이도재 장로(반석대교구) -

말씀과 함께하는 이웃 사랑은 참 행복하다

40년간 가정형편 어려운 학생들 장학금 전해
70세 기념해 2년간 성경필사 주님 사랑 커져

 70세가 되었다. 2014년도였다. 나이를 생각할 때는 ‘이만큼 살아왔다’는 삶의 길이와 함께 ‘그 나이에 맞게 사는지’도 돌아보게 된다. 나의 이익 때문에 다른 이들에게 못할 짓을 하지는 않았는지, 남의 눈에 눈물을 나게 한 일은 없는지를 뒤돌아봤다. 그래서 70세는 인생의 터닝 포인트라 생각했고, ‘더 나이듦’이란 인생의 덤이자 천국을 준비하는 기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결심한 것 중 하나가 성경필사다. 막상 구약부터 쓰자니 엄두가 안나 신약부터 성경을 쓰면서 읽어 내려갔다.

 의미 있는 시작이었다. 하지만 필사를 하다 보니 어깨나 팔 근육에 무리가 생겼고, 하도 힘을 주면서 썼는지 오른손 엄지손가락 쪽에 뼈가 튀어 올라왔다. 2014년 6월 2일, 신약 필사를 마치고 하나님께 이렇게 편지를 썼다. “감사합니다. 침침한 시력이나마 주셔서 신약 필사를 마치게 하셨으니 재삼 감사합니다. 그런데 구약을 써야 할 텐데 엄두가 안나 망설여집니다. 기도해보고 하겠습니다” 

 20일을 기도하고 망설이다가 구약성경 필사를 시작했다. 다시 쓰는 성경은 이전과 느낌이 달랐다. 이전에는 성경필사 완성품에 주력했다면 이번은 말씀을 알아가고 이해하고 마음에 새기는 데에 초점이 맞춰졌다. 천천히 말씀을 써 내려가니 하나님이 내 옆에서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더욱 깨달을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내 힘으로 산 것이 아니라 다 하나님이 하신 것, 하나님이 인도하신 것이라는 것을.

 나는 금속산업분야에서 47년 외길을 걸으며 30년이 넘게 중소기업을 이끌었다. 지금은 회장직으로 일선에서는 물러섰지만 10년 전 한국을 빛낸 기업인 대상을 받은 것을 기억하면 가슴이 벅차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 지난 40년간 가정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돕기 위해  15∼20명을 매달 후원하고 있다. 번만큼 나누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교회에서는 사회사업선교회장, 세계실명예방단장, 공간협의회장 등을 맡으며 봉사했다. 성공해서 몇 백억 원씩 사회사업을 위해 내놓는 이들에 비하면 나의 봉사와 헌신은 부끄럽기 짝이 없다. 그러나 나의 그릇이 이 정도라고 생각하면서 무리하지 말고 꾸준하게 후원하자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어려운 학생들에게는 돈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학생들을 만나면 용기를 주는 말들을 한다. 삶의 의욕을 북돋아주고 싶어서 고난 중에서 성공한 이들의 얘기를 들려주면 아이들이 힘을 얻는다. 그러한 힘을 나는 성경말씀을 쓰면서 얻을 수 있었다. 2015년 12월 31일 성경필사를 마쳤다. 2년을 넘기지 않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른다. 

 70세를 기념으로 시작한 성경 필사본이 2년 만에 한권의 책으로 엮어졌다. 성경필사를 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고, 말씀을 더욱 지키려고 애쓰게 됐다.
 영광대학에서 전시를 하자고 요청을 해, 다른 이들이 보고 말씀을 향한 마음이 더 커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전시에 응했다.

 ‘하루가 즐거우려면 이발을 하고 한 달이 즐거우려면 차를 사고 일 년이 즐거우려면 새집을 사라’는 말이 있다. 나는 전도할 때 이 영국속담에다 “평생 즐거우려면 이웃을 도우십시오”라는 말을 덧붙인다. 여기에다 “말씀으로 주님이 함께하시면 이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증언한다. 


김덕용 장로(구로대교구) -

4미터 아래로 떨어졌지만 기적으로 살아나

사고 정황 기억 못할 정도로 의식 불명
야훼 라파의 손길로 수술 없이 치유 받아

 스텐을 수집해 제련소로 보내는 사업을 운영하는 나는 지난 6월 10일 오후 4시 반경 공장에서 고장 난 호이스트(물건을 집어 올리는 기계)를 직접 고치기 위해 사다리를 타고 4미터 높이로 올라갔다. 그런데 기계를 거의 다 고칠 무렵 사다리가 미끄러지면서 순식간에 4미터 아래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사고가 일어난 장소는 사무실 CCTV에도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였기에 아무도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

 공장에 자가용은 있는데 주인이 없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한 아내 노경희 권사와 직원이 급기야 나를 찾기 시작했고 머리와 코에서 피를 흘리며 한쪽 구석에서 걸어나오는 나를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내가 서둘러 119에 전화를 걸어 응급상황을 알렸다. 바로 구급차에 실려 인근 대학병원 응급실로 옮겨졌고 응급치료와 CT, MRI, 엑스레이 등 촬영이 진행됐다. 순식간에 각종 바늘과 의료 기계들이 내 머리를 거미줄처럼 에워쌌다. 깨진 머리 안팎으로 피가 멈추지 않고 계속 흐르고 있어 수술이 시급했다. 의사는 상황이 불안하다며 아내에게 사고 사실을 가족에게 알리라고 했고 연락받은 형과 형수가 병원으로 달려왔다.

 생사의 기로에서 의료진은 당황하다가 우선 머리에 고인 피를 제거하고 계속 상황을 지켜봤다. 수술이 진행된다 하더라도 살 가망이 없고, 살아난다 해도 몸이 제 기능을 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의사는 말했다. 바라는 건 ‘기적’뿐이라고 했다. 아내는 피가 멈추고 수술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서둘러 담당 교구 목사님께 연락했다. 또 지인들에게 문자로 위급상황을 알리며 기도를 요청했다.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하는 기도 밖에 없었다.

 응급상황이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밤 11시 CT촬영 결과 머리 안에서 흐르던 피가 멈췄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다행히 수술은 면했다. 의식이 돌아온 건 아니지만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잠시 눈을 떴다가 다시 의식을 잃었다.

 의식을 찾은 건 사고가 난 지 이틀이 되어가는 무렵이었다. 기억이라곤 호이스트를 고치다 사다리에서 떨어진 것이 전부였다. 피를 흘리며 걸어 나온 기억이 전혀 없었다. 머리와 얼굴을 제외하곤 다친 곳이 없어 아내는 내가 의식을 잃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했다. 병실에서 눈을 뜬 나는 왜 내가 병실에 누워있는지 또 내 앞에 형과 형수가 와 있는지 전혀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병원에서는 사고 현장에서 조금만 지체됐다면 머리에서 피가 멈추지 않았더라면 이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했다.

 갑작스런 응급 상황에서 하나님의 치료의 손길을 생각하고 기도를 요청한 아내가 대단했다. 아내는 모든 응급 치료가 너무나도 신속하게 진행됐다며 마치 하나님의 손이 일사천리로 움직여 고쳐주시는 듯 했다고 말했다. 하나님은 정말 예비의 하나님이셨다. 사실 나는 사고가 나기 전까지 아스피린을 복용했다. 먹던 약이 떨어져 사다 놓는다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는데 만일 사고 당일까지 아스피린을 복용했더라면 머리의 피가 멎지 않아 위험한 상황이 초래됐을지도 모른다.

 주변에서는 사망의 골짜기를 넘을 수 있었던 것이 1993년 영산세계선교회 회원을 시작으로 북미캐나다선교회장까지 오랜 세월 오직 주를 위해, 세계선교를 위해 헌신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선물인 것 같다고 했다. 나를 살려주신 하나님께 진정 감사했다. 회복도 빨라 병원에서는 더 이상 치료할 것이 없다며 퇴원을 명했다. 이어 2달간 통원 치료하며 약을 복용한 후 지금은 사고 전보다 더 건강하게 신앙생활하고 있다. 나에게 기적을 베풀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중보해주신 장로님들과 교구 성도들에게 지면을 통해 감사를 전한다.


이명구 권사(마포1대교구) -

치유의 기적을 베푸시는 주님께 감사

내 삶에 축복을 주시니 소망이 넘치고
주님이 나와 함께하시니 두려움이 없어


 나는 중학교 때 미션스쿨에 입학하면서 처음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항상 하나님을 더 많이 알고 소통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다 이웃집에 일주일에 한 번씩 심방을 오는 순복음의 빨간 가방을 보고 그 모습이 너무도 좋아 보여 순복음교회를 다니게 됐다.

 나는 손과 발이 차갑고 혈압이 낮아 몸이 약한 편이었다. 어렵게 두 딸을 낳았지만 여전히 남편은 아들을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천막뿐이었던 오산리최자실금식기도원에서 열심히 기도를 드리다 성령을 받았고 그 뒤 바라던 아들을 갖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25년만에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셨듯 나에게도 그러한 축복을 주셨고 이전에 약했던 몸도 건강해졌다. 이것이 내가 첫 번째 겪은 기적이었다.

 두 번째로 기적은 첫째 딸이 일곱 살 때 그네를 타다가 넘어져 코뼈가 부러진 일이다. 당시 남편은 해외 출장 중이었고,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해 벌어진 일이라는 자책감이 너무 심하게 들었다. 병원에서는 코뼈가 물렁뼈라 잘 붙지도 않을뿐더러 16세까지는 성장기이기 때문에 수술로 붙이면 코가 자라지 않게 된다고 했다.

 딸의 코 옆이 푹 눌린 모습에 너무나도 마음이 아파 뼈를 맞추는 병원을 소개받아 검사를 기다리는데 그 순간 마음에 굉장한 불안감과 떨림이 있었다.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으나 집에 와서 나는 하나님이 들어주실 것을 믿고 의지하는 심정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간절히 기도한 후 재검진을 받으러 대학 병원에 가보니 코가 아물어 있었다. 그때의 기적에 대한 감사함과 기쁨은 정말 아직까지도 잊을 수가 없다. 

 2009년 남편의 신장에 이상이 생겼다. 남편은 주기적으로 주 3회 병원 방문을 해야만 했고 그 과정에서 남편은 지쳐갔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내 마음은 너무나도 아팠다. 앰뷸런스만 봐도 내 남편이 실려가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도 있었다. 내 신장을 기증해 주고 싶었지만 남편과 혈액형이 달라 할 수가 없었다.

 2014년 남편이 5년째 투석할 당시, 나는 우연한 기회로 해외 의료봉사를 가게 됐다. 미얀마로 해외봉사를 갔을 때 거기서 신장 전문의를 만나 의료기술의 발달로 혈액형이 달라도 신장 기증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할렐루야!
 수술 후 2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나와 남편은 건강한 몸으로 잘 지내고 있다. 기도로 아이를 갖게 된 일과 첫째 딸의 기적을 통해 하나님을 더 굳게 믿게 된 것과 교회를 다니며 해외 봉사를 가고, 거기에서 신장 전문의를 만나기까지 모든 과정으로 인해 내가 하나님의 계획안에 살고 있음을 느끼게 됐다.

 자신밖에는 모르던 남편은 나의 신앙생활 모습과 하나님의 치유 능력을 체험하고 변화됐다. 아침마다 남편을 안아주며 삼중축복의 말씀을 해주었더니 자녀들에게 억압적이고 불같은 모습이 인내하고 참는 성품으로 변화되어 가정이 더 행복해졌다.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아는 삶, 건강한 것만으로도 내 삶이 축복 받은 삶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삶에 평안함이 찾아왔다. 내게 기적을 베풀고 삶에 기쁨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고 기쁨이 되기를 바란다.


박기자 권사(은평대교구) -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께 감사

지난해 생긴 발등의 혹, 커질수록 두려움도 커져
수요예배 때 이영훈 목사 신유기도로 고침 받아

 주일이나 수요일이 되면 교회까지 오려면 버스를 3∼4번 환승을 해야 하니 어려움이 많다. 대성전에 들어와서 앉기까지 너무나 힘들어 지칠 때도 있지만 막상 찬양이 시작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마음에 기쁨이 넘치고 설교를 들을 때마다 은혜를 받고 감사하게 된다.

 지난해 발등에 당기는 증상이 있어 자세히 들여다보니 작은 혹 같은 것이  만져졌다. 하지만 워낙 작고 통증도 크게 느껴지지 않아 며칠 자고 나면 사라지겠지하고 잊고 지냈다. 그런데 몇 달 지나보니 이 혹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손으로 만질 때마다 그 만져지는 것도 분명하게 커져 있었다. 처음에는 ‘별일이야 있겠어’라고 생각했지만 2012년도에 이미 급성심근경색으로 스탠트 시술을 받은 적이 있어 병원에 가는 것이 두려웠고 차츰 겁도 나기 시작했다. 가족들이나 주변에서는 얼른 병원에 가보라고 말했지만 나는 점점 무서워져 병원에 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기로 결심했다. 어떻게 보면 참 무식하다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나의 지난 세월 하나님께서는 기도할 때 나와 우리 가정을 지켜주신다는 분명한 체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올해 10월 내 발등의 혹은 점차 커져 남에게 보일까봐 부끄러웠다. 주변의 성화에 못이겨 병원에 가겠다고 말하고는 수요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갔다. 신유기도 시간마다 그 발등을 붙들고 기도했는데 그 날 이영훈 목사님이 “발등이 아프신 분이 오셨는데 하나님께서 고쳐주셨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게 아닌가. 나는 또한번의 기도응답을 기대하며 기쁨으로 “아멘”하고 소리쳤다. 

 집까지 오랜 시간에 걸려 겨우 집에 도착했지만 하나님께서 교회다니라고 건강주신 거다라고 스스로 격려하며 늘 그랬듯이 저녁에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다가 깜짝 놀랐다. 발등에 혹이 만져지지 않았다. 누워 있던 나는 깜짝 놀라 다시 자세히 들여다보았는데 아무리 살펴보아도 혹이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았다. 내 발의 상태를 알고 있던 가족들도, 이웃들도 혹이 사라진 내 발등을 보고 깜짝 놀랐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이웃 아저씨도 “이건 기적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러니 내가 기도할 수밖에 없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과 주변의 주님을 모르는 이웃을 위해서 기도할 수밖에 없다.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긍정과 절대감사의 믿음으로 기도하며 이웃에게 주님을 증거하겠다. 할렐루야!


정리=정승환 기자

 


김성훈 성도(금천대교구) -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 파더스드림

아내 난소 혹이 태 속 아기에게 악영향 줄까 걱정
하나님께 맡기고 간절히 기도하니 건강한 딸 순산


 나는 모태신앙인이지만 흔히 말하는 선데이 크리스천이었다. 주일에 겨우 예배만 드리는데 급급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하시고 또 뒤이어 어머니도 발바닥이 골절되는 사고를 당하시면서 장기간 간호할 사람이 필요했다. 어쩔 수 없이 내가 병간호를 하게 됐다. 회사를 휴직하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병간호하는데 생각보다 힘들었다. 빨래, 청소, 장보기 등 집안일도 쉽지 않았다.

 6개월간의 병간호가 끝이 났지만 이상하게 회사로 복직하기가 싫었다. 다른 일을 알아본다 등 말도 안되는 핑계들을 대며 복직을 차일피일 미루다보니 자존감도 떨어지고 아내에게 짜증내고 다투는 일이 많아졌다.

 나의 이런 모습을 보다 못한 장모님이 내게 파더스드림을 권유하셨다. 처음에는 아버지학교라는 말에 뻔한 이야기를 들으러 가야하나 화도 났다. 마지못해 참석한 파더스드림이 내 인생에 터닝포인트가 될지 꿈에도 몰랐다.
 한 주 한 주 지나면서 아버지라는 말이 주는 의미와 내가 아버지로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해야 되는지 등 내 정체성을 깨닫는 시간이 됐다. 잃어버렸던 자신감을 되찾고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자존감도 회복했다.

 모든 프로그램을 마치자 내 마음에 알 수 없는 감동이 넘쳐나며 이 받은 은혜를 다른 아버지들과 나누고, 나와 같은 다른 아버지들을 위해 기도하고 싶어졌다. 이를 위해 먼저 내 삶부터 돌려놓을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핑계를 대며 미루었던 직장에 복귀했다. 그리고 아내와 다투던 일도 사라졌다. ‘아내를 이해하고 아끼고 사랑하라’는 선배 아버지들의 조언이 가슴 깊이 새겨지듯 다가왔다. 그래서 사소한 것이라도 아내를 위해 하는 것들이 부담되거나 하기 싫거나 하지 않았다. 자연스레 아내와의 관계도 회복됐다. 또한 파더스드림 수요중보기도회에 매주 참석하고, 시간이 되는대로 파더스드림 스태프로 참여해 다른 아버지들과 받은 은혜를 나누고 있다.

 아내가 임신을 했다. 새 생명을 얻었다는 기쁨도 잠시 아내의 난소에 13㎝의 혹이 있다는 이야기도 함께 들었다.  아내와 나는 불안한 마음을 안고 큰 병원을 찾았다. 병원에서는 혹 때문에 아기가 자랄 공간이 부족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아내와 나는 하나님께 의지하기로 마음먹고 열심히 기도했다. 파더스드림 수요중보기도팀에서도 우리 부부와 아이를 위해 간절히 기도해주었다. 나와 아내는 아이가 태 안에서 건강하게 자라 세상에 나오길 하나님께 간구했다. 그리고 올해 6월 아내는 건강한 딸을 순산했고 걱정했던 혹도 이전과 달리 줄어 기쁨이 배가 됐다. 할렐루야!

 더욱 감사한 것은 난소의 혹 때문에 태아보험이 가입이 안되어 혹여나 아이가 아프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이 있었는데 아이는 보란 듯이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잘 키울 수 있도록 보호해주신 것이라 생각하고 더욱 더 사랑으로 키울 것을 다짐했다.

 나는 순복음강북교회, 여의도순복음분당교회 등에서 열린 파더스드림에서도 이 일을 간증하며 더욱 많은 아버지들이 한 가정의 제사장으로서 그리고 가장으로서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서미옥 성도(대학청년국) -

사법고시 잇단 낙방, 4차원의 영성으로 합격

합격 믿고 기도했지만 두려움 생겨 기도 요청
조용기 목사 안수기도 받고 힘과 용기 얻어  


 내가 대학을 다녔을 때, 부산에 살고 계신 이모가 항암치료를 받기위해 서울에 있는 대학병원에 입원을 하셨다. 가족 대부분이 지방에 있어서 이모가 항암치료를 받을 동안 내가  병원을 들렀었다. 이모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됐고, 2년 후 신장암 말기였던 이모가 하나님의 은혜로 치료받는 것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이모는 언제나 나에게 하나님이 너무나도 나를 사랑하신다고 말해주셨다. 그 말이 나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고 위로가 됐는지 모른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나는 사법고시를 준비했다.

 2011년 사법고시 1차 시험에 합격했다. 그리고 바로 합격할 줄 알았던 2차 시험을 탈락하고 말았다. 한 번에 패스를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래도 다시 시험을 준비했다. 하지만 2차 시험만 4번을 낙방했다. 진짜 물 가운데를 지나고 불 가운데를 지나는 것 같은 힘든 시간이었다. 4번째 불합격소식을 들었을 때가 2014년이었다. 당시 법무부는 그 해부터 마지막 사법시험인 2017년까지 총 500명을 선발한다고 발표를 했다. 이 때문에 1차 시험에 9000명의 응시생들이 몰렸으며, 그중 300명만이 합격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언제나 단 한 명만 뽑아도 하나님이 나를 택하신다면 된다고 믿었기에 두렵지 않다고 생각해 왔었다. 그러나 그때만큼은 두렵고 떨렸고 힘들었다. 예배를 드려도 마음이 잡히지 않아서 이제는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어 기도원에 가서 작정기도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에 한 장로님의 간증이 눈에 들어왔다. 그 기사를 본 후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을 찾아 응답을 받을 때까지는 내려오지 않겠다면서 기도했다. 도착하자마자 드린 예배부터 나는 크게 은혜를 받았고 마음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이었다.

 2015년 사법시험을 다시 치렀다. 1차 시험합격 후, 2차 시험을 봤는데 다시 쓴잔을 마시게 된 것이다. 진짜 머리가 텅
빈 것 같았다. 그러던 중 뜬금없이 생각지도 않던 선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이런저런 대화를 하던 중 여의도순복음교회를 가보고 싶다는 말을 했다. 그랬더니 선배는 자신의 남편이 어릴 때부터 여의도순복음교회 교인이라며, 사법고시 2차 시험을 6번 만에 붙었다는 간증도 해줬다. 힘내라고 격려하는 선배는 조용기 목사님 설교를 꼭 한번 들어보라고 권유하는 것이었다. 갑자기 말씀에 대한 소망이 생겨났다. 그래서 송구영신예배를 여의도에 가서 드린 후, 신년예배부터 4부예배를 참석했다. 그리고 조용기 목사님의 ‘4차원의 영적세계’라는 책도 사서 함께 읽었다.

 예전에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사람에게 배를 만들게 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도면을 보여주고 나무를 주는 것이 아니라, 먼 바다를 보여주고 바다너머에 대한 소망을 보여주면 알아서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든다” 4차원의 영적세계가 나에게 배를 만들게 하는 꿈을 꾸게 했다. 하나님이 나에게 먼저 꿈을 주셨다는 믿음, 그 꿈을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조용기 목사님은 예배 때마다 확신시켜 주셨다.  

 2차 시험을 앞두고 나는 조용기 목사님께 안수기도 요청 편지를 썼다. 일단 합격했다고 믿었지만 두려움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얼마 후 조용기 목사님께서 직접 안수기도를 해주셔서 용기를 많이 얻었다. 하나님의 위로하심과 목사님의 격려가 얼마나 힘이 됐는지 모른다. 그리고 11월 11일 제58회 사법시험 최종합격자 109명 가운데 나의 이름이 오른 것이다. 할렐루야!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이겨낼 수 있도록 인도하신 성령님께 감사드린다. 또 기도해주시고 용기주신 조용기 목사님께도 감사드린다. 나는 이제 4차원 영성으로 큰 꿈을 꾸며 하나님께 존귀하게 쓰임받는 일꾼이 되어 믿음으로 전진할 것이다.

 


김홍희 집사(양천대교구) -

다시 부르시고 사명 주심에 감사

커다란 혹, 수술 없이 기도로 깨끗이 완치 받아
지난해말 3명 전도, 새해 전반기 14명 전도목표

 나는 학창시절까지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그런데 남편인 배찬식 집사(사진 왼쪽)를 만나 결혼하면서 생각하지 못한 문제를 만났다. 나는 당연히 결혼 후에도 우리교회에서 계속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 했지만 타교단인 남편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교회에서 계속 신앙생활을 하길 바랐다. 결국 집에서 가까운 개척교회를 섬기기로 우리 부부는 타협(?)했다. 하지만 개척교회를 섬기면서도 늘 마음은 여의도순복음교회에 있었다. 그래서 아쉬운 마음에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그러다 교회 내에서 마찰이 생겨 14∼15년을 섬기던 교회를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오랫동안 섬기던 교회를 떠난 우리 부부는 여러 해를 이곳저곳 교회와 기도원을 방황하며 영적인 목마름에 지쳐만 갔다.

 그러던 중 지난해 초 배에 혹이 만져졌다. 병원 의사 말이 혹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너무 두렵고 떨려 나는 인터넷으로 여의도순복음교회 주일예배를 드리면서 신유기도 시간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했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하나님 고쳐주시면 여의도순복음교회 등록해서 신앙생활할게요’라고 서원기도했다. 그 후 혹이 터져서 통증 때문에 힘들기는 했지만 혹은 흔적조차 없어지며 완치됐다. 수술이 필요하다던 의사도 이런 증상은 처음 본다며 놀라워 했다. 나는 너무나 감사한 마음에 여의도순복음교회에 가서 남편과 함께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몇 달 동안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교구에 등록하러 가는 것이 선뜻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예배 중에 주님이 나를 계속 교구에 등록하라고 채근하시는 거 같았다. 그래서 좋은 교구장, 좋은 지구역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먼저 기도한 후 교구를 방문했는데 너무 좋은 교구장님, 엄마 같은 지역장님을 만나 기쁨으로 신앙생활을 이어갈 수 있게 됐다. 할렐루야.

 여의도순복음교회로 돌아온 나는 요즘 흔히 말하는 ‘힐링’을 제대로 받았다. 영적전쟁훈련학교를 수료하고 중보기도훈련학교과정까지 순복음의 영성으로 재충전했다. 수요예배에서 이영훈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마음의 상처도 말끔히 치료받고 기도제목도 이루어졌다. 또한 나는 남편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무작정 파더스드림에 남편을 등록시켰다. ‘순복음’이 어색했던 남편은 파더스드림을 통해 크게 깨어지고 은혜를 받았다고 고백했다. 남편은 스태프로 섬기는 봉사자들의 모습을 통해 반성하고 큰 감동을 받았다며 이전에는 나와 의견 충돌이 있으면 자신의 주장을 끝까지 관철했지만 이후로는 의논하고 내 말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주었다. 그리고 주변의 권유를 받아 베들레헴찬양대에서 봉사도 하게 됐다. 자연스레 남편도 순복음의 영성으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절대긍정과 절대감사는 남편의 신앙고백이됐다.

 하나님은 정말 기도하는대로 모두 다 이루어 주셨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도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어떻게 전도해야하나 망설였지만 말씀처럼 입을 넓게 여니 주님께서 주님의 방법으로 채워주셨다. 지난해 3명을 전도해 새신자교육까지 수료할 수 있도록 했다. 얼마 전에 끝난 열두광주리 특별새벽기도회를 남편과 함께 빠지지 않고 참여하면서 전반기 전도목표를 14명으로 세웠다. 하겠다고 마음먹으니 주님이 전도 대상자를 보여주시고 만나게 해주시고 기도하게 해주셨다. 남편도 새신자를 데리고 새벽기도를 가기 위해 새벽 3시 반에 일어나야함에도 불구하고 불평 없이 기쁜 마음으로 나를 도와주고 있다. 주일이면 하루종일 교회에 있어도 행복할 뿐이다. 누가 우리교회를 떠나겠다고 하면 도시락 싸들고 말리러 쫓아다니고 싶을 정도다. 돌이켜보면 주님께서 우리 부부와 가정을 다시 여의도순복음교회로 부르시고 새로운 사명 주심에 감사하다. 이 마음 변하지않도록 남편과 함께 전도에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신앙생활하겠다.
 


 


김종심 집사(종로중구대교구) -

특새서 감사로 기도…성대 물혹 사라져

가볍게 생각한 목 통증, 병원서 수술판정
간절히 기도하니 수술없이 치유받아

 살면 살수록 만만하게 인생을 살거나, 아무 문제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누구든지 자신의 아픔을 끌어안고 살아가고 있기에 우리는 예수님이 필요하다. 이번 ‘추수감사절 특별새벽기도회’(이하 특새)를 통해 내가 만난 치료자 되신 예수님을 모두가 만나게 되기를 소망한다.  

 특새가 열리기 3주전, 오산리 기도원에서 종로중구대교구 성령대망회가 있었다. 나는 성령대망회에서 찬양대 봉사를 했다. 성령대망회가 끝난 후 이상한 증상들이 나타났다. 목이 좀 아프더니 목소리가 안 나올 정도로 쉰소리가 나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괜찮을 것 같아서 난 가볍게 생각했다. 특새 2주전, 약수동에서 꽤 유명한 이비인후과를 찾아 내시경 검사를 했더니 성대에 큰 물혹이 보였다. 의사는 큰 병원으로 가야한다면서 이제부터는 목을 쓰지 말고, 찬양도 부르지 말고, 기도하러 새벽예배도 가지 말라고 권고했다 나는 1985년부터 신앙생활을 해왔다. 처음부터는 아니지만 신앙이 자라면서 모든 예배에 참석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지금은 기도처 예배도 먼저 가서 기도처 문을 먼저 연다. 주님을 먼저 만나는 것이 늘 설레기 때문이다. 그런데 특새를 앞두고 성전에 들어가기도 전에 기도도 제대로 못한다니 속이 상했다. 그래서 다른 병원을 찾았지만 진단은 같았다. 약물로 치료하기에는 혹이 크다면서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고, 수술 후 한 달 넘게 말을 하면 안된다고 했다. 결국 대학병원으로 가서 수술 날짜를 29일로 잡았다. 왜냐면 7일부터 2주 동안은 특새가 있었고, 19일에 특새가 끝나면 20일은 특수감사주일, 22일은 기도원 성령대망회, 25일은 장애인대교구 김장을 돕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2주 동안 드리는 특새에서 하나님께 치유 받기를 꿈꿨다. 성대의 혹이 없어졌다고 마음에 그림을 그리며 아침 금식하면서 간절히 기도했다. 이영훈 목사님은 무조건 감사하고 절대 긍정 절대 감사하라고 설교하셨다. 나는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라는 말씀을 붙들고 이미 치료하신 주님께 감사그린다고 선포했다. 또 우리 교구 지역장님과 권사님들도 나를 위해서 함께 중보기도를 해주셨다.

 나의 남편은 선데이 크리스천이다. 하지만 이번 특새는 함께했다. 그리고 추수감사주일 함께 예배를 드리는데, 나를 고쳐달라고 기도를 하면서 순간 마음에 감동이 왔다고 한다. 그래서 준비한 감사헌금 외에 주머니에 있는 모든 것을 전부 하나님께 드렸다고 했다. 예배 후 교구사무실에 왔는데 교구장 목사님 외에도 다른 교구장님도 기도를 해주셨다. 혹이 사라지고 치료가 간증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해주셨다. 기도를 받으면서 아멘을 외쳤다. 그러자 감사가 넘쳐났다. 17일 수능시험이 있던 날, 수험생을 위한 기도회가 있었다. 기도를 해주기 위해 교회에 있는데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수술 전 검사를 다 해놓은 상태였는데, 가슴과 초음파 사진이 너무 시커멓다면서 다시 찍자고 했다. 그래서 22일 기도원 성령대망회에서 찬양대 봉사까지 다 마친 후 병원에 가서 재촬영을 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손톱만큼 컸던 물혹이 온데간데없고 점만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검사를 담당한 의사는 보고 또 보더니 매우 놀라고 신기해 했다. 나는 우리 하나님이 치료해 주셨다고 말하고 또 말했다. 이젠 수술을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가족은 수술 없이 치유된 것을 축하하는 감사식사를 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남편은 치료해주셔서 감사하다며 식사 전 대표기도를 했다. 식사를 하면서 공무원 아들이 수술비로 쓰라면서 만들어서 준 복지카드를 다시 돌려주는데 가슴이 뭉클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이번 나의 간증으로 우리 가족의 신앙이 한층 자라난 거 같다. 또 교구 식구들과 함께 사랑의 꽃을 피울 수 있어 감사하며 주님께 영광 돌린다. 


김인섭 성도(영등포대교구) -

“믿음의 기도, 아들의 탈장 고침 받아”

특별새벽기도 동안 이영훈 목사 전화 기도로 치유함 돼
100퍼센트 믿음 중요···인술 베푸는 의사로 살고 싶어

 추수감사 특별새벽기도 기간 동안 이영훈 목사님의 전화기도를 통해 수술없이 탈장된 아들이 고침받게 된 것이 감사해 우리가 받은 많은 은혜들을 간증하고자 한다.  

 아내(문소원)가 아들 준수를 임신할 당시 혈소판감소증으로 인해 정상인에 비해 혈소판 수치가 10분의 1도 안되게 떨어져 있어서 아기를 낳을 수 있을지도 불투명한 상태였다. 아기도 엄마도 위험할 수 있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 우리 부부는 10개월 내내 눈물로 기도했다.

 이영훈 목사님께 찾아가 안수도 받고 아기 이름도 부탁드렸다. 그런데 기도를 들으신 주님께서 결정적인 순간에 은혜를 주셨다. 혈소판 수치가 최소한 10만은 넘어야 아기를 낳을 수 있다고 했는데 아기를 낳기 위해 출산하던 첫날 수혈을 받고 처음으로 혈소판 수치가 10만이 되었다. 10만이 되던 순간 빠른 수술로 아기를 낳을 수 있었다. 믿겨지지 않는 현실 앞에서 우리 부부는 그저 ‘주여 감사합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 아기 준수가 지금 18개월째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 그런데 얼마전 아기가 자꾸 배를 만지며 울길래 기저귀를 열어봤더니 배가 툭 튀어나와 있었다. 병원에 가니 탈장이라고 했다. 그런데 6년차 의사가 와서 아무리 올려도 탈장된 장이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마침 소아과 교수가 오고 다른 의사 네 명이 더 와서 겨우 응급수술 없이 장을 제자리에 돌려놓을 수 있었다. 그런데 얼마후 장이 또 탈장됐다. 서혜부 탈장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병원에서 이번에는 수술을 해야한다며 당장 입원하라고 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작은 아기를 수술대에 맡기고 싶지 않아서 이영훈 목사님께 전화를 걸어 기도를 부탁드려 보기로 했다. 그런데 목사님이 지방 출장중이셨다. 순간 당혹스럽고 고민이 됐지만 전화로 기도받아도 믿음만 있으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전화 기도를 부탁드렸더니 간절히 기도해 주셨다.

 우리 부부는 전화 기도를 받으면서 마음이 평안해졌고 아기는 잘 놀고 있었다. 병원에서는 당장 수술을 해야 한다며 재촉했지만 우리는 수술을 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으로 매달려 보기로 했다. 찬바람이 쌩쌩부는 새벽에 아기를 안고 특별새벽기도에 데리고 다녔다. 유아실에서 간절히 기도하고 철야기도회도 데리고 다니면서 완치를 소원했다. 우리가 기도하는 동안 아기는 몇 번 더 탈장을 반복해 응급실을 오가기도 했지만 우리 부부는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기도하자고 다짐하며 탈장될 때마다 아기의 배에 손을 얹고 “믿는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병든자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는 말씀을 계속적으로 선포했다. 그럴때마다 장이 제자리를 찾았고 울던 아기가 잘 놀았다.

 나는 의학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앞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다시한번 깨닫는 계기가 됐다. 하나님께서 내게 특수 진료과목을 허락하셔서 턱관절 치료를 통해 허리디스크, 틱장애, 강직성척추염, 허리협착 등 환자의 아픈곳을 고치는 터커리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는데 나는 이번 일을 계기로 일반 병원에서 포기한 환자들이나 힘겨운 사람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인술을 베푸는 따뜻한 의사가 되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아내와 함께 수년째 하고 있는 찬양대 봉사와 의료센터 봉사도 더 큰 사명감을 가지고 할 생각이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려 드린다.


박귀순 권사님(금천대교구) -

예수님만 믿으면 삶에 아무 걱정없어요

교회 온 첫 날 기도 통해 남편 불면증 사라져
대장암 투병도 기쁨과 감사로 ‘완치’ 승리


 교회에 간 첫날 기도도 잘 할 줄 모르면서 기도를 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몰라요. 하지만 하나님! 제 남편에게 불면증이 있어요. 하나님이 계신다면 제 남편을 자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그 순간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꺼내 헌금을 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응답해 주셨다.

 1970년대 중반 결혼 후 첫 아이인 딸을 낳고 시댁식구들과 주변 분들로부터 전도를 많이 받았다. 내게 누가 전도를 해오면 “나는 조금 있다 나가겠다. 나가면 불같이 믿겠다”라고 말만하고 교회에 가지 않았다. 당시 남편 조병두 집사의 불면증이 아주 심했는데 그 때 여의도순복음교회 지역장님의 전도로 처음으로 우리 교회에 오게 됐다. 남편의 불면증이 고침을 받은 후 나는 어린 딸을 데리고 주일 예배는 물론 구역예배, 수요예배, 금요철야예배를 열심히 다녔다. 늘 말했던 대로 뜨겁게 믿겠노라 했던 것처럼 예배드리고 전도에 힘썼다.

 전도의 열정이 뜨거워 친정어머니께도 전도하고 싶었지만 너무 무서워서 친정어머니께는 전도의 ‘전’자도 꺼내지 못했다. 법당에서 살다시피 하시는 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하면서 내가 교회에 다닌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어머니와 함께 교회에 가고 싶어 계속 기도만 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어느 날 어머니 스스로 교회에 가고 싶다고 말씀을 하셨고 그렇게 어머니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을 얻으셨다.

 둘째인 아들이 태어나고 나서도 나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아이들이 초등학생일 때부터 전도지를 나눠가지고 함께 동네 전도를 다녔다. 전도를 하면서 남의 집 아이들을 돌보고 동네 사람들의 일손이 부족한 곳에 달려갔다. 언제나 아이들은 바쁜 엄마를 생각해주며 자기들 스스로 할 일을 찾아 해냈다. 각자 교회에서 찬양대 등 봉사를 하며 신앙 안에서 바르게 성장했다. 신앙적으로 바로 선 아이들은 고등학교 3학년 때도 여유가 있었다. 찬양대 연습을 하고 성경공부도 열심히 하면서도 학교 공부에 소홀하지 않았다. 기특하게 커가는 아이들을 보며 내가 낳았으니 내 자식,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한테 맡겨 주신 보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셨다. 저절로 아이들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아이들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주어야겠다고 전전긍긍하기 보다는 기도를 많이 했다. 용돈 한번 제대로 주기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딸과 아들은 대학생이 되자 장학금을 받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해외 단기 선교도 하고 의미 있게 대학생활을 보냈다.

 장성한 자녀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연구소에서 근무하던 딸은 그곳에서 좋은 신랑을 만나 세 아이의 엄마가 됐고 아들은 꿈을 이루기 위해 미국에서 공부하며 일도 병행하는 중이다. 특히 아들은 결혼한 상태에서 서른이 훌쩍 넘은 나이에 쉽지 않은 도전이었을텐데 신앙이 좋은 아내를 만나 석사 과정을 마치고 지금은 박사 과정 중에 있다.

 아들이 유학을 결정하고 떠나기 전 갑자기 건강검진 중 내게 대장암이 생겼다는 것이 밝혀졌다. 2기에서 3기로 넘어가는 상황이었는데 근심하는 가족과 주변 사람과 달리 내 마음은 터질 것 같은 기쁨이 가득했다. 수술을 하러 들어갈 때도 내입에서는 찬송소리만 흘러나왔다. 감당할 수 없는 기쁨 속에 하나님이 데려가시면 천국에 가면되고 살면 전도를 열심히 해야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항암 치료를 하며 몸무게가 10㎏이나 줄기도 했지만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지난해 이영훈 목사님께 안수기도를 받았고 드디어 올해 수술한지 5년이 지나 5월에 완치 판정을 받았다.
 나의 남은 소원은 전도를 많이 해서 많은 분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이다. 나와 항상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려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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