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니엘(선교사역국 영어예배부) -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제 삶의 목표입니다

선교사 자녀도 하나님이 선택하고 부르신 것
최선 다해 공부한 후 하나님께 맡기면 책임져 주셔

 18년전 선교사인 부모님은 2살인 나와 생후 8개월 동생을 데리고 라오스로 파송 받으셨다. 아버지는 교회를 개척했고, A초등학교를 세웠다. A초등학교에서는 입학한 아이들에게 학용품 일체를 지원하며 성경을 가르쳤고, 틈틈이 기도도 하고 찬양을 하며 하나님을 높였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때였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상의한 끝에 우리 형제를 인근 국가인 태국 치앙마이로 전학을 시켰다. 교육비 때문이었다. 치앙마이 학교는 선교사의 자녀들에게는 학비를 지원해 주는 기독교학교였기 때문에 부담이 덜 됐던 것같다. 처음에 교장선생님은 학교 정원이 다 차서 우리를 받을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를 본 후 마음이 바뀌셨는지 인터뷰를 한 후 곧바로 받아주었다. 어머니는 우리 형제를 돌보면서 치앙마이에서 태국어를 공부하면서 현지인을 전도 했고, 나도 공부를 하면서 외국인들을 상대로 전도 했다. 하나님이 부모님만 선교사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자녀도 하나님이 선택하신 것이라고 배웠기 때문에 우리에게 나이와 환경은 문제가 될 수 없었다.

 얼마 후 우리 가족은 치앙마이에서의 생활도 결국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었다는 것을 깨닫을 수 있었다.

 공산국가인 라오스 정부가 아버지의 선교활동을 알게 되어 아버지를 추방하려고 경찰이 들이닥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다행히 사전에 알게된 아버지는 경찰을 피할 수 있어 치앙마이까지 오실 수 있었다. 아버지는 가족 모두가 함께 있었더라면 도망다니기 어려웠겠지만, 혼자였기 때문에 피신을 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잠시나마 치앙마이에서 행복하게 함께 있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일정 시간이 지나 아버지는 다시 라오스로 가셔서 사역을 시작하셨다. 나는 9학년이 되어 라오스로 돌아가 홈스쿨링으로 공부하면서 A초등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선교지에 있기 때문에 우리 가족은 간증이 많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많이 느낀다. 내가 시내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잠깐 멈추면 과속하던 차가 바로 앞에서 지나갔고, 오른쪽으로 가고 싶어서 오른쪽으로 피하면 조금 전에 내가 있던 그곳에서 큰 사고가 났다. 주님은 어디에서나 나와 가족을 보호해 주셨다. 아버지도 라오스 B지역을 가는 길에 차가 멈춘 적이 있었다. 라오스는 한국과는 달리 길이 황톳길이고 아열대지역이다. 날이 밝아야 움직일수 있기 때문에 아버지는 그냥 차에서 잠을 청했다. 그런데 한밤중에 갑자기 어떤 남자가 차문을 두드리더니 창문으로 치킨 한 박스와 물 한 병을 주고 사라졌다는 것이다. 덕분에 아버지는 허기를 채웠고 잘 주무신 후 아침에 다시 선교 길을 이어갔다고 했다. 우리 가족은 그분이 천사라고 믿고 있다. 

 나는 고등학교를 라오스에서 졸업하고 미국 보스턴에 있는 고든대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해 바이오학을 전공하고 있다. 꿈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나에게 어떻게 공부를 하냐고 묻는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할 수 있는 대로 최선을 다해 공부한다고. 그리고 하나님께 맡긴다고. 기도하고 맡기면 그 다음은 주님이 해 주시는 것을 체험하고 있다. 아무리 힘들어도 하나님은 모든 것을 경영하시는 것을 나는 체험하고 배우고 있다.

 나의 꿈은 바이러스를 연구해서 사람들을 돕는 것이다. 선교사는 선교지에서 원주민을 섬기면서, 동시에 본국과 본 교회에서 섬김을 받고 있다. 그래서 나는 받은 섬김을 다시 섬김으로 나누고 싶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 쓰임 받는 삶이 나의 꿈이고 또 나의 인생의 목표이다.

 


손영선 집사(교회학교) -

유방암 치유에 ‘글로벌 브랜드 대상 수상’ 감사 두 배

 

20년 간 고등부 교사 헌신하며 문화콘텐츠 개발 힘써
야훼 라파 은혜 체험 후 아이들 꿈에 날개 달아줘
 

 나는 지난달 31일 ‘제3회 2016 글로벌 브랜드 대상’시상식에서 문화예술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주)키네마인 대표인 내가 제작한 연극 ‘우리가 처음 사랑했던 소년(우사소)’이 언론인들이 추천한 좋은 작품으로 선정된 것이 이유였다. 대한민국 브랜드 품질에 대한 신뢰를 높인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업체 및 단체’를 대상으로 심사를 거쳐 대표 브랜드로 선정하는 상이라 의미가 크다. 더욱이 이 상은 유방암이라는 고난을 이겨내고 탄생된 작품이라 이번 수상이 내겐 더 없이 값진 감사의 열매다.

 나는 1996년부터 교회학교 고등2부 교사로 지금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20년간 봉사해왔다. 유독 청소년 문화에 관심이 많은 나는 문화 콘텐츠를 만드는 회사를 세워 사명으로 여기며 교회학교 봉사를 병행했다. 청소년들에게 바른 역사를 가르치기 위해 ‘반크 역사 바로 찾기’ 시리즈를 출간하는가 하면 북한 인권 문제를 다룬 영화를 제작해 문화부장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땅에 청소년을 위한 올바른 문화가 세워지길 기도하며 고군분투하던 중 2013년 몸에 이상 증세를 느끼기 시작했다. 유방암 말기, 그것도 림프를 통해 뼈와 몸 곳곳으로 암세포가 전이된 상황이었다. 의사는 “당장 수술을 받아야 하고, 가장 센 항암 치료가 들어갈 것이며, 이로 인해 머리카락이 다 빠지는 등 고통이 심할 것이다.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말했다.

 일주일 뒤로 수술 날짜를 정했지만 잠도 오지 않고 마음이 편치 않아 고등부 교사들이 나누는 SNS 밴드에 그동안 이야기를 올리고 ‘다음 주에 수술이니 기도해 달라’고 중보기도를 요청했다. 그런데 제약회사 관련 일을 하시는 한 선생님께서 오랜만에 밴드에 들어오셨다가 내 소식을 접하시고는 다음날 아침 급히 전화를 주셨다. 유방암 명의가 있는데 만나보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선생님의 도움으로 만난 그 의사 분은 유전자 조직 검사를 통해 최적의 치료법을 찾아보자고 했고 그렇게 한 달이라는 시간이 또 훌쩍 지나갔다. 주변에서는 왜 하루 빨리 수술을 받지 않냐고 난리였지만 내 마음은 사람의 말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처음 암 진단 후 이영훈 목사님께 바로 안수기도 받고 남편과 함께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을 찾았다. 금식기도를 작정하고 기도하는 첫 날, 하나님은 내게 ‘두려워 말라. 이 고난에는 이유가 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다’라는 응답을 주셨다. 그러니 모든 것을 주께 맡긴 내가 환경과 사람으로 인한 두려움에 떨 일이 하나도 없었다.

 병원에서 드디어 연락이 왔다. 암세포 제거 수술 후 표적 치료를 할 수 있는데 미국에서 3차 임상실험까지 성공한 시약을 복용할 의향이 있냐는 것이었다. 전 세계에서 300명이 참여 중인 임상실험은 조건이 맞아야 하는데 내가 딱 들어맞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편한 마음으로 임상실험 참여를 택했다. 그리고 2014년 1월부터 병원에서 주는 약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주기적으로 상태를 체크하는데 약을 먹은 지 4개월 만에 암세포가 반이 사라졌다. 그러더니 8개월 만에 암세포가 거의 사라졌다. 기적이었다. 빠른 기간에 온 몸으로 전이된 암이 없어졌고 변형된 가슴의 피부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이는 ‘고쳐주겠다,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했을 때 하나님이 당신의 방법으로 믿음의 손길을 통해 나에게 치료의 은혜를 부어주신 것이다. 그럼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겠다는 말씀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가르치던 고2 제자 중 방황하던 아이가 나를 위해 눈물로 금식기도 하더니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가 됐고 함께 일하는 감독 역시 믿음이 전보다 굳건해졌다.

 몸이 회복된 뒤 탄생된 연극이 바로 ‘우사소’였다. 나는 이 연극을 고등부 창의체험반 아이들을 세워 고등부 동계수련회 때 처음 무대에 올렸다. 창의체험반을 통해 자신의 꿈을 찾은 아이들은 지금 대학에서 연기 등을 공부하고 있다. 이를 시작으로 작품이 정식 무대에 올려지고 상까지 받았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나는 이번 일로 ‘순복음의 절대희망 절대감사’의 중요성을 다시 깨달았다. 그동안 하나님께  크고 작은 응답을 받았지만 이번 일은 내 인생에서 하나님이 주신 소명의 소중함과 헌신을 배우는 계기가 됐다.  


전봉자 권사(동작대교구) -

기도와 말씀 읽기에 힘쓰니 주님이 책임져 주셔

남편 소천 후 막막하기만 했던 인생길에서
주님만이 나의 든든한 동반자이자 후원자

 2008년 8월 어느 주일이었다. 먼저 교회를 간 남편으로부터 “갑자기 배가 너무 아프다”라며 전화가 왔다. 남편은 구급차를 불러 급히 병원으로 후송해 수술을 받았다. 나는 깜짝 놀라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에서는 대동맥이 터져 어려운 상황이라고 했다. 수술 후 남편은 중환자실에 옮겨져 정신을 차려 회복되는 듯했지만 며칠이 지나지 않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갑자기 일어난 일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남편 없는 삶은 두렵기도 하고 살아가는 것이 무섭기도 했다. 그렇다고 마냥 걱정만 하고 살 수는 없었다. 내가 의지할 곳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었다. 

 2003년쯤이었다. 타교회 목사님이 한 성회에서 수험생시절 공부를 하면서도 성경을 30장씩 읽었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 말에 도전을 받아 나도 성경을 읽기로 작정했다.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해 이동하는 중에도 성경을 읽고, 집에서도 읽고, 교회에서도 읽고 노력하다보니 한 달이면 성경을 일독할 수 있었다. 성경을 읽으니 기도도 더욱 열심히 하게 됐다. 내 경험을 비추어 볼 때 하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하나님이 힘을 주시는 것 같다.

 남편 없이 살아가려다 보니 당장 먹고 사는 일이 급해졌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일을 하면 더 이상 지금처럼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래서 기도 중에 하나님께 선포했다. “하나님 지금처럼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제가 일을 못하겠으니 하나님이 우리 가족의 삶을 책임져주세요”

 당시 아들이 이제 막 군대에서 제대한지 얼마 안됐을 때이기도 하고 환경을 바라볼 때는 불가능한 상황이었지만 믿음으로 선포하고 더 열심히 성경을 읽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때마다 하나님은 동생들을 통해 필요를 채워주셨다. 물론 사정을 아는 동생들이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10년 동안 큰 어려움 없이 지낼 수 있었다. 누가 내게 직업이 있냐고 물으면 “전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예배하는 것이 제 천직”이라고 고백했고 동생들도 “우리를 위해 더욱 기도해달라”며 나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주었다.

 하나님은 필요를 채워주시는 것뿐만이 아니라 넉넉하게 주신다. 아들이 결혼해 살던 집이 구조상 곰팡이가 피고 하수도가 수시로 막히는 등 환경적으로 태어난  손녀가 자라기에 좋지 못해 걱정이 컸다. 하지만 이사를 하고 싶어도 당장 먹고 살기에도 급급한 상황에서 이사를 한다는 것은 꿈에 불과했다. 그런 사실을 안 동생은 이사 비용을 보태주겠다며 아이를 위해 이사할 것을 당부했다. 그래서 이사갈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지만 집값이 너무 올라 형편에 맞는 집을 구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하나님께 좋은 집을 보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지만 당장 그런 집을 찾을 수가 없었다. 무려 6개월 동안 집을 보고 다닌 끝에 겨우 한 곳을 발견했다. 이제는 돈이 걱정이었다. 그런데 이사비용을 보태주겠다는 동생이 이전에 약속했던 것보다 배가 되는 비용을 지원해주겠다는 것이 아닌가. 6개월 전 당시에는 그 금액이 전부였지만 6개월 동안 지원할 수 있는 여력이 더 생겼다는 것이었다. 인내의 6개월이 더 좋은 결과를 가져다 준 것이다.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를 만나 주시고 하나님께 100% 맡기고 의지하면 필요를 채워주실 뿐만 아니라 아주 풍족하게, 넉넉하게 채워주시는 이심을 고백한다. 나는 얼마 전 성경 133독했다. 바라기는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성경을 읽고 기도해 내가 체험한 넉넉하게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길 소망한다.


정리=정승환 기자

 


               

박진희 집사(강서대교구) -

죽음도 막지 못한 자유, 탈북은 하나님 주신 기적

두 차례 한국행 시도 실패로 공안에 잡혀 북한 압송
복음 통해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 깨달아

 나는 북한에서 예술전문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국가가수로 소련 중국 등 해외공연에 참가했다. 또 김일성 김정일을 위한 국가 행사와 공연에도 다수 참가했다. 내가 활동했던 당시는 ‘온 사회를 김일성 주체 사상으로 일색화하자!’는 구호가 거리 곳곳에 걸려있었다. 김정일에 의해 김일성을 우상화하는 충성 맹세 작업이 가장 최고조에 올랐던 때였다. 그때 내 나이는 20대 중반이었다. 공연단으로 활발히 활동했던 나는 군인과 결혼했고 남매를 낳아 단란한 생활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큰 사건에 연루되면서 목숨을 잃게 됐다. 젊은 나이에 살 길이 막막했던 나는 어린 딸만 등에 업고 1998년 하반기 두만강을 건너 중국 땅에 도착했다. 조선족 가정에서 몇 달간 딸과 머물렀지만 우리 모녀가 마음 편히 쉴 곳은 없었다. 다행히 주인집의 살림을 해주며 가정부처럼 살았다.

 그 당시 새해를 맞이하면서 북한 탈북민은 물론 불순한 자들을 잡아들이는 중국 공안의 대검거가 시작됐다. 그때의 살벌했던 공포를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더 이상 머무는 것이 불가능했다. 주인집의 도움으로 남쪽으로, 그리고 더 남쪽으로 내려와 한국인 회사에 화식모(식당에서 일하는 사람)로 취직했다. 딸아이를 키울 수 없어 딸을 동북의 한 도시로 보내 위탁 공부를 시켰다. 그 시기 딸은 위탁 가정의 부인을 따라 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나를 만나러 오는 딸은 주일만 되면 함께 교회에 가자고 졸랐다. 딸을 따라 한국인 교회에 갔는데, 그 날이 새신자를 위한 잔칫날이었다.

 성도들이 나에게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찬양을 불러줄 때 내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는 것과 반드시 살아야 하는 이유를 깨달았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탈북자들이 중국에 많이 몰려들자 중국 공안은 해마다 설을 앞두고 탈북자 색출을 위한 대검거를 실시했다. 나는 오래 전부터 준비했던 한국행을 결심하고 2003년 초 북경에 있는 한국대사관에 진입했지만 실패했다. 다시 상해 한국영사관 진입을 시도했지만 이마저도 실패하면서 딸과 함께 그만 중국 공안에 체포되고 말았다. 2003년은 탈북자들이 그 어느 해보다 한국행 시도를 많이 하고 또 북경에서는 탈북민이 대량으로 잡혀 북송되던 무서운 해였다. 상해 감옥에서 20여 일 갇혀 있는 동안 나는 잘 하지도 못하는 기도를 하며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간구했다. 북송되면 선택의 여지없이 정치인 수용소에 가거나 죽음을 당해야 했다. 엄마로서 딸에게 닥칠 불행이 무서웠다. 필사적으로 하나님께 매달렸다.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드리는 기도는 진실하고 간절했다.

 그러자 도움의 손길이 임했다. 중국 측 인사가 우리에게 대사관 진입 시도로 잡힌 것이 아니라 중국 식당에서 일하다 잡힌 것으로 내용을 바꿔 그 서류를 북한 관계자에게 넘긴 것이었다. 그해 12월 초 우리는 지옥과 같은 북한 감옥에서 꿈같이 풀려났고, 2004년 3월 다시 북한을 탈출해 중국을 거쳐 2005년 3월 나 먼저 제3국으로의 탈출에 성공했다. 그리고 마침내 2006년 5월 자유의 땅 남한에 안기게 됐다.

 죽음도 막지 못한 자유, 남한으로의 도착은 나를 선택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과 기적의 역사였다. 지금 3만 명의 탈북자가 이 땅에 왔지만 이 곳에 오기 위해 너무나도 많은 이들이 중국과 제3국에서 죽어간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이후 딸은 무사히 남한에 올 수 있었고, 한국 외국어대를 졸업하고 현재 미국 영주권자로 그 곳에서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있다. 상상할 수 없는 아픔이 있었지만 이 땅을 밟을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예비하심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였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이끌어주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셨다.

 바라기는 북한에 있는 아들도 머지않아 주님의 자녀로 이 땅에서 함께 살길 기도한다. 하나님을 만나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나는 주님의 딸로서 주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북한 복음화와 통일을 위해 기도하는 삶을 살겠다.


 

  

   

이태영 성도(강동성전) -

‘파더스드림’이 만든 변화와 회복

욕심과 교만으로 얼룩져 있던 죄인에서
아버지로서, 전도자로서 새로운 사명 찾아

 나는 아내의 권유에 못 이겨 1993년 초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멋모르고 시작한 신앙생활이지만 열심히 봉사도 하고 간절히 기도도 하자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물질의 축복을 주셨다. 그런데 사업이 잘 풀리고 돈이 생기자 내 마음에 교만과 욕심이 생겼다. 생전 잘 안마시던 술이 달콤하게 느껴지고 도박과 유흥을 하며 세상 즐거움을 쫒으니 어찌나 즐겁던지. 아내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 기세를 몰아 더 큰 돈을 만져볼 욕심으로 대리점을 접고 전혀 경험이 없는 사업에 투자를 했다. 사업 자금이 부족하자 사채업을 하는 친척이 생각났다.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친척과 어울리다보니 나도 자연스럽게 건달들에게 형님 대우를 받게 됐다. 그러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시 1:6)의 말씀처럼 나는 곧 모든 것을 잃고 경제사범으로 수배자 신세가 됐다. 믿었던 친척의 배신으로 거지신세가 된 나는 너무나 억울해 참을 수가 없었다. 사촌을 죽이겠다고 결심하며 분노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경찰들을 피해 도망 다닌 지 한 달 만에 나는 구치소에 수감됐다. 그 누구도 면회를 오지 않았다. 도리어 아내로부터 이혼소장이 왔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나는 당황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나를 항상 돌보아 주셨다. 당시 나는 구치소에서 소년 수들의 보호자로 뽑혀 매일 예배를 드렸고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성경을 읽었다. 말씀을 읽다보니 용서하는 마음을 갖게 되어 내 돈을 갈취한 사채업자들의 고소도 취하했다. 그러자 하나님은 아내와의 이혼 소송을 막아주셨다.

 하지만 출소를 하자 나는 또다시 빼앗긴 돈을 위해 친척을 찾아다녔다. 그만 잊고 다른 일을 시작하자는 아내의 말에 매일같이 싸웠다. 결국 가족들이 떠나고 나서야 나는 그 일에 대한 미련을 버리게 됐다. 택시운전수를 하며 누구보다 성실하게 일했고, 3년 별거 끝에 나는 다시 가족의 곁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이번에는 개가 문제였다. 집에 있는 개가 사나워 내 손을 물고 피가 나도 가족들은 10여 년 가장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못한 나보다 개가 더 우선이었다. 서운함에 부인과 싸움도 잦아졌다. 집에서 나는 가장도 남편도 아니었다. 가장으로서 남편으로서 바로 서게 도와달라는 기도를 하며 매일 회개기도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를 안쓰럽게 생각한 장로님이 파더스드림을 소개했다. 변화는 이때부터였다. 뭔지도 모르고 갔던 파더스드림의 프로그램들을 통해 불화가 사라지고 가정이 회복됐다. 나는 가족들이 아닌 나의 마음 문이 닫혀있음을 알게 됐다. 내가 권위의식을 버리고 가족을 이해하게 되니 가정에 행복이 넘치게 됐다.

 가정을 회복시켜준 파더스드림이 너무 좋아 수료 후에도 봉사자로 일하며 형제들과 하는 중보기도에 참여하고 있다. 받은 은혜가 있으면 전도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파더스드림 중보기도 시간에 전도자를 적어 내고 기도를 하는데 목표를 갖고 기도하면 반드시 그 사람은 전도가 됐다. 어머니를 따라 다른 종교였던 누나들이 변화됐고 내 주변의 사람들이 모두 새신자로서 인도 받았다. 얼마 전 특별새벽기도에서 나는 ‘네가 반드시 승리하리라’는 강하고 뚜렷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하나님은 내가 방황한지 20년 만에 파더스드림을 통해 나를 완전히 회복시켜 주셨다. 2월에는 강동성전에서 전도상도 받았다. 죄악에 물들어 범죄자였던 나에게 전도자로서 사명을 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린다. 할렐루야!       


김수영 성도(마포2대교구) -

말씀에 의지해 선포한 대로 기도응답

갑자기 찾아온 마비증세로 직장 잃고 일상생활 불가능
주님의 치료하심 바라보고 기도하니 치료의 기적 임해

 2005년 어느 날이었다. 회사에 출근했는데 갑자기 양쪽 팔을 들 수가 없었다. 주변에서는 오십견이 아니냐며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목도 돌리기 힘들었고 앉았다가 일어날 수도 없고 계단을 내려가는데 발바닥이 저려오는 등 몸 상태가 좋지 못했다. 병원에서는 류마티스관절염이라며 약을 처방해주었다. 도저히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유명하다는 병원이나 치료제, 치료방법은 다 알아보기 시작했다. 병원을 바꾸어 가며 진료를 받았는데 조금 차도가 보이는 듯하더니 1년이 지난 어느 날부터는 걸을 수조차 없었다. 그때부터 어쩔 수 없이 휠체어를 타고 이동을 했는데 당시 주택에서 살 때라 엘리베이터가 없어 난감했다. 그 때마다 119소방대원들이나 주변 분들의 도움으로 집에 들어가고 나올 수 있었다.

 증상은 더욱 심해져 몸은 붓고 식사하는 것도 힘들어졌다. 일상생활이 점점 불가능해지다보니 다니던 회사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통증의 범위도 넓어지기 시작했다. 2009년부터는 아예 침대에서만 생활했다. 당시는 컵도 들 수 없고 누워서 머리를 돌리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 때부터 하루 종일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듣기 시작했다. 특히 조용기 목사님의 말씀이 큰 위로가 됐다. 나를 간병하시던 어머니는 설교 중에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라는 말씀을 일만 번 쓴 권사님의 치유 간증 예화를 듣고는 그 말씀을 일만 번을 쓰시며 나를 위해 중보해주셨다. 나도 조용기 목사님의 4차원의 영성으로 기도하라는 말씀에 의지해 내가 나은 모습을 상상하고 꿈꾸고 바라보며 선포하듯 기도했다. 변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흔들릴 때는 이영훈 목사님의 절대긍정과 절대감사를 떠올리며 “저는 이미 나았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하며 기도했다.

 내가 나을 수 있을까라는 불안감이 나았다라는 확신으로 바뀌자 조금씩 차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상체는 제법 움직일 수 있었고 하체도 비록 제대로 걷지는 못해도 도움을 받아 휠체어를 타고 이동할 수 있을 정도는 됐다. 더욱 하나님께 매달리기로 작정하고 지역장님께 매주일 교회에 갈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말했다. 그렇게 지역장님의 부축을 받아 매주일 예배를 드렸다. 그것도 부족해 수요예배, 금요성령대망회도 참석했다.

 더욱 말씀을 의지해 기도하니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금요성령대망회에서 이영훈 목사님이 신유기도를 선포하시는데 무릎이 시원해지면서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매일 혼자서 어렵게 계단을 올라 집에 들어가던 나는 그날 어렵지 않게 계단을 올라 집에 갔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내가 나았다는 인식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 주일에 예배를 드리고 교구사무실로 내려가던 중 그때서야 나는 깜짝 놀랐다. 전혀 통증을 느끼지 않고 자연스럽게 계단을 내려가고 있는 나를 발견한 것이었다. 할렐루야!

 비록 완벽하진 않지만 걸을 수 있게 된 나는 제일 먼저 아파서 중단했던 성경대학을 다시 시작했다. 처음에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내가 혼자서 대중교통을 이용해 교회를 다닐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막상 시작하니 봉사도 하고 더욱 확신을 갖고 기도하니 졸업이 다가와서는 아프기 전과 다름없을 정도로 건강해졌다. 얼마 전 성경대학 졸업식에서 대표로 봉사상을 받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성경대학 봉사를 하면서 하나님께서 내게 상담에 대한 비전을 주셔서 지금은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에서 상담학을 공부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일련의 체험을 통해 아픈 자들의 마음을 알게 하시려고 한 것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학업을 준비할수록 길을 열어주시고 물질의 축복도 주셨다. 앞으로 열심히 공부해서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되겠다.    


미즈타 미사키 성도(순복음후쿠오카교회)

하나님 사랑으로 위기에 놓인 가정 회복됐어요



남편의 잦은 방황, 심각하게 이혼까지 생각할 정도
성도들의 사랑과 위로, 기도로 미움 원망 사라져


 교회를 다니시는 어머니를 통해 내가 순복음후쿠오카교회가 운영하는 기독교국제학교에 온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복음을 전해 듣고 침례를 받았지만 가슴으로 예수님을 인정하는 건 쉽지 않았다. 하나님을 알게 되면 사람을 용서하고, 기도로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이 과연 있기는 한 건지 믿기 어려웠다.

 학교를 졸업한 뒤 교회는 그저 형식적으로 예배만 드리는 곳일 뿐, 나는 세상이 더 좋았다. 재학시절부터 알게 된 남편과 결혼한 것은 고등학교 졸업 직후였다. 자상한 남편과 사랑스런 아이들, 누구나 꿈꾸는 행복한 가정을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꿈꾸는 가정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4살 연상인 남편은 아직 어렸다. 경제적 능력이 없는 것은 물론 가정보다는 세상과 어울리는 것을 더 좋아했다. 첫 아이를 임신했다. 몸이 약한 나는 많이 아팠고, 복통이 심했다. 남편의 보살핌이 필요했지만 그때마다 남편은 내 옆에 없었다. 첫 아이를 출산할 때도 남편은 곁에 있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은 그런 나를 안타깝게 여겼다. 내가 느끼는 고통은 그들의 걱정보다 심각했다. 아이가 태어나 아빠가 됐지만 남편의 방황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혼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둘째를 임신했다. 편치 않는 마음에 몸 상태는 다시 나빠졌다. 몸과 마음이 지쳐 어린 딸을 안고 친정에 왔다. 우연히 후쿠오카기독교국제학교를 다닐 때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남편을 위한 기도’라는 책이 눈이 띄었다. 그때 처음으로 ‘하나님께 내 어려움을 말하고 기도해볼까.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다면 이렇게 아파하는 나를 위로해주시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가졌다.

 둘째는 아들이었다. 새생명은 언제나 신비로웠다. 그런 귀한 아이가 태어난 지 3개월 만에 하늘나라로 떠났다. 침대에서 떨어진 아이는 온 몸이 마비가 됐다. 순복음후쿠오카교회 성도들은 아이를 살려달라고 한 마음으로 중보했다. 방황하던 남편도 아이를 살려보겠다며 교회에 와서 기도했다. 그러나 끝내 아이는 주님 품에 안겼다. 아이의 장례식 날, 성도들은 자신의 일처럼 아파하며 나를 위로했다. ‘왜 이런 고난이 나에게만 임하는 것일까’ 원망이 생겼다. 그런데 그런 고난을 통해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됐다.

 김 일 담임목사님을 비롯한 순복음후쿠오카교회 성도들의 참 위로와 사랑, 무엇보다 김선교 목사님의 사모님 격려가 큰 위로가 됐다. 고난을 통해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다. 그분의 존재를 믿게 되면서 하염없는 눈물이 흘렀다. 주일 예배는 물론 수요예배, 금요철야예배 그리고 매일 드려지는 예배를 통해 현존하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을 비로소 깨닫게 됐다.

 “아버지 사랑 내가 노래해 아버지 은혜 내가 노래해 그 사랑 변함없으신 거짓 없으신 성실하신 그 사랑…죽음도 생명도 천사도 하늘의 어떤 권세도 끊을 수 없는 영원한 그 사랑 예수” 찬양만 부르면 눈물이 주룩 흘렀다. 기도할수록 용서할 수 없던 남편에 대한 미움이 사라졌다. 삶에 대한 원망이 가슴에서 녹아 없어졌다. 남편의 방황은 여전했지만 그때마다 기도하며 남편을 미워하는 마음을 용서해 달라고 간구했다. 그런데 내가 기도하는 동안 하나님은 나의 마음 뿐 아니라 남편의 마음을 만져주셨다. 방황하던 남편이 사회복지 일을 시작했다. 함께 지낼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열심을 돈을 벌기 시작했다. 교회도 꼬박꼬박 나오고 있다. 이 모든 것이 기도로 이룬 기적이었다.

 하나님은 3년 전 나에게 새 생명을 허락하셨다. 아들이었다. 아이를 키우느라 정신없던 나는 한나회(어머니모임)에서 활동하는가하면 찬양팀에서 싱어로 봉사하고 있다. 순복음후쿠오카교회는 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새 힘을 얻게 해주는 보금자리’였다. 하나님은 성경 말씀처럼 “나의 길을 그분께 맡길 때 이뤄주시고 의를 빛같이 나타내어 보이시는 분”이셨다. 

 아이들이 없었다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말았을 나. 아이들에게 ‘하나님은 너를 창조하신 분’이라고 말할 수 있도록 나에게 믿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고난 중에 회복을 이루시고, 당신의 살아계심을 깨닫게 해주신 하나님을 우리 가정의 중심으로 모신다. 그 하나님을 믿고 주님을 증거하는 믿음의 가정이 되겠다.  


이영미 집사(양천대교구) -

“서연이를 멋지게 고치신 하나님”



화농성 고관절염 후유증에 다리 이상이 와
이영훈 목사 안수기도 후 성장판 생성 ‘확인’

 딸 서연(사진)이는 2008년 2월에 태어났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귀한 아이였다. 그런데 아이가 8개월이 되던 그해 10월, 감기바이러스가 아이의 관절에 침투하면서 급성 화농성 고관절염이라는 생소한 병에 걸리고 말았다. 고관절에 염증이 나서 곪으면 그 고름이 뼈를 녹이는 무서운 병이었다. 입원 당시 아이는 40도의 고열이었고 거기에 패혈증까지 와 최대 고비를 맞았다. 다행히 다음 날 열이 내려 한 고비 넘기면서 수술이 진행됐다. 이런 일이 왜 나에게 닥쳤는지 원망스러웠고, 왜 아이를 빨리 병원에 데려오지 않았는지 나의 무지함에 가슴이 먹먹했다. 수술을 마치고 나온 아이는 가슴부터 발목까지 깁스를 하고 있었다. 또 수술이 이뤄진 왼쪽 대퇴부에는 남은 고름을 빼내기 위한 주머니가 달려 있었다. 말도 못하는 어린 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미어졌다. 그렇게 한 달 가량 입원 후 퇴원했지만 수술 부위에 계속 문제가 생겼다. 우리 부부는 다른 대학병원으로 옮겨 재검사를 실시했고, 재수술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듣게 됐다. 당황스러운 건 아이가 성장할 때까지 몇 번의 수술을 더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남편과 나는 15개월이 된 딸 서연이를 데리고 다시 명의를 찾아 나섰다. 그곳에서도 역시 성장을 마칠 때까지 서 너 차례 대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또 어른이 되서는 왼쪽 대퇴부 고관절에 인공관절을 삽입하는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아이가 어려 큰 수술을 견디는 것이 당장은 무리라고 하셨다. 우선 6개월마다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아이는 화농성 고관절염의 후유증으로 왼쪽 고관절이 기형으로 자라고 있었고 성장판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왼쪽 다리가 오른쪽에 비해 짧았다. 하염없이 눈물만 흘렀다.

 우리가 기댈 곳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하나님뿐이었다. 2010년 새해가 되면서 나는 열두광주리 새벽기도회에 참석했다. 새벽기도회 때 이영훈 목사님이 말기암 환자 등 많이 아픈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주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신청했지만 우리까지 순번이 오기란 쉽지 않았다. 그런데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자 목사님의 안수를 받게 됐다. 그리고 정확히 그 해 6월, 우리는 의사로부터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됐다. 엑스레이 결과 보이지 않던 성장판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할렐루야!

 2년 뒤, 서연이는 1차 수술을 위해 전신 마취를 받고 수술실에 들어갔다. 그동안 제멋대로 자란 뼈를 부드럽게 다듬고 찢긴 연골을 봉합하기 위한 수술이었다. 그런데 수술실에 들어간 지 1시간 뒤 담당 의사가 급히 보호자를 찾는다는 연락이 왔다. 수술실 입구로 달려갔더니 의사가 조영술 검사결과 상황이 호전돼 수술을 받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결과였다. 그 후 7살 되던 해 서연이는 수술실에 들어갔다 또 다시 수술을 받지 않았다. 상태가 호전된 것이다.

 그리고 2개월 전인 2016년 12월 초, 정기 검진 결과 서연에게 더 이상 수술이 필요치 않다는 최종 진단 결과가 내려졌다. 의사는 “기적이다. 하나님께 감사드려라”고 말하며 서연이의 결과를 우수 사례로 뽑아 학술회의 자료로 쓰겠다고 하였다. 나와 남편은 감격하며 하나님께 모든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렸다. 우리 가정은 서연이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항상 함께 하시며 우리를 사랑으로 돌보신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힘든 일이 있어도 낙심하지 말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 기도에 응답해주신다. 올해 10살이 된 서연이가 정상적으로 뛰어다니는 것을 볼 때면 내 고백은 오직 감사, 절대 감사뿐이다. 기도해주신 모든 분들께 지면을 통해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김근제 목사(미국 풍성한순복음교회)

뇌출혈로 사망 확률 85%, 주님 은혜로 건강 회복



무의식 중 14시간 동안 조용기 목사 설교 들어
수술하지 않고 오직 4차원의 영성 의지해 승리
 

 나는 33년째 미국에서 사역하고 있는 선교사다. 산호세에서 15년 동안 사역을 하고 있다. 그 전에는 타코마중앙순복음교회에서 10년, 아리조나세라비스타순복음교회에서 8년을 있었다. 지금은 캘리포니아 산호세에서 풍성한순복음교회 담임을 맡고 있다.

 1976년 여의도순복음교회에 처음 갔을 때가 23세였다. 당시 나는 할아버지 때부터 유전이었던 고혈압을 앓고 있어 혈압약을 먹고 있었다. 처음 조용기 목사님 설교를 들었는데 “하나님이 젊은 청년을 지금 치료 하셨습니다”라고 선포하셨다. 나에게 하신 말씀이라는 확신이 왔고 너무 놀라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혈압은 정상이 됐고 이후 40년간 약을 안먹고 있다.

 그렇게 교회에 온 첫날 기적을 체험하고 며칠 후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에 올라갔는데 하나님은 내게 강력한 성령을 부어주셨다. 성령 충만을 받고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 신학을 하고 선교사가 됐다. 나는 인디언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시급하다는 것을 알고 미국에서 원주민 사역을 시작했다. 교민 교회에서 주일날 예배드리고 자동차로 인근에 있는 인디언보호구역까지 14시간 오가며 사역을 했다.

 수시로 먼 거리를 운전하며 복음을 전하고 그들의 신앙을 돌보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니 최선을 다했다. 그러던 중 2014년 3월 15일 제직훈련 집회를 하는데 설교 중 갑자기 왼쪽 손끝이 저려오기 시작하더니 다리가 저리면서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뇌출혈이었다. 약간의 의식이 있을 때 뇌출혈 예방에는 아스피린이 좋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아서 아스피린을 달라고 해서 두 알을 먹었다. 이미 뇌출혈로 쓰러진 다음에는 아스피린을 먹으면 안되는 것인데 모르고 먹은 것이다. 앰뷸런스에 실려가는 동안 나는 의식을 잃었다.

 그 이튿날 밤에도 깨어나지 않고 의식불명 상태였다. LA 한인타운 클리닉 의사인 큰 아들과 헐리우드 엔터테인먼트 변호사인 둘째 아들이 연락을 받고 LA에서 황급히 산호세 병원으로 달려왔다.

 아스피린 복용으로 인해 내 머릿속에서는 피가 계속 멈추지 않았고 빨리 뇌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내과 의사인 큰 아들은 “우리 아버지는 목사님이시니 하나님이 하실 것”이라며 뇌수술을 반대했다. 아빠가 순복음교회 목사인 것을 늘 자랑스럽고 고맙게 생각하던 둘째아들도 하나님께 맡기자고 했다. 둘째 아들은 평소에도 늘 조용기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4차원의 영성 책을 읽으며 신앙을 무장하고 있었다. 아들은 21시간 동안 의식 없이 누워있는 나에게 4차원의 영성을 계속 말했다. 그리고 내 귀에 이어폰을 꽂아주며 조용기 목사님 영어 설교 테이프를 계속 들려줬다.

 나는 무의식 상태에서 14시간동안 조용기 목사님의 4차원의 영성의 메시지를 들었다. 얼마 후 의식이 돌아오는데 “내가 너와 함께한다. 걱정하지 말아라”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얼마나 맑고 우렁찬지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의식이 돌아왔다.

 “하나님께서 내게 이런 음성을 들려주시고 나를 살리셨구나” 깨닫게 되자 이 병에서 승리한다는 확신이 왔다. 내가 누워있는 동안 의사는 사망 확률이 85%가 넘을 것이라고 말했고, 깨어난다 해도 언어장애는 물론 무의식 상태가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했다. 머릿속에서 피가 나오는데 지혈을 못하는 상황이니 그런 절망적인 진단이 나올 만 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하신 일은 의사의 예상을 완전 빗나갔다. 나는 곧 의식을 회복했고 말을 했고 일어나 걸었다. 내가 살아난 것은 작은 아들이 의식불명 상태인 내 귀에 이어폰을 꽂아 24시간 잠자지 않고 죽지 않는 내 거듭난 영에게 4차원의 영성 조용기 목사님의 설교를 듣게 하였기 때문으로 확신한다.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한 나는 병원에서도 영상을 찍어서 설교하며 성도들과 함께 기도했다. 한달 후 퇴원했고 빠른 속도로 건강을 되찾은 나는 지금도 건강히 목회하고 있다. 나는 4차원의 영성을 통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많은 성도들이 4차원의 영성을 통해 승리하는 삶을 살기 바란다.


정리=이미나 기자


김준하 성도(대학청년국 가스펠선교회)

“가진 것이 없어도 감사하면 주님은 감사의 선물을 주세요”

어려움은 경제적인 자립심 키울 수 있는 소중한 재산
첫 열매 주님께 드리고 감사편지 … 물질의 축복받아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은 보증 수표와 같은 것이라는 것을 감사하게도 일찍 깨달았다. 당장 가진 것이 없다고 해도 감사하면, 감사의 선물이 미래에 다가오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절대감사의 법칙인 것 같다.

 중학교 2학년 때다. 한국이 국제통화기금 IMF지원을 받으면서 경제의 큰 위기를 맞았었다. 그 여파로 우리집도 가족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고, 나는 당장 먹고 살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중학생이었지만 학교를 다녀온 후에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구해서 일을 했다. 주유소부터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었다. 생계형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교를 다니니, 학교에 도시락을 못 싸가지고 가는 날이 많았다. 그런 날에는 운동장에 가서 물로 배를 채웠다.

 그런 생활을 하던 중 우연한 기회로 우리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렸다. 3학년 때다. 교회를 처음 나온 그해 겨울방학 때 나는 성령체험을 했다. 성령체험을 한 후 한 달 내내 얼마나 눈물을 쏟았는지 모른다. 이렇게 성령님이 나와 함께해주시자 나의 인생은 이전과 180도로 달라졌다. 환경이 바뀐 것이 아니라 성령님과 함께 있는 내가 바뀐 것이다. 더 이상 현실이 비관되거나 힘들지 않았다. 가난해서 슬프지도 않았다. 하나님이 앞으로 잘 되게 해주실 것이라고 믿었다. 믿음대로 어릴적 이런 경험은 경제적인 자립심을 키울 수 있었던 나의 소중한 재산이 되어줬다. 

 나의 생계형 아르바이트는 계속됐다. 고등학교 3학년 한겨울이었다. 그날 눈이 많이 내려 배달을 하다가 그만 오토바이 사고를 냈다. 그런데 상대방이 무리한 합의금을 요구해왔다. 결국 합의를 할 수가 없어 눈이 쌓이는 한겨울 유치장 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으로 결국 법원에서 집행유예 2년 선고를 받았다. 그 판결 기록 때문에 군대도 부대를 출퇴근하는 상근예비역으로 복무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내 인생이 꼬여 보였을지는 몰라도 유치장에서도 상근예비역 복무 중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나는 기쁘고 즐거웠다. 그래서인지 군 생활하면서 대학청년국 프뉴마선교회 찬양팀에서 찬양으로 교회를 섬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주어졌다. 찬양팀에서의 훈련은 나의 신앙이 급진적으로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해줬다. 합력하여 선을 이뤄주신 하나님의 놀랍고 완벽한 시나리오에 감사할 뿐이다. 할렐루야.

 대학을 진학한 후, 나의 몸은 계속되는 허리와 어깨 통증으로 일을 할 수도 없을 정도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러니 일을 못해 경제적인 어려움은 더 심해졌고 또 치료도 받지 못하니, 아픈 데는 점점 늘어갔다. 그래서 매일 새벽예배와 철야예배에 나왔다. 내가 매달릴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뿐이었기 때문이다. 수시로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면서 주님께 울면서 간구했다.

 하루는 조용기 목사님의 말씀을 들었다. 가난함, 육체적 고난 그 자체가 저주라는 말씀이 너무나 나에게 다가왔다. 그날 나는 하나님께 눈물로 간절히 기도했다. ‘다시는 가난한 삶, 저주 아래서 살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부요하게 되어 어려운 이웃들을 돕고 주의 종과 교사님들을 섬길 수 있는 삶을 살게 인도하여 주옵소서’라고. 그러자 주님은 디모데전서 6장 17∼19절 말씀을 레마로 확실하게 보여주셨다.

 그런 일이 있은 후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인도하심이 이어졌다. 문승현 장로님이 계시는 국내법인으로 인도받게 되어 일을 하게 된 것이다. 4개월 만에 받은 첫 월급. 나는 감사헌금 봉투에 감사편지를 쓰고 첫 열매를 주님께 드렸다. 그러자 축복이 시작됐다.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모두 응답해주셨다.  

 내가 드렸던 기도, 내가 가졌던 소망대로 나는 앞으로 선한사업에 더 많이 동참할 것이다. 그래서 더 감사하다. 요새 주변에서 제2의 IMF라고 하는 등 모두 힘들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자신있게 말하고 싶다. 감사하면 어려운 중에도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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