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옥희 집사(금천대교구) -

42년 만에 꿈을 성취하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

가난으로 낙심과 절망 희망을 잃었던 삶에서
주님이 보내주신 사람들로 작가의 꿈 되찾아

 

어린시절 우리 집 형편은 말로 다하기 어려울 정도로 힘들었다.

가난에 찌들어 ‘오늘만 살고 그만 살까’하는 생각이 언제나 내 마음 한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 진학도 할 수 없었고 전자회사에서 일하며 돈을 벌어야만 했다.

어떻게든 학교를 졸업하고 싶어 밤에는 검정고시를 준비했지만 이른 나이에 남편을 만나며

끝내 마치지 못했다. 만약 내 인생에서 주님이 함께 하시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직도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세상과 씨름하며 아무 꿈과 희망 없이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낙심과 절망이 아닌 꿈을 꾸고 살도록 세 명의 인도자를 보내주셨다. 

나에게 처음으로 꿈을 심어준 사람은 초등학교 선생님이다.

학교 글짓기 시간에 나의 재능을 알아봐주시고 중학교 진학을 못하는 나에게 “옥희야 너는

지금 할 수 없더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나중에라도 작가가 되어라”고 말해준 선생님의

그 한마디가 50세가 넘은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다.

선생님이 해주신 말이 내 귓가에 맴돌아 작가의 꿈을 갖게 됐지만 결혼하고 아이 낳고 사는 게 바빠 그런 꿈을 잊어갈 무렵 금천대교구 고순덕 권사님이 나를 교회로 인도했다.

권사님을 처음 알게 된 건 30여 년 전으로 둘째딸을 하루 봐준 스쳐가는 인연인줄로만 생각했던 권사님을 10여 년이 흘러 우연히 길에서 다시 만났다.

다시 만난 권사님은 교회 구역장으로 전도의 열정이 뜨거웠다.

나에게 매일 찾아와 전도를 하는데 처음에는 웃으며 응대했지만 갈수록 귀찮아져 그분이 오실 때쯤 불도 끄고 없는 척하기에 바빴다. 그런데도 어찌나 끈질기게 전도를 하는지 어느 날은 남편 집사님과 같이 와 성경 한권을 선물하셨다.

성경 값을 확인해 보니 3만원이기에 딱 3만원어치만 같이 가주고 말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처음 예배에 참석하게 됐다. 예배를 드리는데 그 시간이 너무 편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면 소원을 이루어주신다는 말씀에 나는 다시 한번 꿈을 꾸게

됐다. 내가 갖고 있는 꿈을 위해 만학도 학교에 입학했다.

 나를 전도하고 신앙을 심어준 것이 고순덕 권사님이라면 신앙이 꽃 피도록 도와준 분은 박분자 권사님이다. 만학도 학교에서 박분자 권사님을 우연히 만나게 되어 국민일보 후원선교회에서 예배도 드리고 찬양과 봉사를 하면서 나의 믿음은 날로 좋아졌다.

주님을 알리는 게 기뻐 ‘행복으로의 초대’를 가지고 매일 전도도 하며 점점 믿음이 커지자

나의 꿈도 분명해졌다. 만학도 학교에서도 글쓰기 대회에 나가면 항상 입상해 초등학교 때

가진 작가의 꿈은 더욱 간절해졌다.

그래서 나는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안 명지대 문예창작학과에 장학금을 받으며 입학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현재 2학년에 재학 중이며 3번의 장학금을 받았다. 할렐루야!  

 

초등학교부터 대학에 오기까지 42년이 걸렸다. 수능시험을 앞두고 마음이 많이 불안하고

흔들려 나는 우리 교구의 김현동 목사님에게만 이야기 하고 그 누구에게도 기도부탁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시험날 갑자기 이사야 41장 10절 말씀이 떠올랐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이 말씀에 따라 나는 자신 있게 시험을 보고 나올 수 있었다.

나는 나중에야 김현동 목사님과 고순덕 권사님이 새벽부터 내가 시험 마칠 때까지 기도해주셨다는 것을 알게 됐다. 심지어 고순덕 권사님은 그날 수능기도회에 참석해 학부형으로서 띠까지 두르고 기도하셨다는 이야기에 내 마음이 뭉클했다.

나에게 꿈을 심어주고 희망을 주는 기도의 어머니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낙심과 실망에 주저앉았을 것이다. 나도 앞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작가가 되어 예전의 나처럼 희망을 잃은 사람들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정리=김주영 기자


최종학 집사(서대문대교구) -

위액 역류로 고통, 신유기도 시간에 치유 받아

구원의 확신 받고 주님께 순종하는 삶 살게 돼
남선교회 봉사하며 날마다 기쁨과 감사 넘쳐

 남선교회 외국인안내실에서 1부 차장으로 봉사하고 있는 나는 올해 2월 큰 은혜를 체험했다. 2월 말쯤 위액이 식도로 역류해 고통을 받았다. 처음에는 “이러다가 괜찮아지겠지” 하면서 약을 복용하거나 병원에 가지 않았는데, 점점 더 역류하는 횟수도 많아지고 밤에 잠들 때에도 무척 고통스러웠다. 3월 6일 주일 3부예배 신유기도 시간에 내 마음속으로 “하나님께서 목사님 입술을 통해 ‘위액이 역류하는 것이 나았습니다’라고 선포해주시면 깨끗히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도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영훈 목사님께서 “식도에서 위로 자꾸 위산이 역류해서 고통당하고 있는 분을 주님이 치료해 주셨습니다”라고 선포하시는 것이었다. 할렐루야! 그 시간 전까지도 위액이 계속 역류해서 목이 심하게 아프고 헛기침을 했었는데 그 시간 이후로 역류하는게 없어졌다.

 처음엔 어리둥절했다. “저 말씀이 나를 위한 말씀이 맞는거겠지?”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 시간 이후로 단 한번도 위액이 식도로 역류한 적 없이 깨끗이 낫게 됐다. 크리스천이라고 하면서도 늘 하나님께 더 가까이 하지 못했던 나를 하나님께서 치료해 주시니 정말 감사했다. 마치 내 기도를 들으신 것처럼 신유말씀을 선포해주신 목사님께도 너무 감사했다.

 나와 같은 기적을 2년 전 큰 딸도 체험했다. 아이가 교회에 가려고 콘텍트 렌즈를 끼는데 눈 흰자위가 부풀어 오르는 일이 있었다.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렌즈를 끼지 못하고 그냥 교회에 갔는데 병원 문도 안 여는 주일이라 걱정이 됐다. 큰 아이가 주일 2부 예배 찬양대에서 봉사하고 있었는데 그날 2부 예배 설교 후 이영훈 목사님이 신유기도 시간에 “교회 오는 길에 눈이 아파서 고통 당한 분이 나았습니다”라고 선포하셨다. 그 순간 딸의 눈은 깨끗하게 나았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나니 그동안 나의 신앙과 삶을 돌아보게 됐다. 나는 2000년에 아내의 전도로 여의도순복음교회에 다니게 됐다. 나는 그저 주일예배만 왔다 갔다 할 뿐 믿음이 없었다. 그러던 중 10년 전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고 삶이 바뀌길 원해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에 가서 금식기도를 했다. 3박 4일 작정으로 기도원을 다녀왔는데도 특별한 체험이 없었다.

 두 달 후 나는 내가 구원받은게 맞는지 주님의 확실한 응답을 받고 싶어 다시 기도원에 올라가 5일 금식을 했다. 5일째 되던 마지막 날 2부 예배 때 목사님 설교에 큰 은혜를 받았다. 목사님은 혈루증 여인에 대해 설교하셨는데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는 말을 하며 나를 지목하셨다. 큰 창이 날아와서 내 가슴에 꽂힌 것 같았다. 눈물이 펑펑 쏟아지면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라는 확신이 왔다. 내 삶은 그 때부터 달라졌다. 매일 아침 7시에 가정예배를 드리고 날마다 긍정과 감사의 고백이 나왔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나는 성경학교·대학·대학원 공부를 했다. 주님의 사랑에 감사해 봉사할 곳을 찾다가 남선교회 외국인안내실에서 봉사도 시작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 직장도 들어가게 됐고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생겼다. 주님의 은혜로 집도 장만하게 됐다.

 하나님을 섬기니 주님은 복에 복을 더해주셨다. 두 딸도 대학교에 잘 다니고 있고 큰 딸은 교회학교 유아부 교사, 작은 딸은 주일 5부예배 찬양대원으로 봉사하고 있다. 아내 이명윤 집사는 지역장으로  헌신하며 기도를 많이 하고 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는 말씀을 좋아한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 마음이 주님의 사랑으로 새롭게 채워진다. 우리를 늘 사랑으로 이끌어주시는 좋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    


박순혜 권사(양천대교구) -

두렵고, 떨리고, 연약할 때 하나님의 능력 나타나

전도! 광야 학교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길
기도와 감사의 찬양 통해 장막의 축복 받아

 

광야 학교에서 고난의 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다. 광야 학교가 언제쯤 끝이 날지 알 수는 없었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그 때 권사찬양대에서 찬양 봉사를 시작했다. 봉사를 시작하고 몇 달이 지나, 하루는 집주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신월동에 뉴타운이 개발되니 이사를 가 달라는 것이었다. 동네가 앞으로 개발될 것이라는 소문은 들었지만, 준비도 없는 상태에서 이사를 가라는 연락을 받고 나니 가슴이 떨렸고 손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기도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찬송은 곡조가 있는 기도였기에 찬송을 부르면 기도의 문이 다시 열렸다. 정신을 가다듬고 힘을 내어 내가 약할 때 강함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그리고 장막을 소원하며 꿈을 가지고 기도했다.    
 “주님, 앞을 봐도 뒤를 봐도 우리집은 없는 것 같아요. 하지만 주님, 이제 우리 가족이 이 월세집을 나갈 때 장막을 사서 나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세요. 우리집을 주세요”라며 눈물로 간절히 기도했다.  

 신년축복 열두광주리 기도회가 열렸다. 목사님은 말씀을 통해서 전도의 비전을 주셨다. 그래서 전도계획을 세우고 기도했더니 하나님은 새신자를 만나게 해주셨다. 새신자가 쌍둥이 엄마라서 주일은 정신이 없었다. 함께 교회를 와서 서로 한 아이씩 맡아 예배를 드렸다. 새신자가 은혜를 받는 날은 나도 은혜가 충만해졌고, 아이들 때문에 집중을 덜해서 은혜를 덜 받으면 나도 가슴이 아팠다. 새신자가 교회에 적응해 나가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 느낄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응답과 축복이 시작됐다.

 권사찬양대에서 미국선교를 간다고 해서 신청자 접수를 받았다. 얼떨결에 간다고 손을 들었지만, 집도 이사를 해야 될 판에 선교여행은 말도 안되는 것이었다. 신청금도 못내면서 연습은 계속 했다. 그런데 수요예배가 있은 후 권사찬양대에서 그날까지 송금을 해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망연자실하고 있는 나에게 한 권사님이 “중보기도 하고 있으니 걱정말라”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일을 책임을 져주신다”고 말씀하며 용기를 주시는 것이었다. 조용기 목사님의 말씀대로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이 아무것도 없어도 믿음을 가지고 담대하게 나가기로 결심하고 선교비를 입금했다.

 그리고 30분쯤 지나서 전화가 걸려왔다. 부동산중개인이 빨리 집을 보러 오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부동산에 도착하자 그 집은 다른 부동산에도 내놓아져 있어서, 다른 부동산 소개로 먼저 온 사람과 계약이 이미 됐다는 것이었다. 매우 낙심이 됐지만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곧 편해졌다.

 다음날 모르는 곳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부동산인데 어제 사려는 사람이 취소했다면서 계약금을 가지고 오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계약을 했고, 중도금과 잔금을 치를 때도 하나님이 도우셔서 융자없이 우리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 할렐루야!

 장막의 축복을 받으면서 권사찬양대 선교여행도 잘 다녀올 수 있었다. 무엇보다 남편이 이제는 안수집사로, 남성지역장을 맡아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어 감사하다.          

 

이사를 한 후 교구장 김일수 목사님을 모시고 입주예배를 드렸다. 광야학교에서 나와 가나안에 들어가는 기분이 이런 것 같았다. 예배를 드리면서 감사의 눈물이 흘렸다. 올해 우리 가족의 목표는 말씀에 순종해 영혼구원인 전도에 목숨을 걸자는 것이다. 이것이 주님으로 채워지는 것이요, 가나안땅에 들어가는 길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린다. 할렐루야!        

정리=이소흔 기자

 


이요셉 성도(대학청년국)와 딸 이예지 양

32주 신생아 지키시고 치료하신 하나님 ‘감사’
딸 돌잔치 축의금 전액 ‘생애 첫 헌금’으로 드려
난치성희귀병을 앓고 있는 환우에게 용기 전해


 오늘 아침 “교회 가서 예배드리고, 아픈 친구들도 돕자”라고 했더니 예지가 활짝 웃었다. 나보다 우리 딸이 더 기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얼마 전 돌잔치를 치른 우리 딸 예지가 ‘생애 첫 헌금’을 드렸다. 돌잔치에서 받은 축의금 전액과 반지 그리고 장난감 등을 난치성희귀병을 앓고 있는 환우들을 위한 헌금으로 전했다. 이는 작은 몸으로 세상에 나와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는 우리 딸이 받은 축복을 감사하며, 또 희귀병을 앓고 있는 아이들과 가족들에게 작은 용기를 전하고 싶어 결심한 것이다.

 예수님이 지켜준 우리 예지는 작년 5월 12일에 태어났다. 아내는 예지를 갖기 전, 6주 만에 유산이 되어 깊은 고통의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아이를 갖게 된 것이다. 하지만 기쁨은 잠시였다. 아내가 임신중독증에 걸려 혈압 조절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작년 5월 9일 병원에 입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담당의사는 아기가 바로 나올 수 있다고 준비하라고 했다. 응급상태에서 나흘간 버티다가 빈 인큐베이터가 병원에 없어서 강남으로 옮겨 출산을 했다. 우리 예지는 엄마 뱃속에서 32주를 채우고 1.4㎏이라는 작은 아이로 세상 밖으로 나왔다. 병원에서는 37주가 안되어 태어나거나 몸무게가 2.5kg미만인 아기를 미숙아로 분류한다. 그리고 이들은 건강해질 때까지 인큐베이터 신세를 져야한다. 왜냐면 폐의 발달이 미숙해 혼자 힘으로 호흡하는 것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심장은 물론 여러 장기들이 온전치 못하기 때문이다.   

 환영보다는 조산의 충격과 염려 속에서  만난 딸 예지는 30일 동안 신생아집중치료실(NICU)에서 생활했다. 예지도 그 작은 곳에서 황달, 동맥관 개존증, 심방 중격 결손증, 선천성 부신 과형성증, 좌뇌 뇌경색이라는 병들과 사투를 벌여야 했다. 우리 부부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뿐이었다. 부모님께 기도 부탁을 드렸고, 교구 식구들에게 중보를 요청했다. 갓난아이를 보러 신생아집중치료실에 가면 살이 마르고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손을 붙잡아 주셨고 위로해 주셨다. 무엇보다 예지와 함께 해주셔서 인큐베이터 안에서도 반짝 웃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 부부의 눈물은 기쁨과 감사의 찬양으로 변해갔다. 치료의 하나님은 광선치료로 황달을 완치해 주셨다. 예지는 선천성 부신 과형성증도 정상으로 판정받을 수 있었고, 동맥관 개존증도 약물치료나 수술 없이 저절로 막혀 치료됐다. 

 처음 뇌경색이라는 진단을 받았을 땐 뇌성마비 편마비로 걷지 못할 수도 있고 운동능력이 떨어질 수 있다면서 고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뇌는 신의 영역이라고 말했었다. 이런 말을 듣고 처음엔 울기도 많이 울었다. 아내는 자신이 몸 관리를 못했다면서 스스로 원망도 했다. 하지만 의사가 신의 영역이라고 한 것은 우리에게는 희망이었다. 하나님의 영역이기 때문에 우리 예지는 누구보다 건강하고 정상이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예지는 지금 기도와 감사로 잘 자라고 있다. 비록 작게 태어났지만 지금은 또래보다 키도 크고 더 밝고 건강하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이 조그만 아이에게 베푸신 기적이 너무나 놀랍고 감사하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 부부의 마음을 강하게 붙잡아 주시고 우리 딸을 지켜주셨기에 우리 가정이 존재한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예지를 통해 아픈 아이들과 그 가정의 고통을 조금이지만 알 수 있다. 그래서 난치병을 가진 아이를 둔 가정에 희망을 전달하고 힘내시라고 말하고 싶다. 하나님은 치료의 하나님이시고 기적의 하나님이시다. 이 좋으신 하나님을 그들도 꼭 알고 만나게 되길 소망한다. 우리 가정에서 일어난 기적이 다른 가정에도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박진희 집사(강서대교구) -

죽음도 막지 못한 자유, 탈북은 하나님 주신 기적

두 차례 한국행 시도 실패로 공안에 잡혀 북한 압송
복음 통해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 깨달아

 나는 북한에서 예술전문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국가가수로 소련 중국 등 해외공연에 참가했다. 또 김일성 김정일을 위한 국가 행사와 공연에도 다수 참가했다. 내가 활동했던 당시는 ‘온 사회를 김일성 주체 사상으로 일색화하자!’는 구호가 거리 곳곳에 걸려있었다. 김정일에 의해 김일성을 우상화하는 충성 맹세 작업이 가장 최고조에 올랐던 때였다. 그때 내 나이는 20대 중반이었다. 공연단으로 활발히 활동했던 나는 군인과 결혼했고 남매를 낳아 단란한 생활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큰 사건에 연루되면서 목숨을 잃게 됐다. 젊은 나이에 살 길이 막막했던 나는 어린 딸만 등에 업고 1998년 하반기 두만강을 건너 중국 땅에 도착했다. 조선족 가정에서 몇 달간 딸과 머물렀지만 우리 모녀가 마음 편히 쉴 곳은 없었다. 다행히 주인집의 살림을 해주며 가정부처럼 살았다.

 그 당시 새해를 맞이하면서 북한 탈북민은 물론 불순한 자들을 잡아들이는 중국 공안의 대검거가 시작됐다. 그때의 살벌했던 공포를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더 이상 머무는 것이 불가능했다. 주인집의 도움으로 남쪽으로, 그리고 더 남쪽으로 내려와 한국인 회사에 화식모(식당에서 일하는 사람)로 취직했다. 딸아이를 키울 수 없어 딸을 동북의 한 도시로 보내 위탁 공부를 시켰다. 그 시기 딸은 위탁 가정의 부인을 따라 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나를 만나러 오는 딸은 주일만 되면 함께 교회에 가자고 졸랐다. 딸을 따라 한국인 교회에 갔는데, 그 날이 새신자를 위한 잔칫날이었다.

 성도들이 나에게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찬양을 불러줄 때 내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는 것과 반드시 살아야 하는 이유를 깨달았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탈북자들이 중국에 많이 몰려들자 중국 공안은 해마다 설을 앞두고 탈북자 색출을 위한 대검거를 실시했다. 나는 오래 전부터 준비했던 한국행을 결심하고 2003년 초 북경에 있는 한국대사관에 진입했지만 실패했다. 다시 상해 한국영사관 진입을 시도했지만 이마저도 실패하면서 딸과 함께 그만 중국 공안에 체포되고 말았다. 2003년은 탈북자들이 그 어느 해보다 한국행 시도를 많이 하고 또 북경에서는 탈북민이 대량으로 잡혀 북송되던 무서운 해였다. 상해 감옥에서 20여 일 갇혀 있는 동안 나는 잘 하지도 못하는 기도를 하며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간구했다. 북송되면 선택의 여지없이 정치인 수용소에 가거나 죽음을 당해야 했다. 엄마로서 딸에게 닥칠 불행이 무서웠다. 필사적으로 하나님께 매달렸다.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드리는 기도는 진실하고 간절했다.

 그러자 도움의 손길이 임했다. 중국 측 인사가 우리에게 대사관 진입 시도로 잡힌 것이 아니라 중국 식당에서 일하다 잡힌 것으로 내용을 바꿔 그 서류를 북한 관계자에게 넘긴 것이었다. 그해 12월 초 우리는 지옥과 같은 북한 감옥에서 꿈같이 풀려났고, 2004년 3월 다시 북한을 탈출해 중국을 거쳐 2005년 3월 나 먼저 제3국으로의 탈출에 성공했다. 그리고 마침내 2006년 5월 자유의 땅 남한에 안기게 됐다.

 죽음도 막지 못한 자유, 남한으로의 도착은 나를 선택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과 기적의 역사였다. 지금 3만 명의 탈북자가 이 땅에 왔지만 이 곳에 오기 위해 너무나도 많은 이들이 중국과 제3국에서 죽어간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이후 딸은 무사히 남한에 올 수 있었고, 한국 외국어대를 졸업하고 현재 미국 영주권자로 그 곳에서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있다. 상상할 수 없는 아픔이 있었지만 이 땅을 밟을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예비하심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였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이끌어주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셨다.

 바라기는 북한에 있는 아들도 머지않아 주님의 자녀로 이 땅에서 함께 살길 기도한다. 하나님을 만나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나는 주님의 딸로서 주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북한 복음화와 통일을 위해 기도하는 삶을 살겠다.


황수연 안수집사(동작대교구) -

“감사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젊은 시절 결핵 자연치유 후 폐섬유증
암 의심 상황에서 기도하니 응답 받아

 나는 젊었을 때부터 감기에 걸리면 잘 낫지 않고 기침을 한번 시작하면 오랫동안 해댔다. 그러던 중 올해 초 더 심해진 기침 증상으로 동네 의원에서 처방을 받아 일주일동안 약을 먹었고 많이 호전 되는 듯했다. 그런데 지난 3월 4일 금요성령대망회에 참석하기 위해 평소보다 일찍 교회에 나와 간절히 기도를 드리고 일어서는 순간 가슴에 견딜 수 없는 심한 통증이 몰려와 주저앉고 말았다.

 한참을 가슴에 손을 대고 ‘주여!주여! 살려주세요’라고 기도를 하는 중에 통증은 서서히 사라졌다. 16년째 교회에서 교통봉사를 하는 나는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봉사를 하고 예배도 드리고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튿날 바로 병원으로 가서 검사를 했다.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이를 보자마자 병원 원장님이 큰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좌우 폐가 심하게 손상 되어 있고 우측 폐는 3분의 1정도가 없어진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좋지 않은 줄은 몰랐기에 내 눈을 의심했다. 하지만 어떠한 상황에서도 감사하면 하나님께서 좋은 일로 바꿔주신다는 것을 많이 체험했기에 나는 곧바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제 폐가 저렇게 심하게 손상되고 일부가 없는데도 지금까지 저를 살려주신 은혜에 감사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평소와 다름없이 주일 새벽 교회에 나가 봉사를 했고 월요일인 3월 7일 오전 일찍 종합 병원 호흡기 내과 진료를 받고 바로 입원했다.

 담당 교수님은 젊었을 때 자신도 모르게 결핵이 생겼다가 자연치유 된 경우 이처럼 폐가 굳어지는 현상이 나타나 폐섬유증이나 암이 발생한다고 하셨다. 정밀 검사를 하고 어쩌면 수술을 해야한다고 말씀하셨다. CT촬영 등 모든 검사를 마치고 담당 교수님은 우측 폐가 유착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며 수술 일정을 서둘러 잡아주셨다. 유착이 되었다면 수술 절제 부위도 커질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수술을 앞두고 누구보다 나를 잘 아시고 내 몸을 잘 아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싶었다. 응답 받을 때까지 수술을 보류하고 입원 중인 몸이지만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말씀을 붙들고 묵상을 했다. 묵상 중 환상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셨다. 성경이 펴져 있는데 그 위에 병따개가 놓여있는 모습이었다. 수술을 하라는 하나님의 응답임을 확신했다. 하나님께서 이 수술로 병을 고쳐주시고자 한다는 것에 감사하며 기도했다. 이어 하나님께서는 환상으로 가득 쓰레기가 들어있는 통을 보여주셨는데 쓰레기통을 말끔히 비워 깨끗이 치료하겠다는 뜻으로 느껴졌다.

 응답을 받아 담대한 마음으로 수술에 들어갔다. 수술 전 담당 의사는 폐 상태와 폐 중앙부위에 하얀 콩알만한 것이 보여 암인지 여부에 대해 알아 볼 것이라고 했다. 암에 대해서 이야기 하시는데도 내 마음에는 조금도 두려움이 없었다. 수술 결과 우측 폐 상단에 약간의 유착이 발견됐다고 한다. 수술을 해서 폐를 펴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하셨으나 나는 더 이상 몸에 칼을 대지 않고 유착된 폐가 고쳐지기를 기도했다. 호흡재활 운동기구로 입술이 부르트게 노력했지만 시간이 지나도 폐가 펴지지 않아 결국 수술대에 올랐다. 그런데 옆구리와 허리에 소독을 하던 의료진이 한참을 기다려도 진행을 하지 않더니 시술을 하지 않아도 되겠다며 그냥 수술실 밖으로 나를 보냈다.

 최종 검사 결과 병명은 폐섬유증으로 나왔고 폐 중앙에 의심되던 하얀 점은 암이 아닌 것으로 판명됐다. 완쾌 후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교통실 봉사에 임하고 있다. 병상에 있는 동안 나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며 도와주신 고마운 교회식구들이 많다. 동작 3교구 봉종광 목사님과 성도들, 남선교회 이명로 교통실장님과 전 회원들 등 많은 분들이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셨다. 나는 앞으로도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봉사하며 살아가고 싶다.    


김경애 집사(영등포대교구) -

포기하지 말고 기도해야 하는 이유

유교전통의 완고한 부모님 구원 위해 간구
하나님 정하신 때에 응답하고 기적 베푸셔

강한 유교집안에서 평생을 살아오신 부모님은 나와 동생들의 신앙생활을 반대 했다. 그래서 그런 부모님을 전도한다는 생각을 쉽게 하지 못했다. 그러다 20년 전 교구식구의 장례예배에 참석했는데 일반적인 장례식장 분위기와 달리 은혜가 넘치는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다. 바라기는 우리 부모님도 천국으로 인도하고 이렇게 가족들이 모여 천국환송예배를 드리면 좋겠다는 소망이 생겼다. 그래서 그날부터 부모님을 위한 기도를 시작했다. 7년 전 어머니에게 약물성 치매가 찾아왔다. 평생을 온유한 성격으로 살아온 어머니는 돌발행동과 거친 말들로 가족들에게 상처를 주고 힘들게 했다. 

 하루는 어머니와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하는 중에 성령님이 ‘어서 어머니를 구원시켜라’는 음성을 주셨다. 당황스럽지만 성령님의 말씀에 순종해 어머니에게 “제 말을 따라서 해보세요”라며 결신기도를 시켰다. 처음에는 잘 따라하는 듯했는데 평생 험한 말 한 번 안하셨던 어머니가 험상궂은 표정으로 욕을 하며 화를 내는 것이 아닌가. 너무 놀랐지만 어머니를 달래며 단 한번만 해달라고 졸라 겨우 결신기도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기회만 되면 성경 속 이야기도 들려주고 찬송도 들려드렸다. 눈으로 보기에는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어 보였지만 동생들과 함께 기도하면 할수록 어머니의 구원에 대한 확신이 생겼다. 그래서 성찬주일에 떡과 포도주를 가져다 아버지 몰래 어머니가 성찬에 참여할 수 있게 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 날 이후로 어머니가 우리가 기억하는 온유하고 착한 예전의 모습으로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기억도 온전히 돌아오면서 그동안 못했던 어머니와 진솔한 대화도 하면서 그 간의 어려움이 씻겨지는 듯했다.

 그 날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어머니는 찬송을 참 좋아하셨다. 그 날도 눈을 감고 찬송을 듣고 계셨다. 그런데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떠시면서 쫓기는 표정을 지으시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셨다. 너무 놀란 난 동생들과 지구역장들과 함께 간절히 어머니를 위해 기도했다. 1시간 기도했을까 그 때서야 고통에 일그러졌던 어머니가 배시시 웃음을 지으며 편한 자세로 누우셨다. 그리고 다음 날 어머니는 너무나 행복한 모습으로 천국으로 가셨다.

 어머니를 천국으로 모셨다는 안도감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아버지가 예상치 못한 폭탄선언을 하셨다. “장례는 경애네 교회 식으로 하겠다” 나는 물론 동생들도 사전에 얘기된 바 없었고 예상조차 못했던 일이라 깜짝 놀랐다. 그렇게 내가 20년 전부터 꿈꾸며 기도했던 그 장면이 실현된 것이다. 온 가족이 모여 어머니의 천국환송예배를 드렸다.

 우리 가족이 어머니의 치매로 힘들어 할 때 우리 가족을 도와주었던 이계화 집사님의 섬김과 사랑 그리고 장례예배에 함께 와서 예배드리는 교구 식구들의 모습에 큰 감동을 받으신 듯 했다.

 그후 한 달 뒤 아버지는 나를 따라 우리 교회에 출석하시고 새신자교육도 수료하셨다. 아버지는 1년이 넘도록 단 한 주도 빼놓지 않고 주일성수하셨다. 아버지는 특히 이영훈 목사님의 설교를 좋아하셨다. 그래서일까. 아버지는 이영훈 목사님이 요셉의 장례를 주제로 한 주일설교를 끝으로 들으시고는 그 날 저녁 어머니처럼 평안한 자세로 천국으로 가셨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자녀들은 이전보다 더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됐다.  

 나는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을 계획하고 이끄셨음을 분명하게 확신하게 됐다. 바라기는 부모 혹은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는 분들이 절대 포기하지 말고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때에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나 또한 남은 오빠네 가족들을 위해 계속 기도할 것이다. 할렐루야.           

      정리=정승환 기자

 


장태영 안수집사(구로대교구) -

내 삶을 인도하신 치료의 하나님

 오래 전 나는 모 회사 입사시험을 보기 위해 상경했다가 당시 돈 6000원이 없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오갈 데 없는 신세에 처한 적이 있다. 도움을 구할 사람도 없어 궁여지책으로 구걸도 해봤다. 그러다 무슨 오해를 했는지 경찰서로 신고가 들어가 경찰에 붙잡혀 조사를 받은 적도 있다. 그렇게 막막하기만 했던 내 인생에도 하나님은 찾아오셨다.

 1990년이었다. 모 대기업에 입사하게 된 후 인쇄기술을 연마하며 생활을 이어갔던 그 때 빨간 가방을 든 아주머니를 만나게 됐다. 내게 쥐어준 것은 ‘행복으로의 초대’란 전도지였다. 한 번 읽고, 두 번 읽고 하다 보니 어느새 빼곡히 적힌 글들이 내 마음에 들어왔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렸을 때 시골에서 자라왔던 나는 예수님이 누군지, 하나님이 뭐 하시는 분인지도 모른 채 시골을 누비는 촌놈에 불과했다. 그러다 서울 숙모가 운영하는 홍대 인근 서점에서 일을 배우며 숙모가 다니는 교회를 따라 예배를 드리게 됐다. 지금이야 당연한 것이었지만 매 주일 예배를 드리는 것과  끼니마다 기도하는 것이 참 어색했다. 그러다 군대를 가게 됐고 좋은 선임을 만났다. 당시 군종이었던 선임은 부대 내 교회로 인도하고 어렵고 힘들 때 좋은 위로의 말을 해주어 인간적으로 잘 따르고 마음도 편안해짐을 느꼈었다.

 그 때의 평안함이 떠오르면서 나도 모르게 여의도순복음교회로 발걸음이 옮겨졌다. 주일예배는 물론 주일철야예배도 참석하면서 매 예배가 즐거웠다. 지금 담임목사님이신 이영훈 목사님이 당시 철야설교를 하셨는데 하는 말씀 족족 내게 하시는 말씀처럼 느껴져 큰 은혜를 받았다. 말씀으로 은혜를 받으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눈에 들어온 것이 햐얀 옷을 입은 봉사자들이었다. 그 때는 남선교회가 무엇인지 봉사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저 “저도 하얀 옷을 입고 싶습니다”라는 말이 먼저 나왔다. 그렇게 남선교회 봉사실에서 봉사를 시작했다. 근데 봉사를 하기 전 봉사자는 믿음이 필요하다고 들었다. 나는 믿음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봉사를 시작하면 마냥 기쁘기만 할 것 같았는데 그런 생각도 잠시 나는 허리통증과 무릎통증이 함께 와서 큰 어려움을 겪었다. 아픈 다리와 허리를 부여잡고 인근 병원에 가서 치료도 받아봤지만 차도가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통증은 더욱 심해졌고 봉사는 물론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 때가 되어서야 매주일 교회에서 듣던 말씀들이 생각났다. 예수님이 늘 병자들을 고쳐주셨음을 기억해냈다. 그래서 교회에서 배운 대로 하나님께 의지하기로 작정하고 기도처에서 40일 작정기도를 시작했다. 성경의 말씀처럼 기도하면 허리와 무릎에 통증이 치료받을 것이라 확신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안수기도만 받으면 무조건 나을 것 같다는 믿음이 생겼다. 실제로 엄태욱 목사님이 그 때 우리 기도처를 찾아와 예배를 인도해주셨는데 그 때 나는 엄 목사님께 매달리다시피 안수기도를 요청했다. 엄 목사님은 내게 안수기도해주셨는데 그 즉시로 통증이 떠나가버리고 지금까지 건강하게 봉사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 후 하나님께서는 내게 힘을 주셔서 아무리 피곤하고 고단하여도 철야예배 후 이어지는 새벽기도에도 참석할 수 있는 새 힘을 주셨다. 매주일 그 힘에 의지해 예배를 드리고 여름이면 오산리 기도원 금식성회도 참석하며 은혜를 누릴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오갈 곳 없던 나를 하나님은 지금까지 지키고 보호하시고 이끌어주셨다. 그 은혜에 감사하며 날마다 이사야 41장 10절과 시편 23편을 묵상하며 오늘도 주님이 주시는 평안함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고백한다. 할렐루야!     

 


투루카나 임연심 굿피플 미션스쿨

아프리카 맘(Mom)의 꿈으로 지은 투루카나 임연심 굿피플 미션스쿨
가난과 굶주림, 절망 가득한 아프리카에
여의도순복음교회·굿피플 희망과 꿈을 심다

 아프리카 케냐 최북단에 위치한 투루카나에 사는 사이몬 에페텟. 올해로 투루카나 ‘임연심 굿피플 미션스쿨’의 최고학년이 된 그는 늦게까지 교실에 남아 깨알같이 필기한 노트와 책을 들여다본다. 낮에는 50도 가까이 오르고 밤에는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기온이 ‘뚝’ 떨어지는 등 공부에 집중하기 어려운 환경이지만 책을 읽는 그의 표정은 밝기만 하다.  
 “여기서 공부할 수 있어 너무나 기쁘고 행복해요”
 4년 전만해도 사이몬의 손에는 책이 아닌 숯이 들려져 있었다. 부모가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나고 형과 함께 살아가야만 했던 그는 숯을 만들어 생계를 이어가야 했다. 더운 아프리카의 날씨에 종일 땀을 흘리며 숯을 만들어 팔아야 겨우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었다. 가녀린 손과 팔에는 숯을 만들다 생긴 수많은 화상으로 인한 흉터만 가득했다. 사이몬뿐만이 아니었다. 투루카나는 어른이나 아이나 할 것 없이 가난, 굶주림과 사투를 벌여야 하는 땅이다. 투루카나는 케냐의 최북단으로 수단과 에티오피아 세 나라의 국경선이 맞닿아 있는 지역으로 아프리카에서도 대표적인 오지다. 수많은 사람이 지금 이 시간에도 굶어 죽는다. 영양실조에 걸린 아이들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1984년 7월 투루카나에 한국인 여성 임연심 선교사(사진 왼쪽)가 이 땅을 밟았다. 가난하고 굶주린 아이들을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가난과 굶주림을 이 땅에서 없애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굶주림을 채워줄 먹을 것이 아니라 교육이다”
 그녀는 이곳의 아이들을 위해 ‘킹스 키즈 유치원’을 설립했고 나아가 이 아이들이 더 큰 꿈을 펼칠 수 있도록 중븡고등학교를 설립하겠다는 꿈을 꾸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꿈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2012년 8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녀의 꿈은 그대로 사라지지 않고 여의도순복음교회와 (사)굿피플 인터내셔널이 이어 받아 2013년 투루카나 사막 한 가운데에 그녀의 이름을 딴 ‘임연심 굿피플 미션스쿨’을 세웠다. 현재 지역 아이들 약 200여 명이 학교에서 생활하며 공부하고 있다. 학교는 8개동 건물이 있다. 교실, 과학실, 도서실, 다목적홀, 교사 숙소 등을 갖추고 있으며 이 곳 아이들의 안전하고 따뜻한 울타리가 되어주고 있다. 2014년도에 개교한 이래 한 학년에 1개 반, 40명 정원이다. 현재 4학년은 24명이 재학 중에 있고, 다가오는 11월 대입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 중이다. 사이몬도 그 중 한 명이다. 사이몬은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 중 하나다. 그에게는 분명한 꿈이 있기 때문이다.

 “아빠는 결핵으로, 엄마는 말라리아에 걸려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저는 의사가 돼서 아픈 환자들이 없도록 하고 싶어요. 저와 같은 아픔을 다른 아이들이 겪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게 제 꿈이에요”
 일찍이 임연심 선교사는 이 땅을 바꿀 희망을 아이들에게서 보았다. 그래서 고아들을 모아 먹이고 재운 것 뿐 아니라 가르치고 꿈을 심어주었다. 임 선교사는 ‘맘’(Mom)이라 부르며 따르던 그 아이들이 가난과 굶주림의 땅 투루카나를 희망의 땅으로 바꾸는데 앞장서고 있다. 임연심 굿피플 미션스쿨의 선생님으로, 혹은 후원자로 자신들과 비슷한 환경의 또다른 아이들을 돕고 있는 것이다.
 아직도 전 세계에는 투루카나와 같이 가난과 굶주림 그리고 다른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절망과 고통 속에 살아가는 우리의 이웃들이 있다. 이런 이웃들을 위해 여의도순복음교회와 굿피플은 이천년 전 예수님이 그러하셨듯이 손을 내밀고 사랑으로 품을 것이다.


박성룡 집사(용산대교구) -

뇌출혈로 죽음의 위기에서 새생명 얻어

금요철야예배 때 중보기도 받고 기적 체험 
어머니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께 감사

 나는 예수님을 만나고 삶이 180도 달라졌다. 7년 전 쯤이다. 양식 주방장이었던 나는 교회에 다니게 되면서 신앙의 갈등이 생겼다. 주일에 교회를 가고 싶은데 일을 해야 해서 못가는 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주일성수를 위해 내 가게를 열어 식당을 시작했다. 하지만 막상 식당 주인이 되고 보니 가장 수입이 많은 주일에 문을 닫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익을 포기할 수 없어 장사를 주일에도 계속 했다. 어느날 음식 준비를 하려고 재료를 들고 들어가는데 “네가 나를 잊었구나. 네가 나를 떠나서 얼마나 행복하게 살려고 하느냐”하는 주님의 음성이 들렸다. 나는 너무 놀라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어머니는 돈이 중요한 게 아니라며 주일을 온전히 지키라고 강하게 말씀하셨다. 나는 대답은 했지만 또 주일 영업을 계속 했다. 얼마 후 뒷머리가 벌레가 기어가는 것처럼 간지럽더니 찌릿찌릿했다. 나중에는 두통이 너무 심해져 장사를 접어야 했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에 자고 일어났는데 몸이 너무 이상했다. 발을 지탱할 수도 없고 서있을 수도 없었다. 걸으려고 하
면 그냥 쓰러져버렸다. 너무 놀라 아내에게 전화를 해 앰뷸런스를 불러달라고 하고 전화를 끊으면서 의식을 잃었다.

 내 병명은 뇌출혈이었다. 응급실에 도착해 수술하려고 했을 때는 이미 머릿속으로 피가 뿜어져 나왔고 끊어진 핏줄을 찾지 못해 수술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때가 우리 교회 대성전 금요철야예배 시간이어서 내 상태가 긴급 중보기도 제목으로  올라가 전 성도들이 함께 기도해 주었다. 권사님이신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고 계셨다. 어머니는 “네 아들은 살려줄테니까 걱정하지 마라 염려말고 오늘 내 약속을 믿고 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내가 의식없이 누워 있을 때 어딘가를 걸어가는 환상을 보았다. 찬양소리가 들려 천국이라 생각했다. 아름다운 길을 걷고 있는데 기도 소리도 들려왔다. 나중에 들어보니 의사는 머릿속으로 피가 터졌는데 살아있다는게 기적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머릿속에 고인 피는 약으로 말렸지만 이미 내 상태가 너무 안좋았다. 의사는 살아도 평생 기억이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며 지금 상태로는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어린 두 아이를 두고 내가 이렇게 되자 아내는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려 기도했다.

 혼수상태로 누워있던게 한달 반, 그 후 의식이 돌아온 나는 예전과 다른 사람이 돼있었다. 간호사 뺨을 때리는 등 거칠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일삼았다. 정신이 이상해지는게 이렇게 무서운 건지 몰랐다. 기억도 못하는 상황에서 내 의지와 상관없는 행동들이 나오니 기가막힐 노릇이었다. 눈빛이 흐릿하고 검은 눈동자도 따로 움직였다. 어머니는 내가 쓰러졌을 때부터 퇴원할 때까지 새벽 2시에 교회에 가서 나를 위해 밤새워 울며 기도했다. 

 1년 후 퇴원했는데 의사의 말대로 내 아이들도 알아보지 못했다. 퇴원하고도 한 달에 한 번씩은 온 몸이 아프고 정신이 없어  일어나질 못했다. 이후 두 번을 더 입원할 정도로 몸이 안좋았다. 나는 점점 폭력적이 됐다. 애들이 조금만 시끄럽게 하면 때리고 던지고, 아내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머니와 아내는 이런 나를 위해 늘 기도했고 그 간절한 기도가 응답돼 6개월 후 정신이 돌아왔다. 오랜시간 누워만 있다보니 허리디스크가 왔지만 교정을 받아 건강해졌고 나는 하나님께 너무 감사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싶었다. 2년 전 교회 신문을 보던 중 교회 미화를 담당하는 직원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지원해 열심히 일하고 있다. 일하면서 내 건강은 더욱 좋아졌다. 지난해부터는 미가엘찬양대에서 봉사하고 있다. 치료의 하나님, 나를 이끄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날마다 감사가 넘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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