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양순·박동률 집사(마포2대교구)-

죽음의 순간에서 이영훈 목사 기도 후 살아나

전립선암 치료 도중 급성 폐렴으로 응급실 행
기도하던중 하나님이 남편의 치유 확신 주셔


 남편이 전립선암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2013년이었다. 건강검진에서 이상 소견이 발견되면서 남편은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간단하게 끝날 것으로 예견했던 것과는 달리 암이 임파선으로 전이 돼 수술은 예상 시간보다 길었다. 걱정했지만 집도의 선생님으로부터 임파선으로 전이된 암세포가 더 이상 퍼지지 않고 한 곳에 모여 있었다는 얘기를 듣고 감사했다. 2주간 입원해 있다가 퇴원한 남편은 그 후 호르몬치료를 받았다. 1년 넘게 치료했지만 차도가 없어 항암치료로 바꾸고 지난해 여름까지 5차례  진행됐다.

 그러던 지난해 8월 남편의 입안이 하얗게 헐었다. 물 한 모금조차 넘기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워하던 남편은 결국 8월 16일 신촌 세브란스병원 응급실에 입원했다. 고열에 혈압이 올라가면서 중환자실로 옮겨진 남편은 폐렴 진단을 받게 됐다. 그리고 일주일 후 체내 산소 수치가 급격히 떨어지면서 갑작스레 혼수상태가 왔고, 생사의 갈림길에 놓이게 됐다. 엑스레이를 찍었더니 폐가 새까맣게 보였다. 의사는 2∼3일 안으로 깨어나지 않으면 살 가망이 없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교구 담당 정규태 목사님과 교구 식구들에게 기도를 부탁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나에게 ‘3년 반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던 이스라엘 땅을 위해 엘리야 선지자가 기도할 때 손바닥만한 구름이 떠올라 비가 내리게 된 것’과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에 생기가 불어넣어지면서 살아난 사건’의 말씀을 주셨다. 그리고 기도하는 가운데 이영훈 목사님의 심방을 부탁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알릴 방법이 없었다. 다행히 우리의 사정을 아는 한 장로님이 목사님께 남편의 소식을 알려 이영훈 목사님이 30일 주일에 심방을 오셨다.

 목사님이 심방 오시기 전 새벽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은 내 입술에서 새찬송가 216장 찬양이 흘러나오게 하셨다. “만 가지 은혜를 받았으니 내 평생 슬프나 즐거우나 ∼” 나는 하나님께 남편을 살려주시면 주님을 위해 살겠다고 기도했다. 그리고 그 날 이영훈 목사님이 병원으로 심방을 오셔서 남편 박동률 집사를 위해 간절히 기도해주셨다.

 목사님이 다녀가신 후 9월 초,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엑스레이를 찍어본 결과 남편의 폐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의사는 늘 기도하던 나를 보고는 “더 기도해보세요.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아요”라고 했다. 그리고 20일 후 남편은 깨어나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그 후 좋은 간병인을 만나게 해주셨고, 10월 첫 주부터 남편의 재활 치료가 시작됐다. 남편은 10월 24일 아들의 결혼식에도 참석했고, 11월 24일에는 재활 치료의 고통을 이겨내고 퇴원했다. 폐렴을 일으켰던 거대바이러스가 눈으로 전이되면서 왼쪽 눈에 이상 증상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이 또한 하나님이 깨끗이 치료해주셔서 실명 위기를 넘기게 하셨다. 남편은 현재 18층까지 혼자 계단을 올라갈 정도로 건강을 회복했다. 호흡기내과 선생님은 “죽을 사람이 살아났다. 기적이다”라며 더 이상 병원에 올 필요가 없다고 했다.

 폐렴으로 인해 잠시 중단됐던 전립선암은 비뇨기과 담당 선생님으로부터 희한하게 암 수치가 떨어져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남편의 전립선암이 머지않아 하나님의 손길로 치유될 것을 확신한다. 남편과 나는 아침저녁으로 가정 예배를 드린다. 얼마 전 교구에서는 나에게 회계 일을 맡아달라고 했다. 남편은 ‘나는 다 나았으니 가서 열심히 봉사하라’며 나를 응원해줬다. 남편을 위해 기도해주신 이영훈 목사님과 모일 때마다 “박동률 집사를 살려달라”고 기도했던 교구 성도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다.


이주은 성도(대학청년국 프뉴마선교회) -

나를 기다려주시는 하나님

공동체 사역 가운데 때로는 상처도 받아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 만나는 체험 통해 회복

나는 지난해 11월 임기를 마치고 공동체 리더의 자리를 내려놨다. 리더를 맡기 전 다짐들과 다르게 리더라는 사명 아래 힘든 시간들을 보냈다. 모태신앙으로 자라 특별히 방황이라고 할 만한 일도 없었던 내게 리더의 자리는 지금까지 겪어보지 않았던 비난과 상처들을 마주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 시간을 보내고 난 후 같은 공동체 사람들과 마주치고 싶지도 않았고, 그 때가 떠오를 때면 끝없는 후회와 우울, 좌절 속에 아무 것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물론 그런 내 마음을 솔직하게 하나님 앞에 내려놓아야 한다는 답은 알고 있었지만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랬던 것 같다. 주일마다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데 간절함이 없었다. 기도시간에 기도하지 않았다. 설교를 들었지만 그 어떤 도전도 하고 싶지 않았다. 말씀을 묵상할 때도 하는 둥 마는 둥 시간을 보내기가 일쑤였다. 기도시간 내내 서서 가만히 있는 것이 너무 지루하고 힘들었다. 그래서 한 가지 기도를 시작했다. ‘예수님의 사랑이, 십자가 구원의 감격이 귀로 들어서 하는 게 아니라 깊이 경험해서 가슴에 새겨지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 기도를 매주 반복하면서 꼼짝하지 않는 내 곁을 계속 지키고 계신 하나님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정말 아무 것도 안해도 괜찮은걸까?’라고 자문하는 내게 하나님은 ‘얼마든지 그래도 돼, 내가 너를 기다릴게’라고 말씀하셨다. 문득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에 감격했고 내가 주님을 사랑해서 기쁘게 찬양하고 기도하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그 때부터, 그 기쁨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빼앗기지 않도록 해달라는 찬양의 가사를 기도로 고백하기 시작했다.
 나의 영적 방황이 반 년 가까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매주일 예배시간에 불렀던 한 찬양의 가사가 뜬금없이 내 얘기, 내 고백, 내가 쓴 찬양인 것처럼 느껴졌다. ‘내 백성이 나를 떠나 돌아섰지만 내 사랑이 내 백성을 포기 못하니 내 모든 것 내어주고 나 그들을 얻으리라’, ‘야훼께로 돌아가자 우린 넘어져도 그는 변치 않네. 야훼께 돌아가자, 우린 넘어져도 그 사랑 영원하네’

 지금까지도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모든 것을 다 내어주시기까지 하신, 나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내 머리 위에서부터 쏟아지는 것 같았다. 그 사랑에 나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하나님께로 돌아갈게요”라고 고백하는 그 순간 하나님은 내게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다. ‘세상 모두가 의인이고 너만 홀로 죄인이었다해도, 그래도 나는 너를 위해 이 땅에 왔을 거야. 나는 너를 그렇게 사랑한다. 그게 나의 사랑이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 그게 바로 너란다’

 그렇게 나의 늦은 사춘기 같은 영적 방황은 끝났지만 그 후에 극적인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후에도 나는 예배의 기쁨을 잃어버릴 때가 있었고, 요즘처럼 과제가 많을 때는 기도하기 너무 힘들 때도 있다. 그러나 나는 백 번, 천 번을 도전한다. 오늘도 그 사랑을 새롭게 경험하게 해달라고. 그리고 그 사랑의 기쁨을 잊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그렇게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분명한 음성이 나를 계속 기도하게 만든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다시 하나님께 기도하게 한다. 오늘도 나를 비롯한 모든 크리스천들이 함께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험하고, 그 경험으로 함께 도전하며, 하나님을 예배하고, 또 예배하길 바라고 기도한다.(제11회 홀리스피릿 페스티벌 간증을 정리했습니다


박정미 집사(여의도순복음동탄교회) -

단기선교 중 고질적인 어깨 통증 치유 받아

성령 충만 받고 고통 한순간에 사라져
봉사하며 기쁨과 감사의 삶 살고 싶어

 나는 지난달 대만 가오슝으로 단기 선교활동을 다녀왔다. 처음에는 갈 생각도 계획도 없었지만 중학생인 아들이 선교를 가고 싶어 해 나도 따라 나섰다. 아직은 어린 아들이 걱정되는 마음이 가장 컸다. 그러면서 아이들을 위해서 중보기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나도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단기 선교도 가고 봉사도 하고 싶다는 오랜 바람이 새록새록 생각났다.

 내 삶을 뒤돌아보면 남편을 만나 전도를 받아 구원도 받았고, 여의도순복음교회 장로님이신 시아버지와 권사님이신 시어머님 덕분에 믿음의 가정의 일원으로서 감사한 삶을 살아왔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의 보답이라고 하기도 부족하지만 그저 감사하는 마음으로 여러 삶의 문제를 잠시 접어두고 선교를 가기로 결단할 수 있었다.

 사실 나는 몇 년 전부터 오른쪽 어깨가 너무 안 좋아서 때때로 목까지 통증이 퍼져 팔을 올리지 못할 만큼 고통이 심했다. 일을 하면 정도가 심해져서 누군가 어깨를 꽉 쥐고 있는 느낌에 온 신경이 곤두섰다. 병원에 가서 물리치료도 많이 받았고 약도 계속 처방 받았지만 차도가 없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부터 둘째 아이를 낳을 때까지 미용사로 활동했었고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다. 미용 일을 그만 둔 뒤에도 아이들을 키우면서 회사에 다니며 일을 했는데 워낙 손을 많이 쓰는 일이었다. 병원에서는 근육을 너무 많이 써서 그렇다며 지속적인 치료만 권할 뿐이었다.

 이번 선교여행을 준비하면서도 가장 신경이 쓰였던 부분이 어깨의 통증이었다. ‘혹시 선교팀에 방해가 될까, 선교하러 갔다가 선교지에 폐만 끼치지 않을까’ 진통제를 비롯해 평소 챙겨먹는 약을 꼼꼼히 챙기다 보니 한 봉지가 만들어졌다. 어깨 통증을 어떻게 고쳐야겠다는 생각도 없이 선교에 충실하기만을 바랐다. 도착한 첫날부터 대만 성도들에게 한국의 음식을 소개하고자 김치를 담그는 법을 가르쳐주고 잡채와 김치전을 만들어 대접했다. 다같이 맛있게 식사를 한 후 저녁 성회에 참석했다. 도착하자마자 많은 일을 해서 혹시나 어깨 통증이 시작될까 싶어 약을 찾았다. 하지만 약을 먹지 말고 기도를 해보자라는 마음이 들었다. 현지 성도들과 함께 기도와 찬양을 하면서 기도했다. 그 때 나는 아들의 성령 충만과 방언을 위해서 한참을 집중적으로 기도하고 있었다. 우리 교회 담임인 이성우 목사님께서 기도회를 인도하시던 중 아픈 곳에 손을 얹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이상하게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서 나는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두통이 걷히면서 어깨에서 돌덩어리가 확 빠져나가는 시원한 느낌이 났다. 

 그 때 내 귓가에 ‘내 딸아’라는 희미한 음성이 들어왔다. 엎드려 통곡 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예전에 방언을 받았었는데 내가 의심을 해서 방언이 없어졌었다. 성령 충만을 통해 다시 방언이 돌아오고 무엇보다 마음에 행복이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구름 사이를 걷는 기쁨이 느껴졌다. 마주치는 사람 모두가 예뻐 보이고 귀해 보였다. 그리고 선교 이튿날부터 시작된 미용봉사도 차질 없이 해낼 수 있었다. 파마를 할 때도 기쁘고 가위질을 할 때도 신이 났다. 예뻐지는 모습에 웃음이 번지는 사람들의 얼굴에 내 마음도 환해졌다. 

 감사의 마음은 귀국 후에도 더욱 불타올랐다. 주일에 식당 봉사는 물론 수전 봉사 등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하고 싶어 기쁜 마음으로 찾아서 하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약 없이 살아도 되는 삶에 감사하다. 하나님의 기적에 감사하며 이를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많이 알리고 싶다. 예수님 안에 기적과 치료는 물론 삶의 참 기쁨과 평안이 있음을 꼭 말해주고 싶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봉사하는 삶, 전도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한다


유종춘 집사(마포2대교구) -

가정이 믿음 안에서 바로 설 때 복 주셔

사업의 위기 맞아도 감사의 고백할 수 있는 이유
가장이 앞서 변하니 가정에 대화와 웃음 가득해

 지난달 25일 개성공단이 폐쇄됐다. 입주기업들 대부분이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나 역시도 예외는 아니었다. 개성을 왕래하면서도 남북관계가 다소 불안하다는 걱정을 하긴 했지만 예측보다도 이른 시기에 중단되어 사업상 큰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사람의 방법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생각에 하나님께 매달리기로 작정하고 기도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다. 이런 고난에 앞서 하나님이 나를 새벽기도로, 파더스드림으로 훈련시키시고 위기를 견딜 수 있는 버팀목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이다.

 나는 20기 파더스드림에 참여했다. 당시 나는 큰 딸 대학입학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중이었다. 딸들에게 내가 해줄 것은 기도밖에 없다는 생각에 지난해 11월부터 지금까지 새벽기도를 빼놓지 않고 하고 있다. 새벽기도하면서 내가 파더스드림을 통해 가정의 제사장으로서 바로 설 수 있기를 간구했다. 하지만 파더스드림만 시작하면 바뀔 수 있을 거 같았던 나는 그 것이 큰 착각임을 깨달았다. 1주차가 지나고 2주차, 3주차가 지나갔는데 역시나 마음먹은 것처럼 변하지 않았다. 도리어 딸들과 심하게 말다툼을 하고 아내에게 서로 상처만 되는 말을 하는 등 기대했던 결과와는 전혀 다르게 진행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기보단 새벽에 가서 더욱 열심히 기도하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딸들에게 먼저 사과하니 딸들도 “아빠가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것 아는데도 심한 말이 먼저 나와서 미안하다”며 내게 용서를 구했다. 추운 겨울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루하루 기도의 제단을 쌓아가니 조금씩 변화가 생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내와 함께 사업장을 운영하다보면 자연스레 아내와 부딪히는 일이 많았다. 특히 아내가 내 의견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화도 많이 내고, 가정 일 특히 자녀문제는 아내에게 일임하고 문제가 생기면 아내를 탓하기 일쑤였다.

 파더스드림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내가 했던 일들이 아내와 자녀들에게 큰 상처를 주는 일임을 깨닫고 크게 반성했다. 그래서 파더스드림에서 배운 대로 먼저 아내의 의견을 수용하려고 애를 쓰고 가정의 일에 내가 먼저 관심 갖고 도와주려고 노력했다. 부족하지만 그런 모습에 아내는 “진작 이랬으면 지금까지 싸울 일도 없었지 않았냐”며 핀잔하기도 했지만 내심 기쁜 듯 내가 매일 새벽기도를 나갈 때 자주 따라나서며 함께 가정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딸들도 함께 기도했다. 시키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기도하기 위해 따라나서는 모습에 신기하기도 하고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하기도 했다. 가장이 가정의 제사장으로서 본을 보여야 한다는 말의 의미를 이제야 깨달았다.

 가정에 변화가 찾아오니 하나님의 복이 임했다. 큰 딸의 대학합격소식이었다. 그동안 삼수하면서 마음고생도 심했고 뒷바라지 하느라 나도 아내도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자신이 하고 싶은 꿈을 이룰 수 있게 되어 너무 기뻤다. 그리고 연이어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중소기업이 대기업에 납품을 하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몇 차례에 걸쳐서 테스트와 면접을 거쳐야 하는 등 많은 어려움이 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된 타교회 장로님으로부터 ‘여의도순복음교회에 출석한다니 믿고 맡길 수 있겠다’며 대기업 거래처를 연결해주셨다. 흔히 말하는 ‘빽도 없는’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좋은 거래처를 얻게 된 것은 정말 기적이었다. 가정이 믿음 안에서 바로 서니 하나님의 복이 임하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특히 개성공단 폐쇄로 위기를 맞았지만 앞서 대기업에 납품하게 된 것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하나님의 예비하심이 없으셨다면 꼼짝없이 사업체가 큰 위기를 맞아 흔들렸을 것이다. 감사의 고백이 끊이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오는 파더스드림 21기에는 나는 봉사자로, 아내는 중보기도자로 함께 참여하기로 했다. 가정이 믿음 안에서 바로 설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가정에 복을 주신다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더 많은 가정과 아버지들이 파더스드림을 통해 변화되길 기대한다. 할렐루야!


정리=정승환 기자


신현주 성도(영등포대교구) -

‘마더스드림’ 통해 삶의 기쁨 되찾아

가정 생활로 인해 겪은 우울증과 육체의 질병
신앙생활과 교제 통해 어머니로서의 자신감 회복


 17년 전 이혼을 결심하고 아들은 아이 아빠가 딸은 내가 맡게 됐다. 나는 이혼 후 직장생활을 하면서 심각한 우울증과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고 술과 담배를 하기 시작했다. 딸이 중학교에 올라갈 무렵 이사를 가게 됐는데 아이는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더욱이 숨어서 담배를 피우던 나를 본 이후로는 모녀간 갈등도 깊어졌다. 딸은 중학교 1학년을 겨우 다니더니 중학교 2학년에 올라가서는 결국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 그 후 나는 술과 담배를 더 이상 숨어서 하지 않았다. 내가 방탕한 생활을 하다보니 아이가 학교에 안가겠다고 해도 뭐라 할 수가 없었다. 정신이 쇠약해져 있는 상태에서 나는 육체의 건강까지 잃게 됐다. 갑상선저하증에 허리디스크까지 와서 오후 4∼5시만 되도 피곤했다. 안 좋은 일들이 겹쳐 일어나자 문득 친정엄마가 매일 새벽기도 했던 모습이 떠올라 그 모습을 좇아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가까운 교회를 찾다가 2015년 4월 5일 여의도순복음교회 부활절 예배에 처음으로 나와 예배를 드리는데 조용기 목사님 설교에 눈물이 흘렀다. 내 죄가 선명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러자 자녀들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21살이 된 딸이 가장 먼저 생각나 딸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놀랍게도 4년 동안 집에만 있던 아이가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겠다고 했다. 낯을 가리고 말수가 적은 딸이 사회로 첫 발을 내딛는다는 것과 나의 첫 기도가 응답을 받았다는 것에 하나님께 눈물로 감사의 기도를 드렸고 나는 그 길로 술과 담배를 끊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나의 구원뿐만이 아니라 나를 통해 자녀들 또한 구원받기를 원하셨다. 편의점을 다니던 딸은 문제가 생겨 더 이상 다니지 못하게 됐다. 나는 딸을 부둥켜안고 나도 변화됐으니 너도 교회에 가자고 말했다. 그 일을 계기로 딸은 나와 함께 주일1부 예배를 드리게 됐다. 같이 예배를 드리게 되어 감사했지만 여러 가지 자녀의 문제로 고민하던 중 ‘마더스드림’을 소개 받았다.

 제28회 마더스드림에서 내 마음은 완전히 치유됐다. 세미나 첫 날 큰 하트지에 ‘주님 제가 꿈꾸는 어머니입니다’라는 글을 보자 마음이 뭉클했다. 그날 성경 말씀이 적힌 종이를 받았는데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엡 4:22)라는 말씀이었다. 그 말씀을 보고 나는 새롭게 변화될 수 있다는 큰 용기를 얻었다. 4일 간의 프로그램들을 참여하며 미워했던 남편도 용서하게 됐다. 그 후 후속 모임을 가지며 만난 분들의 따뜻한 웃음이 또 배려가 내 안에 있던 모든 미움을 사랑으로 바꾸어 놓았다. 미움이 사라지자 정신도 육체도 회복됐다. 무엇보다 나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다. 나를 만나러 교회 근처로 찾아오는 아들도 엄마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는 청년부에 등록했다. 평소 나를 알던 사람들도 내 변화에 놀라워하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궁금해 하고 최근 교회에 나오고 있다. 내가 어떤 말을 하지 않아도 나의 변화로 다른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게 된다는 것이 너무 감사하다.

 6월 20일부터 시작하는 제30회 마더스드림은 ‘열매 맺는 삶’을 주제로 열린다. 나는 율동 봉사에 참여할 예정이다. 예배와 봉사를 하며 나는 자녀들이 신앙의 열매 맺고 꿈을 가지기를 계속 기도할 것이다. 앞으로 살면서 또 다시 힘든 일이 찾아올 수도 있지만 두렵거나 무섭지 않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용기를 주실 것을 믿는다. 나는 꿈꾸는 어머니다!

정리=김주영 기자


박경민 집사(반석대교구) -

3살 아이 실명 위기 주님의 은혜로 치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응답받아
성경학교, 파더스드림 통해 순종 배워


 아들 서준이가 3살 때였다. 교회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소꿉놀이용 도자기 주전자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아이는 잠깐 울다 울음을 멈췄지만 눈을 자세히 보니 파편 조각이 박힌 것 같아 병원으로 달려갔다. 마침 한주 전 쯤 눈에 키위 씨가 들어가서 병원에서 식염수로 씻어낸 적이 있던 터라 아이 눈을 수시로 잘 살피던 차였다.

 병원에 가보니 아이의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도자기 파편으로 인해 각막 뿐 아니라 검은 눈동자까지 찢어진 상태였다. 아이 눈에 면봉을 대니 까맣게 변하는 걸 보고 너무 놀랐다. 병원에서는 앞을 못보게 될 것 같다며 24시간 이후에 아이의 상황을 발견했다면 안구를 적출해야 했는데 미리 발견해 안구 적출까지는 안하게 돼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했다. 결론은 수술을 해도 눈은 안보인다는 거였다. 너무나도 예쁘고 밝은 3살짜리 아이가 앞을 못보게 되다니…. 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았다. 

 장모님과 나와 아내, 온 가족이 하나님께 기도하며 매달렸다. 눈 전문 병원으로 서둘러 옮겨 수술을 했다. 24시간 안에 수술을 받을 수 있던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다. 레지던트 의사가 아이의 상태를 봤는데 그에게도 3살짜리 아이가 있던 터라 아버지의 마음으로 수술을 재빨리 진행시켜주었다. 24시간을 넘기지 않고 수술을 하기 위해 전문의가 새벽 일찍나와 오전 7시부터 수술을 시작할 수 있었다.

 아이가 다쳤을 때 장모님이 누구보다도 많이 기도를 해주셨다. 기도하던 중 장모님은 자고 있는 아이에게 하나님이 무언가를 짜서 눈에 넣으시는 환상을 봤다고 했다. 기도가 응답됐음을 확신한 장모님은 아이가 정상으로 회복될 것이라며 희망의 말을 해주셨다. 나도 기도하던 중 “내가 너의 아들을 낫게 해줄게 걱정하지마”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우리 가족은 하나님이 서준이를 고쳐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진행됐고 의사는 아이의 눈이 괜찮을 것 같다고 긍정적인 말을 해주었다. 회복실에 있는 아이의 눈을 가리고 아빠가 보이는지 물었다. 아이는 아빠가 보인다고 말했다. 아빠를 따라해보라고 했더니 아이는 나를 따라 똑같이 흉내를 냈다. 나는 그 순간 감격을 잊을 수가 없다. 하나님이 기적을 보여주신 것이다.

 서준이는 3개월마다 검진을 하는데 아무 이상 없이 건강하게 잘 보고 있다. 지금 6살이 된 서준이는 유치부에서 여전히 밝고 명랑한 아이로 잘 자라고 있다.

 둘째아이 서율이에게 미안한 일이 있었다. 아내가 둘째 아이를 임신한 중에 서준이가 다쳐서 나도 모르게 둘째 때문에 큰애가 다쳤다는 마음을 갖고 서율이를 싫어했다. 지난해 10월에 파더스드림에 참여하면서 서율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번도 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아이와 얘기를 나눠보니 나한테 서운함을 갖고 있었다. 나는 “아빠가 정말 미안해 지금부터 잘할께”라고 얘기하고 꼭 안아주었다. 우리 가족은 더욱 사랑으로 하나가 됐고 아이들은 유치부, 유아부에 다니며 행복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나는 기도에 모두 응답해주신 주님께 감사해 성경학교도 다니며 많은 은혜를 체험했고 주님께 순종하는 것을 배웠다. 나는 세가지 사업을 하면서 늘 주님의 인도하심을 체험하고 있다. 슈피겐이라는 핸드폰케이스를 판매하는 한국 총판을 하고 있고, 아이뎁스 게임단도 운영하고 있다. 또한 조명회사도 하고 있는데 주님의 은혜 속에 사업이 잘 되고 있어 감사하다. 늘 주님이 함께 해주셔서 날마다 기쁨과 감사가 넘쳐난다.


방정인 집사(종로중구대교구) -

황반변성 질환을 치유하신 하나님

절대긍정의 믿음 안고 주께 간구
주일이면 성도들에게 영어성경 강의

 여의도순복음교회를 다니게 된 건 영어 강의 제안 때문이었다. 때마침 교회학교에서 학생들을 위한 창의체험활동반이 만들어졌고, 그로 인해 아이들을 대상으로 매주일 영어성경을 가르치게 됐다. 더불어 2015년 9월부터 지금까지 20개월 째 NIV영어성경 신·구약, 영어회화, 이영훈 담임목사님의 주일 설교 영어판 독해, 문법 등을 3시간 무료로 강의하고 있다. 나에게 있는 달란트를 나눌 때 은혜가 충만해진다는 것을 그동안은 왜 몰랐을까. 주일이니까 응당 교회를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에 주일이 손꼽아 기다려졌다. 말씀을 함께 공부하면서 이영훈 목사님의 설교를 다시 한 번 되새길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행복하다.
 그런 나에게 문제가 생겼다. NIV 영어성경 강의를 시작한지 6개월 째 되던 지난해 2월 경이었다. 이영훈 목사님의 주일설교 영어 요약본을 강의하는데 갑자기 시야가 희미해지면서 글씨가 찌그러져 보였다. 겨우 수업을 마치고 다음날 안과병원을 찾았다. 진찰 결과 ‘황반변성’질병이라고 했다. 의사는 “눈 안쪽 망막 중심부에 위치한 황반부에 변화가 생겨 나타난 시력 장애”라며 “치료를 하지 않으면 시력이 점점 나빠지다가 결국은 실명에 이른다”고 했다. ‘시력이 서서히 저하된다면 이제 NIV영어성경 강의는 어떻게 하지? 계획하고 있었던 해외선교는? 또 영어성경 해설집 작업은? 평생 봉사하겠다는 나의 기도는?’ 청천벽력 같은 의사의 말에 머릿속은 오만가지 생각으로 복잡해졌고, 눈앞은 캄캄했다.

 영어 강의를 들으시는 박충남 목사님이 소식을 듣고 우리 교회 장로님이 운영하시는 JC빛소망안과를 소개해 주셨다. 여기서도 진단 결과 ‘황반변성’으로 판명했고 더 이상의 악화를 막기 위한 주사요법을 추천받았다. 치료도 치료지만 매회 고가의 주사 비용이 부담됐다. 다행히 의료보험공단의 질병 심사에 통과돼 치료비 부담을 덜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2월부터 1개월마다 검사를 받고 주사를 맞기 시작했다. 그리고 8월까지 네 번에 걸쳐 안구 주사를 맞았다. 나는 치료를 받으면서 ‘야훼 라파(치료의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주일이면 항상 3부 예배를 드리는데, 이영훈 목사님이 설교 후 신유기도를 해주시면 두 눈에 손을 얹고 성령의 역사가 임하길 간구했다. 영어성경을 배우는 50여 명의 성도들도 나를 위해 기적을 일으켜달라며 중보기도를 했다.

 기도의 힘은 참으로 놀랍고도 신기하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네 번의 주사 이후 눈의 시력 악화가 중단됐고, 지금까지 주사를 맞지 않고 있다. 예수님의 치유 능력을 100% ‘믿고,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입으로 시인했을 때’ 치유가 일어난 것이었다. 할렐루야!

 나는 또 1년 전에 걷는 것이 힘들 정도로 사타구니와 허리통증이 심했다. 한 걸음 내딛기가 괴로웠지만 ‘이 또한 치유되리라’는 믿음을 품고 기도했을 때 지금은 90% 회복 수준에 이르렀다. 절대긍정의 믿음이 낳은 기적이었다.

 두 가지 질병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된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라’는 주님의 명령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은 글로벌시대이고, 다문화시대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세워주신 이유는 세계 복음화에 대한 사명을 주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도들의 사명이 크다. 우리가 만난 좋으신 하나님을 이웃에게 전한다는 것은 주님의 지상명령이다. 더군다나 우리나라를 찾은 외국인들에게 영어로 주의 복음을 전한다면 얼마나 값진 일이겠는가. 치유의 하나님을 믿고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세계에 전할 수 있도록 모든 이들과 영어 공부에 매진해 기독교 세계화의 밀알이 되길 기도한다.



한지현·이종성 집사(장년부) -

후방 비출혈의 위험에서 딸을 살려주신 하나님

많은 양의 피를 삼켰다 토하기를 여러 차례 
장년부 한 마음으로 중보할 때 ‘기적’ 일어나
 
 올해 1월 말, 장년부 주관으로 열린 여리고 기도회 때였다. 기도회 4일째인 28일 아침, 둘째 아정(5세·사진 엄마 앞쪽)이가 코피를 흘렸다. 원래 코피가 잘 나는 아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아이가 갑자기 ‘가슴이 아프다’며 몇 차례 피를 토했다. 그것도 많은 양의 피를 토했다. 또 코를 통해 피가 쏟아져 덜컥 겁이나 아이를 데리고 동네 이비인후과로 달려갔다.

 의사는 진찰 후 ‘후방출혈 같다’고 말했다. 밤새 아이가 코피를 많이 흘렸는데 피가 코 안에서 목으로 넘어가면서 많은 양의 피를 삼켜 속이 답답했던 것이었다. 의사는 ‘큰 병원으로 가더라도 아이가 감당하기 힘드니 우선 지혈을 해보자’고 해 그 병원에 머물러 있었다. 근데 아이의 몸상태가 급격히 나빠져 의사는 소견서를 주며 대학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집에서 가까운 대학병원 응급실로 갔지만 담당 의사가 휴가를 떠난 상태였고, 응급실에는 레지던트 뿐이었다. 늘어진 아이의 얼굴은 이미 하얗게 변해 있었다. 의사들은 계속 출혈이 나는 곳을 찾았지만 찾지 못해 발만 동동 굴렀다. 후방출혈 위치를 찾는다 해도 수술할 의사가 없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헤모글로빈 정상 수치가 9.5∼12.5인데 아정이는 수치가 점점 떨어졌다. 이마저 피를 한 차례 더 쏟은 후에는 헤모글로빈 수치가 5.4까지 떨어졌다. 5이하로 떨어지면 쇼크로 인해 사망할 수도 있다고 했다. 당황한 의사는 수술이 가능한 병원으로 빨리 옮겨야 한다고 했다. 급한 대로 아이의 진정을 위해 수혈에 들어갔지만 미동도 없는 아이를 보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다급해진 나는 ‘장년부 화요중보기도회 카톡방’에 아정이 상황을 올리고 중보기도를 요청했다. 그 시간 여의도에서 열리고 있는 장년부 여리고 기도회에서는 아정이를 위한 장년부 성도들의 중보기도가 진행됐다. 그런데 30분 후 기적이 일어났다. 수혈 중이던 아이의 의식이 돌아왔고, 출혈이 일단 멈췄다. 옮겨가기로 한 병원에서는 수술 준비를 마쳐놓고 대기 중이었다. 나는 아이를 붙잡고 시편 23편 6절을 외우며 기도했다. 더 이상 출혈이 나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아정이는 수술이 가능한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런데 일단 출혈이 멈춰 수술을 대기한 채 다음 날 아침을 맞이했다. 병원 측은 후방출혈이 드문 일이라며 좀 더 지켜보자고 했고, 다행히 아이의 상태가 호전돼 수술 없이 토요일에 퇴원을 했다. 신기하게도 아정이는 더 이상 출혈이 없어 병원에 가질 않았다. 

 이후 아정이가 감기에 걸려 동네 이비인후과를 찾았다가 그간의 일을 묻는 의사에게 ‘대학병원 의사가 휴가를 떠나 바로 수술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비인후과 의사는 후방출혈 수술이 아이에게는 오히려 위험한 일이라며 수술 안한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말했다. 그 순간 대학병원 의사를 휴가 보낸 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깨닫고 전율을 느꼈다. 하나님은 수술이 아이에게 해가 된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셨기에 미리 손을 쓰신 것이었다. 아정이를 고친 것은 의사도, 우연도 아닌 바로 하나님이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하심을 다 안다면 매일 까무러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이번 일로 나는 중보기도의 위력을 깨달았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고백과 함께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기대감과 자유함을 얻게 됐다. 그래서 더 많은 30, 40세대들이 화요중보기도회에 모여 함께 기도하길 원한다. 분명 우리 가운데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비전을 보게 될 것이다.


정리=오정선 기자

 


김지희 집사(반석대교구) -

췌장암 말기 하나님의 기적으로 회복

조용기 목사 신유 선포에 믿음의 확신
주님과 동행하며 기도하는 삶으로 바뀌어


 1995년 첫아이를 출산하고 6개월이 됐을 때다. 정기 검진을 받았는데 췌장암 말기라는 결과가 나왔다. 암은 전이 되어 병원에서는 치료나 수술조차 못하니 남은 시간 좋은 것 먹고 좋은 곳 다니며 지내라고 했다. 병은 급격히 진행돼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나를 많이 예뻐하신 시어머니가 충격을 받으실까봐 가족에게 알릴 수 없었다. 남편에게 내 뜻을 알리고 아무도 투병사실을 모르게 지방으로 내려가자고 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두고, 울면서 서울을 떠나 충남 서산으로 갔다. 

 신앙이 신실한 시어머니 슬하에서 자란 남편은 신앙심이 깊었다. 남편이 교회에 가자고 했지만 결혼한 후에야 처음으로 교회라는 곳을 가본 나는 신앙이 없었다. ‘하나님이 계시면 내가 왜 아프나. 교회 안다닐 때도 나쁜 짓 안한 나인데 너무하다’는 생각뿐이었다. 피를 토하고 하혈하고 체중이 줄면서 진통제도 소용이 없었다. 너무 아프니까 빨리 죽어야지라는 생각뿐이었다. 고통 속에 실신하기를 반복했다. 내가 내일 모레면 죽겠구나 싶었던 그때도 실신한 상태로 누워있다 정신이 돌아왔다. 남편은 나를 붙잡고 기도하고 있었다. ‘하나님 얘는 하나님도 모르잖아요. 지금 가면 지옥 가는데 차라리 저를 데려가세요’라고 울부짖는 걸 듣고 있으려니 그동안 나에게 한 말들이 거짓이 아닐 것 같았다. ‘남편마저 나 따라 죽으면 우리 딸은 어떡하지’라는 생각에 겁이 났다. 나는 남편에게 말을 건넸다. “여보 하나님이 계시는 곳으로 가자. 당신이 그렇게 좋아하는 하나님 나도 만나고 싶어” 우리는 아이를 어머니께 맡기고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으로 갔다.

 기도원에서는 때마침 부흥회가 열리고 있었다. 첫예배 강사님이 말씀 후 기도하시는데 아픈 사람이 나았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두 번째 예배에서 강단에 서신 분은 조용기 목사님이셨다. 설교를 마친 목사님은 신유 기도를 하시고 “여기 암 말기환자가 왔는데 암이 다 나았다. 오늘 내려가서 축배를 들라”고 선포하셨다. ‘저게 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더니 머리부터 뜨거워지기 시작해 온몸에서 열이 났다. 없었던 식욕도 당기기 시작했다. “여보 나 나은 것 같아. 나 닭도리탕 먹고 싶어” 차를 몰고 금촌 쪽으로 내려가는데 갑자기 화장실에 가고 싶어졌다. 화장실을 가서 소변을 봤는데 나온 것들은 고름덩어리로 가득했다. 남편에게 이야기 했더니 남편은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를 했다.

 식당에서 나는 닭도리탕과 밥을 한 그릇 다 비웠다. 나는 한번만 더 예배 드리고 집에 가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남편은 “이대로 집에 가면 네가 또 의심할테니까 오늘은 기도원에서 자고 내일 병원에 가자. 네 눈으로 확인 시켜줄께”라고 말했다. 우리는 원래 다니던 병원이 아닌 다른 병원으로 갔다. 암이 있을 것 같아 왔다고 하면서 췌장과 전이된 곳들을 검사해달라고 했다. 검사 후 아무 이상도 없고 염증수치만 높다는 결과가 나왔다. 의사 선생님에게 그간의 이야기를 했더니 기적이라고 하셨다. 염증치료약만 처방 받고 그 약을 먹은 후에는 전혀 아무 이상을 느낄 수 없었다.

 암을 극복하고 난 뒤 둘째를 잉태해 귀한 아들이 태어났다. 지방에 있던 우리를 어떻게들 알고 연락이 와서 남편은 대학 교수가 됐고 나는 수학 학원을 운영하게 됐다. 또한 어릴 때부터 여의도와 서산을 오가며 유아부부터 신앙생활을 해온 두 아이는 어느덧 대학교 3학년과 고등학교 3학년이 됐다. 큰아이인 딸은 현재 의대에 재학 중이다. 엄마처럼 아픈 사람을 고쳐주겠다는 마음으로 의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품은 딸은 대학에 수석 합격해 4년 장학금의 수혜자가 됐다.

 하나님의 기적은 치료 후에도 이어졌다. 내가 비로소 진짜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이다. 삶의 여러 가지 시련과 연단이 끊임없이 닥쳐왔지만 그럴 때마다 기도하면 회복됐다. 고난이 오면 감사하라는 것도 처음에는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수많은 고난을 기도로 이겨나가면서 더 큰 축복을 예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다. 나를 살려주시고 기도하는 삶을 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이기석 집사(관악대교구) -

봉사는 하늘의 복을 여는 열쇠

사직 후 부담감에 자존감 상실, 신앙으로 회복하고
봉사하며 섬길 때 더 좋은 길로 인도해 주셔

 나는 지난 4월 모 중학교 축구수석코치직을 사직했다. 막연히 꿈꾸던 고등학교 축구팀을 창단하기로 마음먹고 아내와 함께 100일 작정 새벽기도를 시작했다. 나는 기도만 하면 바로 응답이 있을 것만 같았다. 선교헌금도 작정하고 팀이 생기면 선수들을 전도하리라는 꿈도 가졌다. 친분이 있는 중학교 감독들을 떠올리며 한 명씩만 선수를 받으면 금방 팀을 창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실제 팀을 창단하기 위해 필요한 학교, 선수들을 위한 숙소나 운동자, 차량 등 기본적인 제반사항이 전혀 준비되지 않은 채 그냥 잘될 거 같다는 기대감뿐이었다. 사직 후 처음 일주일은 행복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가장이라는 부담감에 아내에게 짜증을 내고 아이들에게도 화를 내는 횟수가 많아졌고 집밖으로 잘 나가지도 못했다. 결국 고등학교 축구팀 창단을 포기하고 다시 재취업을 목표로 바꿨다. 하지만 우리나라 체육계는 학연이나 지연과 같은 인맥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다보니 적지 않은 나이에 재취업을 시도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런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나는 지난해 가을 제22회 파더스드림에 봉사자로 참여하게 됐다. 당장 일이 없다는 것에 자존감이 떨어져 내가 봉사를 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라는 고민 속에서도 하나님께 모든 것을 내어 맡기고 기도하고 헌신하기로 작정했다. 주일에는 아동2부에서 교사로 봉사도 시작했다. 당장의 환경만 바라보면 답답했지만 하나님만 바라보면 마음에 평안과 감사가 넘쳐났다. 기쁨과 감사가 넘쳐나니 생활에 활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쉬었던 운동도 다시 시작했다. 예배마다 눈물이 쉼 없이 흘러나왔다. 스스로 내가 너무 힘들어서 그런 건가 생각했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사인임을 눈치 채지 못했다.

 올해 봄에도 제23회 파더스드림 봉사자로 참여하게 됐다. 봉사할 여건이 되지 않았지만 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시작했다. 봉사를 시작한 직후.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 코치 면접 제안이 들어왔다. 고등학교 코치를 하다보면 합숙훈련 등으로 인해 다시 가족들과 떨어져 주말부부로 지내야할지도 몰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더욱이 파더스드림 봉사하는 날과 면접 날짜가 겹치면 안되는데 라는 걱정이 앞섰다. 이번 일로 하나 깨달은 것 중 하나가 있다. 하나님은 정말 세밀하게 예비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면접이 수료식 다음날로 잡힌 것이다. 반신반의한 장소에 갔는데 깜짝 놀라고 말았다. 면접관이 우리나라 축구계를 대표하는 분 중 하나인 정해성 감독님이셨다. 감독님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해주셨고 그렇게 올해 4월부터 출근하게 됐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고등학교 팀 창단을 꿈꾸며 바라보며 기도했던 것들이 모두 이루어졌다. 첫째로 당연히 코치로 일하게 될 줄 알았는데 정 감독님이 국가대표 수석코치직을 수락하시면서 협회에 코치가 아닌 감독으로 등록되어 일하게 된 것이다. 둘째로 선교헌금을 작정했는데 작정한 헌금 그대로 할 수 있는 여건이 됐다. 셋째로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선수들을 상담해보니 신앙을 갖고 있었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교회를 못 다니는 아이들이 있었다. 현재 그 아이들을 모두 우리 교회로 인도해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지난 1년간을 돌아보면 감사할 것뿐이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나를 믿고 기도해준 가족들에게도 감사하다. 특히 봉사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 파더스드림 봉사자들에게도 감사하다. 바라기는 많은 분들이 기도하고 봉사하면서 함께 하늘의 복을 누렸으면 좋겠다. 할렐루야.정리=정승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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