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근수 안수집사(강동성전) - 믿음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 응답하셔
담낭에 생긴 악성 종양, 죽음의 공포 속에
수술대에서도 담담히 기도로 주님만 바라봐


 나는 1981년부터 여의도순복음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해 하나님의 은혜로 신앙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올해 초 나는 또한번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다. 교편에서 은퇴한 후 해외여행을 즐기던 나는 언젠가부터 비행기만 타면 항문주변에 큰 고통이 있었다. 때론 혈흔도 있어 여행 중에 심히 걱정하며 한국에 돌아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멀쩡해 병원에 갈 이유를 찾지 못해 그냥 방치했다. 그러다 올해 초에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엄습해 인근 병원을 찾았다. 예상했던 치질을 판정 받았는데 검사 중에 불필요할 거 같은 복부초음파검사를 하기에 이상하게 여겼다. 치질수술을 잘 받고 퇴원을 준비하는 중에 담당의사가 나를 조용히 불렀다. 의사는 “담낭에 큰 혹이 있다. 크기가 크고 악성일 가능성이 있다”며 이 경우 다른 방법은 없고 빨리 절제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예상치 못한 악성종양 이야기에 놀라 “이제 치질수술을 받았고 생각할 시간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나는 대형병원으로 자리를 옮겨 검진을 받았다. 마침 건강검진센터에서도 연락이 와서 사정을 이야기하고 자세한 검진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대형병원에서도 건강검진에서도 담낭에 혹이 있으며 모양도 특이하고 악성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말했다. 평소 담낭에 암이 생기면 죽는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에 덜컥 겁이 났다.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나는 하나님께 한 달간 간절히 기도했다.

 1987년 경 아내가 신장암에 걸려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었다. 그 때는 병원에서 암이 너무 커진 상황이라 손을 쓸 수 없다며 돌아가라고 말했다. 사실상 사형선고인 셈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즉시 아내를 데리고 오산리기도원에 올라가 간절히 기도했다. 정신없이 기도를 하고나니 주위에 목사님들이 함께 기도해주시고 계셨다. 한 목사님은 내게 “기도가 응답됐다”며 계속해서 기도하라고 격려해주셨다. 그리고 다음날 딸로부터 병원의사에게 연락이 왔으니 병원으로 가보라는 연락을 받았다. 의사는 재검진을 해보자고 말했고 기도가 응답됐다는 말씀에 의지해 응했다. 이전 검사결과와 이번 검사결과 사진을 비교하던 의사는 깜짝 놀라며 “암이 줄어들어 수술이 가능할 것 같다”며 즉시 수술을 하자고 말했다. 반신반의하면서도 시작된 수술은 예상시간보다 넘게 오래됐다. 수술을 마친 의사는 떼어낸 신장을 보여주며 “암이 이렇게 컸는데 흔적만 남고 이렇게 축소되어 수술을 잘 마칠 수 있었다”라고 말했고 나는 기도원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의사는 “진짜 기적이 존재하는구나”라며 놀라워했다.

 이런 기적이 나에게도 일어날 것을 분명히 믿었다. 혹시나 심신이 약한 아내가 놀랄까 두려워 가족들과 구역식구들에게도 수술사실을 숨기고 나는 수술대에 올랐다. 마취에 앞서 나는 의사와 간호사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수술대 위에서 10분간 간절히 기도했다. 정말 신기한 것은 하나님께 병을 치료해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와 돕는 모든 의료진들을 위한 기도가 나왔다. 이들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길 바란다는 기도에 의사와 의료진들이 내게 “수술에 앞서 처음 기도를 받았다. 덕분에 마음에 여유가 생긴 것 같다”며 감사했다. 수술을 잘 마치고 검진 결과를 기다렸다. 의사는 수술 전에는 회복에만 일주일이 걸릴 것 같다더니 수술이 잘되었다며 하루 만에 강제퇴원을 시켰다. 실제로 검진결과도 매우 좋아 의심을 버리고 건강한 모습으로 퇴원할 수 있었다. 

 나는 구역장으로 섬길 때도 늘 믿음에 대해 강조했었다. 사람이기에 기도에 앞서 믿음보다 의심이 드는 것이 당연했다. 그 때마다 난 ‘될까?’라는 생각보다 ‘무조건 된다’는 생각으로 기도했다. 이영훈 목사님의 절대긍정, 절대믿음, 절대순종을 떠올리며 믿음으로 기도했다. 그 때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는 것을 이번 일을 통해 또한번 깨달았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기도해 이와 같은 기적을 체험하길 기도하겠다. 할렐루야!


전종순 집사(영등포대교구) -

하나님의 손길로 모두 건강 회복

난치병 큰딸 위해 수술대 오른 둘째
수술에 대한 두려움 기도의 동역자들 있어 이겨내


 큰딸 수정이가 간외담도가 서서히 녹아 없어지는 난치병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너무 놀라 말을 잃었다. 왜 이러한 병이 착하기만 한 내 딸에게 찾아 왔는지 이해할 수 가 없었다.

 수정이가 병세를 보인 건 2015년 여름휴가를 다녀온 뒤였다. 수정이의 피부는 벌레에 물린 듯 빨갛게 올라 가라앉지를 않았다. 첫 아이를 출산하고 담낭염으로 응급실에 실려 간적이 있긴 했어도 그 뒤로 별다른 문제는 보이지 않았었는데 피부발진이 생긴 것이다. 곧장 병원에 찾아가 여러 가지 검사를 받았지만 병원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다.

 그러다 지난해부터는 간수치가 오르락내리락 기복이 심해 의사의 권유로 조직검사를 했는데 검사 결과 담도폐쇄증이라고 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나의 마음이 무너지는 듯했다.

 치료약이 없어 여러 약을 사용하고도 간수치가 오를 때마다 절망하는 딸아이의 모습을 볼 때면 가슴이 너무 아팠다. 그동안 사용한 약이 전부 효능이 없자 올해 3월 의사는 딸에게 2주간 병원에 입원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검사를 해보니 간이 돌이킬 수 없이 나빠져 이식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했다. 의사는 수정이가 수술을 받지 않으면 1년 안에 복수가 찰 수도 있다고 말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연년생인 여동생 희정이는 망설임 없이 언니를 위해 검사를 받기로 했다. 만약 희정이가 이식을 해줄 수 없다면 뇌사자를 기다려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다행히 희정이가 공여자로 간이식을 할 수 있다는 결과를 받았지만 내 마음은 편치 않았다.

 두 딸이 수술대에 오를 것을 생각하니 하염없이 눈물만 흘렀다. 그러나 원망보다는 기도가 간절했다. 나의 기도는 물론 다른 사람의 중보기도가 절실해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기도해달라며 부탁했다. 기도는 점점 확장되어 내가 기도를 부탁했던 분이 또 다른 사람에게 기도를 부탁했고 제주도에 있는 사람까지 아이들을 위해 기도해주었다. 교구담당 목사님을 비롯한 권사님 집사님들은 딸이 난치병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순간부터 기도해주셨다. 특히 지역장인 안복림 권사님은 수정이와 희정이의 수술을 앞두고 금식까지 하며 기도해주셨다. 이러한 기도의 동역자들이 있다는 것이 너무 든든했다.

 두 딸의 수술을 생각하면 나의 두 손과 발이 떨렸지만 기도로 하나님이 두 딸과 함께 하실 거라는 믿음만은 흔들림 없이 확고해졌다. 기도의 힘으로 수술절차는 빠르고 순조롭게 진행됐다. 둘째는 직장일을 누군가에게 맡기기 어려워 걱정을 많이 했다. 그런데 다행히 수술이 잡혀있는 5월에는 쉬는 날이 많았고 다른 가정에서 수술 순서를 양보해 원하는 날짜에 수술을 할 수 있게 됐다. 이것뿐만이 아니라 의사는 공여자의 담도가 넓고 혈관도 건강해 아주 좋은 사례에 속한다고 말했다. 할렐루야!

 믿음대로 두 딸은 예정된 시간에 수술실에서 나왔고 둘째는 회복 속도도 남들보다 빨랐다. 수술을 할 때 수정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계속 떠올랐다고 한다. 나를 위해 피 흘리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아픔을 참을 수 있었다고.

 이번 일을 통해 함께 드리는 기도의 힘은 크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다. 앞으로 나의 바람은 수정이도 희정이도 건강한 몸으로 회복돼 다함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두 딸을 위해 기도해 주시는 기도의 동역자들 너무 감사합니다!

정리=김주영 기자

 


관악대교구 글로리아찬양대 “하나님 찬양은 우리의 사명이죠”


섬김과 헌신으로 23년째 찬양 봉사

 “목마른 사슴 시냇물을 찾아 헤매이듯이 내 영혼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후덥지근한 날씨로 나른함이 몰려오는 지난달 19일 오후, 제2교육관 5층 예배실에서는 부드러운 중년 여성들의 찬양이 문 밖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날 모인 40여 명의 여성들은 관악대교구의 글로리아찬양대 대원들이다. 매달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에서 드려지는 대교구 성령대망회의 찬양 봉사를 위해 한 달에 한 번 연습시간을 갖는 이들의 시선은 지휘자 홍옥선 권사의 지휘봉에 집중해 한 순간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기자가 사진을 찍으니 활짝 미소 지으며 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지휘자의 제안에 함박웃음 소리가 예배실을 한가득 채웠다.

 글로리아찬양대(이하 글로리아)는 우리 교회 16개 대교구 중 유일한 대교구 소속 찬양대이다. 글로리아는 1994년 3월 당시 마창수 관악대교구장의 제안으로 교구 성도들을 중심으로 창단됐다. 이들은 대교구의 크고 작은 행사는 물론 기도원 성회, 중국과 대만 등 해외 선교현장을 찾아다니며 음악을 통해 복음을 전해 왔다.
 창단 첫 해부터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는 대원이 5명이나 될 정도로 이들에게 찬양대는 각별하다. 창단과 동시에 지금껏 대장으로 섬겨온 김정희 권사는 “관악대교구에 계셨던 목사님들이 교회 개척 후 창립예배를 드릴 땐 찬양대가 없잖아요. 그런 경우 저희를 불러주실 때가 많았어요. 그 예배에 설 때면 대원들도 개척하신 목사님도, 모두 감격하며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다 함께 은혜를 누렸어요”라고 말했다.

 추운 겨울, 각자 대중교통을 이용해 강원도의 외진 교회에 도착해 철야예배에서 찬양을 부르고 그 이튿날 아침 각자 집으로 돌아갈 때도 있었다. 그렇게 봉사를 마친 후 대원들은 어느 곳에서든 찬양으로 사람의 마음을 열고 복음을 선물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 간절히 기도하며 더욱 하나가 됐다.
 글로리아에게 해체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럴 때마다 교구 소속 교역자들과 성도 그리고 대원들은 기도하며 서로를 다독였다. 재정적 어려움이 있을 때는 십시일반 회비를 모았고, 그래도 부족할 땐 대원들이 직접 오징어, 멸치, 김 등 건어물을 떼어다 시장에 팔아 비용을 충당하기도 했다.

 또 다른 숨은 일꾼들의 헌신도 글로리아의 토대가 됐다. 김정희 권사는 건물 미화원으로 근무하며 받은 한 달 급여로 찬양대복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 권사는 “제가 받은 하나님 은혜에 비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또 2년 전부터 찬양대 지휘를 맡아온 홍옥선 권사는 지금껏 아무런 댓가도 받지 않고 대원들을 섬기고 있다.
 이같은 헌신으로 30여 명이었던 찬양대는 50여 명 규모로 늘어났다. 홍 권사는 “호흡이 있는 자마다 야훼를 찬양하라는 시편 150편의 말씀을 되뇌일 때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사명임을 깨닫게 된다”고 간증했다. 대원들은 “주변의 관심과 기도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서로 합심했기 때문에 지금껏 찬양할 수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대원들의 선한 마음 그리고 뒤에서 말없이 헌신해온 대원들이 있었기에 찬양대의 이름 ‘글로리아’처럼 23년째 영광스러운 찬양을 이어가고 있다.


김경민·김은이 집사(장년부) - “아내의 기도로 제 인생이 달라졌죠”
하나님 의지해 노점상에서 사업가로 성공

 나는 평일철야예배 찬양을 인도하는 ‘기쁜소리 찬양팀’의 총무를 맡고 있다. 낮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밤에는 봉사를 통해 주님을 찬양할 수 있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드린다. 나는 내 인생을 돌아보며 아내의 기도는 남편을 변화시키고 남편이 변화되면 아내의 삶이 바뀐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어렸을 때 가난하게 자랐기 때문에 인생의 목표가 돈을 많이 벌어서 폼나게 사는 것이었다. 2000년에 우리 부부는 지금까지 모은 전 재산을 투자해서 의류사업을 시작했는데 두달 만에 쫄딱 망하고 말았다. 쇼핑몰도 입점하고 나름 괜찮게 시작했지만 기도도 안하고 준비없이 내 생각대로 사업을 한 결과였다. 많은 빚과 현금 40만원만 남았다. 길거리에서 노점상을 시작해 악세사리도 팔고 아동복도 팔았다. 아들이 태어났지만 병원비가 없어 퇴원도 못하는 처지였고, 겨우 퇴원해서도 아내 혼자 집에서 산후조리를 해야 했다. 이런 힘든 상황에서도 아내는 늘 감사하며 열심히 교회를 다녔다. 나는 밥 굶을 걱정에 늘 전전긍긍하는데 아내는 세상 편하게 교회에 가는 것이 싫었다. 몇 년 후 길거리에서 카세트테이프를 팔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해 전 재산 100만원을 모아 장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4일째 되던 날 음반저작권협회에서 단속을 나와 물건을 모두 빼앗아 가버렸다. 벼랑 끝에 몰린 기분이었다. 둘째아이 분유 값도 없고 당장 저녁에 먹을 밥이 없었다. 생각해보니 작은 보험에 하나 가입되어 있는 것이 생각났다. 내가 죽어서 돈이 나오면 당분간 식구들은 먹고 살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자살을 시도했다. 하지만 아내의 기도 때문인지 실패하고 말았다.

 어느 날 아내가 장년부 수련회를 같이 가자고 부탁해 마지못해 따라갔다. 나는 한번도 배워본 적 없는 드럼을 연주하게 됐고 3년간 젊은부부선교회에서 드럼을 쳤다. 정말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했다. 하지만 내 생활은 여전히 배고팠고 생활고에 시달렸다. 나는 이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아내와 집중적으로 기도했다. 그러던 중 하나님이 사업 아이템을 주셨다. 도검을 판매하는 거였다. 누가 봐도 안 될 것 같은 사업이었고 실행이 쉽지도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상품화해서 판매가 시작됐다. 2007년부터 본격적으로 도검을 국내에 유통하게 됐는데 사업이 잘 됐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니 사람들을 만나서 밥사주고 술사주고 하며 인심 좋은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교회에서는 인색했다. 아내가 1만원 헌금하면 화내고 1000원만 내라고 하고 나는 교회에 안나갈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런데 3년 전 어느날 갑자기 사업장에 형사 7명이 압수수색영장을 들고 들이닥쳤다. 나는 합법적으로 사업을 진행한 건데 누군가 신고를 해 조사를 받게 된 것이다. 힘든 법적 싸움이 1년 동안 이어졌고 그 동안 내 인맥으로 생각해온 지인들이 모두 뒤돌아섰다. 하지만 내가 인색하게 굴었던 교회 지역식구들만이 나를 위해 기도해주었다. 나는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느라 여력이 없었지만 장년부 브엘세바찬양팀에서 봉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 때부터 내 사업장의 목표가 ‘폼나게 살자’에서 ‘매달 50가정 후원’으로 바뀌었다. 그 이후로 세상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교회 안에서 10가정을 후원하고 있다.  

 나는 법적 문제를 빨리 해결하기 위해 아내와 기도원에 올라가 얼굴이 퉁퉁 부을 때 까지 울면서 기도했다. 우리 부부는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렸다. 재판에서 마지막 선거공판이 있던 날 판사가 “김경민 씨 당신은 죄가 없습니다. 무죄입니다”라고 말했다. 모든 일이 깔끔하게 해결된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 내 인생의 목표가 “우리 식구 잘 먹고 잘 살자”에서 “세상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데 크게 쓰임받는 사람이 되자”로 바뀌었다.

 늘 어려운 중에도 불평 없이 감사하며 신앙으로 이끌어준 아내 김은이 집사에게 감사하다. 사업은 주 안에서 날로 번창하고 있다. 나는 더 열심히 돈을 벌어 하나님 영광을 위해 쓰임받고 싶다.


영화배우 이성재의 간증                       

                

CTS 내가 매일기쁘게 - 영화배우 이성재의 간증


1. 연기는 아르바이트, 세계선교가 본업(1분 39초)



2. 믿음의 유산이 가장 소중하다. (1분 30초)



3. 한달에 30명을 전도하다. 4. 믿음으로 해보자. [Reference] : 범사에감사, 「연기는 아르바이트, 세계선교가 본업 - 영화배우 이성재 - 베스트 - 갓톡」 http://www.godntalk.com/?mid=best&document_srl=11283.



안종구 안수집사(남선교회 교통실) -

하나님께 감사할게 많아 행복하다

자녀들 건강하고 복 받는 비결은 오직 ‘기도’
남선교회 교통실서 봉사할 때 기쁨·감사 넘쳐

 

남선교회 교통실에서 봉사한지 20 년. 많은 사람들이 힘들지 않냐고 질문한다.

하지만 봉사할 수 있어 기쁨과 감사가 넘쳐난다. 내가 처음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은 나의 사랑하는 가족 때문이었다. 아내와 결혼을 하고 우리 부부는 자녀 갖기를 소망했지만 몸이 약했던 아내는 유산을 거듭했다. 그래서 병원도 다녀보고 한의원에 가서 약도 지어서 먹였다. 그러다보니 신혼집임에도 불구하고 늘 집안이 한약 냄새로 가득했다. 우리들은 늘 약 다리는 냄새로 가득찼던 우리 가정을 안타까워 하던 윗집 살던 구역장님의 인도로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내는 다시 임신을 했다. 병원에서는 아내에게 늘 거동을 조심하고 안정을 취할 것을 당부했다. 그러나 아내는 구역장을 따라 주일예배, 수요예배, 금요철야예배는 물론 기도원에도 따라 나서며 예배란 예배는 다 참석했다. 당시에는 교구버스도 없던 시절이라 시내버스를 몇 번 갈아타야 겨우 여의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아내가 걱정스러워 따라나서기도 했다.

 한번은 순복음소식지 속의 간증을 보게 되었는데, ‘결혼 7년 만에 아이를 갖게 된 이야기’ 등이 실려 있었다. 그런 간증을 읽으며 ‘나도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어보자’라는 마음이 샘솟았다. 그래서 집에 있던 약탕기와 약을 모두 버리고 아내와 같이 하나님께 기도로 의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 부부는 하나님으로부터 건강한 아들을 선물로 받을 수 있었다.

 4년 후 아내는 둘째 아이를 낳았다. 둘째도 아들이었다. 두 아들로 인한 기쁨도 잠시 두 돌쯤 된 둘째가 장출혈이 발생했다. 둘째 아이의 혈변증상이 멈추질 않았다. 중환자실에서 집중치료를 받았음에도 1년 만에 또 재발하고 말았다. 당시는 생활형편도 좋지 않아 우리 부부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월요일 새벽 아내가 아이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소리에 잠을 깼다. 나도 가만있을 수 없어 아이를 위해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고 거두실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아들은 내 아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맡기신 귀한 아들인데 잘 돌보지 못해 아이가 아픕니다. 주님, 제가 지금 회개하오니 치료해주시면 주님 안에서 잘 키우겠습니다”라고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그렇게 기도를 하고 나니 5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이가 조용기 목사님으로부터 기도만 받는다면 나을 거 같다는 믿음이 생겼다. 그래서 기도신청서를 작성해 수요예배 후에 둘째 아이가 조용기 목사님께 안수기도를 받을 수 있었다.

 기도를 받은 후에도 아이는 혈변을 보긴 했지만 이미 아이가 나음을 받았다는 확실한 믿음이 내 마음속에 생겼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 다음날부터 아이의 혈변증상이 멈추고 병원으로부터도 아이가 완전히 나았다는 진단도 받았다. 할렐루야!

 그 두 아들들은 어엿한 가장으로 믿음의 가정을 이루었다. 운영하던 사업장이 화재로 불타 재정적으로 어려울 때 아들들은 장학금을 받아 학교를 졸업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과정에서도 힘든 내색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우리 부부의 자랑이 되어 주었다. 돌이켜 보면 하나님은 우리 가정의 기도를 늘 응답해주시고 행복의 길로 인도해주셨다. 너무나 감사할 뿐이다. 하나님께서 많은 것을 주셨는데 무엇 하나 갚을 길이 없어 하나님께 작은 것이라도 드리고 싶다는 생각에 남선교회 교통실에서 봉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봉사를 하면 주님께서 더 큰 복을 부어주셨다. 그래서 건강을 허락하시는 한 이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바라기는 우리 교회 많은 성도들이 이 복 받는 일에 동참하길 희망한다.            

정리=정승환 기자


정태권 안수집사(신안산교회) -

잃었던 미각을 되찾았어요

병원 치료로는 전혀 고침 받지 못해
믿음의 하나님 바라보며 간절히 기도
치유 바라며 감사예물 드리자 깨끗이 나아



 2014년 4월경 갑자기 미각(味覺)을 상실했다. 사고를 당한 것도, 다른 질병이 있던 것도 아닌 건강에는 자부심이 강했던 나였다. 소금을 먹어도 짜지 않았고, 꿀을 먹어도 전혀 단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며칠 지나면 돌아오겠지’ 했지만 일주일이 지나도 미각은 돌아오지 않았다.

 병원을 찾았다. 이비인후과 전문의는 원인을 확실히 모르겠고, 치료방법 또한 특별히 없다며 “가글 열심히 하고 소염제 처방을 해줄테니 복용하라. 그래도 회복되지 않으면 큰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혹시 못 고치는 병이 아닐까 덜컥 겁이 났다. 진료의뢰서를 가지고 분당에 있는 대형 병원에 예약하고 진료를 받으러 갔다. 시약 검사 등을 받았으나 거기서도 ‘가글액, 소염제 처방’을 해주시더니 보름 후 다시 오라고 했다. 어느덧 미각을 상실한 지 한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내 안에 점점 실망이 커지고 있었다. 병원 로비 난간을 잡고 뒤늦게 간절히 기도했다.

 “전능하신 야훼 하나님! 제가 참으로 죄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서 순종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했으며 물질을 믿고 살아 왔습니다. 세상 유혹에 빠져 살아온 지난 시간을 회개합니다. 용서하여 주세요” 한참을 난간에 기대어 기도하고 있었다. 그때 지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나와 똑같이 미각을 상실한 사람이 있는데 한 대학병원 교수에게 진찰받고 약 처방 받아 3일 약을 복용한 후 미각이 돌아 왔으니 그 교수를 찾아가보라는 것이었다.

 순간 ‘야훼 하나님께서 나에게 치료의 길을 내어주시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열흘 후 그 병원 교수를 찾아 내가 들었던 이야기를 했다. 의사는 당황해하며 그 환자는 운이 좋았던 경우라고 말했다. 병원에서는 소염제 처방을 해줄테니 보름 후 다시 오라했다. 결과는 또 마찬가지. 여전히 미각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또 다시 2개월이 지났다. 약을 먹어도 전혀 소용이 없었다. 그후 1년 2개월 동안 병원에 가질 않았다. 아무런 약도 먹지 않았다. 오직 기도에만 힘쓰고 내가 찬양 봉사하는 교회 중보기도회에 나의 문제를 알리고 기도를 부탁했다.

 그런데 올해 9월 경 하나님께서 나에게 깨우침을 주시는 일이 일어났다. 주일 아침 안수집사회에서 예배를 마친 후 임 모 안수집사의 간증이 있었다. 집을 처분하고 이사를 가야하는데 도무지 집을 보러오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부부가 열심으로 기도하던 중 하나님께 믿음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먼저 예물을 심자고 다짐하고선 주일에 감사예물을 심었단다. 그러자 며칠 만에 원하는 사람이 나타나 그 자리에서 계약이 이뤄졌다며 감사간증을 전했다. 그 순간 나는 ‘그동안 열심히 기도했지만 미각 회복을 놓고 감사 예물을 드린 적이 없었구나’라고 깨달았다. 그리고 미각이 회복될 때까지 하나님께 감사드리자는 생각으로 계속 물질을 심겠다고 다짐했다. 주일예배와 금요철야예배 때 “미각이 회복되게 해주심을 믿음으로 감사드립니다”라고 헌금봉투 써서 예물을 드렸다. 그렇게 3주가 지났을 때 혀끝에서 미세한 단맛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정말 기뻤다. 하나님께서 잃었던 미각을 치료해주셨다는 확신이 다가왔다. 그리고 한주가 지날 때마다 10%, 20%, 50%… 서서히 미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든 미각이 1년 6개월 만인 10월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하나님은 믿음 안에서 감사로 심는 예물 위에 반드시 보응해주시지 그냥 지나치는 분이 아님을 이번 일을 통해 깨달았다.

 누군가 절실한 기도 제목을 가지고 기도하고 있다면 먼저 믿음과 감사로 하나님께 심으라고 말해주고 싶다. 반드시 하나님의 응답과 축복이 임하게 될 것이다.


최길학 목사(여의도순복음광명교회) -

심장 멈추고 혼수상태였지만 후유증 없이 회복

의식 없던 중 이영훈 목사 기도 받은 후 급속 회복

 얼마 전 나는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했다. 지난달 29일 오전에 가슴이 답답한 증세가 느껴져 교회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병원을 찾았다. 병명은 부정맥 질환의 일종인 발작성 심방세동 빈맥이었다. 이 병은 심방의 여러 부위가 무질서하게 뛰면서 불규칙한 맥박을 형성하는 것으로 평균 맥박이 75인데 그때 당시 나의 맥박은 200까지 빠르게 뛰었다.

 아무리 해도 맥박이 빨리 뛰는 것이 해결이 되지 않아 앰뷸런스를 타고 대학병원 응급실로 이송이 됐고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그런데 치료를 받는 과정 속에서 심장 박동이 멎었고 의식도 잃었다. 심폐소생술로 심장 박동을 다시 살려 놨지만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내가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의료진은 가족들에게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면 가능성이 없다는 소견을 전달했다. 산소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의식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온 가족이 기도하며 여러 목사님과 성도들에게 중보기도를 요청했다. 소식을 듣고 30일 여의도순복음교회 담임 이영훈 목사님이 병실을 찾아 오셨다. 중환자실이라 면회시간 외에는 들어올 수 없는데 목사님께서 와 주셨다. 이영훈 목사님은 “하나님, 우리 목사님 살려주셔서 영혼을 살리는 그 귀한 복음 증거하는 일을 계속하게 해주시옵고, 제2의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게 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를 해주셨다. 

 목사님이 오셨을 때 나는 의식이 없었기 때문에 목사님이 다녀가신 건 나중에야 알게 된 일이었다. 목사님의 기도를 받은 그날 밤 기적이 일어났다. 의식이 돌아와 깨어났다.

 내가 사경을 헤매고 있는 그 시간 이영훈 목사님을 비롯해 나를 위해 많은 분들이 기도를 해주셨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내 소식이 전해져 여의도순복음광명교회 전성도를 비롯해 여의도순복음교회 교역자 기도회와 총회 실행위원회 예배, 새벽예배와 수요예배에 참석한 목회자와 성도들이 나를 위해 기도를 해 주셨다. 의식이 돌아온 뒤 12월 2일에 양쪽 다리의 동맥을 통해서 시술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시술도 말끔하게 잘 되었다. 

 보통 심정지가 일어나면 뇌로 가는 혈액공급이 정지돼 몇 분만 지체 돼도 돌이킬 수 없는 뇌손상으로 식물인간이 되거나 뇌사상태가 된다고 한다. 깨어나도 몸의 일부가 마비되는 등 장애와 후유증이 있다고 하는데 쓰러지기 전과 다름없이 건강한 모습으로 회복되고 있는 중이다.

 절망적인 상황이었는데 이영훈 목사님의 기도를 받고 극적으로 깨어나고 수술도 잘 끝나 몸 상태도 급속도로 좋아졌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2주 전부터는 다시 강단에 올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다. 나의 하루 하루는 전적으로 생명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생명을 주셨으니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여의도순복음광명교회 성도들을 잘 섬기겠다. 또한 기도해주신 많은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다시 한번 이번 일로 기도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었다. 우리 좋으신 하나님은 주님의 자녀들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신다. 앞으로 이영훈 목사님께서 기도해주신 것처럼 제2의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께 쓰임 받으며 주님의 일을 잘 감당하고 싶다.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증거하는 주님의 종으로서의 사명을 최선을 다해 감당할 것이다. 


전정심 권사(마포1대교구) - 부르짖는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


교통사고 난 손주, 중보기도 힘으로 살아나
이영훈 목사 안수 기도에 절대긍정 희망 얻어

 친손주 재영(사진 왼쪽)이가 25살 때인 2015년 7월이었다. 새벽 5시 병원으로부터 재영이의 사고 소식을 들었다. 군대를 제대한 손자는 운전 중 난간을 들이받아 쇄골이 골절됐고, 머리에 큰 부상을 입었다. ‘죽었구나’ 생각하고 정신없이 병원으로 달려갔다. 수술을 마친 의사는 “환자가 살 가망이 40%”라고 했다. 절망적이었다. 그런데 이영훈 목사님의 기도만 받으면 재영이가 살 수 있겠다는 희망이 생겼다. 하지만 목사님과 연결될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당시 담당교구장이셨던 추한숙 전도사님의 도움으로 이영훈 목사님과 전화연락이 됐다. 정신줄을 놓고 있던 나와 며느리는 목사님의 기도에 힘을 얻었고 절대긍정의 믿음을 품게 됐다. 그날이 토요일이었는데, 이영훈 목사님은 “내일 주일예배 후 병원으로 가겠다”는 말을 해주셨다. 그리고는 정말 주일 4부 예배 후 병원으로 우리를 찾아오셔서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손자를 위해, 가족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 주셨다.

 이영훈 목사님의 기도를 받고 난 후 나는 기도원으로 달려갔다. 마침 여성금식기도대성회 기간이라 금식하며 하나님께 매달렸다. 예배 시간마다 중보기도를 청했고, 강사 목사님과 수 많은 성도들이 3∼5분씩 손자를 위해 중보 기도해 줬다. 또 예배 후 목사님마다 내 머리에 손을 얹고 손자를 위해 기도해주셨다. 이어 경찰선교회 주관 성회까지 참석해 금식하며 기도했다. 그러자 마음에 희망과 용기가 생겼다.

 재영이는 몇 차례에 걸쳐 뇌수술을 받았다. ‘아이가 깨어 날까’하는 기대감에 수술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수술을 마치고 나온 의사는 “살아도 식물인간이 된다”는 절망적인 말을 했다. 가족 모두는 지쳤다. 그런데 어디서 그런 담대함이 나왔는지, 나는 “가자. 가서 밥 먹고 힘내자.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께 무릎 꿇자. 그러면 하나님이 안 살려주시겠니? 재영이는 안 죽는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살려주신다고 했다. 이영훈 목사님도 기도해 주셨잖니?”라며 가족을 위로했다. 그리고는 철야예배가 드려지는 교회로 달려와 “하나님, 제발 살려주세요. 하나님 믿고 담대히 선포했잖아요. 제발 살려주세요”라며 눈물로 기도했다. 금요성령대망회때 나는 성도들에게 중보기도를 요청했다. 그러면 성전에 모인 성도들이 손자를 위해 기도했다. 교구에서도, 남편이 봉사하는 남선교회 보호실에서도 간절히 기도해주셨다. 지나는 길에 모르는 사람의 손을 붙잡고 손자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중보 요청도 했다.

 병원에 입원한 지 24일째 되던 날, 손자가 기적적으로 눈을 떴다. 중보기도의 힘이었다. 손자는 의지가 강한 아이라 재활에 적극성을 보였다. 주변의 지속적인 중보기도 힘으로 재영이는 8개월 만에 일어나 퇴원했다.

 지난해 여름 재영이는 이영훈 목사님을 직접 찾아뵙고 다시 기도를 받았다. 목사님은 “더 좋아질 것이다. 하나님이 은혜 주셨으니 앞으로의 길도 열어 주실 것이다”라며 안수해주셨다. 대학청년국 가스펠선교회에 들어간 재영이는 주일은 물론 금요 철야예배를 드리며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있다.

 우리를 위해 아낌없이 기도해주시고 도와주신 교구 성도들에게 감사하다. 남선교회 보호실 가족들에게 지면을 통해 인사한다. 대교구장님을 비롯한 많은 교역자님들께 감사드린다. 무엇보다 재영이를 위해 한걸음에 달려와 기도해주신 이영훈 목사님께 “사랑하고 진심으로 존경합니다”라고 인사드린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복음전도에 힘을 쏟는 것이다. 10명 전도 목표 중 지금까지 4명을 주께 인도했다. 나도 손자도 남은 일생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살자고 다짐했다.       


한영교 권사(서대문대교구) -

생명 보다 더 귀한 것, 바로 ‘영혼’이지요

호스피스 봉사하며 하나님의 사랑 깨달아
주님 은혜로 봉사하며 대장암 완치 받아


 나는 순복음호스피스 8기로 8년간 호스피스 봉사를 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아픈 이웃을 섬기러 갔다가 오히려 내가 배우고 얻은 것이 많다. 그중 봉사 초창기에 만난 환자분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구강암 말기로 고통 중에 계셨던 분인데 알고 보니 무속인이었다. 호스피스 봉사는 팀으로 이뤄지는데 우리가 교회를 다닌다는 것을 알고 처음에는 찾아가도 언짢아하고 달가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 방문을 하면서 마음 문을 두드렸다. 대화를 해보니 너무나 외로운 분이었다. 남편과 사별했고 슬하에 5남매를 두었지만 파란만장한 삶과 남다른 가정사로 자녀들과 왕래가 없어진 지 오래였다. 나중에는 우리가 가면 너무나 반기며 좋아하셨다.

 2009년 6월 어느 날 새벽기도 다녀온 아침에 나는 배가 견디지 못할 만큼 많이 아파 병원에 갔다. 진통제를 처방받고 며칠 후 알게 된 검사 결과는 대장암 3기였다. 큰 병이라고는 들었지만 마음은 평온했다. 다만 수술을 받으러가야 하는데 구강암 말기로 약해진 그분께 충격을 줄까봐 “한 달 간 시골에 다녀올 일이 생겼으니 다녀오겠다”하고 입원을 했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 좋은 의료진을 만나 수술을 잘 받았다. 수술을 마치고 일주일에 한번씩 항암치료를 받았다. 항암치료를 받을 때는 많이 힘들었지만 어느 정도 몸이 회복이 되어 늘 걱정이었던 그분께 전화를 했다. 그사이에 건강이 악화 돼 입원과 퇴원을 했다고 했다. 회복을 위해 내가 먹는 음식들을 챙겨서 그분을 만나러 갔다.

 호스피스 봉사를 통해 어느새 그분 마음이 달라지고 어느덧 예수님을 영접하고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셨다. 그리고 스스로 결단을 하고 무속인을 할 때 사용했던 것들을 모두 치우고 예수님 안에서 참 평안을 얻으셨다. 그분은 입퇴원을 반복하며 괴로움 속에도 신앙을 지켰다. 그분이 많이 힘들어 할 때는 “내가 먼저 천국에 갈수도 있다. 내가 먼저 가면 내가 천국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당신이 먼저 가면 나를 기다려달라”는 말을 했다. 그 말에 안심을 한 그분은 며칠 뒤 천국에 가셨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서대문대교구 11교구에서 도와주셔서 장례를 잘 마칠 수 있었다. 다섯 자녀들도 장례에 참석해 어머니를 불쌍히 여기고 후회를 하는 모습을 보였다. 자녀들 중 감동을 받은 큰아들과 막내딸은 예수님을 믿겠다고 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대장암 판정을 받았을 때가 69세였는데 항암치료를 1년 동안 받으면서 봉사를 하고 75세인 지금까지 완치 판정을 받고 별다른 건강의 문제없이 지낸 것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다.

 4개월 전에는 사랑하는 남편이 천국으로 갔다. 지난해 4월에 위암 선고를 받고 5월에 임파선까지 퍼졌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남편은 항암치료를 하겠다고 결정했다. 남편은 사실 교회는 오래 다녔지만 변화를 받지 못해 술을 계속 마셨었다. 암 선고를 받은 후 술을 끊고 암과 싸우며 남편은 월요일마다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기 시작했고 기도만 하면 울었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인데 주일에 교구실에서 기도를 받다가도 통곡을 했다.

 1년 4개월간 투병을 하며 호스피스 봉사를 하며 배웠던 모든 것을 남편에게 해드리며 불편함 없이 서로 감사하며 시간을 보냈다. 남편의 마지막은 어느 드라마보다도 아름다웠다. 교구 목사님들, 지역장님들, 교구 식구들이 다 다녀가시고 자녀들과 손자 손녀들에게 둘러싸여 보고 싶은 사람들을 다 만났다. 사람들이 모두 찬양을 하며 평온한 가운데 천국으로 가셨다.

 호스피스 봉사를 10년 가까이 하면서 느낀 것은 생명이 귀하다는 것, 그리고 생명보다 영혼은 더 귀하다는 것이다. 나에게 호스피스 봉사를 소개해주고 이끌어주신 이재순 실장님께 지면을 빌어 감사인사를 전하고 싶다.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그날까지 호스피스 봉사를 하며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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