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풍환 안수집사(구로대교구) -

순종할 때 복 주시는 하나님

결혼 전 교회출석 약속, 15년 만에 지켜
술 접대 대신 당당하게 크리스천임을 밝혀


 나는 결혼 전 “결혼하면 열심히 교회출석하겠다”고 큰소리쳤지만 실제로는 이 핑계, 저 핑계대고 차일피일하며 예배 드리러 가는 것을 피했다. 연애시절 아내를 따라 우리 교회 대성전에서 예배를 드린 적이 있다. 수많은 사람들과 깜짝 놀랄만한 속도로 말씀을 전하는 조용기 목사님까지… 매우 인상적이었지만 말처럼 쉽게 교회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주일이면 자녀들을 교회에 들여보내고 교회주변에서 맴돌다 예배가 끝나고 나오면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반복됐다. 아이들도 매번 같이 예배를 드리자고 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을 쉽게 정하지 못했다.

 나는 다소 이른나이인 33살에 사업을 시작했다. 영업을 하다보면 어쩔수 없이 술자리가 잦고, 지방출장이라도 가면 여지없이 접대는 필수였다. 열심히 사업장을 운영했지만 항상 승승장구할 수는 없었다. 해가 갈수록 자리는 잡아갔지만 그만큼 피로도 쌓여만 갔다. 사업이 여러모로 힘들었던 무렵이었는데 지역에서 교구장과 함께 지역식구들이 와서 예배를 드려주셨다. 교구장도 몇 번을 사업장에 와서 기도도 해주고 격려해주셨다. 그렇게 찾아와서 격려해주시니 불안감도 어느 정도 해소가 되는 것 같고 큰 위로가 됐다. 그러던 어느 날 교구장이 사업장에 오셔서 “교회 나오실거죠?”라고 질문하셨는데 나도 모르게 “네”라고 대답했다. 또 연이어 “언제부터요?” “네 다음주부터 나가겠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렇게 해서 15년만에 결혼 전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됐다.

 막상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니 너무 좋았다. 그 후로 어머니가 소천하셨을 때를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주일성수를 어긴 적이 없다. 그리고 시간이 되는대로 성경학교, 파더스드림 등을 수료하고 파더스드림에서 봉사자로도 참여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내가 찾아가서 했다. 나도 모르게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찾게 됐다. 교구 식구의 인도로 지금은 남선교회 기획조정실에서 봉사를 하고 있다. 교회에서 자주 접하는 말씀 중에 하나가 ‘순종할 때 하나님이 복주신다’인데 정말 그 말씀 그대로였다. 평소 목도 자주 붓고 스트레스 탓인지 몸이 아플 때가 많았는데 봉사를 시작한 이후로 아픈 일이 없다. 심지어 새벽 봉사를 하면 육체적으로 더 피곤할수도 있는 상황인데 몸은 더 건강해졌다.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가장 큰 어려움은 사업장에서였다. 일의 특성상 영업과 접대는 필수였는데 신앙생활을 시작한 후로 갈등에 빠졌다. 그래서 처음에는 대신 직원을 보내기도 하고 핑계를 대며 피했지만 결국에는 당당하게 크리스천임을 밝히고 술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다. 초기에는 이 문제로 어려움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니 관계가 더욱 좋아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주변의 다른 사업장은 경기침체로 어려움에 처해도 하나님의 은혜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자녀들이 다섯이다 보니 남들만큼 사교육도 못시켜주고 대학학자금을 마련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어떻게든 필요한 만큼을 반드시 채워주셨다. 그리고 자녀들도 조금도 엇나감 없이 잘 자랐고, 우애가 좋아 서로가 서로를 이끌어주었다. 단 한 번도 자녀 문제로 고민한 적이 없다. 돌이켜보면 내가 주님을 믿지 않았으면 자녀들이 비뚤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런 생각을 할 때면 늘 주님께 감사할 뿐이다.  
 내게 주님을 만나고 가장 큰 변화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이전에는 사업을 하면서도 누구하나 의지할 곳이 없다는 두려움이 있었다면 지금은 의지하고 기도할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늘 든든하다는 것이다. 어떤 어려움이 다가와도 기도할 때 해결해주시는 주님이 있어 교회에 오는 것이 즐겁고 예배를 드리고 섬김과 봉사를 할 수 있어 오늘도 행복하다. 할렐루야. 


신홍순 권사(종로중구대교구) -

“주님 만나고 넘치는 감사로 은혜 누립니다”

사산 판정받은 태아, 기적으로 살아나 믿음의 자녀로 장성
‘하면 된다, 할 수 있다’는 믿음의 기도 응답받아


 

주님께서 우리 가정에 주신 은혜가 차고도 넘칠 만큼 풍성하여 감사할게 많다. 나도 모르게 감사기도가 나올 정도다. 서울 중심부에서 떡볶이를 파는 노점상을 20년째 운영하면서 내가 받은 축복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건강이 좋지 않은 남편 대신 생계를 책임지느라 삶은 고단했지만 하나님은 늘 나와 함께하셨다. 하나님을 믿기 전 허약했던 나는 하나님을 만난 후 건강을 선물로 받았다. 65세가 넘도록 아픈 데 없이 건강하게 지금껏 경제활동을 할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100일 전에는 우리 집안에 쌍둥이 외손주가 태어났다. 비슷한 시기에 친손주도 태어나면서 우리 집안은 자손 번성의 축복으로 요즘은 더욱 기쁜 날을 보내고 있다.   쌍둥이를 낳은 큰 딸은 불신자였던 나를 하나님께 인도한 천사와 같은 존재다.

 35년 전이었다. 큰 아이의 임신 사실을 안 것은 2개월이 지나서였다. 그런데 의사는 아이의 심장이 뛰지 않는다며 수술을 권했다. 허약체질로 임신이 쉽지 않았는데 잉태의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아이와 작별해야 한다니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오진’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다른 병원을 찾았다. 두 번째 병원에서도, 세 번째로 찾아갔던 대학병원에서도 결과는 같았다. 대학병원에선 80% 이상 소생 가능성이 없으며 혹이 있으니 제거수술도 함께 해야 한다며 수술 날짜를 잡자고 했다.

 황망한 마음으로 집을 향하는데 나를 전도하고자 애쓰던 이웃집 집사님을 만났다. 여의도순복음교회에 다니던 그 분은 울고 있는 나를 위로하며 함께 예배드리러 가자고 제안했다. 한 가닥 희망이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으로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에서 열리는 성령대망회에 참석했다.

 조용기 목사님은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라고 설교하셨다. 목사님은 나의 상황을 아는 듯 “그가 채찍을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라는 말씀을 선포하셨다.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니 나도 하나님께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다.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는 모습을 떠올리며 꼭 건강한 아이를 출산하게 해달라며 처음으로 기도를 드렸다. 그 다음날에도 기도원에 가서 간절히 기도드렸다. 교회 문턱도 넘어 보지 못했던 내가 집에 와서도 라디오로 찬양을 들으며 흥얼흥얼 찬양을 따라 불렀다.

 3일 후 걱정과 기대, 복잡한 심정으로 병원을 다시 찾았다. 의사는 고개를 갸우뚱 하더니 “아이의 맥박이 정상입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다는 것을, 나의 기도를 들어주셨다는 것을 곧 알게 됐다.

 그때부터 나는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기적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 어떤 일보다 행복했다. 술을 무척 좋아했던 남편도 하나님을 만나고 술을 끊었다. 떡볶이 노점의 메뉴판 맨 위에는 ‘샬롬’이라는 인사말을 걸어 놓고 기회 닿는 대로 복음을 전한다. 최근엔 치매에 걸린 95세 시어머니를 형님 댁에서 모셔왔다. 신실해진 남편이 나와 함께 어머니를 보살피니 이 또한 감사하다. 이렇듯 우리 가정을 믿음 안에서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정리=김진영 기자


김찬호 성도(대학청년국) -

단기선교를 통해 만난 하나님

오랜 지병 탓에 불가능해 보였던 단기선교
간절히 기도하니 주님이 모든 걸 예비해주셔

 여의도순복음교회 대학청년국에서는 매년 해외단기선교 월드미션과 국내단기선교 리바이벌코리아(REVIVAL KOREA·이하 RK)가 진행된다. 나도 평소 교구의 형들이나 누나들이 단기선교를 다녀와서 하는 간증을 들으며 함께 참여하고 싶다는 생각을 늘 했었다.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왜 그렇게 자랑을 하나 하는 질투도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앓고 있는 지병이 있어 주기적으로 병원을 찾아가 치료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해외단기선교는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래서 국내단기선교인 RK만이라도 꼭 가고 싶었다. 하지만 이것도 사실 나의 욕심이었다. 건강상태가 좋지 못하기 때문에 쉽사리 결정할 수 없었다.

 올해 7월 나는 RK를 소망하는 마음이 더욱 커져 금요성령대망회마다 간절히 기도했다. 첫째로 건강상태가 좋아져서 RK를 갈 수 있도록, 둘째로 가능하면 나의 상태를 이해해 줄 수 있는 팀장과 팀원들을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병원에서 검진을 받는데 건강상태가 매우 좋아졌다며 RK를 가도 된다는 의사의 허락이 떨어졌다. 이 기쁨도 잠시 평소 잘 알고 지내는 최시원 팀장님이 전화를 해서는 “함께 RK가자”고 말했다. 내가 갈수 있다는 것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는데 마치 하나님이 모든 것을 예비하신 것마냥 일이 착착 진행됐다. 가장 깜짝 놀란 것은 기존의 팀원들은 물론 내가 RK팀에 합류해 훈련하는 과정에 추가로 들어 온 팀원들도 내가 기도한대로 모두가 내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내 기도를 하나도 흘리지 않으시고 정말 그대로 이루어 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걱정되는 부분이 있었다. 내가 합류한 RK팀이 가는 곳은 강화도에 위치한 중증장애인시설 예닮이란 곳이었다. 나는 지병 탓에 사역 기간 중 반드시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시설이 외진 곳에 있어 인근에 치료를 할 수 있는 병원을 찾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병원이 있어도 치료를 받으러 갔다 오는 것이 행여나 팀원들의 사역에 불편을 초래하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그래서 다시 또 하나님께 기도로 매달렸다.

 하루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데 의사 선생님이 걱정하지 말라며 가까운 곳에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시설을 소개해주고 시간도 예약을 해주셨다. 그것도 감사한데 함께 사역을 가는 동생이 자신의 차로 병원에 오고갈 수 있도록 해줘서 팀사역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도록 해줬다. 일련의 모든 과정들이 감사할 뿐이었다.

 8월 4일부터 7일까지 예닮에서 사역 하는 과정에서도 감사는 멈추지 않았다. 이 곳 봉사를 하면서 하나님이 이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깨닫게 됐다. 나와 다르다고 생각했던 장애인들이 똑같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며 기도하는 것을 볼 때 나의 잘못된 생각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회개했다. 또한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이들을 축복할 수 있음에 감사고백하는 나를 만나게 됐다.    

 이번 RK사역에 동참하면서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사랑하심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었다. 동시에 왜 그렇게 형과 누나들이 단기사역을 통해 만난 하나님을 쉼 없이 간증하는지도 깨닫게 됐다. 심지어 한 번 다녀온 나조차도 많은 이들에게 단기사역에서 만난 하나님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라기는 더 많은 청년들이 단기선교에 참여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길 소망한다. 할렐루야!    


박정순 집사(전국교육자선교회) -

아흔 된 시어머니 매일 주를 위해 헌신

성경 가르침 따라 시부모 섬길 때 구원 역사
고령에도 뜨개질로 선교 사역 동참, 늘 주께 감사

 나는 41년 9개월간의 초등학교 교직생활을 마치고 3년 전 퇴직한 교사다. 그동안 결근 없이 교편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38년 동안 한 집에서 살았던, 올해 아흔이신 어머니의 도움이 전적으로 컸다. 내가 오늘 나누고 싶은 간증은 성경의 가르침 따라 부모를 공경할 때 어떤 변화와 감사가 펼쳐지는지 말하고 싶어서다. 나는 29세에 크리스천 남편을 만나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했다. 그때까지 만해도 시어머니가 타종교를 믿는, 그것도 동네 대표직을 맡을 정도로 열정 있는 분임을 전혀 몰랐다. 한 집에서 생활하시던 부모님은 나와 남편이 교회 다니는 것을 반대하지 않으셨다.
 나도 신앙생활 외에는 시어머니께 전적으로 순종했다. 신실한 믿음을 가지셨던 친정어머니의 가르침이 컸다. 어머니는 결혼하면 항상 입을 조심하고 부모를 섬기라고 말씀하셨다. 그러한 성경적 가르침에 순종하며 오로지 시부모를 섬겼고 구원을 위해 기도만 했다.

 시집온 지 1년 후 시어머니가 남편과 나를 불렀다. “너희가 믿는 하나님을 나도 믿고, 나중에 천국에서 너희를 만나야겠다” 그리고는 바로 동네 교회에 등록하셨다. 시어머니의 변화는 시아버님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고집이 세셨던 아버님은 제사를 중시하시는 분이셨다. 그런 아버님이 어머니를 따라 교회를 다니셨다. 시부모님의 구원을 위한 우리의 간절한 기도는 그렇게 응답됐다. 아버님은 교회를 다니신 후 제사를 추모예배로 바꿔주셨다. 할렐루야!

 교직생활을 마친 3년 전 시어머니는 뇌경색으로 쓰러지셨다. 불편한 몸 때문에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못하셨다. 그러니 ‘누워계셨다, TV 보셨다, TV를 보다 주무셨다’를 반복하셨다. 신앙생활도 전 같지 않으셨다. ‘어머니를 위해 뭘 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시어머니가 좋아하셨던 성경 구절 암송을 시작했다. 몇 주 지나 머리가 아프다며 힘들어 하셨다. 이번엔 초등학생들에게 가르쳤던 색칠공부를 권해드렸다. 단순한 색칠부터 점차 난이도를 높여 어려운 그림 색칠까지 진행했다. 우울해하셨던 어머니 얼굴에 생기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칠한 컬러링북은 십여 권으로 불어났다. 어머니는 삶의 즐거움이 회복 되자 건강도 되찾으셨다.

 그 때 마침 국민일보 토요일판에 ‘그림이 있는 말씀’ 코너가 생겨 어머니가 색칠하시기 좋게 확대 출력해 1년 넘게 드렸다. 지난해 구정에는 어머니의 그림과 사연이 신문에 실려 가족 모두 어머니를 격려해드린 일도 있다. 어머니가 즐거워하실 만한 일을 또 찾았다. 이번에는 뜨개질이었다. 수세미를 만드는 뜨개질은 생각보다 어머니 적성에 맞았다. 어머니는 하루에 5∼6개씩 만들며 자신이 뭔가 해내고 있다는 성취감과 행복감에 젖으셨다. 나는 어머니가 만드셨던 수세미를 모아 지난해 대만 선교 때 전도 용품으로 사용했다. 올해 여름에는 일본 선교에 200개, 국내 무주 전도 때 80개를 전도용품으로 활용했다. 어머니는 ‘내 나이에 이렇게 선교 사역에 동참할 수 있어 행복하다’며 하나님의 일꾼 되심을 감격해 하셨다.

 부모와 자녀가 분리되어 가는 오늘날 우리는 부모와 함께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서로 행복할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 어머니와 이야기가 있는 삶을 찾아 살고자 노력했다. 성경적 가르침이 아니었다면 전혀 깨닫지 못했을 일이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부모님이 필요로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돌봐드리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보다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을 두실 수 있도록, 하나님의 사랑을 공유하도록,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해지는 삼중축복을 누리실 수 있게 해드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정리=오정선 기자


노무라 사다노리 성도(순복음동경교회)
야훼 라파 치료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8년간 앓아온 무릎관절 통증 치유 
기도하자 10년간 못 이룬 금연도 성공


 나는 32년 전인 1983년 일본 무도관에서 열린 복음성회에서 조용기 목사님의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설교를 듣고 그 자리에서 구원 받았다. 그 때 성경 속에 나오는 상처입고 쓰러져있는 사람이 바로 내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당시 믿음이 없었던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던 것도 기적이었지만 그 외에도 많은 기적이 해일처럼 밀려 왔다.

 시간이 지나면서 무도관에서 받은 은혜를 잊고 일반 사람들처럼 자유롭게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눈을 감고 기도라고도 할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하나님은 정말 존재하는 걸까?” 나의 이 의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있었다. 내가 뜻밖에 내 뱉었던 “만약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내가 결코 그만 둘 수없는 것을 나에게서 제거해주세요”라는 어처구니 없는 말을 하나님은 기억 하시고, 10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하루 수십 개비를 피웠던 담배를 끊게 하신 것이다. 그날 이후 오늘까지 계속 금연을 하고 있다.

 그동안 다양한 일들을 경험하면서 인간의 지혜를 초월한 주님의 위대한 기적을 여러 번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 대표적인 예 중의 하나가 바로 3년 전 9월에 순복음동경교회로 인도받게 된 것이다. 또한 이 교회가 바로 나를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이끌어 주신 조용기 목사님의 교회였다는 것도 기적이나 다름없다.

 나는 지금부터 약 8년 전 근무 중에 작은 구멍에 빠져서 왼쪽 무릎에 상처를 입었다. 균형을 잡으려고 왼발에 모든 체중을 싣는 순간 왼쪽의 반월판(관절부분에 있는 연골조직)에 부상을 입게 됐다. 그 당시는 무릎이 아파서 목욕도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한달에 2∼3차례 병원에 다니면서 무릎 관절에 히알루 론산 주사를 맞았다. 그 후로 계속되는 통증에 견딜수 없는 나날을 보냈다. 신발 속에 실리콘으로 만든 경사진 깔창을 깔거나, 철끈이 들어 있는 보호대로 무릎을 촘촘히 감싸기도 했다. 어느새 오른쪽 허벅지에 비해서 왼쪽 허벅지가 매우 가늘어져 있었다.

 그러던 2013년 초여름 어느 날 오후 식탁 의자에 앉아서 다리를 펴고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 다리는 맞은 편 의자에 편 채로 올려놓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왼쪽 무릎이 ‘뚝’하는 소리와 함께 꼬였다가 펴졌다. 다음 순간 놀랍게도 무릎 통증은 완전히 사라지고 걸을 뿐 아니라 뛸 수도 있게 됐다.

 무의식중에 2층으로 달려 올라가면서 아내 마사코에게 “무릎이 완치됐다”고 큰 소리로 외쳤다. 기뻐하던 중에 시가끼 시게마사 담임목사님이 예배 때마다 “아픈 곳에 손을 대고 하나님께 기도합시다”라고 하셨던 말씀이 갑자기 생각났다. 그리고 나도 항상 왼쪽 무릎에 손을 얹고 기도했던 것도 생각났다. 지금 이 시간 나에게 치유가 임했다는 것을 알고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뭐라고 말할 수 조차 없었던 무릎의 통증이 깨끗이 사라졌다.

 그 일이 있은 후 그동안 다니던 병원의 의사에게 알려야 한다는 것이 생각났다. 오랫동안 통원치료를 다녔기 때문에 그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진료실에 들어가니 의사는 늘 그랬듯 주사를 놓으려고 했다. 나는 당당히 “제 다리가 치료 받았습니다. 사실은 하나님께서 무릎을 고쳐 주셔서 이제 아프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사 맞을 필요가 없습니다. 더 이상 병원에 오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의사는 깜짝 놀라며 무척 신기해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내 간증을 전하며 나의 치료자 되시는 좋으신 하나님께 영광돌릴 수 있어 감사하다.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며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참된 신앙인이 되고 싶다.
 


엄혜심 집사(하노이순복음교회) -

“목사님의 안수기도후 다현이를 얻었어요”

어렵게 얻은 자녀, 믿음의 위대한 힘 깨달아
절대긍정과 절대감사의 마음 기도열매 맺어


 똘망똘망한 눈과 오똑한 코가 예쁜 딸 다현이는 우리 부부가 2년 만에 어렵게 가진 귀한 보물이다. 나는 결혼 후 주재원으로 근무하는 남편을 따라 하노이에서 살게 됐다. 마흔 가까이 된 우리부부는 아기가 생기지 않는 것에 대한 걱정과 근심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새벽에 나와 열심히 기도했지만 아기는 쉽게 생기지 않았다. 한국에 돌아와 검사를 해보니 노산이기도 하고 남편과 나에게 문제가 있어 자연 임신은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받게 됐다. 의사는 시험관 시술로도 임신이 어렵겠지만 1%의 가능성이라도 붙잡고 싶다면 지금이라도 빨리 정자를 채취해 놓아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의사의 말에 따랐고 1차 시험관 임신을 시도했다. 양가 가족들은 물론 하노이순복음교회 목사님, 사모님, 성도들이 함께 기도해주었기에 아기가 생길 거라는 기대가 컸다. 그러나 기대가 컸던 만큼 착상조차 되지 않았다는 결과를 들었을 때 나는 크게 낙심할 수밖에 없었다. 남편은 일 때문에 먼저 하노이로 돌아간 상태였고 나 혼자 결과를 듣는데 슬픈 마음을 주체 할 수 없어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도망치듯 남편이 있는 하노이로 돌아갔다.

 2016년 8월 29일 부흥성회를 위해 하노이에 오신 이영훈 목사님은 히브리서 11장 6절의 말씀을 통해 ‘믿음의 위대한 힘’이라는 제목으로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으로 바꾸는 것이 믿음이다. 모두 불가능이라고 할 때 할 수 있다! 하면된다! 라는 거룩한 꿈을 꾸는 것이 믿음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부부는 계속해서 임신을 위해 노력해 왔지만 어느 순간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목사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생각을 바꾸고 꿈을 가지게 됐다. 그뿐만이 아니라 설교 후 치유기도 시간에 목사님은 기도 중에 태아가 보이는데 지금 아기를 위해 기도하시는 분이 있으시면 하나님이 응답하셨다고 말씀하셨다. 그 순간 나는 나를 위해 기도해주시는 분들이 생각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예배 후 안수기도를 받으러 가서 기도를 받는데 목사님은 “순산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아기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녀가 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해주셨다. 나는 ‘임신만 되도 좋겠는데 순산기도를 해주시나’라고 생각하면서도 설교 말씀을 떠올리며 감사했다. 받은 기도에 의심이 생기고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남편 장하영 집사와 함께 이사야 66장 9절 말씀을 읽으며 기도했다.

 10월에 한국에 가서 두 번째 시험관 임신을 시도했지만 두 번째 역시 실패했다. 하지만 처음과 달리 나에게 아기가 생길 것이라는 분명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실망보다 더욱 기도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이영훈 목사님이 항상 강조하시는 절대 긍정이 내 마음에 가득 넘쳐나는 듯 했다. 그리고 믿음대로 3차 시도에 아이를 갖게 됐다. 할렐루야!

 우리 부부는 10개월 동안 기도로 출산을 준비했다. 남편은 어렵게 자연분만을 결심한 나를 위해 기도했고 나는 다현이가 건강하게 태어나기를 기도했다. 그리고 안수기도 받은지 1년만인 올해 8월 우리의 기쁨인 다현이를 순산했다. 나는 이 일로 확신을 가진 믿음, 절대 긍정과 절대 감사의 힘을 깨달았다. 하나님의 자녀를 맡겨 주신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 앞으로 다현이가 하나님 나라의 귀한 쓰임 받는 자녀 되도록 잘 양육할 것이다.  

정리=김주영 기자


이영자 권사(강서대교구) -

교회 나왔더니 류마티스 관절염이 나았어요

기도할 때 목에 난 종양과 치질도 고쳐 주셔

 30대 초반이던 1982년 몸에 이상이 생겼다. 류마티스관절염이 생겼는데 얼마나 심했던지 우리 집에서는 내 비명 소리 밖에 나질 않았다. 8살 6살 4살된 어린 자녀들은 내가 아픈 까닭에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류마티스관절염은 점점 심해져 나중에는 내 손으로 밥도 못 짓고, 혼자 눕거나 일어서지도 못하는 죽으려야 죽을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러자 이를 보다 못한 남편이 무당을 집으로 불러다가 밤새 굿을 했다. 여의도순복음교회를 다니는 한 구역장이 우리 집에 와서는 “젊은 사람이 어디가 어떻게 아프길래 굿까지 하느냐”며 교회로 가자고 했다. 마침 다음날이 주일인지라 나는 구역장을 따라 여의도순복음교회 1부 예배에 참석했다. 구역장은 4주 동안 주일 아침이면 우리 집 앞에 택시를 잡아두고 걷지도 못하는 나를 부축해 교회에 데리고 다녔다. 아무 것도 모르는 나였지만 교회에 다니면서 마음에 평안이 왔다. 그렇게 4주가 지난 뒤 다음 날인 월요일 아침 눈을 떴는데, 몸에 힘이 느껴졌다.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아팠던 몸이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부엌으로 걸어 나갔다. 제대로 일어서지 못했던 내가 부엌까지 걸어갔다. 쌀을 씻어 보았다. 행주를 짜보았다.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했다. 전혀 몸이 아프지 않았다.

 신기하고 놀라워 그 길로 동네 골목으로 뛰어나갔다. “동네 사람들, 나 좀 보세요. 어르신들, 나 이제 아프지 않아요”라고 소리치며 이 골목 저 골목을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고함치는 소리에 이웃 아주머니들이 아침밥을 짓다말고 놀라 뛰쳐나왔다. 

 “아무개 엄마, 안 아파! 괜찮아? 웬일이야?” “네. 안 아파요. 나는 아무것도 한 것 없이 교회에 나갔을 뿐인데 병이 나았어요!” 하나님은 교회에 처음 나온 나에게 참으로 큰 은혜를 주셨다. 그 후 기적은 또 일어났다. 셋째 아이를 임신 했을 때 생긴 치질로 몇 해 동안 혈변으로 고생했다. 누군가 오산리 기도원에 가서 3일간 금식하며 기도하면 낫는다고 알려줬다. 정말로 3일간 금식기도하고 집으로 돌아와 보호식을 한 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그날이 주일이라 교회에서 3부 예배를 드리는데, 조용기 목사님이 신유기도 후 선포하셨다. “치질로 인해 하혈하는 분이 지금 이 자리에 와 있는데 나았다” 나는 그 순간 자리에서 일어나 ‘할렐루야’를 외쳤다. 정말 깨끗하게 나았다.

 한 번은 또 구역장 사명을 받아 활동할 때였다. 목에 임파선 종양 3개가 났다. 나는 먼저 내 신앙을 돌아보고 회개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류마티스관절염과 치질을 고쳐주신 하나님께서 임파선 종양을 고쳐주실 것을 확실히 믿었다. 그 당시 나는 세 아이를 돌보느라 수술할 수 있는 경제적 여유가 없었다. 무조건 하나님께 매달려 병을 치유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렇게 한달 간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한 결과 혹 3개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할렐루야!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으니 내가 할 일은 사람들에게 주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환경을 돌아보면 남편을 도와 중·고등학생이 된 세 아이 등록금 마련을 위해 돈을 벌어야할 형편이었다. 나는 세 아이가 공부를 마치면 주의 일을 하겠다고 기도했다. 그러자 마음속에 한 찬양이 울려퍼졌다.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 길을 주었다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 그때를 시작으로 나는 담대히 주의 복음을 전하는데 힘썼다. 복음전파에 힘을 쏟자 하나님은 내가 돈을 벌 때보다 더 많은 축복을 부어주셨다. 세 자녀는 교사 경제인 등 훌륭한 사회인으로 성장했고, 장막을 선물로 주셨다. 주의 명령에 순종할 때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지 못한 복을 흔들어 넘치도록 채워주신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2005년부터 호스피스 봉사를 통해 고통당하는 이웃에게 그리스도의 위로를 전하고 있다. 호스피스 봉사에 집중하며 주께 받은 사랑을 이웃에게 전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임광순 집사(말레이시아 사랑순복음교회) - 15년 간 앓던 두통이 사라졌어요
우울증까지 생겨 고통스러웠던 나날
기도와 말씀으로 치유의 감격 체험


 나는 말레이시아에서 3년 전부터 거주하고 있다. 사업을 하는 자녀들을 따라 말레이시아에 왔는데 낯선 나라에서 젊은 나이도 아닌 내가 적응을 잘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한다.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30년 넘게 신앙생활해온 나는 어디를 가든지 두려움 보다는 희망을 품고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나아가기를 소망했다.   

 가장 감사한 것은 사랑하는 자녀들과 함께 사랑과 배려 속에 살아가는 것이다. 또 외국에 나와 있지만 이곳에 순복음교회가 있어 하나님께 정말 감사했다. 말레이시아 사랑순복음교회 담임이신 염세열 목사님과 사모님을 만나 순복음의 신앙을 이어 나가게 됐고 가족같이 서로를 사랑하는 성도들을 만났다. 그리고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다시금 체험하게 됐다.

 나는 2000년 뇌수술을 받았다. 우연히 뇌종양이 발견됐고 양성이었지만 병원에서는 그냥 두면 눈이 보이지 않는다든가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다며 수술을 서둘렀다. 처음 예상은 9시간이었던 수술이 12시간이나 진행됐다. 회복이 잘되는가 싶었는데 수술 이후부터 바람만 불어도 머리가 시려 모자를 쓰게 됐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두통이었다.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머리가 깨질 듯 아파 와서 하루에 약을 6∼7번 씩 먹고 살았다. 약으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도 없이 찾아오는 고통은 나를 많이 힘들고 지치게 했다. 병원에 가도 약만 처방해줄 뿐 고통의 발생 원인이나 통증이 안 생기게 하는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게다가 지난해에는 우울증이 생겨서 내 자신이 싫고 여러 가지 계속 부정적인 마음이 들어 힘들었다. 한국에 돌아가서 병원에 다니고 우울증 약도 받아서 1년 동안을 먹게 됐다. 하루도 날 가만 두지 않는 두통은 내 삶을 힘들게 했다. 아프고 힘들어서 교회에 가지 말고 누워있을까 하는 날도 있었는데 그 때는 어린 손자들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어려도 ‘할머니 할머니’라고 부르면서 교회에 가자고 귀엽게 말하는 손자들의 말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내가 오랜 통증으로 고통 받고 있다는 것을 안 염세열 목사님은 정말 간절하게 안수기도를 해주셨다. 나도 고통에서 해방되어 건강한 몸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어떤 때는 목사님께서 기도를 마치신 후 자신의 머리가 아프다고 하시거나 눈이 아프다고 하셨다. 목사님이 성도를 사랑하는 마음이 크셔서 그런가 감사하면서도 어서 이 통증에서 해방되고 싶었다. 사모님은 매일 성경 말씀을 보내주셔서 그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해주셨다.

 그런데 2달 전부터 자연스럽게 약병에 손이 안 가게 됐다. 어느 순간 ‘아 이상하다. 오늘은 한번도 약을 먹지 않았네’ 하는 날이 점차 많아졌다. 아플 때마다 먹는 약인지라 통증의 횟수가 줄어들더니 이제는 하루에 한번만 먹거나 아예 먹지 않아도 되는 날이 매일 이어지고 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1남 2녀 자녀를 주시고 이 아이들을 통해 6명의 손자 손녀들도 주셨다. 하나님 안에서 받고 누린 것이 참으로 많다. 그동안 신앙생활하게 하시고 고통을 치유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말레이시아에서의 생활이 만족스럽지만 한국에 있는 형제들도 늘 그립다. 형제들은 모두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직분을 받고 각자의 달란트대로 봉사하며 살아가고 있다. 누군가에게 어려움이 생기면 한마음으로 걱정해주고 함께 기도할 수 있어 정말 든든하다.

 앞으로는 건강을 회복 시켜주신 하나님과 나에게 일어난 이 일들을 사람들에게 간증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싶다. 


나운성 집사(마포1대교구) -

하나님 만나 가정이 회복되었습니다

 젊은 시절 나는 ‘두 얼굴’로 살았다. 밖에선 성실한 직장인이었지만 안에선 독재자나 다름없었다. 130여 명이 근무하는 인쇄회사에서 밤낮 없이 열심히 일한 덕분에 나는 회사에서 다른 동료들에 비해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그런 나를 위해 아내는 최선을 다했다. 늦은 시간에 귀가해도 아내는 갓 지은 밥으로 식탁을 차려줄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고마움보단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아이들에게도 늘 명령하고 지시했다. ‘내가 가장이니까’ ‘내가 돈을 버니까’ 그렇게 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허리디스크 수술이 내 삶을 일순간 바꿔놓았다. 수술 후 극심한 후유증 때문에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말았다. 계속되는 통증으로 7년여를 집에만 있었다. 나를 대신해 생계를 이어가던 아내는 경제적 압박감 등으로 예민해졌다. 경제력은 상실했지만 여전히 일방적이고 권위적이었던 나는 아내에게 “고맙다” “미안하다”는 말조차 표현하지 못했다. 전쟁을 치르듯 아내와 부부싸움을 했다. 매일 술을 마셨고 삶을 놓아버리고 싶은 순간도 여러 번이었다. 우리 가정은 위태로웠다.

 여의도순복음교회에 다니던 아내는 마포대교구의 목사님과 구역식구들의 도움을 구했다. 그들은 우리 부부와 가정을 위해 기도해줬고 집에도 자주 심방을 왔다. 그때마다 나에게 교회에 함께 갈 것을 권면했다. 아내도 내가 교회만 다니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 같다며 제발 교회에 함께 나가자고 부탁했다. 더 이상 아내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서 나는 억지로 교회를 따라 나섰다.

 젊은 시절 타종교를 믿던 나에게 예배시간은 도저히 적응하기 힘든 것이었다. 설교와 찬송, 기도 모든 예식이 어색하고 불편했다. 맹목적으로 교회를 다니던 어느 날 교구 장로님께서 영성훈련 프로그램 ‘파더스드림’을 추천해 주셨다. 등 떠밀려 등록한 프로그램이었기에 한 번만 나가고 안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나는 참으로 놀라운 체험을 했다.

 프로그램의 시작과 함께 찬송을 부르는데 심장이 쿵쿵거리는 게 아닌가.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뭔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올라왔다. 눈물조차 메말라버린 나인데,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주변에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안경 속이 눈물범벅이 되도록 울고 또 울었다.

 ‘그 동안의 삶이 너무 힘들었던 것일까?, 가족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을까?’ 그 이유를 알아야 했기에 계속 ‘파더스드림’에 참석하게 됐다. 그리고 그 눈물의 의미를 깨닫게 됐다. 권위적으로만 살아온 가장으로서 나를 돌아보게 된 것이다. 가장 먼저 한 일이 아내와 자식들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는 거였다. 하나님께는 회개기도를 드렸다. 오랫동안 기다려 주셨던 주님은 나를 그렇게 불러주셨고 나의 삶을 풍성하게 인도해 주셨다. 어느 날 주일예배를 드리는데 목사님의 말씀이 귀에 쏙쏙 들어왔다. ‘아멘’을 외치면 신이 났고 감사가 넘쳤다. 허리의 통증도 차츰 회복되어 보안업체서 근무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해주신 그 은혜가 너무 감사해 무엇이든 하고 싶은 마음에 ‘파더스드림’의 스태프로 봉사도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교회가 최우선이라는 것이다. 내가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는 아내가 나를 이끌어줬지만 아내가 힘들어 할 때는 내가 먼저 아내를 이끌고 교회에 가는 날도 생겼다. 뿐만 아니라 교구에서는 구역장 직분도 맡았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면 나는 여전히 두 얼굴로, 내 기준과 내 생각으로 세상의 걱정과 근심을 안고 살았을 것이다. 하나님께 의지하면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응답하신다는 확신을 갖게 되어 진심으로 감사하고 기쁘다.     정리=김진영 기자


김효정 성도(강서대교구) -

아이를 치료해주신 하나님

뱃속 아기에 장기이상 발견돼 수술 필요
이영훈 목사 안수기도 받고 건강하게 출산


 나는 세 번째 자녀를 임신했을 때 딸이라는 것을 알고는 뛸 듯이 기뻤다. 앞서 두 아들이 있었기에 나나 남편이나 가족들 모두가 딸을 간절히 바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쁨도 잠깐 임신 30주차 즈음 인근 병원에서 초음파검사를 받았는데 의사가 “아이의 신장이 하나만 있는 것 같다”며 조심스럽게 결과를 말했다. 뿐만 아니라 손가락도 이상이 있는 것 같다며 대형병원으로 가서 다시한번 진찰을 받아볼 것을 권했다. 깜짝 놀란 나는 세브란스병원에 가서 다시 검사를 받았다. 그런데 오진이길 바랐던 마음과는 달리 기존의 검사결과에 덧붙여 위도 안보인다며 ‘다발성기형증후군’이 의심된다고 말했다. 의사는 식도가 막혀 있어 위가 안보일수도 있고 태어나자마자 응급수술을 해야 할 것 같다며 확정적으로 말했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였다. 너무 놀라 어머니 이희월 권사에게 전화해 기도를 요청했다. 남편도 이 소식에 깜짝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머니를 통해 교구식구는 물론 목사님, 선교사님 등에게도 기도를 요청했다.

 사실 남편과 나는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태어나면서부터 교회를 등한시했었다. 아이들은 꼭 교회학교에 데리고 가서 예배를 드리게 했지만 정작 내 신앙은 지키지 못했다. 남편과 나는 즉시로 그 주부터 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하며 기도로 하나님께 간구했다. 지난날 하나님을 뒤로한 채 아이들만 바라보았던 것을 회개하고 예레미야 18장 6절의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이 능히 치료해주실 것을 믿으며 간절히 기도했다.

 어머니는 태어날 손녀를 위해 이영훈 담임목사님께도 편지를 보내 기도를 요청했다. 그래서 4월 첫째 주 수요예배 때 안수기도를 받을 수 있었다. 기도를 받을 때만 해도 이미 수술은 확정적이었다. 단지 큰 수술이냐 작은 수술이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매주 검사를 했지만 별다른 진전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영훈 목사님은 기도를 해주시고나서 “아이가 나았다”고 선포해주셨다. 그 말씀에 얼마나 큰 힘을 얻었는지 모른다. 특히 2주 후 수요예배 중 신유기도시간에 ‘태어날 아이가 갖고 있던 장애가 고침받았다’고 선포하셨다. 심지어 아이가 태어난 후에도 신유기도시간에 ‘식도에 이상이 있는 아이가 치료받았다’고 지속적으로 선포해주셔서 우리 가족은 그 말씀에 의지해 믿음으로 아이가 나았다고 고백했다.

 진통이 와서 병원에 갔을 때 의사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라는 말로 불안을 가중시켰다. 하지만 우리 부부와 가족들은 이영훈 목사님의 말씀대로 나을 것을 믿고 기도했고 주변에서도 기도해주시고 용기를 주셨다.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신생아응급실로 옮겨졌다. 의사는 기도와 식도가 엉켜있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런데 검사결과 다소 식도가 짧긴 하지만 당장 수술이 필요 없을 것 같다는 진단이 나왔다. 초기에 심장에도 문제가 있는 듯했지만 정밀검사결과 심장과 위, 신장 등 주요 장기들이 작긴 하지만 큰 이상이 없음이 확인됐다. 수술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할렐루야.
 퇴원을 앞두고 의사는 처음 찍었던 초음파사진과 태어난 후의 사진을 비교하며 “이 아이 사진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마치 다른 아이를 찍은 것 같다. 같은 아이의 사진이라고는 믿기 어렵다”라며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음을 시인했다.

 딸의 이름을 주님의 아이라는 뜻으로 주아, 홍주아로 지었다.(사진) 주아의 일을 계기로 우리 가정이 신앙으로 하나가 됐다. 아이를 양육하며 힘들다는 핑계로 교회를 등한시했던 모습을 이제는 버리고 남편과 함께 더욱 더 주안에서 아름다운 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와 같이 아이 때문에 기도하는 가정들에게 하나님이 분명히 아이를 치료하시고 지켜주심을 끝까지 믿고 희망을 버리지 말고 기도하라고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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