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봉원 장로(강서대교구) -

뇌출혈로 쓰러진 나를 살려주신 하나님

고속도로 위에서 사고, 그러나 큰 부상 없어
‘전광석화’같이 빠른 회복 9일 만에 퇴원
정상적으로 돌아온 삶, 보는 사람마다 ‘깜짝’

지난해 여름 원인도 모르게 머리가 어지러웠다. 병원을 찾아 MRI 등 촬영을 해보니 혈액순환이 잘 안된다는 진단결과 뿐 별 다른 이상은 없었다. 하지만 계속 머리가 아파 약 처방을 받고 1년 동안 복용하며 지내왔다. 그런데 지난 8월 22일, 딸아이로부터 한 통의 휴대전화 문자가 왔다. 평소와 다르게 행동하는 나를 걱정한 딸은 “아빠 요즘 이상해. 약이 이상한 거 같아. 약 봉지 들고 병원에 가보는 게 좋을 것 같아”라며 걱정했다.
 조만간 병원을 가봐야겠다고 생각하고선 이튿날 사업 계약을 위해 인천으로 향했다. 그때도 역시 머리가 계속 아팠는데 그만 고속도로 위를 운전하다 가드레일을 받고 말았다. 첫 번째 가드레일을 받은 후 한참을 달렸고, 좌회전을 시도하려다 이번에는 직진하는 차와 부딪히고 말았다. 머리가 계속 아파서인지 정신이 몽롱했다. 고속 도로 위에서의 아찔한 사고였지만 천만다행으로 크게 다치진 않았다. 서둘러 보험 처리하고 수리를 위해 정비공장에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딸아이의 걱정도 있으니 다음날 병원을 가야겠다고 마음먹고선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아침, 새벽기도회에 가기위해 준비하려는데 내 몸이 말을 듣지 않더니 이내 그 자리에서 의식을 잃고 말았다. 놀란 아내와 자녀들은 서둘러 119에 신고했고, 나는 앰뷸런스에 실려 신촌세브란스병원으로 갔다. 정밀검사 결과 뇌출혈이었다. 알고 보니 혈관이 터진 상태에서 고속도로 위를 달리다 사고가 난 것이었고, 이미 전부터 전조 증상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의사는 “아스피린 종류의 약을 하루에 세 알씩 복용했던 것이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든 것 같다”고 했다. 어떻게 한 알도 아닌 세 알씩 매일 복용해 올 수 있었냐며 이전 병원 처방에 문제가 있었음을 알렸다. 머리 안에는 많은 피가 고여 빨리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상승된 혈압으로 인해 당장 수술이 어려웠다. 가족들은 기도를 시작했다.

 병원 중환자실에 온 것이 오전이었지만 수술은 그날 밤 7시 경이나 되서야 진행됐다. 의사는 “수술이 이뤄진다 해도 몸 일부 사용이 부자연스러워질 수 있다”고 조심스레 말하고는 수술실로 향했다. 가족은 간경화를 고쳐주신 하나님이 이번에도 기적을 일으켜주실 것을 간절히 바라며 수술실 앞에서 기도했다.

 감사하게도 수술은 50분 만에 끝났고, 오른쪽 귀 위로 관을 삽입해 고여 있는 피를 뽑았는데 총 1리터의 피가 나왔다고 했다. 수술 후 의사는 이런저런 질문과 손과 발을 들어보라는 몇 가지 행동들을 요구하더니 다음 날 일반병실로 옮겨도 좋다고 했다.

 기적이었다. 이렇게 빨리 일반병실로 옮긴 예는 드물었다. 그 후 내 증상은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회복됐다. 의사는 부지런히 운동을 해야 몸에 이상이 생기지 않는다고 했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병실 복도를 걸어 다니며 운동을 했다. 그리고 병원 예배실에 앉아 “히스기야의 눈물을 보시고 삶을 연장시켜 주신 주님, 내 삶도 연장시켜주소서”라며 눈물의 기도를 했다. 감사하게도 뇌출혈의 소식을 들은 이영훈 목사님이 홍콩 성회를 마치고 돌아오시자마자 나를 위해 안수기도해 주시며 이전보다 더 건강하게 해달라고 주께 간구하셨다.
 그 후 나는 뇌출혈로 병원에 입원한 지 9일 만에 퇴원했다. 그리고 9월 14일 CT촬영 결과 더 이상 문제가 없다는 결과를 들었다. 주변에 사고 소식을 들은 지인들은 다시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온 나를 보고 ‘깜짝’ 놀란다. 이 모든 기적을 일으켜주신 하나님께, 살아계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할렐루야!      


정리=오정선 기자


코웨이 람 탕 목사(미얀마) -

“여의도순복음교회 덕분에 감사가 넘쳐”

2월에 교통사고로 다리를 크게 다쳐 계단 이용 못해

이영훈 목사 주일예배 기도로 다리 완치 신유체험

 

나는 미얀마성서공회 총무를 맡고 있다. 미얀마는 전체 인구 2500만 중 83%가 불교를 믿는 불교국가다. 그러나 미얀마에도 소수민족을 중심으로 서서히 복음화의 불길이 일고 있다. 미얀마에는 135개의 소수민족이 있으며 약 200개의 부족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이들이 읽을 수 있는 부족어로 된 성경이 턱없이 부족하다. 미얀마 소수민족 언어 성서 번역 프로젝트가 한국교회의 도움으로 2011년부터 시작됐다. 현재 여의도순복음교회의 후원 속에 지난해 4월 라시드어 신약성경을 봉헌했고, 2018년에는 게바어 신약성경이, 2020년에는 라우투어 구약성경이 번역 및 제작이 완료될 예정이다.

 미얀마는 직접 성경 제작이 불가능하다. 때문에 주변 국가에서 성경을 제작해 미얀마로 반입해야 한다. 그래서 제작비용보다 운송 및 배포 비용이 훨씬 많이 들고 있다. 한국교회의 후원이 있어 이 모든 일들이 가능했으며 한국교회와 성도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나는 올해 2월 친 주의 마푸티라는 도시의 셈피 마을에서 ‘조퉁’이라는 부족어 첫 번역 성경 봉헌예배를 드렸다. 셈피 마을은 가파른 산 속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서 봉헌 예배를 드리고 돌아오다가 차가 미끄러지며 절벽 숲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당시 조사관에 따르면 150미터 가량을 굴러 떨어졌는데 차 안에는 나를 포함해 7명의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누구하나 생명을 잃지는 않았지만 모두가 부상을 입었다. 그 중 내가 가장 상태가 심각했다. 머리와 얼굴에 타박상이 있었고 윗니 하나가 부러지고, 앞니 세 개는 겨우 붙어 있었다. 오른쪽 쇠골은 부러졌고 왼쪽 발목은 심하게 탈구되었다. 부상 정도가 심하다보니 나는 당시를 제대로 기억조차 못했다.

 치료를 위해 여러 병원으로 이송하다 양곤에 있는 병원에서 집중적으로 치료를 받았다. 입원치료를 한 지 다섯 달 만에 처음 목발을 짚고 겨우 걸을 수 있었다.
 그러던 중 나는 8월 26일 아내와 함께 대한민국을 방문했다. 이번 방한은 미얀마 소수민족 성경번역 및 제작과 관련하여 후원교회들을 직접 찾아가 감사인사를 드리고 지속적인 협력과 기도를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후원교회들을 방문하는 과정에서 아직까지 완치되지 않은 발 때문에 목발을 짚고 다니려니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9월 3일 나와 아내는 여의도순복음교회를 방문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성전을 향하는데, 눈앞에 펼쳐진 계단이 걱정되었다. 오르는 것은 큰 어려움이 없었지만 아직까지 완치되지 않았던 다리로 내려오는 것은 매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예배를 통해 은혜를 받은 것은 물론 이영훈 목사님의 신유기도 시간에 믿음으로 다리가 나을 것을 선포하며 간절히 기도했다.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성전비서실에서 이영훈 목사님과의 만남을 기다리다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내가 어떻게 10여 개의 계단을 내려왔지?” 나는 목발도 잊어버린 채 두 다리로 걸어서 대성전에서 성전비서실까지 온 것이다. 나는 사고 후 계단을 두 다리로 걸어서 내려온 적이 없었다. 그랬다는 사실조차 잃어버릴 정도로 하나님은 내 다리를 치료해주신 것이었다. 나는 이영훈 목사님을 만나 바로 이 신유체험을 간증했다. 할렐루야.

 이번 방한을 통해 나는 미얀마의 복음화를 위해 한국교회 특히 여의도순복음교회의 기도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현재 미얀마는 약 400만의 크리스천이 있다. 이들을 위해 그리고 미얀마의 복음화를 위해 기도해주길 부탁드린다.      

정리=정승환 기자


엄덕산 성도(반석대교구) -

70세에 탈북해 기적의 하나님 만나 행복

탈북의 고된 여정 주님 함께하셔
죽음의 위기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체험

 북한에서 태어나 일흔의 나이가 될 때까지 살아온 나는 전형적인 무신론자였으며 주체사상의 신봉자였다. 70세가 되던 지난해에 탈북을 해 남한에서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은 분명 기적이다. 교회에 나와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성경공부를 하며 지나온 생활을 돌이켜보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 

 나는 북한 노동당 간부 출신이다. 60세에 정년퇴직을 하고 압록강 주변에서 살고 있었다. 우리집에 텔레비전이 있어서 국경 경비대원들이 가끔 우리집에 와서 남한 드라마를 보곤 했다. 경비대원들과 가깝게 지내며 나도 함께 남한 드라마를 봤다. 그런데 어느날 보위부에서 나를 불렀다. 내일 아침에 집으로 조사하러 갈테니 어디 가지 말고 있으라는 통보를 받았다. 나는 눈앞이 캄캄했다. 당장 내일 아침이 되면 체포가 되는 것이고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면 죽는 것이었다.

 나는 처갓집이 있는 함흥으로 바로 달려가 내가 죽었다고 전보를 쳤다. 그리고 그날 밤 서둘러 브로커를 만나 북한을 탈출했다. 5명이 함께 탈북했는데 국경경비대한테 돈을 찔러주고 순간 순간 위기를 넘기며 이동해야 했다.

 3월이라 얼음이 녹아내리고 있어 위험했지만 압록강을 건너야 했다. 압록강 가운데가 녹고 있어서 나무 두개를 놓고 건너는데 내가 건널 때 얼음이 녹아서 밑으로 빠지고 있었다. 일행은 다 브로커 쪽으로 넘어갔는데 나만 밑으로 빠지면서 떨어진 얼음에 매달렸다. 바로 앞에 국경경비대가 총을 메고 담배를 피고 있었다. 나는 죽었구나 생각했다. 다행히 내가 매달린 얼음이 중국 쪽으로 미끌어지면서 중국 국경을 넘어 나무를 붙잡을 수 있었다. 나를 발견한 경비대가 마구 총을 쐈지만 나무 뒤로 몸을 피해 다행히 안 맞았다. 산 속으로 들어가니 브로커와 탈북일행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은혜였다.

 우리는 바로 중국 심양에서 곤명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누워서 가는 2층짜리 버스를 탔는데 공안이 차를 세우더니 검열을 시작했다. 나는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북송되면 죽은 거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바로 내 앞에서 검열을 멈추고 돌아갔다. 놀라운 일은 이뿐 만 아니다. 곤명에 도착해 하룻밤을 자고 라오스 국경을 넘으려고 했다. 곤명산의 꼭대기가 라오스 국경이다. 또 다른 탈북자까지 2명을 더해 총 7명이 산을 넘는데 나는 너무 더워 겨울 옷을 벗으려고 잠깐 풀숲에 들어갔다. 그 사이 공안에게 모두 포위를 당해 끌려가 버렸다. 가까스로 살아난 나는 숲으로 도망쳤다. 숲이 어우러져 골짜기에 숨었는데 공안은 나를 찾으려고 산에 총질을 하며 수색을 펼쳤다. 나는 해가 질 때까지 낙엽 속에 숨어있다가 어두운 저녁이 되자 큰 나무에 올라가 주변을 살폈다. 달빛에 강물이 흐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거기가 메콩강이었다.

 강변으로 내려오니 대나무 집들이 있는데 어디선가 조선말 소리가 들렸다. 들어가보니 북한에서 온 아버지와 아들이 배를 기다리고 있다. 탈북자들이었다. 라오스에서 태국으로 넘어가는 배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만나다니 이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태국에서 한국 대사관 직원들과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들을 따라 편안히 태국으로 가 안전하게 한국 대사관으로 인도될 수 있었다. 태국에서 형식적인 재판을 받고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왔다. 북한을 떠난지 50일만에 고대하던 한국 땅에 도착한 것이다.

 하나원에서 전도를 받고 하나님을 알게 됐다. 성경을 선물로 받고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며 마음이 편안해졌다. 탈북자의 전도로 여의도순복음교회에 오게 됐는데 나는 우리 교회가 좋다. 주일날 오후 3시에 제2교육관 401호에서 새터민 지역예배를 드리는데 나에게 좋은 안식처가 되고 있다. 또한 성경공부 시간도 기다려진다. 

 내가 기적적으로 남한에 도착해 하나님을 알게 된 것 모두 하나님의 은혜이다. 지나온 삶을 회고해보니 모든 것이 주님의 예비하심이었다. 나와 늘 동행하시며 나를 지켜주신 야훼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


예병환 안수집사(마포2대교구) -

혼수상태에 있던 나를 일으켜주신 하나님

넘어지면서 머리 다쳐 의식 잃고 중환자실로
꿈속서 심방온 이영훈 목사 만난 뒤 기적 일어나


 지난해 12월 30일 새벽, 나는 화장실에서 발을 헛디뎌 넘어지면서 그만 머리를 다쳤다. 겨우 몸을 추스르고 주방에 물을 마시러갔다가 다시 넘어져 머리를 또 다쳤다. 두 번 ‘쿵’하는 소리에 놀라 아내 박명순 권사(사진)가 방에서 뛰어나왔다. 이후 상황 중 일부는 내 기억에 없다. 아내의 기억을 더듬어 상황을 설명하면 이랬다.

 겁에 질린 아내는 주방에 쓰러져 있는 나를 겨우 일으켜 거실 카펫 위로 옮겼다. 출가한 둘째 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통화가 되질 않자 급한 마음에 미국에 사는 아들에게 전화를 했다. 역시 통화가 되지 않았다. 아내는 자신이 전도한 약사 출신 구역 식구에게 급히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했고, 119에 빨리 전화하라는 말을 듣고 실행에 옮겼다. 5분도 되지 않아 119가 왔고, 나는 인근 대학병원으로 이송되는 중 코피를 쏟았다. 천만다행이었다. 다음날 오후 12시까지 CT 촬영 등 정밀 진단이 이뤄졌고, 일단 집으로 퇴원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와 또 다시 넘어지면서 병원으로 다시 이송됐다.

 서둘러 수술이 시작됐다. 의사는 머리에 찬 물만 빼면 일주일 후 퇴원이 가능하다며 아내와 가족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수술이 들어간 지 1시간도 되지 않아 나는 수술실에서 나왔다. 수술이 잘못되면서 피를 많이 쏟자 의사는 인위적으로 더 이상 피가 나오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고 병실로 옮겼다. 하지만 너무 급한 나머지 배변 호스를 연결하는 것을 잊고 말았다.

 잠시 의식을 되찾았던 나는 아내 대신 병간호를 하던 딸이 눈을 붙인 사이 홀로 화장실을 갔다가 또 다시 쓰러지는 변을 당하고 말았다. 그때부터 전혀 의식을 찾지 못했다. 중환자실로 옮겨져 치료가 진행됐다. 의식 없이 누워 있는 나는 폐렴 증세까지 더해지면서 건강이 더욱 악화됐다. 회복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자 의사는 가족을 대기시켰다.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신호였다. 신장투석 중이라 몸이 약한 아내는 그 소리를 듣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의식 없이 일주일간 중환자실에 누워있던 나는 어느 순간부터 의식 없이 중얼거리는 섬망 증상(뇌질환으로 인한 일종의 환각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3일 동안 5분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나를 위해 딸아이는 순복음가족신문에 실린 이영훈 목사님의 설교를 읽어주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설교 말씀을 천천히 읽어 내려간 딸이 마지막 기도문을 읽고 ‘아멘’ 하는 순간 내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27시간 넘게 자고 일어난 나는 처음 집에서 넘어진 일 이후 하나도 기억 못하는데 꿈에서 본 장면만은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이영훈 목사님이 주일날 바쁘실텐데 오후에 심방을 오셨어. 그리고는 예배를 드리자고 하시면서 야트막한 언덕으로 나와 사람들을 데리고 올라가셨지. 함께 예배를 드렸는데 참 감사하더라구. 그래서 예배를 마치고 목사님을 환송하며 감사인사를 드렸어”

 혼수상태에서 꾼 꿈이지만 마치 실제 일처럼 느껴졌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기적을 베풀어주실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기적처럼 몸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대부분 머리를 다쳐 뇌질환을 겪은 사람들은 몸에 이상이 오거나 지난날을 기억 못하는 정신적 어려움을 호소한다. 하지만 나는 오랜 시간 중환자실에 누워 있던 것과는 달리 재활 등 회복이 빨랐고, 기억력 또한 또렷했다.

 누구보다 건강 하나는 자신이 있다고 자부했던 나는 머리를 다쳐 쓰러져 3개월간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긍정적인 믿음을 갖고 부르짖어 기도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응답해주신다는 것을 알았다. 내게 이런 축복이 온 것은 아내인 박명순 권사가 지난날 수많은 사람들을 전도한 결과라 생각한다. 내가 쓰러져 있는 동안 아내가 전도해 장로님, 목사님이 되신 분들이 나를 위해 불철주야 하나님께 중보기도 했다. 모든 분들께 지면을 통해 감사인사를 드리고 싶다. 무엇보다 나를 살려주시고 고쳐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남기원 집사(마포2대교구) -

기도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들어주신다

고난 중 기도하며 새 힘 얻어
모든 복의 권한은 하나님께 있어


 나는 어려서부터 스님이 되고 싶어 부모님의 동의도 없이 스무살 때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에 진학했고 출가를 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불교를 전하기 위해 서울 도심 가까운 곳에 포교원을 세우기도 했다. 그런데 산에서 내려오기 전 불상 앞에서 기도만 하면 눈앞에 십자가가 보이고 고등학교 때 가장 친했던 친구 현승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네가 언젠가는 하나님께 돌아올 걸 믿으며 기도하고 있어” 그냥 헛 생각으로 치부하고 산에서 내려와 원래 계획대로 포교원을 세워 열정적으로 운영했다. 그런데 건물이 재건축되면서 1년 8개월 만에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을 정리한 뒤 아내 공정옥 집사를 만나 결혼을 했다. 고등학교에서 시간제 한문 교사로 근무를 하고 있던 중 아버지께 재정적으로 큰 지원을 받았다. 세상 경험도 없이 큰 돈을 벌겠다는 야심으로 사채업에 투자를 했고 실패했다. 6살 2살 된 두 아이들과 막막한 처지에 놓였다. 그때 도움을 준 처형의 전도로 우리 가족은 여의도순복음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형식적인 믿음생활인데도 교회 권사님 지구역장님들은 우리 가족을 위해 기도를 많이 해주셨다. 호프집을 운영하며 어느새 아파트도 마련했다. 제대로 믿음의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청주에서 호텔 사업을 크게 하는 또 다른 처형이 우리를 불렀다. 경제적으로는 풍요로웠지만 우리 부부의 신앙이 깊어지면서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죄책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호텔 나이트클럽과 단란주점을 관리하는 업무였는데 이전에는 전혀 아무렇지도 않았었다. 결국 그 일을 정리하고 전 재산에 대출을 보태 볼링장을 인수했다. 우리 부부는 하나님의 사랑에 눈을 떴다. 그러면서 교회가 건축 과정에서 빚이 생겼고 그로인해 경매 소리까지 들려오는 것을 알게 됐다. 교회가 살아날 길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교회의 고난은 견딜 수 없었다. 그때 우리 부부는 눈만 뜨면 교회로 달려가서, 또 집에서는 금식하고 작정하며 기도했다. 나는 너무나 간절했기에 교회의 고난이 내 것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고, 아내는 분명히 문제가 해결된 후 혹시 우리 가족이 교만해 질 수 있으니 이 교회를 떠나게 해달라고 했다. 볼링장은 처음에는 잘됐지만 사양산업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결국 10년의 청주 생활로 빈손이 되고 말았다.

 우리 부부는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몸부림쳤다. 매일 기도를 해야 하는데 막상 기도할 곳이 없었다. 그때 생각난 곳이 여의도순복음교회 바울성전이었다. 기도의 불이 꺼지지 않는 곳. 누구라도 언제라도 가서 기도할 수 있는 그곳이 그리웠다.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생활이 어려웠지만 큰 결심을 했다. 우리가 바울성전에 가까이 있으려면 교회 근처에 집을 마련해야했다.

 2002년 교회 옆 아파트에 살면서 주일예배는 물론 수요, 금요철야예배 등 공 예배는 물론 새벽예배와 철야예배도 다 드리도록 노력했다. 아내는 일을 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성전에 머물며 잠도 철야 기도하면서 잠깐씩 자면서도 무슨 힘이 나는지 낮에 일을 하러 나갔다. 그렇게 1년이 지나니 빛이 안드는 집이어서 그랬는지 아내의 건강이 많이 안 좋아졌다. 우리는 또다시 기도를 했다. 그리고 기적처럼 처제네가 새 아파트를 분양받았는데 세 들어온다는 사람이 없다며 우리더러 살라고 했다. 또 동서가 지금 사업을 하고 있는 이 상가에서 뭐라도 해보라며 자금을 빌려주었다. 세탁업을 한지 벌써 10년이 됐다. 아내와 힘을 합쳐 열심히 세탁소를 운영했다. 그런데 건설사와 가게 주인 사이에 법적 분쟁이 있었다. 쫓겨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주인이 졌다. 그런데 하나님은 새로운 길을 열어주셨다. 옆 상가를 우리가 구입할 수 있게 해주신 것이다. 사업장을 옮겨서 작년 9월부터 현재의 자리에서 운영중이다. 또 하나 예기치 못한 일이 생겼다. 원래 하던 우리의 사업장 자리까지 사게 됐다. 신기하게도 하나님께서 자금을 다 채워주셨고 결국 지난 5월에 그 곳도 구입해서 빨래방을 개업했다.

 아내와 나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기도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성전은 우리에게 생명 줄이고 기도의 끈이었다. 고난의 터널을 지나고 있는 분들은 모두 이 기도의 끈을 잡으시길 바란다.
 


최현희 집사(서대문대교구) -

“나는 비전을 품은 간호사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 통해 봉사하니 감사·행복 넘쳐

 나는 500g, 600g의 초미숙아들을 돌보는 신생아실 간호사다. 인큐베이터에 있는 미숙아들에게는 극소량의 약물이 투여되는데 자칫 소수점 하나만 바뀌어 넣어도 치명적일 수 있다. 몸에 붙은 테이프 하나를 잘못 떼면 진피까지 떨어져 나가는 미숙아들을 돌보니 나는 극도로 예민해져 후배들의 작은 실수에도 지적하고 야단치기 일쑤였다. 그래서 후배들은 내 뒤에서 나를 마녀라고 부르곤 했다.

 병원은 3교대 근무로 오후 근무가 있는 날은 밤 12시가 넘어야 집에 올 수 있었고 너무 피곤한 나머지 현관에서 쓰러져 잘 때도 많았다. 직장과 더불어 가정의 일도 만만치 않았다. 옆 동에 사는 시어머니는 내가 남편에게 작은 가사일이라도 부탁하려고 하면 무조건 막아섰다. 남편은 어머니라는 든든한 백을 두고 밖에서 친구들과 늦게까지 놀다오곤 했다. 결국 내가 없는 날이면 연로한 시어머니가 손주 둘을 돌볼 수밖에 없었고 육아로 지친 시어머니는 나에게 그 화를 푸셨다. 머릿속으로 이혼을 수십 번 생각하다가도 어렸을 적 할머니가 나에게 “현희야 너는 잘될거야. 잘될 수밖에 없어 할머니가 너를 위해 매일 기도해” 라고 하셨던 말씀이 떠오를 때면 그저 눈물만 하염없이 흘렀다.

 대학생 때만해도 나는 CCC(대학생 선교회)에 속해 예배드리고 봉사하며 신실한 크리스천의 삶을 살았었다. 그러나 졸업을 하고 직장을 다니며 점점 교회에 나가기 어려워졌고 무교인 남편이 내가 교회 가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기 때문에 2∼3년이 넘도록 교회를 나가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직장과 가정에서 겪는 고충으로 나는 여의도순복음교회에 등록하고 다시 교회에 나갈 것을 결심했고 지역장님의 권유로 의료센터에서 봉사하게 됐다. 봉사를 하며 난 분노와 우울했던 지난날 나의 모습을 회개했다. 간호사로서의 일을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만 여겼기 때문에 늘 스트레스가 심했는데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임을 깨닫게 되니 내 일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어느 날 기도를 하는데 예전 대학생 때 봉사했던 일이 떠올랐다. 다리가 없어 구더기가 끓는 텐트에서 살던 남성을 업고 나와 전도하고 그가 교회와 사회에 잘 적응해 나가도록 도왔던 그때의 감동이 내 마음에 다시 스며드는 듯했다. 나는 그때부터 마음이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로하는 일을 의료센터 봉사를 통해 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의료센터에서 나는 찾아온 사람들의 차트를 찾는 일과 한 달에 한 번 외부로 봉사를 간다. 200∼300명이 되는 사람들에게 주사를 놓다 보면 대화를 나눌 틈도 없다. 그러나 감사하다며 기뻐하는 사람들을 보면 나까지 행복해 진다. 교회에서 봉사를 하며 내 마음이 감사와 행복으로 젖어들자 예전의 나처럼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들어 하는 후배 간호사들이 측은하게 느껴졌다. 그런 후배들을 위로하고 기도를 해주니 이제는 후배들이 나로 인해 용기를 얻었다며 나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닮아 가고 싶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가정에도 변화가 생겼다. 교회를 못 가게 했던 남편이 지금은 잘 다녀오라며 인사도 하고 교회도 데려다 준다. 아직은 교회를 안 나오지만 우리 교회라고 말하는 남편을 보면 확실히 변화됐음을 느끼고 감사하다. 나는 앞으로도 봉사로 환자들의 육체는 물론 마음을 치유하는 전인간호를 하기 위해 기도할 것이다. “하나님 저에게 주신 간호사의 달란트 감사합니다!”                 

정리=김주영 기자

 


하렌달 전도사(인도 선가더처치) -

우리 가족을 구원하신 하나님

아버지 교통사고 이후 당장 끼니조차 해결 못해
주님 영접 이후 아버지 치료받고 온가족 구원 받아


 나는 현재 인도 선가더처치에서 배 선교사님의 목회를 도와 사역을 하고 있다. 지금은 온가족이 배 선교사님을 통해 구원받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원래 우리 집은 인도의 대표적인 종교인 힌두교집안이었다. 아버지의 체험을 통해 온가족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됐다.

 내가 10살이던 무렵이었다. 당시 아버지는 트럭운전사였다. 힌두교 제사에 사용되는 나무를 실어 옮기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교통사고로 그만 목이 돌아가고 왼팔이 골절되는 등 큰 부상을 입고 말았다. 급히 치료를 받긴 했지만 넉넉치 않은 집안 형편으로 지속적인 치료를 받기 어려웠고 아버지의 통증은 나날이 심해져 갔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위해 열심히 힌두교사원을 다니며 기도했지만 차도는 없었다.

 가난한 집안 사정에 아버지가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보니 당장 끼니를 이을 방법이 없었다. 어머니는 인근 시장에 가서 가족들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먹을 것을 구걸해야만 했다. 어머니가 겨우 얻어 온 것들로 우리 식구들은 하루하루를 연명해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시장에서 만난 분이 어찌된 일이냐며 사정을 물었다. 이전부터 알던 사이였던 그 분은 아버지의 딱한 사정을 듣고는 우리 가정을 도와주었다. 그 분은 크리스천이었고 어머니는 자연스레 그 분을 따라 교회에 나가게 됐다.

 아버지도 한 달 후에는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교회를 출석하기 시작한 후부터 아버지는 차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현재는 거의 완치 단계에 이르렀으며 가정의 형편도 좋아져 더 이상 끼니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특히 교회를 다닌 지 1년쯤 되었을 때였다. 어느 미국 선교사님의 간증집회가 열렸는데 그날 아버지와 어머니는 뜨거운 성령체험을 했다. 부모님은 이날 눈물로 회개를 하고 온 가족이 주님의 일에 헌신하겠다고 다짐했다. 실제로 아들 둘에 딸이 넷으로 총 여덟 식구인 우리 가정은 당장 형편이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집의 반을 교회로 사용해달라며 내놓았다. 지금 악발 목사가 시무하고 있는 글로리순복음교회가 바로 우리 가족이 살던 집을 허물고 그 곳에 교회를 지은 것이다. 우리 집이 있는 샤데리 지역은 인도 델리에서도 가장 낙후되고 상하수도 시설은커녕 전기조차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가정이 많은 곳이다. 아무런 희망도 없는 이 곳에 순복음교회가 생기고 복음이 전해지면서 전에 없던 생기가 돌고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심심찮게 들려오고 있다. 얼마 전 이영훈 목사님이 인도를 방문하셨을 때 이 곳에 오셔서 교회는 물론 여러 가정을 심방하셨다. 또한 우리 가정에도 심방을 오셔서 축복해주셨다. 온 식구가 이영훈 목사님께 기도를 받을 수 있어 너무나 감사하고 행복했다. 

 나는 여섯 자녀 중 장남으로 배 선교사님의 첫 번째 제자들 중 한 명이다. 같은 동기들 중 가장 어린 나이인 14살에 함께 신학을 공부해 지금도 열심히 인도복음화를 위해 기도하며 사역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우리 가족들의 중보기도가 나에게는 가장 큰 힘이 되고 있다. 인도는 12억 8000만의 인구를 가지고 있으며 힌두교와 불교 등 타종교가 강세를 보이고 있다. 복음화율은 아주 미비하지만 배 선교사님의 헌신과 섬김의 선교를 통해 미션센터가 세워지면서 젊은 청소년을 중심으로 빠르게 전해지고 있다. 인도에 여의도순복음교회와 같은 부흥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많은 크리스천들의 중보기도와 지원이 필요하다. 인도를 위해 많은 기도를 부탁드린다. 할렐루야. 
 


홍옥선 권사(관악대교구) -

무속신앙 신봉했던 시어머니부터 가족 모두 구원

주님 주신 사랑으로 병간호 극진히 해  
봉사·십일조 통해 가정에 큰 복 주셔

 

타종교에 의존하셨던 시어머니는 집안의 모든 대소사를 무당과 점쟁이에게 맡겼다. 어머니는 아들을 낳고 원인 모르게 아팠던 나를 위해서도 굿판을 벌였다. 그렇게 굿판이 벌어지는 날이 부지기수였지만 기대 이상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어머니에 이어 남편 역시 하나님과 전혀 무관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나는 1988년 처음 교회에 나가자마자 성령체험과 방언을 받았고 몰래 교회를 다니며 시어머니와 남편을 위해 기도드렸다. 금요철야를 앞두고 설거지를 할 때면 교회에 가고 싶어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로 애가 타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에게 혈액암이라는 병마가 찾아왔다. 어머니는 병을 고치기 위해 또다시 굿을 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썼다. 하지만 효험이 없었다. 그런 어머니를 보는 것이 안타까워 “교회에 가면 하나님께서 어머니의 병을 고쳐주실 것이니 함께 가보실래요”라고 말씀드리자 어머니는 병을 고치기 위해 무작정 교회에 따라나섰다. 그 후 어머니의 투병 생활이 이어졌다. 나는 ‘하나님, 우리 어머니가 잘 몰라서 우상숭배를 했어요. 용서해주세요’ 라며 어머니 대신 눈물로 회개기도를 드리며 어머니를 위해 날마다 기도했다. 집안의 모든 우상도 불태웠다.

 어머니는 3년 간 투병하셨고, 그 중 1년 6개월을 의식이 없으신 상태로 지내셨다. 어머니의 병간호는 참 힘들었다. 특히 대소변을 받아내는 일은 쉬운 게 아니었다. 뒤로 물러서고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어머니를 섬기라는 마음을 자꾸만 나에게 심어주셨다. 그때부터 어머니를 돌보는 일이 힘들지 않게 됐다. 어머니는 병상에서 구원의 확신을 얻고 결국 하나님 품에 안기셨다. 비록 우리 곁을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주님께 인도된 것을 계기로 우리 가족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됐다.

 어머니를 사랑으로 돌보며 기도하는 동안 나는 영적 훈련은 물론 아팠던 몸이 좋아지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나는 하나님 안에서 언제나 ‘예’라고 대답하며 순종하는 신앙생활을 했다. 그러자 주님께 순종하면 할수록 온 가족의 기도제목이 응답되는 복을 얻게 됐다. 자연히 전도로 이어졌다. 아파서 움직이기 힘들어하는 이웃, 타종교를 믿으며 완악했던 이웃을 데리고 교회로 왔고, 지금은 그 이웃의 자녀들까지 주님을 섬기는 축복을 받았다.

 철저한 십일조 생활도 내 삶의 축복 비결이었다. 적은 금액이라도 하나님께 드렸을 때 주님은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세세한 것까지도 챙기시며 삶 속에 많은 기적을 보여주셨다.
 두 자녀에게 임한 축복은 물론 남편의 신앙생활도 뜨거워졌다. 특히 남편은 교회 일에 충성이었다. 관악8교구 교구협의회의장을 맡고 있는 남편(김 원 장로)은 최근 우수교구협의회의장 상을 받으며 더욱 충성을 다짐하기도 했다.
 나는 하나님께 순종했을 뿐인데 돌이켜 보면 복을 차고 넘치도록 받은 것 같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신 33:29) 라는 말씀처럼 주님 안에 거할 때 진정 행복한 사람이 되지 않았나 싶다. 앞으로 주어진 삶도 주께 더욱 헌신하며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 소명을 실천하며 살고 싶다. 할렐루야!

정리=김진영 기자


류 양 성도(순복음동경교회) -

주님의 은혜 속에 깨어진 가정 회복

이혼 1년 후 재결합, 온 가족 구원받아
교회 봉사하고 섬기며 믿음의 가정 일궈


 어머니를 따라 신앙생활을 시작한지 1년 후 나는 남편과 함께 중국에서 일본으로 오게 됐다. 매일 돈을 벌기 위해 바쁘게 지내다 보니 교회는 가지 못하게 됐고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삶을 살게 됐다. 5년이 지나면서 삶에 지치고 남편과의 관계도 냉랭해졌다. 

 힘든 결혼생활에 지친 나는 마지막으로 이혼을 선택했다. 이혼은 부모, 자녀, 나 자신에게 큰 상처가 됐다. 중국으로 돌아가 어머니를 만나 5년 동안 가지 않았던 교회를 찾아가게 됐다. 그날 성령님께서 내 마음을 만져주셨다. 주님 앞에 죄를 회개하며 주님의 용서를 구하는 것 밖에 없었다. 다시 일본에 돌아와 순복음동경교회에 출석하며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서 참된 자유와 해방을 얻게 됐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이혼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깨닫고 결혼생활이 실패한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주님의 말씀대로 남편을 존중하지 않았던 것, 아내의 역할을 제대로 행하지 않았던 것, 남편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지 않았던 것, 그리고 주님과 점점 멀어졌던 것을 깨달았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어떻게 남편을 위해 기도할 것인가에 대해 가르쳐주셨다. 금식기도를 하고 믿음이 약해질 때에는 철야기도를 했다. 이렇게 기도한지 1년 정도 됐지만 이미 깨어진 가정은 회복될 여지가 없었다.

 지난해 12월부터 새벽기도에 참석했다. 시가끼 시게마사 담임목사님께서 매일 안수기도해주셨다. 나는 목사님께 기도받을 때마다 믿음을 가지고 큰 소리로 ‘아멘’을 외쳤다. 지난해 말 담임목사님께서는 2015년의 목표를 적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첫번째는 2015년에 주님의 사랑 안에서 남편과 회복되는 것, 두번째는 남편이 예수님을 영접하여 침례를 받는 것, 마지막은 남편이 교회 성가대에서 봉사하는 것을 목표로 적었다. 어느 날 아침 담임목사님께서 저에게 “주님, 이 자매님의 모든 기도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안수기도를 해주셨다.    

 어느 날 성령님께서 나에게 1월 13일에 남편을 만나서 죄를 고백하라고 감동을 주셨다. 1월 13일 그날은 바로 나와 남편이 이혼한지 1년째 되는 날이었다. 바로 그때 몇 번이나 내 연락을 받지 않던 남편이 내게 메일을 보내왔다. 나는 남편과 만나자고 했지만 남편은 단호히 거절했다.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통보를 하고 그때부터 금식기도를 시작했다. 1월 13일에 용기를 내어 약속한 장소로 가서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남편은 험한 어조로 “당신이 3박 4일 기다려도 나는 절대 안나가! 기다려도 소용없어!”라고 말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나도 화가 나서 돌아가버렸다. 나는 하늘을 보며 믿음을 달라고 기도했다. 그 때 여호수아 1장 9절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야훼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의 말씀을 받게 됐다. 그 말씀을 듣고 나서 나는 다시 그 약속했던 장소로 돌아갔다. 거기에서 40분 동안 기도하고 있을 때 남편의 전화가 왔다. 남편의 목소리는 순하게 누그러져 있었고 그 날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됐다.

 이혼해서 딱 1년째 되는 그 날에 우리는 다시 새롭게 시작했다. 남편은 2월에 나와 함께 순복음동경교회에 출석해 성가대 봉사도 시작했다. 올해 3월 28일에 시가끼 담임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식도 올리게 됐다. 지난 7월 남편은 침례도 받았다.

 친정 어머니는 늘 천국 가시기 전에 나와 남편의 관계가 회복되길 기도하셨는데 우리 부부가 다시 재결합 하는 것을 보시고 1개월 후 천국에 가셨다. 어머니의 기도응답에 아버지가 감동을 받아 그날 하나님을 믿게 되었고, 무속신앙에 빠져있던 할머니, 할아버지께서도 주님을 믿게 됐다.

 어떠한 고통 중에 있더라도 주님을 꼭 붙잡고 있으면 최고의 인생을 보낼 수 있음을 체험했다. 이 모든 은혜에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주님께 영광돌린다.


노병후 집사(동대문성전) -

수십 년간 고통이던 축농증 고침 받아

동대문성전에서 배운 기도 열정 삶에 적용
주께 헌신할 때 하나님이 치유 역사 베푸셔

 20살 무렵부터 시작된 축농증은 성악을 전공한 나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 싶어 방치해뒀던 것이 수십 년 환절기만 되면 나를 몹시 힘들게했다. 상태는 점점 심각해졌다. 처음에는 병원을 다니며 약을 처방받았는데, 나중에는 증상이 조금이라도 나타나면 약국에서 소염진통제를 사서 먹었다. 오랜 세월 약을 복용하다보니 약의 효능은 떨어지고, 몸은 점점 힘들어지면서 컨디션 조절에 어려움을 느끼게 됐다. 할 수 없이 병원을 다시 찾았다. 의사는 생각보다 심각한 단계라며 당장이라도 수술을 하자고 했다. 하지만 수술이 너무나도 두려웠다. 지인들 말에 의하면 수술을 한다 해도 효과를 크게 보지 못하니 안하는 게 낫다고 했다. 나는 하나님께 매달리기로 했다. “우리의 간구하는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 내 고질병인 축농증이 사라지게 해주소서. 축농증이 사라지게 해주소서!”

 동대문성전 찬양대 지휘를 맡은 지 2년 즈음 지나서였다. 어느 날 장인이 우연찮게 “소금물로 씻어내면 좋다는데, 한 번 해 보게나”하고 이야기하셨다. 나는 매일 소금물로 씻어내며 고침 받은 모습을 마음에 그리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리고 더욱 주를 향한 예배와 찬양대 봉사에 열중했다. 그런데 하루는 ‘어, 환절기가 지났는데 코가 멀쩡하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께 간구하며 주를 위해 열심히 봉사할 때 그동안 나에게 축농증이 있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지냈던 것이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주께 마음과 정성을 드렸을 때 위대한 하나님이 의사의 손 없이 나를 치유해 주셨다는 것을 깨달았다. 할렐루야!

 내가 동대문성전 찬양대 지휘자로 봉사하게 된 것은 6∼7년 전이었다. 나름 주일성수는 물론 새벽예배를 열심히 드리며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 신앙인으로 살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동대문성전에 와서 보니 이곳 성도들의 신앙생활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뜨거웠다.

 그런 성도들 틈에서 함께 신앙 생활한 덕에 나의 신앙은 뜨거웠고, 아픈 질병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었다. 나에게 신앙 도전을 준 동대문성전은 우리나라 경제 허브라 할 수 있는 동대문상권 내에 위치해 있다. 24시간 쉴 틈 없이 돌아가는 이 곳 상인들이 장사를 마치는 시간은 오전 5시. 일반인들과 비교할 때 저녁 퇴근 시간과 같다. 상인들이 고된 몸을 이끌고 허기진 배를 채우러 가거나 잠을 자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는 그 시간, 동대문성전 성도들의 발걸음은 매일 성전으로 향한다. 그 때부터 동대문성전은 부르짖는 기도, 애끓는 기도의 소리가 예배당을 가득 메운다. 그 기도 소리는 함께 기도드리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이 있다. 내가 동대문성전에서 마주한 이 첫 인상은 나의 신앙을 되돌아보게 했고, 그 덕에 신앙의 깊이는 더해지게 됐다.

 나는 주일 새벽이면 동탄 집을 나서 아침 일찍 동대문성전에 도착한다. 찬양대 연습을 위해 성전에 들어서면 새벽예배 후 그때까지도 강대상에 엎드려 기도하는 성도들이 있다. 내겐 그 기도소리가 하늘의 소리 같다. 성전 한 구석에 앉아 함께 기도하다보면 내 마음은 어느새 주를 향해 있었다. 찬양대원들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수는 결코 적으나 주를 향한 열정은 수 천, 수 만의 군대보다 뜨거웠다.

 찬양대원들은 날마다 동대문성전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며 주께 헌신한다. 나 역시 기도의 은혜, 병고침의 은혜, 찬양의 은혜를 주신 주께 받은 사랑을 갚기 위해서라도 동대문성전 찬양대 지휘 봉사에 더욱 열심을 다할 것이다. 주를 섬기는 것이 내 삶의 기쁨이자 행복이기 때문이다.      

 정리=오정선 기자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