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애 집사(강서대교구)

- 100일된 손녀의 척추측만증 기도로 나아

평일 철야 등 집중 기도하며 말씀 붙잡아
삶의 위기에 걱정하지 말고 하나님 만나야


 첫 손녀가 지난해 3월 24일에 태어났다. 손녀는 4.62㎏으로 다른 아이들 사이에서도 단연 눈에 띄였다. 크게 태어 난 편이지만 다행히 며느리의 건강도 별 탈 없이 진통 6시간 만에 자연분만 순산했다. 하나님께 감사했다. 아들과 며느리가 결혼할 때 준비 된 것이 없어 바울성전에서 평일 철야 기도를 했었는데 출산 과정에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이는 무럭무럭 자랐다. 100일 기념사진은 딱 100일에 찍지 않고 좀 지나서 찍는다고 해서 100일 지나고 열흘, 보름쯤 지났을 때 사진관에 갔다. 그런데 손녀가 목을 잘 못 가눠서 사진을 찍기가 어려웠다. 15일이 지나 다시 가서 촬영을 해 마무리했다.

 그런데 그즈음 아이를 안아 보면 아이 등이 손에 닿는 느낌이 좀 남달랐다. 등이 둥그렇게 뼈가 좀 튀어 나온 거 같았다. 동네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 검사를 했는데 병원에서는 척추측만증이라며 큰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대학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으려고 하니 예약이 굉장히 많이 밀려 있었다. 한 달 동안을 기다려야하는데 마음은 조급하고 겁도 많이 났다. 그 마음을 그대로 하나님 앞에 가져갔다. “아이를 정상이 되게 해주세요. 아이의 척추측만증을 고쳐주세요” 시도 때도 없이 기도에 매진했다. 주일에는 주일예배를 드리고 농어촌선교회에 가서 기도회에 참석하면 더욱 힘이 나서 기도에 집중할 수 있었다. 평일에도 평일 철야예배에 가서 기도하고 수요예배 후에는 농어촌선교회에 가면 중보기도회가 있어서 마음껏 기도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 떼를 쓰다시피 기도하며 또 기도했다. 그리고 추석날 남편의 추도 예배를 드릴 때에 담대하게 선포하는 기도를 했다. “하나님! 이 기도로 말미암아 더 이상 손녀의 척추측만증 기도를 하지 않게 해주세요. 나은 줄로 믿습니다”

 추석을 지나 9월 말에 드디어 예약 했던 진찰을 받을 수 있었다. 엑스레이 검사부터 했는데 정상이라는 판정이 내려졌다. 할렐루야! 손녀는 언제 무슨 일이 있냐 싶게 걸음마도 잘하고 예쁜 짓도 잘하고 튼튼하게 잘 자라고 있다.

 그리고 얼마 전에 우리 가정에 또 하나님께서 큰 복을 주셨다. 지난달 18일에 딸이 아들을 낳았다. 29살에 결혼한 딸이 5년이 지나도록 아이를 갖지 못해 근심이었다. 신앙이 좋은 딸은 믿음의 가정에 시집을 간 뒤 아이가 생기기를 기다렸다. 딸의 시댁에서도 손자를 간절히 기다리는 눈치였다. 병원에 다녔지만 이상이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상이 없는데도 바로 잉태가 되지 않는 것이 답답할 텐데도 딸은 상심하지 않고 기도에 더욱 힘썼다. 나도 딸을 위해 철야예배를 나와서 기도했다. 막막한 순간에는 성경 말씀을 붙들었다. 그중에서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예레미야 33장 3절)는 말씀은 기도 응답에 확신을 주었다. 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한삼서 1장 2절)는 언제나 큰 힘을 주었다.

 드디어 지난해에 잉태의 소식을 들었고 순산하게 해주실 하나님께 감사하며 미리 감사의 예물과 함께 감사 기도를 드렸다. 8시간의 진통 후 딸은 건강한 아들을 순산했다.

 그동안 하나님께 기도해서 많은 것을 응답 받았다. 날마다 매 순간 하나님과 동행하며 기도할 수 있으니 걱정이 없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언제나 기도하며 살기를 원한다. 2011년부터 농어촌선교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무엇보다 기도를 많이 하는 선교회라서 찾아오게 됐다. 앞으로도 기도의 용사로서 나라를 위한 기도, 다른 사람들을 위한 중보기도도 열심히 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문정기 권사(동작대교구)

-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주시는 하나님

교통사고로 의식 잃은 채 중환자실 입원한 손자
1000명이상이 함께 중보기도 해 3주 만에 퇴원


 새해 우리 교구에서는 각자 성경 구절 카드를 한 장씩 뽑는데 나는 시편 21편 2절의 말씀이 적힌 카드를 뽑았다. ‘그의 마음의 소원을 들어 주셨으며 그의 입술의 요구를 거절하지 아니하셨나이다’ 이 말씀을 읽고 또 읽을수록 주님이 주실 은혜를 기대하게 되고 사모하게 됐다. 그래서 100일 기도를 작정하고 2일부터 매일같이 새벽기도를 열심히 드렸다. 마지막 날이던 4월 11일 기도를 마치고 둘째 딸에게 긴급한 목소리의 전화가 걸려왔다.

 “엄마 재민이가 교통사고를 당했어”라며 우는 딸의 목소리에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손자 재민이가 학원에 가던 중 횡단보도를 건너다 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재민이는 횡단보도에 파란 불을 확인하고 길을 건넜지만 상대방 운전자의 부주의로 그만 사고가 난 것이었다. 아이는 차에 치여 의식을 잃고 인근 병원으로 후송되었다고 했다. 인근 병원에서는 아이의 상태를 고려해 대학병원으로 다시 후송보낼 정도로 상황은 긍정적이지 못했다. 실제로 내가 병원에서 아이를 보니 팔다리가 묶인 채 인공호흡기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 절로 눈물이 날 정도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평안했다. 반드시 하나님이 재민이를 우리 가족을 지켜주실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그래서 하나님은 새해부터 나를 기도로 준비하게 하셨나보다.

 당시 의사는 재민이의 상태를 살피며 머리 앞부분에 손상이 있고 귀가 찢어지고 출혈이 있는 것을 볼 때 “살아도 식물인간이 될 것”이라며 절망적인 이야기만 했다. 심지어 애가 아직 깨어나지 않아 수술조차 할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우선 내가 봉사하고 있는 (사)순복음실업인선교연합회 농어촌선교회 회장 임은태 장로에게 전화해 기도를 요청했다. 장로님은 선교회원들을 비롯해 아는 지인들에게 중보기도를 요청했다. 큰 딸도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의 식구들에게, 둘째 딸도 지인들에게 기도를 요청했다. 나를 비롯해 1000명이 넘는 분들이 손자 재민이를 위해 기도했다. 많은 분들이 내게 문자로 손자를 위해 3시간, 5시간 기도했다며 하나님이 꼭 손자를 치유하실 거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보내며 위로하고 격려해주었다. 특히 임 장로님의 ‘하나님이 반드시 살려주시고 재민이를 반드시 크게 쓰실 것’이라는 메시지는 큰 위로가 됐다.

 기도의 힘 때문인지 조금씩 차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튿날 아이가 눈을 뜨긴 했지만 아직 의식은 없었다. 셋째 날에는 완전히 눈을 뜨고 “아빠, 엄마”하며 부모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4일 째에는 일반실로 옮기는 등 급속도로 상태가 호전되기 시작했다. 나는 “하나님, 재민이가 수술을 받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니, 꼭 자기 발로 일어나 걸어서 퇴원하게 해주세요”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한 때 재민이가 잠시 의식을 잃어 다시 중환자실로 옮겨지기도 했지만 다시 곧 의식을 찾아 일반실로 옮기게 됐다. 내가 줄곧 기도를 요청한 결과 재민이를 위해 기도하는 분이 1300명에 이를 정도였다.

 기도의 힘이 세질수록 아이는 급속도로 건강을 되찾기 시작했다. 검사결과 뇌를 감싸고 있는 뼈에 금이 가긴했지만 뇌손상이 없고 세균침투도 안되어 수술이 필요없다는 판정을 받았다. 할렐루야. 재민이는 사고를 당한지 한 달도 안된 3주 만에 병원에서 퇴원해 지금은 건강히 학교를 다니고 있다. 당시 담당의사는 “이것은 정말 기적이다. 식물인간이 될 수 있었던 아이가 벌써 회복되어 학교를 다닐 수 있다니 기적이 확실하다”며 재민이의 빠른 회복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기도할 때 응답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린다. 또한 재민이가 의식을 차리고 일어설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한 모든 분들에게 다시한번 감사드리고 나도 교구 식구나 다른 분들을 위해 늘 중보하는 기도자가 되겠다.
 


서형석 안수집사(서대문대교구)

- 오토바이 사고로 죽음의 문턱에서 얻은 새 삶

주님 주신 새 생명으로 봉사하니 진정 행복
동역자들의 간절한 중보기도, 하나님 치유 체험

 

2016년 9월 29일, 점심식사로 자리를 비운 직원들 대신 거래처에 자동차 부품 배달을 위해 평소처럼 오토바이를 탔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타이어에 펑크가 나면서 내 머리와 몸은 오토바이를 이탈해 아스팔트 바닥에 그대로 곤두박질 쳤다.

 1년여의 시간이 흐른 후, 나는 아내(박근숙 지역장)의 도움을 받아 사고로  사라진 기억의 조각들을 하나 둘씩 찾아내면서 사고 전말을 알게 됐다. 아내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사고 당일, 내가 쓰고 있던 헬멧이 벗겨져 뇌출혈이 일어났다. 또한 오른쪽 갈비뼈 전체와 늑골이 부러졌다고 했다. 병원으로 옮겨져 긴박하게 진행된 대수술 후 의사는 수술 도중 심장이 정지돼 심폐소생술로 생명을 가까스로 연장했으며 뇌압 상승으로 인한 뇌 손상을 막고자 뇌뼈를 냉동실에 보관 중이라고 아내에게 말했다. 수술 후 중환자실에서 20여 일을 보내고 일반병실로 옮기려던 시기, 약의 부작용으로 아물지 않았던 뇌가 또 터졌다고 한다. 아내는 “퉁퉁 부은 당신 모습이 마치 죽은 사람 같았다”고 말했다. 두 번의 뇌수술 후 의사는 생명은 살렸지만 자가호흡이 불가능해 내일이라도 당장 목에 구멍을 뚫어 호흡기를 끼워야 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음날 내가 호흡기 없이 호흡을 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추가 수술은 없었다.

 나는 어떻게 살아난 것일까? 바로 기도의 힘이었다. 아내 말로는 사고 직후부터, 매일같이 가족은 물론 서대문대교구의 박근우 목사님과 8교구 식구들, 남선교회 안내실의 동역자들이 끊임없이 찾아와 기도해 줬다는 것이다. 심지어 아내는 의식이 없는 나를 대신해 사업이 번성하면서 세상 즐거움을 버리지 못했던 나의 죄를 눈물로 회개하며 끊임없이 기도했다고 고백했다.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은 나를 살려주신 것도 감사한데 더 큰 은혜를 베푸셨다. 거듭된 수술로 인해 엄청났을 통증을 온전치 못한 인지력 때문이었는지 전혀 느끼지 못했다. 통각을 잃어버렸나 걱정했는데 몸이 회복 단계에 이르자 주사 바늘의 아픔이 느껴졌다. 또한 뇌뼈를 넣는 시술은 후유증이 많다던 염려에도 불구하고 아무 이상 징후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괴사로 인해 오른손 전체를 절단해야 한다는 의사 소견에도 중지 끝부분만 절단함으로 오른손을 지켜주셨다. 이 뿐만 아니다. 수 천 만원에 달하는 병원비도 국가유공자 혜택을 받아 전액 지원을 받게 하셨다. 이 모든 과정에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는 것을 확신한다. 할렐루야!

 나는 사고 발생 3개월 만에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제는 다시 태어난 듯 매일 매일이 새롭다. 사고로 잊었던 기억도 차츰 회복되면서 가까운 곳은 혼자 갈 수 있을 정도가 됐고 온전치는 못하지만 일상생활에 큰 어려움이 없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고난을 통과하면서 얻은 이 감사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내게 주신 축복이다. 이 모든 과정이 감사해 작년 10월부터 다시 시작한 남선교회 안내실 봉사를 더욱 열심히 하고 싶다.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과  기도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정리=김진영 기자


김일선 집사(구로대교구) -

주님 의지해 믿음으로 기도, 뼈암 치료받아

눈물어린 기도와 간구에 하나님 역사 일어나
조용기 목사님 안수기도 받고 믿음으로 승리

 나는 충남 아산에서 약국을 운영하고 있는데 주일마다 여의도순복음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린다. 버스타고 기차타고 대중교통을 여러번 바꿔타고 오느라 왕복 6시간이 걸리지만 여의도순복음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은 참으로 행복하고 감사한 일이다.

 나는 2001년 3월 대장암 말기로 수술을 받았다. 암덩어리가 너무 커서 다른 곳으로 퍼지지는 않았나 하고 X-ray를 50회나 촬영했다. 5시간이나 정밀 조사했지만 다행히 전이된 곳이 없었다. 안심하고 살아가던 중 4년이 지난 후 이상하게 소변이 잘 나오질 않았다. 1년동안 전립선 약을 지어먹고 지냈는데 소변이 안나오는 것은 둘째치고 갑자기 심한 통증과 함께 밤에 잠도 잘 수가 없었다. 극심한 허리 통증에 뜬눈으로 밤을 새우는 일이 잦았고 열흘 동안 잠을 못자는 일도 있었다. 아내 강미영 권사는 밤새도록 따뜻한 물수건으로 허리, 다리, 어깨 등을 닦아주며 내가 편안히 잘 수 있도록 힘써 간호해주었다. 기도의 용사인 아내는 눈물을 흘리며 나의 병고침을 위해 하나님께 매달렸다. 나는 참다못해 2006년 3월 병원을 찾아갔다. 암이었다. 병원에서는 입원해서 수술을 받으라고 했지만 우선 통원 치료만 하기로 하고 주사만 맞고 집에 돌아왔다. 아내의 눈물어린 기도와 나의 간구에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됐다. 그렇게 아프던 통증이 사라지고 밤에 잠도 잘 잤다. 일주일 후 CT촬영 결과를 자세히 보기위해 다시 병원을 찾았다. 나는 전립선비대증이나 전립선암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사진이 온통 새까맣게 되어 있었다. 전립선암이 전이되어 등쪽에서부터 엉덩이까지 모든 뼈가 다 새까맸다. 뼈암이었다. 담당의사는 전립선암은 수술하지 않고 호르몬 주사와 약물요법으로 치료하면 20%정도 살 가능성이 있지만 뼈암은 치료가 어렵다고 말했다. 아내는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기도하면 분명히 희망이 있고 치료가 될 것이라고 큰소리 쳤다. 하나님이 살려주신다고 믿음으로 외치고 온 그 날 그렇게 아프던 통증이 사라지고 잠을 편히 잘 수 있었다. 아내가 기도할 때마다 살려주신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늘 들었기에 주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확신이 있었다. 믿음으로 선포하고 기도하던 중 조용기 목사님께 안수기도를 받게 됐다. 목사님은 내 병의 치료를 위해 간절히 기도해주셨고 나는 하나님이 함께하시니 반드시 치료될 것이라고 강한 믿음을 갖게 됐다.

 매달 호르몬주사와 약물요법으로 치료를 받았다. 담당의사는 나를 볼 때 마다 아프지 않느냐고 물었다. 죽을 줄 알았는데 계속 혼자 걸어서 병원에 잘 나오니 이상했던 것이다. 3개월이 지난 후 의사는 다시 CT촬영을 해보자고 했다.

 CT촬영을 하고 그 결과를 보러 일주일 후에 아내 혼자 병원으로 갔다. 담당의사는 컴퓨터를 보더니 고개를 갸우뚱 했다. 처음 촬영한 사진은 모든 뼈가 새까맸는데 3개월 후 촬영한 사진은 등뼈가 거의 하얗게 되어 있었다. 아내는 사진을 보고 무척 기뻐했다. 하나님의 기적을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이다.

 우리 부부는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한없이 울었다. 그렇게 1년을 통원치료 했다. 의사는 늘 내게 아프지 않느냐고 물어보았다. 내 얼굴이 점점 좋아지는 것을 보고 의사는 CT촬영을 다시 하자고 했다.

 검사 결과를 확인하는 날 담당의사는 사진을 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어떤 것을 먹었냐고 물었다. 이어 나를 보더니 이 환자는 도저히 살 가능성이 1%도 없었고, 며칠 안에 땅에 묻힐 사람이었다며 기적이 일어났다고 말했다. 뼈암이 사라진 것이다.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나를 위해 함께 기도해주신 믿음의 형제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서성애 권사(마포2대교구) - 가족 전도의 열쇠는 ‘사랑’입니다

20년 간 소원한 남편의 구원 응답
경제적 시련 취업의 기쁨으로 변해

 20대 초반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한 남편과 나에게 1남 1녀 예쁜 아이들이 태어났다. 아이들은 내 생애 전부였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존재들을 위해 무엇을 해주어도 부족한 것만 같았다. 항상 내 아이가 정말 잘 되기를 바라고 바랐다. 하나님께 의지하면 그 꿈이 이뤄질 것만 같았다. 그런 나의 욕심이 스스로 교회를 찾아가게 했다. 마침 교회에 가고 싶어 하는 나를 이웃이 여의도순복음교회로 인도했다.

 아이들만을 생각하며 온 교회였는데 예수님의 사랑과 구원을 받은 은혜로 기쁨이 내안에 충만해졌다. 이 기쁨을 남편도 함께 느꼈으면 해서 남편을 전도했다. 남편에게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나는 불교신자니까 나에게는 절대 강요하지 마라” 하지만 내 마음속에는 남편을 구원시켜야할 사명이 생겼다. 이토록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릴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남편을 사랑하고 섬기기를 하나님 섬기듯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남편을 구원하기 위해 기도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도했다. 20년 간 많은 사람들이 나의 전도를 받고 교회를 다니는데 남편의 완고함은 더욱 심해져갔다. 교회에 가자는 말을 할 때마다 조용했던 집안이 뒤집어지니 아이들도 힘들어했다. 사랑하고 섬기는 모습을 보이려 노력 했지만 남편은 겉 다르고 속 다르다며 비난을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난해 갑자기 남편이 실직을 하게 됐다. 그동안 가족들을 위해 헌신하며 가장의 역할을 해온 남편이었기에 경제적인 어려움은 남편의 마음을 크게 흔들었다.

 그즈음 나는 교회에서 권사 직분을 받으라는 권유를 받았다. 가장 힘든 시기였지만 오랫동안 기도하고 있었기에 기쁘게 받아들이려했다. 하지만 그 소식은 남편의 화를 돋궜다. 술을 잔뜩 먹고 온 남편은 나를 심하게 핍박하며 이혼을 강요했다. 주변사람들도 나와 남편을 위한다면서 이혼을 종용했다. 기가 막혔다. 내가 받은 모멸감과 고통보다도 남편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눈물이 흘렀다.

 간밤의 소란을 뒤로하고 길에 나섰다가 남편 생각에 바닥에 주저앉아 한 두 시간씩 기도를 했다. 그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였다. 처음에는 남편의 손, 발목을 잡고 기도하다 온몸을 끌어안고 기도했다. 나는 권사 직분을 받고 기도로서 제2의 인생을 살 것을 서약했다. 그런 헌신과 기도 속에 남편에게 서서히 변화가 일어났다. 그리고 새해를 한달 앞둔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은 스스로 교회에 가겠노라 선언하고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며칠이 흐르자 자신도 자녀와 손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아버지가 되겠다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남편을 위한 기도 중 한 가지 기적을 허락하셨다. 쉰이 넘은 나이에 내가 서울 시내 유명 대학병원 취업에 성공한 것이다. 결혼 전 복지관에서 근무했었지만 가정주부로서의 생활만 20년 넘게 했었는데 전공을 살릴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특히 내가 속해 있는 업무와 환경이 아동병동이어서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에 보낸 이유가 무엇인가 늘 생각할 수밖에 없다.

 기도의 어머니가 되게 하신 것은 내 자녀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 교회의 아이들과 청년들만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누구보다 기도가 필요한 약하고 아픈 아이들을 섬기고 기도하라는 책임이 생겼음을 깊이 깨닫게 됐다. 새해가 밝았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을 많은 분들이 사랑과 기도의 힘으로 승리하길 기도한다. 밤이 아무리 깊어도 새벽은 온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이다.

정리=복순희 기자


고순덕 권사(금천대교구)

- “주님 은혜로 아팠던 다리가 회복됐어요”

기도하며 봉사할 때 무릎 통증에서 벗어나
하나님 사랑 이웃에게 전파하는 새해 다짐

 지난해 3월부터였을 것이다. 다리가 서서히 아프더니 급기야 높은 곳에서 내려오다 다리를 잘못 디딘 것이 무릎 연골 파열로 이어졌다. 그동안 무릎 때문에 통증클리닉도 다녀보고, 침도 맞아보았지만 결국 소용이 없었나보다. 찢어진 부위를 꿰맨다하더라도 다시 파열될 위험이 있어 병원에 20일간 입원해 치료만 받았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나를 찾아와 위로해주고 기도해주는 목회자님과 교구 식구들이 고마워 눈물이 났다. ‘이런 큰 위로를 받았으니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무리하지 말라는 의사의 권고를 받고 남편의 부축을 받아 퇴원했다. 간신히 일어나 힘겹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이었다. 꿈에 조용기 목사님이 우리 집에 심방오셔서 나를 위해 안수기도해주셨다. 그리고는 언제 일어나 가셨는지 목사님의 뒷모습을 보다가 잠에서 깼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방 밖으로 나왔다. 이 광경을 보던 남편이 깜짝 놀라 “당신 다리가…”하며 소리쳤다. 그러고 보니 아무 것도 의지하지 않은 채 내가 걷고 있던 것이 아닌가. 그래도 무릎 연골이 손상된 상황이라 병원에서는 산에 오르거나 많이 걷거나 오래 서 있지 말라고 계속 경고했다.

 올해 여름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에서는 권사금식기도대성회가 열렸다. 각 교구에서 성회 때 봉사할 권사들을 선정했는데 그 가운데 내가 포함돼 있었다. ‘다리도 안 좋은데 무리가 되면 어쩌나’ 걱정이 앞섰다. 성회 전날까지 약을 먹고 3박 4일 일정으로 집을 떠났다. 다행히 내가 할 봉사 자리가 기도원 대성전 찬양대석 옆이라 오르내릴 일이 없어 감사했다.

 그런데 성회 두 번째 시간부터 내 눈에 들어오는 이가 있었다. 성전 맨 앞에서 두 번째 줄에 앉은 예쁘장하게 생긴 자매였는데 왼쪽 손이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내 손을 내밀며 반갑다고 인사하자 자매는 아픈 왼손을 뒤로 감추고 건강한 오른손을 내밀어 인사했다.

 나는 아픈 손을 달라했고, 그 손을 꼭 잡으며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깐 힘내세요”라고 말했다. 그때부터 자매는 예배 시간만 되면 나를 보고 웃어줬고, 나는 그런 자매를 위해 ‘하나님의 은혜로 힘을 얻어 하나님을 위해 일하게 해달라’고 중보 기도했다. 그렇게 은혜로운 성회를 마치고 마지막 시간에 만난 자매는 생각 날 때마다 자신을 위해 기도해달라며 이름을 알려줬다.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하산 준비를 하는데 기도원에 있는 내내 아픈 다리를 위해 약을 먹지도 않았고, 뛰어다니며 봉사하는 동안 전혀 힘들지 않았다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됐다. 긍휼의 마음을 안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 봉사했을 때 하나님이 내 아픈 다리를 고쳐주셨던 것이었다. 할렐루야! 여름 이후 나는 통증없이 지내고 있다.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도 모두 버렸다.  

 하나님은 진정 전능하시고 살아 역사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시다. 지난날 우상숭배를 하던 어머니 밑에서 자란 나에게 “이 안에 모든 답이 있다”며 성경을 건네주시던 시고모님을 통해 주를 알게 하셨던 하나님. 그리고 자녀삼아 주시더니 복음 전파의 일꾼으로 세우셔서 친정식구들은 물론 이웃 전도에 헌신하게 하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나는 하나님을 믿고 주께 순종하며 나아갔고 신앙생활 1년 만에 방언 은사를 받았다. 불타는 열정에 못 이겨 하나님을 전할 때 수많은 이웃을 믿음의 동역자로 만들어주셨다. 전도하면서 깨닫게 된 것은 ‘사명을 주실 때 반드시 전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아팠을 때 나를 찾아 눈물로 기도해준 믿음의 동역자를 보면서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제 그 사랑을 기억하면서 몸 바쳐 주께 더욱 헌신하는 새해를 만들어가겠다.

정리=오정선 기자


윤혁분 권사(마포2대교구) - “주님 영접하자 아들의 병이 나았어요”

가정을 묶고 있던 귀신의 저주 떠나가
예수 보혈 의지할 때 전도·양육 은사 받아

 오래 전 시어머니는 자신의 삶이 다 돼 간다며 대굿을 하시겠다고 해 남편 몰래 돈을 해드렸다. 어머니는 일요일에 굿을 할 테니 시댁으로 내려오라고 하셨다. 가서 보니 영화에서처럼 굿을 하고 있었는데, 한국전쟁 때 죽은 시숙의 영혼을 결혼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그날 밤 꿈에 죽은 지 10년 된 시누이가 죽은 시숙의 영혼을 데리고 우리 집으로 들어오는 악몽을 꾸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굿을 한 지 일주일 후 당시 4살이었던 큰 아들의 눈 주변이 하얗게 변했다. 병원에 갔더니 신장염이라고 했다. 약을 먹으면 곧 나을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대학 병원에서 약을 처방받고 치료되는 줄 알았는데 1년 뒤, 아들의 병이 재발되면서 나았다 재발 됐다를 4번이나 반복했고, 그러는 사이 아이는 거반 죽게 되었다.

 아들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 병원 검사실 앞에 앉아 있는데 두 노인이 나에게 다가와 복음을 전했다. “애 엄마, 교회를 다녀야 아들을 고칠 수 있어”라는 말에 나는 재수가 없다며 화를 냈다.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있던 나는 검사 후 병실로 돌아와 아들의 침대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

 나는 꿈에 하얀 옷을 입고 붉은 띠를 띠었으며, 양 한 마리를 품에 안고 있는 분을 보았다. 그 분은 나에게 “교회로 오면 내가 고쳐주겠다”며 두 사람을 가리키며 그들을 따라가라고 했다. 조금 전 검사실 앞에서 나를 전도했던 분들이었다.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깬 나는 부리나케 검사실로 달려갔다. 다행히 그분들이 거기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

 이후 전도를 받고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출석하게 됐다. 그리고 2주 동안 전도사님 댁으로 매일 찾아가 아이를 위해 기도를 받았다. 2주가 지났을 때 전도사님은 “하나님이 고쳐주셨다. 더 이상 병원에 가지 말라”고 하셨다. 믿음이 없던 나는 ‘점쟁이도 아니면서 그걸 어떻게 아냐’며 소리 지르고 화를 냈다.

 그런데 이틀 후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더 이상 약을 복용하면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며 약을 끊어보자고 말했다. 약을 떼면 아들은 어떻게 되는 거냐며 걱정스레 물었다. 그러자 의사는 아이를 위해 일단 약을 떼보자고 강하게 말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아들은 그때 약을 뗀 이후 41세가 된 지금까지 재발 없이 건강하게 지내고 있다. 할렐루야!

 나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예배드릴 때 참으로 평안했다. 금요철야예배를 드리는데 옆에 있는 사람이 뜨겁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성령을 달라’고 간구했다. 당시는 새벽 4시까지 예배를 드릴 때였다. 잠시 화장실을 갔다 다시 성전으로 올라오는데 성전 벽면에 적힌 성구가 마음에 깊이 들어왔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는 요한삼서 1장 2절 말씀이었다. 성전으로 올라와 기도하는데 성령이 내게 임했다. 주님은 철야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나에게 귀한 환상을 보여주셨다. 대성전 십자가에서 흐른 피가 내 머리로 뚝뚝 떨어지는 것이었다. 나는 그 일 후로 사람들에게 말씀을 증거할 때나 아픈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전했다. 보혈의 능력을 의지할 때 주님은 나를 매일 철야예배와 말씀 묵상으로 훈련시켜주셨고, 지역장으로서 전도와 지역 부흥의 사명을 허락해주셨다.

 기도를 충분히 하고 거리에 나서면 사람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주님의 복음을 받아들였다. 지역은 젊은이들과 어린아이들이 불어나면서 70명까지 늘어나기도 했다. 주께 헌신할 때 주님은 세 자녀에게 복을 주셨고 지금은 자녀들이 찬양대원으로, 예배 통역 봉사로 주님을 열심히 섬기고 있다. 병고침의 기적과 지역 부흥이라는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이성민 성도(국제사역국 영어예배부)

- ‘꿈’꾸고 기도해 美 명문 컬럼비아대학 합격

넓은 세상 향해 탈북, 국제사회에 북한 실상 보고
한반도 평화 통일한국 위한 외교 전문가 비전


 꿈에 그리던 미국 명문 아이비리그 중 하나인 컬럼비아대학교로부터 드디어 입학 허가를 받았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꿈을 안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지난해 우연한 기회에 미국 유수 대학을 방문하게 된 나는 국제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컬럼비아대학교의 문을 두드렸다. 학장님을 만나 내가 가진 꿈을 얘기했을 때 그는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꿈이 이뤄지기까지 나는 하나님께 간구하며 계속 환경의 문이 열리길 기도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하나님이 너의 기도에 응답해주실 것”이라며 기도하셨다. 그리고 마침내 기도한대로 꿈이 눈앞의 현실로 나타나게 됐다.

 나는 탈북자다. 세상과 단절된 곳, 북한에서 태어나 자란 내가 더 큰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건 10살 즈음이었다. 김일성 사후 북한은 고난의 행군으로 인해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 역시 배고픔의 고통이 심했다. 강 건너 보이는 중국 땅은 환한 불빛으로 부유해 보였지만 북한은 너무나도 어두웠다.

 하루는 집 앞 강으로 놀러갔다가 중국 아이와 맞닥뜨렸다. 그 아이는 나에게 초콜릿 하나를 건네주었다. 초콜릿이라는 것을 처음 보았고, 그 달콤함에 놀랐다. 그 뒤로 중국 아이는 나에게 몇 번 더 초콜릿을 갖다 줬다. 순수한 마음에 중국 아이와 친해진 나는 강을 건너 그 아이의 집에 놀러가게 됐고, 내가 살던 북한과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그 일은 결국 내가 더 큰 세상을 동경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줬다. 

 바깥세상으로 나가게 된 것은 내가 아닌 누나가 먼저였다. 돈을 벌어오겠다고 중국으로 떠난 누나는 탈북자에 대한 북한의 경계가 강화되면서 결국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가족이 다 같이 살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남한 땅으로 가는 것뿐이었다. 누나에 이어 2010년 나를 비롯한 가족이 남한에 오게 되면서 우리는 비로소 함께 살게 됐다. 자유의 땅을 밟기까지 겪어야 했던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다.

 남한에서 대학에 들어간 나는 이 곳에서 살기 위해서는 영어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단어 암기장을 사서 공부를 시작했다. 어려운 형편에 학원을 다녀보았지만 시간과 돈의 여유가 내겐 없었다. 우연히 유튜브를 통해 영어 강의 프로그램을 듣게 됐고, 틈만 나면 영어공부에 열중했다. 화장실에 스피커를 달아 샤워할 때도 영어공부를 했다. 2012년에는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UN) 인권이사회에 참석해 영어로 북한의 실생활을 보고했다. 이듬해는 캐나다 정부의 초청으로 캐나다의회에서 인턴으로 활동하는 기회가 주어졌다. 모든 것이 기적 같았다. 

 지난해 초 탈북 학생들이 한 자리에 모인 행사에서 나는 이영훈 목사님을 처음 만났다. 당시 하나님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나는 목사님께 교회에 가고 싶다고 했다. 그 만남을 계기로 우리 교회 국제사역국 영어예배를 드리기 시작했고,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 경험하고 있다.

 나는 힘들 때마다 마태복음 7장 말씀을 묵상한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기도로 구하면 주시고, 두드리면 열릴 것이라고 가르쳐주셨다. 또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라는 말씀으로 위안을 주셨다.

 이 말씀을 붙잡고 나는 이제 더 큰 ‘꿈’을 향해 나아간다. 9월부터 미국에서의 공부가 시작된다. 비자와 경제적인 문제 등 아직 해결할 과제도 있다. 하지만 어려움을 이기고 지금까지 오게 해주신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나의 가는 길을 인도해주실 것을 확신한다. 앞으로 유엔본부와 같은 국제기구에서 일하며 외교 전문가로서 남북통일,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일하고 싶다. 그날을 위해 날마다 기도하며 최선을 다하겠다. 
 


이갑근 권사(강서대교구) - 류마티스 깨끗이 고쳐주신 하나님
예수님 믿으니 삶에 기적 일어나

 17년 전 나는 평범하게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1998년이었는데 그때가 직장이 이사를 가는 날이어서 생생히 기억이 난다. 전날까지 멀쩡히 일을 했는데 이사 당일 몸에 마비가 와서 못 일어났다. 오전에 내내 누워 있다가 조금 나아져 오후에서야 몸을 겨우 일으켰다. 너무 아파서 조금씩 겨우 걸어 병원에 가니 류마티스였다. 온몸이 안 아픈 곳이 없었다. 눈도 쏟아 질 듯 아팠고 음식도 먹을 수 없고 허리가 땡겨 걸을 수도 없었다. 비닐봉지 한 장을 못 집을 정도로 힘이 없었다. 그때 옆집에 사시는 분으로부터 전도를 받았고 그 다음주부터 부축을 받아 우리 교회에 왔다. 성전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알 수 있었다.

 당시 지역장님이 기도를 많이 해주셨다. 하루는 꿈에서 뱀이 다리를 감싸서 너무나 아팠는데 지역장님이 나타나서 뱀을 떼어 내주셨다. 깨고 나니 다리에 세 줄로 감은 흔적이 나타나 있어 깜짝 놀랐다. 그때 나는 약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다. 이 약을 먹으면 몸의 다른 기관이 망가질 수 있다고 해서 하나도 먹지 못했다. 오직 기도하며 하나님께 의지할 뿐이었다. 고통으로 잠이 든 날에도 하나님은 날마다 꿈을 통해 ‘너와 함께 하리라’는 말씀을 주셨다. 초신자인 내게 어떤 믿음이 있다기 보다는 그냥 하나님만 바라보고 달려나갔다. 오래 지나지 않아 주일예배 때 조용기 목사님께서 신유기도시간에 이 시간 류마티스 관절염을 치료받았다고 선포하셨다. 아무것도 모르는 초신자였지만 ‘아멘’이라고 말했다. 그 뒤로 계단을 하나씩 올라갈 수 있게 돼 너무 놀라웠다. 하나님께 감사했다. 경제적으로도 많이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길 소망하며 국민일보 평생회원이 됐다. 그 후로 손가락 마디마디가 튀어나온 것도 싹 들어가고 17년이 지났는데 지금까지 류마티스로 고생을 해본 적이 없다.

 또 7∼8년 전에는 기도원으로 직장인 금식기도대성회에 참석을 했는데 깜박 잊고 혈압약을 집에 놓고갔다. 4박 5일간 그냥 지내다보니 정수리 쪽 부근이 울룩불룩 하게 몇 개가 솟아올랐다. 그리고 구토가 올라와서 처음에는 체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뇌졸중 증상이었다. 그런데 예배를 드리는 중에 신유기도시간에 이영훈 목사님이 뇌졸중으로 쓰러지려고 한사람이 나았다고 선포하셨다. 그리고 머리에 솟았던 멍울들이 다 사라지고 고통이 사라졌다.

 그 외에도 하나님의 예비하심과 기적을 크고 작은 일을 통해 경험했다. 5년 전에는 신종플루가 유행을 했는데 고객을 만난 후 심하게 몸이 처지는 것을 느꼈다. 집에 오자마자 누워 잠이 들었다. 꿈에 제주도에서 택배가 왔는데 귤 상자 속에 타미플루가 있었다. 바로 병원에 가서 타미플루를 처방 받아 먹고 다시 잠이 들었다. 어떤 한사람이 우리 집에 오더니 온 방을 다 소독해주어서 꿈이지만 가족들은 옮지 않겠구나 마음을 놓았던 적도 있다. 신종플루도 금세 치료됐다.

 나는 어려움이 닥치면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 그러다 지난 4월 17일에 종합검진을 했는데 유방에 종양이 있다며 조직검사를 받아야했다. 조직 검사 후 악성으로 밝혀졌다. 긴급하게 수술날짜가 잡혀 5월 7일에 수술을 했다. 수술 후에 1주일이면 결과가 나온다고 했는데 너무 이상하다면서 검사는 3주가 걸렸다. 결과는 암이 아닌 걸로 판명됐다. 나는 문제가 생기면 1주일동안 여리고 기도를 해왔다. 수술 결과를 기다리며 1주일동안 기도를 하는데 21일 동안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새벽기도를 하면서 말씀 큐티를 하며 담대해졌다. 이 세상에서 나를 통해 하나님 영광 받으실 일이 남았다면 하나님께서 치료해 주실 것이란 믿음이 생겼다. 암이 아니라는 결과를 보며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네가 믿는 하나님이 정말 계시는구나”라는 이야기를 했다.  

 앞으로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기 위해 쓰임받기를 소망한다.


안은경 집사(마포2대교구)

- ‘죽음의 벼랑’에서 건져주신 주님

딸에게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
기도로 주님께 맡길 때 치유 받고  대학도 입학

 나는 딸 영주(사진 오른쪽)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당시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제일 먼저 했던 일이 영주의 코에 손을 갖다 대는 것이었다. 하루에도 몇 명씩 죽음의 강을 건너는 집중치료실에서 오늘도 살아있음에 안도했다.

 “엄마, 나 괜찮아”라며 도리어 영주가 나를 위로하는 이 상황에서 나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2011년 영주가 중학생이 되어 교복을 입은 그 해 여름 소아암(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담당의사는 성장기에  발병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며 골수이식보다는 먼저 항암치료로 상태를 보자고 했다. 그렇게 끝이 보이질 않는 고통스러운 항암치료가 시작됐다. 성장기였던 터라 항암제 투여량도 많았다. 영주는 약을 먹고 토하고, 먹고 토하기를 매일 반복했다.

 1년이 지났을 때는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생활이 계속되다보니 면역력이 떨어져 결국 무균실로 옮겨졌다. 그런 딸을 보면서 나는 하나님께 제발 살려만 달라고 매일 간절히 기도했다. 우는 나를 도리어 영주가 “엄마 왜 울어, 하나님이 고쳐주실거야”라며 위로했다. 그랬던 영주도 같은 병실을 쓰던 아이들이 한 명, 한 명 천국으로 갈 때마다 마음이 약해져 가기 시작했다. 나보다 믿음이 강하던 영주도 치료가 너무 고통스러워 “엄마 나 먼저 천국에 가 있을게”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런 영주를 붙들고 기도하는 게 전부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내 기도가 바뀌었다. 나는 더 이상 살려달라고 매달리지 않았다. “이제 하나님께 영주를 맡기겠습니다. 설사 하나님이 데려가신다고 하셔도 기쁨으로 보낼 수 있도록 온전히 주님께 아이를 내어 맡깁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나니 마음에 알수 없는 평안이 찾아왔다. 그날 밤 영주는 꿈에 커다란 황소가 날카로운 뿔로 자신에게 무섭게 달려들었지만 이상하게 하나도 무섭지가 않았다고 했다. 심지어 그 황소가 자기 바로 앞에서 거꾸러져, 그 소를 밟고 넘는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 나는 그 얘기를 듣자마자 ‘하나님이 영주를 곧 치료해주시겠구나’라는 확신을 가지게 됐다. 그래서 그날부터 영주와 함께 세브란스병원 새벽기도회에 참석해 기도했다. 기도하러 오고 가는 길에 우리 모녀는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주변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벼랑 끝에서 웃는 우리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이 영주를 치료해주실 거라는 믿음이 우리를 웃게 만들었다.

 실제로 영주는 상태가 많이 호전되어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에는 통원치료가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영주는 중학교 내내 병원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 고등학교 과정부터 공부를 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도 영주는 자신과 같은 아이들을 위로하고 치료해줄 수 있는 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다. 제법 성적이 나오기 시작할 무렵 약해진 몸은 영주의 꿈을 가로막았다. 항암치료로 몸이 망가진 탓에 공부는커녕 걸어서 등교도 못할 정도였다.

 그 때가 고등학교 2학년이었는데 동생의 첼로를 가르치는 선생님의 소개로 지금의 멘토가 되는 교수님을 만나게 되었다. 영주는 그 교수님과의 만남을 계기로 의사대신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게 됐다. 입시가 약 1년이 남은 상황이라 걱정도 되고 막연했지만 분명한 하나님의 이끄심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열심히 입시준비를 한 영주는 체코 브루노 콘서바토리 서울캠퍼스에 합격할 수 있었다.

 현재 영주는 베들레헴찬양대 글로리아오케스트라에서 봉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 그리고 올해 8월 23일 그 지겨웠던 소아암과의 전쟁에 마침표도 찍었다. 영주가 드디어 완치판정을 받은 것이다. 할렐루야. 나와 영주는 매주일 가정예배를 드리며 한주동안 받은 은혜를 나누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기적은 아직 끝이 아니라 지금도 진행 중임을 확신하며 맡기신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


정리=정승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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