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묵 안수집사(강서대교구)

- 갑자기 닥친 죽음의 위기에서 건져주신 주님


서부간선도로에서 운전 중 원인모를 어지러움 느껴
사고 없이 정차하고 병원 후송돼 기도로 치료받아

 지난 4월 7일 토요일 밤 10시경이었다. 나는 서해안 고속도로 서울방향 서부간선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광명대교에서 약 100븖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순간적으로 차가 뒤집히는 것 같은 심한 어지러움이 엄습했다. 내 몸을 주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낀 나는 나도 모르게 기도가 먼저 튀어나왔다.

 “하나님 저를 살려주세요. 아직 이 세상에서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지나간 모든 잘못을 회개하오니 예수님 십자가 보혈로 저를 씻어주세요. 목숨을 보전하여 교구 총무 일도 감당하게 하시고 안수집사회 중보기도 팀장도 잘 인도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지금 저를 데려가시면 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오니 치료하여 주세요”

 돌이켜 보면 어떻게 기도부터 나왔는지 모르겠다. 나는 다른 차들과의 충돌사고에 대한 두려움으로 핸들을 꼭 부여잡고, 비상등을 켠 채 천천히 차를 도로 옆 갓길에 정차시켰다. 서부간선도로는 하루 종일 많은 차들이 오가는 곳이라 불안했는데 신기하게도 그 때 서부간선도로에 오가는 차가 단 한 대도 없었다. 정지되어 있는 차 안에서도 어지러움은 멈추질 않았다. 도리어 더욱 심해져 마치 몸이 차에서 튕겨져 나갈 것 같았다. 나는 시간이 지나면 진정될 줄 알았지만 어지러움은 멈출 기색이 없었다. 물을 마셨지만 도리어 구토와 설사로 인해 상황은 나빠지기만 했다. 결국 나는 구급차를 부를 수밖에 없었고 구급차는 순찰차를 앞세워 나를 인근 홍익병원으로 후송했다.

 병원에서 나는 방사선촬영, CT촬영을 했고, 소식에 놀라 달려온 아들이 병원입원 수속을 진행했다. 나는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어 휠체어로, 병실로 옮겨졌다.
 자정 무렵 검사를 마친 당시 나는 혈압이 196mmHg에 이르고 알 수 없는 추위가 엄습해 벌벌 떨고 있었다. 다음 날이 마침 주일이라 간호의료진의 진료만 받을 수 있었다. 온종일 구토만 하는 나는 견딜 수 없는 고통에 교구 권사님을 통해 안수집사회 중보기도팀에게 기도를 부탁했다. 소식을 들은 소속 교구(강서 1교구)에서도 심방을 와서 나를 위해 간절히 기도해주셨다.

 월요일 아침 담당 의사는 토요일 검사결과를 가지고 “목동맥의 폐색 및 협착증”이라며 동맥에 혈전이 있으니 정밀 검사를 통해 보다 자세히 알아보자고 말했다. 자칫 뇌출혈로 이어질 수 있었다고 했다. 불안감을 갖고 MRI촬영 등 정말검사를 마치고 결과를 들으러 의사를 찾아갔다. 의사는 토요일에 CT상으로 있던 혈전이 모두 사라졌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직 반대편 쪽 3군데에 혈전 가능성이 높으니 치료를 하자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그 상황 가운데 날 살려 주신 것도 모자라 혈전도 사라지게 해주신 것이다. 앞서 주일에 간절히 기도하고 또 나를 위해 기도해준 분들이 있어 혈전이 사라졌다는 확신을 얻었다. 그래서 남은 혈전들도 하나님께서 제거해달라고 간구하기 시작했다. 평소 좋아하는 구절이기도 한 이사야 38장 16∼17절을 반복해 읽으며 하나님께 기도로 매달렸다.

 평소 나는 건강에 대한 자신감이 가득했다. 질병으로 병원에 입원한 적도 없고, 마라톤 완주를 위해 일주일에 2∼3회씩 10km를 뛰는 것은 물론 매주일 오후면 축구도 했다. 그랬던 내가 한순간에 생사를 오가는 갈림길에 처할 줄이야. 나는 회개기도하고 또 회개기도했다. 그저 하나님께 감사할 것 밖에 없다. 예배 때면 사고의 위험 속에서 지켜주신 것도 모자라 지금처럼 깨끗하게 치료해주셨음에 감사의 고백과 눈물이 저절로 나온다. 바라기는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이웃을 위해 중보기도하고 주님의 일에 앞장 서는 삶을 살고 싶다. 할렐루야.

정리=정승환 기자


모리타 요시츠쿠 목사(순복음사카이교회)
수술 불가능한 뇌종양, 4차원 영성의 기도로 고침 받아

조용기 목사의 치유메시지 테이프로 전해 듣고 신유체험

 20년 전 내가 열 살이 좀 넘어서였다. 동네 친구들과 뛰어놀다가 계속되는 두통 때문에 정신을 잃었다.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병원을 찾았다. 당시 시골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도시의 병원에서 여러 가지 검사를 받았다. 의사는 내 머리에 종양이 있다고 했다. 결과는 악성 뇌종양이었고, 뇌암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암의 위치가 뇌 깊숙이 있고 많은 신경이 지나가는 자리라서 수술과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전했다.

 부모님과 나는 죽음이라는 절망만 안고 시골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종양이 커지면서 뇌압이 상승되어 참을 수 없는 두통과 구토가 이어졌다. 여기에 신경마비 증상까지 나타났다. 팔과 다리가 마비됐고, 시력 장애로 눈이 보이질 않았고, 안면신경도 마비됐다.

 나의 신경이 죽어가자, 잠을 자고 싶어도 마비증상 때문에 눈꺼풀이 감기질 않았다. 가족들은 나의 눈을 감겨준 후에 그 위에 스카치테이프를 붙여줬다. 그러면 겨우 잠을 잘 수 있었다. 죽음만 기다리고 있던 중 큰누나의 친구가 조용기 목사님의 설교 테이프를 전해줬다. 일본에서 열린 큰 성회에서 일본어로 ‘치유와 기적’에 관해 설교하신 것이었다. 
 당시 우리 가족은 장로교회를 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누나는 많은 사람들이 이 성회에 참석해 병고침을 받았다면서 설교를 들어야 한다고 했다. 

 당시 나는 TV소리나 음악을 켜놓으면 구토증세가 더 심해졌다. 하지만 누나가 틀어준 설교를 들으면서 한 번도 구토를 하지 않았다. 말씀을 들으면서 치유라는 메시지가 매우 생소했다. 하지만 우리가 간절하게 바라는 게 또 치유였다. 어머니도 신기해했다. 거의 24시간 내내 조용기 목사님의 설교를 테이프를 통해 듣고 또 들어 외울 수도 있었다. 조용기 목사님 설교말씀은 매우 강력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는 나음을 입었다”라는 말씀을 반복하셨다. 말씀은 죽음이라는 절망 앞에 있는 나에게 희망을 전했다. 그래서 설교말씀을 나에게도 적용했다. 잠을 자기전 몸의 한부분과 특정증상에 대해 아주 구체적으로 기도하며 나았다고 선포했다.

 “모리타의 눈은 나을 것이다. 이미 나았다. 제 눈을 고쳐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반복하면서 기도했다. 마음이 편안해질 때까지 기도하고 감사로 선포했다. 시간이 흘렀다. 기도는 더욱 선명하고 구체적으로 바뀌어갔다. “나는 나아지고 있다. 내일 아침에 눈이 나을 것이다”라고 믿으며 기도했다. 진짜 다음날 기적이 일어났다. 잘 안보이던 눈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귀가 나았다고 선포하면서 기도했다. 다음날 나의 귀는 청명하게 잘 들리는 것이었다. 또 팔이 나았다고 기도했다. 그랬더니 다음날부터 팔을 들어올릴 수 있었다. 할렐루야!

 나는 신체 하나씩을 위해 기도했고, 구체적으로 드린 믿음의 기도는 모두 응답됐다. 6개월이 걸렸다. 할렐루야! 수술조차 할 수 없었던 암덩어리는 사라졌고 20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매우 건강하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 나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순복음신학교를 졸업해 지금은 목회자로서 오사카에 있는 사카이순복음교회를 섬기고 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주님께 영광 돌린다. 할렐루야!

 나는 이번 간증을 통해 조용기 목사님께 가슴깊이 감사를 전한다. 일본 복음화를 위한 헌신으로 우리 시골동네까지 성령충만한 메시지가 전달될 수 있었고, 내가 살아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할렐루야!
 


송영미 집사(강서대교구)

- 10년간 앓은 딸의 난치병 하나님 은혜로 치유


이영훈 목사 신유기도 받고 정상 판정
선천성 질환 치유에 의사도 기적 인정


 2007년 예쁜 막내딸을 낳았다. 하지만 출산의 기쁨을 느끼기도 전에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갓난아이의 폐에 공기가 차있어서 태어나자마자 수술을 했는데 그러던 중 우리 아기가 선천성부신피질호르몬증식이라는 난치성 질환을 가지고 태어난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무슨 병인지 귀에 들리지도 않고 듣고 싶지도 않았다. 원인을 알 수 없다는 것, 또한 완치가 어렵다는 것에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평생 12시간, 24시간 마다 2종류의 약을 먹고 살아야 하는 병이었다. 갓 태어난 아이가 앞으로 평생 이렇게 약에 의존해서 살아야 한다니 막막했다. 그저 약으로 인한 부작용이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약에 의존해서라도 아이가 잘 자라나고 있는 것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3개월에 한번 씩 정기적인 검사와 호르몬제로 인한 부작용 반응검사를 받았다. 검사가 이루어질 때마다 아이가 먹는 약의 양이 늘지 않고 이대로만 잘 유지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아이에게 스트레스가 가장 위험한데 유치원에 들어가면서 스트레스를 받아 3차례나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우리 가족은 매일 아이가 건강하게만 자랄 수 있기를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했다. 공중에 나는 새도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내버려 두시지 않으실 것을 믿고 주님이 주시는 은혜만을 바라봤다. 그리고 우리 가족에게 이 아이를 주신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분명히 있을 것을 믿었다. 그렇게 10년이 지났다. 2016년 아이가 10살이 되던 어느 날 이영훈 목사님께서 주일예배 설교 후 신유기도 시간에 “희귀난치성 질환을 앓고 있는 아이를 위해 엄마 아빠가 아주 오랫동안 눈물의 기도를 하고 있는데 오늘 하나님께서 그 눈물을 닦아주시며 ‘다 나았다’고 말씀하십니다”라고 선포하셨다. 우리 부부는 “아멘”으로 감사와 영광을 돌렸고 아이를 끌어안고 기뻐하며 응답받았음을 확신했다.

 다니던 병원에서 의사 선생님이 아이의 호르몬이 약으로 10년 째 잘 유지되고 있으니 유전자 검사를 해서 좀 더 세밀한 부분을 확인해보자고 하셨다. 검사결과가 나오던 날 의사 선생님은 아이의 몸에서 호르몬이 생성되고 있고 더 이상 약을 복용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나는 “할렐루야!”로 대답했고 의사 선생님도 기적이 일어났다며 함께 기뻐해주었다. 그 후로 12시간, 24시간 마다 먹어야 하는 약을 끊고 6개월에 한번씩 정기적인 검사를 하며 호르몬이 잘 생성되고 있는지 확인만 하고 있다. 늘 가슴 졸이던 부작용 검사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된다.

 3개월 전 정기검사를 받았는데 그 결과도 호르몬 수치가 정상이고 모두 정상적인 발달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다. 우리 아이 현주는 지금 아동5부에서 순복음의 어린이로 건강하게 성장하고 있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나아가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신다는 것을 우리 가족 모두 배웠다. 아이를 통해 가족의 믿음도 많이 성장했다. 좋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 돌린다. 더욱 하나님께 감사하며 순종하는 삶을 살 것을 다짐한다.  

정리=이미나 기자


윤남수 집사(동작대교구)

-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 따르니 복 받아

술,담배 중독 시아버지 극진히 모셔 전도해
좋으신 하나님 전하니 마음에 기쁨 넘쳐  
   
 

나를 시작으로 우리 가족은 구원의 열매를 맺고 있다. 나 또한 다른 분의 전도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한 번 나가겠다는 말을 어길 수 없어 나오게 된 교회에서 성령침례를 받고 그때부터는 교회 일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게 됐다.   20여 년 농산물가게를 하며 내가 받은 기적과 은혜는 말로 다할 수 없다. 나에게는 두 가지 사업 원칙이 있었다. 매달 첫 주 사업장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과 주일은 가게를 쉬는 것이다. 대목이어도 주일은 장사를 하지 않았다. 야채가 시들면 팔 수 없기에 주일을 쉬면 큰 손해를 볼 수도 있었지만 그러한 걱정보다 예배를 사모하는 마음이 더 강했다.

 내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내 삶에서 작은 부분까지도 보살펴 주셨다. 기도하면 토요일에 뜻밖에 손님이 찾아와 물건을 전부 구입해 갔다. 만약 물건이 다 팔리지 않았더라도 남은 물건으로 불우한 이웃들을 돕고 전도용으로 사용하면 되기에 마음이 불편하지 않았다. 3년 전 남편이 농산물가게를 내놓을 때 역시 기도하니 40도가 되는 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계약이 되는 응답을 받았다.    

 내가 이러한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건 십계명의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에 따라 시아버지를 잘 봉양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10여 년 전 “아버지가 몸이 정상이 아니다. 올해가 마지막 생신일 것 같다”는 시누의 전화를 받게 됐다. 가보니 시아버지의 얼굴이 술 중독으로 벌겋게 올라있었다. 술을 쉬지 않고 마시고 담배를 하루에 6갑씩 피우는 시아버지를 모실 사람이 없어 둘째 아들인 남편이 맡게 됐다. 시아버지는 술을 많이 마셔 다리가 코끼리처럼 부어 거동하기 힘들었고 담뱃재로 옷은 물론 집안 곳곳에 구멍을 내기 일쑤였다.

 처음에는 기가 막혀 기도도 나오지 않았다. 내가 교회를 가야하니 어쩔 수 없이 모시고 가는데 십자가탑 앞에서 술을 한 병 마셔야 따라오셨다. 내가 명색이 집사라는 직분을 가지고 있는데 시아버지가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게 너무 부끄러워 힘들었다. 그렇지만 예배를 드리고 기도할 때 내 마음에 시아버지를 먼저 전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하나님 내 가족 구원도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전도 하겠어요. 부모부터 믿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다. 내 부모님도 나의 전도로 교회에 다니게 되셨고 다른 사람들도 전도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시아버지 구원도 들어주실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교회에 가지 않겠다고 완강하게 고집을 부리는 시아버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맛있는 걸 사드리겠다고 모셔오고 평소에는 좋아하는 곳을 함께 다녔다. 부은 다리를 매일 주물러 드리고 지극정성으로 간호했다. 시아버지가 변화된 건 한 순간이었다. 몇 년 동안 예수님을 부인하고 예배 때면 대성전에서 목사님을 향해 삿대질하고 고함을 지르던 시아버지가 어느 날부터는 교회에 가겠다고 말씀하셨다. 시아버지는 그 후로도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시며 신앙생활을 하다가 건강한 모습으로 89세에 소천 했다. 기독교를 멸시하던 시동생도 아버지의 변화에 감동해 하나님이 참 좋으신 분인 것 같다며 마음의 문을 열게 됐다. 나는 곧 시댁 가족 모두가 신앙생활을 하게 될 거라고 믿고 있다. 전도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그저 나는 좋으신 하나님을 전할 뿐이다. 앞으로도 전도에 힘쓰며 사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정리=김주영 기자

 


이유진 성도(금천대교구)

- 난소암 4기 극복케 한 중보기도의 힘

절대긍정과 절대감사로 주님께 영광
이영훈 목사 기도 받은 후 ‘믿음’ 생겨

 

나는 1남 2녀를 둔 엄마다. 세아이를 양육하며 처음 교회에 갈 때는 살기위해 교회에 다녔는데 생계 때문에 회사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주말에도 출근하느라 교회를 다닐 수 없게 됐다. 그래도 항상 마음속에는 교회에 가고 싶었다. 성도들이 교회에 가자고 하면 “나는 70세까지 직장 다니고 71세 되면 교회다닐께”라며 거절했다. 그러던 중 지난해 3월 9일 근무를 마치고 병원에 갔다.

한 달 동안 설사를 해서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다. 직장 일에 매진하느라 조퇴 한 번 한적 없었는데 온 김에 여러 검사를 다 받아보자 했다. 그때 임파선과 난소에서 이상소견이 나왔다. 복수가 찬 줄도 몰랐는데 단순히 나이 들어 뱃살이 붙나보다 했던 것이 복수였다. 난소암 4기였다.

 눈물도 하나 나오지 않고 그때든 생각은 “아!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 이제 쉬라는 거죠. 저 이제 교회갈 수 있어요”였다. 오랜 동네 친구이자 교회친구였던 임명희 지역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많이 아파”라고 말하자 친구는 어서 만나자고 했다. ‘다음에’라고 했는데 그날 집밖에 나섰다가 우연히 딱 마주쳤다. 당시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는데 무엇이라도 먹어야한다는 친구의 말에 추어탕을 뚝딱 한 그릇 먹었다. 그날부터 임명희 지역장과 함께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임 지역장과 만나고 이틀 뒤 3월 17일 철야예배를 드리러 가던 중 임명희 지역장이 하나님이 생명을 연장해준 히스기야 왕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그날 예배에서 목사님이 딱 그 말씀으로 설교를 하셔서 놀라웠다. 그리고 기도 중에 내 입술에서 방언이 터져 나왔다. 십 몇 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성령 충만의 임재를 경험하며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걸 느꼈다. 이후 이영훈 담임 목사님께 안수기도도 받았는데 목사님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고쳐주실 거란 절대긍정 절대감사의 믿음을 마음에 심었다.

나를 위해 교구장님과 교회식구들은 날마다 중보기도를 해줬다.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도를 부탁했다.

우리 교회 공예배 때 마다 성도들이 합심으로 해주는 중보기도에도 내 기도제목이 있었다.

 나는 마음이 급했다.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려 다시 주님을 찾았기에 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새신자교육을 다시 받고 오래되어 없어진 줄 알았던 침례기록도 찾았다.

 4차 항암 후 6월 27일 개복수술을 했다. 림프절 등 전이된 곳까지 수술을 했다. 10시간의 대수술 후 의식이 돌아온 순간, 눈뜨자마자 “주여 감사합니다” 소리가 바로 나왔다. 이사야 41장 10절 말씀을 써서 계속 읽었다. 누워서도 걸어 다니면서도 읽었다. 그때 병실에 입원해 있을 때 함께 방을 쓰던 두 분이 계신데 믿음이 신실한 교회 권사님들이셨다. 첫 만남부터 “암 그거 아무 것도 아니야. 먹기만 잘하면 나아”라며 뜨겁게 용기를 부어주셨다.

 

수술을 잘 마치고 이후 항암치료를 차례로 받는 중 10월 7차 항암과 11월 8차 항암 때 대장에 천공이 나고 장유착이 돼 항암치료를 멈췄다. 몸 상태가 좋아지면 내년에 항암치료를 다시 하자고 하셨다. 그런데 올해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수치가 0∼35가 정상인들의 수치인데 3월 28일에는 수치가 26으로 나온 것이다. 이어 4월 23일 검사에서는 16이 되고 전이 되었던 암이 모두 사라졌다는 결과를 받았다. 지금은 그저 운동만 하라는 처방을 받고 건강하게 살고 있다. 나는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자녀들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을 강력하게 체험했다. 그동안 나를 위해 기도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앞으로도 하나님께 감사와 기쁨으로 찬양드리며 살아가고 싶다. 

정리=복순희 기자


김선영 집사(금천대교구)

-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것을 아세요

암 직전에 발견, 투병 생활 없이 회복
건강 찾은 후 봉사하는 삶의 기쁨 얻어

 결혼 직후 임신을 했다. 기쁨도 잠시 난소에 물혹이 있는 줄 몰랐는데 그것 때문에 아이를 잃게 됐다. 이후 3년간 두 번이나 계류 유산을 했다. 몸과 마음이 많이 힘들었다. 그러던 중 감기에 걸려 항생제까지 먹었는데 뒤늦게 임신사실을 알았다. 병원에서는 중절을 권했다. 간절히 기다렸던 아이인데 그렇게 보낼 수는 없었다.

 수술대에 누웠다. 의사가 자꾸 이상하다고 했다. 아무리해도 마취가 안되고 또 자궁문도 열리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이런 환자는 처음이라며 방법이 없다며 더 큰 병원에 가라고 했다. 신기한 일에 하나님의 뜻이라 믿고 아이를 품고 있는 열달 내내 예배란 예배는 모두 찾아 드렸다. 그리고 드디어 아들을 품에 안았다. 아들은 심방중격결손증이 있었지만 건강하게 자랐다. 7살에 수술을 했고 12시간의 긴 수술 시간 동안 친정 고모님이 기도를 해주셨는데 아이 옆에 예수님이 지켜주시는 모습을 보셨다고 했다. 아들은 건강하게 자라서 이제 어엿한 대학생이 됐다.

 항상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 감사해 봉사를 해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생각뿐이었다. 그러다 5년 전 소화가 안 되서 약을 먹었는데 잘 낫지를 않아 병원에 갔다. 검사 때 대장에서 용종 하나를 떼었다는 소리를 들어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데 조직 검사 결과 암이었다. 수술하기는 애매했지만 일단 혈관을 2㎝ 정로 타고 올라갔다고 해서 수술을 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암이라니 나에게 왜 이런 병이 생겼나, 아이들은 어떻게 하나 걱정과 근심으로 나는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마음이었다. 그런데 병원에서는 정말 운이 좋은 분이라며 너무 미세해서 발견되는 것 자체가 더 신기한 일이라고 했다. 항암치료도 방사선 치료도 받을 일이 없었다.

 수술 후 나는 똑같은 생활로 돌아가 바쁘게 직장 생활하며 세상에 젖어 살았다. 일년 반의 시간이 흐른 뒤 뭔가 몸이 이상한 것 같아 병원에 갔는데 이번에는 유방암이 발견됐다. 육안으로도 확인이 안 되고 아주 작은 몇 개가 있는데 다발성암이었다. 의사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심각하게 이야기 했다. 주변에서 투병하시는 분들이 너무 힘들게 치료 받는 것을 봐서 제발 항암치료를 안받았으면 하고 기도했다. 밤을 새우며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그 순간 비로소 내가 그전에 서원기도 했던 것이 생각났다. ‘살려주시면 하나님을 위해서 봉사하겠다’고 했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똑같이 세상으로 나가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수술 4일 후 결과를 들으러 병원에 갔을 때 의사로부터 ‘정말 운이 좋은 분이세요’라는 말을 들었다. 상피내암인데 암이 되기 전 0기에서 발견이 됐다고 한다. 대장암이 발견 됐을 때와 똑같았다. 의사 선생님은 내게 종교를 갖고 계신 분이냐고도 질문했다. 내가 교회에 다닌다고 하니 그분은 ‘정말 신이 계시나 보네요’라고 말하셨다. 

 수술 후 몸을 회복하면서 아이들을 위해서 봉사하러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기도처에서 여선교회 봉사자가 부족해 굉장히 힘들다는 소식을 들었다. 수술 부위가 아물자마자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봉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내가 아이들을 좋아하는 마음도 아셔서 평일에는 어린이집 교사로서 살아갈 수 있게 해주셨다.

 내 아이들을 낳고 키우면서 유아교육에 대한 열망이 커졌다. 교사로서 제2의 인생을 살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는데 병 때문에 꿈을 포기해야 하나 생각했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공부를 잘 마쳤고 더욱 소중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만나고 있다. 가장 감사한 것은 불신 가정에 시집을 가서 오랜 세월 남편을 위해 기도한 것이 응답된 것이다. 예수님을 믿게 되고 집안에서 제사 때 절하는 것이 마음에 많이 걸렸는데 이제 남편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함께 기도하는 동역자가 됐다.   

 언제나 함께 하시고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주님이 계시기에 두려움이 없다. 하나님이 건강을 허락해주시는 그날까지 봉사하며 기쁘게 살아가고 싶다.  


김도영 집사(마포1대교구)

- 하나님이 아내의 암을 치료해 주셨어요


갑작스런 아내의 암판정, 주께 오는 계기 돼
‘바라봄의 법칙’ 따라 믿을 때 기적 일어나


 본가는 원래 천주교를 믿는 집안이었지만 나는 신앙의 갈급함이 없었다. 내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내가 열심히 노력만 하면 반드시 문제를 해결해 낼 수 있다고 믿었다. 결혼 후 기독교 집안 출신인 아내가 시댁식구들과 같이 성당을 다니길 바랐지만 조율이 안돼 결국 우리는 교회도 성당도 다니지 않게 됐다. 둘째 딸이 태어난 지 1년 후인 2007년 11월 아내(전윤정 집사·사진)는 가슴에 무언가가 만져진다고 했다. ‘매년 검사결과 이상이 없었으니 아내에게 아무 이상 없겠지’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검사 결과 유방암 4기였다. 뼈로 전이가 의심스런 상황까지 되면서 병원 측은 절망적인 이야기를 했다.
 다른 병원도 “가망이 없다”는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만 3살인 큰 딸과 이제 겨우 돌이 지난 둘째 딸, 어린 아이들에게 엄마가 없어질 것을 생각하니 앞이 캄캄했다. 무거운 절망이 온 집안에 가득했다.

 그때 늦은 나이에 신학을 공부하시고 전도사 사역을 하시던 장모님이 찾아오셨다. 장모님과 장인어른은 “사람은 고칠 수 없지만 우주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능치 못함이 없으시다. 자 이제 교회에 가자”고 하셨다. 나는 바로 아내와 함께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출석했다. 첫 주 조용기 목사님은 ‘삶과 고난’이라는 주제로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왜 우리 삶에 고난을 허락하시는지, 그 속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알려주셔서 큰 위로가 됐다. 그 다음 주일에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믿음을 가지고 ‘바라봄의 법칙’을 적용하면 반드시 이뤄주신다”는 말씀에 희망을 품게 됐다. 당시 조용기 목사님은 유난히 유방암 치유에 관한 신유기도를 예배 중 선포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깨달았다. 그리고 우리 것으로 받아들이고 아내가 고침 받는 믿음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속해있는 마포1대교구 교역자님과 교구 식구들도 우리를 위해 힘써 중보 기도해 주셨다. 우리에겐 큰 위로였다.

 아내는 다른 대형 병원으로 옮겨 한달 반이나 걸리는 힘겨운 검사를 다시 했다. 그리고 치료가 시작됐고, 30회 이상 항암치료를 받았다. 고가의 항암 치료 약, 병원비만도 엄청났다. 그런데 하나님은 도움의 손길을 통해 임상시험에 참여토록 인도해주셨고, 비용의 부담을 덜게 해주셨다. 아내는 수술 전 조용기 목사님의 안수기도를 받고 평안을 찾았다. 이영훈 목사님의 기도도 깊은 감동이 됐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고 우리는 기도에 힘을 쏟았다. 그 결과 살아날 가망이 없다던 아내는 성공적인 수술은 물론 뼈에 전이됐던 암세포의 흔적이 감쪽같이 사라지는 기적을 체험했다. 할렐루야!

 나와 아내는 우리가 신앙의 방황기를 보냈던 것과 달리 두 딸이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의 아이들로 성장되길 기도했다. 두 딸은 아내의 기도대로 드리머 콰이어(구 엔젤스 합창단)에 들어가 하나님을 찬양했다. 10년이 지나 지난해 우리에게 한차례 고비가 다가왔다. 아내의 유방암이 재발한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반드시 고쳐주신다는 확신으로 간구했다. 수술 전 조용기 목사님이 또 다시 기도해주셨다. 그리고 마포1대교구에서도, 드리머 콰이어에서도 아내를 위해 기도했고 올해 2월 좋은 검사결과를 얻었다.

 ‘내 삶의 주인은 나’라는 생각에서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나’로 바뀐 우리 가족. 우리를 믿음의 길로 이끄신 주를 찬양하며 주께 “잘하였도다 충성된 종아”라며 칭찬을 얻도록 믿음의 행진을 이어가겠다.

정리=오정선 기자

 


김애란 집사(반석대교구)

- “하나님께서 저를 강하게 훈련시키셨어요”

늘 포기와 좌절했던 나, 말씀과 훈련 통해 변화돼
60주년 행사 통해 중화권에 말씀운동 일어나길 소망

 2년 전 “니하오” “쎄쎄” 밖에 모르던 내가 얼마 전 중국어능력시험 HSK 5급 시험을 봤다. 그리고 오는 가을부터는 일본어 공부를 시작할 계획이다. 정말 놀라운 일이다. 나란 사람은 의지박약, 끈기 부족, 무기력함에 주저 않을 때마다 정말 많은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꿈만 있고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못 만들어 내는 연약한 내 자신이 답답해 하나님께 매달리고 또 매달렸다. 그렇게 하나님의 훈련이 시작됐다.

 하나님의 첫 훈련은 남선교회 외국인안내실에서 시작됐다. 나는 그 곳에서 만난 김명철 집사로부터 2년 동안 하루 한 시간씩 일주일에 4,5번씩 전화로 중국어를 배웠다. 2년 동안 내가 절망에 무릎을 꿇을 때마다 김 집사는 일으켜 세우고 때론 엄하게 혼을 내면서 절대 포기하지 않도록 이끌어 주셨다. 중국어가 너무 어려워 아프다고 핑계를 대어도 그는 절대 수업을 빼먹지 않았다. 심지어 김 집사는 휴가를 가서도 내게 전화를 걸어 수업을 할 정도였다. 돌이켜보면 어느 누가 무료로 이렇게 열정적으로 가르쳐 줄 수 있을까.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나선 것뿐인데 이렇게 좋은 분을 붙여주시고 환경을 만들어 주시니 감사할 뿐이다.

 또 하나의 훈련은 말씀과 기도, 묵상을 삶의 가장 우선순위로 두는 것이었다. 100일 동안 성경을 통독하며 묵상하고 기도를 1시간씩 하는 훈련을 받았다. 성경을 200독 이상씩 한 분들의 지도 아래 하루에 성경을 10장씩 100일 동안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읽는데 정말 쉽지 않았다. 100일 동안 성경통독에 함께 해보니 ‘같이 해냈다’는 자신감과 믿음이 생겼다.

 지난해 겨울 봉사하는 도중 대만 카오슝에서 어머니와 함께 온 소축운이라는 성도를 만나게 됐다. 20대 초반의 앳된 나이인데 몸은 6개월 정도 임산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자세히 이야기를 들어보니 난소암으로 복부가 부어있다는 것이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가까운 목사님들에게 안수기도를 부탁했고 외국인안내실 봉사자들도 모여 그녀를 위해 간절히 기도해주었다. 소축운 성도와 어머니는 정성어린 기도에 감격해 연신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다고 말했다.

 올해 3월 4일 소축운(사진 우측)성도가 또 우리 교회를 방문했다. 이번에는 부모님과 함께였다.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에도 다녀왔다고 했다. 겉으로 보이기엔 아직 차도는 없었지만 소축운 성도의 표정은 매우 밝아보였다. 나는 도와줄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말씀은 죽은 자도 일으키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음을 기억해내고 함께 100일 성경통독을 하자고 말했다. 그 때부터 나는 소축운 성도를 위해 한글 성경을 중문간체로, 번체로 번역을 시작했다. 잘못된 번역을 수정하기 위해 중국어예배 교역자님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소축운 성도가 매일 엄마와 함께 성경을 읽으며 기도한다는 메시지를 받을 때마다 감사하게 되고 용기도 생겼다. 소축운 성도의 일을 계기로 나는 왜 하나님이 내게 중국어를 공부하고 말씀으로 훈련시켰는지를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큰 꿈을 품게 됐다. 올해 열리는 아시아성도방한성회에 오는 분들에게도 중국어, 영어로 준비된 ‘100일 성경통독’이 전해져서 중화권 전역으로 말씀운동이 일어나는 것이다. 바라기는 내가 그러했듯이 많은 분들이 외국어에 용기를 갖고 도전하길 바란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들어서 사용하실 것이고 그 길을 열어주실 것이다. 할렐루야!

 정리=정승환 기자


김용익 안수집사(은평대교구) - “전도는 예수님의 지상명령”
성령 체험 후 세상의 즐거움 버리고 주님만 바라봐 
전도에 대한 두려움, 교회성장선교회 통해 기쁨 돼

 나는 원래 다른 교회에 출석하다가 1992년 즈음 조용기 목사님의 설교에 큰 은혜를 받아 우리 교회에 출석하게 됐다. 당시 조용기 목사님의 속사포 같이 빠른 설교를 못알아 듣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부산 출신인 내게 목사님의 설교는 또렷하게 들렸다. 특히 강남기도원에서 성령체험 후 세상이 달라보이기 시작했다.

 교회 출석을 하면서도 직장생활을 하다보니 술과 담배를 쉽게 끊지 못했었다. 그런데 성령체험 후 놀라운 체험을 했다. 하루는 직장상사 등과 함께 술자리를 가졌는데 담배가 벌레처럼 보이기 시작했고 술은 도저히 목구멍을 넘길 수조차 없었다. 심지어 억지로 술을 삼키려다가 그 자리에서 술을 뱉어내 상사의 눈치만 살펴야했다. 그 후로 난 자연스레 술과 담배를 모두 끊게 됐다.

 2003년에 안수집사가 되어 남선교회 봉사실 등에서 봉사도 했다. 그러다 지난해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에서 기도 중에 ‘전도’라는 말에 강한 끌림을 받았다.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명령이기도 한 전도에 도전하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실상 나는 전도만큼은 참 어렵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평소 주일성수하고 봉사도 하면서 신앙생활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지만 직장에서도 쉽게 ‘예수님을 믿으세요’라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당연히 노방전도는 상상하기조차 힘들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우리 교회의 교회성장선교회였다. 그 곳에서 난 전도학교를 통해 전도에 대한 자신감과 전도 방법에 대해 배우고 매주 토요일이면 선교회 전도활동에 참여했다. 처음에는 우물쭈물하며 “예수∼”라고 입을 떼기도 전에 사람들이 나를 지나쳐갔다. 그래도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매주 전도활동에 참여했다. 몇 주 지나니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바로 기도였다. 그 후에는 선교회에서 배운 대로 뜨겁게 기도하고 나가니 어느 곳에서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정말 신기했다. 하나님은 거의 매주 세사람씩을 내게 붙여주셨다. 한 번은 병원전도를 갔는데 인사를 해도 대꾸도 안하던 분이 차츰 마음의 문을 열더니 내게 기도를 요청했다. 옆에서 듣고만 있던 환우도 ‘나도 기도해달라’며 한 번에 두 명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도 있었다. 복음을 전하는 것도 절대 사람의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해 하는 것임을 매 번 느낀다. 그래서 나는 일이 바빠도 반드시 매주 금요철야예배는 빼놓지 않고 참석하며 성령의 재충만을 위해 기도한다.

 열두광주리 새벽기도회 때 있었던 일이다. 기도회 마지막 날에도 선교회원들과 전도를 나가는데 왜인지 모를 기대감이 가득했다. 금천대교구 성도들과 연합으로 시행된 이날 전도대회에서 나는 시장 서쪽 주택가에서 복음을 전하게 됐다. 마침 주택가에서 나오는 한 젊은이를 붙들고 복음을 전했다. 그 청년은 순간 당황했지만 내 말을 경청하더니 더듬더듬 내게 자신은 중국 흑룡강성에서 한국으로 왔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신학에 꿈을 가지고 믿지 않는 부모와 남동생과 함께 이곳에 왔으며 자신이 다닐 교회와 신학교를 찾기 위해 기도하고 집에서 나오자마자 나를 만나게 됐다며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그래서 난 우리 교회의 위치와 예배시간 등을 상세히 알려주고 추후 회원들과 그 청년의 집을 심방하기도 했다. 이 청년은 최근에는 교회성장선교회에 등록해 함께 전도활동도 하며 신학교 진학을 준비 중에 있다. 나는 이 청년을 통해 중국지역에 복음을 전하시려는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 있음을 확신하며 중보하고 있다. 내게 전도는 두려움이었지만 지금은 가장 큰 기쁨이 됐다. 예수님을 믿는 모두가 이 기쁨을 함께 누렸으면 좋겠다. 할렐루야.


[나누는 기쁨, 넘치는 사랑] 이선자 성도(관악대교구)



딸 잃은 슬픔 목사님 말씀으로 회복 됐습니다
이영훈 목사 긍정의 선포로 위로, 용기 전해
천국 소망 품고 충성해 복된 성도 되길 축복
 
 
 “염려하지 마세요. 주님께 감사와 영광 돌리면 반드시 마음에 평안을 주시고 상처 입은 마음에는 위로와 용기를 주십니다”
 이영훈 목사는 17일 관악구 난곡로에 사는 이선자 성도(관악대교구)를 찾아 빌립보서 4장 6∼7절 말씀을 전했다. “좋은 일이 차고 넘칠 것이다. 주님이 은혜를 부어주신다”는 이영훈 목사의 긍정적인 말에 이선자 성도는 큰 위로를 받고 앞으로도 열심히 신앙생활 해서 꼭 천국에서 딸을 만나겠다고 말했다.

 이선자 성도는 하나뿐인 딸을 살려야겠다는 생각으로 2014년 12월부터 우리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교회를 다니기로 결심한데는 박윤숙 지역장의 8년 기도와 헌신이 있었다. 딸이 아파서 응급실을 다닐 때 함께 병원에 가주고 반찬도 만들어주며 도와준 박 지역장에게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오랜 세월 교회를 안가겠다고 버텼는데 마음이 눈 녹듯 녹았다고.

 올해 75세인 이선자 성도는 나라에서 나오는 수급자 생계비로 힘들게 생활하고 주택공사에서 지원해준 집에 살고 있다. 남편은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이었을 무렵 중풍으로 세상을 떠났다. 딸을 무릎에 앉혀 놓고 고기를 손수 찢어 밥을 먹일 만큼 외동딸을 애지중지하던 남편이었다고 한다. 그런 아빠를 잃었다는 것에 딸은 큰 충격을 받았다.

 적응을 못하던 딸이 그나마 정을 붙인 게 동네 교회였다. 공부나 하라는 구박에도 딸은 찬양대에서 봉사하고 중학교 때까지 교회를 열심히 다녔다. 그런데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 진학을 못한 딸은 광주에 있는 공장에서 3개월 일하
다가 친구가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데를 알려줬다며 집을 나갔다고 한다. 그렇게 딸은 돌아오지 않았다.

 30대가 되어 빚을 안고 돌아온 딸은 알코올 중독 그리고 당뇨 합병증까지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엉망이었다. 병은 날로 악화되어 응급실에서 딸의 연락을 받는 일이 잦았다. 병상에 누워있는 딸에게 자신이 교회에 나가게 됐다고 말하자 “그래 엄마 믿어, 믿는 게 좋은거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같이 교회 가자는 말에 “어”라고 대답했지만 딸은 얼마 못가 세상을 떠났다. 이선자 성도는 그래도 딸이 자신을 구원으로 인도한 ‘복된 딸’이라고 말한다.

 어렵게 구원 받은 이선자 성도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나도 안 믿으려고 했던 사람인데 예수님 믿어보니 마음이 편해요. 같이 교회 가요”라며 전도한다. 이미 두 사람을 전도했다. 자신을 8년 동안 기다려준 지역장처럼 재촉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주는 것이 전도 방법이라는 이 성도는 이영훈 목사의 방문에 “반갑기도 하고 좋은데 어쩔 줄 모르겠네요. 나 같은 사람한테 목사님이 오셨다는 것이 감사할 뿐이에요”라며 “오늘 주신 말씀 기억하며 염려와 근심하지 않고 내가 받은 축복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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