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진 성도(여의도순복음동탄교회)

- 고난 통해 온 가족을 구원하신 하나님

첫 딸 하나님께 보내며 주님 영접오빠의 상처 보듬으며 온 가족 구원돌아보니 걸음마다 하나님 인도하심

 결혼 후 나는 시험관으로 어렵게 딸 아들 쌍둥이를 가졌다. 그런데 출산을 하고 보니 첫째 딸이 피부가 생성되지 않는 심각한 희귀병을 가지고 태어났다. 아기를 보며 나는 정신을 놓아버렸고, 병원과 조리원에서 매일 통곡하며 미친 사람처럼 다녔다. 그런 나를 사람들은 위로를 했다. 알지 못하는 이도 있었다.
 “기도하자. 하나님이 계신다!”
 하지만 그런 말을 들을수록 하나님에 대한 반감은 더 커져갔다. 충격은 산후우울증으로 발전하여 나도 죽고 아기도 죽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우울증은 점점 심각해져 정말이지 같이 죽어야겠다고 생각한 날, 갑자기 하혈을 해서 응급실로 실려 갔다. 그때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는 지옥의 모습을 보게 됐다. 의식을 차린 후 시아버지의 지인인 교인 한 분이 “첫 아이는 곧 하늘나라로 갈 테니 마음으로라도 살인하지 말라”는 쪽지를 보냈다. 당시에는 마음으로도 죄를 짓지 말라는 하나님의 사인임을 나는 깨닫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길을 가다 교회 목요찬양예배 현수막을 보았고, 나는 교회로 들어가 통곡하며 울부짖었다. 비로소 마음이 안정되는 느낌이었다. 아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나라로 갔다.
 이후 우연히 여의도순복음동탄교회를 알게 되어 남편과 함께 교회를 섬기게 됐지만 점점 신앙은 식어갔고 교회와는 다시 거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그때 전역 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게된 오빠의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20년이 지나도 오빠의 증세는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심해지고 밖에 나가서 사람들조차 만나기를 꺼렸다. 이러고 보니 부모님까지 피폐해져 친정 전체가 병들어갔다. 나는 이런 모습을 보고 다시 기도를 시작했고 하나님께 매달렸다.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고 금요철야예배에도 참석했다. 어느 날 철야예배에서 목사님께 안수기도를 받던 중 뜨거운 성령이 임했다. 그동안 머리로 믿으려고 해도 믿어지지 않던 십자가의 복음이 온몸으로 믿어지고 모든 일들이 날 위해 예비하신 것임을 확신하게 됐다. 그때부터는 내 문제가 보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사랑만이 보였다. 하도 크고 감사하여 기쁨이 충만했다. 그렇게 한 달 가까이 눈물로 회개기도를 드렸다. 그러자 내 모든 생각이 바뀌고 영혼 깊숙이 평안함이 임했다.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오빠 집 앞으로 가서 기도하라는 마음을 주셔서 순종하고 당장 오빠를 찾아 갔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오빠가 집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병세가 심해져 1년간 가족도 만나지 않던 오빠였다. 나는 달려가 그런 오빠를 꽉 안아주며 말했다.
 “오빠 미안해. 내가 그동안 오빠의 아픔을 모른척했어.”
 그렇게 용서를 구하고 교회에 나가 함께 기도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성령님의 온전한 도움으로 놀랍게도 오빠는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하고 금요철야예배에 함께 참석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남매가 온전한 믿음으로 서기를 바라셨던 거다. 이런 일들을 겪으며 이제는 친정과 시댁이 모두 교회에 나가게 됐고 믿음 안에 서게 됐다. 게다가 앞으로 아이가 생기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두 번째 딸을 선물로 주셔서 위로해 주셨다. 할렐루야!

 이 모든 일들은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였음이 퍼즐처럼 맞춰진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면 절대 행복할 수 없음을 알게 된 지금은, 교회에서 남편과 함께 찬양 봉사를 하며 기쁘게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 나는 앞으로도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정리=김주영 기자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기적


진실과 화해를 통한 참된 용서

 1996년 9월 12일 남아프리카공화국 비쇼에서는 특별청문회가 열렸습니다. 4년 전 이곳에서 인종차별 철폐를 요구하며 행진을 벌인 흑인들을 향해 군인들이 총을 쏴 50여 명이 사망한 대학살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는 청문회였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백인들이 수백 년간 흑인들을 지배하며 차별한 나라였습니다. 식당 버스 화장실은 물론이고 공원 벤치와 구급차, 심지어 교회도 백인용과 흑인용이 따로 있었습니다. 인종차별에 저항하는 흑인들을 백인 경찰과 군인이 마구잡이로 잡아 가두고 죽였습니다.

 1994년 마침내 흑인 지도자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흑인들은 백인에게 복수하길 원했습니다. 만델라 대통령은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위원회는 인종차별의 진상을 규명하고 청산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위원장은 데즈먼드 투투 성공회 주교였습니다. 위원회가 개최한 청문회는 누구나 와서 지켜볼 수 있었고 라디오와 텔레비전이 생중계했습니다.

 청문회가 진행될수록 흑인들의 분노는 커져갔습니다. 이날은 비쇼 대학살 사건의 책임자였던 군인들이 증인으로 불려나왔습니다. 대부분의 증인들은 냉소적인 태도로 자신들의 책임을 부인했습니다. 흑인들은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도대체 이런 청문회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차라리 우리가 직접 저 군인들을 처벌하겠다.’

 마지막으로 소베스버거 대령이 나왔습니다. 그는 군인다운 태도를 지키려고 노력하면서도 차분히 진실을 밝혔습니다. 자신이 총을 쏘라는 명령을 전달했다고 담담하게 인정했습니다. 방청객들은 곧 분노를 쏟아낼 기세였습니다. 그때 소베스버거 대령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십시오.”
 그는 함께 청문회에 나온 동료 장교들을 손으로 가리켰습니다.
 “저와 동료들은 평생 동안 비쇼 학살 사건의 책임을 어깨에 짊어졌습니다. 감히 잊어달라고 말씀드리지는 못하겠지만, 저희를 용서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방청석이 일순간 조용해졌습니다.
 “제 동료들의 무거운 마음을 이해해주시고 다시 받아들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소베스버거 대령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이것뿐입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청문회장은 침묵에 빠졌습니다. 낮은 탄성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리고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점점 커졌습니다. 조금 전까지 분노한 표정이었던 방청객들의 얼굴에 감동과 경의가 가득했습니다. 투투 위원장이 마이크를 잡고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 잠시 침묵의 시간을 가집시다. 우리는 지금 대단히 의미심장한 장면을 보았습니다. 모두 아실 겁니다. 용서를 구하는 일은 쉽지 않고 용서하는 일은 더더욱 힘듭니다.”

 투투 위원장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만약 내가 백인의 자리에 있었다면 나는 절대 그렇게 되지 않았으리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백인들의 잘못을 너그럽게 봐주거나 눈을 감자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으로 마음을 가득 채우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우리 인간들이 이렇게 서글픈 처지에 이르렀음을 한탄하며 함께 웁시다. 우리는 용서가 아니면 미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값싼 고백이 아니라 진심으로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나도 같은 처지였으리라!”

 투투 주교는 진실을 찾아내고 용서하고 용서하자고 호소했습니다. 피해자들이 겪은 고통, 차별 받아온 흑인들의 분노를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백인들도 자신이 저지른 일을 감히 고백하길 두려워했습니다. 투투 주교는 그럴 때마다 흑인과 백인에게 함께 기도하자고 요청했습니다.

 “청문회 자체가 지옥과도 같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 섬뜩하고 소름이 끼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도 여전히 회개하고 달라질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합니다. 눈을 감고 기도합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끄시는 곳으로 따라 갑시다. 용서와 화해는 쉽지 않지만 누군가는 그 문을 열어야 합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라는 주기도문을 함께 실천했습니다. 흑인과 백인이 함께 살아가는 나라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과거청산 작업을 벌이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기적이 일어나길 소망합니다.

김지방(국민일보 기자)


어윤희 권사(순복음강남교회)

- 내 인생을 바꾼 예수님 사랑

우연히 전도 받아 교회 출석
상담공부하고 봉사하며 새 세상 맛보고
가족 이웃들에게 감사의 전도
자녀도 주 안에서 믿음으로 형통

 나는 철저한 유교 가정에 시집와서 한학자인 아버님이 계시는 12대 종손의 맏며느리였다. 그런 내가 교회에 다니게 된 것은 지금 생각해도 놀랄 일이다.

 결혼 후 나는 공직생활을 하는 남편을 따라 고향을 떠나 서울에 왔고, 서울에서는 남들처럼 평범한 신혼생활을 보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내 마음에는 언제나 종손의 아내라는 압박감이 있었다. 입시를 앞둔 시동생들을 서울에 올려 보내도록 재촉해서 한 사람씩 서울에 왔고, 나중에는 사촌 시동생까지 합쳐서 고등학생 세 명을 뒷바라지하여 대학 졸업을 할 때까지 함께 살았다.

 그 사이 2년 터울의 남매가 태어났고 나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게 살았다. 남들도 다 그렇게 산다니까 맹목적으로 가족만 생각하며 산 셈이었다.

 그러던 중에 남편의 심부름으로 여의도에 사는 지인 댁에 가던 날 우연히 전도를 받아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고, 그 후로 내 인생은 180도 달라졌다. 예배와 성경말씀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깨달았다. 이렇게 좋은 예수님 사랑을 모르고 살아온 게 속이 상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전도도 열심히 하고, 구역장과 지역장으로 섬기면서 예수님 사랑을 전했다. 또 찬양대와 율동부에도 들어가서 비록 중년의 나이지만 젊은이들처럼 춤추며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했다.
 이렇게 교회에서 여러 가지 봉사를 하면서 나는 자신감이 생겼다. 주님 안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그중에서도 아가페전화상담실 봉사는 벌써 28년째이다. 처음에 우리 교회가 하는 상담학교과정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상담이 뭘까?’ 하는 호기심으로 공부를 시작했는데 이 공부가 사람을 사랑하고 이해하는 데 큰 힘이 됐다. 시간이 흘러 전화상담 봉사를 시작했다. 마음과 육신이 힘든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어느새 나라는 사람도 성장했다. 나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날까지 이 봉사를 계속하겠다고 다짐했다.

 엄마가 하나님 사랑에 감사하여 봉사하는 모습을 본 아들도 철저히 순복음의 자녀로 자라났다. 고3인 아들이 찬양대 봉사하느라 공부할 시간이 좀 줄어드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하나님께서 돌보시고 책임져주실 것이라고 믿었다. 심지어 그해에 15박 16일 선교여행까지 다녀왔다.

 아들은 고3 때 음대를 가고 싶어 했다. 음대 입시준비는 어릴 때부터 해야 하는 것이라 우리 부부는 음대 지원을 만류했다. 아들은 우리 조언을 받아들여 홍익대 전기과에 입학했다. 입학선물을 주려고 물었더니 아들은 전자키보드를 원했다. 교회 봉사를 하려고 하나 보다 싶어서 사주었다. 아들은 악기를 다루면서 음악에 더 깊이 빠져들었고,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음악을 공부하고 싶어 했다. 3학년으로 올라갈 때는 아들의 열정이 너무 대단해서 말릴 수가 없을 정도였다. “좋다. 서울대나 연세대에 가지 않으면 복학해야 한다. 그러면 재수를 허락하마.”

 아들은 약속을 하고 1년간 음대 준비를 했다. 결국 아들은 서울대와 연세대 음대에 동시 합격하더니 서울대를 선택했다. 사람이 자기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야훼시라는 말씀을 우리는 비로소 체험했다.

 마지막으로 가족 전도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에게 그것은 가장 중요한 사명이었다. 예수님 사랑으로 부모님을 섬겼다. 시부모님은 돌아가시기 전 주님을 영접하시고 장례도 기독교 예식에 따랐다. 이 일로 우리는 제사를 모두 추도예배로 바꿀 수 있었다.

 

주변을 돌아보면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이 많다. 그들에게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주고 싶다. 그 사랑이 내 인생을 이렇게 바꿔주셨다고, 그 사랑으로써 나는 지금 행복을 누리고 산다고 말해주고 싶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예수님 사랑으로 변화된 삶을 살기를 기도한다.      정리=복순희


이진권·배희숙 집사(동대문성전) - 사업도 사역도 하나님 복으로 충만



사업 어려워지자 새벽예배 드리며 극복…영적 회복도
하나님의 ‘맞춤 축복’에 감사, 이웃 섬기며 복음 전도

 우리 부부는 동대문 상권에서 액세서리 사업을 한다. 하루 수백 명이 오가는 이곳은 우리의 일터이자 복음을 전하는 선교센터이다. 우리가 이곳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나 고객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전적으로 주께 받은 은혜와 사랑이 크기 때문이다.

 나는 아내와 결혼하면서 주님을 영접했다. 어릴 적부터 여의도순복음교회를 다닌 아내는 교회학교 교사를 할 정도로 신앙심이 깊었다. 어린아이 같은 신앙을 가진 나를 위해 아내는 교사를 그만두고 함께 성경교육과정에 등록해 성경학교 성경대학 성경대학원 등 전 과정을 이수했다.

 고된 일이 많아 휴일 하루만이라도 쉬고 싶었지만 아내는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성경공부를 반드시 해야 한다고 했다. 힘들어도 참고 공부해 매진하던 어느 날 나는 성령을 받고 방언을 말하게 됐다. 그리고 믿음이 자라기 시작했다.

 하루에 서너 시간만 자고 일을 해야 하는 액세서리 사업은 힘들었다. 투자 금액도 수억 원이라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곳에서 사업하는 사람들은 물질로 인해 시험에 들 때가 비일비재하다. 크리스천도 예외는 아니다. 영적으로 올바로 서 있지 않고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마귀의 계략에 쉽게 쓰러지고 만다.

 동대문 상권의 상인들은 야시장을 마친 새벽에 퇴근을 한다. 지친 몸과 허기를 채우기 위해 식사를 하러 가거나 잠을 자러 집으로 돌아갈 때 우리 부부는 새벽기도를 드리러 성전으로 향했다. 그 시간이 우리에겐 영적 쉼을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시간이었다. 물질적으로 가장 어려움을 당할 때 새벽예배는 우리에게 영적 회복의 길로 안내했다.

 2008년부터 인터넷 쇼핑몰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자 동대문과 남대문 상권은 큰 타격을 입어 오프라인으로만 사업을 하던 상인들의 매출은 급락했다. 우리 가게도 재정난에 시달렸다. 금전적으로 낭패를 겪은 우리는 하나님 앞에 무릎 끓고 기도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 생각하고 곧바로 새벽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물질적으로 힘들어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은 절대 하지 않게 해달라고 간구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업장을 통해 물질의 복도 받고 이를 토대로 이웃에게 복음과 사랑을 나누는 일에 헌신하게 해달라고 간구했다.

 힘들어도 새벽예배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자 어렵던 사업이 다시 회복되기 시작했다. 말씀을 통해 영적으로 깨어났으며 사업의 지혜도 얻게 됐다. 새벽 제단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매일 드리는 가정예배도 우리 부부에게 신앙의 자양분이 됐다.

 나아가 우리는 사업 확장을 위해 기도를 시작했다. 매장 바로 옆이 최적의 장소라고 생각했지만 가진 돈이 많지 않았다. 작정하고 1년을 기도했는데 지난해 10월 매장 주인이 우리를 찾아와서 “혹시 우리 매장 사지 않을래요? 내가 시세보다 싸게 줄게요” 하고 제안했다. 놀랍게도 주인이 제시한 금액은 우리가 가진 돈과 정확히 일치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하나님의 계획이셨다.

 

하나님이 축복해주셨으니 우리의 할 일은 축복의 통로가 돼 주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동대문상권은 3만 개의 매장이 있는 어마어마한 전도의 황금어장이다. 우리 부부는 만나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한다. 또 올해부터 동대문성전의 ‘사랑의행복나눔센터’ 센터장까지 맡게 돼 주일 아침 인근 지역의 독거 이웃에게 사랑의 도시락을 배달하고 있다. 또 장애 성도를 위해 주일 차량봉사도 하고 있다. 우리의 것을 이웃과 나눌 때 우리 부부의 신앙은 계속 성장됐고 삶의 기쁨도 두 배로 커졌다.             

정리=오정선 기자


오가타 히데코 성도(순복음후쿠오카교회)

- 예수님이 온 몸을 고쳐주셨어요

무릎 통증 사라지고 손바닥은 다시 펴졌으며
어깨 탈골도 바로잡고 심지어 암까지 치유


 

나는 15년 전부터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왔다. 사업을 하다 망했는데 보증을 서준 가족들이 나 때문에 큰 피해를 입어 마음이 너무 괴로웠기 때문이다.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며 나는 오로지 죽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정신병원에 입원과 퇴원을 열 번 이상 반복할 만큼 증세가 심각했다.

 여러 번 자살 시도를 했고 정말이지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내가 다니던 정신병원의 의사가 순복음후쿠오카교회 성도였는데 내가 자꾸 자살을 시도하자 순복음후쿠오카교회로 나를 전도했고 지난해 6월 18일  교회에 등록했다.

 많은 일본인들이 그렇듯 나는 집에 사당도 만들어 놓고 철저하게 우상을 섬기던 사람이었다. 교회에 가는 게 쉽지 않았지만 의사의 전도로 교회에서 처음으로 예배를 드리게 됐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2년 전 무릎 뼈를 뚫고 철심을 박은 수술을 한 뒤로 무릎을 구부리지 못해 늘 지팡이를 짚고 다녔는데 그날 예배를 드린 후 무릎 통증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지팡이를 내려놓고 편안하게 걷고 있었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의사는 평생 무릎을 꿇지 못할 것이라고 했는데 나는 신유기도 시간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교회에 온 첫날부터 이런 기적을 체험한 것이었다. 나는 기적을 보며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3개월 후 나는 오직 예수님만이 나의 구주이심을 고백하며 그동안 숭배해 온 모든 우상들을 버렸다. 집안 곳곳의 우상숭배 도구들을 모아놓으니 세 보따리나 나왔다.

 교회에 나오기 전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자살을 시도할 때 식칼로 손을 여러 차례 찍는 바람에 동맥이 끊어져 많은 피를 흘렸다. 그 후 손바닥이 당겨 구부릴 수 없었는데 예배를 드리면서 이것도 치유되어 주먹을 쥘 수 있게 됐다. 뿐만 아니라 집에서 넘어져 어깨뼈가 탈골돼 오른팔을 움직일 수도 없었는데 이 또한 예배 시간에 치유를 받아 지금은 팔을 자유롭게 사용한다.

 나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해 7개월 전부터 성경을 쓰기 시작했다. 매일 성경필사를 한 결과 지금 노트 25권에 달하는 필사본이 생겼다. 가장 큰 은혜를 받은 말씀은 이사야 53장 5절 말씀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였다.

 성경을 읽으며 설교 말씀을 들으니 매주 은혜와 감사가 넘쳐났다. 최근에는 먹으면 자꾸 토하는 바람에 병원에 가서 내시경 검사를 했더니 악성 림프암이라고 했다. 위와 장에 모두 전이된 상태였다. 나는 낙심했다. 그러나 죽을 각오로 성경을 쓰며 기도했다. 김일 담임목사님께 매일 기도도 받았다. 어느 날 목사님이 내게 “춤을 추면서 찬양해 보세요”라고 하셨다. 나는 목사님 말씀에 순종해 춤추고 찬양하며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그렇게 2주가 흘렀을 때 정밀검사를 받기 위해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깜짝 놀랐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예요? 암이 사라졌어요.”

 

예수님이 또 고쳐주신 것이다. 할렐루야! 여기 저기 아픈 곳도 많고 죽고만 싶던 내가 교회에 다니며 몸도 마음도 건강해졌다. 하나님을 만나면서 내 삶은 활기로 가득 찼고 성경을 읽으면 새 힘이 생겨났다. 많은 사람들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전하며 전도하는 것이 가장 기쁘다. 이전엔 TV만 보던 내가 항상 설교 말씀을 듣고 성경을 읽고 쓰게 됐다. 주 안에 살아가는 것이 너무 기쁘다. 야훼 라파, 치료의 하나님께 찬양을 드린다.

정리=이미나 기자


김갑석 성도(용산대교구)

- 꼬리에 꼬리를 문 하나님의 인도하심

아내 따라 교회 다니기 시작
교통사고로 입원한 병원서 믿음 좋은 권사님 만나
여의도순복음교회 등록하고 파더스드림 참여
말씀안에서 ‘좋은 아빠’로 거듭나고 헌신 봉사

 나의 아내는 믿음의 가문에서 자랐다. 할아버지는 목사님이셨고 그 믿음의 유산이 아내에게까지 전해져 교회 다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왔다. 교회를 다녀본 적이 없던 나는 단지 가정의 불화를 만들지 않기 위해 아내를 따라 교회에 갔다. 매주일 교회에 가긴 했지만 예배를 드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말씀이 시작되면 어찌나 졸리는지 시작과 동시에 고개를 숙이고 깊은 잠에 빠져들고는 했다. 나는 사업을 하며 세상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다. 토요일 새벽까지 술을 마신 후 다음날 교회에 나갔고 술 냄새가 나는 나에게 목사님이 손을 얹고 안수해 주셨는데 나는 그게 너무 싫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느니 차라리 교회에 안 나가겠다고 아내를 설득했으나 아내는 완고했다.
 “술을 마시고 언제 들어오든 상관 안 할 테니 무조건 예배는 드려요.”
 나는 6∼7년간 등록하지 않고 교회에 잠시 들러 낮잠 자고 오자는 생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골목길에서 마주 오는 차와 정면충돌하는 교통사고가 났다. 초보운전 승용차가 앞에서 돌진한 것이다. 이 사고로 우리 부부는 병원에 입원했는데 다인실이라 여러 환자들과 함께 있었다. 환자들 중에 여의도순복음교회에 다니는 권사님 한 분이 계셨는데 우리 부부에게 어찌나 친절하시던지 곧 친해졌다.

 교회 새신자부에서 식사봉사를 한다는 권사님은 우리에게 등록하여 새신자교육을 받도록 권유하셨다. 우리 부부는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교회에 등록하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이런 우연이 하나님의 계획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새신자교육을 받은 후에도 여전히 믿음은 생기지 않았으나 여전히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멈추지 않았다. 사업을 하면서 알게 된 지인과 이야기하던 중에 그도 우리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저와 함께 파더스드림 프로그램에 등록하지 않겠어요?”
 나는 그의 권유로 20기 모임에 참가했다. 처음에는 이런 모임들이 부담스럽기만 했다. 그런데 동기들이 나를 살뜰히 챙겨줄 뿐만 아니라 열정적으로 모임을 이끌어가는 회장님을 보면서 감동을 받았다.

 모임에 참석하는 동안 나는 조금씩 변화했다. 전에는 아들에게 “야! 임마” 하거나 “이 자식아” 했다면 이제 “아들∼” 하고 따뜻하게 부른다. 때로는 포옹도 해주며 내가 받은 사랑을 나눠주고 있다. 처음엔 어리둥절했던 아들도 어느새 아빠의 변화된 모습에 익숙해져 가고 있다.

 

파더스드림에서 팀장으로 봉사하면서 세상 친구들과도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이제는 술 마시고 다른 사람 험담하는 시간이 즐겁지 않다. 내 안의 옛 모습을 비우자 성령으로 충만한 새 부대로 바뀌었다. 앞으로도 기도와 말씀 안에서 봉사하며 살아가야겠다.

정리=김주영 기자


박임출 권사(순복음강북교회)

- 23년 봉사의 원동력은 ‘하나님의 도우심’

남편 살려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상담봉사 결심
‘어머니’처럼 베풀고 나누는 여생 살고 싶어

 나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아가페전화상담실에서 매주 3시간씩 23년째 상담봉사를 하고 있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문제와 아픔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고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성령님과 함께하며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 수 있었던 것은 내 삶에서 가장 귀하고 보람된 시간이었다. 봉사를 시작한 것은 1993년, 남편(노대영 장로)이 뇌종양으로 생사의 기로에서 수술을 받고 깨끗이 치유된 뒤였다.

 아직도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하루 저녁 머문 응급실에서 남편의 침대 양쪽에 누워 계시던 분들이 2시간 간격으로 돌아가셨다. 이후 중환자실로 옮겼는데 거기서도 연달아 환자들의 죽음을 목격했다. 젊디젊은 청년이 목욕탕에서 미끄러져 뇌진탕으로 삶을 마치고, 맹장수술 후 가스가 나오기 전에 물을 먹어 사망한 사람도 있었다.

 남편은 수술 전 조용기 목사님의 기도를 받았다. 그리고 위험천만한 뇌수술 끝에 시력이 돌아오고 수술 후유증 하나 없이 건강을 회복했다. 두렵고도 힘든 과정이었으나 시련을 극복하면 신앙과 삶에 큰 유익이 있음을 깨달았다.

 이 일을 겪고 나서 인생에 대한 나의 생각과 관점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때 나는 교회에서 지역장을 맡고 있었는데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면서 인생에서 소중한 것과 허무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러면서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의 일에 더욱 헌신해야겠다고 결단했다. 한 번뿐인 인생을 가치 있게 쓰임 받고 싶었다. 그리고 기도하던 중에 상담으로 이웃을 섬기는 소명을 받았다.

 학창시절 친구들은 고민이 생기면 나에게 와서 털어놓았다. 그래서 나에게 혹시 상담의 달란트가 있나 보다 생각하여 상담사역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공부를 하고 상담을 할수록 부족함을 느꼈다. 비록 무료봉사지만 누구에게나 제대로 된 상담을 해드려야겠다 생각하여 서강대학교 사회교육원 카운슬러 전문과정을 이수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시작한 상담봉사인데 정작 가장 큰 혜택을 입은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지 싶다. 상담을 하면서 슬픈 사람과 함께 울고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면서, 때로는 격한 말을 들어야 할 때도 있지만 감사하게도 모든 상황에서 스트레스를 받은 적은 없었다. 이는 지속적으로 사람에 대해 공부한 덕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신앙 안에서 내가 배운 것으로 이해하고 베풀고 누리니 모든 것이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70을 바라보는 나이에 뒤를 돌아보니 기도 응답도 많이 받았다. 삶에 여러 문제가 있을 때마다 기도원에 가서 두세 시간씩 하나님께 기도하며 속상한 마음을 다 풀어놓았는데 하나님께서 내가 봉사하며 살 수 있도록 문제를 해결해주셨고 시간과 건강도 주셨다.

 

그동안 서원기도를 많이 했는데 지금 나의 기도는 할머니가 아닌 ‘어머니로 살다가 죽을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누구에게든 ‘어머니’로서 베풀고 섬기고 보듬고 안아주며 살게 해달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바란다.

정리=복순희 기자


이영신 권사(은평대교구)

- ‘오직 예수’로 무속신앙 떨쳐냈다

 

나는 박수무당인 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랐다. 결혼 후 만난 시어머니도 철저하게 미신을 섬기는 분이었다. 나도 시어머니를 따라 무당집을 드나들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알 수 없는 병이 나를 억눌렀다. 매순간 목이 조이고 머리가 무거워 밥도 제대로 먹을 수 없었다. 내 몸조차 가누기 힘든데 이번에는 갓 돌이 지난 막내딸이 심한 화상을 입어 입원을 했다. 의사는 사흘 고비를 잘 넘기지 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며 경고했다. 절체절명의 상황에 처한 셈이었다. 그때 옆 병실에서 찬송과 기도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읊조리듯 부르짖었다. “하나님이 계시면 저 찬송 소리를 내게 들려주시고, 우리 아이가 죽을 수도 있다는데 하나님이 살려주세요.”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했다. 단지 누군가 우리 집 문 앞에 두고 간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소식지가 있어서 가끔 읽은 적이 있을 뿐이었다. 내 몸이 아팠으므로 병이 나았다는 간증을 열심히 읽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안개 속에서 빛이 내리쬐며 우렁찬 소리가 들렸다. “침례를 받아라. 그러면 너와 네 딸이 살 것이다.” 그 소리가 세 차례나 들렸다. 희한한 꿈이었다.

 교회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던 나는 침례가 무엇인지 물어보기 위해 옆집 문을 두드렸다. 얼마 전에 이사 온 사람인데 기독교인이라고 했다. 나는 무작정 침례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집 아주머니는 대뜸 성경책을 건네며 “창세기를 읽다가 이해가 안 되면 마태복음을 읽으세요”라고 말했다. 나는 그때부터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이 눈에 들어왔다. 그 기적이 나에게도 일어날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기도도 할 줄 모르는 내가 기도를 시작했는데, 다행히도  막내딸이 사흘 고비를 넘겨 살아났다.

 나는 더욱 열심히 성경을 읽고 기도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방해하는 소리가 들렸다. “네가 예수를 믿어? 어디 한번 두고 보자”는 소리가 또 밤마다 들렸다. 하루는 기도하는 모습을 시어머니가 발견하고는 내가 읽던 성경책을 가져다가 불태우고 나를 방안에 가둬버렸다. 며느리가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던 시댁의 식구들은 온갖 방법으로 나를 회유했다.

 그러나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내가 당장 죽게 생겼는데 왜 나에게 교회를 못 가게 합니까?” 하고 소리쳤다. 집안이 흑암이었다. 이번에는 일곱 살인 큰딸이 갑자기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나는 지금 우리 집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일들을 혼자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가까운 교회로 달려가 “우리집에 와서 찬송과 기도 소리를 좀 들려주십시오” 하고 간청했다.

 교회에서 20여 명의 사람들이 우리집에 와서 예배를 드려주었다. 예배를 마치고 나자 피를 토한 채 쓰러졌던 큰딸이 열이 내리면서 정신이 돌아왔다. 이 모습을 본 시어머니가 결국 “하나님의 힘이 진짜 강하시구나” 하며 자신이 여태까지 섬긴 신을 내려놓았다. 수많은 우상들을 모조리 꺼내 태웠다.

 내가 이런 일을 겪는 동안 우리집 형편은 급격히 기울었다. 그동안 미신을 믿으며 쌓은 집안의 재물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새로운 물질의 축복이 밀려왔다. 그 후 큰딸과 막내딸은 모두 목회자의 사모가 되었고, 둘째아들도 우리 교회에 다니는 믿음 좋은 여인을 만나 결혼했다.

 박수무당 집안이 그렇게 믿음의 가정으로 바뀌었다. 시댁을 온전한 믿음으로 무장시키려면 아직 더 많은 기도가 필요할 것이다. 앞으로도 믿음의 가정을 세우기 위해 영적인 무장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우리 가정을 사랑하셔서 구원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할렐루야.     

정리=김주영 기자


박영자 집사(마포2대교구)

- 내 주부습진에 동생까지 치유해주신 주님

 

내 인생에서 가장 큰 행복은 하나님을 만난 것이다. 어릴 적 할머니를 따라 절에 다닌 것이 결혼 후에도 답답하면 절을 찾게 됐고, 무당을 통해 굿을 하게 됐다.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답답했다. 그럼 또 다시 무당을 찾아 굿을 했기에 돈도 많이 버렸다. 또 외로움을 잊기 위해 친구 술 세상을 벗하며 지내다보니 결국 가진 재물을 다 잃고, 심한 주부습진으로 두 손은 갈라지고 벗겨져서 지문조차 사라졌다. 그야말로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됐다. 이런 나를 안타깝게 여긴 여동생이 어느 날 교회에 가자고 했다. 나는 냉정하게 “너나 잘 믿어” 하고 핀잔을 주었다. 다음에는 마포2대교구 정옥수 권사님이 찾아오셨다. 손주를 등에 업고 매일 오전과 오후에 한 번씩 나를 찾아와서 “교회에 한 번만 가자”고 했다. 나는 또 “제 동생도 순복음교회 다니면서 저에게 전도를 하지만 전 절대로 교회 안 다녀요” 하고 말했다.

 하지만 권사님은 포기하지 않고 매일 찾아와서 성경도 사다주시고, 전화를 안 받으면 받을 때까지 끈질기게 기다리면서 어떻게든 하나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나는 여전히 “하나님이 어디 있어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왜 그리 말이 많죠?” 하며 투덜거렸다. 그래도 토요일만 되면 어김없이 나타나 “우리 교회 한 번만 가자”고 했다. 결국 나는 못이기는 척 권사님을 따라 2009년 어느 날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 후로 나는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으나 신앙이 깊지 않으니 1부 예배를 드리고는 등산을 했다. 등산을 가면 점심은 언제나 절에서 절밥으로 때웠다. 그런데 하루는 절밥에서 비린내가 나서 도저히 먹지 못하고 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술병만 봐도 헛구역질이 나와 술도 입에 대지 않았다. 대신 산에 가면 머릿속에 찬송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 맴돌았다. 권사님이 나를 위해 얼마나 기도하셨으면 찬송이 떠오를까 생각했다.

 나는 2010년 7월 30일 침례를 받았다. 세상 자랑, 세상 욕심 다 버리자고 다짐했다. 그 후로는 예배마다 참석하고, 오산리 금식기도원에도 자주 갔다. 하루는 기도원에서 기도하면서 “하나님, 방언주세요” 하고 간구했더니 바로 그날부터 방언기도가 나왔다. 풀리지 않던 내 인생도 그때부터 평안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또 양약으로도 한약으로도 고치기 어렵다던 주부습진이 손뼉을 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이에 매끄럽게 치료됐다.

 전에는 ‘하나님은 한 분인데 이 많은 사람들의 소원을 어떻게 하나하나 다 들어주실까” 했는데 때로는 음성으로 때로는 말씀으로 만나주시는 하나님을 깨달으면서 하나님은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분임을 확신했다.

 최근에는 남동생도 낫게 해주셨다. 남동생은 7년간 간암 수술을 네 번이나 받고, 지난해 겨울에는 수술이 어려운 부분에서 암이 발견되어 방사선과 항암치료를 받았다. 빈혈에다 백혈구와 혈소판 수치까지 낮아서 나와 여동생은 매일 기도했다. 몇 달 전에는 남동생이 코피를 흘렸는데 멈추지 않았다. 급한 마음에 동생 등을 두드리며 간절히 기도하자 코피가 멈췄다. 동생은 그제야 아침까지 편안하게 잠을 잤다. 일주일 후 또다시 코피가 쏟아져 다시 동생 등을 두드리며 간절히 기도했더니 코피가 멈추고, 빈혈 백혈구 혈소판 수치도 정상으로 돌아와 지금까지 잘 지내고 있다.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시는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신다. 간절히 기도할 때마다 내 곁에서 모든 기도를 듣고 계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 나는 그저 감사할 뿐이다.    

       

정리=오정선 기자


김남수 권사(금천대교구)

- 사고로 척추 다친 남편 하나님 도움으로 ‘완쾌’

휴일에도 원하던 의사의 집도로 수술 … 빠른 회복
‘좋은 교회’ 만난 덕분에 ‘가족구원’의 기쁨도

 지난해 12월 23일 새벽, 일찍 출근한 남편(이문재 집사)이 교통사고를 당했다. 주차장에서 후진하던 버스에 치여 넘어진 뒤 버스 아래에 허리가 눌렸다. 바퀴에 깔리지 않은 것만도 천만다행이었다. 사고 후 즉시 가까운 병원으로 이송했지만 하필 토요일이라 오후 2시가 넘도록 별다른 조치 없이 기다려야 했다.

 남편은 통증을 호소했고, 우리 가족은 기도밖에 해줄 것이 없었다. 게다가 남편은 2009년 허리디스크 수술을 받은 경력이 있어서 가족들 마음은 더욱 초조했다. 어쩔 수 없이 남편이 예전에 수술을 받은 병원으로 옮길 작정으로 검사한 서류들을 챙겨 병원을 나왔다.

 옮긴 병원에서도 처음에는 병상이 없다고 했다. 우리는 다급히 ‘하나님’을 찾고 또 찾았다. 고맙게도 병상이 났고 수속을 밟을 수 있었다. 입원한 뒤 만감이 교차했다. 우리는 10년 전 남편을 수술한 선생님이 이번에도 맡아주시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현실은 어려워 보였다. 왜냐하면 이튿날은 주일인 데다 다음날은 크리스마스였다. 벽에 게시된 의료진의 스케줄을 확인해 보니 우리가 바라는 교수님은 크리스마스인 월요일엔 휴무인지 일정이 없었다. 화요일은 진료 일정으로, 수요일은 수술 일정으로 바빴다.

 나는 아이들과 또 소식을 듣고 달려오신 목사님과 함께 진통제를 맞고 누워 있는 남편 곁을 잠시 떠나 병원 내 예배실로 갔다. 우리는 간절하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 채 기도했다. “하나님 남편이 수술을 빨리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하나님 보고 계시죠? 다 아시죠?”

 그리고 이튿날 같은 예배실에서 주일 예배를 드린 뒤 병실을 지키고 있는데 갑자기 남편을 수술하신 교수님이 나타나시는 게 아닌가. 생각지도 못한 반가운 얼굴을 보자 우리는 고맙고 기뻐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교수님이 허리디스크 수술을 하신 뒤로 10년 동안 남편은 한 번도 병원을 찾지 않을 만큼 수술 결과가 좋았으므로 교수님에 대한 우리 가족의 신뢰는 대단했다. 그런 교수님이 “오늘부터 금식하시고 내일 점심 때 쯤 수술합시다” 하고는 자리를 뜨셨다.

 크리스마스 휴일에 수술 일정이 잡힌 셈이었다. 그리고 수술 결과도 대만족이었다. 70세 고령이었음에도 남편의 회복속도는 매우 빨라서 11일 만에 퇴원할 수 있었다. 척추를 다쳤지만 디스크수술 부위 위쪽이었고 다른 데는 상처가 없었다. 모든 게 참 신기하고 감사했다. 그렇게 긴박한 이틀이 기적처럼 지나간 뒤 우리 가족은 이 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찬양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셨다고 확신했다.

 32년 전 나는 우편함에 꽂혀 있던 ‘행복으로의 초대’를 보고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찾아갔다. 어린 시절부터 동네 교회에서 뛰놀며 성장했고, 중학생 때 성령침례와 방언기도를 받았으나 그 후 잘 사용하지 않아 소멸됐다. 결혼 후 고향을 떠나 서울로 와서 교회들을 전전했으나 무엇보다 기도가 갈급했던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을 행복으로의 초대를 통해 여의도순복음교회로 불러주신 셈이었다.

 나는 인생에서 크고 작은 일을 만날 때마다 주님을 바라보았다. 아이들(1남 1녀)도 신앙 안에서 잘 자라서 믿음의 배우자를 만났고, 교회에서 봉사하고 있다. 대를 이어 신앙으로 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게다가 부모님과 형제들까지 부족한 나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믿어 천국의 소망을 품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하면서 느낀 것은 이것이다. 즉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으면 걱정할 것이 없다. 그러니 모두 예수님을 믿고 행복한 삶을 살길 바란다.

정리=복순희 기자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