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인순 집사(종로중구대교구)

- 고난의 길을 지나 축복의 땅으로

우리 교회로 불러 기도하게 하시고
사업의 난관 겪으며 더 매달리게 하신 뒤
고비마다 지혜 주시고 길 열어주셔서
헌 집 버리고 새 집 얻게 하셨네


 나는 24년 전 여의도순복음교회의 한 지역장을 통해 우리 교회에 인도를 받았다. 우리 교회에 출석하기 전에도 교회에 다녔지만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세상에 치우쳐 살다가 2014년 권사님이신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본격적으로 믿음생활을 시작했다. 주일성수는 물론이고 구역예배도 드리고, 십일조를 시작하고, 성경통독도 하면서 신앙이 깊어졌다.  

 2016년 11월 나는 방언을 받고 싶었다. “주님 방언을 허락해주세요. 방언으로 기도하며 주님과 더 깊이 교제하고 싶어요.” 그렇게 기도하며 방언을 사모했다. 구역예배 통성기도 시간에 방언기도가 안 나온다고 안타까워하자 구역장님은 자신이 방언을 받게 된 이야기를 해주면서 함께 기도해주었다. 나는 방언을 받을 때까지 기도해보자는 작정으로 매일 아침과 저녁 1시간씩 기도를 했다. 그렇게 기도한 지 이틀이 지났을 때 갑자기 나도 모르게 혀가 움직이면서 방언이 나왔다. 그 뒤로는 기도시간이 그렇게 즐겁고 신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충만한 은혜 속에 살면서도 사업은 어려움에 빠져 있었다. 거래처에서 결제를 자꾸 미루면서 그 피해를 고스란히 내가 받았다. 한 달 두 달 기간이 길어지자 직원들의 월급은 물론 사무실 월세, 가정의 생활비조차 감당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살던 아파트의 보증금을 빼서 월세로 돌리고 여기저기 돌려 막기를 하면서 버텼다. 6∼7개월 동안 계속 거래처에서 결제 대금을 받지 못하자 나는 더 이상 버틸 여력이 없었다. 이번에는 내가 살던 지역이 재개발에 들어가면서 임대아파트를 신청했는데 그것마저 떨어졌다. 캄캄하고 막막했다. 어디를 봐도 길은 없었다. 나는 하나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기도하면서 겨우 견뎌냈다. 그야말로 바닥에서 간절하게 드리는 기도였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정과 형편을 아시고 임대아파트조차 허락하지 않으신 줄 알고 감사드립니다.” 내 입가에는 한 곡의 찬양이 맴돌았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눈앞에 아무것도 안 보이는 그 시각, 나는 저녁마다 겟세마네기도회에 가서 성령의 도우심을 느끼며 눈물로 기도했다. 겟세마네기도회를 시작한 지 1주일이 지났을 무렵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아파트에 당첨되도록 해주셨다. 너무나 기쁘고 감사한 일이었지만 계약금을 마련할 수 없었다. 나는 낙심하지 않고 더 힘을 내어 기도했다. 기도 중에 하나님은 겟세마네 동산 위에 십자가 세 개가 서있고 저녁놀이 지는 산 위에 무지개가 걸린 환상을 보여주셨다. 다음날에는 처음에 본 것보다 더 큰 무지개를 보았다.

 또 하나님이 지혜를 주셔서 나는 거래처 담당자에게 나의 형편을 조목조목 적어서 이메일을 보냈다. 그랬더니 다음날 밀린 결제대금 전액이 입금됐다. 만약 그때 입금이 안 됐으면 나는 아파트를 포기해야 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로밖에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나는 그 돈으로 계약금과 잔금을 모두 치렀고, 우리 가족은 더 넓은 새 아파트로 이사할 수 있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예상을 뛰어넘어 더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다. 나는 그런 주님을 체험하면서 믿음이 더 깊어졌다. 주일 예배시간에 나는 담대히 고백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성령님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하여 40년간 광야를 헤매다 죽었던 것처럼 어쩌면 나도 그럴 수밖에 없는 인생이었는데, 불쌍한 나를 구원해주시고 만나주셨으니 이보다 큰 복이 어디 있을까.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        

정리=이미나 기자


금정렬 권사(양천대교구)

- 전도상에다 끊어진 인대까지 덤으로 치유

전도상 시상 앞두고 인대 끊어져
이영훈 목사님 신유기도로 치유
전도상에 치유 축복, 권사 임명까지
‘할렐루야!’ 더 없이 행복한 날들

 나는 8월 26일 ‘2018 상반기 전도 정착 종합시상’에서 대상을 받은 데 이어 9월 5일 제직임명예배에서 권사로 취임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큰상을 두 개씩 주신 셈이니 올해는 무엇보다 뜻 깊은 해로 기억될 것 같다.  

 결혼 후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1년 넘게 다른 종교에 공을 들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런데 친구의 전도를 받아 교회에 나오면서 비로소 귀한 딸을 낳았다. 결혼 13년 만의 일이었다. 그렇게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지 20년이 넘었다. 그 동안 나는 내가 만난 그 좋은 하나님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래서 전도는 나에게 마땅한 책무요 사명이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마음으로는 굴뚝같은데 막상 낯선 사람들 앞에서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6년 전 우리 교회 교회성장선교회가 전도훈련학교를 열었을 때 등록하여 교육을 받았다. 이때 함께 교육받은 분들과 협력하여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다가가 전도할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붕어빵 전도, 토스트 전도 등을 시작했다. 전도지 ‘행복으로의 초대’는 어디를 가든 꼭 지참했다. 무엇보다 나의 전도 열정에 불을 붙여준 건 전도를 받은 분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삶과 인격이 변화될 때의 기쁨이었다. 세상에 그보다 더 큰 기쁨은 없다고 나는 믿는다. 또 아픈 몸으로 오셨다가 예배를 드린 후 병을 치유 받는 분들도 많았다. 이런 기쁨들이 나를 전도하게 만들었다.

 올해는 특히 전도에 모든 것을 걸고자 생각했다. 전도된 분들이 잘 정착하여 신앙의 뿌리까지 내릴 수 있도록 관계 전도에 최선을 다했는데 갑자기 교회에서 전도대상을 주신다는 연락이 왔다. 하지만 그 기쁨을 다 만끽하지도 못했는데 갑자기 왼쪽 팔에 심한 통증이 시작됐다. 시상식을 나흘 앞둔 아침이었다. 아마 그 전날 스트레칭을 무리하게 한 까닭인 것 같았다. 병원에 갔더니 인대가 끊어졌다며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당장 수술을 할 수는 없어서 다음 예약을 잡은 뒤 집으로 돌아와 진통제를 먹었다.

 주일에는 전도 시상식에 참여했다. 이영훈 목사님이 예배 때 시상을 하셨는데 상을 받고 나자 이상하게 팔이 아프지 않았다. 시상식을 마치고 교구 식구들을 만나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에 가는데 한 집사님이 바삐 물었다.
 “아까 목사님께서 신유기도 시간에 왼쪽 팔이 아픈 사람이 나았다고 하셨을 때 ‘어머 이건 지역장님께 하신 말씀이네’ 싶어 ‘아멘’을 했는데, 지역장님 지금 팔 어때요?”
 “신기하게 아프지 않아.”
 가만히 생각하니 당시에는 경황이 없어서 목사님의 말씀도 잘 듣지 못했는데 정말 감쪽같이 통증이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예약한 날 병원에 가서 MRI 촬영을 하고 결과를 듣기 위해 의사와 마주앉았다.
 “인대가 멀쩡해졌어요. 끊어진 흔적을 찾을 수 없으니 지금은 해줄 게 없네요. 나중에 아프면 오세요.”

 하나님이 전도상에다 덤으로 인대까지 낫게 해주신 셈이었다. 나는 하나님이 낫게 해주신 건강한 몸으로 더 열심히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기로 다짐했다. 게다가 이제는 기도의 어머니인 권사가 되었으니 만나는 모든 분들이 주님을 만나 행복하기를 기도하며 전도의 사명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정리=복순희 기자


박태근 장로(용산대교구)

- 암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신앙회복


이영훈 목사 ‘주께서 고쳐주신다’ 안수기도

 지난 2월 아내(안순덕 권사)는 종합건강검진을 받고 오른쪽 폐에 이상이 있어 다시 대형 병원에서 정밀검사를 받은 결과 혹이 발견됐다. 다시 조직검사를 받고 나서 의사는 폐암일 확률이 80∼90%라며 수술을 제안했다. 암이 아니면 다행이지만 그렇더라도 혹이 암으로 발전될 가능성이 농후하니 제거하는 수술을 받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또 만약 암이라면 오른쪽 폐의 절반을 절제하고, 심하면 오른쪽 폐 모두를 절제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더 걱정스러운 건 혹이 발견된 위치였다. 하도 위험한 부위라 수술이 커질 경우 갈비뼈 두 개를 절단할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아내와 나는 생명을 주신 이도 야훼시고, 거두시는 이도 야훼시니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자고 했다. 혹을 제거하고 2차 조직검사를 위한 수술은 8월 7일로 잡혔다. 수술을 나흘 앞둔 8월 3일 서울 더플라자호텔에서는 전국장로연합회 수련회가 열렸다. 수련회에 참석했다가 이영훈 목사님을 우연히 만났다.
 “목사님, 제 아내가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바쁘시니 전화로라도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아니에요, 권사님을 직접 만나서 기도를 해드릴 테니 이번 주일예배 후에 권사님과 비서실로 오세요.”

 나는 감사한 마음에 뛸 듯이 기뻤다. 우리는 주일3부예배 후에 비서실에 들렀다. 목사님은 아내와 나를 위해 간절한 마음을 담아 안수기도를 해주셨다. 그리고 돌아서서 나오려는 우리 부부에게 “암은 병도 아니에요. 이미 주님이 고쳐주셔서 다 나았습니다”라며 은혜의 말씀을 선포해주셨다. 그 순간 우리 안에 있던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면서 ‘그래, 나을 수 있다. 주님이 고치신다’는 강하고 담대한 믿음이 생겨났다.

 아내가 입원해 있던 병실은 5인실이었는데 비슷한 증상으로 수술을 앞둔 환자가 아내를 포함해 네 명이었다. 입원실 바로 앞에는 기도실이 있었다. 우리 가족들 그러니까 나와 목사인 사위, 전도사인 딸을 비롯해 모든 자녀들이 번갈아가며 이곳에서 중보기도를 드렸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한 병실에 있는 환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했다. 수술 받는 당일에는 대교구장님과 담당교구장님이 방문해서 기도해주셨다.

 수술은 대기자가 많아 기다리는 데만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내가 수술실에 들어가자 다시 어머니이자 할머니인 아내를 살려달라고 온 가족이 합심하여 기도했다. 드디어 수술을 마친 아내와 함께 의사도 회복실로 들어왔다.
 “암이 확실했는데 다행히 암이 아니니 안심해도 되겠습니다.”

 할렐루야! 의사가 확신한 암의 두려움에서 해방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었다. 아내는 급기야 지난 8월 20일 병원에서 암이 아니라 ‘결절’이라는 판명을 받았다. 더 이상 암이 아니니 안심해도 된다는 최종 진단이었다.
 아내는 이번 일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고 ‘하나님께 소홀하지 않았나’ 회개하며 기도하는 시간을 갖게 됐다고 감사드렸다. 세 딸은 중보기도의 능력이 강한 힘이 된다는 것을 다시 배우며 모든 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십자가 승리의 믿음’을 깨닫는 시간이었다고 고백했다.
 

뒤를 돌아보면 하나님은 우리 가정에 많은 복을 허락하셨다. 우리 가족을 목사와 전도사, 장로와 권사, 교사, 교회학교 헌신반 봉사자 등 믿음의 일꾼들로 세워주셨다는 것은 곧 섬김의 자리에서 더욱 충성하라는 주님의 말씀임을 기억하고 기쁨으로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살아갈 것을 다짐한다.        

정리=오정선 기자


안교숙 권사(은평대교구) - 독사에 물린 아들을 살려주신 하나님

 

24년 전, 그러니까 1994년 7월 넷째주일이었다. 나는 예배에 빠지고 동네 친구들과 부부동반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일영계곡에 바캉스를 떠났다. 한참 재미있게 놀고 있는데 아들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물속에서 뛰쳐나왔다. “엄마 뭔가 이상한 게 내 발꿈치를 물었어요.” 자세히 보니 오른쪽 발목이 부어오르고 있었다. 재빨리 딸의 머리끈을 풀어 아들의 허벅지에 묶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독사에 물렸네요. 독이 이미 퍼졌으니 빨리 큰 병원에 가보세요.” 우리는 서둘러 서울의 종합병원 응급실로 달려가 응급처치를 받았다. 하지만 아홉 살밖에 안 된 아들의 다리는 점점 부어오르고 눈이 돌아가기 시작했으며 구토까지 했다. 고통스러워하는 아들 모습을 바라보는데 가슴은 뛰고 숨도 쉴 수 없었다. 기도를 해야 하는데 무슨 말로 어떻게 할지 알 수 없었다. “살려주십시오, 하나님 살려만 주십시오.” 그렇게 무조건 살려달라는 기도만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아들의 상태는 점점 심각해져 가고 의사는 독이 머리까지 오르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경고를 했다.

 “그런데 왜 해독제를 안 쓰세요?”
 “해독제가 외국에서 오는데 도착하려면 3일이 걸려요. 그리고 해독제를 쓴다 해도 쇼크로 사망할 확률이 높아요. 그러니 더 이상 손쓸 수 없을 상태가 됐을 때 최후 수단으로 쓸 수 있을 뿐이에요.”
 의사의 말을 듣고 나서 나는 더 캄캄해졌다. 그때서야 지역장님께 중보기도를 요청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전화를 했다. 그리고 응급실 밖으로 나와서 눈물로 부르짖어 기도했다.

 “하나님 용서해 주세요. 세상 즐거움에 빠져서 주일성수도 안 하고 구역장의 사명도 감당하지 못한 죄를 용서해주세요.” 한참을 기도한 뒤 응급실에 돌아왔다. 의사는 다시 경고했다.
 “독이 조금만 더 퍼지면…. 게다가 산다고 해도 혈액순환이 원활하지 않아 상처 부위가 썩을 수도 있어요. 그러면 절단해야 하는 상황도 생길 거예요.”

 나는 의사의 말을 듣고는 다시 밖으로 나와서 기도했다. 걷지 못해도 좋으니 살려만 달라고, 하나님이 저에게 맡겨주신 생명이니까 하나님이 책임져 달라고, 살려만 주시면 주일 범하지 않고 구역장 사명 잘 감당하겠다고 서원하며 기도했다. 아이는 하룻밤을 응급실에서 보낸 뒤 병실로 옮겨졌다. 6인실인데 다들 아들의 상태를 보고는 깜짝 놀라며 혀를 찼다. 다리는 부어서 본래보다 두 배는 되었고, 피부는 뱀가죽처럼 얼룩덜룩했다.

 지역장님이 심방 오셔서 아들 상태를 보고 나서 지역 식구들에게 아침 금식을 부탁한 뒤 병실을 떠나지 않고 아들의 손을 잡고 기도를 계속했다. 나는 그동안 주님 앞에서 온전히 믿음생활을 하지 못한 잘못을 회개했다. 그리고 사흘째 되던 날, 아들이 일어나 앉았다. 의사는 그 모습을 보고는 이제 생명에 지장은 없지만 상태를 좀더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독이 더 빠지고 붓기가 사라지면 물리치료만 잘하면 된다고 했다. 우리는 아들을 살려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제야 같은 병실에 있는 환자들이 눈에 보였다. 모두들 기적이 일어났다며 자신들을 위해서도 기도해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다른 환자들을 위해 기도해주면서 아들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전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했다.

 주님의 은혜로 아들은 건강하게 잘 성장하여 지금은 국방부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다. 결혼도 하고 예쁜 딸도 얻었다. 우리는 이 모든 게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한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에 늘 감사한다.            

정리=이미나 기자


김선영 집사(금천대교구)

-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것을 아세요

암 직전에 발견, 투병 생활 없이 회복
건강 찾은 후 봉사하는 삶의 기쁨 얻어

 결혼 직후 임신을 했다. 기쁨도 잠시 난소에 물혹이 있는 줄 몰랐는데 그것 때문에 아이를 잃게 됐다. 이후 3년간 두 번이나 계류 유산을 했다. 몸과 마음이 많이 힘들었다. 그러던 중 감기에 걸려 항생제까지 먹었는데 뒤늦게 임신사실을 알았다. 병원에서는 중절을 권했다. 간절히 기다렸던 아이인데 그렇게 보낼 수는 없었다.

 수술대에 누웠다. 의사가 자꾸 이상하다고 했다. 아무리해도 마취가 안되고 또 자궁문도 열리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이런 환자는 처음이라며 방법이 없다며 더 큰 병원에 가라고 했다. 신기한 일에 하나님의 뜻이라 믿고 아이를 품고 있는 열달 내내 예배란 예배는 모두 찾아 드렸다. 그리고 드디어 아들을 품에 안았다. 아들은 심방중격결손증이 있었지만 건강하게 자랐다. 7살에 수술을 했고 12시간의 긴 수술 시간 동안 친정 고모님이 기도를 해주셨는데 아이 옆에 예수님이 지켜주시는 모습을 보셨다고 했다. 아들은 건강하게 자라서 이제 어엿한 대학생이 됐다.

 항상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 감사해 봉사를 해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생각뿐이었다. 그러다 5년 전 소화가 안 되서 약을 먹었는데 잘 낫지를 않아 병원에 갔다. 검사 때 대장에서 용종 하나를 떼었다는 소리를 들어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데 조직 검사 결과 암이었다. 수술하기는 애매했지만 일단 혈관을 2㎝ 정로 타고 올라갔다고 해서 수술을 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암이라니 나에게 왜 이런 병이 생겼나, 아이들은 어떻게 하나 걱정과 근심으로 나는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마음이었다. 그런데 병원에서는 정말 운이 좋은 분이라며 너무 미세해서 발견되는 것 자체가 더 신기한 일이라고 했다. 항암치료도 방사선 치료도 받을 일이 없었다.

 수술 후 나는 똑같은 생활로 돌아가 바쁘게 직장 생활하며 세상에 젖어 살았다. 일년 반의 시간이 흐른 뒤 뭔가 몸이 이상한 것 같아 병원에 갔는데 이번에는 유방암이 발견됐다. 육안으로도 확인이 안 되고 아주 작은 몇 개가 있는데 다발성암이었다. 의사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심각하게 이야기 했다. 주변에서 투병하시는 분들이 너무 힘들게 치료 받는 것을 봐서 제발 항암치료를 안받았으면 하고 기도했다. 밤을 새우며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그 순간 비로소 내가 그전에 서원기도 했던 것이 생각났다. ‘살려주시면 하나님을 위해서 봉사하겠다’고 했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똑같이 세상으로 나가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수술 4일 후 결과를 들으러 병원에 갔을 때 의사로부터 ‘정말 운이 좋은 분이세요’라는 말을 들었다. 상피내암인데 암이 되기 전 0기에서 발견이 됐다고 한다. 대장암이 발견 됐을 때와 똑같았다. 의사 선생님은 내게 종교를 갖고 계신 분이냐고도 질문했다. 내가 교회에 다닌다고 하니 그분은 ‘정말 신이 계시나 보네요’라고 말하셨다. 

 수술 후 몸을 회복하면서 아이들을 위해서 봉사하러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기도처에서 여선교회 봉사자가 부족해 굉장히 힘들다는 소식을 들었다. 수술 부위가 아물자마자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봉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내가 아이들을 좋아하는 마음도 아셔서 평일에는 어린이집 교사로서 살아갈 수 있게 해주셨다.

 내 아이들을 낳고 키우면서 유아교육에 대한 열망이 커졌다. 교사로서 제2의 인생을 살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는데 병 때문에 꿈을 포기해야 하나 생각했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공부를 잘 마쳤고 더욱 소중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만나고 있다. 가장 감사한 것은 불신 가정에 시집을 가서 오랜 세월 남편을 위해 기도한 것이 응답된 것이다. 예수님을 믿게 되고 집안에서 제사 때 절하는 것이 마음에 많이 걸렸는데 이제 남편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함께 기도하는 동역자가 됐다.   

 언제나 함께 하시고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주님이 계시기에 두려움이 없다. 하나님이 건강을 허락해주시는 그날까지 봉사하며 기쁘게 살아가고 싶다.  
 


송시윤 장로, 지유정 권사(구로대교구)

- 뒤돌아보니 걸음마다 인도하셨네

병마, 자녀문제, 삶의 고민들…고비마다 기도로 응답

 30여 년 살아온 낡은 빌라는 엘리베이터도 없어서 여든이 넘은 부부가 살기에는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 이사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팔리지도 않고, 전세도 안 나가고, 재건축도 번번이 안 됐다. 우리 집만 이런 게 아니라 이웃집도 마찬가지여서 포기하고 기도만 해왔다. 그런데 어느 날 아내가 계단을 내려가다 다쳐서 반월상연골판이 파열됐다. 걷지도 못할 만큼 심해서 결국 수술까지 해야 했다.

 수술 후 요양을 할 때 딸의 도움을 받기 위해 큰딸 집에서 잠시 지냈다. 하루는 내가 장로수련회에 참석하고 있을 때 아내는 비워둔 집에 들렀는데, 그날따라 하필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때마침 부동산에서 찾아와 집 살 사람과 만나게 됐다. 부동산에 내놓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알고 왔느냐 물으니 원래 매매를 원하는 집에 들렀다가 사람이 없어 돌아가는 중에 이웃 사람으로부터 이 집도 팔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단다. 아내는 곧장 나에게 문자를 보냈는데, 나는 그때 예배중이어서 무조건 알아서 하라고 대답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토지주택공사에서 저소득자에게 급히 임대해줄 집을 구하는 중이었다. 계약 조건은 주방기구를 놓고 가는 것이라고 하여 돕는 마음으로 흔쾌히 계약했다. 그 집을 정리하고 엘리베이터가 있는 집으로 이사를 했으니 우리 부부로서는 감사할 뿐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 부부가 기도할 때마다 언제나 당신의 계획대로 인도해 주셨다. 나는 젊은 시절 전쟁을 겪고 수없이 많은 육체의 고통을 짊어지고 살았다. 얼마나 생사의 고비가 많았던지 내가 환갑을 맞았을 때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는 꼭 환갑잔치를 하도록 권고할 정도였다. 우리 교회에 나오게 된 계기도 병 고침을 받기 위해서였다. 맹장수술을 한 데가 잘못되어 주먹만한 혹이 생겨 수술을 했는데 그 후유증이 너무 심했다.

 60세가 넘어서는 장에 문제가 생겨 수술을 했는데 그래도 낫지 않아서 세 차례나 더 수술했다. 수술 부위가 아물지 않으면 배설물 통을 차고 다녀야 할 만큼 불편하고 고통스러웠다. 아내는 이런 남편을 위해 금식하면서 부르짖었다. 남편의 고난을 알기에 그야말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했다. 아내가 기도 중에 성령 충만을 받아 감사기도가 흘러나오던 그 다음날 나의 상처가 감쪽같이 아무는 기적을 체험했다.

 이밖에도 살아오면서 겪은 기적은 말로 다할 수 없다. 고난은 우리 부부가 기도하는 기회가 됐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어떻게든 해결해 주셨고 자녀들에게도 복을 주셨다. 반듯하게 잘 자라 약사로, 유치원장으로 일하는 자녀들을 볼 때면 내 자랑으로 삼기보다 모든 것을 이루어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이영훈 목사님이 모세는 여든 살에 하나님의 사명을 받았으니 인생은 80세부터라고 설교하셨는데, 나는 그 말씀에 큰 용기를 얻는다. 나와 아내는 앞으로도 잠언 16장 9절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야훼시니라”는 약속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절대긍정 절대감사의 삶을 살아가려고 한다.

정리=김주영 기자


김상준 안수집사(구로대교구)

- 교통사고 순간 터져 나온 ‘감사 기도’

작은 상처 하나 없이 기적처럼 깨끗

 얼마 전 수요일에 동생을 만나기 위해 휴가를 내어 포항에 들렀다. 시내버스에 올랐는데 자리가 없었다. 나는 한 손으로는 손잡이를 잡고 한 손으로는 휴대전화를 들고 수요예배 실황중계를 보며 예배를 드렸다. 평소 수요예배와 금요철야예배에 참석할 수 없을 때는 종종 휴대전화를 활용해 예배를 드렸으므로 흔들리는 버스에서도 이영훈 목사님의 말씀강해에 푹 빠진 채 이동하던 중이었다.

 쾅! 갑자기 들리는 소리와 함께 나는 엉덩방아를 찧고는 운전석이 있는 앞자리까지 쭉 미끄러져서 거의 날아가다시피 했다. 차는 급브레이크를 밟고 멈췄다. 벌떡 몸을 일으켰을 때 “하나님! 감사합니다!”가 터져 나왔다. 다친 곳이 없는지 살폈지만 아무 데도 아픈 데가 없었다.

 “누가 119에 신고 좀 해줘요.” 운전기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서둘러 손에 쥐고 있던 휴대전화로 신고를 했다. 다시 주변을 돌아보니 사고의 충격으로 버스 안은 엉망이었다. 한 승객은 머리를 다쳐 피가 흐르고 있었고, 움직이지 못하는 승객이 쓰러져 신음하고 있었다. 나는 다친 사람들을 보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날 사고는 여러 언론 매체에 보도됐다. 12명이 다쳤고 4명이 중상을 입었다고 했다.

 나도 버스에 서 있었으므로 큰 부상을 당할 수밖에 없었는데 작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하나님이 지켜주셨다는 말 외에 더 설명할 말이 없었다. 나중에 보니 입고 있던 옷이 찢어져 있었다. 나는 더욱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다시 서울에 올라와 병원에 들러 검사를 했으나 아무 이상이 없었고, 보험회사 직원에게도 아무 이상이 없으니 마무리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아무것도 바랄 게 없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키고 보호해주신 사실만으로 행복했다.

 나는 ‘선데이 크리스천’으로 살았다. 아내의 권유로 10년 전부터 교회에서 새가족을 위해 봉사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기적 같은 시간들을 보냈고 한순간도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일에 스포츠 동아리 활동을 하던 때만 해도 스트레스가 많아서 무슨 말을 하려면 헛기침부터 나오고 만성 속쓰림에다 어깨 통증까지 그야말로 종합병원이었다. 그러던 몸이 예배에서 은혜를 체험하고, 봉사활동하며 말씀읽기를 시작하면서 어느새 깨끗해졌다. 나는 어느새 ‘절대긍정 절대감사’의 삶으로 충만했으며, 불평할 일이 사라지면서 삶이 평온해지는 기쁨을 누렸다. 주 2교대 근무를 하는 작업환경은 하나도 바뀐 게 없지만 내 삶은 어느새 모든 것이 새로워졌다. 그리고 급기야 위태한 사고의 순간에서도 지켜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하면서 내 일상의 일거수일투족 속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에너지 삼아 더 열심히 봉사하는 인생을 살아가고자 한다.

정리=복순희 기자


강록희 집사(강서대교구)

- 말씀에 순종했더니 공황장애 치유

기도시간 기다려지고 대중교통 이용도 ‘거뜬’

 13년 전에 공황장애가 생겼다. 직장에서 억울하고 분한 일을 겪으면서 여러 사람을 미워하게 됐고 그만두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 견디기 힘든 시간에 병이 생겼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동생의 결혼 문제로 말다툼이 일어나 집안 분위기까지 침울해졌다. 나는 동생의 결혼을 반대했다. 하나님이 허락한 배우자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지금 생각하면 영적으로 교만하기 짝이 없었다. 동생은 누나의 반대에도 결혼식을 올렸고, 나는 의절하기로 결심했다. 이 일로 부모님과의 관계도 멀어지고, 동생과는 왕래도 끊어졌다.

 그러면서 공황장애를 앓게 됐다. 증세가 시작되면 갑자기 기분이 가라앉고 마치 죽을 것 같은 공포가 몰려왔다. 그러면 전기에 감전된 사람처럼 온 몸이 쩌릿쩌릿 하고 손발과 머리가 차가워지면서 감각을 느끼지 못했다. 정신은 혼미해지고 몸은 붕 떠서 중심을 못 잡고 쓰러질 것 같았다. 급기야 나중에는 숨조차 쉴 수 없는 지경에 빠졌다.

 이런 증상들이 13년 동안 시도 때도 없이 반복됐다. 병원을 드나들며 1년 이상 약을 먹어보았으나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증상이 나타나면 기도를 했고, 1시간 쯤 기도를 하면 비로소 증상이 사라졌다.

 결국 직장을 그만두었으나 공황장애는 여전히 없어지지 않았다. 6개월 동안 쉬면서 나는 무료한 나날을 보냈다. 나의 미래가 걱정됐고 불안감과 초조감이 몰려오더니 위경련이 생겼다. 3개월 동안 잠도 못자고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괴로운 날들이 이어졌다.

 병원에 가고 약을 먹어도 소용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뿐이었다. 새벽예배를 시작했다. 아마 2년 전 어느 날 새벽이었지 싶다. 기도 중에 예수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결코 순종하고 싶지 않았으나 나는 어느새 동생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누나가 잘못했어. 용서해줘. 나는 너와 화해하고 싶구나.”
 그렇게 화해하고 나자 비로소 공황장애는 사라지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시시때때 나에게 깨달음을 주셨고 오랫동안 닫혀 있던 마음이 조금씩 열리고 있었다. 어머니와 동생이 나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하나님께 회개했다. 교구에서 진행하는 기도회와 성경세미나에 참석하여 최진용 목사님의 강의를 들으며 성경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자 말씀이 그렇게 달게 와 닿았다.

 ‘버스를 타보고 싶다.’ 어느 날 그렇게 마음을 먹고 버스에 올랐는데 거짓말처럼 목적지까지 편안하게 갔다. 이전의 나는 공황장애로 대중교통을 전혀 이용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는 지하철을 타도 증세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오랜 상처가 치유됐다.

 

나에게 놀라운 변화들이 일어났다. 매달 열리는 기도회와 성경세미나를 기다리고, 사람들 앞에 서기를 꺼리던 내가 찬양팀의 일원으로 헌신하고 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확신으로 충만하다. 내게도 행복이 찾아온 것이다.

정리=이미나 기자


홍순건 장로(동작대교구) - ‘덤’으로 사는 인생의 축복

삼풍백화점 사고 당시 기적으로 살아나 믿음 좋은 아내와 결혼
아들의 주의력결핍행동장애 기도로 치유 받고 교회 봉사 결심


 

20대 젊은 나이에 백화점에 입사했다. 4년이 지나 1995년에는 수입식품부 담당으로 일했다. 그해 6월 29일 오후 5시, 한국의 치즈 시장을 알아보기 위해 외국에서 손님들이 백화점을 찾았다. 나는 그들에게 인사하기 위해 백화점에 들어갔다가 인사를 마치고 백화점을 나오는 순간 내 뒤로 그 큰 백화점 건물이 붕괴됐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가 내 바로 뒤에서 일어난 것이다. 정신이 몽롱한 채로 쓰러졌다가 먼지를 털고 일어났다. 사방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날 이후 한 달 넘게 나는 사고현장을 지켰다. 아침부터 사고현장 수습을 도왔고 저녁에는 병원으로 갔다. 살아남은 직원들도 피해를 입었지만 유가족들에게 위로를 건네야 했다. 게다가 언론에서 일부 직원들이 백화점이 붕괴될 걸 미리 알고 있었다고 거짓소문을 퍼트리는 바람에 나는 유가족들로부터 죄인 취급을 받기도 했다. 피해 현장에선 도둑들이 활개 치고 그야말로 지옥 같았다.

 그 일이 그나마 얕고 좁은 내 신앙심의 바닥을 드러내 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선데이크리스천으로 예배만 드리는 정도였다. 이 엄청난 상황을 견뎌낼 믿음이 내게는 없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하나님이 정말 계시는지 의심했다.

 이 일을 겪으면서 나는 허울만 남은 크리스천으로 살아온 지난 삶을 돌아보고 후회했다. 다시 회복하고 싶었다. 내 힘으로는 불가능해 보였다. 그래서 믿음의 배우자를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고등학교 시절 우연히 조용기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며 여의도순복음교회에 다녀 보고 싶다는 막연한 마음을 품은 적이 있었는데 소개로 만난 아내가 바로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신실한 교인이었다. 결혼하면서 나는 열심히 예배에 참석했고 술도 끊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고난이 찾아왔다. 세 살짜리 아들에게 주의력결핍행동장애(ADHD)와 틱장애가 나타났다. 의사는 고치기 어렵다고 했지만 나와 아내는 주님께 매달려 보기로 하고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은혜로 아들은 치유됐다. 그 일로 나는 주님의 일을 하기로 결심하고 15년째 남선교회 회원으로 봉사하고 있으며 동작대교구에서 젊은 세대의 부흥을 꿈꾸며 ‘3040’ 지도장로로 섬기고 있다.
 

살아오면서 여러 가지 환난이 올 때마다 기도를 하면 하나님은 꿈과 소망을 주셨다. 어찌 보면 1995년 이후로 나는 ‘덤’으로 사는 인생이 아닌가. 그러니 더욱 충성하며 살아야겠다.


정리=김주영 기자


길명순 권사(뉴욕퀸즈장로교회)

- 수술 받아야 할 허리가 깨끗이 나았어요

뉴욕대성회 참석해 이영훈 목사의 기도에 기적 체험
추방 위기의 입양인들 도우라는 하나님의 뜻 깨달아

 나는 1977년 남편(강성남 집사)과 결혼하여 정미, 윤선, 재규 삼남매를 낳고 평범하게 살다가 아이들 교육을 위해 1987년 미국으로 이민 왔다.
 삼남매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1992년 우리 가족에게 먹구름이 몰려왔다. 남편에게 코암이 생겼고, 5년 6개월 동안 투병한 끝에 우리 곁을 떠났다. 졸지에 이국땅에서 가장을 여의고 덩그러니 남게 된 우리들은 슬퍼할 여유도 갖지 못한 채 힘을 모아서 위기를 이겨내야 했다.

 세월이 흐르고 안정을 찾아가던 중에 이번에는 내가 교통사고로 몸을 크게 다쳤다. 2003년부터 2년 넘게 입원생활을 하며 치료에 전념했다. 그러나 완치되지 않았고, 허리디스크까지 생겨서 고생해야 했다. 진통제를 먹으며 버텼고 통증이 심할 때는 병원으로 가서 무통주사를 맞았다. 의사는 당장 수술을 하자고 강권했으나 나로서는 그보다 급한 할 일이 있었다. 7월에 열리는 ‘이영훈 목사 초청 뉴욕 할렐루야대성회’에 참석할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성회를 마치고 수술을 받겠다는 약속을 했다.

 이 성회를 그토록 간절하게 기다린 까닭은 내가 시작한 사역 때문이었다. 그 사역이란 다름 아닌 시민권을 받지 못해 추방 위기에 내몰린 입양인들을 위한 일이었다. 현재 미국에는 40∼60세 사이의 입양인들 중 양부모가 사망하거나 서류상의 문제로 시민권을 받지 못하고 있는 이들이 약 3만 5000여 명이다. 이들 가운데 약 2만 명이 한인들이다. 나는 이들이 시민권을 받을 수 있도록 돕는 단체를 만들었는데, 이번 성회에 참석한 분들의 서명을 받아 올해 안에 입양인들을 위한 법안을 통과시키고 싶었다.

 아픈 몸을 이끌고 성회가 열리는 사흘 동안 날마다 참석해 예배시작 전 성도들로부터 서명을 받아냈다. 또 성회시간에는 예배에 참석했는데 이영훈 목사님의 설교가 마치 나를 위해 준비하신 것처럼 와 닿았다. 특히 “오직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과 함께하신다”는 말씀과 “환경과 사람이 아닌 오직 성령님만 의지하라”는 말씀이 무엇보다 내 가슴을 울렸다.

 설교 후에 몸이 아픈 사람은 아픈 데 손을 얹고 기도하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통증으로 고통스러운 허리를 펴고 서서히 문지르며 목사님의 기도에 따라 간절히 간구했다.
 “하나님 아버지, 목사님의 말씀을 통해 3만 5000명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믿음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앞으로 할 일 많은 명순이의 허리도 고쳐주십시오.”

 목사님의 기도가 끝나자 하염없는 눈물이 흘렀다. 그러면서 속이 탁 트이고 온몸이 시원해지는 느낌이 왔다. 그리고 고통스럽게 나를 짓누르던 그 허리 통증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밖으로 나와 뛰어보았으나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가슴이 벅찼고 나는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저에게도 이런 기적을 체험하게 하시는군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성회가 모두 끝나고 다시 며칠이 지난 지금도 나는 전혀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 이 놀라운 기적을 경험한 기쁨이 아직 여진처럼 남아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게 한다.

 현재 입양인들에게 시민권을 발급해 주기 위한 법안이 미국 상·하원 법사위원회에서 심사를 기다리고 있다. 시민권이 없는 입양인들은 어린 시절 입양가정의 학대와 무관심 등으로 하나님까지 모른 채 살고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나는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언젠가 그들 또한 깨달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때 주님은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시고 구원의 기쁨을 허락하시지 않을까. 그들을 위해 헌신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린다.     

정리=김용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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