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순 권사(장애인대교구)

- 죽어가던 아이 살려주신 하나님께 감사


절망에도 더 감사하며 기도에 매진  
주님 은혜로 살아나 찬양으로 봉사


 1988년 10월 7살 된 아들 웅선이를 데리고 산 기도를 갔다 돌아오는 길에 웅선이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수술실로 들어간 웅선이를 기다리는 시간은 피를 말리는 것 같았다. 수술이 끝나고 중환자실로 옮겼는데 의사 선생님이 웅선이 머리가 수박을 땅바닥에 던져서 깨진 것처럼 뼈가 박살이 나서 머릿속 골들에 다 박혔다며 뇌압이 오를 경우 살 가망은 희박하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날 밤이 새도록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했고 울부짖으며 “감사합니다”를 되풀이했다. 새벽 즈음에 급한 호출이 와서 달려갔더니 웅선이 머리를 감싼 붕대를 다 풀어 놓았는데 수술한 머리가 다 찢어지면서 머릿속에서 더 큰 덩어리가 나와서 급히 망사 같은 걸로 아이를 뒤집어 씌워놓은 상태였다. 나는 그만 그 자리에 쓰러져 정신을 잃고 말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밤늦은 시간이었다. 희미한 정신으로 “주님 감사합니다. 우리 웅선이 살려 주실 줄 믿습니다”라고 기도를 하면서 통곡하고 부르짖고 울고 또 울었다. 교통사고 가해자가 병원에 500만원을 들고 찾아왔다. 나는 이 돈을 받지 않을 것이니 대신 교회에 다니라고 말했다. 교회에 가본 적이 없다는 가해자는 정말 열심히 다니겠다고 인사하며 자리를 떠났다.

 아침 7시 면회 시간에 중환자실로 들어갔는데 나는 아이를 보고 놀라서 까무라칠 뻔했다. 튀어나온 골들과 함께 붕대를 감아 놓았는데 눈까지 튀어나와 거즈로 막았고 코에는 호스가 달려있고 입은 혀가 쭉 빠져나와 재갈을 물려 놓았고 목에는 큰 호스를 꽂아 기계에 연결해 놓은 것이다. 하지만 그때도 어김없이 입술에는 감사 기도가 나왔다. “주님 감사합니다. 데려가지 않으셨군요. 주님 감사합니다” 그때부터 한 달 두 달 오로지 병원 6층을 기도실 삼아 기도하면서 버텼다. 두 달이 지나면서 웅선이 몸은 점점 더 오그라들기 시작했고 면회 시간마다 웅선이 몸을 만져 주는 것이 일과처럼 되어버렸다. 3개월이 될 무렵 의사선생님이 머리 수술을 다시 해야 된다며 혹시 잘못될 경우 뇌사가 되지 않을까 싶다고 했다.

 나는 6층에 가서 오로지 기도로 울부짖었다. 그날 밤이 새도록 기도하며 눈물을 흘리던 중 어디선가 거센 바람이 불더니 밝은 빛과 푸른 잔디가 눈앞에 펼쳐졌다. 찬란한 빛에 이끌려 앞으로 나아갔는데 유난히 빛나는 무덤이 갈라지면서 온몸을 붕대로 감은 웅선이가 우뚝 서 있는 것이었다. 달려가서 아이를 끌어안고 “살려주셨군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가슴이 터지도록 흐느껴 울며 감사하다고 외쳤다. 깨어보니 강대상을 끌어안고 있었고 무릎에서는 피가 흘렀다. 아이를 일반 병실로 옮기고 팔과 다리를 따뜻한 물로 찜질해주었다. 여러 가지 견과류와 야채를 절구로 찧어서 체에 받쳐서 콧줄로 먹이고 늘 감사 기도를 주님께 드렸다. 그렇게 6개월 정도 되자 눈은 못 보지만 얼굴과 몸에 살이 붙어 기어다니기 시작했다. 그후 웅선이는1991년 2월 퇴원을 했다.

 

집으로 와서 큰 고무통을 사서 물을 데워 따뜻한 물로 늘 마사지를 해주고 업고 다니며 높은 산에 올라 샘물을 받아 먹였다. 그 후로 점차 걷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앞을 보지 못해 허리에 끈을 묶어서 붙잡고 같이 병원을 다녔다. 1993년 12월 왼쪽 눈을 이식 받았고 2006년 11월 오른쪽 눈도 이식 받아 두 눈을 볼 수 있게 됐다. 웅선이 몸은 사고 후유증으로 불편한 부분이 많이 남아 있지만 그래도 죽은 것과 다름없던 아이를 살려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늘 감사드린다. 웅선이는 우리 교회 장애인대교구 소망부 예배 찬양대원으로 열심히 주님을 찬양하고 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    
정리=이미나 기자


김미경 권사(마포2대교구)

- 불안했던 삶, 말씀 묵상으로 정답 찾아

성경 읽으며 신앙 회복, 가정 화목 이뤄

 나는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성격이다.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녔던 터라 결혼 후에는 집사 직분을 맡아 교회생활은 물론 30여 년간의 결혼생활도 열심히 하려고 애썼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결혼했기 때문에 직장 경험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남편 경수창 안수집사는 내게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른다며 핀잔을 주며 무시하곤 했다. 금융업계에서 나날이 승승장구했던 남편은 회사 일에만 몰두할 뿐 나와 두 아이는 뒷전이었다. 남편은 내게 풍족하게 생활비를 주는 대신 자신의 성공만을 위한 삶을 살았다. 나는 사춘기 아이들을 돌보느라 힘이 들어 남편을 원망했다.

 사실 나와 남편은 성격이 정반대다. 서로 양보하지 않으려고 하다 보니 다툼이 잦았다. 남편에 대한 미움과 불안감, 공허함이 점점 깊어지면서 그 마음을 채우기 위해 ‘쇼핑’을 시작했다. 시장에 가서 색깔별로 옷과 각종 가방을 사들여 옷장에 쌓아두었다.
 남편의 초고속 승진으로 생활비가 넉넉해진 만큼, 남편과 말다툼을 한 다음날에는 보란 듯이 과도하게 카드를 긁었다. 한편 ‘뭐든 열심히 하다보면 인생의 진리를 알게 되겠지’ 싶은 마음으로 교구활동도 열심히 참석했다.

 그러던 2013년 어느 날, 남편이 갑작스럽게 퇴직을 했다. 남편의 퇴직은 무계획적인 지출로 마음을 채워온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게다가 하루 종일 집에서 책만 읽으며 지내는 남편을 보고 있자니 한없이 답답해졌다. 경제적으로 크게 어려운 것은 아니었지만 소비를 자제해야 하는 상황은 서로에 대한 불만이 되었고 힘든 생활로 이어졌다.
 “하나님, 앞으로 저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탄식의 기도가 저절로 터져 나왔다. 기도만으로는 안 되겠기에 기독교상담학을 접목한 주석 성경을 한 절, 한 절 꼼꼼히 읽기 시작했다. 노트에 말씀을 정리하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하며 내가 누구인지 되돌아보는 일기를 썼다.

 이른 새벽이 지나고 아침이 되도록 말씀읽기에 집중하는 날이 계속됐다. 3년여 동안 계속된 묵상으로 나는 내면 가득했던 불안감을 떨쳐내면서 마음 한가득 자유함을 얻었다. 삶의 불안감을 덜어내고자 과하게 사들여 진열된 그릇들을 볼 때는 부끄러움이 앞섰다.

 어느 날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엡 5:24)는 말씀이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
 “주님, 저의 머리 되는 남편을 공경하지 못했습니다. 회개하고 또 회개합니다”
 남편은 자신의 성공이 가정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인데 나는 남편이 이기적이고 가정에 소홀하다며 원망했었다. 성경을 읽으며 다 ‘내 탓’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니 남편에게 미안했고 굳이 순종 못할 이유가 없었다. 주님을 잘 알지 못한 채 반평생을 이기적이고 고집스럽게 살았던 과거 내 모습 대신 친절과 사랑으로 남편을 대하며 긍정적으로 생활하기 위해 노력했다.

 나의 변화는 남편의 변화로 이어졌다. 혼자 모든 의사 결정을 해왔던 남편이 이제는 나와 무엇이든 의논하며 “당신을 존경해, 당신은 참으로 지혜로워”라며 칭찬하고 인정해 주었다. 수년간 성경을 읽어보라는 내 간청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던 남편이 성경을 두 번이나 완독한 것은 정말 꿈만 같다.

 요즘 우리 부부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는 말씀처럼 절대감사로 묵상에 집중하고 있다. 또한 열 한권 째 쓰고 있는 나의 회복일기를 책으로 출간하자는 남편의 제안이 언젠가는 실현되어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인생 정답’을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게 되길 소망한다.          

정리=김진영 기자


황문숙 성도(양천대교구)

- 생명과 구원 주신 주님께 감사


하나님 믿으며 섬김의 기쁨 깨달아
아버지의 패혈증 중보기도로 완쾌

 나는 유년 시절에는 성당을, 결혼 후에는 절을 다녔다. 그 곳에 많은 공을 들였는데도 시댁집안에 우환이 끊이지 않았다. 공들이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고, 이런 상황들이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하나님을 떠올리게 됐다. 동네 아는 언니를 따라 여의도순복음교회에 처음으로 갔다. 예배가 시작되기 전 성전에 앉아 있는데 현기증과 메스꺼움으로 화장실로 가서 속을 송두리째 토해내듯 심하게 구토를 했다. 숨이 멎을 것만 같아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왔다. 그때가 2011년 11월 즈음이었는데 길거리 낙엽들이 초라한 내 모습과 어찌나 흡사한지 서글픈 맘에 하늘을 쳐다보며 울부짖었다. “주님! 저의 교만을 용서해 주세요. 방황했던 제 믿음생활을 회개합니다” 이후에는 어려움 없이 주일예배, 금요철야예배, 수요예배를 드리고 교구에 소속돼 지역장님의 권유대로 새신자교육도 받고 침례도 받으며 차근차근 신앙생활을 지속할 수 있었다.

 믿음의 삶 속에서 하나님은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게 하셨다. 첫 번째 기적은 지난해 7월 아시아성도방한성회로 수천명의 중국인들이 우리 교회를 방문했을 때다. 이 분들 중 몇 분이 우리 구역예배에 참석하신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설레었다. 작게라도 섬기고 싶어서 동네에 중국분이 운영하는 식당에 가서 중국어를 몇 마디 배웠고 개인적으로 작은 선물도 준비했다. 사실 선물을 준비한 날 나는 수술을 해야할지 결과를 들으러 가는 날이었다. 나는 4∼5년 전부터 갑상선 암 진단을 받아서 이번에는 수술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선물을 사고 병원을 방문했다. 전이가 얼마나 됐을까 궁금했지만 마음이 불안하거나 부정적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의사선생님 입에서 “결절이 여러 개 입니다. 각각 조직검사를  해보았는데 모두 다 암이 아니에요. 염증이에요”라는 말이 나왔다. 수술을 하지 않아도 됐다.

 두 번째 기적은 87세이신 친정아버님께 일어났다. 올해 초 교구 성경통독 기도회에서 성령의 임재를 체험한 후 보름쯤 지났을 무렵에 아버님이 패혈증으로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2주간 치료를 받았지만 진전이 없었고, 마지막을 준비하라는 의사의 소견까지 들었다. 혈뇨로 가득찬 소변 주머니가 침상 옆에 매달려 있는걸 보니 안타까움이 더했다. 친척들에게도 알려 온가족이 임종을 지키고 있었다. 그때 나는 교회 교구장님을 비롯해 지·구역식구들에게 중보기도를 요청했다. 우리 아버님을 위해 열성적으로 기도해주시던 권사님 한분이 “퇴원하실 거니까 염려 말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을 통해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알기에 1%의 가능성도 없던 상황에서 다시 한번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갔다. 그리고 그날 밤 12시부터 혈압이 정상 수준으로 상승을 했고 긴 잠에서 깨어나신 아버지께서 점점 호전이 됐다. 하나님은 주의 종들을 통해 퇴원을 여러 번 말씀해주셨다. 김문섭 대교구장님은 교구기도회 통성기도 시간에 “아픈 가족은 퇴원할지어다”라고 하셨고, 이영훈 목사님은 주일 3부예배 때 “입원한 사람이 퇴원을 했습니다”라고 선포하셨다. 그 선포 후 아버님은 이튿날인 월요일에 퇴원을 하셨다. 요즘에는 산책도 하시고 노인정에 가실 정도로 건강을 회복하셨다.  

 이런 일들을 통해 주님의 일꾼들이 하나님 권능 속에서 사랑으로 일을 하신다는 것과 중보기도에 주님께서 크게 역사해 주심을 믿게 됐다. 또한 긴 세월 유교사상에 젖은 친정식구들과 시댁식구들을 구원하고, 복음을 듣지 못한 민족을 위해서 땅 끝까지 예수님을 증거하겠다는 사명을 깨달았다. 앞으로도 나는 내 뜻대로가 아닌 하나님 뜻대로 기도하며 주님께 모든 영광을 드리며 살아갈 것이다.    


조혜리 집사(오아후순복음교회)

어린 딸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 깨닫게 됐어요


생후 8개월 때 발견된 머릿속 혹, 수술 위험성 경고
치료 과정 이끄신 하나님의 손길 통해 기적 체험


 모태신앙인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의 깊이를 깨닫지 못하고 살아왔다. 하나님은 분명 살아계시는데 그것을 사람들에게 증명할 방법을 몰랐고, 세상과 하나님의 길을 동시에 걷는 자체가 늘 고민이었다. 교회 안에서 젊은 엄마들과 모임을 가질 때면 항상 기도 제목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게 성령을 체험할 기회를 달라’는 것이었다.

 지난해 8월, 둘째인 딸(사진)이 9개월 때였다. 보통 아이들보다 발육 상태가 늦어보였던 아이는 다리의 힘이 약했고, 배로 기는 것을 힘겨워했다. 혹 아이에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싶어 병원을 찾았지만 별 이상이 없다는 진단뿐이었다. 그래도 나는 뭔가 이상해 다시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아이 머리가 조금 크다는 것 외에 특이점을 찾진 못했지만 그래도 희망한다면 MRI 촬영을 해보자고 했다.

 그런데 뜻밖의 결과가 나왔다. 의사는 “아이의 머리에서 혹이 발견됐는데 상황이 좋지 않다. 더군다나 혹이 깊이 그것도 중요한 혈관 앞에 있어 수술할 경우 위험할 수 있다. 흔치 않은 경우다”라고 말했다. 나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나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생각했다. 문득 몇 주 전에 들었던 설교 말씀이 떠올랐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쳤던 사건이었다. 4대째 아들만 있는 집안에서 귀하게 태어난 내 딸. ‘나는 아브라함처럼 내 아이를 주께 드릴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모든 걸 하나님 앞에 내려놓기로 했다. 그러자 놀랍게 마음에 평안이 찾아왔다.

 보통 병원 진료 후 수술까지 걸리는 시간은 길다. 그런데 월요일 검진 뒤 딸의 수술은 그주 금요일로 바로 잡혔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우리는 딸의 성공적인 수술과 회복을 위해 한 마음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고난의 시기를 믿음으로 극복해가는 과정을 보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명확히 깨달았다. 갈등과 번민의 사이에 있던 가족은 딸의 수술로 인해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됐고, 모두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도하게 됐다.  

 예정된 수술 시간은 6시간, 끝없는 기도가 이어졌다. 3시간 앞당겨 수술이 끝났고, 수술실을 나서는 의사의 얼굴은 자신감에 찬 행복한 표정이었다. 중요한 혈관의 손상 없이 혹을 정확히 떼어냈다고 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정확히 들어 주셨어” 모두들 감사의 고백이 터져 나왔다. 문제는 떼어낸 혹의 검사결과였다. 하지만 이마저도 이틀 후 나온 결과 암이 아닌 일반 종양으로 밝혀졌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기적의 연속이었다.

 딸아이가 입원해 있는 3개월 동안 병실 안은 나와 딸 둘 뿐이었다. 아니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셨다. 누군가 힘든 시간을 홀로 견뎌내기 힘들지 않았냐고 물었다. 하지만 정작 나는 병실 안에서 하나님과의 시간을 보냈다.
 한없이 나약해 보였던 나였지만 고통을 통해 주님을 비로소 만나면서 나는 깨달았다. 사람의 눈으로 봤을 때 절망의 상황이 하나님 안에서는 절대 긍정의 소망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나의 연약함을 들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 하는 도구로 삼아주신 것이 감사했다.

 

딸은 지금 17개월이 됐다. 수술 후 아이는 발가락과 다리에 힘이 생겨났고, 정상적인 삶을 회복해가고 있다. 아이를 볼 때마다 나는 ‘주의 은혜를 항상 기억하게 하소서’라고 고백한다. 함께 기도해주신 지인들과 오아후순복음교회 믿음의 가족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정리=오정선 기자


오영자 권사(종로중구대교구) -

0.1% 믿음을 보시고 살려주신 하나님


패혈증, 간암 말기의 절대절망에서 승리
이영훈 목사 중보기도 후 급속도로 회복

 지난해 12월 20일 오후 남편 백일현 안수집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위가 뜯기듯이 아프고 오한이 나며 몸이 평소와 다르게 아프다고 했다. 다음날 집 근처 병원 응급실로 향했고 검사 결과 혈액과 복부, 전신에 염증이 퍼져 신장, 간 등 장기가 다 손상된 상태였다. 진단명은 ‘심각한 중증 패혈증’이었다. 약 30∼50%의 사망률을 보이는 심각한 병이었다. 혈압이 더 떨어지면 심장이 멎을 수도 있는 상황이라 바로 중심정맥관을 삽입하고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밖에 없었다. 남편은 밤새 2번 혈압이 떨어져 승압제를 썼고 고열로 얼음판 위에 누워 있어야 했다. 장기가 손상되어 CT촬영이 불가능해 초음파 검사를 했다. 의사는 간에 두 덩어리가 보이는데 한 덩어리는 간농양, 즉 간에 고름 주머니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나머지 한 덩어리는 종양일 수도 있다고 했다. 아는 의사를 통해 초음파 결과를 다시 확인했는데 의사는 남편이 간농양이 아닌 간암 말기라고 했다.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고 남은 기간은 6개월에서 길면 1년이라고 했다. 위험 부담을 안고 CT촬영을 진행했고 여러 의사 선생님들과 판독한 결과 99.9%의 확률로 간암 말기라는 진단이 나왔다. 간농양일 수도 있지 않느냐는 우리의 질문에 의사는 단호하게 간농양일 수 있는 확률은 0.1%라고 말했다.

 남편은 오직 하나님 밖에 모르고 주일이면 새벽 3시 반에 일어나 22년 동안 교통실에서 봉사해 왔다. 비록 간암 말기일지라도 하나님이 치료하시면 0.1%의 기적이 일어날 것을 믿고 바로 담당 교구 목사님과 교구 식구들에게 중보기도를 요청했다. 남편은 계속되는 금식과 39도가 넘는 고열로 힘들어했다. 크리스마스 날 남준희 부목사님께서 병원 심방을 오셔서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하라는 말씀을 주시며 간절히 기도해 주셨다.

 다음 날 아침, 의사를 만나 우리는 하나님이 행하실 0.1%의 기적을 믿는다고 선포하고 다시 검사를 진행해달라고 요청했다. 초음파를 다시 촬영하고 온 의사의 첫 마디는 “정말 고름 주머니일 수도 있겠네요”였다. 의사가 설명하기 위해 그려주는 간의 모양이 처음과 달랐다. 순간 “주님이 하셨구나!”라는 확신이 들었다. 고름을 빼내는 배액관을 2개의 덩어리 중 하나에 삽입한 후 MRI를 촬영했다. 하나는 암이 아닌 농양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지만 나머지 하나는 큰 종합병원에서 최종 확진을 받으라고 권했다. “할렐루야! 주님께서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감사가 터져 나왔다. 남편에게 고열이 계속 되었고 폐에 물이 찼지만 치료의 하나님만을 의지했다. 12월 31일 주일3부 예배 때 이영훈 목사님은 통성기도를 인도하시며 백일현 안수집사가 믿음으로 승리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주셨다.

 2018년 1월 1일이 되자 열이 처음으로 36.5도인 정상 체온으로 돌아왔다. 새 일을 행하실 주님을 바라보며 우리는 큰 종합병원에 입원했다. 다시 CT와 MRI판독 결과, 2개의 덩어리 모두 암이 아닌 간 농양 고름덩어리로 진단 받았다. 하나님께서 간암 말기를 간농양으로 바꾸어 주신 것이다. 농양을 잘 제거하고 치료 경과가 좋아 남편은 10일 퇴원을 했다.

 남편이 퇴원하고 며칠 뒤 나는 그 의사를 다시 찾아가서 0.1%의 기적을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셨다며 예수님을 꼭 믿으라고 전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 할렐루야!        

정리=이미나 기자


최수자 권사(영등포대교구)

- 이영훈 목사 안수기도 후 췌장암 완치

히스기야처럼 간절한 기도로 삶 연장 받아
시한부 인생에서 영혼구원하는 삶으로
 
 2016년 4월경이었다. 나는 미국으로 선교여행을 다녀온 뒤 소화가 잘되지 않아 밥맛이 없어졌다. 처음에는 여독으로 생각하고 인근 병원에 가보니 신경성 위염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약을 처방 받았지만 차도가 없어 이곳저곳 좋다는 병원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난 통증을 견디다 못해 택시를 잡아타고 아산병원으로 향했다. 아산병원에서 접수가 되지 않아 구급차에 실려 보훈병원으로 옮겨져 위내시경 및 MRI촬영을 했지만 원인을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7월에야 아산병원에 입원해 검진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여러 차례 MRI촬영을 마친 끝에서야 원인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그 때 나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내 병명이 췌장암인 것을.

 함께 간 아들은 당시 의사로부터 “어머니는 췌장암 3기로 3개월 밖에 살지 못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아들 내외는 내가 충격을 받을까 두려워 비밀로 하고 치료를 진행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나는 예전에 오랜 직장생활을 하며 담석으로 고생을 한 터라 다시 담석이 생긴 걸로만 생각했다. 바로 치료에 들어가야 했지만 나는 MRI촬영한다고 8일간 제대로 못 먹어 체력이 떨어져 항암치료를 진행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10일 동안 아들 내외의 지극한 간호를 받아 기력을 회복해 항암치료에 들어갔다.

 항암주사는 얼마나 독하던지 한 대만 맞으면 3일간 아무 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항암주사를 맞을 때서야 나는 췌장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의사로부터 췌장암이라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난 그 자리에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죽을 뻔한 아들(2015년 4월 26일자 만남과변화)이 이제 겨우 회복해 직장생활을 준비하고 있는데 이제는 내가 췌장암으로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나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며 틈틈이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특히 기도로 삶을 연장한 히스기야의 말씀을 읽고 더욱 열심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목사님들에게 중보기도를 부탁했다. 교구 지구역장들은 나를 위해 작정기도를 드려주고, 전 직장 신우회서도 중보기도해 주었다. 그리고 죽을 뻔한 아들이 이영훈 목사님의 기도를 받고 회복됐듯이 나도 이영훈 목사님께 기도를 요청했다. 이영훈 목사님은 “아들을 살리신 하나님께서 권사님도 살려주실 것”이라며 나를 위로하시며 간절히 기도해주셨다.

 나는 목사님의 말씀에 용기를 얻어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렸다. 특히 목사님이 강조하시는 ‘절대감사’를 하루에도 수백 번씩 되내이며 기도했다. 그렇게 나는 6개월간의 항암치료를 마치고 방사선 치료에 들어갔다. 당시 교구장이었던 이주희 목사님은 집으로 국과 반찬을 해서 전해주며 기도하고 격려해주셨다. 많은 목회자들과 교구 식구들의 기도와 응원에 힘입어 3개월만 산다던 나는 치료를 마치고 1년이 넘도록 건강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할렐루야!

 

나는 아팠던 지난해를 제외하고는 매년 10명 정도를 전도했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연장시켜준 것은 더 많은 영혼을 인도하라는 사명을 이어가길 원하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올해도 많은 영혼을 주께로 인도하기 위해 기도하고 있다. 또한 지면을 빌어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신 목사님들과 구역 식구, 한독화장품 신우회 등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정리=정승환 기자


이재은 권사(은평대교구)

- ‘네 부모를 공경하라’ 순종하며 주님 은혜 깨달아

 

34년 전 결혼할 때 남편은 “내가 맏아들이니 당신이 부모님을 모셔야 한다”고 했었다. 남편의 제안을 당연한 것이라 여기고 망설임 없이 했던 그 약속이 내 삶을 힘들게 할 줄은 몰랐다. 나의 인생 시간표는 신체가 불편한 어머니를 중심으로 짜여 있다. 올해 83세이신 시어머니는 9년 전 중풍으로 쓰러진 후부터 왼쪽 팔 다리가 마비됐다. 지역장으로 섬기며 구역모임과 교회에 갈 때는 미리 식사를 챙겨놓거나 식사 시간에 맞춰 귀갓길을 재촉했다. 어머니는 올해 들어 부쩍 반찬이 싱겁다고 하신다. 심지어 젓갈도 싱겁다며 소금을 더 넣으라고 하신다. “어머니, 간을 더 넣지 않아도 무척 짜요” 청력이 안 좋으신 어머니께는 늘 큰 소리로 말씀 드린다. 그래도 잘 듣지 못하시니 같은 이야기를 여러 번 반복한다. 그러다보면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게 된다.

 사실 내가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은 시어머니 때문이었다. 시집 와서는 어머니께 제발 나를 교회에 끌고 가지는 말아달라고 부탁했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여의도순복음교회를 다니게 되면서 점차 마음의 문이 열리고 주님이 살아계심을 믿게 되었다.

 여동생이 모시고 있는 친정어머니마저 7년 전 치매 판정을 받으면서 나는 더 분주해졌다. 주일이면 동생을 대신해 어머니를 돌봐드리자 주변에서는 나를 ‘효부’라고 칭찬했다. 사람들이 나를 칭찬할 때마다 34년 동안 어머니를 모시면서 힘들다고 불평하며 잘하지 못했던 일들만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원망, 불평의 마음을 내려놓기 위해 나는 하나님을 붙잡고 기도하는 날들이 점점 많아졌다. ‘동서가 두 명이나 있는데 왜 나만 어머니를 모셔야 할까’ 하는 원망도 생겼다. 어느 날 ‘하나님, 너무 억울해요. 잘한 것은 아니지만 최선을 다해 왔는데 언제까지 어머니를 수발하며 살아야 해요?’라고 기도했다. 그런데 “그럼 나는 안 억울하냐?”는 하나님의 음성이 또렷하게 들렸다.

 나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넘치는데 불평하지 말라는 말씀인 것 같았다. 연세 드신 어머니를 마음 깊이 공경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을 회개기도 했다. 그리고 어머니를 모시는 것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평생의 사명임을 마음깊이 받아들이게 됐다. 점차 주님이 주시는 안식으로 마음이 평안해졌다. 감사기도가 나왔고, 가족을 위해 기도하며 내 주변을 섬기며 전도하는 사명도 기쁨으로 감당케 됐다.

 나를 내려놓고 주님께 순종하고자 노력했더니 하나님은 우리 가정을 풍성한 축복의 길로 인도하셨다. 주말이면 교회에 가기 보다는 낚시를 즐겼던 남편은 서리집사가 됐으며 자녀들은 믿음 안에 장성했다. 특히 남편은 지난해 전력기술 대통령상을 받았고 올해는 평창 동계올림픽의 설상 경기장 두 곳과 주변 시설의 전기 설계를 맡아 성공적으로 올림픽 경기를 치르는데 기여했다. 자녀에게는 대학 입학과 취업, 결혼과 출산 모든 과정 가운데 하나님의 형통한 은혜가 임했다.
 주께 순종하며 어머니를 모셨을 뿐인데 십계명(신 5:16)의 말씀처럼 우리 가정에는 헤아릴 수 없는 축복으로 형통한 믿음의 가정이 되었다. 앞으로도 주께 대하듯 어머니를 모시며,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살고 싶다.


정리=김진영 기자


조돈형·홍부영 집사(강서대교구)

- 고난 속에 축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


10년 빚 탕감, 욕심 내려놓으니 마음이 부유해져
파더스드림으로 사랑 회복되고 가정에 축복 더해


 우리부부는 과거 중국집을 경영했다. 남편은 중식요리사로서 외길을 걸으며 자부심을 갖고 있었고 나는 손이 크고 호탕해 사업은 나날이 번창했다. 타종교 신자였던 나는 사업으로 얻은 많은 물질을 투자하며 치성에도 공을 드렸다. 이렇게 부자가 되기까지 쌓은 노력은 많고 세월은 긴데 망하는 건 한순간이었다. 모든 것을 잃고 빚더미에 앉게 되자 허무해졌다. 내가 낙심해 있을 때 친구가 교회에 나오라고 했다. 20여 년간 끊임없이 나를 전도해온 친구였다. ‘하나님이 부자 만들어 주냐?’고 우스갯소리로 물어보니 친구는 ‘물론’이라 답하며 나를 당황케 했다.

 부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 하나로 참석한 교회 부흥회에서 뭔지 모를 뭉클함과 감격을 느끼고 계속 교회에 다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남편의 반대에 부딪히게 됐다. 남편은 굉장히 완고했다. 고집이 워낙 강해 양보란 없고 배려도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원하는 게 되지 않으면 화가 심했다. 남편의 반대에도 나는 주일 예배에 참석했다. 새신자 환영을 받고 있는데 갑자기 작은아들로부터 남편의 엄지손가락이 잘렸다는 전화가 왔다. 그 순간 내가 교회에 와서 받은 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남편은 이 일을 계기로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다.

 교회에 다닌 후부터 3년 동안 새벽기도에 빠지지 않았다. 그리고 사업도 새롭게 시작했다. 여기저기 돈을 빌려 오리집을 열고 정말 열심히 했는데도 불구하고 사업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장사에 쓸 재료를 구입하기조차 어려웠다. 남편은 늘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짜증을 냈고 나는 차라리 죽자는 결심이 들었다. 그런데 죽기 전 마지막으로 찬송 테이프를 사서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맴돌았고 그날의 찬송으로 나는 돈을 좇던 내 지난날을 회개하게 됐다.

 가게를 정리하기로 결심하고 빚잔치를 시작했다. 감사하게도 지인들이 빚을 탕감해주어 빚의 반을 갚고 나머지는 파산신고 해 나는 10년 만에 원점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신기하게도 모든 것을 내려놓자 문제가 해결되고 감사함도 느끼게 됐다. 비록 물질로 부자는 못 되었지만 마음이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남편에게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남편은 교회에서 봉사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행여 남편이 봉사를 하다가 지쳐서 신앙생활까지 그만두지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이 들어 말렸다. 그러나 고집 있는 남편은 끈기 있게 새벽4시에 나와 수전봉사를 하고 있다. 파더스드림 프로그램으로 남편은 내면의 사랑까지 넘쳐흐르게 됐다. 완고했던 성격이 온유해지고 이제는 집에 와서 빨래, 청소를 도맡아 한다. 평생 잘못했다는 말을 한 번 하지 않던 사람이 미안하다, 감사하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니 감동스럽다. 아버지의 변화로 가족 모두의 신분이 상승한 기분이다.
 가정에 사랑이 넘치고 서로를 축복하니 좋은 일들도 하나 둘 생기고 있다. 사업이 바빠 부자가 될 욕심에 눈멀어 못 보던 것들이 보이니 감사할 따름이다. ‘고난 속에 축복이 있다’는 말씀에 따라 하나님을 끝까지 믿으니 내 안에 사랑이 차고 넘치게 됐다. 앞으로 우리 부부의 꿈은 30년 세월 함께 해온 짜장면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정리=김주영 기자


최수자 권사와 아들 부부(영등포대교구)

“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님, 아들도 살려주셔” 

수면 중 갑자기 심장 멎어 뇌사상태된 아들
이영훈 목사 안수기도 후 깨어나 회복 돼

 나는 결혼 1년만에 남편을 잃었다. 겨우 25세에 돌 지난 아들과 함께 세상에 단 둘이 남았다. 남편이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아들을 훌륭하게 잘 키워야 한다는 일념 아래 나는 살던 지역을 떠나 무작정 상경해 취업했다. 힘든 직장 생활 중에 전도를 받아 여의도순복음교회에 출석하게 됐다. 처음에는 혼자 아등바등 살던 삶에 지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지금까지 마음에 숨겨두었던 설움이 터져 나오고 알 수 없는 평안이 찾아옴을 느꼈다.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것이 하나님도 예수님도 교회도 잘 모르는 내가 다음날부터 무작정 새벽기도에 참여했다. 교회 행사나 예배가 있다면 빠지지 않고 참여했다. 자연스레 전도도 하면서 전도상도 받고 구역장, 지역장을 거쳐 지금은 권사가 됐다. 그러자 하나님은 내게 아니 우리 가족에게 복을 주셨다. 주님께 다가갈수록 건강의 축복은 물론, 물질의 축복도 받았다. 무엇보다 아들이 주님의 사랑 안에서 건강하게 자라 가정을 꾸리고 한양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를 받기까지 아들은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영훈 목사님의 안수기도를 받고, 우리 가족을 신앙으로 이끌어 준 정길영 목사님과 구역식구들의 기도로 이겨낼 수 있었다.

 그런데 지난 4월 16일 목요일 새벽에 며느리로부터 급한 전화가 왔다. 아들이 쓰러졌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안산시 공무원으로 근무하는 아들이 최근 많은 업무로 피곤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전날 잠을 자던 중 갑자기 숨이 멎었다는 것이었다. 응급구조대가 일찍 도착해 심폐소생술을 하고 고대안산병원으로 아들을 옮겼지만 뇌에 산소공급이 일시 중단되어 뇌사상태가 됐다. 며느리는 아들이 중환자실로 옮겨져 당장 면회가 안되니 아침이 밝으면 병원에 올 것을 당부했다. 나는 이른 새벽 교회로 가서 하나님께 아들을 살려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이영훈 목사님께 안수기도를 요청하고는 안산에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갑작스러운 이 상황이 이해조차 되지 않았지만 다음날 다시 교회에 가서 새벽기도를 하고 이영훈 목사님의 안수기도를 또 한 번 요청했다. 그리고 그날 병원 면회시간에 이영훈 목사님이 오셔서 아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주셨다. 목사님은 내게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라”는 말씀을 주시고 가셨다. 그 말씀을 붙잡고 아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지·구역 식구들은 물론 이대현 대교구장 목사님과 아들이 다니는 여의도순복음안산교회 김유민 담임목사님도 함께 기도해주셨다. 그리고 그날 저녁 아들이 손가락을 조금 움직였다. 분명히 기도응답의 징조였다.

 실제로 다음날에는 아들이 실눈을 뜨기 시작했다. 주일에 전도한 새신자 5명과 교회에 함께 가서 예배를 드리고 왔는데 아들이 완전히 눈을 떴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월요일에는 의식을 거의 차렸고 화요일에는 동료 직원들의 말에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은 말도 하고 일반병실로 옮겨져 치료를 받고 있다. 할렐루야.

 돌이켜보면 아들과 단 둘이서 살아갈 때는 너무나 외롭고 힘든 삶이었지만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는 늘 함께 해주시고 지켜주시고 이번처럼 큰 위기가 닥쳤을 때는 구해주셨다. 다시한번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또 아들을 위해 기도해주신 이영훈 목사님을 비롯한 목사님들 그리고 지·구역식구들에게 감사 드린다.   

 


권성근 집사(마포2대교구) -

디스크 파열 하나님의 권능으로 치유 받아

성경 말씀에 감동받아 죄의 고리 끊어내
말씀과 기도로 성령충만한 성도 될 것


 나는 아내의 권유로 교육개발연구소 성경학교 프로그램을 듣고 현재는 성경대학까지 수료했다. 아내와 함께 성경대학원도 공부할 계획이다. 나보다 먼저 성경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한 아내는 재작년에 갑자기 장모님이 백혈병으로 판정받으며 공부를 잠시 중단하게 됐다. 장모님을 한 집에서 모시며 간병하는 아내의 마음과 그 수고를 생각하면 내 마음이 아프다. 그런데 성경대학을 공부하던 시기 나 또한 병중에 놓이게 됐다. 허리의 극심한 통증으로 제대로 눕지도 못하고 서지도 앉지도 못하게 되어 대학병원에 가서 MRI를 찍었다. 의사는 디스크가 파열이 돼 허리수술은 불가피하니 빨리 수술 날짜를 잡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혹시나 다른 병원에서 다른 판정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찾아갔지만 거기 또한 수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리에 마비까지 오니 내 마음이 무너졌다. 왜 하나님이 나에게 또 우리 가족에게 이러한 시련을 주셨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장모님에 이어 나까지 수술을 하게 되면 아내는 두 사람을 병간호해야 했다.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또 수술비 걱정에 잠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수술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아내가 오기 쉽도록 집 근처 대학병원에서 수술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에 의사와의 면담을 2주 후로 예약했다.

 나는 시련 가운데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깨닫고 감격해 감사했다. 성경학교에서 배우고 읽었던 말씀들이 몸이 아픈 가운데 계속 떠올라 힘이 되었다. 성경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배운 말씀들은 내 신앙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 2주의 기간 동안 나는 기적을 체험했다. 갑자기 다리가 서서히 풀리기 시작하더니 조금씩 걷게 됐고 마비로 걸을 때 통증을 느끼며 힘겹게 걷던 것도 어느 정도 회복됐다. 말씀으로 2주를 보내고 병원에 가기 전 날 잠결에 나는 ‘성근아’라는 부름을 들었다. 그 목소리를 듣자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나님께 내 죄를 용서해달라고 회개 기도를 했다.

 모태신앙인 아내는 결혼 전 나에게 함께 예배드리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어려운 부탁도 아니라는 생각에 나는 흔쾌히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결혼 후 직장을 핑계로 나는 술과 담배를 일삼았고 나쁜 행동도 많이 했다. 내 게으름으로 인해 한 두 번의 참석 이후 믿음 생활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런 나에게 아내는 세상의 일이 아닌 교회 안에서의 일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자계열에서 일했던 나는 가장으로서 월급이나 모든 면에서 교회를 선택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내는 앞으로 물질은 덜 사용하면 된다며 믿음생활을 건실하게 해 딸에게 신앙의 모범이 되는 아빠가 되어줄 것을 부탁했고 나는 따랐다.

 

그때부터 나는 신앙생활을 다시 하게 됐다. 주일 예배를 드리며 가끔 내 죄를 회개하기는 했지만 이번처럼 눈물로 간곡히 회개를 드린 것은 처음이었다. 주님이 나를 잊지 않고 못된 죄인을 회개 시켜주심에 감사를 드리고 다음날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다. 의사는 수술은 안 해도 된다며 한달치 약을 먹고 경과를 보자고 했다. 한 달 약을 먹고 또 진료를 받으러 가는데 이제는 약도 필요 없다고 했다. 할렐루야! 말씀으로 치유함을 얻은 나는 앞으로 우리 가족이 대대손손 아브라함의 자손들처럼 믿음의 가문이 되는 것을 소망 하고 있다. 이를 위해 나는 아내와 함께 말씀과 기도를 쉬지 않을 것이다.  

정리=김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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