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자 권사(금천대교구) -

혈압으로 실명한 어머니, 예수님 믿기로 결단

예수님 영접 후 시력 돌아오는 기적 일어나
매일 새벽예배 드리고 성경 읽으며 기쁨 누려


 

김제가 고향인 나는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결혼 전부터 여의도순복음교회를 다녔다. 형제들도 하나둘씩 예수님을 영접하며 구원을 받았다. 우리는 6남매를 낳고 기르느라 고생이 많은 친정어머니의 구원을 위해 매일 같이 기도해왔다. 하지만 자식들이 전도를 해도 어머님은 “나는 죽어도 예수를 믿을 수 없으니 너희들이나 잘 다녀라”라고 말씀 하실 뿐이었다.  

27년 전 너무나 절망적인 일이 생겼다. 혈압이 높은 어머니는 그때 환갑의 나이셨는데 혈압 때문에 눈이 터져서 보이지 않게 됐다. 서울로 모셔 와서 제일 좋다는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았는데 한쪽 눈은 실명, 한쪽 눈은 흐릿하게 형체가 보이는 정도로 98% 실명이라고 했다. 갑자기 앞을 보지 못하게 된 어머니는 의외의 말씀을 하셨다. “내가 그렇게 정성으로 제사를 지내면서 조상님들을 잘 모셨는데 이제와 내게 남은 것은 눈이 먼 것 밖에 없구나”라고 허탈해 하시며 “너희들이 그동안 나를 위해서 많이 기도한 것을 안다. 나도 너희들이 믿는 예수님을 믿어 보겠다”라고 결단하셨다. 외동딸로 귀하게 자란 어머니는  시집을 오셔서 일년에 12번의 제사상을 차리셔야했다.

 이튿날 어머니는 나와 함께 우리 교회 금요철야예배에 참석하셨다. 어머니는 예배를 드리자 너무나 머리가 아파서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힘들어하며 나가려고 하셨다. 그것이 영적 싸움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나는 “어머니 조금만 참으세요. 조금만 있으면 하나님이 분명히 치료해 주실 거예요”라고 말했다. 주일예배와 철야예배를 드릴 때 지역장님도 함께 하며 기도로 우리를 붙들어 주셨다. 그렇게 어머니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됐다.  

 그러던 중 병원에서는 확률은 낮지만 수술을 할 수 있다고 했다. 당연히 받아들일 줄 알았던 어머니는 뜻밖에 “수술로 내 눈에 손을 대고 나면 하나님이 역사하실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이 생겼다”라며 수술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나는 하나님께서 내 눈을 고쳐 주실 줄 믿는단다. 하지만 하나님이 하신다면 눈이 멀어도 좋다”라고 고백하셨다.

 수술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병원에서 약을 처방 받아왔다. 어머니의 고백에 감동한 나는 어머니께 약을 챙겨드리기 전 약을 앞에 두고 하나님께서 어머니를 꼭 고쳐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제 어머니의 고백을 하나님도 들으셨지요. 저희를 위해 살이 찢기셨고 피 흘리며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 이제는 하나님이 하실 것을 믿습니다”

 점심을 맛있게 잡수시고 약을 드신 어머니는 낮잠을 푹 주무셨다. 한잠 주무신 후 어머니께서 눈을 뜨셨다. 그러더니 나와 아이들을 향해 흥분한 목소리로 “얘들아 왔다 갔다 해보거라”라고 하셨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우리 아이들이 손가락을 할머니 앞에서 흔들며 “이게 몇 개예요?”라고 묻자 보이는 대로 어머니는 숫자를 맞추셨다. 어머니는 눈이 점점 밝아지고 잘 보인다고 하셨다. 그때부터는 어머니는 오직 하나님 한분만 섬기겠다고 다짐하시고 고향으로 내려가셔서 그곳 교회를 섬기며 새벽기도를 한번도 빠지지 않고 매일 다니신다. 지금 88세이신데 몇 년 전에 뇌졸중이 왔음에도 큰 불편함 없이 강건하시다. 눈을 다시 뜨신 이후부터 떠듬떠듬 읽는 속도이지만 손에서 성경을 놓지 않고 읽으셔서 성경을 세 번이나 통독하셨다.

 

어머니가 눈이 머셨을 때는 온 가족이 절망에 빠졌었는데 그때 어머니가 예수님을 믿게 되셔서 고통이 오히려 기쁨과 기적으로 바뀔 수 있었다. 우리 가족에게 큰 기쁨을 주신 참 좋으신 하나님을 세상에 증거하며 살아가겠다.

정리=복순희 기자


모리타 요시츠쿠 목사(순복음사카이교회)
수술 불가능한 뇌종양, 4차원 영성의 기도로 고침 받아

조용기 목사의 치유메시지 테이프로 전해 듣고 신유체험

 20년 전 내가 열 살이 좀 넘어서였다. 동네 친구들과 뛰어놀다가 계속되는 두통 때문에 정신을 잃었다.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병원을 찾았다. 당시 시골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도시의 병원에서 여러 가지 검사를 받았다. 의사는 내 머리에 종양이 있다고 했다. 결과는 악성 뇌종양이었고, 뇌암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암의 위치가 뇌 깊숙이 있고 많은 신경이 지나가는 자리라서 수술과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전했다.

 부모님과 나는 죽음이라는 절망만 안고 시골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종양이 커지면서 뇌압이 상승되어 참을 수 없는 두통과 구토가 이어졌다. 여기에 신경마비 증상까지 나타났다. 팔과 다리가 마비됐고, 시력 장애로 눈이 보이질 않았고, 안면신경도 마비됐다.

 나의 신경이 죽어가자, 잠을 자고 싶어도 마비증상 때문에 눈꺼풀이 감기질 않았다. 가족들은 나의 눈을 감겨준 후에 그 위에 스카치테이프를 붙여줬다. 그러면 겨우 잠을 잘 수 있었다. 죽음만 기다리고 있던 중 큰누나의 친구가 조용기 목사님의 설교 테이프를 전해줬다. 일본에서 열린 큰 성회에서 일본어로 ‘치유와 기적’에 관해 설교하신 것이었다. 
 당시 우리 가족은 장로교회를 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누나는 많은 사람들이 이 성회에 참석해 병고침을 받았다면서 설교를 들어야 한다고 했다. 

 당시 나는 TV소리나 음악을 켜놓으면 구토증세가 더 심해졌다. 하지만 누나가 틀어준 설교를 들으면서 한 번도 구토를 하지 않았다. 말씀을 들으면서 치유라는 메시지가 매우 생소했다. 하지만 우리가 간절하게 바라는 게 또 치유였다. 어머니도 신기해했다. 거의 24시간 내내 조용기 목사님의 설교를 테이프를 통해 듣고 또 들어 외울 수도 있었다. 조용기 목사님 설교말씀은 매우 강력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는 나음을 입었다”라는 말씀을 반복하셨다. 말씀은 죽음이라는 절망 앞에 있는 나에게 희망을 전했다. 그래서 설교말씀을 나에게도 적용했다. 잠을 자기전 몸의 한부분과 특정증상에 대해 아주 구체적으로 기도하며 나았다고 선포했다.

 “모리타의 눈은 나을 것이다. 이미 나았다. 제 눈을 고쳐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반복하면서 기도했다. 마음이 편안해질 때까지 기도하고 감사로 선포했다. 시간이 흘렀다. 기도는 더욱 선명하고 구체적으로 바뀌어갔다. “나는 나아지고 있다. 내일 아침에 눈이 나을 것이다”라고 믿으며 기도했다. 진짜 다음날 기적이 일어났다. 잘 안보이던 눈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귀가 나았다고 선포하면서 기도했다. 다음날 나의 귀는 청명하게 잘 들리는 것이었다. 또 팔이 나았다고 기도했다. 그랬더니 다음날부터 팔을 들어올릴 수 있었다. 할렐루야!

 나는 신체 하나씩을 위해 기도했고, 구체적으로 드린 믿음의 기도는 모두 응답됐다. 6개월이 걸렸다. 할렐루야! 수술조차 할 수 없었던 암덩어리는 사라졌고 20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매우 건강하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 나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순복음신학교를 졸업해 지금은 목회자로서 오사카에 있는 사카이순복음교회를 섬기고 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주님께 영광 돌린다. 할렐루야!

 나는 이번 간증을 통해 조용기 목사님께 가슴깊이 감사를 전한다. 일본 복음화를 위한 헌신으로 우리 시골동네까지 성령충만한 메시지가 전달될 수 있었고, 내가 살아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할렐루야!


정순임 성도(강동성전) -

살아계신 주님, 귀 통증 완전히 치료해주셔

고난주간 갑자기 찾아온 귀 통증, 잠도 못 자
부활주일 이영훈 목사 신유기도 시간에 고침받아


 나는 지난해 5월 5월 새신자교육을 수료한 신앙 초년생이다. 하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은 이런 나에게도 찾아와 기적을 베푸셨다.

 나는 지난달 1일 무렵 자고 일어나니 귀에 알 수 없는 통증이 시작됐다. 마치 비행기를 탔을 때 먹먹함이나 귀에 물이 들어갔을 때 느껴지는 불편함과 통증이 계속됐다. 특히 내가 말을 하거나 상대방이 말을 하면 그 소리가 마치 메아리 울리듯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대화도 못하고 TV도 볼 수 없었다. 갈수록 통증은 심해지고 신경은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밥을 먹을 수도 잠을 잘 수도 없었다.

 하지만 병원에는 가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이 병원에 가도 고치기 힘들다는 말에 겁이 났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는 동생이 비슷한 증상으로 병원에서 수차례 치료를 받았지만 차도 없이 계속 통증에 시달리는 모습에 더욱 겁이 났다.

 나는 오직 하나님께 의지하기로 작정하고 21일 다니엘기도회에 참석하며 하나님께 치유해달라고 매달렸다. 사실 초신자라 어떻게 기도를 하는 것인지 솔직히 아직도 잘모르지만 무작정 기도했다. 시간이 갈수록 통증은 심해져만 갔다. 자려고 누우면 마치 물이 콸콸 쏟아지는 듯한 소리가 나서 도저히 잠들 수가 없을 정도였다.

 부활주일이었다. 예배에 참석했지만 찬양대의 아름다운 찬양소리마저도 메아리치듯 울려 귀는 물론 머리도 깨어질 듯 아팠다. 이영훈 목사님의 설교가 끝난 후 신유기도시간이 됐다. 나는 목사님의 말씀을 따라 아픈 귀에 손을 얹고 “하나님 살아계시다면 증명해주세요. 저를 고쳐주세요”라며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예배가 끝나고 교회에서 준 부활절 떡과 계란을 받아 집으로 돌아갔다. 떡이 맛있어 나도 모르게 보혈찬송을 흥얼거리며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깜짝 놀랐다. 내 찬양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리지도 않고 귀의 통증도 완전히 사라진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 큰 소리로 찬양을 불러보았다. “주의 보혈 능력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정말이었다. 귀가 깨끗하게 치료받은 것이다. 할렐루야.

 나는 이 사실을 교구 전도사님과 아는 분들에게 고백했고 모두가 축하해주었다. 정말로 감사한 것은 이렇게 교회에 나온지 얼마 안된 나마저도 치료해주시는 하나님,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할 뿐이었다. 사실 나는 오래 전부터 교회에 나오라고 전도를 받았었다. 친한 친구들은 이미 권사직분을 받기도 했고 특히 지난해 돌아가신 시어머니도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오래 다니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가자고 하면 그냥 못들은 척 흘려 넘기기 일쑤였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너무나 죄송하고 내가 왜 진작에 우리 교회에 오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다. 특히 시어머니가 내게 주신 선물에 적혀있던 시편 23편의 말씀이 이렇게 큰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말씀이란 것을 이제야 알게 됐다. 올해 아들이 결혼을 한다. 이들 내외도 올해부터 함께 교회를 가기로 약속했다. 

 앞으로 우리 가정이 믿음의 가정을 이루고 내가 만난 살아계신 하나님을 전함으로 나와 같은 환자들이 희망을 얻길 기대하고 기도하고 있다.


이승후·이혜진 성도(장년대교구) -

하나님이 장인어른 뇌종양을 치료해 주셨어요


예고 없이 찾아온 슬픔, 말씀 붙잡고 기도할 때 영과 육 치유

 지난해 추석을 앞두고 장인어른이 두통을 호소하실 뿐 아니라 사람을 잘 기억하지 못하셨다. 가족은 혹시 ‘치매가 아닐까’ 의심했으나 병원 확인 결과 다행히 치매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속된 통증에 장인어른은 다시 병원 진료를 받기로 하셨다. MRI 결과 뇌종양으로 판명났다. 한쪽 뇌 전체에 자리 잡고 있던 종양은 더군다나 악성이라 진행 속도가 빨라 하루 속히 수술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하지만 선뜻 수술에 나서려는 의료진은 없었다.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나와 아내, 처제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기로 했다. 급한대로 전에 봉사하던 유아부 중보팀에 사정을 알렸고, 장년대교구 담당교구장님에게 알려 중보기도팀이 기도를 시작했다. 처제 직장 동료 중 믿음의 동역자가 있어 그들에게도 중보기도를 요청했다.

 두려움에 쌓인 우리는 의지할 것이 필요했고 마침 조용기 목사님의 설교 테이프를 들으면서 위로를 받았다. 또 다른 의료 기관을 찾아 강남의 한 대형병원으로 향하면서 처가 식구와 나는 차 안에서 조용기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다. 참았던 슬픔이 터지면서 차 안은 울음바다가 됐다.

 그런데 그때부터 하나님의 기적이 시작됐다. 모두들 피하려던 수술을 자처하는 의사가 나타났다. 입원 수속은 일사천리로 진행됐고, 우리는 의사의 도움으로 추석 전 바로 수술을 진행할 수 있었다. 하나님이 보내주신 손길이었다. 하나님은 기도의 용사들도 붙여주셨다. 교회 안에서 중보기도자 300명을 모았고, 수술이 시작됨과 동시에 기도가 진행됐다. 나는 병원 기도실을 찾아 꼬박 6시간을 기도에 집중했다. 아내는 ‘수술할 때 성령의 불이 임해 암 세포가 깨끗이 떼어지게 해 달라’고 세밀하게 기도했다. 수술과 동시에 시작된 기도가 4시간이 지났을 때 두려웠던 마음이 평안으로 바뀌면서 하나님의 응답이 느껴졌다. 수술은 정확히 6시간 진행됐고, 수술실에서 나온 아버님은 병원 측의 우려와는 달리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셨고 의식도 말도 또렷하게 하셨다.

 신기한 건 아내의 기도처럼 암이 깨끗이 떨어져 나갔다. 의사는 암세포가 딱딱하게 굳어 쉽게 제거할 수 있었다고 했다. 할렐루야! 우리는 이 모든 것이 사람의 힘으로 능력으로 할 수 없는, 온전한 하나님의 섭리셨음을 깨달았다.
 아버님이 병원에 입원해 계시는 동안 심방오신 장년대교구장님과 교구장님, 성도님께 진심으로 감사했다. 아버님은 퇴원 후 지난해 11월부터 여의도순복음교회에 출석하신다. “나를 위해 기도해준 ‘중보 기도 부대’가 있는 교회”라며 “이 교회를 다니지 않으면 어딜 가겠냐”고 하셨다. 1월에는 새신자 교육도 받으셨다. 이전에도 타교회를 출석하셨지만 주님을 향한 새 마음으로 교회에 출석하고 계신다. 새해가 되면서 열두광주리새벽기도회도 참석하셨다. 아버님은 또 매일 말씀을 쓰시며 묵상하신다. 가정예배도 드리신다. 예전에는 ‘성경에 기록된 일들이 예수님 시대에만 있던 일’이라고 하셨다면 이제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는 말씀이 진정 중요하다고 고백하신다. “살려만 달라”던 가족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해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매주일 2부 예배에 참석하신다. 이영훈 목사님의 설교는 아버님의 신앙에 좋은 양분이 되고 있다.

 완전한 종양 제거, 자유롭게 움직이는 몸, 의지를 표현하는 말. 아버님은 모든 것을 되찾으셨다. 현재 항암치료가 진행 중이나 이 또한 하나님의 돌보심이 임하고 있다. 고난의 터널을 지나오신 아버님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여러 사람 앞에서 반드시 증거 될 것을 확신한다.            

 정리=오정선 기자


한강수 성도(마포2대교구)

- 하나님의 소명을 이루는 부부 될 것


암으로 어머니 잃고 아버지도 말기암으로 위기
새벽기도하며 하나님께 간구하고 새 소명 얻어

 우리 부부는 매주일이 기다려진다. 남선교회 외국인 안내실에서 봉사하는 우리 부부는 이른 새벽에 교회에 나오는 것이 조금 힘들기는 하지만 봉사가 주는 기쁨이 있어 너무나 행복하다.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지 2년 정도될 무렵 아내(사진 왼쪽·이미선 성도)는 우리 집에 걸어놓은 칠판에 ‘함께 봉사하고 싶다’라는 글귀와 함께 이를 위해 매일 기도했다. 그런 아내의 모습에 나의 ‘귀차니즘’이 항복하고 말았다. 아내와 함께 봉사할 수 있는 곳을 찾다가 정착한 곳이 남선교회 외국인 안내실이었다. 중국어를 좋아하는 나와 영어를 좋아하는 아내는 각각 자신들이 좋아하는 언어로 외국인들의 예배안내와 교회소개 등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처음에는 주말에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 걱정도 많았지만 봉사하면서 누리는 기쁨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하기 힘들었다.

 모태신앙인 나는 3형제의 막내로 늘 사랑만 받고 살았다. 그러다 고등학교 2학년 무렵 어머니가 췌장암에 걸리셨다. 사실 그 때만해도 나는 죽음이라는 것이 막연했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더욱이 하나님을 잘 믿는 가정이기에 하나님이 당연히 어머니를 치료해주실 것이라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머니처럼 암으로 고생하는 환자들을 위해 의사가 되겠다는 꿈도 품었다. 그런데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어머니는 암을 이기지 못하고 천국으로 가셨다. 그리고 나는 원하던 대학입시도 실패하면서 또 한 번 좌절하고 말았다. 그런 나를 위로해 줄 어머니도 안계셨다. 세상의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어떤 위로와 격려의 말도 내게는 상처가 되고 아픔이 되었다. 의대의 꿈을 접고 재수를 해서 원하는 대학에 입학했다. 마음을 다독이기도 전에 이번에는 아버지가 위암에 걸리셨다.

 ‘내게 왜 이런 일이 계속해서 생기는 걸까’ 억울하고 힘든 마음을 털어놓을 사람도 없었다. 형들도 군복무 중이던 시절이라 내가 아버지를 간호해야 하는데 내 마음조차 추스르기 어려웠다. 왜 우리 집을 이렇게 큰 병으로 쑥대밭을 만드시는지, 하나님의 생각은 대체 무엇인지 답답하기만 했다. 그런 원망 속에서 내가 한 것은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것이었다. 매일 같이 새벽기도로 매달렸다. 너무 힘들었지만 내가 의지할 곳은 하나님 밖에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께 매달리고 또 매달렸다. 모태신앙이었던 나는 다른 방법을 몰랐다. 기도하는 것이 내가 아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은 내게 새 꿈을 주셨다. 아버지의 완쾌는 주님께 맡기고 그 꿈이 이루어질 것을 믿기로 작정했다. 그러자 위암 말기로 생사를 알 수 없었던 아버지는 위절제술을 받았고 몇 년 후에는 완쾌를 받을 수 있었다. 할렐루야!

 아버지는 수술한지 10년이 지난 지금도 건강하게 매주일 교회를 출석하고 계신다. 한편 내게 주신 꿈은 하나님이 영광 받으실 수 있는 의료재단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환자와 그 가족들을 돕는 의료재단 설립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은 나를 대학원과 직장으로 이끌어 주시고, 함께 꿈을 이루어갈 수 있는 지금의 아내도 만날 수 있게 해주셨다. 이 은혜에 감사해 작은 일이라도 하나님을 위해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돌이켜보면 남선교회 외국인 안내실에서의 봉사도 하나님께서 내게 꼭 필요한 일이기에 시키셨음을 인정하고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하려고 한다.

 특히 올해는 우리 교회가 창립 60주년을 맞아 많은 외국인들이 교회를 방문한다고 한다. 부족하지만 우리 부부가 봉사할 수 있어 감사하고, 함께 할 봉사자들이 더 많이 필요로 해서 이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정리=정승환 기자

 


홍주섭 장로 (종로중구대교구)

- 뼈가 녹아 없어지는 희귀병 주님의 은혜로 치유

치료비까지 정확하게 채워주신 좋으신 하나님  
88세인 지금까지 건강주신 하나님 사랑에 감사


 2013년 8월에 몸이 아팠다. 양쪽 다리에 힘이 없어지고 걷기가 불편했다. 혈액순환이 안되나보다 해서 한의원에 갔었는데 점점 심해져서 걸어다닐 수도 없었다. 9월 25일 여의도성모병원에 입원했는데 한 달 만에 어깨와 둔치에 암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골수암 2기였다. 다행히 골수암은 15번의 방사선 치료를 받고 잘 치료가 됐다. 그런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암은 없어졌는데 신장이 나빠져서 온 몸이 붓고 음식을 먹을 수가 없는 것이다. 계속 어지럽고 너무 힘들어 죽을 것 같았다. 병원에서 계속 이런 저런 검사를 해봤지만 병명을 알 수 없었고 원인도 찾을 수 없었다. 온 몸이 퉁퉁 부어오르는데 병명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고통스러웠고 가족과 형제들도 내가 더 이상 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하나님께 차라리 내 생명을 거둬달라고 기도할 정도였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내가 포기한다고 말하는 것이 너무 죄송해서 바로 잘못을 회개하고 내 생명을 연장시켜주시면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했다.

 내 입원실은 11층이었는데 5층에 있는 성전에 내려가 기도하며 지금까지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한 것을 회개했다. 몸을 움직일 수도 없어 5층까지 내려가는게 정말 힘든 일이었지만 성전에 앉으면 마음이 평안해졌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고통당하신 예수님의 사랑이 느껴져 눈물이 났다. 예수님이 나 때문에 당하셨을 고통을 생각하며 내가 겪는 고통을 참아냈다. 2시간씩 찬송 부르고 기도하면 그날 밤에 잠을 편안히 잘 수 있었다.

 세살부터 신앙생활을 했지만 하나님을 멀리하던 때도 있었다. 나는 눈물로 회개하며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는 말씀을 붙잡고 간절히 기도했다. 발병한지 45일만에 나온 결과는 뼈가 녹아서 없어지는 병이었다. 세계에서 최초로 발견된 희귀병이라 병명도 없었다. 병원에서 이미 희귀병이 발견됐을 때는 병이 많이 진행된 상태였다. 70㎏이던 내 몸은 49㎏까지 빠졌고 온 몸이 너무 힘들었다.

 의사는 희귀병을 치료하기 위해 연구를 하며 약물치료를 시작했고, 3일 후에는 약이 잘 들어서 치료에 진전이 있었다. 치료의 효과가 나타나면서 입맛도 돌아와 밥도 맛있게 잘먹고 건강도 회복했다.

 입원해있을 때 가족들과 여러 곳에서 문병 오신 분들이 물질로 도움을 주신 것을 모아보니 1100만원이 됐다. 병원비에 딱 맞는 금액이었지만 하나님께 먼저 십일조를 드렸다. 얼마 후 병원비에 보태라며 주위 분들이 봉투를 주셨는데 십일조를 낸 금액이 그대로 들어있었다. 그 돈으로 치료비가 딱 맞아 떨어졌다. 하나하나 세심하게 살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놀라웠다.

 나는 11월 16일에 건강히 퇴원했다. 퇴원하고 교구 모임에도 열심히 참여하고 이전보다 더 기쁘고 감사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다시 나의 생명을 연장시켜주신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나는 70세에 장로를 은퇴한 이후 오순절사랑훈련학교 26기에 참가했다. 오사랑을 통해 큰 은혜를 받고 감사해서 그 이후 151기인 지금까지 계속 봉사를 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하나님은 늘 나와 함께 하셨다.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를 해야할 때도, 군대에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신앙을 지키기 힘든 환경 속에서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 수 있도록 길을 예비해주셨다. 88세인 지금까지 건강하게 봉사하며 예배드릴 수 있도록 사랑으로 보듬어주시고 길을 예비하신 좋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
 


유다희 학생(관악대교구)

- 뇌출혈 죽음의 위기, 절대 긍정과 감사로 승리

이영훈 목사 기도 받고 기적 일어나  
빠른 속도로 건강 회복, 의료진 모두 놀라


 나는 다음 달에 고등학교를 졸업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고등학교 졸업은 평범한 일이지만 나에게는 너무나 감사한 은혜이자 기적이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였던 2014년 12월 2일 뇌출혈로 쓰러졌다.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갔지만 상태는 심각했다. 지하철 화장실에서 쓰러져서 사람들이 나를 발견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지체됐기에 수술이 불가능했다. 가족들은 수술을 받게 해달라고 의사에게 간곡히 요청했고 나는 6시간 이상 대수술을 받았다. 가족들은 눈물로 기도하며 하나님께 매달렸다. 수술을 마친 후 의사는 깨어날 가능성이 없고 일어나도 일상생활은 불가능 하다고 말했다. 할머니와 엄마는 중환자실 앞 의자에 앉아 하루 종일 기도에 매달렸다.

 쓰러진지 13일째 되던 날 이영훈 목사님이 소식을 듣고 찾아 오셨다. 죽은 사람처럼 미동도 없이 누워있었는데 목사님이 기도해주시자 기적이 일어났다. 내가 눈을 뜬 것이다. 두 번째 오셨을 때는 목사님 말씀에 눈물을 흘렸다. 목사님은 내가 침을 흘리자 닦아주시며 기도해주셨다. 소리가 들리면 ‘아멘’하라고 하셨는데 나는 눈을 깜빡이며 표현을 했다. 쓰러진지 27일 되던 날, 목사님은 세 번째로 찾아오셔서 기도해주셨다. 말을 못할 때였지만 ‘엄마’라고 처음으로 말을 하게 됐다. 중환자실에서 생사를 오갈 때 꿈 속에 예수님이 환한 빛으로 나에게 오셨다. 그리고 내게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며 꼬옥 안아주셨다.

 빠른 속도로 회복한 나는 중환자실에서 집중치료실로 옮겼고 재활전문병원으로 옮겨져 재활에 힘썼다. 너무나 감사하게도 목사님은 재활병원까지 와서 기도해주셨다. 바쁘신 일정에도 수 차례 찾아와주신 목사님께 너무 감사했다. 그리고 나는 그 때마다 놀라운 기적을 체험했다. 의료진들도 처음에 가망이 없다고 한 말과는 달리 회복이 빠르다고 다들 놀라워했다. 그때마다 우리 가족은 ‘기도의 힘’이라고 강조했다.

 2015년 5월 퇴원을 하고 2016년 3월부터 복학을 해서 학교를 다니게 됐다. 그런데 또 다른 어려움이 있었다. 재활 과정을 오랜기간 해야 했지만 바로 학교생활을 시작하다보니 어려움이 많았다. 친구들은 3학년이 됐지만 나는 2학년으로 다니게 돼 친한 친구들과 헤어져야 했다. 몸 한쪽이 마비돼 움직여지지 않고 걷는 것도 불편하다보니 학교 생활이 너무 힘들었다. 내가 지나가면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스스로 위축되고 부정적인 생각이 들수록 교회를 더욱 열심히 다니고 설교 말씀에도 귀기울였다.

 나는 유치부 때부터 우리 교회에 다녔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법을 배웠다. 아프고 나서 부정적인 생각이 많이 들었지만 교회에 올 때 마다 이영훈 목사님은 설교를 통해 절대 긍정 절대 감사를 강조하셨다. 나는 힘을 내 학교생활도 열심히 할 수 있었다.  

 

퇴원하고 1년 후 목사님을 찾아뵈었다. 내가 의식없이 누워있을 때 와서 기도해주신 목사님께 내가 직접 뵈러가서 기도를 받으러 가니 꿈만 같았다. 목사님은 내가 갈 때마다 목사님의 저서를 여러 권 주시며 격려해주셨다. 나는 졸업하면 아빠가 계신 태국으로 가서 공부를 하려고 한다. 국제대학교에서 미술치료상담사 공부를 해서 아픈 사람들을 상담을 통해 치유해주고 싶다. 모두가 희망이 없다고 하는 내게 꿈을 이룰 수 있도록 희망을 주시고 기도해주시고 다시 꿈을 꾸게 해주신 이영훈 목사님께 너무 감사드린다.



홍명순 권사(서부성전)

- 고난 속에 하나님께 감사하면 기적 일어나

대장, 신장, 담낭 세 군데 암 초기에 발견
항암 치료 없이 건강한 삶 되찾아


 올해 초 운동을 다니는 건물에 있는 병원에 검사 기계가 새로 들어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태어나서 59년 동안 단 한번도 장에 대한 검진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냥 한번 받아보고 싶어서 검사를 받았는데 대장에서 4㎝ 크기의 혹이 발견됐다. 더 큰 병원에 가보라고 해서 대학병원으로 갔다. 종합적으로 다시 검진을 하니 대장, 신장, 담낭 총 세 군데에서 암이 발견됐다. 수술을 하게 됐지만 원래 하던 대로 하나님만 바라봤다. 나는 모태신앙이라서 부모님의 신앙생활과 모습을 보고 또 그동안 살면서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했기에 수술에 앞서 우선 감사 헌금을 했다. 기도를 하면 아무것도 아닐 거라는 마음이 들었다. 수술을 하기 위해 입원을 해서는 오직 주기도문만 암송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하나님을 부르는 부분에서는 ‘하늘에 계신 명순이 아버지’라고 내 이름을 넣어 외웠다.  

 마음 편히 수술에 임했고 수술 결과도 좋았다. 장기가 자리를 잡고 가스가 나오는데 2∼3일이 소요될 거라 했는데 하루 만에 해결이 됐다. 빨리 회복이 되면서 수술 전과 다름없이 밥맛도 좋고 기력도 떨어지지 않았다. 정밀 검사를 보니 초기 중에서도 이제 막 암이 나타난 상황이었다. 병원에 잘 가지 않는 내가 이렇게 발견한 것도 신기했다. 또 한가지 놀라운 것은 예전에 지인들이 보험 영업을 하면서 인정 때문에 들었던 작은 액수의 보험들이 이미 납부 만기도 한참 지나고 60세가 되면 효력도 없어지기 직전이었는데 그 보험금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보험을 들 때는 그냥 하나 들어주자는 생각에 보험 내용도 잘 모르고 들었는데 이 또한 하나님의 예비하심 같다.  워낙 초기에 발견되어서 수술 후에는 항암 주사나 방사선 치료도 받지 않았다.

 나를 걱정해주고 상심했던 지인들도 이런 상황을 보면서 함께 감사하고 다행이라며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고 있다.
 나는 기도할 수 있어서 조금도 마음이 약해질 틈이 없었다. 그저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고 감사만 했다. 수술 후에도 집에서 한 시간 씩 찬송가를 틀어 놓고 혼자 춤을 추며 하나님을 예배 한다.

 모태신앙이지만 결혼 전 아가씨 때는 신앙이 그리 좋지 못했다. 결혼을 하고 구역에 소속되어 구역식구들과 기도하고 말씀을 배우면서 신앙이 자라났다. 그 전에는 봉사에 대해 잘 몰랐는데 신앙 생활을 하다 보니 30대 후반 무렵 너무나도 봉사가 하고 싶어 기도를 했다. 꿈에서 수화하는 손이 보였다. 학창 시절 잠시 가졌던 꿈이 20년이 지나 생생하게 마음속에 다시 살아났다. 수화를 열심히 배워서 10여 년 넘게 수화 봉사를 하며 예배 통역도 했었다.

 나는 무엇보다 아이를 낳으면서 정말 많이 기도하게 됐다. 아이가 키가 작고 공부에 흥미가 없는 게 마음에 걸렸다. 재능이 무엇인지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아이의 장래를 위해 버스를 두 번씩 갈아타고 강서에서 여의도 성전까지 수시로 오고 새벽예배를 드렸다. 1996년부터는 지금 서부성전의 모태가 된 기도처의 열쇠를 갖고 내가 가장 먼저 가서 문을 열고 가장 나중에 나오며 문을 닫아 왔다.

 새벽시간에 기도할게 뭐가 있냐고들 하지만 우리나라와 교회, 주의 종들, 성도들을 위해서 중보기도하면 아침 8시까지 기도해도 기도할 게 많다. 내 자녀 때문에 기도를 시작했는데 이제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를 더 많이 한다. 나를 새벽예배 드리게 했던 아들은 또래보다 일찍 신앙 좋은 배필을 만나 초등학생, 유치원생 두 아들을 낳고 오손 도손 재미나게 살고 있다. 키는 작아도 단단하게 몸을 다듬고 내성적인 성격도 적극적으로 변해 사회생활도 잘하고 교회에서는 찬양대 봉사를 한다. 

 얼마 전 나는 서부성전에서 전도팀장으로 임명받았다. 전도 팀장으로서의 사명도 있지만 매일 전도하면서 참 좋은 하나님을 사람들에게 전한다. 내가 만난 하나님, 나와 함께 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싶다. 


황에스더 권사(여의도순복음새평양교회)

생명과 실명의 위기에서 살려주신 나의 하나님

가족과 함께 탈북, 위기 때마다 주님 인도해주셔
권사 직분받고 여선교회장으로 교회 열심히 섬겨


 나는 북한에서 좋은 직장을 다니며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했다. 그러다 김일성 사후 북한 경제 사정이 급격히 나빠지면서 중국으로 돈을 벌러 나가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 중 딸도 중국으로 건너갔는데 그만 소식이 끊기고 말았다. 딸을 찾기 위해 회사에 휴가를 내고 중국에 갔지만 문제가 생겨 한달 넘게 중국에 지체하고 말았다. 이것이 발단이 돼 결국 나는 탈북하게 됐고, 이어 북에 두고 온 또 다른 딸과 9살된 아들을 중국으로 데려오게 됐다.

 중국에서의 삶은 참 험난했다. 다행히 소식이 끊겼던 딸을 찾았고 친척의 도움으로 생활할 수 있었지만 신분을 감추고 살기란 쉽지 않았다. 우리는 10여 년 동안 적발을 피해 많은 지역을 옮겨다니며 흩어져 살았다. 그러다 A지역에 정착해 가족이 함께 살게 됐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공안에 적발되고 말았다. 나와 아들 그리고 손주 둘은 가까스로 위기를 면했지만 두 딸은 탈북자라는 꼬리가 붙어 결국 강제 북송되고 말았다. 하늘이 무너지고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남은 가족을 어떻게든 돌보고, 두 딸과 만나야 한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이를 악물었고, 2010년 남한에 오게 됐다. 나는 먹고 살기 위해 아파트 청소 일을 시작했다. 그런 중에 탈북자 중심으로 모인다는 여의도순복음새평양교회를 알게 됐고, 전도를 받아 교회를 출석하면서 마음의 평안을 얻게 됐다. 날마다 북송된 딸을 위해 기도하며 살려만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어렵게 딸의 소식을 들었다. 북송된 두 딸 중 큰 아이는 상상조차 어려운 수감 생활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단다. 시체 사이에 버려졌던 딸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나 감옥에 함께 있던 동생과 마침내 탈북에 성공, 먼저 남한에 온 우리와 2012년 재회할 수 있었다.

 꿈에도 그리던 가족 재회의 기쁨도 잠시, 나는 그동안 쌓인 긴장과 피로가 한꺼번에 몰리면서 쓰러지고 말았다. 육체적 고통 뿐 아니라 정신적 스트레스가 상당했는지 국립의료원에 6개월 반 입원해 있는 동안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지 못한다. 물조차 다 토하며 제대로 걷지 못했다는 나는 가족의 말에 따르면, 주일이 가까워지면 ‘교회에 데려다 줘’라고 했단다. 그러면 차만 타면 토하는 나를 아들이 자전거에 태워, 그래도 힘들어하면 두 팔로 안아 교회까지 데려다 줬다. 그리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오는 생활을 반복했다. 내가 살 수 있는 길이 오직 예배 뿐이었음을 알았나보다.

 박상식 담임목사님의 헌신적인 돌봄과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로 나는 기력을 회복했고, 하나님 앞에 더욱 열심이었다. 지난해에는 탈북자 최초로 권사 직분도 받아 여선교회장직을 더욱 충실히 감당하고 있다. 축복도 많이 받았다. 두 딸은 각각 회사원, 세무 회계 일을 하게 됐고, 아들은 명문대 공대에 재학 중이며 기독동아리에서 활동할 정도로 신앙이 뜨겁다.

 그런 나에게 지난해 10월 두 번째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앞을 볼 수 없어 병원에 갔더니 뇌에 이상이 온 것 같다고 했다. 세종병원에서 MRI를 촬영한 결과 뇌혈관 70%가 막혀 생명과 실명의 위기가 발견돼 당장 수술이 불가피했다. 12시간이 소요되는 대수술이었지만 자녀들은 1시간 걸리는 간단한 수술이라며 나를 안심시켰다. 

 수술 전 의사는 내 몸에 약을 투여했다. 그러는 사이 내 옆에서는 의료기계들의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수술 중이라고만 생각했지 그것이 내가 받을 12시간 대수술을 위한 준비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의사가 “어머니! 어머니! 하늘이 도왔다. 기적이다”는 말을 했다. 알고 보니 뇌수술 전 뇌혈관이 확장되면서 생명의 위험도 실명의 위기도 넘기게 된 것이다. 기적 중 기적이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이었다. 할렐루야! 나는 분명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고 믿는다. 내가 살아온 북한을 사람들에게 제대로 알려주고 나를 살려주신 하나님을 전하고 싶다.


나보름 성도(용산대교구)

- 주님께 시간 드리니 꿈과 소원 이뤄져

교회 봉사하며 해금 찬양사역의 꿈 다시 찾아
이영훈 목사님께 기도 받고 바라던 아이 임신


활을 그어 소리를 내는 해금은 우리의 전통악기로 전통음악 전 분야는 물론 퓨전음악에도 두루 사용되는 매력 있는 악기다. 해금에 푹 빠져 대학에서 국악을 전공한 나는 해금 연주가로서의 진로를 늘 고민해 왔다. 내 마음에는 해금 찬양사역자로 활동하고 싶다는 비전이 분명히 있었지만 연주 활동을 해도 수입이 고정적이지 않고 진출분야가 다양하지 않다보니 늘 현실적인 것들에 발목이 붙잡혔다. 더욱이 결혼 후에는 고정적인 수입을 찾아야했고 첫째 아이를 가진 후에는 음악보다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20대 초반부터 13년째 해온 교회 반주 봉사만큼은 내려놓지 않았다. 해금은 아니었지만 피아노 반주로나마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을 계속 하고 싶었다. 이런 나의 모습을 지켜봐온 남편은 어느 날 나에게 해금 찬양 앨범을 제작해 보는 건 어떻겠냐고 물었다. 남편은 나와 결혼하고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초신자인 남편이 이러한 제안을 해주는 게 놀랍고도 고마웠고 무엇보다 기독교 음반임에도 불구하고 시댁에서도 지원을 해주겠다고 하며 나를 응원해주어 든든했다. 물질적인 부분은 해결이 되었지만 혼자 제작하려다 보니 앨범을 완성하기까지 여러 가지 난관들이 있었다. 편곡과 믹싱작업의 어려움은 물론 해금은 단율악기이기 때문에 피아노와 같은 선율이 있는 악기가 함께 연주가 되어야만 했다.

 빌립보서 4장 19절의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는 말씀대로 전능하신 하나님은 10개월 앨범제작 기간 동안 예기치 않게 내가 도움이 필요한 순간 적절한 인재를 보내주셨다. 스쳐간 인연으로 또는 소개로 교회에 음악하는 청년들이 동역자가 되었다. 20대 친구들에게는 앨범 제작의 경험을 해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나는 편곡 제작 등 모든 게 해결됐으니 감사할 뿐이었다. 보통 앨범을 제작하다 보면 서로의 견해차로 다툼이 일어나기 마련인데 찬양을 만들고 교회 안에서 하다 보니 그러한 잡음이 생기지 않았다. 고요하고 평안한 가운데 만들어진 앨범이기에 찬양을 듣는 사람들 역시 염려, 근심, 걱정에서 벗어나 편
안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타이틀을 『평화 평화로다』 타이틀곡을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로 정했다.

 작년 11월 6일 앨범이 완성되던 날 나는 또 한 가지 큰 기쁨을 얻었다. 기다렸던 둘째 아이가 생긴 것이다. 나는 육아기간이 길어지면 계획했던 찬양 사역이 다시 힘들어질까봐 첫 아이와 둘째가 터울이 많이 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런데 생각처럼 둘째 임신이 되지를 않아 살짝 조바심이 생기던 찰나였다. 만약 앨범 제작 기간 중 아기가 생겼다면 마무리가 어려웠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앨범 제작이 마무리되고 임신이 되니 기쁨이 더했다. 임신 사실을 알기 2주 전 나는 마더스드림의 반주 봉사를 위해 왔다가 우연히 길에서 이영훈 목사님을 뵙게 됐다. 주일 2부 예배에서 이영훈 목사님이 신유기도 시간에 아기를 간절히 원하는 자매가 아기가 생겼다고 선포하셨는데 그 말씀이 내 말씀이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생긴터라 나는 곧장 목사님께 다가가 인사를 드리고 안수기도를 해주실 수 있는지 여쭤보았다. 놀랍게도 이영훈 목사님은 나를 반주하는 자매라며 기억해 주시고 그 자리에서 안수기도를 해주셨다. 나는 이 또한 오랫동안 교회에서 봉사를 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린 힘이라는 생각이 든다.

 

찬양 사역자로서의 첫 앨범도 둘째 아기도 나는 교회 봉사를 하며 내가 꿈꾸던 것을 조금씩 이루어 나가고 있다. 앞으로의 비전은 국악 찬양을 통해 전세계에 복음을 전파하고 싶고 더불어 우리 교회 중·고등부 국악찬양팀이 나아갈 발판을 만들어 주고 싶다. 찬양 사역이 보다 활성화 돼 청년들에게 다양하고 많은 기회들이 주어져 찬양으로 교회가 더욱 부흥 되기를 바란다.        

정리=김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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