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주 안수집사(관악대교구) -

“혼수상태 깨어나자마자 중보기도부터 부탁했죠”

사업장 창고 2.3m에서 추락, 머리가 바닥에 부딪쳐
주님 보호하심에 큰 이상 없어, 통증도 기도로 완치


 나는 제조업을 한다. 사업장 2층에는 샘플들을 두는 창고가 있어 하루에도 사다리로 몇 번씩 오르락내리락했다. 지난달 2일이었다. 샘플을 확인하고 내려오다 그만 발을 헛디뎌 추락하고 말았다. 나중에 내가 떨어진 높이를 확인해보니 무려 2.3m나 됐다. 더욱이 떨어지면서 머리를 바닥에 심하게 부딪쳐 그대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응급실로 옮겨져 수술 준비 중인 때였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기도해야 산다’였다. 그래서 나는 아내에게 “빨리 중보기도를 부탁하라”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 교구 담당 신현욱 목사님을 비롯해 봉사하는 남선교회 회계실장 김근식 장로님, 지구역 김정표 총무권사님, 교구협의회 조경팔 장로님 등에게 기도를 부탁했다. 그래서 지구역 식구들, 남선교회 회원 등 많은 분들이 나를 위해 기도해주셨다.

 내가 깨어났을 당시는 이미 MRI를 비롯해 각종 검사를 끝낸 후였고 수술을 앞두고 응급실에서 중환자실로 옮겨진 상태였다. 중환자실로 옮겨졌을 때 머리보다는 쇄골 주변에서 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통증 탓에 가만히 누워 있을 수 없어 나는 수차례 자리에 앉아서 기도했다. 그런 내 모습을 신기하게 여긴 의사는 수술을 미루고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실제로 나는 추락하면서 머리가 일부 함몰됐지만 다행히도 뇌는 큰 이상을 보이지 않아 당장 수술을 하지 않기로 했다. 정말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런데 문제는 쇄골 부근의 통증이 멈추질 않는 것이었다. 너무 통증이 심해 강한 진통제를 투여 받았지만 통증은 계속됐다. 5일이 지나도 통증은 잡히지 않고 괴로움만 더해갔다. 심지어 의사는 “통증이 평생 갈수도 있다. 좀 더 경과를 지켜봐야 한다”라고 말해 나를 두렵고 떨리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께 의지하기로 작정하고 의사에게 진통제 투여를 멈춰달라고 했다. 아마도 새벽 1∼2시 경이었던 것 같다. 나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께서 이 생명을 살려주신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이 통증도 멈추게 해주실 것도 믿습니다” 나는 통증이 멈추게 해달라고 뜨겁게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새벽 5시쯤 됐을 무렵이었다. 불붙은 통나무가 내 어깨에 다가오는 환상과 함께 통증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통증이 사라지고 특별한 문제를 발견할 수 없어 25일, 입원한지 20여 일만에 퇴원했다. 그리고 3일후 이영훈 담임목사님께 안수기도를 받을 수 있었다. 기도를 받는 순간 쩌릿한 느낌과 함께 내가 이제는 사고로 인한 고통과 두려움에서 완전히 해방되었구나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바로 다음날이 CT촬영 등 마지막 재검사와 결과도 나오는 날이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가득했지만 기도 받고 나서는 그런 마음도 사라지고 담담하게 검사를 받고 결과를 기다렸다. 의사는 검사결과물을 보고는 “모든 결과가 깨끗하다. 심지어 나이에 비해서도 더 건강하다”는 결과가 나왔다며 놀라워했다.

 나는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창문 밖 교회로 주일예배를 드리러 오고가는 성도들의 모습을 보고 참 부러웠다.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참 행복을 창문을 통해 만날 수 있었다. 퇴원한 지금은 그 행복을 누릴 수 있음에 너무나 감사하다.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도록 앞으로도 더욱 열심히 봉사하고 기도와 신앙생활에 최선을 다하겠다. 할렐루야!  


박정연 안수집사(양천대교구)

- 하나님만 믿으면 고난은 축복이 된다

교회 다니며 참된 평안얻고 물질 축복받아
해외 아동 60명 후원하며 큰 기쁨 얻게 돼

 나는 우리 교회가 너무 좋다. 성령 충만한 예배, 은혜 넘치는 설교, 열정적인 기도가 있어서 좋다. 어려운 이웃도 많이 도와주는 우리 교회 성도라는 것이 참 행복하다. 나는 2006년부터 하나님을 믿게 됐는데 5년 전부터 여의도순복음교회에 다니면서 마음의 평강을 얻고 물질의 축복을 받고 삶의 의미와 천국의 희망을 찾았다. 나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사람이 태어나서 죽고 이 세상에서 없어지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해 30년간 마음수련을 하러 다녔다. 도인, 스님을 만나 마음의 평안을 얻으려 했고 인생의 이치를 배우려고 했다. 인도, 중국까지 가서 수련을 할 만큼 마음수련에 힘을 쏟았다. 회사에서도 불상을 놔두고 수시로 기도했다. 그러던 중 지리산 도사를 만나 1000일 축수기도를 하게 됐는데 두 달이 지날 무렵 ‘하나님이 최고이신데 내가 누구를 위해 기도하나’하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그 순간부터 기도가 안나왔다. 하나님을 믿겠다고 선언하고 단호히 그곳을 나왔다. 도사를 비롯해 함께 기도하던 사람들이 극심하게 반대했지만 내 뜻은 확고했다.  

 다음날부터 집 근처 교회에 나가 새벽기도를 했다. 그 전에는 삶의 의미를 못찾아 마음을 비우기 위해 도를 닦았고, 모든게 하나님이 주신 은혜라는 기독교 사상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하나님을 알게 되니 그토록 오랫동안 찾고 노력했던 마음공부가 진정으로 이루어졌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니 나의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쉽게 마음을 비울 수 있게 됐다.

 영적 방해가 있을 것을 예상했지만 일이 벌어지는데 기가 막혔다. 아이들이 사춘기를 겪으며 부모와 다투고, 회사 운영이 어려워졌고, 땅을 사면 사기 당하고 투자를 하면 사기 당했다. 1년간 고난을 겪으며 어려운 일 억울한 일을 당해도 싸우지 않고 묵묵히 하나님 말씀을 보며 순종했다. 결국 망해서 회사를 팔게 됐지만 나는 더 하나님 말씀대로 살며 고난을 이겨낸 뒤에 찾아올 축복을 기대했다.    

 산업용 보일러를 생산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 국내 최고의 보일러 기업에서 나를 찾아와 같이 사업을 하자고 했다. 대기업과 함께 사업을 하게 되면서 연매출이 상상도 못할 만큼 급성장했다. 십일조의 축복이 시작되는데 어마어마했다. 성경 말씀처럼 30배 60배 이상의 복을 받았다.

 지난달 우리 교회에 대형 전광판 2대를 기증했다. 이영훈 목사님께 기도를 받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전광판 헌납 선언 한달 후 우리 회사 제품이 조달청 우수제품으로 선정됐다. 조달청 우수제품이 되면 고소득이 보장되는 것이라 4차까지 지원해도 힘든데 1차에 합격했다. 분명 기적이었다.  

 나는 여의도순복음교회를 다니며 매일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는 삶을 살고 있다. 교육 때문에 아내와 아이들이 캐나다에 있을 때도 10년간 조용기 목사님의 설교 테이프를 꾸준히 보내며 말씀으로 신앙생활 할 수 있도록 했다.  
 순복음실업인선교연합회 운영본부에서 봉사하고 있는 나는 굿피플을 통해 매달 해외아동들을 60명씩 후원하고 있는데 아이들이 편지를 보내올 때면 큰 감동을 받는다. 3만원으로 한 아이에게 희망을 주고 그 가정에 기쁨을 주고 하나님을 전할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나는 하나님께서 교회로 불러주신 것을 실제 체험했기에 죽음 이후 천국의 소망을 갖고 살며 이 세상사는 동안에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               

정리=이미나 기자



이형순 집사(마포1대교구) -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합니다”

혈액암의 절망, 주님 의지하며 희망으로 변해 
성경 읽고 회개하며 살아계신 하나님 은혜 체험


 나는 2006년 11월 16일 급성호지킨림프종 판정을 받았다. 급성호지킨림프종은 혈액암 중의 하나로 인체의 가장 중요한 면역체계인 림프계에서 암이 발생한 것이다. 세수를 하는데 목에 혹이 있어서 검사를 받으러 갔다가 내가 암이라는 것을 알았다. 등산도 즐기며 건강했던 내가 갑자기 이런 병을 앓게 되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절망적인 마음으로 입원하러 병원을 가는 길에 십자가와 교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교회 다니시는 분에게 부탁해 기도문을 한 장만 달라고 했다. 그 분은 나에게 주기도문과 사도신경, 십계명을 적어주셨다. 나는 그 때부터 수시로 주기도문과 사도신경, 십계명을 읽고 또 읽었다. 

 항암주사를 여러 번 맞으며 나는 무척 고통스러웠다. 항암주사 3번을 맞고 나서 집근처 교회에 나가게 됐다. 교회를 찾아가 의자에 앉는 순간 눈물이 흐르는데 멈출 수가 없었다. 용서해 달라는 기도만 하고 있었다. 그 즈음 교회 다니던 선배 언니가 나에게 성경을 선물로 주고 갔다.

 나는 집에 와서 시편을 펼쳐 놓고 읽었다. 시편 51편을 읽을 때는 내 죄를 고백하며 눈물을 펑펑 쏟았다. 성경을 읽는데 “2007년 3번”이라는 성령의 음성이 들렸다. 나는 하나님께서 암을 통해 나를 주님께 인도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느꼈다.

 친구를 통해 여의도순복음교회 지역장을 알게 됐다. 지역장님은 내게 여의도순복음교회에 같이 가자고 했다. 2007년 3월 4일 항암주사를 6번째 맞고 여의도순복음교회에 왔다. 교회에 갈 수 있는 몸상태가 아니었지만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으로 교회를 찾아갔고 하나님은 나를 만나주셨다. 교회를 다니면서부터 꿈을 꾸었는데 어떤 두 사람이 나를 지켜주기도 하고 밤에는 빛이 내 얼굴을 환하게 비쳐주기도 했다.

 2007년 3월 어느 날 성경을 읽고 있는데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다 읽으면 내 병이 낫는다는 음성이 들렸다. 항암주사를 맞고 있었기 때문에 항상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성경을 읽고 있으면 내 몸에서는 비오듯 땀이 흐르고 있었다. 기운이 없어서 성경책을 들고 있다가 바닥에 떨어뜨리기도 했다. 힘이 없어서 옆으로 넘어져도 일어나지 못했으며 그대로 쓰러져 울며 정신을 잃기도 했다. 성경 일독은 내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2007년 3월 31일 8번째 항암주사를 맞고 지역장을 따라 기도처에 갔더니 다니엘 기도회가 진행 중이었다. 갑자기 혀가 꼬부라지고 방언이 나오며 성령을 체험했다. 4월 18일 성경을 처음으로 일독하고 약 2주 뒤에 펫시티(PET-CT) 촬영을 했는데 암이 깨끗이 없어졌다. 할렐루야!

 나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 더욱 힘써 성경을 읽었다. 하루에 7∼8시간씩 회개하고 눈물을 흘리며 성경을 읽었다. 성경만 읽으면 내가 기억하지 못한 죄가 필름처럼 지나갔다. 내가 지은 가장 큰 죄는 하나님을 믿지 않은 죄였다. 가장 잘한 일은 하나님을 영접하고 교회에 다닌거였다. 나도 모르게 암을 주신 것을 감사하는 믿음의 고백이 나왔다. 이 암이 아니었으면 교회에 다니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속에 들려왔던 말처럼 2007년 12월 24일까지 성경 3독을 모두 마쳤다.

 병원에서 의사는 나를 보고 항암주사를 16번 맞아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8번으로 항암주사를 끝냈다. 그리고 지금은 만 5년이 지났기 때문에 완치판정을 받았다. 나는 지금 국민일보후원선교회에서 봉사하며 열심히 신앙생활 하고 있다. 나를 구원하시고 자녀로 삼아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
 


조용숙 지역장(구로대교구) -

딸의 사법시험 합격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이들에게 역경 이겨내는 신앙 알려주고파
이영훈 목사 기도받고 응답 확신

 딸 은비가 2년 반을 준비한 사법시험에 3등으로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부터 드렸다.  올해 시험은 사법시험 폐지 전 시험을 치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사법시험은 1, 2차로 나뉘는데 나는 2차 시험 전 이영훈 목사님에게 기도를 받으며 은비가 합격하면 다시 찾아뵙겠다고 말씀드렸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길이라면 응답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사실 시험을 앞둔 딸에게 내가 해줄수 있는 거라곤 오직 확신하는 믿음을 보여주는 것뿐이였다. 나에게 신림동은 두 가지 기억을 떠오르게 한다. 하나는 은비에 대한 좋은 기억이다. 시험준비 기간 신림동 고시원에서 지낸 딸은 공부 시작 전 꼭 기도하고 주일 시간은 온전히 하나님께 드렸다. 공부도 믿음 생활도 알아서 잘하는 대견한 딸의 모습이 생각난다. 또 다른 하나는 가난했던 중·고등학생 시절 내 모습이다. 군인이었던 아버지가 허리 부상으로 군 생활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면서 부유했던 우리집은 가세가 기울었다.  거기에 아버지가 친구에게 보증까지 서주며 하루아침에 빚더미에 올라앉게 됐다. 불우한 가정, 그런 중에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구역장으로서 하나님을 섬긴 어머니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나 역시 교회 지·구역장으로 섬긴지 벌써 19년이 흘렀다.

 젊은 시절에 나는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부터 했다. 부지런하고 열심히 일하니 사업장을 맡을 기회가 생겼고 26살 젊은 나이에 차도 생겼다. 그런데 차를 타고 일을 하러 가다가 앞 차와 부딪히는 교통사고를 겪게 됐고 너무 놀란 나머지 몇 초도 안 되는 그 순간에 ‘하나님 살려주세요. 살려주시면 하나님 일을 하겠습니다’라고 약속을 드렸다. 어머니로부터 보고 배운 신앙이 나에게도 있었기에 그때부터 돈을 좇지 않고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고자 열심히 봉사했다.

 그동안 말도 못할 고난들이 많았지만 그 중 살면서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건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었다. 아버지 때문에 내 가난이 시작됐다는 생각에 가슴에 응어리가 있었다. 그런 아버지가 폐암 판정을 받으셨다. 또 다시 아버지로 인해 내 자신은 물론 아이들까지 돌보지 못한다는 생각이 드니 내 마음은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5년 넘도록 아버지를 간호했고 병실에서 집에 오면 밤 12시가 넘어 육체와 정신적 한계에 부딪힐 때가 많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나는 친한 언니에게 사기를 당하며 빚까지 떠안게 됐다. 여러 고난으로 상처투성인 나는 교회 일을 하면서도 다른 사람과 나 자신을 비교하고 낙심했다.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을 때 처음으로 나는 하나님께 너무 힘들다고 호소에 가까운 눈물의 기도를 드렸다.

 그때 내 마음에 찬송가 429장이 떠올랐다. ‘받은 복을 세어보아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눈을 떴을 때 내 앞에 앉아있는 아이들이 보였다. 엄마에게 경제적 부담을 주지 않고자 학원을 보내달라는 말도 안하고 묵묵히 책을 읽으며 공부하는 아이들. 착한 자녀들이 내 복임을 깨달았다. 돌이켜 보면 나의 삶은 늘 하나님의 계획 아래 있었다.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미움도 이해로 바뀌었다. 내가 믿는 사람의 처지가 딱해 돈을 빌려주었듯 아버지 또한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고난을 통해 아버지에 대한 미움을 지웠고 감사함을 깨우칠 수 있었다. 내가 자녀들을 위해 많은 것은 못해주어도 세상 풍파에 고통당할 때도 감사할 수 있는 이러한 ‘신앙’만큼은 꼭 물려주고 싶다. “얘들아 어떠한 일을 하던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일생을 기도하며 감사로 살아라”   

 
정리=김주영 기자


이효진·노성은 집사(새성북성전) -

“감사가 고난에서 복으로 우리 부부를 이끌어”

절망의 순간에 새벽기도로 주님께 나아갈 때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기적으로 응답해주셔  


 결혼 전 피아노학원을 운영하던 나는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은 마음에 욕심을 부리다가 그마저도 잃고 말았다. 남편은 프랜차이즈 베이커리 운영으로 한 때 승승장구했지만 결국 빈손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각자 하나님을 만나는 과정을 비슷하게 겪은 후 결혼식을 올렸다. 아픈 시련을 딛고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의지하며 예쁘게 살고자 가정을 이루었는데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다. 계약했던 신혼집은 잔금을 치르는 것이 불가능해지면서 계약금마저 잃었다. 결국 기대했던 예쁜 신혼집이 아닌 친정집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게다가 임신 초기 유산까지 경험하면서 나는 말할 수 없이 우울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아이가 왜 우리 곁을 떠나야 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내 친구들은 “네 삶은 왜 그렇게 순탄치 않느냐”고 묻곤 했다.

 우리 부부는 이러한 마음과 상황을 극복하고자 하나님께 작정기도를 드렸다. 올해 초 12일간 계속되는 ‘신년축복 열두광주리 특별새벽기도회’를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일정으로 정하고 하루도 빠짐없이 교회로 향했다. 이영훈 목사님은 그 어떤 시련이 와도 절대긍정, 절대감사하며 기도하고 또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부부도 절대긍정과 절대감사로 나아갈 것을 마음 깊이 다짐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아기를 주실 것과 보금자리를 예비해 주실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간절히 기도드렸다.

 유산한지 3개월째 되던 날은 때마침  우리의 작정기도가 끝나는 날이었다. 그리고 새롭게 임신 사실을 확인한 날이기도 했다. 그 날 이후 우리 부부는 주님께 응답받은 기쁨과 감사함으로 태중의 아기가 건강하게 자라나길 기도했다. 그런데 임신 26주차에 병원에서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태아의 뇌 속에 있는 양쪽 뇌실이 정상 사이즈보다 큰 ‘뇌실확장증’이며, 뇌를 연결해 주는 뇌량이 없어서 기형아를 출산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아픈 마음을 위로받고 싶어 교회로 향했다. 찬양이 울려 퍼지는 성전에 앉으니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오직 감사인거죠?’ 하나님은 우리 부부가 끊임없이 기도와 감사로 나아가기를 원하시는 것 같았다. 불안함과 두려움 대신 마음 가득 감사가 넘쳐났다. 남편과 나는 다시 새벽 제단을 쌓았다. ‘하나님, 이 아이를 통해 믿지 않는 제 친구들에게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세요’

 일주일째 새벽기도를 드리던 날, 우리 부부는 서울대병원에서 다시 검사를 받았다. “태아는 뇌량이 없는 무형성 증세로 볼 수 없으며 뇌실도 정상 사이즈입니다”
 정확한 진단을 위해 또 다른 전문의를 통해 검사를 재확인했다. 역시 결과는 같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엉엉 울며 이렇게 기도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이를 건강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몇 달 후 주변의 축복 속에 건강한 아기가 태어났다. 이름을 ‘노아’라고 지었다. 성경에 하나님이 노아에게 새 언약의 증거로 무지개를 주신 것처럼 우리 노아에게는 큰 복을 주실 것을 예고하듯 아름다운 장막을 선물해 주셨다.

 우리 가정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이들도 이제는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구나”라고 말할 정도로 변화됐다. 일련의 과정을 통해 남편은 삶을 온전히 주님께 드리기로 결심하고 내년부터 신학대학원에 다닐 계획이다. 이 모든 일을 이루신 하나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며 본이 되는 믿음의 가정이 되도록 힘쓰겠다. 할렐루야!

정리=김진영 기자


안인옥 집사(양천대교구) - 나는 북한 지하교회 교인이었다

몰래 받은 남한 성경책 가족이 돌려가며 읽어
남한과 중국교회 원조로 주민돕고 복음화시켜


 “하늘의 신이 내려와서 축복을 주는 책이 있는데 한번 보시겠습니까” 남편 덕분에 추방을 면한 한 청년이 우리 집에 오더니 내게 말을 건넸다. 그런 책이 어디 있냐며 어이없어 웃던 나는 “점쟁이가 점을 쳐주는 책이 있다던데 그 책인가보네. 당장 가져와봐요”라고 말했다. 청년위원장 부인이었던 나의 말에 그 사람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새벽 3시 그 책을 품에 안고 우리 집에 왔다.

 1997년 7월, 무더운 한 여름 새벽 우리 집으로 달려온 그의 옷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온 그는 당장 문을 걸어 잠그라고 했다. 그가 시키는대로 문을 잠그자 품고 있던 책을 내게 내밀었다. 그리고는 북한 보위부에 걸리면 당장 끌려가니 남편도 몰래 조용히 읽으라고 당부했다.

 땅에 묻어둔 것을 꺼내왔다는 그 책은 악어가죽에 지퍼가 달려 있었다. 책을 펴자 앞부분은 썩어 후두둑 떨어져 나갔다. 뒷장은 물을 흥건히 먹어 질퍽거렸다. 부엌에 앉아 젖은 책을 불에 말려가며 읽기 시작했다. 무슨 뜻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매일 밤 식구들이 자는 것을 확인하고는 몰래 부엌에 앉아 청년이 주고 간 그 책을 읽었다. 

 그러다 어느 날 밤 부엌에 들어온 남편에게 책을 들키고 말았다. 남편은 “남조선에서 들어온 책”이라며 어서 감추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서둘러 문을 걸어 잠그더니 창문을 닫고 커튼을 쳤다. 남편의 행동이 이상했다. 남편은 나더러 “정치범 수용소에 가서 재판도 없이 총알 맞고 죽고 싶냐”며 나를 데리고 방으로 가더니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리고는 “이 책은 이렇게 숨어서 읽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늘의 축복을 담고 있다며 청년이 건네 준 이 책은 바로 성경이었다. 

 김일성 사후 북한 주민들은 배고픔 속에 많이 죽어갔다. 고난의 행군이 가장 극심했던 1997년, 일대에서 가장 부자였던 우리 집도 예외 없이 생활고를 겪어야 했다. 나에게 성경책을 건네 준 청년은 성경책을 주기 몇 달 전 쌀과 암탉을 주고 갔다. 남편에게 진 빚을 갚은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가 건네 준 식량은 중국 교회를 통해 북한 지하교인들에게 전달된 구호물자 일부였다. 

 북한의 지하교인은 두 부류로 나뉜다. 1950년 이전 생으로 외국 선교사들로부터 복음을 전해 듣고 북한이 기독교를 말살하기 전까지 신앙생활을 했던 이들을 그루터기 지하교인이라고 일컫는다. 북한에서 1980,90년대는 기독교가 완전히 말살된 무종교시대라고 볼 수 있다. 이후 고난의 행군으로 북한의 식량난이 남한과 서방세계에 알려지고 전세계 민간단체의 구호활동이 시작되면서 북한은 다시 지하교인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들이 바로 신지하교인들이다. 나는 신지하교인에 속했다. 우리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부정기적으로 모여 기도를 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나는 딸 아이가 병에서 고침받는 기적도 경험했다.

 우리가 청년으로부터 받은 낡은 성경은 이후 친정식구들이 돌려가며 읽었다. 중국에 살고 있던 사촌 오빠의 가정이 기독교가정임을 알게 되면서 그들과의 교류를 통해 나와 남편은 남한과 중국 교회로부터 받은 후원물자를 굶주린 북한 주민들에게 전달하며 활발히 복음을 전했다. 위태함 속에 2년간 지속됐던 지하교인 생활은 결국 누군가의 밀고로 발각되고 말았다.

 비공개재판을 통한 나의 죄명은 북한노동당 역사 이래 유래 없는 최대 종교간첩단 사건, 반동사상 유포죄로 13년형이 구형됐다. 거꾸로 매달리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나는 함께 신앙생활했던 이들의 이름을 결코 말하지 않았다. 나는 모진 고문과 배고픔 속에 3년 가까이 감옥생활 하던 중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당시 내 몸무게는 28㎏.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난 나는 2003년 아들과 함께 북한을 탈출했다. 그리고 2005년 남한으로 왔고, 미국 의회에서 북한에 존재하는 지하교인들에 대해 증언했다. 북한복음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지하교인들이 살아나야 한다. 이를 알리기 위해 올해 나는 북한순교자비전센터를 세웠다. 북한 복음화 확장 방안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에서다. 하나님은 이미 평화 통일의 길을 제시해주셨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비전을 품고 그 길이 열리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만나 변화된 목적은 바로 이를 알리기 위해서이다.


문준우·이한빛나 성도(워싱턴제일순복음교회)

엉켜 있던 비자 문제 기적적으로 해결

건강 악화로 접었던 학업의 꿈 회복돼
사랑하는 자녀를 돌보시는 하나님 만나


 2012년 결혼 후 학비면제 장학생이 돼 미국으로 공부하러 갔다. 하지만 갑작스레 건강이 안 좋아지고 여러 상황이 겹쳐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오게 됐다. 귀국 후 나는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가족을 제외한 아무에게도 귀국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나를 아는 누구와도 만날 일이 없는 대전으로 내려가 카이스트에서 연구원 생활을 하게 됐다. 카이스트에서 근무하면서 몇 개월이 지나 미국 출장을 가게 됐다.

 그런데 미국 입국 과정에서 신분상태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됐다. 학업 중 갑작스럽게 귀국하면서 제대로 관련 서류 업무를 마무리 못하고 출국을 하는 바람에 비자 상태가 엉켜있었다. 샌프란시스코 출입국사무소에서 소명자료를 제출해 겨우 입국할 수 있었다.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안 나는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몸과 마음을 추슬러 꿈을 향해 다시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복잡하고 난감한 가운데 의지할 분은 하나님 한분뿐이었다. 출장기간 중 신기하게도 묵었던 숙소 인근에 상항순복음교회(現 예수인교회)가 있어 그곳에서 예배를 드렸다. 예배 중에 간절히 하나님께 다시 미국에서 공부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20일간의 긴 출장을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한 그날. 매년 2명만 선발하는 조지메이슨 대학의 커뮤니케이션 전공 박사과정에 학비면제 및 생활비까지 지원해주는 전액장학생으로 선발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를 통해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됐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제일 큰 고비인 학생비자 발급이 있었다. 이미 학업을 한번 중단했었고, 과거에 신고조차 제대로 안하고 출국해 미국 입국 시에 문제가 있었기에 비자 관련 전문가는 내가 다시 학생비자를 발급 받기 어려울 것이라 했다. 그래도 포기할 순 없었기에 대사관에 비자발급 관련 모든 서류를 접수했다. 나는 낙관할 수 없는 상황에 초조하고 답답해 하는데 아내 이한빛나 성도는 정반대였다. 분명히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날 거라고 우리를 도울 분을 보내주실 거라고 말하며 강건한 믿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비자 면접 당일 상상하기도 힘든 기적이 일어났다. 은행 창구처럼 번호표를 뽑아 순서에 따라 무작위로 미국 영사에게 인터뷰를 하기에 기다리는 동안 제발 말 수 적고 깐깐하지 않은 영사랑 인터뷰 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저기 2번 창구의 말 많고 계속 비자발급을 거절하는 영사는 피하고 싶다’라고 생각했으나 순서에 따라 우리 부부는 그 공포의 2번 창구 영사에게 비자 인터뷰를 하게 됐다.

 적막 속에 영사의 한마디 “오! 조지 메이슨?” 영사는 조지메이슨 동문에다가 심지어 내가 전공하는 커뮤니케이션과의 선배님이셨다. 그 다음부터는 학교이야기, 동문 자랑, 축하, 덕담이 이어졌다. 그리고 가장 걱정했었던 부분들을 살펴보시더니 큰 문제가 아니라며 깔끔하게 기록들을 정리해주셨다.

 솔직히 지금도 신앙이 연약하고 예수님에 대해 자세히는 모르지만 이번 일을 통해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몸소 느꼈다. 앞으로 살면서 어디에서든 누구에게나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하나님이 아버지의 마음으로 끝까지 자녀를 돌보고 책임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은혜로만 산다고 확신한다. 오직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말이다. 미국에서 얼마나 큰 하나님의 돌보심이 있을 지, 매일 기대하며 기도하고 있다. 열심히 공부해 아시아를 대표하는 커뮤니케이션 전문가가 되길 소망한다.

 


김정희 집사(양천대교구) -

멎었던 심장, 주의 손길로 다시 뛰다

갑자기 닥친 남편의 심근경색, ‘가망 없다’ 판정
이영훈 목사 기도 후 급속도 회복, 병원측 ‘이건 기적’


 2주간 열린 추수감사절 특별새벽기도회 첫 주를 은혜 속에 마치고 둘째 주 새벽기도회가 시작된 13일이었다. 머리가 심하게 아파 병원에 갔다 왔다. 운영하는 가게에 앉아 있는데, 남편이 대신 가게를 봐 줄 테니 잠시 집에 가서 쉬라고 했다. 다른 때 같으면 발걸음이 떨어졌을 텐데 그날따라 가게를 떠나는 게 편치 않았다. 대신 앞 집 과일가게에 가서 잠시 쉬었지만 이마저도 마음이 무거워 남편 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속이 메스껍고 머리가 아프다던 남편(이현우 안수집사·사진)이 손을 덜덜 떨더니 이내 의식 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심장이 멎었다. 119를 불렀다. 남편의 얼굴은 짙은 보랏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30∼40분 간 심폐소생술을 했지만 남편은 의식을 찾지 못했다. 인근 대형병원으로 이송했다. 급박한 상황의 연속이었고, 곧 의사가 보호자를 찾았다.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1%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다” 아무런 가망이 없다니, 도대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의사가 다가와 마지막 방법이라며 ‘저체온치료법’를 권했다. 저체온치료는 심장기능이 일시 정지된 환자의 체온을 인위적으로 내려 신진대사 및 산소 소비량을 감소시킴으로 뇌세포 파괴를 막는 치료법이라고 했다. 남편의 상황을 교구담당이신 윤병옥 전도사님께 알리자 전도사님은 교구 성도들에게 단체 문자를 보내 중보기도를 요청하고 급히 병원으로 오셨다.

 저체온치료법이 시작된 남편은 부천에서 강남 대형병원으로 이송돼야 했다. 그런데 하필 퇴근 시간과 우천이라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됐다. 전도사님은 다시 문자로 20분 안에 도착할 수 있도록 교구에 기도를 요청했다. 그리고 기도대로 20분 안에 병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곧바로 남편의 수술이 시작됐다. 저체온상태에서 심근경색을 일으킨 막힌 혈관 세 군데를 뚫었다. 의사는 1차로 48시간 안에, 최대 72시간 안으로 환자가 깨어나지 않으면 사망이라고 했다.

 14일 화요일이 됐다. 의사는 여전히 상황을 부정적으로만 판단했다. 그때 전도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정오 즈음 이영훈 목사님이 병원으로 심방오신다는 얘기였다. 목사님의 심방 소식에 더 큰 희망이 생겼다. 12시 40분 경 이영훈 목사님이 중환자실에 오셨고, 전도사님과 함께 남편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주셨다. 그리고 나에게 “눈물의 기도를 하나님이 보시고 치료해주셨다”고 선포하셨다. 오후 2시 경 의사가 보호자를 찾았다. 환자가 약간의 의식을 보인다는 것이었다. 저녁에는 병문안 온 딸이 아빠를 부르자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의사는 일시적 현상이라고 했다. 하지만 발바닥을 비비자 환자의 반응을 나타내는 그래프가 심하게 요동쳤다. 남편은 수요일(15일) 오전 마침내 의식이 돌아왔다.

 중환자실에서 남편을 지켜봤던 간호사들이 내게 다가와 물었다. “목사님이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나나요? 어제 목사님이 기도해주신 후 환자의 상태가 급속도로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정말 목사님이 기도하면 낫나 봐요”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증거 되는 순간이었다. 남편은 금요일부터는 일반병실로 이동해 회복 중이다. 남편이 걱정돼 교구 성도들이 심방 온 추수감사주일, 의사는 성도들 앞에서 남편을 향해 “당신은 하나님이 살려주신 사람이다”라고 선포했다. 여러 차례 심정지가 일어났지만 뇌에 전혀 손상이 없고, 몸에 마비가 오지도 않았고, 어느 한 군데 이상이 없다는 건 정말 하나님의 손길 아니면 일어날 수 없는 기적이었다.

 오직 주만 바라보고 남선교회 교통실에서 열심히 봉사했던 남편, 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사까지하며 전도에 매진했던 우리를 주님은 그저 바라만 보지 않으시고 ‘생명’이라는 큰 선물을 이번 추수감사주일에 안겨주셨다. 할렐루야!      


박윤숙 권사(관악대교구) -

가족들의 기도로 낳은 손녀 ‘별이’

딸의 임신에 기쁨도 잠시, 장애 가능성에 낙심
이영훈 목사님의 기도 받고 건강한 손녀 태어나


 2015년 말이었다. 둘째 딸로부터 임신 소식을 듣고 너무나 기뻤다. 특히 첫 손녀라는 소식에 기쁨이 배가됐다. 딸 부부가 지은 태명 ‘사랑이’처럼 사랑스러운 아이를 만날 기대감으로 행복했다. 그런데 임신 5개월이 됐을 무렵 딸의 말에 깜짝 놀랐다. 검진차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아이에게 다운증후군 증상이 있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는 것이 아닌가.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 얘기에 당장 딸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보다 정밀검사를 하려면 양수검사를 해봐야 하는데 비용도 많이 들고 주사 바늘이 잘못 찌르면 태아에게도 위험하다고 했다. 정확한 진단을 받아서 결과를 안다고 한들 사실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아이를 치료할 수도 없으니 위험을 무릅쓰면서 검사할 필요성을 못느꼈다. 딸과 ‘아이를 낳지 말까’라고 고민할 정도로 올바른 해결책이나 생각을 전혀 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병원에서는 아이가 너무 자랐기 때문에 산모를 위해서도 아이를 낳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했다.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실 분은 하나님뿐이었다.  나와 딸 그리고 사위, 교구 권사님, 담당 교역자님과 함께 딸의 집에서 작정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사람의 의술도, 치료도, 방법도 불가능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기적을 베푸실 것을 믿고 선포했다. 매일 아침 9시면 이사야서의 말씀을 붙잡고 뱃속의 태아가 건강해질 것을 꿈꾸고 믿고 고백했다. 기도하는 가운데 이영훈 목사님의 안수기도를 받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히 들어서 담당 교구장님을 통해 요청했다. 이영훈 목사님은 2016년 새해 첫 달에 딸을 안수기도하며 건강하게 손녀가 태어날 것을 믿음으로 선포해주셨다. 이영훈 목사님이 기도해주신 당일 밤 나는 꿈에서 아기의 몸에 달라붙어 있는 나쁜 물체가 떼어져 멀리 버려지는 것을 보았다. 그 꿈을 꾸고 나니 나는 하나님이 태아를 치료해주셨다는 분명한 확신이 생겼다.

 기도는 계속됐다. 딸의 집에서 우리 집으로 옮겨와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간절히 기도했다. 2016년 5월 3일 기다리던 손녀가 태어났다. 나와 딸은 태어난 아이의 얼굴부터 먼저 확인했다. 정상이었다. 혹시 몰라 보고 또 봤는데 역시나 정상적인 예쁜 아기였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외손녀의 이름은 별(사진)이라고 한다. 얼마나 사랑스럽고 귀여운지 모르겠다. 예배에 데리고 가도 울기는커녕 찬송을 따라 흥얼거리기도 하고, 기도로 태어난 아이라서 그런지 예배가는 것을 참 좋아한다. 이렇게 많은 기도를 받고 태어난 아이이기에 하나님께서  특별한 계획이 있으심을 나는 분명히 믿고 지금도 그렇게 기도하고 있다. 별이를 위해 기도해주신 이영훈 목사님을 비롯해 중보기도를 해주신 담당 교역자님들과 신연숙 권사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이 일을 계기로 아이를 위해 기도하는 가정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하게 됐다.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온 가족에게 어둠이 드리운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가정에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깃들길 바라며 기도에 힘쓰겠다. 할렐루야!  

정리=정승환 기자


임규영 성도(교회학교 예제모) -

“포기하지 않는 사랑 덕분에 제 길을 찾았습니다”

예제모 말씀 훈련으로 비전 향한 첫걸음
소명 받고 군종사관후보생 시험 합격해


 나는 신학생으로 소명을 받고 입학했기에 대학교에서 수업도 열심히 듣고 언제나 말씀과 예배 중심으로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9월 28일 믿음을 가지고 치룬 군종사관후보생 시험에 합격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의 모든 발걸음이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음을 다시 한 번 알게 됐다. 하지만 예전에 나를 알았던 사람들은 180도 달라진 나의 모습을 낯설어 한다. 신학과에 가야겠다고 마음먹기 전까지 나는 학생으로서 하지 말아야할 것들만 골라하는 소위 불량학생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 난 체격도 좋고 인기도 있다 보니 자연스레 나쁜 친구들을 만나게 됐고 술과 담배를 하며 방황했다. 반 친구들을 짓궂게 괴롭혔고 나 때문에 학교에 나오기 싫어하는 아이들도 더러 있었다. 학교에서는 감시해야 하는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혀 선생님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기 일쑤였다. 부모님은 어떻게든 내가 더 이상 나쁜 길로 빠지는 걸 막기 위해 매를 드셨다. 처음에는 연약해 보이는 어머니가 때려봐야 얼마나 아프겠나 싶었는데 종아리에 피가 나고 엉금엉금 기어 학교를 나가야 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나는 바뀌지 않았다. 부모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작정기도로 내가 변화되어 하나님께 쓰임 받는 자녀가 되기를 기도하셨다. 그러나 정작 나는 어렸을 적부터 다녔던 교회를 빠지고 부모님께 거짓말을 하고 친구들과 어울렸다.

 1년 간 교회를 빠지며 방황하는 나를 붙잡은건 교회학교 중등3부 담임으로 만난 황의대 선생님이었다. 황 선생님은 내가 교회를 빠진 날이면 곧장 부모님께 연락을 드렸다. 선생님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나를 관리하자 어머니는 선생님께 가정방문을 부탁드리고 나에 대한 상담을 곧잘 하셨다. 선생님은 집이 멀다는 핑계로 청소년 철야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날 차로 데리러 오며 참석시켰고 말씀 훈련 동아리인 예제모큐티스쿨에도 억지로 참여시켰다. 나는 요리조리 빠질 궁리를 하며 온갖 잔꾀는 다 썼다. 그러나 선생님은 나를 한 번도 혼낸 적이 없고 늘 생각할 기회를 주고 소통을 시도하셨다. 그런 선생님의 모습에 못 이기는 척 한 번씩 큐티모임에 참여했는데 그때마다 들은 성경 말씀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부모님의 기도와 큐티모임에서 들었던 말씀들이 차곡차곡 쌓여서였는지 고등학교 2학년 무렵 주일 예배 시간 하나님은 나의 잘못들을 깨우쳐 주셨다. 예배를 드리는데 갑자기 그동안 내가 잘 못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여태까지 반항심이 가득 차 있던 마음에 회개의 마음이 생겼다. 미안한 마음에 눈물이 흘러 예배를 드리기가 어려웠다. 회개한 후부터는 큐티에 열심히 참여했다. 꾸준히 말씀 훈련을 하니 내 미래도 말씀에 대입해 생각하게 됐다. 성적을 비롯해 여러모로 부족했지만 하나님이 역사하심으로 신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고 입학 후 나는 군복음화와 더불어 북한선교의 일환으로 말씀을 전하는 군목이 되어야겠다고 더욱 구체적인 꿈을 품게 됐다.

 

현재 예제모 교사로 봉사하고 있는데 주일 1부 예배를 드리고 기도모임, 특별활동 등을 하다보면 밤 9시가 돼서야 집에 간다. 내가 그동안 하나님께 소홀했던 시간들을 회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 나와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학생들에게 어렵더라도 꾸준히 말씀을 보며 하나님과 친밀해지라고 말하고 싶다.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는 우리가 세상의 주역이다!

정리=김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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