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정섭 장로(군선교회) -

하나님과 동행하면 형통합니다

 1945년 8월 15일 라디오에서 일본 천황이 항복문을 낭독하는 소리가 나오자, 내가 살던 황해도 구월산 주민 모두가 나와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다. 그때 나는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광복이 된 수요일부터 계속 놀고 있는데 ‘일요일에 학교로 모이라’는 사발통문을 받았다. 학교에 갔더니 두루마기를 입고 흰 수염이 난 할아버지가 서 계셨다. 학생 전부를 모아놓고 우리 학교가 원래 교회였고 자신은 목사님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에 대해 설명하셨다. 그리고 한지에 적어온 찬송가를 가르쳐 주셨다. 그날 배운 ‘예수 사랑하심을’이라는 찬송을 부르면서 집에 오자, 할머니와 어머니는 누구에게 배웠냐며 놀라셨다. 대답을 하자 “목사님이 오셨네. 목사님이 오셨어”라며 크게 기뻐하셨다.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목사님과 우리 할아버지는 친구 사이였다고 했다. 두 분이 함께 평양신학교를 다니셨지만 할아버지는 중도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친구가 목회자가 되어 고향에 오자 교회를 세우는데 큰 몫을 했다고 할머니가 말씀해 주셨다.

 해방 후 우리 교회는 축제 분위기였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공산당의 박해가 날로 심해져 갔다. 그런 중에서도 나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중학교를 다니며 나라를 빛내는 사람이 되겠다는 꿈을 안고 공부를 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이기는듯 했지만, 끝없이 내려오는 중공군으로 북방한계선(NLL)이 그어졌다.

 나는 어머니와 누님 두 분과 함께 대한민국 해군 배를 타고 백령도를 거쳐 군산항에 도착했다. 실향민이 된 우리는 군산에서 정부가 내어준 트럭을 타고 김제 공덕면 회령리 문씨마을에 정착했다. 길고 험한 피난길이었지만 하나님은 우리 가족과 함께 하셨다. 부잣집 머슴살이를 했지만 하나님은 나에게 꿈을 주셨고, 희망을 주셨다.

 시집간 누님을 따라 대전에 갔다. 역 앞에서 아이스크림을 팔면서 생활비를 벌었다. 당시 군산보안부대에서 일을 하면서 군산상고를 다니는 친척형이 있었다. 나는 형을 만나 형처럼 일하면서 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랬더니 형은 ‘알기 쉬운 영어 첫걸음’이라는 책을 선물로 주면서 영어공부를 해보라고 했다. 내가 황해도에서 공부했을 때는 소련어를 배웠기 때문에 나는 독학으로 알파벳부터 공부했다.

 대전에서 장사를 하던중 5군단에 발령이 난 군인이 계셨다. 그분은 나를 심부름하는 아이로 쓰시겠다고 했다.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신 것이다. 그래서 난 그분을 따라 강원도 5군단 부대를 향했다. 틈틈이 영어공부를 하는 나를 보신 대장님이 공부를 하고 싶냐고 물으셨다. 그러시더니 포천중학교에 넣어주셨다. 그분이  청주대장으로 발령을 받자 나를 청주중고등학교로 옮겨주셨고 거기서 졸업해 서울사범대학교 영문학과까지 진학을 할 수 있었다.

 내가 청주고등학교를 다닐 때다. 사람들은 나를 특무대장의 아들이라고 착각했다. 그래서 부잣집 딸이 나를 좋아하기도 했다. 나는 아니라고 했고 서울로 가서 공부를 한 후 청주지역에 학교 발령 요청을 한 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사범대학을 나오면 먼저 발령을 받고 1년간 학보로 가면 군복무를 마치는 것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군제도가 바뀌어 3년 사병생활을 해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너무나 아찔해 장교시험을 봤다.

 하루는 나를 특무대장의 아들로 착각을 했던 그 아가씨가 8년 만에 찾아와 결혼을 하자고 했다. 오랫동안 결혼을 위해 불공을 드렸다면서 말이다. 우린 결혼을 해서 2남 1녀를 낳았다. 나는 신앙생활을 계속 했지만 아내를 전도하기란 쉽지 않았다. 부대 안에는 교회도 있고 절도 있었기 때문에 각자의 종교대로 예배를 드렸다. 나는 아내를 위해 기도했다. 좋으신 하나님은 너무나도 인격적인 방법으로 아내를 교회로 인도하셨고, 교회에 나오자마자 십일조 생활을 했다. 군인의 월급은 뻔했다. 하지만 십일조의 축복은 물질의 축복을 넘어 자녀의 형통함으로 채워주셨다. 중령으로 예편한 후 지금까지 내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면 감사뿐이다. 좋으신 하나님께 감사 또 감사드린다.


박을순 권사(기도원교구) - 기도의 성산 오산리 기도원서 되찾은 나의 건강
오중복음 삼중축복 믿음 갖고 열심히 기도할 때
이유없이 시리고 아팠던 등의 통증 깨끗이 나아

 2008년 1월 갑자기 뇌경색이 발병하면서 왼쪽 팔에 마비가 왔다. 몸도 점점 약해지면서 다리의 힘이 빠져 걷는 것조차 힘들었다. 자녀와 지인들의 걱정 속에서 나는 하나님의 치료를 믿고 새벽예배를 드리며 기도에 힘을 쏟았다. 그러던 중 2013년에는 대상포진까지 발병했다. 마음의 실망과 몸의 고통은 말로 다할 수 없이 극심했다. 대상포진으로 인한 수포가 등과 복부에 퍼지면서 혼자서는 몸을 움직여 앉거나 설 수 없는 형편이 됐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증상이 또 나타났다. 등이 시리더니 쐐기에 쏘이는 듯한 통증이 일어나 그 고통에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다. 한 여름에도 추위가 느껴져 긴 옷, 때론 두꺼운 옷을 착용해야했다. 뚜렷한 원인도, 치료방안도 찾을 길이 없었다. 그저 기도 밖에 방법이 없었다. 그때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이 생각났다.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이면 이른 아침 안양 집을 나섰다. 여의도에 와서 기도원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타면 마음이 편안했다.

 육신은 고통스러웠지만 하나님이 반드시 치료해 주실 것을 믿고 바라고 생각하며 화요일과 목요일마다 금식 기도했다. 그리고 입술로는 “더 이상 질병은 나와 상관이 없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나는 깨끗이 고침받았다”고 선포했다. 부활의 복음, 신유의 복음 등 순복음의 오중복음과 영혼이 잘 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해지는 삼중축복을 바라보고 기도원을 찾아 기도하면서 차츰 내 몸에는 변화가 일어났다. 뇌경색으로 인해 불편했던 몸이 호전됐다.

 나는 시력이 좋지 않아 26년간 안경을 착용했다. 그런데 몸이 약해지면서 시력 또한 나빠졌다. 안약을 투약해도 눈이 뻑뻑하게 느껴졌고 시야가 흐리며 아팠다. 이 때문에 성경 읽는 것이 무척이나 힘들었다. 그래도 기도를 쉬지 않고 더욱 건강해진 내 모습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며 쉬지 않고 기도했다.

 올 여름 어느 화요일, 기도원에서 예배를 드리던 중 당시 기도원장이셨던 함덕기 목사님의 설교 말씀을 들었다. 목사님은 설교를 마치신 후 신유기도를 하시면서 “눈이 뻑뻑하고 아픈 사람이 있는데 이 시간 깨끗하게 고침받았다”고 선포하셨다. 그 순간 “아멘”하고 고백하자 아프고 흐릿했던 눈이 깨끗해졌다. 한 달 뒤인 9월 기도원에서 함덕기 목사님을 만나 그동안의 일을 말씀드리며 예배 중 눈이 낫는 기적을 경험했다고 말씀드렸다. 함덕기 목사님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씀하시고는 이번에는 시리고 아픈 나의 등을 안수하시며 간절히 기도해주셨다. 그런데 그 순간 그토록 쑤시던 등의 통증이 신기하게도 감쪽같이 사라졌다. 할렐루야! 지난해 이맘때 즈음 나는 등이 시려 두꺼운 솜옷을 입어야 했다. 하지만 등의 통증이 사라지면서 지금은 얇은 티 하나만 입어도 몸에서 열이 날 정도이며 정상적인 몸이 됐다.

 기도원에서 기도하면서 나는 뇌경색의 고통도 사라졌고, 대상포진으로 인해 생긴 흉터는 작은 흔적 하나만 남기고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행하신 기적이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이 나는 “내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고백을 하게 된다.

 지금도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이면 기도원으로 향한다. 나를 고쳐주시고 살려주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다. 나는 기도원에 가면 기도원을 찾은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한다. 내가 응답받은 것처럼 그들이 ‘절대 믿음’ ‘절대 희망’을 갖고 문제 해결을 위해 기도할 수 있도록 중보하기 위함이다. 나에게 기도를 부탁한 이들을 위해서도 간절히 기도한다. 기도원이 더욱 은혜의 성산이 되도록, 여의도순복음교회가 더욱 성령으로 충만해지도록 기도한다. 오직 감사와 찬송을 하나님께 올려드린다.
 


박해숙 권사(장애인대교구) -

고난 중에 감사로 이끄시는 주님


갑작스러운 남편의 뇌경색에 청천벽력
기도할 때 걱정과 근심이 감사로 바뀌어

 나는 늘 신앙생활에 대한 갈급함이 있었다. 하지만 몸이 불편해 엄두를 내지 못했다. 특히 아이를 낳고 나서는 육아에 전념하기에도 벅찼다. 그러다 여의도순복음교회 구역장님의 전도로 교회출석을 마음먹게 됐다. 아이가 4살이 되던 무렵 구역장님의 도움으로 주일예배를 드렸다. 예배를 드리면서 너무 행복하고 큰 은혜를 받았다. 그 후부터 장애인대교구에 등록해 열심히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주일에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려면 교구버스를 이용해야 했다. 당시 우리 집에서 교구버스를 타는 곳까지는 버스정거장 2개 정도 되는 거리였다. 일반인이면 20분이면 걸어갈 거리지만 나는 목발을 짚고 2배 이상의 시간을 들여야 겨우 교구버스를 탈 수 있었다. 이런 나를 남편은 “주변에 많은 교회들을 놔두고 왜 거리가 먼 교회를 가느냐”며 타박했지만 은혜를 사모하는 나의 열정을 막을 수 없었다.

 하루는 장애인대교구 찬양대 연습을 하는 중에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남편은 다급한 목소리로 몸에 마비가 찾아온 거 같으니 빨리 와서 도와달라고 말했다. 깜짝 놀라 황급히 집에 오니 남편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고 몸의 한 쪽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병원으로 옮겨진 남편은 뇌경색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나는 “하늘이 노랗다”는 말의 의미를 그 때 이해했다. 나도 몸이 불편한 상황에서 남편마저 뇌경색이 찾아왔으니 그냥 눈물만 나오고 하나님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중환자실로 옮겨진 남편을 두고 의사는 “뇌 내 혈관이 좁아져 일어나는 증세로 여러 가지 상황을 보아야 하겠지만 100% 완치는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기도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교구 식구들에게도 기도를 부탁하고 나는 하나님께 매달렸다. ‘하나님 어떻게 해요. 도와주세요. 하나님 살려주세요’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은 내게 ‘너 근심 걱정 말아라∼ 내 너를 지키리∼’라는 찬송을 들려주셨다. ‘그래요, 하나님만 믿고 걱정을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다짐하고 남편이 호전될 것을 바라보고 기도했다. 그렇게 기도가 바뀌자 그 날부터 남편이 급속도로 좋아지기 시작했다. 특히 남편은 강한 의지를 갖고 재활운동에 매달렸다. 간병인이 자제를 시킬 정도로 열심히 했다. 비록 지금도 목발을 필요로 하지만 혼자서 거동이 가능할 정도로 회복됐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거주하고 있던 집은 우리에게 너무 불편했다. 그래서 새 장막을 위해 기도했다. ‘하나님 지금 사는 집은 너무 힘들어요’라며 매일 노래를 부르듯 하나님께 졸랐다. 임대아파트를 신청했는데 몇 차례 당첨되었지만 그 아파트들은 교회에서 너무 멀었다. 나는 다시 ‘하나님! 교회와 가까운 집을 주셔야 남편과 교회를 가지요’라며 기도했다. 그렇게 기도를 한 결과 10년 만에 하나님은 영등포에 임대아파트를 주셨다. 할렐루야.

 영등포로 이사 온 후 남편도 주일예배에 참석하고 있다. 병원에 입원해 있을 당시 문병 왔던 목사님과 약속을 했다고 한다. 좋은 아파트에 당첨되면 교회에 가겠다고. 아마도 하나님이 남편의 말을 들으셨던 것 같다.

 나는 믿음생활하는 것이 너무나 좋다. 순간순간 고난도 있었지만 돌아보면 그런 고난마저도 감사하게 된다. 그 고난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바라기는 믿지 않는 양가 친척들까지 모두 구원을 받길 바라며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정리=정승환 기자


이연용 집사(여의도순복음안산교회) -

수 십년 간 앓고 지낸 두통 한번에 사라져

금요철야예배 드리며 치유의 소망 품어 
목사님 안수 기도 중 성령의 기적 일어나


 원래 나는 교회나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이 살았다. 시집오기 전에는 불교이면서도 점을 보는 것을 좋아해서 많이 다녔었다. 그런데 남편과 열애 끝에 결혼을 하려고 보니 시어머님도 남편도 예수님을 독실하게 믿는 기독교 가정이었다. 남편을 따라 나도 교회를 다녔다. 그때는 말씀도 잘 모르고 믿음도 생기지 않아서 다니다 말다를 반복했다.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는 항상 나도 교회를 다녀야겠다는 생각이 있어서 이 교회 저 교회 동네 여러 교회들을 다녀보고 이내 시들해졌다. 그러다 5년 전 지인에게서 순복음교회를 다녀보라는 말을 들었다. ‘성령이 충만한 교회’라는 말을 듣고 왔는데 예배에 참석하고 말씀을 들으며 조금씩 하나님에 대해 알게 되고 교회 출석도 꾸준히 하게 됐다.  

 사실 나에게는 초등학교 때부터 원인을 알 수 없는 두통이 있었다. 약국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는 두통약을 하루에도 5∼6알씩 먹어야 했다. 약을 계속 먹으니 약이 듣지를 않아서 다른 두통약으로 바꿔가면서 결국 지난해에는 가장 독하다고 평이 난 약을 먹다가 그마저도 내성이 생겼는지 효과를 볼 수가 없었다.

 당연히 두통이 시작 된 때부터 병원에도 다녔다. 시간이 날 때마다 내 병명을 밝혀줄 새로운 병원과 의사를 찾아 헤맸다. 병원에서 각종 검사를 받고 의학 기술이 발달 돼 새로운 검사 기기가 생겨 검사를 받아도 나를 괴롭히는 두통의 원인을 알아 낼 수 없었다. 지난해부터는 진통제를 복용하는 것 외에 신경외과 약도 같이 먹었다. 병원에서 MRI 촬영을 했는데 두통의 원인은 찾아낼 수 없었지만 뇌혈관이 조금 막힌 것을 발견했다. 그 약을 먹으면서 생각지 못한 증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약을 먹고 나면 정신이 맑지를 않았다. 저녁에 약을 먹고 나면 약 기운에 취한 듯 아무것도 못하고 잠이 들었다. 한번은 어딘가를 가다가 갑자기 정신이 들어 길 한복판에 멈춰 섰는데 내가 어디를 가려고 했었는지 몰라 몹시 당황한 적도 있다. 혹시 내가 치매에 걸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덜컥 겁이 났다.

 멈추지 않는 두통과 약의 부작용으로 인해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막연히 금요철야예배를 참석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담임 김유민 목사님의 안수기도를 받으면 고통이 멈출 것 같다는 소망이 생겼다. 그전에는 일을 하기 때문에 피곤하니까 금요철야예배를 갈 수 없었는데 수십 년 간의 고통을 하나님께서 고쳐주실 것을 믿고 나을 때까지 계속 다니기로 마음에 결단을 했다. 매주 금요철야예배를 드리면서 기도로 하나님께 나의 고통을 말씀드렸다. 그리고 세 번째로 금요철야예배에 참석했을 때 통성기도 시간 중 안수기도를 받고 싶은 사람은 강대상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그래서 담임 목사님께 안수기도를 받게 됐다. 기도를 받는 순간 기도를 받던 내가 한 순간에 쓰러져 버렸다. 몇 분 후 나 스스로 깨어났을 때는 목사님을 비롯해 성도들이 나를 위해 기도를 해주고 있었다. 창피한 생각이 얼핏 들어 일어나 나가려는데 목사님께서 다시 안수기도를 해주셨다. 깨어난 순간부터 놀랍게도 머리 속이 깨끗이 맑아지고 상쾌해 진 것을 느꼈다. 불같은 성령의 임재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됐다. 그 즉시로 먹던 약봉투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벌써 5개월가량이 지났는데 그 이후로도 머리에 두통은 없고 항상 맑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나는 나에게 일어난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네 분들도 모두 내가 어떻게 약을 먹고 살았는지 다 아시기 때문이다. 이제는 약을 하나도 먹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다 보면 저절로 전도가 된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기적을 체험하다니 놀랍고 감사하다. 수 십 년 동안 누구도 고칠 수 없었던 두통을 고쳐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과 감사를 드리고 싶다. 
 


이원재 집사(영등포대교구) -

‘오직 주만’ 의지했을 때 삶에 기적 체험

뇌출혈로 죽음의 위기서 살려주신 주님
하나님 영광과 영혼구원 위해 늘 최선


 나는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 약을 줄곧 달고 살았다. 수많은 잔병치레는 물론 큰 수술도 몇 번했지만 지금까지도 아픈 곳이 많고 밥도 제대로 먹기 힘들 정도다. 어머니는 생전에 내게 “네가 밥 한 끼 제대로 먹는 걸 보고 싶구나”라고 말씀하셨을 정도다. 6년 전 어머니를 천국에 보내고 늘 효도 한 번 제대로 못한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 중에 ‘어머니께 못한 효도를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대신하라’는 마음에 감동이 왔다. 그래서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신다는 전도에 매진하게 됐다. 비록 몸은 성치 못해도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가능했다. 어머니를 생각하며 열심히 전도한 결과 교회에서 주는 전도상을 두 차례 수상하기도 했다.

 지난해 2월의 어느날 뇌출혈로 쓰러져 그만 병원에 입원하게 됐다. 남편의 말에 의하면 당시 내가 갑자기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와중에도 새신자들을 챙겨 교회에 보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병원으로 옮겨져 이튿날 다행히 수술을 잘 마칠 수 있었다. 수술 후 의사는 내 상태를 보면서 “뇌출혈 후 3시간 내에 수술을 해야 살 수 있는데 24시간이 지나서 수술을 했음에도 살아있는 것이 기적이다”라며 놀라워했다. 남편을 통해 내가 수술을 받는 중에 많은 분들에게 중보기도를 부탁했다고 한다. 교구식구들은 물론 금요성령대망회나 기도원에도 연락해 중보기도를 요청했었다며 당시 매우 시급한 상황이었음을 알려주었다. 나는 하나님이 아직 내가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으므로 살려주셨다는 것으로 생각하고 앞으로 더욱 전도에 매진할 것을 다짐했다. 실제로 올해 전도에 열심을 다한 결과 매 달 한 분을 교회에 등록시키고 있다. 새신자교육을 수료할 때까지 함께 예배도 드리고 남편의 도움으로 집에서 교회까지 다시 교회에서 집까지 모셔다 드리고 있다.

 나와 우리 가족들은 지난해 말 또 한 번의 기적을 체험했다. 11월 어느 날 금요성령대망회를 가기 전에 막내아들과 전화통화를 했는데 아직도 퇴근을 못하고 야근 중이었다. 어서 들어가라고 재촉하며 전화를 끊었는데 예배를 드리고 오니 며느리로부터 아들이 쓰러졌다고 전화가 왔다. 놀란 마음을 다스리며 병원으로 달려갔는데 심장의 혈관이 터져 수술을 해야 하고 생존율이 30%도 안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먼저 하나님께 기도했다. 수술이 진행되는 동안 ‘올해 초 저를 살려주신 하나님, 아들도 살려주세요’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8시간이 걸린다는 수술은 5시간만에 끝났고 수술 후 8시간 후에나 깨어난다는 아들은 1시간만에 의식이 돌아오는 기적이 일어났다. 다음날 일반병실로 옮긴 아들을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살려주셨다는 확신이 들었다. 마침 특별새벽기도기간이라 나는 매일 새벽에 교회에 가서 아들의 회복을 위해 기도했다. 그 결과 아들은 하루가 다르게 회복세를 보이더니 생존율이 낮다는 의사의 예측과는 달리 열흘 만에 건강하게 퇴원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나는 감사할 뿐이다. 내가 늘 부르는 찬송인 ‘주 없인 살 수 없네’는 정말 가사 그대로다.

 작년 수술 후 나는 3개월에 한 번 CT촬영을 하고 있다. 반대쪽 뇌에도 이상증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감사할 수 있는 것은 늘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나와 아들을 살려주신 것은 물론이려니와 늘 전도대상자를 보내주시고, 남편 이성빈 집사도 “아내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일이다”라며 항상 함께 전도하고 차량봉사를 해주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그러했듯이 나도 가족들과 형제들을 위해 늘 기도하고 천국가는 그 날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매진하겠다. 또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건강주실 것을 믿는다.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 할렐루야.
 


방상훈 집사(양천대교구) - 하나님 믿으니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파더스드림에서 봉사하며 자신을 돌아보게 돼
모범적인 신앙인 되어 전도의 사명 감당할 것

 

나는 물질적으로 지원만하면 가장의 소임을 다한 것으로 생각했던 아버지였 다. 여행으로 나만의 시간을 가지는 것 정도는 내 삶에 대한 보상이라고 여기며 생활했다. 아들의 수능이 몇 개월 남지 않아 중요한 시기니 가족들과 함께 있어달라는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국 친구들과 해외로 골프여행을 떠났다. 가족보다 운동이 더 좋았고 친구가 더 우선이었다. 여행을 다녀오고 2개월 후 나는 또다시 인도네시아로 유럽으로 친구들과 여행을 떠났다. 한 번 가정을 벗어나자 두 번 세 번은 문제도 아니었다. 내가 친구들과 여행을 갈 때마다 아내는 나에게 연거푸 실망했고 심지어 외도를 의심하는 등 부부 간의 신뢰는 금이갔다.

 예수님을 잘 믿는 아내는 아들들이 어렸을 적부터 교회를 데리고 다녔다. 나는 운전기사 노릇을 하며 날이 좋으면 밖에서 어슬렁거리고 날이 추우면 교회에 들어와 목사님들의 설교를 평가했다. 아내는 늘 아버지의 기도가 중요하다며 나를 교회로 인도하려 했지만 그럴수록 타종교 집안에서 자라온 나는 교회에 이질감이 느껴지고 부담스러웠다.

 아내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아버지교육 프로그램인 파더스드림을 신청했다고 말했을 때도 처음에는 질색팔색했다. 아내의 권유에 어쩔 수 없이 참여하게 된 파더스드림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 좋아하는 나로서는 다른 아버지들을 만나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어느 기업의 특강들보다 훨씬 좋게 느껴졌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는 사랑과 감사를 외치면서도 교회 밖에서는 술, 친구, 운동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아내에게도 여전히 그런 나를 이해해줄 것을 강요했다. 내가 이러한 나의 이중성에 부끄러움을 가지게 된 것은 파더스드림에서 봉사를 하면서부터였다. 참가자들의 멘토 역할을 하게 됐는데 내가 먼저 변화 되지 못했으니 떳떳하게 조언해주기가 어려웠다. 사회생활을 통해 익힌 말솜씨와 서글서글한 인상으로 하루하루 봉사를 이어갔지만 신앙적인 질문을 해올 때면 내가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답을 해줄 수가 없어 부끄러웠다. 그리고 교회에 일찍 나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기쁨으로 봉사하는 봉사자들을 보고 집에 간 날에는 그 잔상이 하루 종일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세상이 주는 기쁨으로는 만족되지 않았던 삶이 교회에서 넘치도록 누릴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하나님을 알고 싶다는 생각으로 남성 예배에도 참석하고 중보기도에도 참여했다. 여태까지 내 삶에 만족하지 못한 채 사회에서의 나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서만 쫓기듯 살아왔는데 교회에서 비로소 만족감을 느끼자 점점 내 것을 포기하게 됐다.

 나의 변화는 평생 타종교를 믿어온 부모님마저도 변화시켰다. 아들이 먼저 전화를 걸고 포옹을 하자 부모님은 교회에 관심을 보이며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셨다. 감사하게도 부모님뿐만 아니라 내 주변에는 전도할 대상자들이 수두룩하다. 회사에서 은퇴하고 그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세상에서 삶을 허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는 교회에 나오라고 말한다. 교회에서 얻는 기쁨과 감사를 함께 누리자고. 나는 누군가 나의 모습을 통해 전도될 수 있음을 믿는다. 앞으로도 모범적인 신앙인이 되기 위해 늘 내 자신을 되돌아보며 말씀과 기도로 나아갈 것이다.


김경선 집사(순복음강북교회) - 절망의 상황에서 좋으신 하나님 의지해 승리
태아의 다운증후군 증상 소견에 주님께 간구
기도에 힘쓰며 건강한 아기 출산 기적 체험


 결혼한 지 6년만에 기다리던 아이를 갖게 됐다. 유산의 경험이 있어서 기도하며 기다린 터라 우리 가족은 무척 기뻤다. 더 늦어지기 전에 아이를 갖고 싶어 인공수정을 했는데 두 차례의 시도 만에 임신이 된 것이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5주차에 다시 유산을 하게 됐다.

 너무 마음이 아파 괴로워하며 지내다 지난해 7월 시험관 아기 시술을 했다. 인공수정을 할 때는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았는데 시험관 시술을 시작하면서 교구활동도 열심히 하고 주변 분들에게 중보기도도 부탁하며 하나님께 매달렸다. 첫 시술이 성공해 임신을 하게 됐다. 내 생일날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우리 부부는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선물이라며 기뻐했다. 태아가 쌍둥이라는 것을 알고 교구식구들도 모두 기뻐하셨다.

 임신 초기였던 7주 때 임산부가 조심해야 하는 고양이기생충인 톡소플라즈마 양성반응이 나와 걱정이 됐다. 7주차부터 하혈을 하고 12주, 14주차에도 하혈을 해 응급실에 가기도 했고 2주동안 입원한 적도 있다. 호흡기 질환으로 다시 입원한 적도 있어 임신기간 동안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그런데 20주 차에 우리 부부에게 큰 시련이 왔다. 12주에 정밀 검사할 때는 아무 이상이 없었는데 20주에 받은 정밀 초음파에서 쌍둥이 중 한 아이의 코뼈가 안보인다며 다운증후군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의사는 “엄마의 잘못이 아니니 자책하실 필요 없고 남편하고 오면 다시 설명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큰 충격을 받고 진료실 밖으로 나와 엉엉 울었다. 만약 사실이라 해도 하나님이 주신 아기니까 잘 키워야지 생각했지만 눈만 뜨면 눈물이 났다. 재검을 받기위해 다른 유명한 산부인과를 찾아갔다. 지난번과 같이 아이의 코뼈가 보이지 않았다. 담당교수는 다운증후군이라 확신할 수는 없지만 선택적 낙태 시술을 고려해보라며 다른 병원을 추천했다. 낙태를 선택할 수 있는 시간조차 1주일 밖에 남지 않았다. 양수검사부터 다시 받아보려면 두 아이를 같이 검사해야 하는데 이미 검사시기도 한참 지나 정상적인 다른 아이에게도 위험한 일이었다.

 우리 부부는 병원에 가지 않고 검사도 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니까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고 나아가기로 했다. 릴레이금식기도를 하며 하나님께 매달렸다. 창조의 하나님이시고 능력의 하나님이시니 지금까지 기도에 응답해주신 것처럼 아이도 좋은 선물로 주실 거라고 기대했다. 남편도 담대한 믿음으로 하나님이 분명 건강한 아이를 주실 것이라고 고백했다. 임신기간 내내 초음파를 하면서 계속 코뼈가 보이는지 확인했지만 출산 전 마지막 초음파에서도 끝까지 코뼈가 보이지 않았다.

 출산 전날까지도 새벽에 잠을 못잤다. 과연 건강한 아이가 나올지 너무 떨렸다. 5월 12일 한울, 하람이가 태어났다. 코뼈가 안보이던 아이가 둘째 아이 하람이(사진 오른쪽)인데 주님의 은혜로 건강하게 정상으로 태어났다. 신생아실에서 정밀 검사를 한 의사 선생님이 다른 신생아와 다른 점이 없다며 정상이라고 했다. 나는 너무 감사해 눈물 밖에 나지 않았다. 어떻게 이렇게 건강한 아이를 주셨을까 가슴이 벅차 눈물만 났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크게 느낀 것이 있다. 중보기도의 힘이 대단하다는 것이다. 내 일처럼 다같이 진심으로 기도해주신 교구 분들에게 너무 감사했다. 그리고 생명의 소중함을 깊이 깨달았다. 6개월이 된 두 아이는 모두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 날마다 쑥쑥 커가는 모습을 보고만 있어도 감사해 눈물이 난다. 하람이는 콧날도 오똑해 보는 사람마다 예쁜 코를 가졌다고 칭찬한다. 키와 체중도 표준 보다 크고 많이 나간다. 모두 하나님이 주신 은혜다. 많은 기도 속에 태어난 만큼 이름처럼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며 하나님만 증거하는 아이로 잘 자라주길 기도한다.
 


유방재건수술 통해 하나님 사랑 깨달아 -

이혜선 권사(여의도순복음신안산교회)

 나는 5년 전 유방암 수술을 받았다. 항암·방사선·표적치료 등 2년에 걸친 치료 과정을 겪으면서 힘들 때마다 “내 탓인데, 누굴 원망해. 어쩌겠어!”라며 자조하게 됐고, 그럴 때면 슬픔이 밀려왔다. 

 유방절제수술 후 시간이 지날수록 허리 측만증세(척추가 정면에서 봤을 때 옆으로 굽은 것)가 왔고, 갈비뼈 3개가 금이 가는 등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그래서 의사와 유방재건수술에 대해 상담하니 의사는 방사선 치료로 피부가 얇아져 가슴 쪽 피부는 하나도 쓸 수가 없고 다른 피부와 근육을 이식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또 그동안 재건 수술이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못했는데 올해부터 적용가능하다며 본인 부담이 적으니 수술하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바로 가족과 의논하고 수술 스케줄을 잡았다. 하지만 언니는 수술 위험이 크다며 더 기도해보자고 했다. 때마침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에서 추석 축복성회가 열려 언니와 함께 기도원을 찾았다. 예배 중 설교하셨던 목사님을 통해 하나님이 여호수아 1장의 말씀을 레마로 내게 주셨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 말씀을 듣는 그 순간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데 지금까지 내가 왜 걱정한거지? 난 그냥 감사만 하면 되는데…’라는 생각과 함께 마음에 평안이 찾아왔다. 그 후로 나의 기도는 ‘감사’만이 나왔고, 사람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나의 수술을 담당할 의사의 손길과 눈을 주관해 주시길 간구했다.

 그런데 수술 전날 밤, 또 다시 걱정이 밀려왔다. 그때 에스겔 37장의 ‘마른 뼈 사건’이 묵상됐다. “마른 뼈들이 서로 연결되고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가죽이 덮이고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살아나더라!” 아멘! 이스라엘을 향하신 말씀이지만 그 순간에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었고, 레마의 말씀이었다. 

 다음날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수술실에 들어갈 수 있었고 10시간의 수술을 끝내고 회복실을 거쳐 병실로 왔다. 마취에서 풀리면 무통주사를 맞아도 몸이 아프다고 하는데 나는 예수님이 쓰신 가시관과 갈퀴 달린 채찍으로 맞으시는 고통을 생각하면서 ‘이 정도 아픈 건 별거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나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었다. 새벽 꿈에 최용우 담임목사님이 병실에 들어오셔서 “새벽 기도를 하고 오니 춥네!”하시며 보호자 침상에 누우시길래 흐트러진 침상을 정리하고 내 이불을 덮어 드렸다. 그리고 꿈에서 깼는데 이상하게도 수술 통증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나중에 교구 목사님을 통해 담임 목사님께서 나를 위해 간절히 기도해주셨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양떼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며 기도해주신 목사님의 사랑에 감격했다.

 수술을 집도했던 의사 두 분은 수술 후 내가 다른 환자와 달리 편안해하는 것을 보고 신기해했다. 그때마다 “나는 크리스천이라 기도했다. 선생님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병실에 누워 있는 동안 눈만 감으면 시편 23편이 입에서 계속 나왔다. 조용기 목사님이 설교 때마다 시편 23편과 91편을 아침저녁으로 외우라 하셔도 솔직히 관심이 없었는데 그때는 시편 23편이 내 입술과 생각 속에서 떠나지 않고 계속 나왔다.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으로 나를 치료하고 계셨다.

 보통 수술 후 회복까지는 15∼20일 정도 걸린다는데 나는 하루가 다르게 회복되어갔다. 어떤 이는 한 달이 돼도 피주머니를 떼지 못해 퇴원을 못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나는 수술 열흘 만에 병원에서 더 이상 해줄 것이 없다며 퇴원을 허락했다. 의사는 농담으로 “뭐가 그리 바쁘냐”며 빠른 회복을 신기하게 생각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대로, 야훼 라파 치료의 하나님을 체험케 하시고 말씀 위에 나를 견고히 세워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었다.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다. 지금까지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는데 앞으로도 어떤 일을 주시고 간증하게 하실지 기대가 되고 설렌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신은혜·최대석 성도(대학청년국 카리스선교회)

폐동맥 고혈압, 생사의 기로에 섰던 신생아 살아나

출산 중 양수 많이 마셔 폐 감염으로 위중
2주라는 고비 넘기고 건강 회복의 기적

 나는 둘째 아이를 잉태하고 직장일과 큰 아이 양육을 하면서도 건강하게 임신 기간을 잘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출산 예정일 한달 전 한쪽 얼굴이 마비가 됐다. 한의원에 가니 침 치료 등으로 치료에 한달이 걸린다고 했다. 출산 예정일 전까지 충분히 회복이 될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로부터 1주일 뒤 검진차 산부인과병원에 갔는데 이미 자궁이 2cm가 열렸다며 바로 출산을 하자고 했다.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인데다 얼굴은 마비가 되어 있으니 의료진에게 힘을 제대로 못줄 것 같다고 말했다. 병원에서는 그래도 첫째를 자연분만 했으니 시도하다가 어려우면 제왕절개를 하자고 결정을 내리고 분만을 시작했다. 힘을 잘 못주니 아이가 나오는 것이 지체가 되는 듯 했다. 7월 6일 2시간 반만에 예쁜 딸 보배를 출산했다. 하지만 아이가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양수를 많이 먹고 나왔다. 계속 양수를 게워내는데도 의료진들은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고 말했다. 그 말을 믿고 아이에게 젖을 물렸지만 아이는 물려는 생각도 안하고 계속 잠만 잤다. 12시간까지는 못 먹어도 괜찮다고 했지만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다고 생각이 들어 의료진에게 이야기 했다. 검사를 해보더니 아기가 깊은 호흡을 스스로 못한다고 했다. 산소포화도가 떨어지면 집중치료가 가능한 대학병원으로 가자고 하셔서 상태를 살펴보다가 결국 대학병원으로 옮겼다.

 폐동맥고혈압이라는 병명이 나왔다. 폐가 감염 돼서 상태가 좋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이런 경우 2주 안에 판가름 날거라고 말했다. 하나는 엄마 품에 안겨서 집으로 가던지, 또 하나는 하늘나라로 간다는 것이었다. 아이는 아무것도 먹지 못해 기관 삽입을 하고 수액으로 영양을 공급 받아야했고 소변 배출이 원활하지 않아 얼굴이 심하게 부었다. 얼굴에 주사바늘을 꽂아 물을 빼냈는데 1㎏이 나온적도 있다.

 아이를 위해 우리 가족은 모두 기도에 집중했다. 우리 부부가 봉사하는 남미선교회를 비롯해 교회 성도들에게도 기도를 부탁했다. 그리고 2주가 거의 다 되가 던 그때 아이는 생사의 기로에 서있었다. 우리 소식을 들으시고 7월 17일 이영훈 목사님께서 병원으로 직접 찾아와 주셨다. 신생아 중환자실 안으로 들어가거나 아이를 데려올 수 없었지만 목사님은 병실 밖에서 보배를 위해 기도해 주셨다.  

 2주가 지난 뒤에도 보배는 그 작은 몸으로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60일이 됐을 때 집중 치료실에서 나왔다. 기관 삽입을 빼고 우유를 먹였다. 20cc정도를 먹였는데 게워냈다. 유문협착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병원을 옮겨보니 유문협착과 탈장도 발견 됐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 병원에서 응급으로 바로 입원하고 당일 수술을 받을 수 있게 됐다. 두 가지 수술을 동시에 받고 1주일 후 퇴원했다.

 퇴원 후에도 입원 했었던 두 병원을 오가는 시간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안정을 찾아 아기는 무럭 무럭 자라고 있다. 비록 간수치가 높아 꾸준히 약을 먹이고 각막 쪽 이상이 예상돼 한번씩 검진을 받고 있지만 이 역시도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평안함 가운데 아이를 위해 더욱 기도하고 있다.

 보배를 통해서 우리 가족이 기도할 수 있게 해 주셔서 하나님께 감사하다. 사실 너무나 힘든 상황에서 감사하는 것이 맞는 건지도 모르겠고, 목숨만 살려달라고 울부짖으며 기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생명은 하나님께 속하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길 수밖에 없었다. 첫째 때는 태교도 많이 하고 기도도 많이 해주었는데 보배를 가졌을 때는 직장 일과 살림, 큰아이 양육 등 바쁘다는 핑계로 태명도 별로 불러준 적이 없었다. 태중에 있었을 때 기도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고 보배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기도 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지금도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분들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고 기도하시길 바란다.

 


백순길 안수집사(순복음강남교회) -

물질 보다 귀한 생명 얻어

사업실패, 건강악화 속에 하나님 은혜 깨달아
 내년이면 칠순이 되는 나는 큰 병원 한 번 가보지 않을 정도로 건강만큼은 자신하면서 살아왔다. 사회적으로도 40여 년간 특수인쇄 분야에서 쌓은 노하우는 대한민국 5위 안에 들 정도로 인정을 받았다. 나는 대기업에서 필요로 하는 특수기술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독점계약을 맺으면서 큰 수익을 올렸다. 공장 증축과 부동산 매입 등 사세 확장을 하면서 자신감이 넘쳤다.
 승승장구 하리라 믿었던 나의 예상과는 달리 대기업과의 계약은 1년 만에 종결되고 말았다. 심지어 대기업은 나와 다른 회사와의 계약 수주를 차단하면서 더 이상 사업을 할 수가 없게 만들었다. 비싼 수임료의 변호사를 선임해 법적으로 호소도 해보는 등 그 억울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기에 나의 삶은 악몽 같기만 했다.

 나는 20여 년간 남선교회에서 봉사하며 주님 앞에 부족함 없는 크리스천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회사와 공장 그리고 집까지 나의 모든 걸 잃어버린 후에는 하나님을 원망하기에 이르렀다. 심지어 우리 가정에 닥친 위기로 인한 스트레스로 아내는 뇌출혈로 쓰려졌다. 나는 인쇄 관련 회사에 취직했고, 누워있는 아내의 병수발을 함께 해 나갔다. 너무 힘들 땐 기도도 할 수 없었다. 심신은 지쳐갔고 결국 지난 3월 7일, 거래처와 미팅 중 극심한 어지럼과 구토증으로 인해 쓰러졌다. 그 뒤로 수원의 한 대학병원 집중치료실로 옮겨졌고 의식만 있을 뿐 몸을 가눌 수는 없었다. 나의 병명은 ‘파종성혈관내응고’. 혈전과 출혈로 주요 장기가 마비되면서 사망할 수도 있는 희귀병으로 판명됐다.

 입원한 날부터 아들과 딸 그리고 교구 전도사님과 강남7교구 식구들은 릴레이 중보기도를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장애인선교회에서 나와 함께 봉사하시는 남성우 집사님은 아침 저녁만 면회가 가능한 중환자실로 하루도 빠짐없이 문병하며 중보기도 해주셨다.

 몸 속 출혈이 계속 됐고 지혈은 되지 않았다. 혈변과 저혈압, 고열이 지속됐다. 체온을 내리고자 내 몸 주변은 얼음으로 채워졌지만 나는 의식을 잃었기에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의료진은 가족들을 불러 마지막 준비를 시켰다. 중환자실에서 나흘 째 되던 밤, 꿈을 꾼 것이었을까?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의 삶이 필름처럼 스쳐 지나갔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제 능력과 돈에 의지하며 건강함도 자만했던 것을 회개합니다. 주님 저를 제발 살려주세요”라며 나는 간절히 회개 기도했다. 그리고 아픈 아내를 돌봐야 하고 아들과 딸도 결혼시켜야 한다며 주님께 매달렸다. ‘주님이 내 기도를 들으셨구나’하는 안도감이 느껴질 즈음이었을 것이다. 멈추려던 나의 맥박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모든 의료진들은 내가 살아난 것을 ‘기적’이라고 표현했다.  

 나는 그렇게 새 생명을 얻은 후 58일 만에 퇴원했다. 나의 빠른 회복 속도에 사람들은 매우 놀라워했다. 사업실패 이후 물질만 중요시한 지난 삶을 회개하고 온전히 주님만 바라보는 삶을 살 것을 다짐했다. 그래서 교회로 돌아와 장애인선교회 봉사도 다시 시작했다. 내 몸이 아프고 보니 몸이 불편한 아이들과 부모들의 심정이 더욱더 공감이 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나를 위해 기도해준 가족과 교구 식구들에게 지면을 빌어 감사드린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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