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희 권사(관악대교구)-

아픈 허리를 치료하신 하나님

30여 년 넘게 허리통증으로 일상생활 불가능
오산리 기도원서 기도하니 치유 기적 임해

 나는 35년 전 딸을 낳은 뒤 이튿날 병원에서 뒤로 넘어지는 사고를 당한 이후부터 허리에 심한 통증을 안고 살았다. 허리가 아프다보니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어, 허리에 좋다는 곳은 다 찾아가서 침도 맞아보고 약을 먹어보기도 했지만 차도가 없었다. 1999년에 종합병원에서 MRI를 촬영하니 척추협착증이라는 병명을 처음 들을 수 있었다. 신경이 눌려 걷기도 어려울 것이라며 의사는 수술을 권유했다. 하지만 차마 수술을 받을 용기가 없어 수술대신 기도로 하나님께 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던 2013년 11월 무렵 다리에도 통증이 오기 시작했다. 얼마나 통증이 심한지 3분 이상을 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작은 의자를 들고 다니며 의자에 앉아 쉬었다, 걷고, 쉬었다, 걷고를 반복해서 겨우 목적지까지 갈 수 있었다. 평소 다니던 병원에서 집중치료를 시작했지만 효과가 없어, 전국에서 허리와 다리에 좋다는 병원 등은 모조리 찾아가 치료를 받아 봤지만 증상은 갈수록 악화될 뿐 효험이 없었다. 나중에는 진통제와 수면제를 먹어도 통증 때문에 잠을 잘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2014년 말쯤 대형병원에서 정밀검사를 해보니 척추협착증은 물론 디스크에 척추전방위증, 퇴행성관절염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집중치료를 시작하며 병원에서는 수술을 권유했고 결국 수술을 결정했다.

 수술 날짜가 다가오자 나는 또다른 문제에 부딪혔다. 평소 마취가 풀리지 않아 고생한 적이 있다 보니 마취에 대한 두려움과 더불어 수술로 인해 생길 수 있다는 후유증 등으로 수술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수술을 앞두고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을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마침 기도원에서는 최자실목사기념축복금식성회가 진행 중이었다. 남편과 함께 2박 3일을 작정하고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 손길을 주님이 인도해주실 간절히 기도했다. 그런데 성회 중 강사 목사님이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에 대한 설교를 하시는데 그 말씀이 레마로 다가왔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 제 척추를 낫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다. 수술이 잘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다가 어느새 질병을 치료해달라는 기도로 바뀐 것이다. 그리고 나는 말씀에 의지해 수술을 포기할 것을 결심하고 감사헌금을 드렸다. 막상 집으로 돌아와 수술안내 문자를 받고 보니 또 마음이 흔들리고 두려움이 다가왔다. 불안한 마음을 부여잡고 새벽기도를 드리러 교회에 갔다. 그런데 당시 강사였던 함덕기 목사님이 두 마음을 품지 말라는 말씀을 하시며 용기를 주셨다. 그래서 나는 다시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다시 남편과 함께 기도원으로 향했다.

 그 날을 잊을 수가 없다. 11월 13일 새벽기도시간이었다. 그 날 새벽에 또 한번 홍해가 갈라지는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말씀에 힘입어 부르짖어 기도했다. 나는 방언으로 기도를 쏟아내는 와중에도 허리가 너무 아파 성전 바닥을 구르면서도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보다 못한 남편은 “하나님이 수술하고 계신다”며 나를 끌어안고 간절히 몇 시간을 기도했다. 그런데 그렇게 한참을 기도하고 나서 정신을 차려보니 허리통증이 말끔히 사라졌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할렐루야!

 인근 주변의 사람들은 멀쩡해진 나의 모습에 모두들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깜짝 놀란다. 나는 간증을 하며 살아있는 하나님을 전하고 있다.

 요즘에는 남편과 등산을 다닐 정도로 건강해졌다. 1년이 지난 2015년 11월에도 남편과 함께 기도원에 가서 또한번 감사기도를 드렸다. 진작 기도원에 갔으면 고생을 덜 했을텐데 라고 후회도 한다. 나를 말끔하게 치료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같이 기도해 준 남편과 중보기도해준 우리 지역 및 교구 식구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앞으로 치료의 하나님을 더욱 간증하고 복음을 전하는 것을 목표로 영혼구원에 매진할 계획이다.


정종화 집사(은평대교구) -

자녀 위해 기도할 때 주님 응답해 주셔

세상만 바라보던 첫째 딸 주님이 인도해 주시고
학습능력 부진했던 둘째 딸 장학생으로 변화돼


 나는 지금까지 한 신앙인으로서 또 한 아버지로서 기도와 말씀 묵상의 삶을 살고자 노력해 왔다. 전도자로서의 사명을 받은 6년 전부터 남선교회에서 회원들과 함께 병원, 경찰서, 군부대 등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 하나님은 열심을 다해 전도하면 할수록 나의 모든 기도에 귀 기울여 주시고 응답해 주셨다.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두 딸 은혜(사진 오른쪽)와 현혜는 무엇보다 소중하기에 항상 두 딸을 위해 기도했다. 큰 딸 은혜는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문제없이 잘 자라주었지만 요즘 젊은이들처럼 교회 보다는 세상 문화를 더 좋아했다. 어렸을 때부터 넓은 세상을 동경했던 딸은 전공분야도 아니고 외국어도 잘하지 못했지만 자신의 꿈을 이루고자 여행사에 취직했다.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열심히 일하면서 어학실력은 좋아졌고 회사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큰 딸은 “일본으로 유학가겠다”고 선언했다. 딸의 마음은 이해가 됐지만 심정적으로 허락하기 힘들었기에 하나님께 기도로 답을 구했다. 그러다 딸이 다니는 회사의 일본 거래처 사장으로부터 직접 전화가 왔다. 평소 딸을 좋게 평가했던 사장님은 “유학생활도 돕고 정착에도 도움을 줄테니 함께 일하자”며 딸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해왔다. 그것도 감사한데 사장님은 일본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큰 딸을 오사카순복음교회로 이끌어 주셨다.

 평소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던 은혜는 내게 “아빠,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신가봐요”라며 앞으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고백했다. 나는 일련의 근심들을 접어두고 올해 9월로 예정된 딸의 유학을 적극 지지하게 됐다.

 둘째 딸 현혜는 언니와는 다르게 어려서부터 학습능력이 다소 부진했다. 고등학교 1, 2학년 때까지 공부엔 뜻이 없던 딸에게 공부 좀 열심히 하라고 야단도 쳤다. 결국 내가 딸에게 기대한 건 ‘무사히 고등학교까지 졸업했으면…’ 하는 것이었다. 현혜가 고3이 되던 2013년, 교회에서 ‘신년열두광주리새벽예배’가 있었다. 그때 이영훈 담임목사님께서는 “자녀가 공부를 못한다고 야단치지 마라. 대신 집중해서 공부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 따라 나는 현혜가 집중해서 공부할 수 있도록 기도하기 시작했다. 목사님의 말씀을 붙잡고 매일 같이 딸의 통학을 같이 하며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또한 현혜가 강한 믿음이 생기길 간절히 기도했다. 현혜도 나의 이런 마음을 알았는지 함께 기도하며 공부에 열중했다. 놀랍게도 현혜의 성적은 점점 좋아지기 시작했다.

 수능시험 당일, 시험을 마치고 나온 현혜는 “아는 문제만 나왔다”며 당당하게 말했다. 딸의 말에 나는 ‘그럴 리가’ 싶었다. 성적이 좋아지긴 했지만 자신만만하게 말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믿음이 부족한 것이었다. 현혜는 19.2대 1이라는 높은 경쟁률을 뚫고 당당히 대학에 합격했으며 4년 장학생으로 학교생활을 마쳤다. 할렐루야.

 아버지의 입장에서 딸들은 늘 부족해 보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이들을 ‘무엇이든 가능한 아이, 무엇이든 최선을 다 할 수 있는 아이’임을 보여주셨다.

 현혜는 “하나님이 저와 아빠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다”라고 고백할 만큼 믿음이 성장했다. 두 딸이 믿음의 아이들로 성장한 것이 가장 뿌듯하다. 평소 조용기 목사님께서 강조하셨던 “바라보고 믿고 기도하면 그대로 이루어주신다”는 말씀을 두 딸을 통해 깊게 체험했다. 바라기는 모든 부모들이 아이를 채근하기에 앞서 먼저 기도하길 바란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신다.      

정리=김진영 기자

 


김양순 집사(종로중구대교구) -

하나님 은혜로 안 들리던 귀 치유받아

10월 기도대성회에 참석해 기적 체험 
지역장으로 섬기며 주님께 순종, 신앙생활 힘써


 2011년에 왼쪽 귀에 메니에르병을 앓게 됐다. 귓속의 내부 압력이 높아져 청각과 전정신경의 기능에 문제가 생기게 되는 병인데 귀가 꽉 찬 느낌과 함께 먹먹함을 느끼고, 잘 들리지도 않아 몹시 괴로웠다. 늘 비행기를 타는 것처럼 멍멍한 상태가 반복됐는데 3개월이 지나자 조금씩 안들리기 시작했다. 병원에 가보니 병이 많이 진행된 상태라 치료를 받아도 차도가 없었다. 왼쪽 귀가 안들리니 오른쪽 귀로 온전히 들어야 하는데 심지어 오른쪽 귓속이 기형적으로 아주 작아 잘 안들리는 상태였다. 나는 내 귀가 기형이라는 것을 알지도 못했는데 이번에 알게 돼 놀랐다. 이비인후과에서 검사하기 위해 넣는 기구조차 들어가기 힘들 정도로 귓속이 작아 귓밥이나 물이 조금만 차도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지역장이기에 구역예배를 드려도 5∼6명이 이야기하면 안 들려 난감할 때가 많았다. 구역식구들에게 말도 못하고 늘 답답한 생활을 해야 했다. 구역식구들이 웃으면 내용을 몰라도 따라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병원에서는 수술을 할 수도 없고 의학적으로는 치료가 어렵다고 했다. 그런데 지난해 10월 16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15 세계평화와 한반도 안정, 희망나눔을 위한 기도대성회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밥 로저스 목사님이 ‘7가지 선포의 기도’를 주제로 특별기도를 할 때 들리지 않던 귀가 치유받는 기적을 체험한 것이다.

 밥 로저스 목사님이 기도하던 그 시간에는 구역식구들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귀 아픈 사람 치료 받을지어다”라는 말씀이 내 마음에 깊게 와닿았다. “나 치료받았네?”하며 한쪽 귀를 막고 들으니 소리가 잘 들렸다. 옆에 앉은 집사님께 “아멘” 해보라고 했더니 아멘 소리가 잘 들렸다. 심지어  병을 앓기 전보다 더 선명하게 잘 들렸다.

 평소 나는 내 귀를 낫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많이 하지 못했다. 병원에서는 이미 고칠 수 없다는 판명을 받았고 구역식구들의 기도제목을 먼저 놓고 기도하느라 내 귀의 치유는 구하지 못했었다. 구역식구들 말 소리를 못들어 너무 답답할 때 “하나님!지역장인데 말 소리를 못 들으니 어떻게 해요 저 낫게 해주시면 안될까요?”라고 두 세 번 정도 기도한게 전부였다. 그런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하나님이 왜 나를 치료해주셨는지 생각해보니 기도대성회를 준비하며 주님께 순종한 마음을 잘 봐주신 것 같다. 한끼금식 희망나눔을 할 때에도 순종한다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섬겼다. 한 명이라도 더 성회에 참석하게 하려고 성회 전날 전화심방을 해서 못간다는 분을 세 분이나 더 모시고 갔다. 내가 귀가 치유받으니 가족들도 모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게 돼 교회에도 나오고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고 있다. 

 나는 35년 전 교회에 처음 나왔을 때부터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했다. 막내 아이가 병명도 없이 한 달 동안 열이 계속 나서 아이의 병을 고치기 위해 교회에 나왔었는데 집에 붙여놨던 부적을 떼고 전도사님의 기도를 받은 날부터 아이가 깨끗이 나았다. 아이가 결핵에 걸렸을 때는 구역예배에 참석한 자리에서 성령을 받은 후 간절히 기도했을 때 치유받았고, 아이가 교통사고를 당해 눈이 안보였을 때도 내 기도에 주님이 응답하셔서 다시 볼 수 있게 해주셨다.

 그 뿐 아니다. 남편이 결핵에 걸려 죽음의 위기에 있었을 때에도 구역식구들과 함께 한달 작정기도를 하고 깨끗이 나았다. 남편은 지금 아주 건강하게 열심히 신앙생활 하고 있다.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시다. 귀머거리가 낫고 벙어리가 고침받는 성경 속 기적이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도 일어난다. 나는 더욱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기도하고 모이기 힘쓰는데 더욱 최선을 다할 것이다. 예배를 드리며 주님을 깊이 만나는 그 시간이 나에게 더없이 소중하다. 우리 좋으신 하나님 덕분에 나는 항상 행복하다. 


김성옥 집사(종로중구대교구) -

나와 남편을 살려주신 좋으신 하나님

뼈를 뚫고 자란 혈관은 ‘기적 중 기적’
절대긍정·절대감사만이 삶의 기적 일으켜   

 나는 신장이 좋지 않아 늘 부어있었다. 신장 뿐 아니라 원인 모를 고통도 늘 나를 괴롭혔다. 지금은 서른이 넘은 딸 미란이가 9살 때였다. 하루는 미란이가 “죄가 많으면 교회에 못 간다는데, 엄마는 무슨 죄를 지어 교회에 못 가?”냐고 물었다. 평소 같으면 흘려들었을 말이 그날따라 내 가슴을 찡하게 했다. 그 때부터 하나님을 알게 됐고, 남편의 결단과 주변 지구역장들의 도움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됐다. 신기한 건 예배를 드리고 나면 아팠던 몸이 좋아진다는 것이었다. 몸이 부어 남자 슬리퍼를 신고, 남편과 딸의 부축을 받아야만 교회에 올 수 있었지만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이 행복했다. 초신자인 나는 하나님을 확실히 믿고 싶어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를 보여 달라’고 기도한 적도 있다. 그때 주님은 꿈을 통해 두 팔 벌려 나를 환영하시며 당신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셨고, 주의 종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나와 동행하시며 내 모든 죄의 짐을 대신 짊어지고 가시기도 했다. 이런 증거로 인해 나는 더욱 주님만 믿고 예배에 집중하게 됐다.
 딸 미란이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5월 5일 연휴에 집에서 빨래를 하는데 갑자기 머리가 아팠다. 방에 있던 남편더러 “와 보라”는 말을 하고선 바로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119 구급차에 실려 대학병원에 도착해서는 바로 수술에 들어갔다. 뇌출혈이었다. 13일 만에 깨어났을 때 살아난 것이 기적이라고 했다. 그런데 수술 후 신경이 눌렸는지 어지러움증이 생겨나 길을 똑바로 걷는 것이 어려웠다. 마음에 빨간 구역장 가방을 들고 다니면 살 것 같아 치유의 하나님을 바라보고 간구하고 또 간구했다. 지금은 깨끗이 나아 누구의 부축도 없이 교회를 편히 올 수 있어 그저 감사할 뿐이다. 우리 가족에게는 오직 감사 밖에 없었다.

 절대긍정 절대감사의 신앙으로 살아가던 우리에게 놀라운 기적이 또 다시 일어났다. 지난해 건강검진으로 뇌 사진을 찍어본 남편은 혈관이 좁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 머리가 아프다는 얘기를 종종했지만 상황이 이런 줄 몰랐다. 뇌경색을 우려해 혈관 확장수술이 그나마 해결책이었지만 수술하기엔 시기적으로 늦었다는 게 의사의 견해였다. 다행히 뒷머리 목 위로 작은 혈관들이 잔가지처럼 나 있어 작은 혈관들의 도움으로 큰 위험은 면할 수 있었다고 의사는 전했다. 우리 가족은 나를 살려주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주께 간절히 기도했다.

 1년이 지나 최근 다시 병원을 찾았다가 우리는 놀라운 소식을 접하게 됐다. 작게 뻗어있던 혈관 중 하나가 뼈를 뚫고 굵고 튼튼하게 자라 머리에 피를 공급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의사는 “깜짝 놀랐다. 의사인 내가 수술을 한다해도 이처럼 정교하게 만들 순 없다. 이건 기적이다”라고 했다.

 그 혈관이 남편의 머리에 충분한 혈액을 공급해 문제없이 지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살아서 우릴 위해 역사하고 계셨다. 이것이 주님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시다. 인자와 자비가 넘치시는 하나님을 믿고 말씀 안에서 순종하며 사는 것만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일 것이다. 남편과 딸 그리고 나는 이러한 하나님을 믿고 절대긍정 절대감사의 신앙생활을 이어가며 주의 복음을 이웃에게 전하겠다. 할렐루야!     

 정리=오정선 기자

 


신경자 집사(마포2대교구) -

원인 모를 고통에 있던 손자를 고쳐주신 하나님

생후 7개월 때 갑작스레 중환자실 입원
절망적 환경 대신 야훼 바라볼 때 치유

 둘째 딸은 36살 늦은 나이에 첫 아들을 낳았다. 2014년 12월에 태어난 나은이는 태어나서 바로 딸과 함께 산후조리원에 있었다. 태어난 지 5일 째 되는 날, 나은이에게 이상 증상이 나타났다. 병원에서 원인을 모르겠다고 해 큰 병원 여러 곳을 갔는데 아무래도 산후조리 과정에서 원인 모를 균에 감염된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치료 후 일단락됐다.

 그런데 아이가 자라면서 어딘가 이상해보였다. 두 아들을 키웠던 큰 딸은 나은이 눈 주위가 이상하다며 병원에 가보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크게 아프다고 보채는 것도 없던 나은이는 마치 아프리카 기아처럼 두 눈에 살이 없고 움푹 들어가 보였다.

 태어난 지 7개월에 접어든 2015년 7월, 나은이를 데리고 동네병원을 찾았다. 병원에서는 대학병원으로 가라는 소견을 써줬다. 신촌 세브란스병원 응급실에 등록했더니 예정된 시간보다 빨리 진료를 받으라고 했다.  아이는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병원에서는 여러 가지 진료를 했다. 특별한 병명을 찾는 게 어렵다고 했다. 다만 약간의 뇌출혈과 두 신장에 물이 찼고 돌이 있다는 등 여러 소견을 내놓으며 몸의 조직을 떼내어 미국으로 보냈다. 결과를 기다리며 나은이는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아직 말도 못하는 나은이를 볼 수 있는 시간은 하루에 두 번, 그것도 부모만 가능했다. 사위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딸과 함께 제대로 먹지도 못하면서 병원에서 생활했다. 나는 아이를 볼 순 없었지만 퇴근하면 바로 병원으로 달려가 아이의 상태를 확인하며 기도했다.

 중환자실에 입원한 나은이를 보더니 사위가 말했다. “어머니, 이제 나은이를 보내야 할 때가 온 것 같아요. 아이가 어리고 체력이 딸려요. 산다는 보장이 없어 보여요. 더 이상 아이에게 고통을 주고 싶지 않아요” 나는 “왜 그런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느냐. 살아계신 하나님께 기도해보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아이를 보내지만 아니라면 살려주시지 않겠느냐. 기도하자”고 강력히 말했다. 그러자 딸이 울며 이야기했다. “엄마, 엄마가 나은이를 못 봐서 하는 말이야. 온 몸에 호스를 꽂고 있는 나은이를 보면 절망적이야. 더 이상은 못보겠어”라며 딸은 통곡했다.

 나는 “눈에 보이는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하늘의 하나님을 바라보자”고 말했다.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면 하늘의 하나님이 반드시 우리 기도에 응답해주실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병원 내 예배실에서 딸과 함께 눈물로 기도했다. 담당 교구장님은 성도들과 기도처에 모여 나은이를 위해 기도해주셨다. 금요성령대망회에서는 철야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이 하나님께 나은이를 위해 간절히 기도해줬다. 우연히 나은이를 볼 기회가 있었다. 정말 나은이는 두 눈이 테이프로 가려졌고 목에 호스 두 개를 비롯해 온 몸에 여러 호스를 꽂고 있었다. 나도 두 딸을 키웠지만 이런 고통스런 장면은 처음이었다. 나는 오로지 하늘의 하나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둘째 딸 내외에게 “우리 믿음을 더욱 강하게 해 주시려고 이런 일이 일어난 것 같아. 우리 마음을 모아 기도하자”고 쉼 없이 위로했다.

 우리의 간절한 기도가 하늘에 닿았나보다. 나은이는 중환자실에 입원한 지 한 달 만에 온 몸의 호스를 빼고 일반 병실로 옮겼다. 할렐루야! 그리고 10월 5일 나은이는 병원에서 퇴원했다. 기도의 힘으로 어려운 고비를 넘긴 것이었다. 한 달 뒤인 11월에는 미국에서 연락이 왔다. 조직 검사 상 아무런 이상 소견이 없다는 결과였다. 하나님께 감사했다. 13개월이 된 나은이는 10㎏ 가까운 체중으로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 현재 화요일마다 통원치료를 받고 있지만 이 또한 하나님께서 완전히 치유해주시리라 믿는다.

 이번 일을 통해 나와 작은 딸 내외는 살아계신 치료의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면서 굳건한 믿음을 얻게 됐다. 바라기는 남편과 큰 사위도 교회에 열심히 출석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 되길 기도한다.


박민지, 김동철 집사(구로대교구)-성령의 임재 속에 아들의 암 4기 완치

“네입을 넓게 열라” 말씀 의지 물질 천배 축복 

 1994년에 인공수정으로 1남 1녀 쌍둥이의 부모가 됐다. 정말 간절히 바랐던 아이들이었기에 행복한 나날이었다. 아이들이 16개월이 되었을 때 감기에 걸려 입원을 했다. 아들에게서 이상소견이 나타났다. 열흘 뒤 서울대학병원 검사결과 신경아세포종 4기였다. 바로 암병동에 입원해 항암치료에 들어갔다. 다섯번의 항암치료 후 수술에 임했다. 1년 반동안 열심히 치료를 받았는데 뼈로 전이가 됐다.

 그때까지 우리 가족은 하나님을 알지도 믿지도 않았다. 부모로서 아무것도 해 줄 것이 없다고 생각한 남편이 그때부터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에서 3일간 금식기도를 하고 왔다. 기도원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를 체험한 남편은 내게도 전도를 했다. 하지만 나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내게는 병원에서 하라는대로 하면 나을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뼈로 암이 전이가 되었다는 사실을 안 뒤 나 역시 방법이 없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마지못해 남편을 따라 교회에 갔다. 그때 큰 고모님이 기도 집회하는 곳에 가자고 하셨다.

 가기 싫었지만 항암치료 단계가 높아져 더욱 고통스러워하는 아들의 고통을 보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갔다. 집회 인도자는 여자 목사님이셨는데 본인이 여의도순복음교회 가서 금요철야예배 중 성령충만을 체험하신 간증을 했다. 이어서 조용기 목사님이 안수해주시고 신학을 하고 주의 종이 된 이야기를 하셨다. 가만히 예배에 참여하며 듣고만 있었는데 그분이 성령께서 이 자리에 아들 때문에 고통받아서 온 성도가 있다고 했다. 몇몇이 일어서기에 그런가보다 했는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람이 있다고 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지목을 받아 앞으로 나아갔을 때 그 자리에서 성령이 임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불덩어리가 내려오는 것을 느꼈다. 일주일 뒤에는 아픈 아들을 데리고 참석했다. 목사님은 하나님께 아이를 긍휼히 여겨 살려달라고 간구하셨다. 그때 우리 부부에게 하나님은 온전한 주일 성수, 가정제단, 온전한 십일조, 새벽기도를 명령하셨다. 그날 이후부터 새벽기도를 다녔다.

 아픈 아이를 업고 두달간 새벽기도를 쌓는 과정에서 뼈를 스캔한 검사 결과를 앞두고 있었다. 검사 결과 발표 당일 주치의를 비롯해 10여 명의 의료진이 그 자리에 함께 했다. 교수님 한분이 선뜻 결과를 말씀 못하시며 고개만 갸우뚱하셨다. 우리를 보시더니 “암이 없어졌어요. 깨끗해졌어요”라고 말씀하셨다. 그 자리에서 나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뒤 회진을 하시던 교수님이 퇴원을 명했다. 그렇게 외래진료도 한달에 한번씩이 3개월에 한번 6개월에 한번 1년에 한번이 되고 완치 판정을 받게 됐다.
 지금 스물세살인 아들은 현재 대학청년국에 소속되어 건강하게 신앙생활하고 있다. 또 아들과 딸이 신학교에 입학해 주님의 일꾼으로 쓰임받기 위해 훈련받고 공부 중이다. 아들이 완치되는 기적을 통해 우상을 섬기던 시댁식구들이 모두 변화를 받게 되었고 나를 비롯해 시아주버니, 조카가 신학교에 입학했다. 처음에 노원순복음교회에 다니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지경을 옮겨주셔서 포천에서 강동구로 이전케 하셔서 강동성전에서 신앙생활을 이어갔고, 3년전 구로구로 이사하면서 신앙의 뿌리와도 같은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감사하게 신앙생활 중이다.

 우리가 처음 십일조를 할 때는 한달에 만원이나 3만원을 했었다. 그러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무렵 ‘네 입을 크게 열라’는 말씀을 의지해 십일조 백만원을 기도 제목으로 놓고 기도했다. 시간이 흘러 아이들이 고1이 되었을 때 우리는 십일조로 백만원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의도로 교회를 옮기면서 이번에는 십일조 천만원을 기도제목으로 놓고 기도를 시작했다. 백만원을 드릴 수 있기까지는 6년이 걸렸는데 천만원을 드릴수 있게 된건 3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지난해부터는 십일조 1억을 놓고 기도중이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이 우리 가정의 공통된 꿈이다. 그리고 나는 가출 청소년들, 집안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보듬을 수 있는 대안학교를 15년째 기도하며 구상중이다. 신앙생활은 인내다. 조용기 목사님이 말씀하신대로 바라봄의 법칙을 가지고 내 입을 크게 열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살아가기 원한다.


황성수 성도(대학청년국) - 헤어날 길 없던 삶의 방황, 주 은혜로 극복

갑작스런 부친상 등 고난 이어져 공허
선교사 통해 은혜받고 전도자의 삶 회복

 모태신앙인이지만 나의 믿음은 ‘제자리걸음’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을 따라 습관적으로 교회를 다녔고 신학대에도 들어갔다. 주님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하며 한 일이었다. 또 내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교회와 선교단체에서 열심히 봉사활동도 했다. 그러나 나의 믿음생활은 한계에 이르러 결국 모든 걸 포기하고 말았다. 대학 2학년 때 신학에 대한 회의감이 밀려들었고 방황이 시작됐다. 경제적 어려움까지 겹치면서 결국 학교를 자퇴하고 말았다.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이 끝나지 않은 스물여섯 살의 어느 날, 주무시던 아버지께서 그대로 돌아가셨다.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은 내 삶을 일순간 바꿔놓았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모하던 신학생 시절, 나의 꿈은 선교사였다. 하지만 홀로 남겨진 어머니를 부양하고자 어쩔 수 없이 취직했다. 그렇게 돈을 벌고 바쁘게 일하면서 자연스레 하나님과 멀어졌다. 하나님의 존재감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내가 이렇게 힘든데 그동안 받았던 신앙적 훈련이 다 무슨 소용인가’라는 신앙적 회의감에 짓눌렸다. 내 삶 속에 하나님은 안계셨다. 하나님은 교회에만 계시는 분일 뿐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정말 힘들 때는 교회를 찾았다. 예배를 드리고 나면 잠시나마 위로를 얻었다. 하지만 그것도 그때 뿐.

 직장생활에선 기쁨을 찾지 못했고, 사는 게 팍팍하고 힘들기만 했다. 그러다 또 힘들면 다시 교회를 찾았지만 그것도 잠시, 일상에선 불평불만을 쏟아냈다. 내 마음은 밑 빠진 항아리처럼 언제나 공허했다.

 그러던 2013년, 한 선교사님으로부터 하나님께 불순종했던 이스라엘 민족,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길 원했던 유대인들과 도저히 주님을 믿지 못할 것 같은 무슬림을 회복시키신 하나님에 관한 말씀을 들었다. 나도 모르게 하나님의 은혜로 마음이 벅차올랐다. 나는 그 말씀의 현장을 따라 이스라엘 단기선교를 결심했다. 단기선교 일정을 맞추기 위해 당장 사직서를 내려고 했다. 직장 상사는 그런 나에게 “단기선교가 도대체 뭐길래 직장까지 그만두려고 하느냐”며 심하게 꾸중했다. 상사와 갈등을 빚게 됐지만 결국 상사의 권유로 사직서 대신 휴가를 받아 선교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다. 그 이후 두 차례 더 단기선교를 다녀왔다.

 그 때까지도 나는 회사와 직장상사는 내가 믿는 하나님나라와는 무관하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믿음을 유심히 봐왔던 상사는 나를 따라 처음으로 교회에 갔고, 그 날 주님을 영접했다. 주님은 나의 일터에서 내 옆에 잃어버린 한 영혼을 구원하시고자 나를 사용하셨고 나를 회복시키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동안 내가 받았던 신앙훈련과 예배, 일상생활이 하나님과 분리된 것이 아니었음을 나의 연약한 모습을 통해 비로소 알게 하셨다. 이제는 설령 내가 원했던 삶이 아니라 해도 내 삶 가운데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고자 노력할 것이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의 예배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신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린다. 내 삶의 자리에서 늘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김원희 집사(용산대교구)-희귀병 걸린 아들을 치료하신 하나님

군대 간 아들, 섬유성골이형성증 진단
전도 힘쓰니 기도 응답 받아 치유돼

 나는 예수님을 믿기 전 주위에서 교회가자고 권유할 때 ‘가야지’하면서도 이상하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도리어 아들을 먼저 교회로 보내 신앙생활을 하도록 해놓고 정작 나는 교회에 가지 않았다. 아들은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며 친구도 사귀는 등 너무나 좋아했다. 아들 덕분인지 집에도 좋은 일이 많이 생겼다. 물론 그 때는 그런 줄도 몰랐다.

 아들이 성장해 군대에 입대했다. 그런데 3개월 후에 갑자기 군부대로부터 연락이 왔다. 아들이 무릎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찾아간 병원에서 들은 진단은 섬유성골이형성증이었다. 섬유성골이형성증은 뼈의 통증이나 변형이 동반되는 증상을 보이며 전 세계에서도 흔치 않은 희귀성 병으로 수술을 해도 치유되지 않고 관절에 쇠를 이식해, 몇 년에 한 번씩 교체를 해야 하는 등 완치가 불가능한 병이었다. 심지어 처방해주는 약도 진통제가 전부였다. 난 아들을 위해 좋다는 유명 병원은 다 찾아다녔다. 바다 건너 일본에 가서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았지만 의사들은 똑같은 진단만 할 뿐 다른 해결책을 내놓지 못했다. 어느 누구에게도 상담조차 할 수 없는 내게 남은 유일한 길은 교회뿐이었다. 교회에 가면 나을 수 있다는 말만 믿고 여의도순복음교회로 달려가 눈물로 기도했다. 예배를 드리건 교구 모임을 가건 나는 아들 생각에 눈물만 쉼 없이 흘러나왔다.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데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분…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라는 찬양은 내게 큰 위로를 주었다. 지금도 그 찬양을 들으면 저절로 눈물이 흐른다. 수술을 하느냐 마느냐 중대한 기로에서 나는 아들에게 “수술은 언제든지 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 먼저 간절히 매달려 보자”고 말했다. 예배 때마다 아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물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위해 만나는 사람마다 복음을 전했다.

 어느 날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에 깜짝 놀라 병원으로 달려갔다. 정지신호에 서 있던 아들이 탑승한 차량을 뒤차가 충돌해 사고가 난 것이다. 다행히 아들은 사고로 인한 증세는 없었지만 검사를 위해 병원에 며칠 간 입원했다. 처음에는 가뜩이나 아픈 아들이 병원에 입원하게 되어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 병원에서 아들이 무사함을 확인하고 난 후 우연히 만난 사람들을 전도해 교회로 인도할 수 있었다. 나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시기 위해 나를 이곳으로 부르셨구나하는 확신이 들었다.

 이후 기도처에서 열린 기도회에 참석해 기도하던 중에 갑자기 회개기도가 간절히 나왔다. 그 때 예수님이 내게 다가와 뼛가루로 보이는 것을 물통에 가득 채우시는 모습을 환상으로 보여주셨다. 빈 물통이 마치 뼛속이 빈 아들의 다리를 보는 것 같아 예수님이 뼛가루로 그 물통을 가득 채우면 아들의 다리도 다 나을 거 같다는 확신이 들어 빈틈이 한 곳 없이 가득 채워지길 간절히 기도했다. 내 기도에 응답하시듯 예수님은 뼛가루를 틈 없이 가득 채우시고는 뒤로 돌아 사라지셨다. 나는 그 환상을 몇 차례 본 후 예수님이 아들의 다리를 완전히 치료하셨다는 것을 믿고 선포했다. 실제로 아들은 그후로 통증을 느끼지 않고 완전히 치유 받았다. 아들 윤재는 이영훈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해 며느리 푸이한과 함께 믿음의 가정을 이루고 손녀딸 장빛나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니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주신 것 같아 더욱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그런 생각을 하고 주일에 교회를 갔다가 우연히 전도훈련학교라고 적힌 전단지를 손에 받아 들게 됐다. 그 길로 전도훈련학교에 등록해 지금까지 교회성장선교회에서 매주 토요일마다 전도대회에 참여하고 있다. 전도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이자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란 생각에 전심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더 많은 성도들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전도에 함께 참여해 함께 복을 누리길 바란다.  

     


정은희 집사(마포2대교구)-

3년간 앓던 골반염, 찬양 봉사하며 치유받아

3년간 앓던 골반염, 찬양 봉사하며 치유받아

주님께 기쁨으로 헌신할 때 병고침 기적 체험  
찬양팀, 교사, 지역장으로 섬기며 하나님께 영광


 2009년 7월 교통사고를 당했다. 유턴을 하던 중 뒤차에 받치는 큰 사고가 났다. 사고를 당한 순간 나와 남편, 아이들까지 식구들이 모두 기절했고 차는 폐차를 시켰다. 우리 가족은 보름 넘게 입원을 하고 어려운 고비를 넘겼다. 퇴원 후 1년 있다가 나에게 골반염 증상이 나타났다. 평상시에는 괜찮다가도 갑자기 골반통증이 심해지곤 했다. 계단에 오르다가도 통증이 오면 무조건 가만히 서있어야 했다. 한참을 서있다가 통증이 잠잠해지면 조금씩 겨우 걸을 수 있었다. 동네 병원에서는 큰 병원에 가서 치료해야 한다고 했지만 나는 직장도 다니고 있는 터라 대학병원에 갈 시간이 없어서 소염제만 받아서 먹곤 했다.

 골반염은 하루 이틀 약 먹고 낫는 병도 아닌데다가 몸을 계속 움직여야 하니까 시간이 지나도 차도가 없었다. 3년동안 골반염으로 심하게 고생을 하던 때 교회 봉사를 하고 싶어 내가 섬길 수 있는 곳을 찾았다. 순복음가족신문에 평일철야예배 찬양단원을 모집하는 광고를 보고 지원했다.

 2012년 평일철야예배 찬양단에 들어가서 봉사를 시작했는데 인원이 부족해 3일 연속 철야예배 찬양을 했다. 평일철야예배 찬양단인 ‘기쁜소리 찬양팀’은 저녁 8시반에 모여 기도모임을 갖고 10시까지 연습을 한다. 세팅과 리허설을 마치고 11시에 예배를 시작해 1부예배가 끝나면 새벽 1시다. 그 다음날 오전 8시 반까지 출근을 해야하는데 그렇게 2년을 하니 체력이 바닥나서 피곤이 몰려왔다. 찬양하고 내려오면 코피가 줄줄 흐르고 있던 적도 있었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앞치마를 한 채로 잠들 정도로 피곤했다. 하지만 나는 주님을 찬양하는게 너무 즐겁고 행복했다. 내가 피곤해 하면 가족들이 봉사를 쉬라고 할까봐 집에서는 힘들어도 티내지 않고 더 밝은 모습을 보이려 애쓰기도 했다. 예배 봉사를 위해 직장도 퇴근 시간이 조금은 자유로운 곳으로 선택했다.

 내가 처한 환경이 힘들었을지 몰라도 하나님께 온전히 예배를 드리는 시간만큼은 기쁨과 새 힘이 샘솟았다. 주님을 섬기는 순간만큼은 어떤 염려와 근심도 모두 사라지고 오로지 찬양의 기쁨만이 넘쳐났다. 특히 평일철야예배를 드리며 아이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어 더욱 감사했다. 아이들 진로문제와 다른 기도제목으로 인해 내 골반염 기도는 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어느날 늘 나를 괴롭히던 골반의 통증이 없어졌다. 일주일에 1∼2번 씩 오던 통증이 깨끗이 사라진 것이다.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보니 “골반염이 다 없어졌어요. 치유되셨네요”라는 의사의 소견을 들었다. 할렐루야! 기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니 하나님이 내 문제를 아시고 깨끗이 치료해주신 것이다. 나는 그 뒤로 골반이 아픈 적이 단 한번도 없다. 하나님이 치료하신 건 재발이 없었다. 

 평일철야예배를 드리며 다른 은혜들도 많이 체험했다. 철야를 하다보니까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이 많아져서 감사하다. 엄마가 철야예배에 가서 본인들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아이들도 무척 고마워한다. 큰 아이는 중등1부 교사로 봉사하며 찬양을 인도하고 있고, 작은 아이는 고등부에서 찬양대를 하고 있다. 아이들이 유치부부터 찬양대 봉사를 하고 주일성수하며 신앙 안에서 잘 자라주고 있어 감사하다. 실용음악 공부를 하고 있는 아이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음악인으로 잘 성장하고 있다.  

 나는 하나님을 섬기는 게 기쁘고 감사해 주일에는 아동 6부 교사로 봉사하고 있다. 또 지역장과 교구 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이 너무나 행복하다. 좋으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에 오늘도 행복한 하루를 맞는다.  



윤희훈 성도(대학청년국) - 예배는 비전의 시작이자 완성입니다

나를 위한 꿈보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예배자로서 비전 가지니 기자의 길 인도해

 나는 어렸을 적 과학자, 국회의원, 장관과 같은 꿈을 품었다. 이러한 장래희망들은 하나님이 부어주신 비전이기보다 내가 성취하고 싶은 목표고 꿈이었다. 나이가 들고 신앙이 성숙해지면서 나의 꿈보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비전에 대해 궁금해졌다. 비전을 위해 기도한 끝에 하나님께서 내게 보여주신 길은 기자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 복무를 마친 후 국회도서관을 다니며 언론사 입사 준비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예배를 마치고 국회도서관으로 가는 길에 하나님께서는 국회에서 예배하는 나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그날 이후 국회는 내게 미래의 예배처가 되어 매일 아침마다 국회의사당을 바라보고 국회 광장의 땅을 밟으며 ‘하나님, 기자가 돼 이곳에서 예배하겠습니다’라고 기도했다.

 언론사 시험을 준비하던 2011년 여름, 나는 열악한 주거환경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보금자리를 주는 일에 힘을 보태고자 4박 5일 동안 강원도 춘천으로 해비타트 선교사역을 가게 됐다. 그런데 사역 사흘째 되던 날에 내가 정말 가고 싶었던 언론사에서 서류전형에 합격했으니 토요일 면접에 오라는 문자가 왔다. 사역 일정이 주일까지였기 때문에 밤새 고민하며 기도했다. 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면접을 내려놓기로 결정했다. 정말 힘든 결정이었지만 기자라는 직업은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니 인도해 주실 것이라 믿고 온전히 맡기기로 했다.

 나는 집짓는 사역에 끝까지 동참하며 혼자 온 봉사자에게 복음을 전했다. 면접에 대한 아쉬움보다 누군가에게 집을 지어 희망을 주고 거기에 전도까지 하게 되어 너무 행복했다. 해비타트 사역을 진행하는 동안 하나의 집을 완성하기 위한 과정이 하나님의 일과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골조를 세우고 벽채를 만드는 과정에서 만약 내가 내 자신만을 고집한다면 집은 제대로 지어질 수 없다. 설계도면을 보고 지시하는 사람을 따라 일을 해야 한다. 내가 하는 일은 이렇게 한 부분에 불과하지만 집이 완성되면 귀한 가정이 들어와 기쁨을 누리게 된다. 하나님의 일도 마찬가지로 나의 뜻을 버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좇아 동행해야 한다.

 하나님의 일을 우선시 하자 하나님께서는 예비하신대로 내 비전에 대한 응답을 주셨다. 한달이 채 되기도 전에 나는 다른 언론사에 입사하게 됐고 꿈 꿔온 대로 국회를 첫 출입처로 배정받게 됐다. 할렐루야! 국회로 첫 출근한 날 나는 국회 기자실 한쪽에서 혼자 예배를 드렸다. 기도 중 하나님께서는 사역 때의 일을 생각나게 하셨고 그날의 내려놓음이 기자라는 직업을 원하는 것인지 예배자로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기자가 되기 원하는지를 묻기 위함임을 깨닫게 하셨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회복이 필요한 장소로 나를 보내 그곳에서 예배하게 하셨다. 얼어붙은 개성공단, 눈물로 가득했던 2014년 4월의 진도 팽목항, 그리고 청와대까지. 요즘 들어 하나님께서는 특파원이라는 구체적인 길을 보여주시며 내게 열방의 예배를 회복하라는 마음을 주신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에 따라 이제 나의 비전은 ‘하나님이 기억하는 예배자’가 되는 것이다. 앞으로 내가 가게 될 환경이 어떠한 곳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곳이 바로 하나님이 기다리고 계시는 예배처라는 것이다.


정리=김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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