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란 집사(영등포대교구) -

마더스드림 통해 믿음의 가정 이루었어요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신앙으로 바로서니
남편, 자녀들 그리고 친정 부모까지 구원받


누구나 그렇듯이 내게도 고난은 예고없이 갑자기 찾아왔다. 맞벌이를 하던 우리 부부를 위해 평일에는 시어머니가, 주말에는 친정어머니가 아이들을 돌봐주셨다. 그러던 두 어머니가 거의 동시에 크게 아프셨다. 친정어머니가 유방암과 수술 후유증으로 고생하시고, 시어머니가 위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하셨다. 특히 시어머니는 수술 1년 후 회복을 기대하고 있던 상황에서 갑자기 패혈증으로 소천하시고 말았다. 어머니들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던 나는 크게 흔들릴 수 밖에 없었다. 다니던 직장도 관두었고 홀로 계신 시아버지도 모시게 된 것도 힘든 상황에서 남편의 화장품대리점에 세무조사를 받는 등 수많은 위기와 고난이 나와 우리 가정을 덮쳤다. 그 때 난 시어머니가 늘 가시던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생각났다.

 나는 남편과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독실한 시부모님의 영향이었다. 그런데 남편은 그런 부모님과 같이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또한 시부모님도 내게 강권적으로 교회출석을 강요하지 않았기에 나는 이 부분에 대해 깊게 생각하진 않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가끔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가면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내가 왜이러는지 물으면 ‘하나님이 널 너무 사랑하셔서 그런거란다’라고 말씀해주셨다. 하지만 그 때도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고 주말이면 가족들과 여행다니기 바빴었다. 하루는 교회서점에서 어머니가 나를 붙잡고 이런 말씀을 하셨다. “혹 교회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거든 꼭 순복음교회를 다녀라. 전국 어디에나 있으니 교회를 가려면 순복음교회로 가라”

 그 말씀 때문이었는지, 힘들 때 생각난 곳이 순복음교회였다. 마침 이사간 집 앞에 기도처가 있었다. 기도처가 어떤 곳인지도 모르면서 순복음교회 간판만 보고 새벽에 그 곳을 찾았다. 어떻게 기도하는지도 모르면서 마냥 기도했던 것 같다. 그렇게 순복음교회를 스스로 찾아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고 어느 주일 ‘마더스드림’ 포스터를 보게 됐다. 포스터에 적혀 있는 ‘주님 내가 어머니입니다’라는 문구가 나를 이끌었다. 첫 세미나에서부터 나는 하나님을 만나고 지금까지의 내 자신이 깨어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누구인지, 어머니로서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지, 어떻게 자녀교육을 해야하는지 등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남편을 다시 바라보게 됐다. 남편은 나와 성격이 완전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다름이 아닌 틀림으로 규정하고 남편을 나무라고 다그치고 내 감정을 쏟아내기만 했음을 깨닫고 반성하게 됐다. 마더스드림 이후로는 남편을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남편을 존경하고 높이는 ‘현숙한 아내’로 살아갈 것을 다짐했다. 남편과 함께 부부세미나도 참석하고, 먼저 남편에게 용서를 구하자 남편도 닫힌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남편은 아버지학교를 다녀온 후로는 지금까지도 파더스드림에서 봉사하며 위기의 가정들을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우리 부부가 변화되자 아이들도 변화되기 시작했다. 나는 남편을 화평, 큰 아들은 믿음, 둘째 아들은 소망 그리고 나는 사랑이라 부르며 우리 가정이 믿음 안에서 하나되길 꿈꿨다. 자녀들 모두 신앙 안에서 자라 지금은 각각 바리스타와 대금연주자로 활동하는 모습을 보면 대견스럽다. 부모임에도 특별히 아이들을 뒷바라지 못했지만 우리 가정이 믿음 안에서 바로 서니 하나님이 책임져주시고 아이들 스스로 자신의 꿈과 비전을 찾아 열심을 다 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다.

 지난해에는 믿음의 가정이라는 꿈이 가장 큰 열매를 맺었다. 오랫동안 유교양식을 지켜온 고집센 친정 부모님께서 교회를 출석하기 시작한 것이다. 드리던 제사도 접고 온전히 신앙생활을 시작하셨다. 할렐루야.
 요즘 사회를 바라볼 때 깨어지는 가정, 위기의 가정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교회 내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파더스드림과 마더스드림을 통해 가정이 회복되길 바라며, 이를 위해 나는 마더스드림에서 남편은 파더스드림에서 더 열심히 섬기고 싶다


김정자 권사(금천대교구)-

심장병 고침 받고 복음의 증인돼

20여 년째 새벽기도, 봉사와 전도
믿음으로 기도하면 주님 응답해주셔

 군인이었던 남편을 따라 최전방에서 살다보니 밤낮 없는 대북방송에 내 심장은 견뎌 내지 못했다. 심장병이 생겨 숨도 잘 쉬지 못했고 의사가 내게 아이를 낳지 말라고 주의를 줄 정도였다. 그러다 1972년 순복음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됐다. 기댈 곳이 필요해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집 근처에 교회가 있기에 가보니 여의도순복음교회였다. 그러나 당시 교회는 기둥만 세워진 상태였고 예배를 드리려면 서대문의 교회에 나가야한다고 했다. 조금이라도 먼 거리는 다니기 힘든 상태였기 때문에 교회를 다니지 못한 채 1년이 지나 시흥으로 이사를 가게 됐다. 그런데 어느 날 이웃집에서 찬양소리가 들려왔다. 찬양이 내 마음에 얼마나 위로가 되던지 나는 곧장 이웃집으로 달려갔다. 놀랍게도 그 이웃은 순복음교회 성도였고 나는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얼마 후 안양에서 조용기 목사님 부흥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나는 이 부흥회에서 꼭 병고침을 받겠다는 소망을 가졌다. 기도를 받기 위해 따라 다니는 날보고 목사님은 내 병이 고침 받았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날부터 숨이 차지도 않고 찬송을 부르는 나를 보며 주위 사람들은 심장병이 다 나았다며 기적이라고 했다. 그 일이 주변에 알려져 나는 많은 사람들을 전도할 수 있었다. 내가 만난 기적의 주님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어 목욕탕에서 할머니들의 등을 밀어주며 또는 새벽기도 가는 길에 만나는 미화원들에게 음료를 나눠주며 열심히 전도했다. 전도를 한 사람들 가운데 5명의 목사님이 나왔고 병고침과 아이를 낳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이를 낳는 많은 기적들을 경험했다.

 작년에는 거식증을 앓는 사람이 병고침을 받는 기적도 일어났다. 김중열 성도는 5년 간 거식증을 앓았다. 먹지도 못하고 잠도 못자 빼빼 말라 양쪽에 사람이 붙들어야 겨우 움직일 수 있었다. 나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대해서는 절대 의심을 품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그의 계획대로 어떠한 병이든 고쳐주실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예배를 드리러 온 그 자매에게 “걱정하지마라. 모든 만물을 주관하시고 못하는 일이 없는 하나님이 3개월 내로 병을 고쳐주실 것이다”라고 선포했다. 나는 매일 새벽기도 때 전도한 사람들의 기도 제목을 놓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데 김중열 성도를 위해서도 “하나님 김중열 성도 거식증을 고쳐주셔서 주님을 전하는 사람으로 사용해 주세요”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1월 김중열 성도와 함께 3부 예배를 같이 드리는데 이영훈 목사님이 소화기능에 문제가 있어서 식도로부터 위까지 기능이 상실되고 자꾸 토하는 사람의 기능을 회복시켜달라며 신유기도를 하셨다. 곁에 있던 나는 김중열 성도를 일으키며 “나았다. 할렐루야! 나았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외쳤다. 그날 김중열 성도는 먹고 싶었던 자장면 한 그릇을 다 먹고도 탈이 나지 않았고 지금은 건강한 몸으로 우리 교회 성경학교를 졸업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할렐루야! 20여 년째 직장생활을 하며 작정 새벽기도, 기도처 꽃꽂이 봉사 그리고 전도를 하면 하루 3시간밖에 잘 수 없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해야 할 때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일상을 감당하게 해주시는 하나님께 너무 감사할 뿐이다. 주님께서 주신 생명, 앞으로도 베풀며 남을 돕고 전도하는 데 사용하고 싶다.      정리=김주영 기자


유정임 집사(송파교회) -

“성경일독과 전도로 제 인생이 변화됐죠”

류마티스 관절염과 습관성 유산 모두 치유 받아
두 아이 엄마로 행복한 신앙생활하며 복음전파 주력

 나는 24년 전 송파교회 구역장의 전도를 받고 교회에 오게 됐다. 당시 나는 결혼해도 아이가 없어 괴로운 상황이었다. 류마티스 관절염을 전신에 앓고 있었기에 몸이 약했다. 병원에서는 류마티스는 면역계 질환이라서 완치가 어렵다고 했고 온몸의 뼈 마디마디 마다 상상할 수 없는 통증에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임신을 해도 자꾸 유산이 됐다. 세 번이나 유산을 하고 나니 병원에서는 습관성 유산이라며 앞으로도 아기를 갖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어려움에 있을 때 여의도순복음송파교회 구역장이 전도하러 집을 찾아왔다. 하나님께서 건강하고 예쁜 아기를 주실꺼라는 구역장의 말을 듣고 믿음을 갖고 교회에 나오게 됐다. 매주 은혜가 넘쳐났고 희망이 생겼다. 아이를 갖기 위해 간절히 기도하며 1년 정도 교회에 다니다 성경일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성경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소리내서 읽겠습니다. 다 읽으면 저에게도 건강한 아기를 선물로 주세요”라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말씀을 읽다보니 꿈꾸고 바라볼 때 하나님이 응답을 주신다는 바라봄의 법칙을 깨닫게 됐다.

 1년이 지나 성경을 다 읽었을 때 여의도순복음교회서 침례식이 있어 침례를 받았다. 혹시나하는 마음에 산부인과에 가보니 임신이었다. 할렐루야! 성경 말씀 완독을 마치던 그 달에 하나님이 아기를 선물로 주신 것이다.
 나는 기도한대로 예쁘고 건강한 딸을 낳았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 바로 아이를 또 주셔서 아들을 낳았다. 나는 성경을 읽으면서 받은 말씀으로 아이들의 이름을 지어줬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까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매일 전도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넘쳐났다. 아이들은 주 안에 무럭무럭 잘 자랐고 딸은 대학에서 4년간 장학금을 받았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이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순종해 지난해 전도 2등상을 받았다. 지난해 5월에 부침개 전도를 하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보내주셨다. 그 분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 분은 교회에 나오기로 했지만 한 달 동안 나오지 않았다. 나는 “영혼 구원의 마음을 주셨으니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을 보내주세요”라고 계속 기도하며 더 많은 분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구했다. 그 분이 교회에 나오면서 열심있는 신앙인이 되었고 고구마 뿌리처럼 그 분을 통해 더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게 돼 교회로 인도할 수 있었다.

 어느날 밑이 보이지 않는 깊은 우물에 그물을 내렸더니 큰 물고기들이 가득 올라와 포크레인으로 끌어올리는 꿈을 꿨다. 전도에 더 뜨거운 열정이 생겼고 지난해 5월부터 지금까지 150명 이상을 전도했다. 교회에 정착해 꾸준히 나오시는 분들도 상당히 많고 매주 8명 정도가 새로 교회에 나온다. 2월 마지막 주에는 51명의 새신자가 교회에 왔다. 입술로 선포한 기도가 이렇게 큰 능력이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조용기 목사님 말씀처럼 바라보고 믿고 꿈꾸고 선포하니 그대로 이뤄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이 이루신 것이다.

 주님의 복음을 전하며 날마다 크고 작은 은혜와 기적을 체험한다. 완치가 어렵다던 류마티스 관절염도 깨끗하게 고침받았고, 20년 넘게 기도해 온 부모님의 구원문제도 응답됐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고 포기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때에 꼭 응답해주신다.       

 하나님이 하시는 놀라운 일을 기대하면 큰 감동이 된다. 하나님이 예비해주신 길에 늘 감사하며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하려고 한다. 날마다 우리에게 좋은 것을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며 오늘도 주안에 행복한 하루를 보낸다.


김명춘 권사(용산대교구) -

남편의 폐렴 치유… ‘중보기도’의 힘

기침하던 남편, 하루안에 중환자실 입원
교구식구들의 심방과 기도로 완치판정 받아

 그리스도인의 삶은 영적전쟁과 같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강력한 무기 ‘기도’가 있기에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우리 교구는 남편 양회명 집사의 갑작스런 폐렴으로 성령님의 기사와 이적을 체험했다. 이 간증은 우리에게 어떤 어려운 시련이 다가와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수 있게 했고, 하나님이 하셨다는 고백을 할 수 있게 했다. 믿음의 신앙인으로 인도하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주님께 올려드린다.   작년 김장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며칠 동안 김장 준비로 정신이 없어서 남편이 기침 때문에 약을 먹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김장 당일, 도와줘야할 남편이 일어나지도 못했다. 억지로 깨워서 일어난 남편은 힘겹게 김장을 도와줬지만 여전히 기침은 계속 하고 있었다. 이틀이 지났는데도 기침은 더욱 심해졌다. 나는 남편을 데리고 의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었다. 촬영 결과 한쪽 폐 전체가 희뿌옇게 덥혀있었다. 전문가가 아닌 내가 봐도 위급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의사의 권유로 곧바로 큰 병원 응급실에 입원했다. 급성 폐렴 진단을 받은 남편은 숨 쉬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병원에서는 나이가 있는 사람이 폐렴이 걸리면 자신의 힘으로 숨을 쉬기 힘들어 할 수 있어서 인공호흡기를 사용해야 한다고 했다. 정신이 있는 상태에서 착용한 호흡기가 힘들 수 있으니 수면 유도를 해야 한다고도 했다. 병원에 온지 단 하루밖에 안 지났는데 남편은 중환자실에서 의식 없이 누워있었다.

 그때 생각나는 사람들이 교구 식구들이었다. 우선 담당교구장인 최귀희 전도사님께 전화로 남편의 상황을 말씀드렸다. 그리고 교구 식구들에게 단체 카톡방으로 양 집사의 상태를 알리고 중보기도를 부탁했다. 메시지를 확인한 교구 식구들은 즉각적으로 답문을 보내왔다. ‘권사님 힘내세요’ ‘기도할게요’ ‘걱정 마세요’ ‘하나님이 고쳐주십니다’ 등 격려와 희망의 메시지와 중보기도를 시작하겠다는 말을 보내왔다. 얼마나 고맙고 큰 힘이 됐는지 모른다. 매일 새벽기도를 하는 권사님들의 기도와 격려도 든든했다. 뿐만 아니다. 중환자실은 하루에 두 차례만 면회가 가능했지만, 전도사님과 교구식구들은 아무리 바빠도 병원으로 심방을 와서 기도해 줬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교구식구들의 사랑에 감사할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셨다. 남편의 상태가 호전되기 시작한 것이다. 일주일이 지나자 병원에서는 자가 호흡이 가능하다면서 인공호흡기를 제거했다. 남편은 빠르게 회복됐고 일반병실로 옮겨졌다. 모두가 기적이라고 했다. 할렐루야!

 나는 순복음 권사다. 기도만이 살 길이라는 설교를 들어왔다. 때문에 병원에서 남편이 폐렴으로 위험하다는 부정적인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생사화복을 책임지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었기에 흔들리지는 않았다. 그래서 중보기도를 요청했고, 하나님이 남편을 깨끗하게 고쳐주시리라 믿었다. 5개월 후,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고 믿은 대로 남편의 주치의로부터 완치라는 판정을 받을 수 있게 해주셨다.

 중보기도란 기도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성령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다. 중보기도의 힘을 알기에 나는 오늘도 가족과 교구를 위해, 교회와 나라를 위해 기도드린다. 할렐루야.



이예재 권사(영광대학) -

“성경 필사는 손으로 쓰는 기도입니다”

20년 간 17권 성경 완필…마음의 병 치료받아
 쓰면 쓸수록 더 쓰고 싶어지고, 쓰는 동안 행복이 넘친다. 밖에 나와서도 집에 빨리 들어가고 싶은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연애편지 얘기가 아니다. 내가 지난 20년간 성경을 필사하면서 느끼고 있는 감정들이다. 지금까지 17번의 성경 필사를 통해 내가 체험한 많은 변화를 간증하고자 한다.

 1995년 나는 마음의 병을 앓고 있었다. 당시 내가 불신자는 아니었지만, 안팎으로 일어나는 사소한 걱정들이 늘 문제였다. 걱정은 갈수록 내 마음을 짓눌렀고, 잠도 잘 잘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노이로제, 즉 신경쇠약이라는 병명을 얻게 됐다.

 신경쇠약은 대인관계에 장애를 줬다. 무엇보다도 갑자기 엄습하는 두려움은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주변의 권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나 스스로가 기도원에 가고 싶었다. 기도를 해야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간신히 올라간 기도원이었지만 대인기피증과 우울증은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 다녔다. 예배를 드리는 것을 방해했고, 어디에서나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숨을 곳을 찾았다. 그러던 중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요한복음 1장 말씀이 나의 마음에 들어와 나를 사로잡은 것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은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려 주셨다. 내가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성경을 통해야 했다. 간절한 마음으로 창세기부터 성경을 읽어 내려갔다. 그런데 레위기를 넘기기도 전에 포기하고 말았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 집에 와서 다시 창세기부터 읽었다. 그리고 또 포기했다. 이것을 몇 번 반복했는지 모른다. 하루는 구역장님이 “성경읽기가 힘들다면 성경을 매일 쓰면서 통독을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는 의견을 주셨다. 그래서 신약 마태복음부터 매일 3∼4장씩 한 자 한 자 써 내려갔다. 성경을 쓰자 하나님은 말씀으로 나를 생명의 길로 인도해 주셨다. 불안했던 마음이 안정됐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도 불쑥 쓸쓸하고 마음 붙일 곳 없고 외로운 기분이 들면 무조건 성경을 폈다. 기도의 힘이 필요할 때마다 말씀을 써내려갔다. 마음이 편안해 질 때까지 성경을 필사했다. 그랬더니 3개월 후 신약을 다 쓸 수 있었고, 6개월 후에는 신구약 성경 66권을 완필할 수 있었다.

 성경을 필사하면서 내가 앓았던 신경쇠약과 대인기피증은 완전히 치유 받았고 건강해졌다. 그래서 영광대학도 다닐 수 있었고, 순복음호스피스에서도 봉사할 수 있었다. 

 이렇게 1995년 12월부터 시작한 성경필사는 병을 치유한 것뿐만 아니라 눈까지 밝혀줬다. 지금 나는 81세인데도 웬만한 사람들보다 눈이 밝다. 주님의 말씀은 내 길의 빛이요 등불이라는 시편기자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된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질병이나 어려운 환경 등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성경을 필사해 보라고 권유한다. 성경필사는 손으로 쓰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영광대학에서는 성경 필사본들을 매년 전시해 주고 있어 필사성경이 더 알려졌다. 그래서 지금까지 쓴 17권 중 필사성경을 영광대학과 기도처, 백석대학에 기증했다. 또 조만간 완성될 필사본은 자녀들에게 신앙유산으로 물려줄 예정이다. 많은 이들이 성경 필사에 동참해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을 함께 나누기를 소망한다.


박숙원·네이슨 우즈 성도(서대문대교구) -

시한부 인생 고쳐주신 주께 감사드린다

주 떠났던 우리 부부, 다시 주께 돌아와
남편 고환암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기적

 어릴 적 신앙생활하며 교회봉사까지 했던 나는 호주로 떠나며 완전히 교회와 멀어졌다. 그곳에서 만나 결혼한 남편도 신앙이야기를 전혀 안 해 둘은 교회와 먼 생활을 했다. 오랜 시간 호주에서 살다 지난해 봄 한국을 방문한 건 일을 위해서였다. 오랜 지인인 친한 언니 이은희 집사를 다시 만난 것도 이 때였다. 거처를 위해 언니의 권유로 여의도에 있는 오피스텔을 계약하게 됐다. 단, 언니와의 조건은 “함께 교회가자”는 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마음 한 구석에는 교회에 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질 않았다.

 며칠 뒤 언니는 아주 조심스레 “같이 여의도순복음교회에 가자”고 했다. 그렇게 오랜만에 교회에 간 날 내 마음이 무너지면서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호주에 있는 남편에게 전화로 그간 사정을 이야기하며 교회를 다시 다니게 됐다고 하니 자신도 얼마 전부터 교회를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며, 옛날에 신학교를 다녔고 조용기 목사님의 책을 읽고 그 영향으로 선교활동도 했다는 얘기를 들려줬다. 둘 다 크리스천이었다는 것이 신기했고 벅찬 감동이 밀려왔다.

 얼마 뒤 호주에 있는 남편에게서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어른 주먹보다 큰 혹이 배 안에서 발견됐는데 심상치 않아 호주 병원에서 정밀검사를 요청했다. 나는 기도 중 남편을 빨리 한국으로 데려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주에서는 위험하다며 한국행을 말렸지만 만료된 여권이 하루 만에 갱신되는 기적 같은 일을 경험하고서 남편은 한국에 왔다.

 우연한 기회에 연대 세브란스병원 외국인 진료소에서 인요한 박사님의 검진을 받게 됐다. 박사님은 ‘치료는 하나님이 하신다. 의료진의 손을 통해서도 역사하시니 입원해서 치료를 받는 것이 좋겠다’며 훌륭한 선생님을 소개해주셨다. 진료 결과 남편은 고환암이었다. 그것도 암세포가 사타구니와 임파선으로 전이 돼 심각한 상황이었다. 의사는 치료를 받아도 남은 삶이 6개월이라고 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남편을 살려주신다는 확신을 우리에게 심어주셨다.

 항암치료가 시작됐다. 남편은 고통 속에 제대로 먹지 못하고 계속 구토했다. 항암치료가 진행되는 동안 서대문대교구 성도들은 우리를 위해 작정기도를 하고 있었다. 우리를 아는 지인들도 중보 했다. 나는 어려운 상황을 잘 극복하게 해달라며 계속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다. 항암치료만 하면 구토하는 남편을 위해 나는 구토를 억제하는, 몸에 맞는 약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고 결국 남편에게 맞는 약을 발견했다. 이후 남편은 구토 없이 음식을 먹으며 허약해진 몸을 보강할 수 있었다. 나는 하나님께 또 어른 주먹보다 더 큰 암세포가 2센티로 작아지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또 기적이 일어났다. 항암치료 후 정말 혹이 2센티 이하로 작아진 것이었다. 우리는 수술 없이 온전한 치료가 이뤄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다시 항암치료를 진행했다. 기도할수록 마음이 평안했고, 하나님의 기적을 기대했다. 그리고 4차 치료까지 받은 결과 암세포가 작아져 이제는 군데군데 작은 흔적만 남게 됐다. 병원에서는 놀라운 일이라며 완벽한 치료를 위해 수술로 작은 흔적들을 긁어내자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4개월간 치료를 끝으로 호주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리고 남아 있는 흔적을 없애기 위한 수술을 위해 호주 병원을 찾았다가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됐다. 검사 결과 “아무 것도 없이 깨끗해 더 이상 수술이 필요치 않다. 모든 것이 다 끝났다”는 것이었다. 할렐루야!  

 

세상으로 떠났던 우리를 다시 주님 품으로 인도해주신 것도 감사한데 다시 생명을 허락해주시며 사명을 주신 주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우리를 위해 부모의 마음으로 기도해주신 서대문대교구 식구들에게도 감사를 전한다. 우리를 향한 계획이 있으시기에 남편과 나를 다시 부르셨다는 확신이 든다. 이제는 주만 바라보고 주께 헌신하는 삶을 다짐한다.            

정리=오정선 기자

 


김현정 집사(서대문대교구) -

모든 것을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

예상치 못한 뇌종양 판정 기도로 용기 얻어
계속된 고난이 믿음의 가정 이루는 지름길 돼

 

우리 집은 전통적인 타종교 집안이었지만 나와 언니는 어려서부터 여의도순복음교회에 출석했다. 나는 온가족이 주일성수하는 친구들이 너무 부러웠다. 친구들 집에 있는 성경이나 기도하는 친구 어머니의 모습, 심지어 교회로고가 그려진 수건까지도 부러웠다. 그 때부터 나는 믿음의 가정을 꾸리길 꿈꾸었던 것 같다.

 나는 한 남자를 만나 가정을 꾸렸지만 예상치 못한 문제에 봉착했다. 남편은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자랐다.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시댁과의 마찰은 심각했다. 그러던 2010년 어느 날 접촉사고가 발생해 병원에 검사를 받으러 갔다가 의사의 말에 깜짝 놀랐다. 뇌에 종양이 발견되었다는 것이었다. 내가 의지할 곳은 하나님 밖에 없었다. 나의 신앙생활을 반대하시던 부모님도 더 이상 반대하지 않으셨다. 이 때 아는 분을 통해 김성자 지역장님을 소개받았다. 김 지역장님은 자신의 아들도 뇌종양이었지만 하나님이 치료해주셨다고 간증하며 하나님도 분명 나를 치료해주실 것이라며 위로해주셨다. 그래서 김 지역장님이 이끌어주시는 대로 말씀을 붙잡고 기도했다. 지역장님과 작정기도 후에는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에 올라가 3일 금식기도를 시작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은 내게 먼저 회개하길 원하셨고 온전히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 것을 고백하도록 이끄셨다. 기도하는 가운데 알수 없는 무서운 소리가 나를 휘감듯 내 안에서 터져 나왔고 지역장님은 그런 나를 붙잡고는 “예수의 피”를 계속 외치라고 말씀하셨다. 영문도 모른 채 나는 “예수 피”를 외치며 나중에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함께 기도한 지역장님을 비롯해 주변 분들이 계속 중보기도해주셨다는 것도 나중에 들을 수 있었다. 일련의 영적전쟁을 경험한 후에는 방언을 받고 성령체험을 하면서 수술에 대한 용기와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나를 살려주실 것을 믿고 수술에 임하는 동안 수술실 밖에서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지역장님의 권면으로 남편이 신앙생활을 결심한 것이다. 하나님은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우리 가정을 구원하셨다. 어려서부터 꿈꾸던 식구가 함께 주일성수를 하게 된 것이다. 더 이상의 부모님의 반대도, 시부모님의 반대도 없었다. 그러나 달라진 환경과 달리 난 뇌에 종양이 완전히 치료받았다는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 병원에서도 완치란 있을 수 없으며 재발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그래서 늘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둘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 내가 걱정했던 그 두려움이 현실이 됐다. 뱃속 아이가 5개월이 됐을 무렵 머리에 종양이 다시 퍼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출산 후 재수술과 방사선치료를 해야한다고 병원에서는 말했다. 또 다시 절망이 우리 가정을 덮쳤다. 계속되는 고난에 힘들어하는 남편에게 나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자고 토닥이고 함께 새벽기도를 하며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했다.
 온 가족들의 축복 속에 둘째 아이를 낳았다. 나도 재수술이 아닌 방사선치료만 진행해도 될 정도가 되었고 남편과 함께 3일 금식기도 후 치료를 진행했다. 이때도 김 지역장님을 비롯해 교구장님과 교구 식구들이 나를 위해 기도해주셨다. 처음 수술을 받았을 때와는 달리 이제는 하나님께서 온전히 나를 치료해주셨다는 믿음을 가지니 두려움이 사라졌다. 신앙생활을 내가 먼저 시작했지만 지금은 남편이 나의 신앙버팀목이 되어줄 정도로 믿음이 자랐다. 우리 부부가 주님만을 의지해 어려운 과정을 이겨냄으로서 신앙이 성숙해지고 아이들도 하나님의 자녀로 믿음을 키워갈 수 있는 것 같다. 남편은 교회학교 교사로, 나는 지역장으로 주님이 맡기신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다. 할렐루야!
정리=정승환 기자


신윤복 권사(강서대교구) -

하지정맥류로 인한 두 다리 고통 치유하신 하나님

대교구 리더 훈련 때 성령 임재, 첫사랑 회복
기도할 때마다 응답주신 주께 감사 고백 드려


 1월 26일부터 29일까지 강서대교구에서는 지구역장과 3040예비 리더들을 위한 ‘절대영성 리더훈련’이 있었다. 하지정맥류로 인해 5년 째 고생 중이던 나는 사실 리더 훈련에 참여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앉는 것은 물론 서는 것조차 심지어는 잠을 이룰 수 없이 고통스러워하는 내가, 그 좁은 공간에 오랫동안 앉아 강의를 들어야한다는 게 곤혹이었다. 하지만 다른 교구에서 많이 참석한다기에 고통을 견디기로 마음먹고 훈련에 참여했다.

 여러 강사님들의 말씀은 한결같이 은혜롭고 이후 진행되는 프로그램도 나에게 영적 도전이 됐다. 마지막 훈련 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부활하신 주님을 생각하며 우리 역시 부활 신앙을 회복하는 순간 성령이 나에게 강하게 임했다. 성령은 내가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의 동일한 감격을 나에게 선물했다. 첫 사랑의 회복이었다.

 교회에 처음 출석한 것은 중 3시절, 교회가 서대문에 있을 때였다. 그러나 첫 사랑의 감동이 사라지면서 교회가 여의도로 이전한 뒤 내 신앙은 잠시 주춤거렸다. 그리고 몇 년 후 벌어진 교통사고. 그 사고로 나는 손가락 일부를 잃었다. 가족은 예민한 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봐 늘 노심초사했다. 그런데 사고로 고통스러워야할 나는 정작 어느 때보다 마음이 평안했고, 믿음이 자라기 시작했다. 주님이 늘 꿈을 통해 나를 위로해주시고 안아주셨기 때문이다.

 그 즈음 사촌언니를 따라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에 가서 기도하던 중 나는 강한 성령을 체험했다. 어찌나 강한 성령을 받았던 지 마치 공중을 걸어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현동 굴레방다리 근처에 있던 집에서 여의도까지 매일 밤 철야예배를 다녔다. 통행금지로 버스가 끊기면 마포대교를 걸어 찬양을 부르며 집으로 왔다. 그 시간이 나에겐 은혜의 시간이었다.

 이번 절대영성 리더훈련을 받으면서 그 때의 가슴 절절했던 뜨거움, 예수님을 향한 첫 사랑을 다시 회복하며 많은 눈물을 흘렸다. 그 순간 하지정맥류로 아팠던 두 다리가 시원하게 느껴졌다. 에어컨 바람을 맞을 때 느끼는 시원함이 아니었다. 마치 강한 파스를 붙였을 때 ‘쏴∼’하고 느껴지는 시원함이 다리 위에서 아래로 흐르더니 다리의 고통이 사라졌다. 성령의 치유하심이었다. 할렐루야!

 또 어릴 적 접골원에서 잘못 맞춘 까닭에 아파오기 시작한 무릎의 고통 또한 감쪽같이 사라졌다. 놀라운 기적이었다. 앉았다 일어서도, 오래 걸어도,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심했던 두 다리의 고통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더 이상 두 다리를 파스로 도배하지 않아도 됐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게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기적을 베풀어주신다. 그 하나님을 믿고 기도할 때 하나님은 나에게 좋은 남편을 만나 믿음의 가정을 만들게 해주셨고, 기도할 때 가족 구원을 응답해주셨다. 또 기도할 때 두 자녀를 믿음 안에서 건강하게 키워주셨다. 특히 카투사에 입대했던 아들이 군시절 매주 금요일 여의도에서 철야예배를 드리고 싶다고 기도할 때는 하나님이 자연스럽게 예배드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셨고 우리 가정이 주를 향한 믿음을 잃지 않도록 이끌어주셨다. 이번에 다시 한번 성령의 은혜를 뜨겁게 부어주셨으니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 

 건강을 회복한 뒤 나는 집에서부터 우장산 길을 거쳐 수영장까지 40분간 걸어다니면서 기도한다. 그 시간이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의 시간이다. 더 이상 두 다리의 고통도 없어서 더욱 기쁘다. 기도하며 찬양하다보면 주님과의 관계는 더욱 좁혀지고, 40분이라는 시간은 짧게 느껴진다.

 신앙의 회복, 질병의 치유가 있도록 은혜의 시간을 마련해주신 강서대교구와 대교구장 이대영 목사님께 감사드린다. 교구활동과 교회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은 정말 우리의 영적 성장에 많은 도움이 된다.


정리=오정선 기자


이영광 성도(종로중구대교구) -

“주님 안에서 꿈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17세에 품은 ‘의사’라는 꿈 30세에 성취
교회학교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 배워


 나는 올해초에 의사국가고시에 합격하고 전북대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다. 의사가 되기까지 그동안의 과정을 뒤돌아보면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밖에 고백할 수 없다. 교회를 다니면 하나님께서 주신 꿈은 사라지지 않고 인간의 생각과 방법을 뛰어넘어 이뤄주신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데 내 삶에도 하나님은 그렇게 역사하셨다.  

 믿음의 가정에서 모태신앙으로 태어난 나는 유치부부터 아동부, 중등부, 고등부, 대학청년부까지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신앙생활 했다. 대학에 진학해서는 내가 받은 사랑을 아이들에게 전하고 싶어 교회학교 교사 봉사를 했다.

 이러한 삶은 부모님으로부터 비롯됐다. 성실하고 인자하신 아버지 이범의 장로님과 어머니 김현애 권사님은 어릴 때부터 공부에 대한 말씀은 한번도 하신 적이 없으시고 나를 믿어주셨다. 오직 당부하시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바른 신앙생활이었다. 부모님은 주일 성수와 십일조 생활을 가르쳐 주셨다. 부모님은 말씀보다는 모범적인 생활을 보이시고, 또 언제나 새벽기도회, 철야예배에서 나를 위해 기도하시며 믿음과 신뢰로 나를 키워 주셨다. 

 어릴 때 나는 평범한 아이였다. 그런데 고등학교 1학년 때 교회 하계수련회에 참석해 기도하던 중 성령침례와 방언을 받았다. 그와 동시에 의사가 되고 싶다는 꿈이 처음으로 생겼다. 하지만 열심히 공부했지만 아쉽게도 의대 진학은 할 수 없었다. 의대는 갈 수 없었지만 성균관대학교 화학과에 입학했고 군생활은 카투사에서 했다. 2년동안 열심히 군생활을 하면서 영어실력을 갖출 수 있었다. 이전에 어학연수나 학원을 따로 다닌 적이 없었는데 내게 군에 있던 시간은 영어를 배우는 귀한 시간이었다.

 제대 후 학교에 복귀해 3학년에서 4학년이 되던 시기에 교수님께서 의학전문대학원에 진학 할 것을 권유하셨다. 국가적으로 새로운 제도가 생길 때였는데 의사라는 잊었던 꿈이 다시금 생생해 지면서 나는 기도의 무릎을 꿇었다. 교수님뿐만이 아니라 주변에 여러 사람들에게 도전해 보라는 말을 많이 듣게 됐다. 나는 하나님께 “만약 졸업할 때까지 의사가 되고픈 마음이 있다면 도전하고 싶다”고 기도했다. 시험이 4학년 8∼9월에 있었는데 1월경에 많은 기도와 고민 끝에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목표가 명확해지자 밤낮없이 공부에 몰두했다. 꿈이 없었다면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학교 공부와 병행하면서 체력적으로 많이 약해졌다. 시험을 치르고 결과를 기다릴 때는 그동안의 몰입 때문인지 한쪽 얼굴에 통증이 생길 정도였다.

 얼마 뒤 합격통지를 받고 4년간의 의학전문대학원 과정을 시작할 수 있게 됐다. 의학 공부를 하면서 나는 매순간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특출난 인재들, 나보다 뛰어난 친구들이 많았다. 그들을 보면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구나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셔야 한다는 것을 여실히 깨달았다. 이영훈 목사님께서 늘 하셨던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합니다”라는 말씀을 생각하며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17살 때 품었던 꿈을 30살이 되어 이루면서 처음에는 많이도 돌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의대를 진학했으면 할 수 없었을 일반학과 대학생활의 경험과 교회 봉사 경험, 카투사 군복무의 시간들이 모두 소중하고 이 모든 것이 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의학전문대학원에서 오래전부터 기도하던 배우자에 대한 기도를 응답 받아 지난해 결혼을 했다. 이렇게 좋은 사람을 나의 신부로 맞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첫 월급을 하나님께 전부 드리고 싶다고 했을 때도 아내는 나의 마음과 뜻을 존중하고 이해해 주었다. 

 앞으로 이름을 날리는 의사가 되기보다는 내가 맡은 자리에서 삶에서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처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의사가 되고 싶다. 내가 어디에 있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내 삶의 전부이신 예수님과 동행할 것이다.

정리=복순희 기자

 


김경철 안수집사(금천대교구) -

성경을 쓰면 건강하게 쓰임받는다

이삿짐 나르다 3층 높이서 추락 왼발 골절상
강한 믿음으로 전도와 성경필사하니 치유돼
 

 나는 1994년 이삿짐을 나르던 중 발을 헛디뎌 3층에서 그대로 추락했다. 급히 병원으로 후송되었는데 병원에서 진찰결과 가장 먼저 땅에 닿았던 왼쪽 발꿈치의 뼈가 심각할 정도로 으스러졌다고 했다. 의사는 조각난 뼈를 맞추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치료 후에도 못걸을 수 있다는 소견을 내게 전했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였다. 내가 걸을 수 없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기에 이대로 못걷는다고 생각하니 아찔했다.

 깁스 등 치료를 하고 한 달이 지나 병원을 퇴원하고 통원치료를 받았다. 의사는 뼈가 잘 붙기 위해서는 꾸준히 걷는 재활치료를 받을 것을 권유했다. 완전히 부서졌던 발을 다시 내딛는 것은 상당한 고통을 동반했다. 저절로 눈에서 눈물이 날정도로 끔찍한 통증이 전해졌다. 하지만 나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한 걸음 또 한 걸음 내디뎠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 중에도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치료해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그러면서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매달 드리는 남성연합예배에 가면 한 장로님께서 ‘전도실에 와서 봉사하라’고 권유했다. ‘네 생각해보겠습니다’라며 한 달, 두 달 그리고 몇 해를 넘겼다. 이상하게 그 상황이 뚜렷하게 떠올랐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것 같아 1995년 1월 1일 전도실 문을 두드렸다. 전도실에서 4주간 집중교육을 받고 전도현장에 투입됐다. 노방전도, 병원전도, 군부대나 경찰서 방문예배 등에 빠지지 않고 참여했다. 들고 다니던 목발을 믿음으로 내려놓고 전도활동에 참여했는데 매주 전도에 참여하면 발이 퉁퉁 부어 고생했다. 때론 너무 아파서 포기하고 싶다가도 이것만 참으면 하나님께서 내 발을 완전히 치료해주실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2002년쯤이었다. 하루는 당시 전도실장님이 친구의 성경필사 간증을 전하며 성경필사에 도전할 것을 실원들에게 권유했다. 서예가로도 활동하던 나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왜 한 번도 성경을 써보지 않았을까라는 의문과 이번 기회에 성경필사에 도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일반적인 필사와 달리 한지에 붓글씨로 성경을 쓴다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한 자 한 자 정성을 들인지 약 10여 년 2012년 9월에 결국 총 45권의 한지노트에 성경을 모두 필사할 수 있었다. 당시 CBS에서 성경필사캠페인을 전개하면서 한지에 붓글씨로 쓴 내 성경노트가 방송을 타고 전시회에 전시되기도 했다. 

 그런데 성경필사를 하면서 나는 놀라운 사실들을 깨닫기 시작했다. 다리가 불편하다보니 자연스레 ‘왜 사람은 아픈 걸까?’, ‘병은 어디서 오는 걸까?’라는 의문들이 떠나질 않았는데 성경을 읽고 쓰다 보니 성경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히브리서 4장 12절이나 예레미야 17장 10절 등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걸어 들어 왔다. 이영훈 목사님의 절대긍정과 절대감사의 의미도 이해가 됐고 주님께서 왜 ‘항상 기뻐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신지도 깨닫게 됐다. 우리가 절대긍정과 절대감사, 항상 기뻐하는 것이 이런 병마나 아픔이 찾아오지 못하는 예방법이었다. 나는 이렇게 성경에서 여러 가지 건강비결을 찾았다. 나는 내가 찾은 건강비결을 이웃에 전하며 전도하고 간증했다. 

 현재 내 발뒤꿈치는 99% 치료됐다. 걸을 수 없다던 내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전혀 불편함이 없어 보일정도이니 사실상 완치나 마찬가지다. 그저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 최근 난 하나님의 뜻을 더 이해하고자 두 번째 성경필사에 들어갔다. 현재 민수기 2장을 쓰고 있다. 하나님께서 주실 더 큰 가르침과 복이 있을 것을 생각하니 매우 기쁘다. 바라기는 많은 성도들이 나처럼 성경필사에 도전하고 큰 복을 체험하길 바란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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