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숙 집사(순복음야마토교회) -

주님 만나 180도 변한 내 인생

조용기 목사 안수 후 성령 충만 받아
고지식한 남편도 하나님 자녀로 변화

 일본에서 만난 남편은 고지식하기가 하늘만큼이나 높았다. 사랑했기에 결혼했지만 서로 다른 차이로 부딪힘이 심했다. 남편과의 이혼을 심각하게 고민할 때였다. 순복음야마토교회에 출석하는 권사님의 전도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한국 음식을 먹는 등 향수를 느낄 수 있어 좋았지만 3개월 만에 교회 생활이 싫증났다.

 그 즈음 조용기 목사님이 동경에서 성회를 인도하신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를 전도한 권사님을 따라 성회에 참석했고 운 좋게 안수기도를 받게 됐지만 왠지 모를 거부감이 생겼다. 그런데 내 차례가 되자 나도 모르게 목사님의 두 손을 덥석 잡아끌고 내 머리에 올렸다. 눈물이 흐르다 못해 ‘뚝 뚝’ 흘렀다. 그 후 나는 달라졌다. 음치였던 목소리가 변해 ‘성령받았네. 성령받았네’하며 찬양을 불렀다. 성령이 뭔지도 모르면서 내 입은 계속 성령 찬양을 불렀다. 가슴은 터질 듯 벅찬 감동이 밀려왔다. 세상이 이전과 달리 아름답게 보였다.

 그러나 벅찬 감동도 잠시, 다시 내 마음은 구멍이 난 것처럼 허전했다. 그것이 성령의 소멸이라는 것을 당시에는 몰랐다. 성경이 눈에 들어왔다. 마태복음을 읽는데 말씀 한 절 한 절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팔복’이 기록된 산상수훈 말씀, 가진 것을 함께 나눴던 사도행전에 기록된 초대교회 성도들 이야기가 감동이었다. 말씀이 내 안에 들어오면서 ‘사랑’ ‘희락’ 등 성령의 9가지 열매가 삶 속에서 하나씩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하지만 ‘충성’은 좀처럼 내 안에 열매를 맺지 못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겼다. 우연찮게 파칭코에 빠져 지내는 한 여성을 만나 전도를 위해 6년간 중보기도하며, 또 남편을 주께 인도하는 과정에서 말할 수 없는 연단을 겪고 그로인해 ‘충성’의 열매가 맺혀 교회의 충직한 일꾼이 됐다. 지금은 여선교회장으로 주님을 섬기고 있다.

 남편은 불교집안에서 자란 탓에 집 안에 불상을 두고 지냈다. 교회 가는 나를 보면 늘 트집을 잡았다. 나는 남편과 함께 천국을 소망하고 싶었다. 하지만 “같이 교회가자. 예수님을 믿어라”라고 말하진 않았다. 대신 신앙생활로 인해 변화된 내 모습을 보여줬다. 예를 들어 전에는 남편이 한 마디 할 경우, 열 마디 말을 하며 ‘당신 의견이 틀렸다’고 지적했다면 성령 받은 후로는 성경이 가르친대로 남편을 존중하며 항상 웃는 얼굴로 대했다. 집안 청소를 할 때, 특히 불상 주변을 정리할 때면 주기도문을 100번, 1000번 외우면서 남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달라며 구원을 놓고 기도했다. 그러자 남편은 “나도 당신 따라 교회 한번 갈까?”하며 먼저 말을 꺼냈다. 나는 신앙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 단정한 옷차림, 주보를 보고 미리 성구를 찾는 모습, 정성껏 헌금을 봉투에 담아 준비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남편은 본 그대로 신앙생활했다. 이후 남편은 중풍으로 인해 반신불수로 고생했지만 침례를 받는 등 주님의 자녀로 지내다 2년 전 하나님 품에 안겼다.

 남편의 구원은 값진 열매였다. 10년간의 병수발로 비록 내 몸은 상해 신장 투석을 하게 됐지만 이 또한 하나님은 나를 전도의 도구로 삼아 병자들에게 복음의 증인이 되게 하셨다. 일본사람들은 김치 부침개를 좋아한다. 병원에 투석하러 가는 날이면 나는 김치 부침개를 만들어가 나눠 먹으며 복음을 전한다. 그 시간이 나는 참으로 행복하다.

 주님은 내 삶을 완전히 변화시켜주셨다. 생각도, 언어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변화시켜주셨다. 교회를 다니지 않아도 걱정 근심 없는 삶을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던 나. 하지만 이제는 기도 없이는 단 하루도 살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 따라 순종의 삶을 사는 중보자가 되게하셨다. 그런 나에게 주님은 마음속으로 음성을 주셨다. “너는 작은 예수니라” 주님 감사합니다.  

 


정정섭 장로(군선교회) -

하나님과 동행하면 형통합니다

 1945년 8월 15일 라디오에서 일본 천황이 항복문을 낭독하는 소리가 나오자, 내가 살던 황해도 구월산 주민 모두가 나와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다. 그때 나는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광복이 된 수요일부터 계속 놀고 있는데 ‘일요일에 학교로 모이라’는 사발통문을 받았다. 학교에 갔더니 두루마기를 입고 흰 수염이 난 할아버지가 서 계셨다. 학생 전부를 모아놓고 우리 학교가 원래 교회였고 자신은 목사님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에 대해 설명하셨다. 그리고 한지에 적어온 찬송가를 가르쳐 주셨다. 그날 배운 ‘예수 사랑하심을’이라는 찬송을 부르면서 집에 오자, 할머니와 어머니는 누구에게 배웠냐며 놀라셨다. 대답을 하자 “목사님이 오셨네. 목사님이 오셨어”라며 크게 기뻐하셨다.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목사님과 우리 할아버지는 친구 사이였다고 했다. 두 분이 함께 평양신학교를 다니셨지만 할아버지는 중도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친구가 목회자가 되어 고향에 오자 교회를 세우는데 큰 몫을 했다고 할머니가 말씀해 주셨다.

 해방 후 우리 교회는 축제 분위기였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공산당의 박해가 날로 심해져 갔다. 그런 중에서도 나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중학교를 다니며 나라를 빛내는 사람이 되겠다는 꿈을 안고 공부를 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이기는듯 했지만, 끝없이 내려오는 중공군으로 북방한계선(NLL)이 그어졌다.

 나는 어머니와 누님 두 분과 함께 대한민국 해군 배를 타고 백령도를 거쳐 군산항에 도착했다. 실향민이 된 우리는 군산에서 정부가 내어준 트럭을 타고 김제 공덕면 회령리 문씨마을에 정착했다. 길고 험한 피난길이었지만 하나님은 우리 가족과 함께 하셨다. 부잣집 머슴살이를 했지만 하나님은 나에게 꿈을 주셨고, 희망을 주셨다.

 시집간 누님을 따라 대전에 갔다. 역 앞에서 아이스크림을 팔면서 생활비를 벌었다. 당시 군산보안부대에서 일을 하면서 군산상고를 다니는 친척형이 있었다. 나는 형을 만나 형처럼 일하면서 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랬더니 형은 ‘알기 쉬운 영어 첫걸음’이라는 책을 선물로 주면서 영어공부를 해보라고 했다. 내가 황해도에서 공부했을 때는 소련어를 배웠기 때문에 나는 독학으로 알파벳부터 공부했다.

 대전에서 장사를 하던중 5군단에 발령이 난 군인이 계셨다. 그분은 나를 심부름하는 아이로 쓰시겠다고 했다.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신 것이다. 그래서 난 그분을 따라 강원도 5군단 부대를 향했다. 틈틈이 영어공부를 하는 나를 보신 대장님이 공부를 하고 싶냐고 물으셨다. 그러시더니 포천중학교에 넣어주셨다. 그분이  청주대장으로 발령을 받자 나를 청주중고등학교로 옮겨주셨고 거기서 졸업해 서울사범대학교 영문학과까지 진학을 할 수 있었다.

 내가 청주고등학교를 다닐 때다. 사람들은 나를 특무대장의 아들이라고 착각했다. 그래서 부잣집 딸이 나를 좋아하기도 했다. 나는 아니라고 했고 서울로 가서 공부를 한 후 청주지역에 학교 발령 요청을 한 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사범대학을 나오면 먼저 발령을 받고 1년간 학보로 가면 군복무를 마치는 것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군제도가 바뀌어 3년 사병생활을 해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너무나 아찔해 장교시험을 봤다.

 하루는 나를 특무대장의 아들로 착각을 했던 그 아가씨가 8년 만에 찾아와 결혼을 하자고 했다. 오랫동안 결혼을 위해 불공을 드렸다면서 말이다. 우린 결혼을 해서 2남 1녀를 낳았다. 나는 신앙생활을 계속 했지만 아내를 전도하기란 쉽지 않았다. 부대 안에는 교회도 있고 절도 있었기 때문에 각자의 종교대로 예배를 드렸다. 나는 아내를 위해 기도했다. 좋으신 하나님은 너무나도 인격적인 방법으로 아내를 교회로 인도하셨고, 교회에 나오자마자 십일조 생활을 했다. 군인의 월급은 뻔했다. 하지만 십일조의 축복은 물질의 축복을 넘어 자녀의 형통함으로 채워주셨다. 중령으로 예편한 후 지금까지 내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면 감사뿐이다. 좋으신 하나님께 감사 또 감사드린다.


유다희 학생·문미경 성도(관악대교구)-

뇌출혈로 쓰러진 고등학생 딸 기적으로 살아나


골든 타임 놓치고 ‘가망 없다’ 병원 판정
기도의 힘으로 의식븡건강 회복해 학업 시작

 2014년 12월 2일 고등학교 1학년인 딸 다희가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아이는 학교에서부터 어지럽고 구토를 해 보건실에 가서 쉬었지만 하굣길에 또다시 구토가 나서 지하철 역 화장실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쓰러진 것이었다. 청소하시는 분이 한참 문이 닫힌 걸 이상히 여겨 문을 열어보니 다희가 쓰러져 있었다고 한다. 119를 통해서 병원에 갔지만 의료진은 이미 3시간이나 지나 수술도 못하는 상태라고 했다. 그래도 우리 가족은 희망을 걸고 수술을 해달라고 했다. 저녁 7시에 시작한 수술은 새벽 1시가 넘어서 끝이 났다. 의료진은 가족들을 불러모았다. 수술했지만 깨어날 가능성이 없고 일어나도 일상생활은 불가능 할 거라는 말을 전했다.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아이의 모습은 처참했다. 죽은 사람처럼 미동도 없는 모습에다 의료조치를 하느라 손끝 발끝까지 성한데 하나 없이 다 멍이 들어있었다.

 원인은 뇌출혈이었다. 시어머니 김희재 권사님과 나는 혹시나 자리를 뜨면 아이가 잘못될까봐 중환자실 앞 의자에 앉아 하루 종일 기도에 매달렸다. 주일마다 병원 내 예배처소에서 예배드리고 때마다 기도했다. 다희를 일으켜주실 분은 하나님뿐이었다.

 쓰러진지 13일째 이영훈 목사님이 소식을 듣고 찾아 오셨다. 목사님이 기도해주신 그날 다희는 눈을 떴다. 그리고 두 번째 오셨을 때는 눈물과 침을 흘려서 목사님께서 닦아주셨다. 꼭 듣는 것처럼 울기도 했다. 목사님이 세 번째 방문해 주셨을 때는 사람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면서 표현을 했다. 1월에 오셨을 때는 말을 못할 땐데 쓰러진지 27일 만에 ‘엄마’라고 처음으로 말을 했다.

 이런 기적들이 일어날 때마다 우리 가족은 더욱 기도하며 감사했다. 중환자실에서 집중치료실로 옮겼고. 2월 6일에는 재활전문병원으로 옮겨 재활에 힘썼다. 의료진들도 처음에 가망이 없다고 한 말과는 달리 회복이 빠르다고 다들 놀라워했다. 그때마다 우리 가족은 기도의 힘이라고 강조했다. 주사를 하도 많이 맞아서 주사 공포증이 생길 정도고 하루에도 몇 번씩 토를 하면서도 열심히 재활에 힘을 기울였다. 깨어난 후 새로 태어난 아기처럼 되어 버린 다희는 점점 발전하면서 할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났다.

 말을 할 수 있게 됐을 때 하루는 다희가 잠자기 전 생사를 오갔을 때 당시 꾼 꿈 이야기를 했다. 자기가 교복을 입은 모습으로 큰 강 앞에 서있는데 날씨가 흐려 회색빛 하늘이 많이 무서웠다고 한다. 강에는 배가 떠있고 거기서 어떤 사람이 종을 세 번 치고 배안에 사람들이 앉아 있는데 표정은 침울했다고 한다. 강 건너에는 문이 두개가 보이고 사람들이 줄을 서있는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원래 다희는 요단강을 모르던 아인데 꿈속의 그 강을 요단강이라고 말을 했다. 그러면서 자기는 너무 무서워서 주저앉아 울고 있는데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긴 원피스처럼 치마같은 옷을 입고 나타나셨고 얼굴이 빛으로 환하셨다고 한다. 그 옆에는 예수님이 계셨는데 다희에게 사랑한다고 말씀을 하셨다는 꿈 이야기를 했다.

 재활을 통해서 건강을 회복한 다희는 드디어 3월부터 복학을 해서 학교를 다니고 있다. 모든 감사와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린다. 다희가 쓰려졌을 당시부터 기도해주신 서영희 목사님과 관악대교구 성도님들, 군산에 계시면서도 다희를 위해 매일 새벽기도하신 고모부님, 매일 같이 문병와준 다희의 학교 친구들, 병원비와 생활에 많은 도움을 준 친정 시댁 형제들께도 깊이 감사한다. 앞으로도 우리 가족은 이영훈 목사님 말씀처럼 절대 긍정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면서 생명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을 전하고 싶다.      


정화선 장로(금천대교구) -

“복음의 희망을 전달하겠습니다”

전도로 하나님 기쁘게 해드리니
내 마음에 더 큰 감동이 밀려와

 살면서 ‘하나님에게 받은 사랑이 너무나도 많은데 무엇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갚을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나는 하나님께 보답하고 싶은 마음뿐인데 하나님을 기쁘게 하면 내 소원도 들어주신다는 시편 37장 4절 말씀에 큰 감동을 받았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방법은 전도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나이는 들었지만 인생 선배가 하는 이야기라면 더 귀 기울여 줄 것 이라고 믿고 전도에 총력을 기울인지 3년이 지났고, 감사하게도 그간 세 번의 전도상을 받았다.

 나는 하나님을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먼저 소통하기 위해 노력한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말은 ‘감사합니다’이다. 처음 만나는 사람한테도 항상 감사하다는 말을 한다. 내가 감사하다고 하면 사람들은 도대체 뭐가 감사하다는 건지 당혹스러워할 때가 많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면 그 사람들은 나에게 지인이 된다. 그렇게 전도를 하면 거부하지 않는다. 나는 매주 금천구 일대에 복음을 전하고자 ‘행복으로의 초대’와 ‘신앙계’를 들고 전도한다. 그런데 거기서 나를 통해 전도가 되는 경우는 적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서울 시내 각 CEO들을 나에게 보내주시고 서울을 교구삼아 전도하게 하신다. 각 분야의 사업가들을 만나 그들에게 교회 이야기를 꺼내면 처음에는 거부감을 갖던 사람도 나의 삶에서 감사와 행복이 묻어 나오는 걸 보고 궁금증을 갖고 교회에 나온다. 내가 전도의 마음을 품고 실천하자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내주시고 그들을 전도하게 하셨다.

 내가 말로써 복음을 전하지만 그것을 이루시는 것은 하나님이다. 전도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한 사업가를 우리 교회로 인도했다. 그런데 6개월 동안 잘 나오던 사람이 어느 날부터 갑자기 교회에 출석을 하지 않았다. 나는 채무자로 안양 교도소에 들어갔다는 그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고 죄가 생각보다 무거워 그는 며칠 후 경북 청송으로 가게 됐다. 중죄인들이 가는 곳에 내가 전도한 사람이 간다니 마음이 너무도 아팠다. 게다가 이 사람이 교회에 다니던 기간 동안 상당한 금액의 손해까지 끼치고 교도소로 갔다는 소식까지 들리면서 나는 억장이 무너졌다. 나 때문에 이런 사람을 알게 됐다는 말이 들려올 때마다 마음이 너무 힘들어 울며 기도했다.

 그런데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얼마나 놀랍고 귀한지. 청송 교도소에 간 그 사람이 그 교도소에 있는 무기수들을 전도했다. 전도된 무기수들이 믿음이 얼마나 좋은지 나에게 성경을 부탁해 보내줬더니 지금까지도 편지를 보내온다. 그 중 한 무기수의 편지 내용이 나를 감동시켰다. “장로님, 내가 20년 동안 교도소에서 살고 있고 얼마동안 더 살게 될지 모르지만 앞으로 착하고 성실하게 하나님 뜻대로 살겠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이 하신 일에 감탄이 나온다. 그 후 내가 전도했던 그 사람에게도 희망찬 소식이 왔다. 본인은 여주에 있는 교회가 설립한 교도소로 가게 됐으며 머지않아 나올 거라고, 본인이 나오면 그동안의 잘못을 뉘우치고 열심히 신앙생활하며 돈도 꼭 갚겠다고 기다려달라고 편지가 왔다.

 “나이 들고 보잘것없는 나를 통해 큰 역사를 보여주신 하나님.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겠다고 한 전도가 나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니 감사합니다. 사람을 만나게 한 것도 하나님, 전도가 또 다른 전도로 이어지게 하심도 하나님. 나의 인생 끝까지 주의 복음 전해 사람들에게 희망을 선물하기를 소원합니다”


이경희 권사(서대문대교구) -

주님 손잡고 일어서자 180도 바뀐 내 인생

주께 드린 첫 기도 ‘나누는 사람 되고 싶다’
주님 의지할 때 사업 번창, 선교 위해 물질 후원
대장암 3기 선고, 치유의 손길로 완치 판정 받아

 큰 아이가 어릴 적 나는 지인의 인도로 순복음교회에 온 적이 있다. 그 때 조용기 목사님의 설교가 마음에 들었다. 내가 교회를 다니게 되면 꼭 순복음교회로 오겠다고 다짐했지만 마음뿐이었다. 두 자녀가 어릴 적 우리 가정은 사는 것이 어려웠다. 운전을 하던 남편은 불의의 사고로 더 이상 운전을 못하게 됐고, 우리는 친정 언니가 운영하는 국수 공장에서 일했다.

 북가좌동 한 성결교회 유치부를 다니던 아들이 어느 날 “엄마, 예수님을 믿어야 천국 간대. 엄마 교회 가자”고 말했다. 아들의 소원을 들어 주겠다고 마음먹자 문득 순복음교회가 생각났다. 당시 순복음교회는 서대문에서 여의도로 옮긴 후 성도 수 16만 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때 교회에 온 나는 하나님께 ‘나도 이웃에게 나눠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집 한 칸도 없던 나의 입에서 나온 첫 기도였다. 북가좌동에서 여의도까지 오려면 차를 여러 번 갈아타야 했지만 주님을 바라보며 열심히 신앙 생활했다.

 그런 내게 기회가 생겼다. 남편과 함께 국수와 만두피를 만들어 납품을 시작한 것이다. 크리스천으로 이웃에게 본이 되고자 누구보다 성실히 일했다. ‘나는 할 수 없으되 주님은 하실 수 있으니 나를 도와 달라’고 늘 기도했다. 문제가 닥칠 때면 늘 찬송을 부르며 힘을 얻었다. 지금도 그때 많이 부른 찬송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그렇게 살 순 없을까…남을 위하여 당신들의 온몸을 온전히 버리셨던 것처럼”을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주님께 바라기만 했지, 나는 진정 무엇을 드렸나’ 생각하던 차에 주변에서 교회 봉사를 권유했고, 지금까지 20여 년 세월을 (사)순복음실업인선교연합회 북미캐나다선교회에서 봉사하고 있다. 해외 선교에 동참하며 주를 섬기자 내 믿음은 신기하게 쑥쑥 자랐다. 그와 함께 사업도 번창해갔다. 선교 후원은 물론 개척교회, 경로당 등 주변에서 국수를 필요로 하면 이 또한 아낌없이 후원했다. ‘나도 남에게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내 첫 기도가 응답된 것이다. 주님 사업을 위해 내게 있는 물질을 드릴수록 거래처가 늘어나는 등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내 집 마련이라는 ‘장막의 축복’도 받았다. 남들이 “장사가 안 된다, 어렵다”고 말할 때 우리 공장만은 거래처 납품으로 늘 바빴다.

 그런데 2002년 12월, 느닷없이 대장암 3기 선고를 받았다. 그 해도 사람들과 나눠 먹을 김장 400포기를 한 뒤 피곤해 병원을 찾았다가 암 덩어리가 내 대장을 막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주변에서는 “이게 무슨 일이냐”며 슬픔에 잠겼다. 그런데 나 자신은 평안했다. 주님이 나를 붙들어주고 계셨다. 수술한 날과 이튿날 밤에는 꿈을 통해 주님이 아픈 부위에 손을 얹고 안수해주시는 환상을 보았다. 주가 고쳐주신다는 확실한 믿음이 생겼다. 이후 병원에서는 항암치료 후 완치 판정을 내렸고, 현재는 건강한 모습으로 더 바쁘게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주가 주신 ‘덤 인생’이기에 주를 위한 일이라면 선교와 구제에 적극 나섰다.

 우리 회사는 직원이 15명이며, 250여 군데 업체에 면과 만두피를 납품하는 주식회사로 성장했다. 올해도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하지만 우리는 지속적으로 번창하고 있다. 엄격한 위생설비를 갖추기 위해 공장 부지 확장을 놓고 기도하던 중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250평 규모의 땅을 빚 없이 싸게 매입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인도해주시기까지 했다. 현재는 공장 건축만을 남겨두고 있는 상황이다.

 감사한 일이 또 있다. 바로 외손녀의 서울대 합격이다. 서울대를 비롯해 연대·고대 총 5개 학과에 합격한 손녀는 이중 서울대 자유전공학부에 입학했다. 고난을 딛고 오직 주님 말씀 따라 ‘절대 긍정·절대 순종’했더니 하나님께서 열린 문의 축복을 내게 허락해주신 것이다.

 그 옛날 어린 아들의 입술을 통해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믿음의 가정 만들어주시고, 헌신하는 일꾼 되게 해주셨으니 이보다 더 큰 감사가 어디 있겠는가. 모든 감사와 영광을 주께 올려드리며 더 큰 헌신을 다짐한다.   


임순이 집사(동작대교구) -

30년 앓던 고질적 방광염 하나님 은혜로 치유

전문병원 명의 찾아 다녔지만 차도 안보여
주일 3부 예배 신유기도 때 기적 체험 완쾌

 나는 동네 미용실을 운영하며 살던 평범한 주부였다. 동네 미용실이라서 매우 바쁘지는 않았지만 주부로서 혼자 미용실을 운영하기에는 힘들 때도 있었다. 1986년에 큰 아이를 낳았는데 육아를 하며 미용실도 운영하느라 피로했는지 두 달에 한번씩 전에 없던 방광염으로 매우 고통을 받았다. 그런데 차츰 발병주기가 짧아지더니 1990년에 둘째 딸을 낳은 후에는 매주 병원을 찾아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로 심해졌다. 염증은 만성이 되어 나의 몸과 마음을 메마르게 했다. 방광염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을 여러 곳 다녀 봐도 아무 소용없었다.

 질병의 고통으로 나는 극도로 예민해져서 남편과 두 자녀에게는 물론, 주위 사람들에게까지 신경질적으로 행동했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생활태도마저 무너지는 내 모습에 너무도 힘들었다. 모두가 원망스럽고 나 자신만 고통 받는 것 같아 한탄스러웠다.

 대학병원에서 방광특수촬영 검사를 했는데 진단결과는 방광에 침투한 극소량의 세균이 몸이 피곤하고, 스트레스가 많을 때 활동해 방광에 염증을 유발한 것이라는 의사의 소견을 들을 수 있었다. 의사의 진단을 받은 후 생각해보니 방광염 초기에 큰 아이를 출산하고 미용실 운영으로 몸을 돌보지 않고 고생했던 때가 떠올랐다.

 매 주일 목사님께서는 “좋으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예비하셨으니 매 순간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라”는 설교를 해주셨지만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 같다. 육아와 미용실 운영으로 바쁘고 힘들게만 살아왔던 시간들이 기억 속에 스쳐지나가 하나님께 회개하며 기도했다.

 그 즈음 1995년에 이사를 하게 되면서 몸 상태도 좋아져 신앙생활을 차츰 소홀히 하게 됐다. 예배생활도 기도생활도 점차 줄어들었다. 나는 다시 주위의 큰 병원들, 비뇨기과 전문으로 알려진 의사들을 찾아다니며 치료를 위해 애썼다. 그런데 의사를 만날 때마다 마음속에는 불신만 생겼다. 점점 마음은 낙심이 되고 몸은 지칠대로 지쳐 의욕도 사라졌다.

 나는 지난해까지 병원진료를 받고 처방받은 약은 물론 몸에 좋다는 탕약, 약초도 복용하며 다시 방광특수촬영 검사를 했지만 20년 전 진단받았던 그대로였다. 아무런 차도가 없었다. 나는 낙심했고 심지어 이제 병을 인정하고 있는 내 모습이 너무 비참했다.

 그 때에 불현듯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나와 내 가정만을 위해 살아왔던 시간들을 깨닫고 회개했다. 간절히 기도할 때 야훼 라파, 치료의 하나님이 떠올랐다. 마음속에 “하나님께 기도해보자. 성경이나 주위를 둘러봐도 더 심한 병이나 더 극심한 고통 받는 사람도 고쳐주시는데 나의 하나님이시니 30년 넘은 나의 이 병도 고쳐주실거야”라는 믿음이 생겨났다.

 올해 1월 나에게 기적이 일어났다. 주일 3부 예배를 드리는 내내 나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간절하게 기도했다. “하나님∼ 이영훈 목사님을 통해서 하시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습니다. 예수님을 대신해서 목사님께서 말씀을 주시고 기도해주시는 것으로 믿습니다. 하나님 제발 오늘 성령님께서 목사님이 기도하실 때 내 병이 나았다고, 30년 넘게 고생해서 이제 고질병이 되어버린 방광염이 나았다고 말씀 좀 해주세요”

 이영훈 목사님의 설교시간이 끝난 후 모두가 통성기도를 하고 목사님께서 신유기도 하실 때였다. 그 때 목사님이 “이 자리에 수년 동안 방광염에 시달리신 분이 오셨는데 하나님께서 치료해 주신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깜짝 놀라 옆에 앉아 기도하고 있던 남편에게 내 기도가 응답되었음을 고백했다.

 주일예배를 마치고 이틀 후 나는 기적을 체험했다. 30년 넘게 나를 괴롭히던 지긋지긋한 방광염은 물론 항문 주변의 알레르기 질환까지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고쳐주신 것이다. 할렐루야!
 이제는 더 이상 아프지도 않고, 약을 먹지도 않는다. 오직 기도, 오직 감사로 살아가고 있다. 질병의 저주를 끊으시고 건강과 구원의 기쁨을 회복시켜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신종식 장로(광주순복음교회) -

신앙이 영재를 키운다

어린이집 신앙교육이 자녀와 우리 부부 변화시켜
자녀들은 우리의 자랑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랑

 매주일 저녁 9시면 미국 보스턴에 살고 있는 아들에게서 안부전화가 온다. 하나님이 주신 꿈을 안고 바이오연구원으로서 일하는 아들과 며느리, 어린 손자와 통화를 하고 나면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린다. 자녀들은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요, 하나님의 자랑이기 때문이다.

 내가 신앙생활을 하게 된 것은 아들 형호와 딸 지혜가 광주순복음교회에서 운영하는 어린이집과 유치원을 다니고 나서다. 회사 근처 광주순복음교회가 조그만 성전이었을 때 운영했던 어린이집이 다른 어린이집들보다 교육 프로그램이 좋았다. 크리스천이었던 아내의 바람도 있었고 교육을 위해 어린 남매를 그 어린이집에 입학시키고 난 후 알게 된 것은 신앙이 교육의 기본이고, 신앙이 인재를 만든다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먼저 신앙을 배웠고, 우리 부부는 아이들과 함께 자연스럽게 교회를 출석하며 신앙을 가지게 됐다.

 자녀 교육은 모든 부모들의 고민일 것이다. 특히 대한민국은 더 하지 않겠는가. 우리 아이들은 조기교육, 영재교육 열풍과 상관없이 신앙으로 성장했다. 아침에는 성경묵상을 했고, 주일에는 철저하게 예배를 드렸다. 신앙 안에서 잘 자라주는 아이들이 감사했다. 그래서 가만히 있자니 마음에 부담도 됐다. 다른 아이들도 이런 신앙 교육을 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주일학교에서 교사로 봉사를 시작했다. 교회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신앙과 말씀의 중요성을 더욱 깨달을 수 있었다. 

 아들은 과학자가 되고 싶다고 했다. 광주과학고등학교를 들어간 아들은 기숙사 생활을 했다. 광주과학고등학교는 광주영재학교로 불린다. 그만큼 공부만 하는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그러나 아들은 주일 예배는 무조건 교회에 와서 드려야겠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혼자 학교에서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들어가더니, 나중에는 친구 3명이 따라붙어서 예배를 드리러 나왔다. 오전 7시 예배를 드리고 학교로 복귀했는데, 학교 아침식사가 오전 8시에 나온다는 것이다. 예배를 드리고 학교를 들어가면 아침을 거를 수밖에 없는 아이들이 마음에 걸려서 이 아이들이 수능시험을 볼 때까지 주일마다 도시락을 싸서 함께 예배를 드렸다. 예배를 드리고 난 후 학교안에서 맛있는 아침 도시락을 먹을 수 있게 했다.

 아들은 서울대 공대를 들어갔고 함께 교회를 다녔던 아들 친구들도 서울대와 고려대 등 모두 다 좋은 학교로 진학해 지금도 신앙생활을 잘하며 살고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복이 임한다는 것을 이 아이들을 통해서 증명이 된 것이다.

 서울대에서 공부를 마친 아들은 삼성장학회에서 주는 장학금으로 MIT공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지금은 보스턴에서 바이오연구원으로 있다. 4차 산업과 관련된 연구로 인류에 이바지하고 싶다는 것이 아들의 꿈이다. 또 딸 지혜도 남미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IT 관련 책임자로 있는 남편과 함께 있다. 자녀들과 지역 교회를 잘 섬기면서 말이다. 사람들은 자녀 교육을 말할 때마다 유대인을 말한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은 자식이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임을 가장 잘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신앙으로 잘 자라서 해외에서 조국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아들과 딸이 나는 참 자랑스럽다. 주변에서 우리 아이들을 아는 사람들은 자식을 잘 키웠다고 한다. 그때마다 나는 하나님이 키우셨다고 말한다. 자녀들은 부모의 자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랑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


권경희 집사(강서대교구) -

유방암의 두려움서 해방시켜주신 하나님

절망의 위기에 ‘감사의 고백’ 반복해
이영훈 목사 신유기도 때 치유 확신

 두 아들을 키우고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며 제대로 몸을 돌볼 겨를 없이 바삐 살아왔다. 건강보험공단에서 실시하는 건강검진이 나왔지만 차일피일 미루다 지난해 12월 유방암 검진을 예약했다. 마침 건강 검진을 받기 전부터 오른쪽 겨드랑이 밑이 아팠던지라 이번에는 꼭 검사를 받아보기로 했다. 유방암 검진으로 엑스레이 검사만 나왔지만 좀더 세밀한 검사를 받기 위해 초음파 검사도 신청했다. 하지만 대기자가 많아 예약이 쉽지 않았다. 우선 엑스레이 검사만이라도 받아보자는 생각에 집 근처 병원을 찾았다.

 엑스레이 검사 후 다른 검사를 기다리다가 혹시 하는 마음에 “오른쪽 겨드랑이 밑이 아파서 그러니 오늘 초음파 검사가 받을 수 있을까요?”라고 담당자에게 물었다. 담당자는 잠시 머뭇거리다 검사를 진행했다. 그런데 검사 후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오른쪽은 멀쩡한데 생각지도 않던 왼쪽에 혹이 발견됐다”고 하는게 아닌가. 더군다나 혹 모양이 좋지 않다며 조직검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자 나도 모르게 화가 나기 시작했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성격인데 ‘내가 왜 조직 검사를 받아야 해? 혹시 암?’하며 이유 없는 분노가 일어났다.

 그 순간 성령께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는 말씀을 마음에 주셨다. 즉시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리고 ‘오른쪽이 아팠는데 아무 이상이 없게 해주신 것 감사합니다’ ‘검사를 통해 알지 못했던 왼쪽에 혹이 있음을 발견하게 해주신 것 감사합니다’ ‘초음파 검사를 받게 해주셔서, 또 환경을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쳐주실 것을 확신하니 감사합니다’라고 계속 고백했다. 중간에 불안한 마음에 들 때면 성령은 “강하고 담대하라”는 말씀으로 위로를 주셨다.

 그리고 성탄절을 맞이했다. 강서대교구실에서 안수기도를 받는데 환상 가운데 엄청난 빛을 보았다. 희망이 생겼다. 이틀 후인 27일, 조직 검사를 위해 병원을 찾았다. 간호사가 마취할 때 아플 거라 했지만 통증이 전혀 없었다. 검사는 잘 끝났고, 결과는 일주일 후에 나온다고 했다.

 나는 믿음으로 나을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입으로나 생각에서조차 부정적인 상황, ‘암’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았다. 오직 주께만 기도했다. 그래도 마음속에서는 ‘내가 무슨 병일까, 내가 무슨 병일까’ 걱정이 들었다.

 정신없는 2016년을 보내고 2017년 밝은 새해를 맞이했다. 올해 1월 1일은 성찬 주일이었다. 이날 히브리서 11장 6절로 ‘믿음으로 전진하라’는 제목으로 설교하신 이영훈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대속의 은혜에 감사했고, 하나님께 기도로 조직 검사 결과가 좋게 나오기만을 간구했다. 그런데 신유기도 시간에 이영훈 목사님이 놀라운 말씀을 하셨다.
 “지금 이 자리에 ‘내가 무슨 병일까 내가 무슨 병일까’걱정하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고쳐주셨다”고 선포하셨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1월 3일 검사 결과를 듣고자 병원에 갔더니 의사 말이 “검사 결과 전혀 이상이 없습니다”라는 것이 아닌가. 할렐루야! 좀더 세밀한 검사를 위해 염색체 검사까지 받았는데, 하나님께서 이렇듯 나의 걱정을 아시고 아무 일도 없게 해주셨다는 것이 기적이었다.

 나는 이번 일을 통해 내 신앙을 되돌아보게 됐다. 대학 시절 CAM대학선교회 캠퍼스 리더(CL)까지 했는데 그동안 나의 신앙이 나태해지진 않았는지. 이제 다시 신앙의 열정을 회복하고 온전히 주를 위해 사는 ‘절대 감사 절대 순종’의 일꾼이 될 것을 다짐한다.



안행균 안수집사(관악대교구) -

불안의 늪에서 건져주신 하나님

젊은 시절 술 먹고 방탕한 삶을 살다 주님 만나
진정한 삶의 기쁨 찾고 봉사할 때 가정에 복 주셔


 나는 40여년 전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비록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도 그 순간을 생각하면 절로 눈물이 난다.

 당시 나는 친구들이랑 술 먹고 놀기만 좋아했다. 무엇하나 겁날 것 없이 당당하게 살아왔는데 갑자기 어느 날 부터인가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다가왔다. 몸이 어디가 안좋은 것 같이 느껴지고 마음에 불안감이 찾아왔다. 매일 같이 직장에서 퇴근하면 병원을 다니며 검진을 받아봤지만 별 이상한 부분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늘 불안한 마음이 커져만 갔다. 지금이야 모든 병의 근원이 마음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당시에는 그런 것을 모르니 늪에 빠진 듯 불안감에 나는 꼼짝달싹할 수 없게 됐다.

 어느 정도로 심각했냐하면 달리는 차들 사이를 뛰어들고 싶다고 생각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증상이 심각했던 나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가게 된 곳이 여의도순복음교회였다. 이전부터 주변에서 내게 교회를 가자고 말한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동생은 여의도순복음교회를 강력하게 추천했는데 신림동에 사는 나는 굳이 거기까지 가서 예배를 드려야 하냐며 몇 번을 거절했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 것이 처음 교회에 갔음에도 불구하고 예배 후 대교구사무실에 가서 기도를 받는데 ‘내가 나음을 받았구나’라는 확신이 들었다. 신앙이나 믿음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생각이 어떻게 들었는지 지금도 의문이지만 그 때부터 예배란 예배는 다 찾아다니며 참석했다. 부흥회, 남성구역예배 등 예배만 참석하면 기쁨이 넘쳤다. 특히 주일예배 신유기도 시간은 큰 은혜였다. 한 번은 기도시간에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꼭 나를 상담하고 기도하시는 것처럼 기도해주셔서 깜짝 놀란 적도 있다.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난 후 두 가지를 열심히 실천하고 있다. 하나는 성경읽기이고 또 하나는 1992년부터 시작한 안수집사회에서의 봉사다. 현재 안수집사회 교통실에서 봉사하며 주일에 세계선교센터 인근에서 성도들의 교통안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또한 성경읽기는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스스로에게 내준 숙제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하루에 반드시 3장을 읽었는데 지금은 평균적으로 4장 이상 읽고 있다. 그렇게 해서 지금까지 신구약을 통틀어 총 35독 정도 했다. 성경을 읽으면서 힘이 나는 구절은 반드시 메모를 해서 암기하고 있다. 그렇게 지금까지 외우는 구절이 약 400구절 정도가 되고 매일 같이 읽고 있다. 특히 가정예배 때 조용기 목사님이 설교시간에 말씀하셨던 걸 떠올리며 시편 91편을 암송한다. 이렇게 매일 말씀을 묵상할 때면 하나님께서 위험한 순간에는 피할 수 있게 인도해주시는 등 삶에 기적이 늘 함께 한다.

 나를 마음의 질병에서 고침 받고 우리 가족을 구원받게 해주신 것도 감사한데 연이어 감사할 일이 있었다. 우리를 따라 신앙을 이어 받은 아들이 대학 기독동아리에서 활동하면서 단기선교를 다니며 믿음을 키우더니 주의 종이 되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 믿고 아들을 위해 중보하고 응원했다. 아들은 일반대학 졸업 후 아르바이트를 하며 신학대학원을 다녔고 동아리에서 만난 자매와 결혼해 지금은 파주에서 교회를 개척해 열심히 목회하고 있다. 

 목사님들의 설교 중에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기쁨이란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내가 그 기쁨을 체험하고 나니 봉사도 성경 말씀을 읽는 것도 즐거울 뿐이다. 바라기는 많은 성도들이 내가 체험한 기쁨을 체험하고 함께 봉사하면서 더 많은 은혜를 나누기를 소망한다. 할렐루야.


정리=정승환 기자

 


남오우 안수집사(서대문대교구) -

‘파더스드림’은 우리 가정의 버팀목

좋은남편·좋은아빠로 사는 길, 파더스드림 8년 봉사 결실
모든 가정들이 행복해질 때까지 돕는게 나의 목표

 나는 전통적인 유교 집안에서 태어나 익숙한 유교 문화에 길들여지며 성장했지만 예수님을 잘 믿는 신실한 아내를 만나 새 삶을 살게 됐다. 아내가 나를 위해 눈물로 기도한 덕분인지 2002년 어느날 나는 교회에 들어가 자연스럽게 예배에 참석하게 됐다. 

 노래 부르기를 유난히 좋아했던 나는 어릴 때부터 힘든 것들에 대한 위로를 세상 노래로 풀었는데 교회에 와서 찬양을 드려보니 내가 전혀 알지 못했던 별천지가 있는듯 했다. 어찌나 그 찬양이 마음을 울리고 은혜가 되는지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 시간이 너무 귀하고 좋아서 성전을 떠나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또 우리 교구 지역장님이 나의 신앙생활을 많이 도와주셔서 빨리 적응할 수 있게 됐다. 이제는 내가 지역장이 되었고 그 지역장님에게 받은 사랑을 되갚는 마음으로 지역원들을 열심히 섬기고 있다.  

 나는 동대문에서 원단 사업을 했는데 잘나가던 회사에 어느날 어려움이 닥쳤다. 그럴수록 나는 하나님을 더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열심히 기도했다. 회사가 어려워도 아내와 나는 십일조에 충실했고 작정헌금을 드리면서 기도했는데 아내는 언제나 성숙한 믿음으로 나의 든든한 동역자가 되어 주었다. 잠시 사업을 접고 다른 분야의 일을 했었지만 열심히 하나님께 매달리고 또 매달린 결과 하나님은 다시 내가 하던 사업을 일으켜 주셨다.

 2009년 어느날 나는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실시하는 ‘파더스드림’이라는 영성훈련 프로그램에 참석하게 됐다. 그 프로그램은 내 인생에 있어 커다란 터닝포인트가 됐다. 나는 파더스드림을 통해 좋은 아빠로 좋은 남편으로 좋은 가장으로 다시 태어나는 특별한 계기가 되었고 파더스드림 6회 수료후 지금까지 파더스드림 스태프로 봉사하고 있다. 파더스드림은 우리 가정에서 따뜻한 난로 역할을 해주고 있다. 사업을 하면서 재정적인 어려움이 다가왔을 때 아내와 이런저런 다툼이 생겨 가정이 깨질뻔한때가 있었지만 파더스드림에서 배웠던 가정의 소중함과 남편의 역할이 그때마다 내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 나는 내가 파더스드림에서 배운대로 좋은 남편과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면서 큰딸의 영국 유학 뒷바라지를 열심히 했고 동대문 사업장에서 만난 목사님이 멘토가 되어 주셨다. 하나님 은혜로 유학을 마친 큰딸은 홍콩 근무를 거쳐 지금은 한국주재 외국 회사에 다니며 열심있는 신실한 청년으로 살고 있다.

 또 아내와 두 딸은 서대문에 있는 송죽원이라는 고아원에서 봉사하며 가정이 깨진 어린아이들과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나님 사랑을 전하며 열심히 살고 있다. 나는 연희교구 총무일을 4년째 하고 있으면서 지금은 파더스드림 회장직을 맡아 열심히 봉사하고 있다. 파더스드림이 나의 가정을 유지한 끈이 되어 주었기 때문에 요즘처럼 쉽게 깨지는 또다른 가정을 위해 열심을 더 내고 있다. 깨지려던 가정이 파더스드림에서 훈련을 받으면서 다시 화해하고 따뜻한 가정으로 바뀌는 모습들을 여러번 보았다. 그래서 나는 파더스드림은 단순히 교회 프로그램을 넘어 가정을 지킬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라고 생각하고 그 버팀목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길 바라면서 열심히 봉사하고 있다.

 요즘에는 아내나 남편한테 막 대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고 그로 인해 깨지는 가정들도 너무 많다. 나는 파더스드림을 통해 이런 가정들을 돕고 싶다. 그래서 더 전문적으로 배워볼 욕심에 사회복지와 심리상담학을 공부하고 있다. 

 가정천국을 이루는 것이 나의 최종목표다. 이런 열망으로 매주 수요중보기도 후에는 파더스드림 스태프들을 대상으로 한 시간 동안 기타를 가르치고 있다.

 요즘에는 삶이 너무 외로워서 그 고독 때문에 죽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그들에게 가족이 되줄 수 있는 곳이 교회이고 파더스드림이라고 말하고 싶다. 파더스드림을 통해 가정이 회복되길 바란다. 교육이라기보다는 아버지에 대한 경험이고 아버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파더스드림을 통해 내가 받은 은혜를 앞으로도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나누어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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