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앞에서 생명을 만나는 봉사로 ‘감사’ -

박경자 권사(마포2대교구)


죽음 앞에서 생명을 만나는 봉사로 ‘감사’
갑자기 찾아온 급성뇌병변 치유
기적속에 새 삶 얻고 헌신의 삶 다짐

 호스피스 봉사에서의 만남은 짧게는 몇 주에서 길게는 몇 달이다. 봉사를 하면서 만난 사람들과는 죽음으로 헤어지게 된다. 우리는 그 짧은 시간 동안 가족들에게도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털어놓는 사이가 되어 많은 대화를 한다. 그때마다 깨닫는 것이 있다. 하나님 앞에 서서 모든 것을 내려놓은 자들이 진정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이, 세상에서 중요하다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는 것이다. 내 경우도 죽음의 문턱을 넘어 주님을 만났고,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됐다. 그래서 호스피스 봉사가 시작된 것이다.

 20년 전, 나는 부엌에서 일을 하고 있던 중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놀란 남편이 119에 전화를 걸어 긴급하게 병원으로 옮겼지만, 급성뇌병변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의사들은 수술을 해도 가망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남편의 간곡한 부탁으로 각서까지 쓰고난 후에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담당의사는 수술을 받고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을 확률은 1% 미만이라고 했다. 당시 하나님도 알지 못했던 나에게 주님은 1% 기적을 선물로 주셨다. 새 생명을 허락해 주신 것이다. 모두가 기적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때 나는 하나님의 존재를 깨달을 수 있었다. 

 퇴원을 했지만 몸이 정상일 순 없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일어설 수가 없어서 방과 마루를 기어 다녀야만 했다.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싶어서 삶을 포기하려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다리에 힘이 조금씩 생겨나자 희망이 생겼다. 피나는 연습으로 걸을 수 있게 됐다. 그래서 나는 바로 교회를 나갔다. 결혼 전 여의도에서 비를 피해 들어갔었던 철골구조물 건물이었던 곳,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출석했다.

 교회를 다니면서 예수님을 만나 성령체험을 하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성령 침례를 받은 후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할 지에 대한 고민은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주님과 동행한다는 것이 너무나 기쁘고 행복했다. 그래서 나와 같이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예수님을 전하고 싶었다. 예수님만 만나면 더 이상 두렵지 않고 평안이 온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그래서 호스피스 봉사를 시작했다.

 호스피스 봉사자는 말벗이라고 한다. 암과 같은 불치의 병, 노인성 질환 등으로 죽음을 기다리는 이들에게는 질병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그보다 더 큰 고통이 고독이다. 그래서 나는 하늘나라의 새로운 시작을 위해 지상의 삶을 정리할 수 있도록 말벗이 되어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려고 노력을 한다.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의 손을 잡아주는 것이 예수님을 대신하여 잡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봉사를 하면서 주는 것보다 받는 것도 참 많다. 봉사를 하다 보면 임종을 기다리는 사람, 함께 봉사하는 봉사자들에게서 예수님의 모습을 볼 때가 있다. 또 그들을 통해 예수님의 메시지를 전해 받기도 한다. 그것을 깨달으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아름다운 동행을 통해서 많은 이들이 고통을 벗고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한 풍요로운 시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김정희 권사(관악대교구) -

주님의 일할 때 자녀들 복주셔

연탄가스 사고로 아이 오른손 신경 손상 입어
6년여 아침금식기도하며 주님 의지하니 완쾌

 1980년경 내가 우리 교회에 출석한지 얼마 되지 않은 새신자 시절이었다. 우리 네식구가 한 방에서 자고 있던 그 때 연탄가스가 새어 네식구 모두 가스중독으로 기절하고 말았다. 다행히 아침 일찍 옆방에서 자던 시동생이 기절해 있던 우리 가족들을 발견해 구급차를 불러 병원으로 후송했다. 나는 3일 후 그리고 남편은 5일 후에 정신을 차렸지만 둘 다 한동안 말을 못할 정도로 연탄가스 중독 상태가 심각했다. 아이들의 상태는 더욱 심각했다. 큰 아들은 눈 쪽에 이상이 있어 수술을 받아야 했다. 문제는 둘째였다. 기절 직전 나와 남편은 아이들이 연탄가스 때문에 우는 것을 배고파서 그런 줄 알고 우유를 먹이다 연탄가스에 중독돼 그대로 쓰러졌는데 그 때 둘째 아들의 오른손이 남편의 몸에 눌리고 말았다. 진단결과 의사는 오른손의 신경이 손상됐고 자칫하면 손을 절단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갑자기 닥친 상황에 어쩔줄 몰랐다.

 그런 상황에서 친언니가 “하나님이 너희 가족을 위한 계획이 있으셔서 살려주셨다”라는 말에 나는 위로는커녕 “말도 안된다”며 힐난하며 원망의 마음을 지을 수 없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픈 둘째 아이를 안고 교회 대성전에서 예배를 드렸다. 우는 아이를 달래며 성전 기둥 뒤에 자리를 잡고 예배를 드리는데 강대상에서 말씀을 전하는 최자실 목사님이 나를 쳐다보시더니 곧장 내려오셔서 아이를 받아 들고 다시 강대상에 오르셨다. 최 목사님은 “젊은 엄마가 어린 아이를 안고 예배를 드리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며 강대상에 아이를 놓고 간절히 기도해주셨다. 목사님의 기도에 나도 큰 위로와 은혜를 받고 말로만 듣던 성령을 체험했다. 최 목사님은 내게 아이를 위해 아침금식기도를 하라고 권유하셨고 그 말씀대로 나는 6년 동안 아이를 위해 아침금식하며 기도했다.

 둘째는 두 번의 대수술을 받고 2개월마다 손에 재활기구를 교체해야 하는 등 어려움이 많았다. 아이를 위해 기도하면서도 정말 하나님이 이 아이의 손을 고쳐주실까 하는 의심이 떠나지 않았다. 아이가 손에 낀 보조기구 때문에 학교친구들이 놀리자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움을 벌이는 통에 나는 매번 학교를 찾아가야 했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 믿음을 가지고 기도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 때 또 한 번 최자실 목사님의 기도를 받을 기회가 생겼다. 목사님이 둘째를 위해 간절히 기도해주시니 그제야 나는 용기가 생겼다. 그래서 네식구가 함께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에 올라가 함께 금식기도했다. 그리고 구역장 등 하나님의 일에 앞장서서 최선을 다했다.

 가정이 신앙 안에서 바로 서니 하나님이 우리 가족의 모든 것을 책임져 주셨다. 아이들의 수술비 등으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때마다 채워주셨고 아이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지켜주셨다. 특히 둘째는 간절한 기도와 함께 손을 치료하기 위해 피아노, 검도 등을 가르쳤다. 최 목사님의 말씀대로 6년 아침금식기도가 끝나갈 무렵 둘째의 오른 손은 다른 아이들과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회복됐고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기 힘들다. 당시 담당 의사마저 깜짝 놀라며 비결을 묻기에 나는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라며 당당하게 믿음의 고백을 했다. 현재 큰 아들은 유명 외국계 IT기업의 말레이시아 지사장으로, 둘째는 우리나라 대기업의 연구원으로 미국에서 일하고 있다. 아들들은 시험이나 어려움이 있으면 항상 내게 기도를 요청한다. 그러면 나는 그 때부터 금식하며 아들들을 위해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그 기도에 응답하셔서 아이들이 항상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었다.

 이제는 하나님이 우리 가족을 살리신 특별한 이유가 있음을 확신한다. 또한 절대 긍정과 절대 감사만이 내 입술의 고백이,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의 고백이 되길 바란다.  


이계향 집사(금천대교구) -

“소원을 갖고 기도하면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허리디스크 고침 받고 남편 사업장 축복 임해

 우리부부는 결혼 후 청주에서 시어머니를 모셨다. 시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점을 보고 초하루마다 산기도를 다니며 며느리인 나에게도 함께 갈 것을 요구했다. 기독교 신자였던 친정엄마와 달리 나는 신앙이 없었기 때문에 시어머니를 따라 산기도를 다녔다. 그러나 남편이 하는 일들은 점점 더 풀리지 않았고 13년을 청주에서 살다가 2006년 우리가족은 60만원을 들고 서울로 올라오게 됐다.

 어느 날 여의도순복음교회 권사님 한분이 나를 전도하기 위해 우리집에 찾아오셨다. 나는 반지하에 살고 있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창피해 번번이 거절했지만 더욱 힘들어지는 집안 형편에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아보자는 마음으로 교회에 가기로 결심했다.

 시댁 눈치가 보여 처음에는 집 근처 기도처로만 교회를 나갔다. 당시 조용기 목사님의 말씀이 내게 너무나 위로가 됐다. 믿음이 생기자 내 마음속에 소원이 생겼다. 남편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도와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친정엄마 역시 딸의 가정을 위해 항상 중보기도를 했다. 그렇게 기도한지 3년이 지난 어느 날 문득 남편이 교회에 나가겠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할렐루야!

 내가 소원하던 첫 번째 기도가 이루어졌다. 남편의 신앙은 나날이 좋아졌고 남편이 내 옆에서 믿음의 동역자로서 있어주니 감사했다. 하지만 2년 전 남편이 사업을 시작하고 나도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고자 일을 시작하면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할 수 없게 됐다. 힘들게 붙잡은 신앙을 놓치고 싶지 않아 “주님 제가 기도를 열심히 하는 아내, 엄마가 될 수 있게 도와주세요”라고 또다시 소원을 갖고 기도했다. 여느 날처럼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엉치뼈가 아파 도저히 앉아있기 힘들고 허리가 펴지지 않았다. 조기퇴근을 하고 힘겹게 집으로 돌아와 누웠다. 다음날 남편을 배웅 하던 중 나는 통증으로 기절했다.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다. 목과 허리를 검사한 결과 디스크가 있으나 생활에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라고 했다. 겉은 멀쩡해 보일지 몰라도 나는 몸을 비틀어 어렵게 앉거나 누워있어야만 했다. 심한 통증으로 회사를 휴직하고 싶어도 병원에서 진단서를 써주지 않았다.

 오직 주님께 매달려야 했다. 힘들어하는 내게 남편은 “이제 경제적 지원이 아닌 기도로 후원해 달라”고 했다. 그길로 나는 다니던 회사에 과감히 사표를 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던 중 ‘행복전도축복기도회’에서 박영자 권사님의 간증을 듣게 됐다. 기도로 목발을 던지고 걷게 됐다는 권사님의 간증에 나도 치유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주일 이영훈 목사님의 신유기도 시간이었다. 아픈데 손을 얹고 기도하는데 내 마음속 깊이 ‘치유 받았다’는 확신이 왔다. 더 이상 아프지 않고 편히 앉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아 남편에게만 살짝 이야기했다. 남편은 “당신은 의심이 너무 많다. 하나님께서 고쳐주셨으니 더 이상 의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선포하라”고 했다. 다음날 바로 교구장 김현동 목사님께 말씀드렸더니 전도훈련학교 입학을 권유해주셨다. 나는 전도의 열매를 통해 하나님 은혜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고 싶다는 새 소원이 생겼다.

 감사할 일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자 하나님께서는 우리부부가 맞벌이 했을 때보다 더 큰 물질의 축복을 부어주셨다. 기적의 주님, 치료의 주님을 만나 나의 심령이 회복되고 우리 가정이 평안해지니 기쁨이 넘쳐흐른다. 내가 만난 주님을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다. 


김화경 선교사(독일 브레멘 순복음성령교회)

유럽 최대 한인 기도원 세운 부흥의 주역 김화경 선교사
“기도는 기적의 시작이고 기적의 끝입니다”

 독일땅을 밟은지 35년 됐다는 김화경 선교사를 만나러 가는 길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쯤되면 숨소리에서조차 독일인 같은 향이 풍기려나’
 문이 열리고 김화경 선교사의 얼굴과 대면했을 때 활짝 웃어주는 그의 얼굴에서 평화로운 독일의 한 마을을 보는 듯 했다. 단번에 저 따뜻한 웃음이 독일을 복음으로 녹이고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뷰가 시작되자 김화경 선교사의 첫마디가 이랬다. “어디서부터 말을 시작해야 하죠?” 독일땅에 첫발을 디딘 후 지금까지 많은 일들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화두였다.

 김 선교사는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적으로 살아난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의학적으로 볼 때 이 환자는 거의 가망이 없어 보입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장례를 준비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한국의 한 대학병원에서 김 선교사에게 내려졌던 사형선고다.
 2000년 3월 부흥회를 인도하기 위해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를 타고 공항에 내린 후 하복부의 출혈로 수술을 했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앓아왔던 혈소판 감소증 때문에 폐출혈이라는 후유증이 생겼다. 폐에 고인 피를 계속 뽑아내도 봇물터지듯 피가 멈추질 않아 의식을 잃고 인공호흡기를 낀채 40일을 식물인간으로 누워 있었다. 혈소판이 약하면 내부 혈관이 터져서 위험한 상태에 빠지게 되는데 정상인의 혈소판이 15만∼50만이라면 김 선교사의 혈소판은 1000까지 떨어진 상태였다.  

 병원에서 포기한채 장례 준비를 하라는 소리를 듣고 온가족의 통곡 소리가 병원을 울렸지만 응급실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무릎을 꿇고 포기하지 않는 단 한 사람 그의 남편 이옥만 목사가 있었다. 평소 기도의 사람으로 유명한 이옥만 목사는 병원의 사형 선고에도 굴하지 않고 기도하면 반드시 하나님이 개입하실 거라는 사실을 믿고 숨이 세 번이나 멎었음에도 불구하고 ‘의사보다 하나님’ 이라는 일념 하나로 40일을 버텼고 결국 김화경 선교사가 기적처럼 깨어났다. 김 선교사 자신은 누워있는 동안 또한번 성령체험을 했다. “이 생수를 마시라”는 큰 음성과 함께 그 물을 마시는 순간 깨어난 것이다. 김 선교사의 깨어남은 확률상 3만분의 1에 해당하는 기적이었고 이후 독일의 병원에서는 김 선교사를 기적의 사람이라 말하며 지금도 현대의학의 연구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렇게 살아난 김 선교사는 그야말로 하나님이 쓰시는 기적의 사람으로 이 시대의 부흥사로 쓰임받고 있다. 죽다 살아난 그에게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살려내는 신유 은사는 물론 기도할 때마다 알려 주시고 꿈으로 보여 주시고 놀라운 사역들을 더하셔서 독일과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여러 나라에  부흥 강사로 초청받아 부흥회를 인도하고 있다. 가는 곳마다 뜨거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 많은 사람들이 주님 앞으로 돌아오고 병에서 놓여남을 받고 생활 속에서 기적의 삶을 체험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성령의 역사들은 김화경 선교사와 그의 동역자 이옥만 목사의 철저한 기도생활이 뒷받침 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때때로 두 선교사에게 성령께서 유난히 기도를 시킬 때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이런 특별한 기도로 주변의 많은 사람들을 믿음으로 세우고 어려운 일을 피해가게 된다. 기도원 식당의 구멍난 보일러 파이프까지도 기도해서 해결하다보니 때마다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과의 동행을 자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김 선교사는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독일로 유학을 떠나 외교관의 꿈을 안고 정치학 공부를 하던중 성령의 강한 은혜를 체험했다. 그후 1979년 하던 공부를 중단하고 베를린 베레크 성경신학대학에 진학했고 신학대학에서 평생 동역자가 된 남편 이옥만 목사를 만났다. 신학대학 졸업후 스페인 라스팔마스순복음교회 개척에 동참하고 1982년 독일 하이델베르크 교회에서 시무하다가 1984년 지금의 브레멘으로 들어가 순복음성령교회를 개척했고 2000평의 아름다운 땅에 유럽 최대의 한인 기도원인 성령기도원을 건립했다. 

 성전을 건립할 때는 두 선교사의 특별한 기도가 뒷받침됐음은 물론이다. 이옥만 목사는 30일 작정 금식기도를 하면서 몸무게가 무려 12㎏이나 빠졌고 김화경 선교사는 기도방에서 하나님 앞에 울고 있다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새 힘을 얻었다. “사랑하는 딸아 내가 이곳에 나의 성전을 세우리라” 김 선교사는 울다가 사탕 하나 얻어먹고 울음을 뚝 그친 어린아이처럼 우는 것을 멈추고는 하나님께 반문했다. “주님! 이곳에는 한국 사람들도 없는데 무엇 때문에 성전을 지으려고 하십니까?”
 “딸아! 내가 이 성전을 통해 많은 외국인을 부르리라. 이 성전을 독일인으로 가득 채우리라.”
 그 음성을 들은 이후 두 선교사는 성전 부지를 놓고 매일 건물을 일곱 바퀴씩 돌면서 ‘하나님의 성전이 될지어다’하고 선포했다. 그렇게 기도한 지 정확히 4년만에 하나님 말씀이 현실로 이루어져 지금의 교회가 됐다. 그리고 1년 내내 터키, 스페인, 캐나다, 영국, 미국 등 세계 각지에서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찾아와 주님을 만나고 은혜를 체험하고 가는 역사들이 계속되고 있다.

 김화경 선교사의 저서 ‘브람스테트의 기적’과 ‘지금 독일에 부는 성령바람’을 읽으면 두 분의 선교사를 통해 일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들을 생생히 접할 수 있다. 
 독일에 부는 성령바람, 무엇이 잠자는 유럽 독일을 다시 호흡하게 하는 것일까. 답은 하나님이다. 그 답을 알기에 두 선교사는 오늘도 깊은 기도의 무릎을 꿇는다. 그 기도의 무릎으로 인해 내일은 더 강력한 성령의 역사들이 계속될 것이다.   
 살면서 쉼이 필요할 때, 반대로 열정이 필요할 때 배낭에 책이나 몇 권 넣어 문득 가보고 싶은 곳, 브레멘 성령기도원이 그런곳이 아닐까 싶다. 


 

   



장태영 안수집사(구로대교구) -

내 삶을 인도하신 치료의 하나님

 오래 전 나는 모 회사 입사시험을 보기 위해 상경했다가 당시 돈 6000원이 없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오갈 데 없는 신세에 처한 적이 있다. 도움을 구할 사람도 없어 궁여지책으로 구걸도 해봤다. 그러다 무슨 오해를 했는지 경찰서로 신고가 들어가 경찰에 붙잡혀 조사를 받은 적도 있다. 그렇게 막막하기만 했던 내 인생에도 하나님은 찾아오셨다.

 1990년이었다. 모 대기업에 입사하게 된 후 인쇄기술을 연마하며 생활을 이어갔던 그 때 빨간 가방을 든 아주머니를 만나게 됐다. 내게 쥐어준 것은 ‘행복으로의 초대’란 전도지였다. 한 번 읽고, 두 번 읽고 하다 보니 어느새 빼곡히 적힌 글들이 내 마음에 들어왔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렸을 때 시골에서 자라왔던 나는 예수님이 누군지, 하나님이 뭐 하시는 분인지도 모른 채 시골을 누비는 촌놈에 불과했다. 그러다 서울 숙모가 운영하는 홍대 인근 서점에서 일을 배우며 숙모가 다니는 교회를 따라 예배를 드리게 됐다. 지금이야 당연한 것이었지만 매 주일 예배를 드리는 것과  끼니마다 기도하는 것이 참 어색했다. 그러다 군대를 가게 됐고 좋은 선임을 만났다. 당시 군종이었던 선임은 부대 내 교회로 인도하고 어렵고 힘들 때 좋은 위로의 말을 해주어 인간적으로 잘 따르고 마음도 편안해짐을 느꼈었다.

 그 때의 평안함이 떠오르면서 나도 모르게 여의도순복음교회로 발걸음이 옮겨졌다. 주일예배는 물론 주일철야예배도 참석하면서 매 예배가 즐거웠다. 지금 담임목사님이신 이영훈 목사님이 당시 철야설교를 하셨는데 하는 말씀 족족 내게 하시는 말씀처럼 느껴져 큰 은혜를 받았다. 말씀으로 은혜를 받으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눈에 들어온 것이 햐얀 옷을 입은 봉사자들이었다. 그 때는 남선교회가 무엇인지 봉사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저 “저도 하얀 옷을 입고 싶습니다”라는 말이 먼저 나왔다. 그렇게 남선교회 봉사실에서 봉사를 시작했다. 근데 봉사를 하기 전 봉사자는 믿음이 필요하다고 들었다. 나는 믿음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봉사를 시작하면 마냥 기쁘기만 할 것 같았는데 그런 생각도 잠시 나는 허리통증과 무릎통증이 함께 와서 큰 어려움을 겪었다. 아픈 다리와 허리를 부여잡고 인근 병원에 가서 치료도 받아봤지만 차도가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통증은 더욱 심해졌고 봉사는 물론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 때가 되어서야 매주일 교회에서 듣던 말씀들이 생각났다. 예수님이 늘 병자들을 고쳐주셨음을 기억해냈다. 그래서 교회에서 배운 대로 하나님께 의지하기로 작정하고 기도처에서 40일 작정기도를 시작했다. 성경의 말씀처럼 기도하면 허리와 무릎에 통증이 치료받을 것이라 확신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안수기도만 받으면 무조건 나을 것 같다는 믿음이 생겼다. 실제로 엄태욱 목사님이 그 때 우리 기도처를 찾아와 예배를 인도해주셨는데 그 때 나는 엄 목사님께 매달리다시피 안수기도를 요청했다. 엄 목사님은 내게 안수기도해주셨는데 그 즉시로 통증이 떠나가버리고 지금까지 건강하게 봉사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 후 하나님께서는 내게 힘을 주셔서 아무리 피곤하고 고단하여도 철야예배 후 이어지는 새벽기도에도 참석할 수 있는 새 힘을 주셨다. 매주일 그 힘에 의지해 예배를 드리고 여름이면 오산리 기도원 금식성회도 참석하며 은혜를 누릴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오갈 곳 없던 나를 하나님은 지금까지 지키고 보호하시고 이끌어주셨다. 그 은혜에 감사하며 날마다 이사야 41장 10절과 시편 23편을 묵상하며 오늘도 주님이 주시는 평안함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고백한다. 할렐루야!     


 


강서진 집사(강남성전) -

사고로 인한 장애를 깨끗이 고쳐주신 하나님

전신마비의 몸이 성령의 역사로 치유
바라던 둘째 출산, 생명의 주님 전파


 유치원 원장이었던 나는 학부형으로부터 전도를 받았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지역장이라는 아이의 엄마는 나를 위해 아침마다 작정기도를 드렸고, 그 열심에 1998년 1월부터 남편과 함께 여의도순복음교회를 가게 됐다. 당시는 초신자라 예배 시간 느지막이 성전에 들어와 부속성전 뒷자리 혹은 돗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렸다. 그것도 매주가 아닌 한 달에 한 번 주일예배에 참석했다.

 그해 5월, 나는 돌아가신지 1주기가 된 형부의 추모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중 교통사고를 당했다. 모래를 실은 트럭 운전자가 낸 음주운전 사고였다. 이 사고로 나는 경추 5,6번이 골절돼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처음에는 ‘이렇게 며칠 병원에 누워 있으면 바로 회복돼 일상생활로 돌아갈 수 있겠지’라고 믿었다. 하지만 나는 ‘전신마비’가 됐다. 다만 ‘운이 좋으면’ 휠체어를 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가족 중 어느 누구도 내가 받을 충격 때문에 사고결과를 솔직히 말해 주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병원에 누워있던 나는 갑자기 찬송가가 듣고 싶었다. 주기도문도 외우지 못하는 초신자였는데 왜 그렇게 찬송가가 듣고 싶던지…. 며칠 후 나를 전도했던 학부형이 조심스레 병문안을 왔을 때 찬송가가 듣고 싶다고 했다. 그 후 마음에 평안이 찾아왔다. 초신자였던 남편은 병간호는 물론 퇴근 후 100일 동안 평일 철야예배를 드리며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했고 방언이 터졌다. 이후 나는 수술을 통해 왼쪽 마비는 풀렸지만 오른쪽을 전혀 쓸 수 없는 반신마비가 되고 말았다. 당시 5살이 된 딸아이가 가장 큰 걱정이었다. 절망 앞에 선 나를 위해 교구 식구들은 쉬지 않고 기도해주며 희망적인 메시지를 계속 전해줬다.

 하지만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았다. 그때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에 가고 싶었다. 잘 움직일 수 없기에 한번 가면 적어도 3,4일 많게는 일주일 넘게 기도원에 머물며 하나님께 고쳐달라고 매달려 기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위성을 통해 조용기 목사님의 수요 강해를 듣고 있는데 뜨거운 기운이 갑자기 아픈 내 허리에 꽂히는 기분이 들더니 몸이 가벼워졌다. 불편한 몸 때문에 유치원을 그만 두고 대신 예배와 성경공부를 위한 성경학교·성경대학을 열심히 다녔다. 은혜가 넘쳤다. 이때 딸아이 출산 후 그렇게 바라던 둘째를 임신하게 됐다. 병원에서는 체중이 3㎏이상 늘면 몸에 무리가 온다고 했다. 더군다나 임신은 안된다며 출산을 강하게 부정했다.

 나는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러자 기도원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펼쳐든 성경책에서 성경 말씀이 살아 움직이듯 위로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바로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라는 예레미야서 말씀이었다. 나는 둘째 임신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임을 확신했고 믿음으로 아이를 낳기로 결심했다. 그러자 그렇게 아팠던 허리 통증이 그날을 시작으로 아이를 출산할 때까지 전혀 아프지 않았다. 오른쪽 장애를 깨끗이 고침 받은 것이었다. 할렐루야! 2004년에 태어난 둘째는 건강한 아들이었고, 올해 중학교에 입학한다. 나는 아들이 어릴 때 함께 복음전도지인 ‘행복으로의 초대’를 사람들에게 전하며 전도에 힘썼다. 지난해 집 근처인 강남성전으로 교적을 옮긴 뒤 지역장으로 활동하며 내가 만난 하나님, 나를 고쳐주신 하나님을 전하며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강조하고 있다. 내가 아플 때 나에게 희망을 주고 내 믿음을 키워준 지·구역의 중요성을 알기에 지역장의 사명을 귀히 여기고 교구 식구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사명자가 되겠다.


박성룡 집사(용산대교구) -

뇌출혈로 죽음의 위기에서 새생명 얻어

금요철야예배 때 중보기도 받고 기적 체험 
어머니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께 감사

 나는 예수님을 만나고 삶이 180도 달라졌다. 7년 전 쯤이다. 양식 주방장이었던 나는 교회에 다니게 되면서 신앙의 갈등이 생겼다. 주일에 교회를 가고 싶은데 일을 해야 해서 못가는 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주일성수를 위해 내 가게를 열어 식당을 시작했다. 하지만 막상 식당 주인이 되고 보니 가장 수입이 많은 주일에 문을 닫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익을 포기할 수 없어 장사를 주일에도 계속 했다. 어느날 음식 준비를 하려고 재료를 들고 들어가는데 “네가 나를 잊었구나. 네가 나를 떠나서 얼마나 행복하게 살려고 하느냐”하는 주님의 음성이 들렸다. 나는 너무 놀라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어머니는 돈이 중요한 게 아니라며 주일을 온전히 지키라고 강하게 말씀하셨다. 나는 대답은 했지만 또 주일 영업을 계속 했다. 얼마 후 뒷머리가 벌레가 기어가는 것처럼 간지럽더니 찌릿찌릿했다. 나중에는 두통이 너무 심해져 장사를 접어야 했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에 자고 일어났는데 몸이 너무 이상했다. 발을 지탱할 수도 없고 서있을 수도 없었다. 걸으려고 하
면 그냥 쓰러져버렸다. 너무 놀라 아내에게 전화를 해 앰뷸런스를 불러달라고 하고 전화를 끊으면서 의식을 잃었다.

 내 병명은 뇌출혈이었다. 응급실에 도착해 수술하려고 했을 때는 이미 머릿속으로 피가 뿜어져 나왔고 끊어진 핏줄을 찾지 못해 수술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때가 우리 교회 대성전 금요철야예배 시간이어서 내 상태가 긴급 중보기도 제목으로  올라가 전 성도들이 함께 기도해 주었다. 권사님이신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고 계셨다. 어머니는 “네 아들은 살려줄테니까 걱정하지 마라 염려말고 오늘 내 약속을 믿고 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내가 의식없이 누워 있을 때 어딘가를 걸어가는 환상을 보았다. 찬양소리가 들려 천국이라 생각했다. 아름다운 길을 걷고 있는데 기도 소리도 들려왔다. 나중에 들어보니 의사는 머릿속으로 피가 터졌는데 살아있다는게 기적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머릿속에 고인 피는 약으로 말렸지만 이미 내 상태가 너무 안좋았다. 의사는 살아도 평생 기억이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며 지금 상태로는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어린 두 아이를 두고 내가 이렇게 되자 아내는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려 기도했다.

 혼수상태로 누워있던게 한달 반, 그 후 의식이 돌아온 나는 예전과 다른 사람이 돼있었다. 간호사 뺨을 때리는 등 거칠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일삼았다. 정신이 이상해지는게 이렇게 무서운 건지 몰랐다. 기억도 못하는 상황에서 내 의지와 상관없는 행동들이 나오니 기가막힐 노릇이었다. 눈빛이 흐릿하고 검은 눈동자도 따로 움직였다. 어머니는 내가 쓰러졌을 때부터 퇴원할 때까지 새벽 2시에 교회에 가서 나를 위해 밤새워 울며 기도했다. 

 1년 후 퇴원했는데 의사의 말대로 내 아이들도 알아보지 못했다. 퇴원하고도 한 달에 한 번씩은 온 몸이 아프고 정신이 없어  일어나질 못했다. 이후 두 번을 더 입원할 정도로 몸이 안좋았다. 나는 점점 폭력적이 됐다. 애들이 조금만 시끄럽게 하면 때리고 던지고, 아내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머니와 아내는 이런 나를 위해 늘 기도했고 그 간절한 기도가 응답돼 6개월 후 정신이 돌아왔다. 오랜시간 누워만 있다보니 허리디스크가 왔지만 교정을 받아 건강해졌고 나는 하나님께 너무 감사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싶었다. 2년 전 교회 신문을 보던 중 교회 미화를 담당하는 직원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지원해 열심히 일하고 있다. 일하면서 내 건강은 더욱 좋아졌다. 지난해부터는 미가엘찬양대에서 봉사하고 있다. 치료의 하나님, 나를 이끄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날마다 감사가 넘쳐난다.


           

기도는 길어도 응답은 순간이다

"나라를 새롭게 하자" (삼상11:14)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라 우리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

           

                     

국회경비대교회 담임 김청연 목사

 

사무엘은 오라 우리가 나라를 새롭게 하자. 나라를 새롭게 하자고 외쳤습니다. 사무엘은 선지자로서 외쳤습니다. 선지자는 나라가 어지럽고 백성들이 혼란에 빠질 때 진리로 백성들을 이끌고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선지자가 제 역할을 못하면 시대도 어두워지고 백성들의 고통도 늘어나게 됩니다.

오늘날 선지자의 역할을 교회에 부여해주셨습니다. 교회는 이 시대를 사는 선지자입니다. 교회는 이 시대의 목소리를 들려줘 어둠 속에 방황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이끌어주어야 합니다. 사무엘은 사사 시대를 거쳐 왕정으로 옮겨가는 과도기에 활동한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사시대에서 왕정시대로 옮겨가면서 혼란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의 목소리를 듣고 나라를 새롭게 하게 됩니다.

현재 대한민국은 선진국으로 진입할 좋은 기회를 맞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여러 가지로 가치 혼돈 속에서 난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때야말로 교회가 선지자적 음성을 발하고 선지자적 활동을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나라를 새롭게 만들어주실 줄 믿습니다.

 

2005년에 시작되었던 제1회 전국 경찰복음화 금식대성회가 올해로 제12회째를 맞고 있습니다. “경찰이여 일어나 빛을 발하라”(60:1)는 주제를 가지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가 새롭게 되기 위해서는 전국에 있는 14만 경찰이 먼저 복음화 되어 하나님 앞에 나아와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하여 경찰선교회가 섬기고 있는 선교처와 교회를 통하여 기적이 일어나게 하시고 빛을 발하게 하소서~!

 

선지자 사무엘은 우리가 나라를 새롭게 하자며 하나님께 화목 제물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당연한 의무이자 즐거움입니다. 하나님은 화목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움직이시는 분입니다.

국회에는 골방기도회와 국회기도회와 국회조찬기도회가 있습니다. 이것이 터가되고, 기둥이 되고, 지붕이 되어야 합니다. 온전한 성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주일에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 예배가 국회경비대교회 예배인 것입니다.

지난해에는 이 모든 예배가 각기 따로 갈라졌었고, 이곳 국회경비대교회에는 대원들이 함께 예배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제게 새로운 모습으로 화목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제 국회경비대교회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경찰선교회와 함께 협력하여 나아갈 때 새로운 공동체로 기관사역이 정착할 수 있도록 그 사역을 새롭게 시작하려고 합니다.

이와 같이 교회가 교회의 사명을 다하고 국가의 역사적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선지자적인 목소리를 발하면 하나님께서 교회와 이 나라 모두를 새롭게 해주십니다.

 

201311일부터 저는 국회의 한쪽 켠에 놓여져 있는 컨테이너에서 예배를 드리며 제단을 쌓기 시작하였습니다.

새로운 발견 이었습니다. 그동안 컨테이너에서 주일 예배를 드려오던 국회경비대교회는 2014528일 신사옥 준공으로 컨테이너 예배에서 성전 예배로 환경을 활짝 열어 주셨습니다. 61일 신사옥 다목적 홀 강당에서 주일 첫 예배를 드리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와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대한민국이 받을 영광-국회에 성전을 세우다 (이사야60:1)“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야훼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20141월 하나님이 제게 주신 새로운 비전을 통하여 기도하게 하심으로 국회경비대교회가 컨테이너에서 성전예배로 드려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에 그치지 아니하시고 대한민국이 받을 영광이 이방나라들에까지 확장 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한반도 통일뿐만 아니라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통해 그의 몸 된 교회가 진리의 빛을 비추게 될 것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 꿈에도 그리던 면류관 (2015520일 목사 안수를 받다.)

먼저 택함 받은 자의 사명(벧전2:9)-“기도는 길어도 응답은 순간이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저는 중학교 1학년(19748) 여름방학 성경학교 수련회에 참석하게 됨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마지막 날 물세례를 받으며 알 수 없는 감동으로 기쁨의 눈물을 쏟으며 하늘을 향해 날아가는 듯 했습니다. 아마도 이 경험이 성령세례를 받은 증거였던 것 같습니다. 믿음의 불모지였던 가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저를 먼저 택하여 불러 내셨습니다. 이로부터 3개월이 지나 제가 가장 아끼던 남동생을 하늘나라로 데려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혼신을 다해 그에게 하나님을 전했고 그는 제게 하늘나라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제게 약속하였습니다. 형아, 이다음에 엄마. 아빠와 함께 하늘나라 천국에서 우리 함께 만날 것을 약속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나의 숙제로 남았습니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후 아버님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늘나라로 가시면서 제게 꿈에도 그리던 면류관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기도는 길어도 응답은 순간이다하나님 감사합니다.

2015520일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여의도순복음 총회)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동안의 고난의 흔적이 기적의 축복으로 변화되어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전하는 증인이 되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게 되었습니다.

* 20161월 국회경비대교회 담임으로 위임 받다.

나라를 새롭게 하리라”(삼상 11:14~15)

‘14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라 우리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

15 모든 백성이 길갈로 가서 거기서 여호와 앞에서 사울을 왕으로 삼고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 화목제를 드리고 사울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거기서 크게 기뻐하니라.

이제 또 한해를 시작함에 있어서 국회경비대교회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경찰선교회와 함께 협력하여 나아갈 때 새로운 공동체로 기관사역이 정착할 수 있도록 그 사역을 새롭게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동안 20여년동안 국회경비대에서 기도와 예배로 섬겨오셨던 이광보 목사님께도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2016년 제12회 전국 경찰복음화 금식대성회를 통하여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 이 나라의 국회에 세워진 성전인 국회경비대교회와 경찰선교회를 통하여 먼저 민중의 지팡이가 되어 섬기며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한한 축복을 허락하여 주실 것을 간절히 기도하며 축원 드립니다. 아멘~!



           

"기도로 얻은 기적의 제품, 미가엘 반주기"


()순복음실업인선교연합회 회장 안정복 장로

지난 20여 년간 어느 교회든 빠질 수 없었던 필수품이 있다. 반주자가 없어도 찬양을 부를 수 있도록 돕는 찬송가 반주기다. 미가엘 찬송반주기로 한국교회 선교에 앞장서 온 EM미디어 안정복 대표(여의도순복음교회 실업인선교연합회 회장)를 만나 선교사업 스토리를 들어봤다.

사업 실패, 절망 끝에 만난 하나님25년 전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보증을 잘못서 하루아침에 잘 되던 모든 사업을 정리하고 빈 털털이로 무작정 서울로 올라온 터였다.맨주먹으로 서울에서 둥지를 틀고 오디오 앰프를 조립하며 하루하루를 연명해 갔지만 살기가 어려웠다. 절망의 나락에서 자살도 결심했지만 죽는 것도 맘대로 쉽지 않았다."생활이 어렵고 마음이 너무 힘드니까, 아내더러 교회에나 나가보자 고했다. 그땐 지상파 방송에서 조용기 목사님 설교가 나왔는데 말씀이 얼마나 힘이 되던지..... 무작정 물어물어 버스 타고 찾아간 게 여의도순복음교회였어요. 그 때 처음 교회를 가게 된 거예요."생활이 어렵고 마음은 힘들고, 아무도 의지할 데 없는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도뿐이었다. 주위 사람들의 말을 듣고 기도원에 올라가 금식을 하기도하고, 쉼 없이 철야기도와 새벽예배를 쫒아 다녔다. 그리고 그렇게 찾고 찾으며 부르짖던 하나님, 바라고 바라던 하나님을 드디어 만났다."어느 날 새벽에 기도하는데 하늘에서 스피커가 울리듯이 큰 소리가 들리는 것 이였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너를 기다려왔는데 너는 깨닫지 못하고 방황하고 이제야 왔구나' 하고. 너무 선명하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 이였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이 나와함께 하시고 내 기도를 들어 주셨음을 깨닫고 나자 그 자리에서 나도 모르게 펑펑 울음이 쏟아져 나왔다." 기도로 얻은 기적의 제품 '찬송반주기'신앙이 조금씩 조금씩 생기면서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하게 되었고 이어서 하나님의 도움도 이어졌다.

오산리 금식기도원에 올라가 3일 금식 후 집에 내려오자, 사업을 위한 자금을 지원해주겠다는 연락이 이곳저곳에서 오기 시작했다. 만들어 낸 제품마다 불티나게 팔렸고 사업은 점차 왕성해졌다."그 때부터 엔지니어인 내 재능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방법이 없을까 기도하기 시작했어요. 전자 오르겐, 디지털 피아노도 생각했는데 교회 이곳저곳을 살펴보니 정작 반주자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결심했죠. '자동 찬양반주기를 만들자'.".....

그리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결과 국내 최초 자동반주기 5025(오병이어)를 개발해 냈다. 최초 나온 제품은 중국 장춘과 제주도 최남단 교회에 각각 무상 기증했다.이후 반주기는 음향 기기와 인력이 부족한 개척 교회에서 큰 호응을 입고 해외 선교사들에겐 1호 필수품으로 각광 받으며 팔려나갔다.한때 유행했던 노래방 반주기도 그 무렵 여러 회사에서 개발되기 시작했다.음양기기에 대한 개발능력이 뛰어난 기술력 때문에 수차례 노래방 반주기를 개발해 달라는 문의를 받았다. 마지못해 만든 노래방 반주기는 매달 1억원의 수입을 벌어들이는 품목이 됐다."돈을 많이 벌기는 하는데, 기도할 때마다 너무 괴로운 거예요. 크리스천으로서 대중가요 맞춰 노래 부르게 하는 게 내 일은 아닌데 생각도 들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게 자꾸 생각나는 거죠.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데 세상 것 만들면서 재물 탐한 것 아닌가 하는 자책이 들고."결국 음양기기에 대한 모든 기술을 다른 업체에 넘겼다. 당장 재정 손실이 있어 마음고생도 심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지난날을 회상하면 찬송반주기만 만들기로 결정했던 스스로의 약속에 조금도 후회가 없다. 시대에 맞게 개발한 반주기, 해외에도 수출오늘날 널리 사용되는 미가엘 찬송반주기는 시대에 맞게 개발되며 꾸준히 보급되고 있다.손쉽게 갖고 다닐 수 있는 태블릿 PC, 휴대전화 앱 반주기는 물론, 밴드 반주, 피아노 반주, 파이프오르겐, 오케스트라 반주 등 원하는 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다양하게 개발했다.무엇보다 EM미디어는 25년 간 한결 같이 무상 AS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25년 전 최초 모델을 가져오는 이들도 수리를 받을 수 있도록 모든 제품의 부품을 다 갖추고 있다. 미가엘 찬송반주기가 한국교회에서 사랑 받는 또 하나의 이유다.반주기는 이제 국내를 넘어 12천명의 크리스천이 있는 중국 교회로 들어간다. 3월 안으로 2천대의 제품이 들어가고, 이후 주문도 계속 들어올 예정이다.

찬양반주기가 전국의 교회에 필수품이 되다보니 유사제품도 나돌고 있기는 하지만 미가엘 찬양반주기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성도님들이 은혜가 된다면 내가 할 수 있는 한 찬양반주기의 업그래이드와 향상된 제품의 개발에 전력을 다하고자한다."중국 교회를 위해서 20년 전부터 기도해온 계획이 있는데 지금 열매와 결실이 맺어져 중국의문이 열리고 있다. 하나님이 하신 거죠. 중국에는 환경이 열악한 교회가 많은데 찬송반주기가 교회를 세우는 데 큰 힘이 되길 바라고 중국 선교를 위해 최선을 다 하고자한다."나의 기도제목처럼 해외 곳곳이 미가엘 반주기를 통해서 찬송으로 가득해지길 바라본다.



야훼라파! 치료의 하나님!/박재금전도사                           

할렐루야! 야훼라파! 치료의 하나님!

   

                                 

경찰선교회 교역자 박재금 전도사

 

출애굽기1626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야훼임이라.

먼저 살아계신 하나님께 이 모든 영광과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간증자리에 있게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53:5)

 

저는 1980527일에 여의도순복음 교회에 출석했습니다.

저는 3대째 카톨릭 친정집에서 살았습니다. 성당은 믿음이 있어서 다닌 것이 아니고 신부님이나, 수년님들이 잘해주고, 왠지 든든하고, 마음이 평안해지는 느낌어서 다니다 말다 했습니다. 하나님도, 예수님도, 성령님도, 성경말씀도 모르고 마귀도 모르고 그저 의무적으로 습관적으로 성당을 쫒아 다니며 신앙에 대한 아무런 부담 없이 이런게 신앙생활인가하는 의문마저도 없이 그렇게 무지하게 살았습니다.

 

802월에 결혼을 하고 3년쯤 지났을 때 폐결핵이 찾아왔습니다. 약도 효과가 없었고 보약을 먹어도 효과가 없어 저의 오른쪽 폐는 썩어갔습니다. 저는 죽을 날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아들을 건강하게 출산을 했습니다. 그런데 성당에 다니던 기억이 있어 기도는 속으로 계속했습니다.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10:51.52)

나를 고처주세요. 고처주세요.’ 너무 서럽고 힘들어 우리 아이 운동화를 가슴에 끌어안고 나를 살려주시면 시키는 대로, 하라는 대로, 다 할께요. 우리 아들과 살게 잘 키우게 살려주세요.’ 회개도 할 줄 모르니 그러게 속으로만 기도했습니다. 그 와중에 아이는 너무 예쁘게 잘 자라주었습니다. 다 주님의 은혜이지요. 지금 돌아보니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와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 하겠나이다”(삼상1:10~11)

그래서 저는 폐 한쪽을 절재 했습니다. 왼쪽에 또 결핵이 남아 있다고 해서 약을 복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수술도 성공적으로 끝나고 약도 열심히 복용하여 고처보리라. 다짐하고 살고 있는데 순복음구역장님이 전도를 해왔습니다. 김연숙 구역장님이었습니다. 지금은 권사님이 되셨지만 그때는 구역장이었습니다. 나를 인도한 구역장을 따라 뭐가 뭔지도 잘 모르면서 열심히 예배에 참여했고 그때부터 교회에 나가서 성전에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의 종들에게 사랑도 참 만이 받았습니다.

 

찬양을 하는데 하늘에 상달되는 느낌,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신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찬송이 하늘에 사무쳤고 너무 행복함을 느끼며 마치 여기가 천국이구나그런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한번은 일찍 1부 예배를 갔는데 조용한 가운데 하나님의 기적만이 너를 고친다.” 세밀하면서 따뜻하고 다정한 그 소리가 또렷이 들려 사방을 둘러보니 아무도 없었고 성전입구였습니다.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15:26)

 

하나님의 기적과 나의 불같은 열심과 친정어머니의 정성과 남편의 끝없는 사랑과 경제적 도움으로 삼박자가 딱 들어맞았습니다. 2년후에 병원에서 깨끗합니다. 이젠 오지 마세요. 다 낳았습니다.” 의사선생님이 말해 주었습니다. 그 과정에 수많은 기적과 음성을 보게 하심을 체험하게 하시고 건강주시고 성령에 불담으로 지켜주시고 축복하신 하나님 무한 감사합니다.

 

35년이 지난 지금은 경찰 선교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시고 허락해주심에 감사합니다. 지금은 아들은 성도로 남편은 서리집사로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아들의 인도로 가정예배를 꼬박꼬박 드리며 기쁘게 살고 있습니다. 경찰남편으로 인해 나라에서 받은 혜택이 많으니 돌려 드리는 심정으로 경찰복음화에 일조하고 있습니다.

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만 보충할 뿐 아니라 사람들의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를 인하여 넘쳤느니라.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저희와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를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또 저희가 너희를 위하여 간구하며 하나님의 너희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를 인하여 너희를 사모하느니라“ (고후9:12~14)

 

우리의 가정과 이웃 그리고 나라의 치안을 책임지며 사회의 안전을 위해 밤과 낮이 따로 없는 근무 환경 속에서 민중의 지팡이로 공권력을 집행해야하는 경찰 여러분들의 어려움도 많고 힘든 일들이 많지만 예수 믿어 다 구원받아 믿음의 가정을 이루시기를 소망합니다. 하늘의 소망을 가지고 살기를 기도합니다.

 

마태복음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말씀을 주시니 순종합니다. 하나님의 기적으로 치료와 회복을 체험하게 하시고, 용서하시고, 사랑해 주는 좋으신 시간 시간 분초 분초 마다 지켜주시는 사랑에 하나님 기적에 능력에 하나님 살아계셔서 구원에 확신과 죄 사함의 확신과 믿음에 확신을 주시고 구원에 감격과 사죄에 즐거움이 넘치게 하시는 나의 사랑하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다 돌려드리면서 고맙습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50:23)

주 하나님 진실로 이 영광을 다 받으시옵소서.

할렐루야 아멘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