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수 권사(금천대교구)

- 사고로 척추 다친 남편 하나님 도움으로 ‘완쾌’

휴일에도 원하던 의사의 집도로 수술 … 빠른 회복
‘좋은 교회’ 만난 덕분에 ‘가족구원’의 기쁨도

 지난해 12월 23일 새벽, 일찍 출근한 남편(이문재 집사)이 교통사고를 당했다. 주차장에서 후진하던 버스에 치여 넘어진 뒤 버스 아래에 허리가 눌렸다. 바퀴에 깔리지 않은 것만도 천만다행이었다. 사고 후 즉시 가까운 병원으로 이송했지만 하필 토요일이라 오후 2시가 넘도록 별다른 조치 없이 기다려야 했다.

 남편은 통증을 호소했고, 우리 가족은 기도밖에 해줄 것이 없었다. 게다가 남편은 2009년 허리디스크 수술을 받은 경력이 있어서 가족들 마음은 더욱 초조했다. 어쩔 수 없이 남편이 예전에 수술을 받은 병원으로 옮길 작정으로 검사한 서류들을 챙겨 병원을 나왔다.

 옮긴 병원에서도 처음에는 병상이 없다고 했다. 우리는 다급히 ‘하나님’을 찾고 또 찾았다. 고맙게도 병상이 났고 수속을 밟을 수 있었다. 입원한 뒤 만감이 교차했다. 우리는 10년 전 남편을 수술한 선생님이 이번에도 맡아주시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현실은 어려워 보였다. 왜냐하면 이튿날은 주일인 데다 다음날은 크리스마스였다. 벽에 게시된 의료진의 스케줄을 확인해 보니 우리가 바라는 교수님은 크리스마스인 월요일엔 휴무인지 일정이 없었다. 화요일은 진료 일정으로, 수요일은 수술 일정으로 바빴다.

 나는 아이들과 또 소식을 듣고 달려오신 목사님과 함께 진통제를 맞고 누워 있는 남편 곁을 잠시 떠나 병원 내 예배실로 갔다. 우리는 간절하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 채 기도했다. “하나님 남편이 수술을 빨리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하나님 보고 계시죠? 다 아시죠?”

 그리고 이튿날 같은 예배실에서 주일 예배를 드린 뒤 병실을 지키고 있는데 갑자기 남편을 수술하신 교수님이 나타나시는 게 아닌가. 생각지도 못한 반가운 얼굴을 보자 우리는 고맙고 기뻐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교수님이 허리디스크 수술을 하신 뒤로 10년 동안 남편은 한 번도 병원을 찾지 않을 만큼 수술 결과가 좋았으므로 교수님에 대한 우리 가족의 신뢰는 대단했다. 그런 교수님이 “오늘부터 금식하시고 내일 점심 때 쯤 수술합시다” 하고는 자리를 뜨셨다.

 크리스마스 휴일에 수술 일정이 잡힌 셈이었다. 그리고 수술 결과도 대만족이었다. 70세 고령이었음에도 남편의 회복속도는 매우 빨라서 11일 만에 퇴원할 수 있었다. 척추를 다쳤지만 디스크수술 부위 위쪽이었고 다른 데는 상처가 없었다. 모든 게 참 신기하고 감사했다. 그렇게 긴박한 이틀이 기적처럼 지나간 뒤 우리 가족은 이 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찬양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셨다고 확신했다.

 32년 전 나는 우편함에 꽂혀 있던 ‘행복으로의 초대’를 보고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찾아갔다. 어린 시절부터 동네 교회에서 뛰놀며 성장했고, 중학생 때 성령침례와 방언기도를 받았으나 그 후 잘 사용하지 않아 소멸됐다. 결혼 후 고향을 떠나 서울로 와서 교회들을 전전했으나 무엇보다 기도가 갈급했던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을 행복으로의 초대를 통해 여의도순복음교회로 불러주신 셈이었다.

 

나는 인생에서 크고 작은 일을 만날 때마다 주님을 바라보았다. 아이들(1남 1녀)도 신앙 안에서 잘 자라서 믿음의 배우자를 만났고, 교회에서 봉사하고 있다. 대를 이어 신앙으로 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게다가 부모님과 형제들까지 부족한 나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믿어 천국의 소망을 품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하면서 느낀 것은 이것이다. 즉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으면 걱정할 것이 없다. 그러니 모두 예수님을 믿고 행복한 삶을 살길 바란다.

정리=복순희 기자


한정희 성도(대학청년국)

-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희망 잃은 집시청년들 보면서 선교사 꿈
가치있는 선교사의 길 선택하고 신학결심


 2014년 독일로 유학을 떠날 때의 나라면 3년 뒤 선교사가 되기 위해 귀국한 나를 상상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고 꿈과 비전을 품고 신학교에 다니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선교사에 대한 비전이 있었다. 그 때는 분명한 비전은 아니고 막연하게 선교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선교사라는 정의조차 제대로 내리지 못한 채 사진작가가 되어 평신도선교사로 사역하겠다는 꿈만 품었다.

 성인이 된 나는 사진작가가 되기 위해 독일로 유학을 갔다. 독일에서 베를린순복음교회에 출석하며 신앙생활을 이어 갔다. 그 곳에서 몇 차례 단기선교를 통해 ‘선교’를 진지하게 마주하게 됐다. 이전에는 선교사는 단지 그 나라에 가서 어려운 이들을 도와주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독일에서 선교사님들의 사역과 삶 그리고 단기선교를 통해 선교현장의 생생한 모습을 보면서 기존의 생각이 깨어졌다. 심지어 사진작가가 되겠다는 꿈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였던 것 같다. 평신도 선교사가 아닌 선교사가 되는 꿈을 품게 된 것이.

 나는 내가 받은 소명이 무엇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평신도 선교사인지 아니면 선교사로서 온전히 사역을 감당하는 것인지 분별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1년 정도는 그 고민을 내려놓고 사진작가가 되기 위한 입시준비에 집중했다. 1년 여를 열심히 공부해 원하던 대학교에 합격했다. 이제는 결단을 해야만 하는 시간이 온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또 기도하며 하나님의 응답을 구했다. 하루는 내게 김한수 선교사님이 “세월을 아껴라. 진짜 가치가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보고 결정을 내려라”고 조언해주셨다. 그런데 이 말씀이 내게는 기도의 응답으로 다가왔다. 무엇이 더 가치 있는 것인가는 확신했기 때문이다.

 루마니아로 단기선교를 처음 갔을 때 집시들이 너무나도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꿈도 희망도 없는 청년들은 오늘이 전부인 양 오늘을 즐기는 데만 열중했고 내일에 대한 꿈과 희망이 없었다. 심지어 어린아이들은 쓰레기통에서 놀고 있었다. 너무나 안타까운 상황에 마음이 아파왔다.

 2년 후 그곳을 다시 방문했을 때 깜짝 놀랐다. 희망이 없던 그 마을에 교회가 세워지고 우리가 복음을 전한 아이들이 커서 이제는 교회의 일꾼이 되어 누구보다 열심히 내일을 위해 꿈을 키워가고 있었다. 슬럼가였던 마을에 큰 도로가 생기는 등 복음이 들어간 곳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을 목격했다. 나는 단 한 번 단기선교를 갔다 왔을 뿐이지만 하나님은 그곳에서 계속 일하고 계셨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때 영혼을 사랑하는 것 이상의 가치가 없다는 것을 확신했다.

 선교사가 되겠다는 굳은 결심으로 작년 9월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현재 신학교를 다니며 선교사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이런 나의 결정에 부모님은 처음에 반대하셨다. 그러나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더 우선이라는 생각에 부모님의 반대에도 굴하지 않았다.
 

최근 나는 공부를 하면 할수록 스스로 부족한 것을 느끼고 어려움도 피부로 느끼고 있다.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라도 그 부족함을 스스로 채울 것은 채워야 한다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 바라기는 선교사 준비를 마친 후에 그 곳에 많은 선교사님들이 그러하듯 주님이 주시는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싶다. 이를 위해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공부에 매진할 생각이다. 많은 분들이 응원해주셔서 어려움 중에도 힘을 낼 수 있는 것 같다. 부모님도 지금은 누구보다 응원해주시고 지지해주신다. 앞으로도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많은 기도를 부탁드린다. 할렐루야.               

 정리=정승환 기자

 


김용익 안수집사(은평대교구)

- “전도는 예수님의 지상명령”

성령 체험 후 세상의 즐거움 버리고 주님만 바라봐 
전도에 대한 두려움, 교회성장선교회 통해 기쁨 돼

 나는 원래 다른 교회에 출석하다가 1992년 즈음 조용기 목사님의 설교에 큰 은혜를 받아 우리 교회에 출석하게 됐다. 당시 조용기 목사님의 속사포 같이 빠른 설교를 못알아 듣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부산 출신인 내게 목사님의 설교는 또렷하게 들렸다. 특히 강남기도원에서 성령체험 후 세상이 달라보이기 시작했다.

 교회 출석을 하면서도 직장생활을 하다보니 술과 담배를 쉽게 끊지 못했었다. 그런데 성령체험 후 놀라운 체험을 했다. 하루는 직장상사 등과 함께 술자리를 가졌는데 담배가 벌레처럼 보이기 시작했고 술은 도저히 목구멍을 넘길 수조차 없었다. 심지어 억지로 술을 삼키려다가 그 자리에서 술을 뱉어내 상사의 눈치만 살펴야했다. 그 후로 난 자연스레 술과 담배를 모두 끊게 됐다.

 2003년에 안수집사가 되어 남선교회 봉사실 등에서 봉사도 했다. 그러다 지난해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에서 기도 중에 ‘전도’라는 말에 강한 끌림을 받았다.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명령이기도 한 전도에 도전하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실상 나는 전도만큼은 참 어렵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평소 주일성수하고 봉사도 하면서 신앙생활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지만 직장에서도 쉽게 ‘예수님을 믿으세요’라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당연히 노방전도는 상상하기조차 힘들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우리 교회의 교회성장선교회였다. 그 곳에서 난 전도학교를 통해 전도에 대한 자신감과 전도 방법에 대해 배우고 매주 토요일이면 선교회 전도활동에 참여했다. 처음에는 우물쭈물하며 “예수∼”라고 입을 떼기도 전에 사람들이 나를 지나쳐갔다. 그래도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매주 전도활동에 참여했다. 몇 주 지나니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바로 기도였다. 그 후에는 선교회에서 배운 대로 뜨겁게 기도하고 나가니 어느 곳에서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정말 신기했다. 하나님은 거의 매주 세사람씩을 내게 붙여주셨다. 한 번은 병원전도를 갔는데 인사를 해도 대꾸도 안하던 분이 차츰 마음의 문을 열더니 내게 기도를 요청했다. 옆에서 듣고만 있던 환우도 ‘나도 기도해달라’며 한 번에 두 명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도 있었다. 복음을 전하는 것도 절대 사람의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해 하는 것임을 매 번 느낀다. 그래서 나는 일이 바빠도 반드시 매주 금요철야예배는 빼놓지 않고 참석하며 성령의 재충만을 위해 기도한다.

 열두광주리 새벽기도회 때 있었던 일이다. 기도회 마지막 날에도 선교회원들과 전도를 나가는데 왜인지 모를 기대감이 가득했다. 금천대교구 성도들과 연합으로 시행된 이날 전도대회에서 나는 시장 서쪽 주택가에서 복음을 전하게 됐다. 마침 주택가에서 나오는 한 젊은이를 붙들고 복음을 전했다. 그 청년은 순간 당황했지만 내 말을 경청하더니 더듬더듬 내게 자신은 중국 흑룡강성에서 한국으로 왔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신학에 꿈을 가지고 믿지 않는 부모와 남동생과 함께 이곳에 왔으며 자신이 다닐 교회와 신학교를 찾기 위해 기도하고 집에서 나오자마자 나를 만나게 됐다며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그래서 난 우리 교회의 위치와 예배시간 등을 상세히 알려주고 추후 회원들과 그 청년의 집을 심방하기도 했다. 이 청년은 최근에는 교회성장선교회에 등록해 함께 전도활동도 하며 신학교 진학을 준비 중에 있다. 나는 이 청년을 통해 중국지역에 복음을 전하시려는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 있음을 확신하며 중보하고 있다. 내게 전도는 두려움이었지만 지금은 가장 큰 기쁨이 됐다. 예수님을 믿는 모두가 이 기쁨을 함께 누렸으면 좋겠다. 할렐루야.
 


양효진 집사(장년대교구)

- 난임 중 이영훈 목사 기도 받고 두 아이 출산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어 감사해요”
‘명랑핫도그’ 창업, 중보기도 능력 체험

 나는 뜨거운 성령의 역사가 있는 우리 교회가 너무 좋다. 우리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많은 기적을 체험했다. 결혼 후 노력을 해도 아이가 생기지 않았는데 이영훈 목사님께 기도를 받고 임신을 하게 됐다. 시험관 시술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식을 앞두고 자연임신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우리 가족 모두 너무 놀라고 기뻤다. 건강한 아들을 낳고 2년 후 또 자연임신으로 아들을 낳았다. 난임으로 고생하던 내가 주님의 은혜로 두 아이의 엄마가 됐다. 7살, 5살이 된 아이들은 유치부와 유아부에서 찬양반으로 봉사하며 즐겁게 신앙생활하고 있다.  

 나는 교회에 나와서 주님께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들을 수 있어 너무나 감사하다. 구역장으로 구역을 섬길 수 있어 감사하고, 늘 기도할 수 있어 감사하다. 특히 장년대교구의 화요중보기도회는 기도응답의 자리이자 내 마음의 평안을 얻는 귀한 기도회다. 남편의 사업을 위해 기도하고 응답받는 자리이기도 하다.

 남편은 명랑핫도그 창업 멤버다. 명랑핫도그가 성공한 사업이 된 것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다. 신세계백화점에서 케밥을 만들던 남편은 다른 길을 찾아보다가 케밥을 같이 만들던 사람들과 함께 2016년 6월 명랑핫도그를 창업하게 됐다. 창업 멤버로서 매장을 하나 갖고 있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물질이 부족했다. 이전에 한 차례 사업을 하다 실패해서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았다. 아현동에 매장을 오픈하려고 했는데 돈이 없었다. 계약금을 겨우 마련했지만 중도금도 내야하고 집기도 구매해야 하는데 막막했다. 처음엔 잘 되겠지 하는 마음에 계약을 했는데 막상 돈이 안구해지니 마음이 불안해졌다. 매일 돈을 구하러 다니는 것도 힘들고 지쳤다.

 나는 그제야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지 못했던 것이 생각났다. 내 생각으로 일을 진행시켜왔던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업이면 끝까지 가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들어간 돈 모두 떼여도 좋으니 미련 없이 멈추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화요중보기도회에서 간절히 기도하고 주변 분들께 중보기도를 부탁했다. 유아부·유치부 찬양반 학부모회에서 기도해주시고 구역식구들도 나를 위해 많은 기도를 해주셨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니 꼭 필요한 날짜에 조금씩 돈이 채워졌다. 나는 명랑핫도그가 주님의 것이 되도록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지는 사업이 됐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갖게 됐다. 하나님의 은혜로 가게가 오픈 했고 좋은 직원도 주시는 등 모든 상황마다 일이 잘 되게 해주셨다. 2016년 12월 문을 연 명랑핫도그 아현점은 주변에서도 맛집으로 인정받아 늘 손님이 많다. 이것 모두 기도의 응답이다. 사업을 준비하면서 중보기도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게 됐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남편도 내가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아내의 기도 덕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명랑핫도그를 통해 남편이 하나님을 알게 된 것 같아 감사하다. 나는 아직 신앙이 없는 남편이 성령 충만한 주님의 일꾼이 되도록 늘 기도한다. 명랑핫도그 창업자들과 직원들이 좋으신 하나님을 믿고, 전국 약 700개의 지점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나길 기도한다. “너의 행사를 야훼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잠언 16장 3절)

정리=이미나 기자


김종복 장로((사)순복음실업인선교연합회장)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실업인 되도록 노력
 
 우리 교회 창립 60주년을 맞아 순복음의 실업인들은 제 2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다음 세대를 위한 목표와 비전, 그리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건설 될 수 있도록 순복음 실업인들은 힘찬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조용기 목사와 이영훈 목사 선교사역의 최일선에서 주님의 제자가 되고 있는 실업인연합회 회장 김종복 장로를 만났다.

 “믿음의 실업인 한 사람을 세우려면 많은 분들의 기도와 도움이 필요하죠. 특히 각 선교회에서 기도의 어머니들이 중보기도로 큰 힘이 되어 주세요. 연합회 회원들은 예수님의 증인된 삶을 사는 것이 사명이에요. 자신의 자리에서 복음의 지경을 넓히는 이들이 바로 실업인들이죠”

 김종복 장로는 회장이 되면서 말씀과 성령, 사랑의 열매를 맺는 실업인들이 되도록 힘썼고 가장 먼저 기도와 말씀을 통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도록 했다. 김 장로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꾸짖으셨던 예수님을 예로 들었다. “열매는 맺을 때가 됐건 안됐건 주님이 쓰시려고 할 때 무조건 맺혀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실업인으로서 각자 자기처소에서 기능별 직능별로 어디를 가든지 주님께 쓰임받는 일꾼이 되어야 한다는 거죠”  

 김 장로는 “실업인은 세상에 나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 그들과 함께 현장에서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 중보기도로 물질로 자신의 달란트로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직접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고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새로운 부흥과 도약을 위한 미래의 꿈을 향해 전진하는 실업인의 힘찬 발걸음을 기대해달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총재 조용기 목사님과 이사장 이영훈 목사님이 가는 곳은 어디라도 함께 하며 ‘복음의 증인이 되라’는 명령에 따른 예수님의 제자와 같이, 선교지 최일선에서 보필하며 세계 복음화에 앞장서는 순복음실업인선교연합회를 만들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이영옥 집사(종로중구대교구)

- 기도의 힘으로 가정의 어려움 이겨내


남편 암과 딸 팔의 염증 치유 받아
10년 간 이어진 재정의 어려움도 극복

 13년 전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됐다. 부족함 없이 살아왔는데 행여 어린 두 딸이 위축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생겼다. 어른들이야 어떻게든 버텨내지만 애들은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때마침 교회학교 10대 선교사훈련학교(파워미션)의 광고를 보게 됐다. 단기선교를 준비하면 주일만이 아닌 틈틈이 교회에 가게 되니 집안 사정에 눈 돌릴 틈이 없고 삐뚤어질 일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필 모집일에 재정이 바닥 났지만 나는 아이들을 단기선교에 보냈다. 감사하게도 아이들은 단기선교 준비로 늘 바빴고 곧 이사 간다는 엄마의 말을 믿으며 집안의 어려움을 체감하지 못했다.  

 살림은 좀처럼 좋아지지 않았다. 대학도 나오고 나름 유학의 길도 밟아본 남편인데 신용불량자가 되니 취업이 되지 않았다. 남편은 애들을 굶기지 않겠다는 생각 하나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몸으로 하는 노동도 불사했다. 남편은 열심히 일을 하며 신뢰를 쌓았고 자영업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겠다는 지인도 만났다.

 그런데 평생토록 감기 한 번 안 걸렸던 남편의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 혈뇨를 봐서 검사를 해보니 방광암 말기라고 했다. 갑작스러운 남편의 암 선고에 나는 기도밖에 할 수가 없었다. 교회학교에서는 이 사실을 알고 중보기도 해주었다. 목사님들을 비롯해 선교훈련학교의 학부모들은 우리 부부를 위해 함께 기도해 주었다. 기도 덕분인지 수술 당일 우리 부부의 마음에 평안이 깃들었다.

 마취를 하고 수술대에 오른 남편에게 기적같은 일이 생겼다. 방광에 있던 암덩이가 피가 고인 핏덩이였던 것이다. 의사선생님은 분야 최고 권위자였고 CT촬영까지 마친 상황이었기에 당혹스러움과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셨다. 다시 이 피가 어디서부터 흘러왔는지 재검사를 한 의사는 신장쪽으로부터 피가 흘러나왔다며 신장암 3기라고 했다. 그러면서 “방광암이었다면 살 가망이 적고 수술에 성공해도 소변통을 달고 살아야 했다”고 말했다. 신장암 수술 후 남편은 항암치료 한 번 없이 완치 판정을 받았다. 이 일을 겪고 선데이 크리스천이었던 남편은 새로운 시간을 얻었다며 남선교회에서 1년 넘게 봉사를 하고 있다. 그리고 평생 한 갑 이상 피우던 담배를 끊어냈다. 이 모든 게 중보기도의 힘이었다.  

 최근에는 둘째 딸 수아의 팔에 염증이 생기는 문제가 있었다. 팔에 불이 떨어지는 것 같다며 종이 한 장 들기를 어려워했다. 의사가 운동도 하지 말아야 하고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고 했지만 그림을 전공하는 고등학교 2학년인 딸은 그 말을 따를 수가 없었다. 갈수록 증상이 심해져 가방을 들지도 못해 내가 들어다 주었다. 그런데 딸은 이번 여름 단기선교를 준비하며 팔의 염증이 치유 받는 기적을 체험했다. 그동안 기도를 해도 의심이 들었는데 단기선교 준비로 말씀을 읽고 기도훈련을 하며 마음의 준비가 되니 병고침의 확신이 생겼다고 한다. 딸은 비전도 받아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며 노력 중이다. 남편과 딸의 기적에 이어 우리집도 지하 단칸방에서 42평 전세 아파트로 옮기게 되며 좋은 일들이 넘치고 있다. 나의 바람은 앞으로도 우리 가정이 믿음의 가정 복음을 전하는 가정이 되는 것이다.

정리=김주영 기자


조강연 집사(양천대교구)

- 행동발달장애 하나님이 고쳐주셔



5년 간 절기마다 이영훈 목사님 기도 받아
기도 받은 후 약 끊고 점차 행동 조절 돼

 15년 전 둘째 아이를 잉태했을 때 임신 4개월 경 양수 검사를 통해 아이에게 이상이 있는 것 같다는 의사의 소견이 나왔다. 장애를 지니고 태어날텐데 임신중절을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다. 크리스천인 나로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아이를 보낼 수 없었다. 낳아서 키우겠다고 하니 의사는 고생을 엄청 할 거라고 경고를 했다.

 피부가 희고 예쁜 아들을 낳았다. 돌 때까지는 별다른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어린이집에 입학하고부터 선생님들이  다른 아이들과 행동이 다르다고 병원에서 검사를 받아보라고 권유하셨다. 대학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보니 행동발달장애라는 진단과 장애 3급을 받았다. 아이의 뇌에서는 일반인보다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이 3배 이상이 나오기 때문에 자기 행동 조절이 안 되는 상태였다.

 학교에 입학 한 뒤에는 문제가 더 컸다. 가만히 앉아서 공부하는 교실에서 우리 아이 혼자만 교실을 돌아다니고 소리를 지르니까 다른 아이들과 선생님께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학교에 불려가 담임 선생님과 상담도 여러 번 했고 특수 학급에 소속이 되었다. 그리고 3학년부터 뇌와 행동을 제어하는 약을 처방 받았다. 그런데 약만 먹으면 아이는 모든 행동을 멈췄다.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고 밥도 먹지 않아 애가 비쩍비쩍 말라갔다. 교회학교 선생님들이 너무 불쌍하다고 하시며 이영훈 목사님께 기도를 받을 수 있도록 추천해주셨다. 이영훈 목사님은 열두광주리 신년 축복기도회, 부활절, 추수감사절 등 특별새벽예배 때 교회학교 학생들을 특별히 안수해주셨는데 그때부터 5년간 모든 절기 마다 기도를 받을 수 있었다.

 처음 이영훈 목사님께 기도를 받은 날을 잊을 수 없다. 기도 후 아이는 “엄마 나 약 먹지 않을래요. 목사님이 나 고쳐주셨는데 왜 약을 먹어요” 하나님께서 고쳐주실 거란 믿음은 있었지만 약을 서서히 줄여 보자라고 말했더니 아이는 단호하게 “아니야. 다 고쳤어”라고 말했다.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은 결과 아이 상태가 많이 좋아져서 약을 안 먹어도 된다는 말을 들었다. 급격히 좋아진 이후부터는 교회 절기마다 목사님의 기도를 받을 수 있었고 아이가 좋아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하지만 발작처럼 아이가 돌발 행동을 할 때가 있었다. 지하철을 타거나 버스를 타면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앉아야 하니 다 일어나라고 했다. 그럴 때마다 내가 얼마나 울면서 기도를 했는지 모른다. 6학년 때 검사를 받았는데 점수가 69점 이하로 나오면 장애3급 판정을 받는데 70점을 받아서 장애등급을 받지 않았다.

 올해 아이는 중학교 2학년이 됐다. 얼마 전 부활주일 예배를 드리고 아이와 함께 집에 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아이가 배가 아파서 걸을 수가 없다고 했다. 이상한 예감이 들어 아이와 함께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아프게 하는 귀신은 떠나라”고 계속 기도를 했다. 기도 후 아이는 복통이 사라진 것 뿐 아니라 행동도 완전히 달라졌다. 이전에 있었던 돌발 행동 없이 모든 상황에 조용히 잘 대처해냈다. 그리고 3주 전 주일 3부 예배 때 신유기도 시간에 이영훈 목사님께서 “행동발달 장애로 엄마가 오래 기도해오셨는데 하나님께서 고쳐주셨습니다”라고 기도하셨다. 응답받았다는 것에 감사해 두손을 번쩍들고 ‘할렐루야’라고 외쳤다.

 그날 아이와 지하철을 타고 집에 오는데 아이가 나에게 “엄마 나 오늘 잘했지?”라고 물었다. 내가 “너무 잘했어. 하나님이 너를 고쳐 주셨어”라고 말하니 “하나님께 정말 감사해”라고 말하는 아이를 보며 눈물이 났다. 15년 동안 과정을 뒤돌아보면 계속 좋아지게 해주신 하나님께 드릴 것이 감사밖에 없다.

 우리 아들은 기계를 누구보다 잘 다루고 컴퓨터를 잘한다. 하나님께서 아이에게 예비하신 길이 있을 줄 믿는다. 함께 기도해주시고 도와주신 교회학교 교역자님들과 선생님들, 이영훈 목사님께도 감사를 드린다.

정리=복순희 기자


조명환 교수(건국대학교 생명과학특성학과)

꼴찌가 박사가 된 비결이요?

하나님 전적으로 이끈 드라마 같은 삶
세계적 에이즈 전문가이자 퇴치 운동가
사는 모습으로 하나님 사랑 전하고 싶어

 ‘아시아 태평양 에이즈학회 회장’, ‘건국대학교 생명과학특성학과 교수’, ‘미국 메릴랜드대학 미국정치학 겸임교수’ 그의 이름 앞에는 많은 수식어가 있다. 조명환 교수는 에이즈 분야의 선구자이자 아시아 최고 전문가, 후학을 양성하는 교육자 그리고 에이즈 퇴치를 위해서라면 전 세계 어디라도 가서 정치인, 기업인 심지어 위험지역의 반군 지도자까지 만나는 열정적인 행동가다.

 이런 그가 요즘 그 무엇보다 최선을 다해 하고 있는 일이 있다.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이 세상에 알리는 것이다. 최근 ‘꼴찌박사’라는 제목으로 출간한 책에 그의 삶과 그 안에서 모든 것을 주관하며 사랑을 베풀어주신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고스란히 담아냈다.

 누구보다 오래 책상에 앉아 공부했지만 성적은 그만큼 따라주지 않았던 어린 시절, 그는 어느 날 아버지 친구의 ‘너의 꿈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교수’라고 말해버렸다. 건국대 교수였던 그분이 미생물공학과를 추천하시며 지원해보라는 권유에 적성과는 상관없이 입학원서를 냈고 대학생이 됐다. 남들보다 두배, 세배 노력을 해서 졸업했지만 덜컥 결핵 판정을 받고 요양을 하러 농장으로 내려가야만 했다. 몸이 회복된 후에는 미국 유학에 도전했다. 하지만 실력부족으로 두 학기 만에 학교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막막한 상황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쫓겨난 학교의 교수가 추천서를 써주었다. 여러 학교에 지원했지만 모두 입학이 거절됐다. 그런데 불합격 통지를 낸 애리조나대학교에서 찰스 스털링 교수를 지도교수로 공부할 경우에는 입학을 허락하겠다는 조건이 달린 편지를 보내왔다. 스털링 교수는 에이즈 연구가였다. 그 당시 에이즈 바이러스가 막 규명이 됐을 뿐 에이즈가 뭔지도 몰랐던 시절이라 조명환 교수는 에이즈 연구의 선구자가 됐다.

 “저는 어려서부터 공부를 못했어요. 게다가 문과 성향인데 대학을 미생물공학과로 간 거죠. 공부를 계속 하긴 해야겠는데 제 힘으로는 안 되니까 청년 시절에 하나님께 많이 매달렸어요” 하나님께 절절히 기도하면서, 노력하며 이룬 40년의 성과이기에 누가 봐도 당연한 성공 스토리로 여겨질만 했고 그 자신조차 꽤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을 해왔다. 그러던 그에게 2년 전 뜻하지 않게 들어온 한국기독실업인회(CBMC)의 신앙간증 제안이 그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헌신하도록 하는 터닝 포인트가 됐다. 이전까지 그는 자신의 삶 이야기를 친한 친구에게도 해본 적이 없었다. “너무 가난해서 원조 받으며 자란 걸 어떻게 사람들에게 말하겠어요. 열등생이라 항상 자신감도 없었고 사실 지금도 제 얘기를 하는 건 불편해요” 첫 신앙 간증은 그에게 커밍아웃과 같았다. 처음으로 그의 인생 이야기를 풀어놓는 자리에는 3000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이후 책이 나오고 기독교 방송의 많은 프로그램들과 공중파의 아침방송까지 출연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고 들은 후에는 감동과 은혜를 전하며 조명환 교수를 다시 일깨웠다. “사실 간증을 하고 싶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음성을 주셨죠. ‘이건 너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다. 내 자랑을 하고 와라’하셨어요”


 한국전쟁이 끝나고 3년 뒤 태어난 그는 어머니가 다니시던 교회의 연결로 ‘세이브더칠드런’을 통해 미국인 에드나 넬슨 씨의 후원을 받게 됐다. 그분은 돌아가실 때까지 45년간 매월 15달러와 편지를 조명환 교수에게 보냈다. “제가 교수가 됐다고 하는데도 에드나 어머니는 후원을 멈추지 않으셨어요” 에드나 씨의 편지 말미에는 언제나 세 문장이 적혀 있었다. ‘하나님은 너를 사랑하신다. 그의 사랑을 믿어라. 나는 너를 위해 기도한다’
 “에드나 어머니의 사랑을 나중에 더 크게 깨달았어요. 그리고 그건 인간이 할 수 있는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요. ‘네가 성공해도 너를 돕겠다’라는 하나님의 음성이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 저는 엄청난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함부로 못살겠어요”  

 간증과 책을 준비하며 인생을 되돌아본 조명환 교수는 놀라운 발견을 했다. “예전에는 몰랐어요. 그저 운이 좋은 줄 알았고, 사랑을 받으면서도 그냥 그런가보다 후원자는 자기가 그렇게 하고 싶으니까 하나보다 했었어요. 그런데 우연도 아니고 운도 아니었어요. 너무나도 치밀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였던 거죠. 에드나 어머니를 사람들에게 말하면 그 사랑에 다들 크게 놀라요. 자신은 후원을 몇 년 하다 끝냈다고. 또 어떤 분은 내 자식한테도 편지를 안 보내는데 어떻게 후원아동에게 매달 그렇게 할 수 있냐고요” 요즘 뜻하지 않게 열린 간증 사역자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기쁨과 감동이 있다. “제가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신다는 얘기를 하면 사람들이 저에게 그래요.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는걸 깨달았대요. 연세가 90세도 넘으신 노신사께서도 눈물을 흘리며 그러시더라고요. 어떤 분은 ‘나는 뭘 해도 안 풀리는 흙수저인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주시기 때문에 잘 될 수 있다는 소망을 갖게 됐다’고도 하시죠.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걸 알게 되니 희망도 발견하고 소망도 품으시더라고요” 수많은 일들 속에서도 그가 항상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스리랑카 반군 지도자를 만나서 협상을 했을 때 남들은 겁이 없냐고 하지만 항상 하나님이 용기를 주시고 잘 견뎌 나가게 해주셨어요. 지치지 않고 막히는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고 해결책을 찾는 것도 주님 안에서 할 수 있어요”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로 살아가기를 꿈꾸는 조명환 교수의 눈은 청년의 눈처럼 빛이 났다. “하나님은 제게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주길 바라세요. 마태복음 5장 16절 말씀에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것처럼 삶을 통해서, 사는 모습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싶어요. 앞으로 제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지 모르겠지만 어떤 일을 하던지 저를 보고 하나님을 알게 됐으면 좋겠어요. 예전에는 교수나 박사가 목표였다면 지금은 세상의 직업이나 일이 목표가 될 수 없어요. 이제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만 살기를 원합니다. 힘들어서 쓰러지고 넘어질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이 들어 사용하시는 저의 인생 2막을 저도 기대합니다”


유현숙 집사(마포1대교구)

- 형부의 위암, 이영훈 목사 안수 기도 후 치유

가족들 한 마음으로 금식하며 기도
가족모임서 형부 간증, 은혜 시간 돼


 6년 전이다. 은행에서 퇴직한 둘째 형부는 택시운전을 시작하셨다. 마음의 갈등이 깊었던 형부는 갑작스레 위암 판정을 받았다. 위에서 나온 피가 목까지 차올랐고, 변기가 붉게 물들 정도로 하혈이 심하자 병원은 전이를 의심했고, 수술에 대한 어려움을 호소했다. 지역 병원에서 대형 병원으로 옮긴 형부를 위해 가족이 할 수 있는 건 ‘오직 기도 뿐’이었다.

 우리가 기도의 힘을 온전히 믿는 건 친정아버지를 통해서였다.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에 매일 다니다시피 할 정도로 믿음이 좋으셨던 아버지는 혈액암 판정을 받으셨다. 아버지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셨다. 우리도 아버지를 위해 간절히 중보 했다. 그런데 한 달 뒤 병원에서 암세포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는 얘기를 들었다. 병원에서 95% 확진했던 혈액암이었는데 말이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기적이었고, 중보기도의 힘이었다. 이후 연세가 있어 몇 차례 병원에 입원하셨던 아버지는 숨이 끊어질 것 같은 위기 속에서도 주기도문을 암기하시며 찬송가 ‘나의 맘속이 늘 평안해’를 찬양하셨다. 그러면 다시 회복되셨다. 또 “내가 있는 곳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곳”이라며 같은 병실에 있는 환자들의 치유를 위해 말씀을 전하고 기도해주셨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버지의 기도와 말씀처럼 사람들이 정말 회복해 퇴원했다. 기도의 힘은 위대했다. 그래서 형부를 위해 기도의 힘을 모으기로 했다.

 당시 여든이셨던 친정엄마(김봉의 집사·사진 가운데)와 동생(유순길 집사·사진 오른쪽)은 바로 기도원으로 올라가 3일 금식하며 기도했다. 담당 교구장이셨던 신재분 전도사님이 다리를 다쳐 기도원에 계실 때였다. 3일을 함께 기도해주셨던 전도사님은 엄마와 동생에게 집이 아닌 바로 병원으로 가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에 순종한 두 사람은 형부를 만나기 위해 강남에 있는 병원으로 달려갔다.

 두 사람은 형부가 입원한 병실이 있는 10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낯익은 얼굴이 동승했다. 이영훈 목사님이셨다. 예기치 않은 만남에 동생은 이영훈 목사님을 보자마자 형부 이야기를 꺼내며 기도를 요청했다. 목사님은 예정된 병원 심방을 마치고 병실에 오셔서 형부를 위해 기도해주셨다. 그러더니 가시면서 “마음을 편히 가져라. 그리고 간증할 준비를 하라”고 하시는데 깜짝 놀랐다. “다시 오겠다” 약속하신 목사님은 정말 병원심방을 또 오셨다.

 이후 목사님은 또 다시 한 번 병원에 오셔서 형부를 위해 안수기도해주셨다.
 수술하기 어렵다던 형부는 안수 후 암수술을 받았고 위 3분의 2를 절제했다. 하지만 수술 후 건강을 회복했고, 암 완치 판정을 받았다. 형부 등 가족은 이영훈 목사님께 감사인사를 드리기 위해 교회를 찾기도 했다.

 최근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얼마 전 집안 결혼식이 있어 친척이 한자리에 모이게 됐다. 그 자리에서 형부가 갑자기 간증을 시작했다. “믿음이 없던 내가 이영훈 목사님과 처제 등 가족의 기도로 고침을 받았다. 하나님이 나를 살려주셨다. 처제들의 믿음이 대단하다”

 그 자리에 있던 친척 절반 이상이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런 형부의 간증에 모두들 은혜를 받았고, 가족 모임이 예배 모임으로 변화돼 하나님께 영광 돌렸다. 그 순간 형부를 위해 첫 안수기도 해주시고 나서시던 이영훈 목사님의 말씀이 기억났다. “간증할 준비를 하라” 진정 하나님의 기적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

정리=오정선 기자

 


최수자 권사와 아들 부부(영등포대교구)

“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님, 아들도 살려주셔” 

수면 중 갑자기 심장 멎어 뇌사상태된 아들
이영훈 목사 안수기도 후 깨어나 회복 돼

 나는 결혼 1년만에 남편을 잃었다. 겨우 25세에 돌 지난 아들과 함께 세상에 단 둘이 남았다. 남편이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아들을 훌륭하게 잘 키워야 한다는 일념 아래 나는 살던 지역을 떠나 무작정 상경해 취업했다. 힘든 직장 생활 중에 전도를 받아 여의도순복음교회에 출석하게 됐다. 처음에는 혼자 아등바등 살던 삶에 지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지금까지 마음에 숨겨두었던 설움이 터져 나오고 알 수 없는 평안이 찾아옴을 느꼈다.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것이 하나님도 예수님도 교회도 잘 모르는 내가 다음날부터 무작정 새벽기도에 참여했다. 교회 행사나 예배가 있다면 빠지지 않고 참여했다. 자연스레 전도도 하면서 전도상도 받고 구역장, 지역장을 거쳐 지금은 권사가 됐다. 그러자 하나님은 내게 아니 우리 가족에게 복을 주셨다. 주님께 다가갈수록 건강의 축복은 물론, 물질의 축복도 받았다. 무엇보다 아들이 주님의 사랑 안에서 건강하게 자라 가정을 꾸리고 한양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를 받기까지 아들은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영훈 목사님의 안수기도를 받고, 우리 가족을 신앙으로 이끌어 준 정길영 목사님과 구역식구들의 기도로 이겨낼 수 있었다.

 그런데 지난 4월 16일 목요일 새벽에 며느리로부터 급한 전화가 왔다. 아들이 쓰러졌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안산시 공무원으로 근무하는 아들이 최근 많은 업무로 피곤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전날 잠을 자던 중 갑자기 숨이 멎었다는 것이었다. 응급구조대가 일찍 도착해 심폐소생술을 하고 고대안산병원으로 아들을 옮겼지만 뇌에 산소공급이 일시 중단되어 뇌사상태가 됐다. 며느리는 아들이 중환자실로 옮겨져 당장 면회가 안되니 아침이 밝으면 병원에 올 것을 당부했다. 나는 이른 새벽 교회로 가서 하나님께 아들을 살려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이영훈 목사님께 안수기도를 요청하고는 안산에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갑작스러운 이 상황이 이해조차 되지 않았지만 다음날 다시 교회에 가서 새벽기도를 하고 이영훈 목사님의 안수기도를 또 한 번 요청했다. 그리고 그날 병원 면회시간에 이영훈 목사님이 오셔서 아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주셨다. 목사님은 내게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라”는 말씀을 주시고 가셨다. 그 말씀을 붙잡고 아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지·구역 식구들은 물론 이대현 대교구장 목사님과 아들이 다니는 여의도순복음안산교회 김유민 담임목사님도 함께 기도해주셨다. 그리고 그날 저녁 아들이 손가락을 조금 움직였다. 분명히 기도응답의 징조였다.

 실제로 다음날에는 아들이 실눈을 뜨기 시작했다. 주일에 전도한 새신자 5명과 교회에 함께 가서 예배를 드리고 왔는데 아들이 완전히 눈을 떴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월요일에는 의식을 거의 차렸고 화요일에는 동료 직원들의 말에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은 말도 하고 일반병실로 옮겨져 치료를 받고 있다. 할렐루야.

 돌이켜보면 아들과 단 둘이서 살아갈 때는 너무나 외롭고 힘든 삶이었지만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는 늘 함께 해주시고 지켜주시고 이번처럼 큰 위기가 닥쳤을 때는 구해주셨다. 다시한번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또 아들을 위해 기도해주신 이영훈 목사님을 비롯한 목사님들 그리고 지·구역식구들에게 감사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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