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재수 장로(소하교회)

-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니 복의 문 열어주셔

주님이 주신 사업장 선교 도구 되도록 기도

우리 가정을 전도한 누님이 2003년 교회를 개척하셨다. 당시 나는 1989년부터 운영해오던 국민일보 지국을 2000년 마무리하고 새 사업에 고군분투하던 시절이었는데 1년 반 동안 개척교회에서 매일 새벽예배를 드리며 사업을 통해 선교에 쓰임 받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런데 2004년 8월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길을 나섰다가 승용차와 정면충돌 했다. 왼쪽 쇄골이 완전히 부서져 응급실로 실려가 다섯 시간의 대수술을 받았다. 나중에 보니 병원부터 가라며 사고 수습은 걱정 말라던 상대편 운전자는 경찰이 오자 오토바이 운전자가 음주운전을 했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마침 우연히 사고 현장을 본 동네 분이 “그분은 교회 다녀서 술은 입에도 안 대는 사람”이라고 증언을 해줘서 사고 수습이 잘 마무리가 됐다. 그런데 사고 후 팔이 올라가지 않는 장애가 생겼다. 지인들이 영구장애 판정을 받아 혜택을 받으라고 할 때마다 “하나님 건강한 몸으로 하나님께 헌신하게 해주세요”라고 더 크게 기도했다.

 올라가지 않던 팔이 기적처럼 완쾌돼 건강한 몸으로 2005년 6월, 7명의 지인들과 동업으로 숯불갈비전문점 ‘상상초월’을 창업했다. 저렴한 가격에 질 좋고 맛있는 고기를 제공하자 손님이 200명씩 줄을 설 정도로 번창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손님 수가 줄자 동업하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자신들은 그만두겠다며 투자금을 회수해 빠져나갔다.

 아내와 함께 무릎 꿇고 기도하며 오직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달라고 간구했다. 그리고 투자금 줄 돈이 모자라지 않고 손님들이 다시 많아지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단독 경영을 하며 나는 하나님의 지혜가 더욱 간절해졌다. 직접 회사와 모임들을 다니며 전단지를 돌리면서 ‘행복으로의 초대’도 함께 전달했다. 회식과 가족 모임에 적합한 곳으로 소문이 나자 다시 사업이 재점화됐다.

 힘들 때마다 기도밖에 답이 없었다. 아내와 함께 간절히 기도하면서 시편 91편·109편, 이사야서 41장 등을 외웠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한다 해도 구제역, AI 등 각종 사태가 있으면 손님들이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겸손한 마음으로 나아가니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셨다.

 명절 때는 손님이 없어 이 문제를 놓고 기도했다. 어느 날 손님이 고기를 포장해서 가져가겠다고 했다. 또 얼마 뒤 한 손님이 제주도에 계신 부모님께 보내드리겠다며 얼려서 포장해 달라고 했다. 그 손님들로 인해 포장과 택배로 판매 지경이 넓혀졌다. 맛있고 정직한 음식을 부담 없는 가격에 제공하겠다는 것은 하나님과 나의 약속이었다. 이런 영업방식으로 지역 주민들과 신뢰를 쌓을 수 있었고 보람을 누리고 있다. 지금은 시에서 연결해 준 20∼30명의 독거노인들에게 한 달에 한 번 갈비 정식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가장 감사한 것은 힘든 시절부터 함께 고락을 나눈 아내와 믿음의 가정을 세워 두 아들에게 신앙과 더불어 아름다운 가정의 모습을 가르쳐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금년에는 세금과 급여 등이 올라 어려움이 생겼지만 정책 탓하며 불평불만하는 대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며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내 꿈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전도하고 선교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며 정직하게 매일 열심히 살아갈 것이다. 

정리=복순희 기자

 


정윤희 권사(반석대교구)

- 수술 없이 허리를 고쳐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두 해 걸쳐 다친 허리로
극심한 고통의 시간 보내  

두 번에 걸쳐 허리를 다친 후 하루하루를 고통 속에서 살았던 나를 치료해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과 사랑을 간증하고자 한다. 1997년 10월 시골에서 보내 준 쌀가마니를 들다가 허리에서 ‘우두둑’ 소리가 나면서 비명을 지르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혼자서 일어설 수 없어 양쪽 부축을 받아 겨우 일어섰지만 이튿날부터 통증은 심해졌고 몇 달을 고통 속에 보낸 뒤에야 겨우 허리가 나아지는 듯 했다.

 그러나 이듬해 8월 병환으로 입원 중이시던 시어머니를 간호하면서 또 다시 허리를 크게 다쳤다. MRI 촬영을 위해 시어머니를 침대로 들어올리던 중 허리에서 ‘우두둑’ 소리가 났고 그때부터는 누워있어도 앉아있어도 허리 통증에 고통스러웠다. 어머니의 병간호를 할 수 없어 결국 남편의 도움으로 집에 돌아와 며칠을 누워 지냈다. 시간이 지나도 몸 상태가 호전되지 않자 남편이 척추 치료의 권위자가 있다는 병원을 수소문해 진료를 받게 됐다. 검사결과 의사는 “척추관협착증과 4, 5번 척추신경이 돌출되어 이를 방치하면 앉은뱅이가 될 수 있다”며 당장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당시 아들이 고3 수험생인 관계로 나는 수술을 하더라도 수능시험 이후에 하겠다고 했다. 의사는 “환자 상태가 이리도 심각한데 아들 수능시험이 중요하냐”며 호되게 야단을 쳤다. 그래도 나는 수능시험 이후 수술을 하겠다며 끝까지 고집을 피웠다. 수술을 하면 6개월 간 누워 지내야 하고 수술을 받은 사람들이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것을 봤기 때문에 수술을 미루는 것이 나의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나는 말라기 4장 2절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는 말씀을 붙잡고 “수술 없이 아픈 허리가 깨끗이 낫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몸을 빚으신 하나님께 모든 걸 맡기고 대신 수술비용을 하나님께 드리자’ 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아파트를 분양받아 중도금을 내던 때라 금전적 여유가 없었지만 치유에 대한 확신으로 하나님께 감사예물을 드렸다. 조용기 목사님께도 안수기도를 받고 싶어 아픈 몸을 이끌고 매주 수요예배에 참석했다. 근데 목사님이 설교를 마치신 후 신유기도에 이어 “오늘 이 자리에 한 자매님이 척추관협착증으로 그동안 고생했는데 하나님이 이 시간 깨끗하게 치료해주셨다”고 선포하셨다. 믿음으로 ‘아멘’이라고 화답할 때 치유의 확신이 들었다. 나는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는 말씀을 부여잡고 건강해진 내 모습을 바라보며 기도하고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간절한 나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나를 일으켜주신 하나님의 손길 덕분에 10분을 서 있기 힘들었던 나는 20분, 40분 서 있어도 힘들지 않게 됐고 이후 수술 없이 정상적인 일상생활로 돌아왔다.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며 지금껏 좋으신 하나님을 전하게 해주셔서 감사드린다.    

정리=오정선 기자

 


“내가 서있는 자리가 예배처소입니다”

- 한준희 이은민 집사(청년국)


파더스드림 통해 25년 만에 믿음 회복되고
아내의 중보기도로 복 받은 가정 돼 감사


나는 특전사대원으로 서울에서 복무하면서 2007년부터 여의도순복음교회에 출석했다. 모태신앙인으로 교회에 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지만 간절하고 뜨거운 믿음은 없었다. 중학교 때 방언받고 잠시 믿음으로 충만했던 적도 있었지만 특전사에서 복무하며 교회와 멀어졌고 상위 1%만 들어갈 수 있다는 청와대 경호실에 파견되면서 주일예배마저도 참석하지 못했다.

 1년에 6개월은 집에 들어올 수가 없을 정도로 바빠서 아내 혼자 아이 둘을 돌봐야 했다. 나쁜 아버지는 아니었지만 바쁜 아버지로 신앙이 점점 멀어진 것처럼 자연스럽게 가정에도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나는 교회에서는 교회의 일을 하고 직장에서 직장의 일을 해야 한다는 이분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자리에 있으니 그 누구도 내가 크리스천일거라고 생각지 못할만큼 세상과 분별없는 삶을 살았다.

 그런데 지난해 4월, 8년 동안 주사로 버텨온 디스크가 파열돼 수술을 받았다. 70일을 병원에 있다가 퇴원하고 쉬는 동안 장년국의 한 형제가 교회에서 진행하는 26기 파더스드림(아버지학교) 프로그램에 등록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도 참여하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파더스드림은 내 신앙을 회복하는 전환점이 됐다. 중학교 때 예수님을 만나며 느꼈던 뜨거운 감동이 내게 다시 밀려왔다. 탕자처럼 집을 떠나 헤매던 나를 주님이 다시 불러주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기도를 통해 25년 만에 방언이 다시 터졌고 처음으로 성경 1독에도 성공했다.

 또 하나님께서는 내가 서있는 곳이 예배의 처소임을 알려주셨다. 지금까지 10여 년을 함께 일한 동료들은 여태 내가 크리스천인줄 몰랐었다. 그런데 내가 크리스천임을 밝히고 변화된 모습을 보이자 “네가 믿는 하나님이 나도 궁금하다”며 두 명의 동료가 교회에 나오게 됐다. 항상 주말을 기다리며 일해 왔는데 이제는 월요일이 기대가 된다. 빨리 출근해서 내가 하나님의 사람임을 보여주고 말씀을 동료들에게 전해줘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하다.

 모든 건 신앙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아내의 중보기도 덕분이다. 아내는 화요중보기도회를 다니며 내가 파더스드림을 등록하기 몇 개월 전부터 남편이 가정에 믿음의 제사장이 되기를 서원 기도했다고 한다. 가족이 신앙 안에서 하나가 되자 여러 가지 축복을 받고 있다. 결혼 10주년에 가족과 함께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에서 금식기도를 드리던 중 아파트 분양에 당첨됐다는 기쁜 소식도 듣게 됐다. 나와 아내의 바람은 딱 한 가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을 사는 것이다.      

정리=김주영 기자

 


이계순 권사(종로중구대교구)

- 하나님께 매일 예배 드리고 인생 역전

내가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신앙생활 한지도 벌써 38년이 됐다. 처음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그 날부터 예배는 내 삶의 원동력이요, 기도는 희망의 원천이었다.  

 1981년 남편이 췌장염에 걸려 80㎏이던 몸무게가 40㎏으로 빠지고 남편을 본 사람들은 모두 다 죽을 것 같다며 절망적인 말들을 쏟아냈다. 남편이 입원했을 때 병원 전도를 오신 분들이 간증집을 주고 가셨는데 남편은 내용을 읽다가 ‘이렇게 큰 병들도 낫는다면 내 병은 당연히 낫겠구나’라는 생각에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에 혼자 버스를 타고 갔다. 기도원에서 최자실 목사님께 안수 기도를 받고 3일 금식하고 예배를 드린 남편은 병이 깨끗이 나았다.

 그때부터 나는 하나님께 감사해 여의도순복음교회를 다녔다. 주일 예배는 물론이고 수요예배, 금요철야예배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당시 남편이 아파서 오랫동안 일을 할 수 없었기에 나는 가사도우미로 일을 하며 세 자녀 양육과 가정 생계의 책임을 오롯이 지고 있었다. 형편이 좋지 못해 하루치씩 연탄을 사다가 썼을 정도였다. 없이 산다고 무시당하는 것이 서러웠던 시절 그런 마음을 하나님 앞에 풀어놓고 나면 ‘내 나중에는 자녀들 잘 키웠다’는 소리 들을 날이 올 것이라는 소망이 생겼다.

 내 삶의 우선순위는 예배였다. 수요일에도 무조건 일을 쉬고 예배에 참석했다. 예배를 드리며 새 힘과 희망을 더 크게 가질 수 있었다.

 아이들이 대학에 다닐 때쯤에는 형편이 조금 나아져 5년간 했던 가사도우미를 그만두고 하숙을 시작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을 하느라 바빴지만, 시간을 쪼개 철야예배와 새벽예배를 드렸다. 늘 예배가 갈급해 잠을 적게 자도 피곤한 줄을 몰랐다. 세 자녀를 생각하면 기도밖에 해줄 것이 없었다. 첫째 딸은 치과의사로 활동하고 있고 둘째 딸은 일본 쓰쿠바 대학에서 7년 동안 장학생이었고 박사를 받은 후 지금은 아일랜드에서 네 아이의 엄마이면서도 글로벌 기업과 대학교에서 근무하고 있다. 아들은 무역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자녀들을 위해 기도할 때는 무엇보다 믿음의 가정을 이루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런데 며느리는 결혼할 때 신앙이 없는 상태였다. 사돈 어르신들은 타종교 신자였다. 역시나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도뿐이었다. 사랑하는 며느리의 구원을 위해 매일 평일 철야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아들은 물론 며느리, 손자들 모두가 우리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아들은 아무것도 없는 중에 믿음으로 사업을 일궈 지금은 상당한 매출을 올리며 성장 중이다. 사업상 용인으로 이사 간 아들과 며느리의 신앙은 나날이 깊어져서 며느리가 친정 식구들을 전도하는 구원의 씨앗이 되었다.

 

아들은 지난해 출석하는 교회에서 장로 직분을 받아 교회와 성도들을 섬기고 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그 날까지 건강한 몸으로 항상 예배드리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기도처를 봉헌해 섬기는 것이 나의 소망이다.     

정리=복순희 기자


김봉기 집사(남대문성전)

- 승리하는 방법은 오직 말씀과 기도뿐입니다

성경학교 프로그램으로
신앙인의 자세 깨닫고
삶의 고비마다 말씀 떠올리며

기도해 복 받아

나는 신앙의 성장을 위해서 말씀과 기도를 우선으로 꼽는다. 목사님의 기도와 여의도순복음교회 교육개발연구소의 성경학교 프로그램이 내 신앙 성장의 터닝포인트가 됐기 때문이다.

 1995년 나는 아내의 권유로 남대문성전에서 첫 예배를 드렸고, 이후 2년 정도 선데이크리스천으로 생활을 했다. 당시는 IMF 외환위기와 경제침체로 인해 많은 국민들이 극심한 경제난에 몸살을 앓고 있던 때였다. 건설업에서 종사하던 나 역시 일자리를 잃었고, 현장에서 막노동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막노동을 하게 되니 안 좋던 허리에 무리가 가 두 번째 디스크 수술을 하게 됐다.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하염없이 울던 나에게 아내는 남대문에서 옷가게를 해보자고 했다. 그렇게 2년 정도 옷가게를 운영했지만 그마저도 잘되지 않았다.

 여러 가지 힘든 일로 낙심과 좌절이 반복되던 당시, 교구장 목사님의 끊임없는 기도와 격려는 내게 큰 힘이었다. 어느 날 문제 해결을 위해 기도하던 중 내가 수확하려는 보리를 환한 빛과 함께 온 군중이 ‘우리가 여기서 추수를 해주고 가자’며 추수해주고 가는 환상을 봤다. 이후 나는 건설회사에 취직하게 됐고 옷가게는 아내가 운영하며 물질적 축복을 받았다.

 내 삶의 부족했던 것들이 해결되자 나는 예배 중심이 아닌 기복적인 신앙으로 다시 돌아섰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급이 생겨 성경학교 프로그램에 등록했다. 강의를 들으면서 말씀을 깊이 있게 알게 되니 진정한 크리스천의 모습에 대해 깨닫게 되고 말씀과 기도에 충실하게 변화되어가는 것을 느끼고 있다.

 예전에는 설교를 듣고 흘려버렸다면 이제는 말씀에 집중하기 위해 필기를 하고 나중에 다시 보며 묵상한다.

 성경대학에서 주일반 반장으로 봉사하면서 남대문성전에서 지난해 9월부터 지금까지 새벽예배에도 참석하고 있다. 내가 변하자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복을 주셨다.

 기적적으로 회사를 인수하게 됐고 올해 1월 10일에는 서울 1000개 업체가 참여하는 입찰에 낙찰됐다. 우리 회사가 2등으로 떨어질 상황이었는데 나는 빌립보서 4장 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말씀을 떠올리며 기도했다.

 놀랍게도 우리보다 앞섰던 업체가 서울시 입찰공고 자격심사 과정에서 점수미달로 떨어졌고 1시간 30분 만에 다시 우리가 1등이라는 전화를 받게 됐다. 발주처에서 일하는 서울시 공무원도 공무원 생활 중 이런 일은 처음 본다며 흔치 않은 일이라고 놀라워했다. 이 모든 게 하나님이 하시지 않고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앞으로도 말씀을 사모하고 뜨겁게 기도하는 믿음의 승리자가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정리=김주영 기자

 


이연순 성도(장년국)

- ‘시어머니 구원과 교사임용시험 합격’ 주께 감사

전도 사명 순종할 때
하나님이 복의 복 더해주셔

시어머니는 모든 것은 다 이해하시고 양보하셔도 예수님을 영접하는 데는 한사코 반대하셨다. 4대째 내려오는 믿음의 가정에서 자란 나는 그런 어머니의 구원을 위해 늘 기도했다. 그런데 아흔이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더는 늦어지면 안되겠다’는 마음에 작년부터 더 강하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할머님이 믿으셨는데 어머니 대에 신앙이 끊기니깐 남편이 교회를 다니지 않아요. 저에게는 우리 집안이 주님을 믿는 가정이 되도록 복음 전할 사명이 있어요.”

 어디서 이런 용기가 생긴 건지 아마 성령이 주신 마음이었을 것이다.
 나는 몇 년 동안 교사임용시험을 치렀다. 그러나 그때마다 최종에서 미세한 점수 차이로 낙방했다. 무엇이 문제인지 생각했을 때 깨달음이 왔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장 33절).

 내가 교사임용시험에 합격하게 해달라는 기도가 먼저가 아니라 어머니의 구원이 우선이었다. 나는 지난해 어머니를 모시고 교회를 찾았다. 하지만 그때마다 어머니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시며 주일 예배 참석을 차일피일 미루셨다. 영적 전쟁이 치열했다. 지난해 9월에는 장년국 성도들과 우리 집에서 매주 구역예배를 드렸다. 어머니를 위해 구역 식구들이 한 마음으로 간구할 때 드디어 어머니 입에서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이 흘러나왔다.

 지난해 하반기 나는 다시 중등교사 임용시험에 도전했다. 시험 준비로 밤새 공부하고 새벽녘이 됐는데 어머니가 젖은 두 눈으로 내 방에 들어오셨다. 놀란 나에게 어머니는 머뭇거리시다 입을 여셨다. 꿈을 꿨는데 높은 나무에 올랐다가 떨어졌지만 다친 곳이 하나도 없으셨단다. 그런데 주변을 살피니 이전에 보던 길이 아닌 새로운 길, 좋은 길이 펼쳐져 있는 것을 보시고는 ‘내가 왜 이렇게 좋은 길을 두고 그동안 다른 길로 다녔지?’라고 생각하셨단다. 꿈에서 깨어났지만 그 기억이 또렷했고 그 순간 예배에 빠졌던 것이 미안해 용서를 빌다 눈물이 났다고 하셨다.

 임용시험 전날 나는 친정어머니께 전화로 기도를 받고 시어머니께도 기도를 받고 싶다며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때 시어머니는 이렇게 기도하셨다.
 “우리 며느리 장원급제하게 해 주세요. 그동안(주님을) 몰랐어요. (주님) 미안합니다. 내가 몰랐는데 이제는 (주님을) 믿을게요.” 어머니의 간절함에 눈물이 났고 행복했다. 나는 어머니의 기도와 장년국 성도들의 중보기도 힘으로 2월 8일 최종합격 소식을 듣게 됐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 어머니의 구원과 임용시험 합격이라는 두 선물을 내게 허락하신 것이다. 할렐루야!

 

이제 남은 사명은 어머니와 함께 남편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것, 또 교사로서 앞으로 만나게 될 학생들에게 주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장년국 성도들과 함께 예배드리며 신앙은 홀로가 아닌 공동체를 이룰 때 장성한 분량에 이른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  

정리=오정선 기자


류종순 권사·장만섭 집사(사랑의교회)

- 순복음교회 성도들의 중보기도로 살아났죠


심근경색 죽음의 위기에서 뇌손상, 이식 없이 건강 회복

남편 장만섭 집사가 5년 전에 심장 혈관을 확장시키는 스탠트 시술을 했었다. 이 시술을 하면 혈전이 생기는 걸 막기 위해 매일 약을 먹어야 하는데 남편은 약을 안먹었다. 평소 건강했던 남편이 지난해 12월 18일 자정이 넘어서 갑자기 힘이 없다고 하더니 심근경색으로 쓰러졌다. 나는 급히 119를 불렀다. 한참 만에 도착한 119 구급대원은 남편을 보더니 심장이 멎었다고 했다. 심폐소생술을 하고 서둘러 병원으로 갔지만 다른 병원으로 다시 옮겨야 했다. 골든타임이 4분이라는데 심폐소생술도 10분이 지나서 했고 남편이 병원에 도착해 진료를 받기까지는 30분 이상이 지난 후였다.

 병원에서는 급하게 스탠트 시술을 다시 했다. 시술 후 남편은 이틀이 지나도 혈압이 50∼60으로 너무 낮았다. 염증 수치도 5가 정상인데 210이었다. 의사는 이미 시간이 지체돼 살아나도 정상이 아닐 것이라고 했다. 염증과 혈압이 좋아져도 심장이식을 해야 하고 뇌손상이 얼마나 진행됐느냐가 관건이라고 했다.  

 “그럼 어떻게 해요?” “불가능 합니다. 기도밖에 없어요.” 나와 의사의 대화에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잠시 집에 왔는데 그날 오후 의사한테 연락이 왔다. 지금 숨이 끊어지니 당장 중환자실로 오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연장치료를 하겠냐고 물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얼굴이라도 보려고 내가 도착할 때까지만 살려달라고 부탁했다. 중환자실 문 앞에 있는데 사돈께서 급히 달려오셨다. 안사돈이 권혁순 목사님이신데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오랫동안 시무하시다 개척하셨다.    

 내가 상황을 설명해드리니 목사님은 내게 “의사 말 믿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라”고 하셨다. 정신이 번쩍났다. 나는 그 때부터 오로지 하나님만 바라보고 기도했다. 나는 30년 동안 사랑의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목사님이 연결해 주셔서 여의도순복음교회 금요철야예배 중보기도 시간에 남편의 이름이 올라가게 됐다. 12월 21일 금요철야예배 때 남편의 이름과 기도제목이 스크린에 지나갔다. 목사님과 전 성도들이 간절히 기도해주시는데 가슴이 뜨거워졌다. 예배에 참석한 나와 딸도 눈물로 기도하며 하나님이 하시겠구나 확신이 들었다. 그 다음날부터 염증수치가 떨어지고 혈압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며칠 후 심장의 30%가 살아나 심장이식을 안해도 됐다. 혈압도 매일 10씩 올라가 정상이 됐다. 의식이 깨어난 남편은 물을 달라는 등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염증수치도 내려가 정상이 됐고 뇌손상도 전혀 없었다. 기적은 또 일어났다. 남편이 오랫동안 인공호흡기를 달고 있어 자가 호흡이 안되니 폐렴을 막기위해 기관지 절개 수술을 받아야 했다. 나는 수술 없이 자가 호흡 할 수 있도록 금식하며 기도했다. 수술을 하루 앞두고 남편의 호흡 상태가 좋으니 수술을 안해도 된다는 연락을 받았다. 할렐루야! 주님의 은혜였다. 그날 오후부터 남편은 스스로 호흡을 했고 1주일 후 건강한 몸으로 퇴원했다. 이 기적은 중보기도의 힘이라고 믿는다. 좋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 돌린다.  

정리=이미나 기자

 


이혜연 집사(동작대교구)

- “말씀에 순종하면 기쁨이 덩굴째 굴러옵니다”

성경으로 깨달은 사랑 손과 발의 행위로 이어져
전도하면서 말하는 믿음의 선포가 내 영 살려

나는 기도하던 중 4월 윤중로 벚꽃 축제에 온 사람들에게 전도지를 돌리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벚꽃을 보러 놀러온 사람들이 전도지를 받아줄까’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순종하고 교회 전도지인 행복으로의 초대 100장을 접어서 나갔다. 내 생각과는 달리 나는 30분 만에 전도지를 전부 돌렸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감사해 다시 300장을 접어 전도에 나섰다. 이것이 계기가 돼 나는 6년 반째 전도를 하는 중이다. 나는 본래 고집이 센 사람이라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았었다. 나를 전도하려고 했던 사람이 몇 년 간 찾아와도 문 한 번을 열어주지 않을 정도로 냉담한 성격이었다. 이런 내가 변화된 건 하나님께서 나에게 남을 섬기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이다. 더불어 전도로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라는 사명도 주셨다. 식당 사업을 하기 때문에 토요일과 주일에 시간을 내서 병원과 시장 앞에서 노방전도를 하는데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그저 “축복합니다 예수 믿으세요”라고 말하면서 몸을 숙이고 겸손하게 전도지를 나눠준다. 100장을 나누면 예수 믿으라는 믿음의 선포가 100번 내 귀에 들리니 먼저 내 마음이 예수로 가득 차 전도를 멈출 수가 없다. 전도현장에 가는 것 자체가 나를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심을 깨닫고 있다.

 전도 3년째에는 주변 사람들을 의식하기도 했다. “그렇게 열심히 전도하는데 왜 정작 교회에 데리고 오는 사람은 없냐”는 물음에 섭섭함도 들었다. 그렇지만 말씀에 순종해 시작했기 때문에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때부터 나를 전도 대상자들과 만나게 하셨다. 교회 밖에서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교적이 없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을 위해 기도해주다 보니 2017년에는 동작대교구 전도 2등상도 타게 됐다. 또한 지난해 2월에는 요청을 받아 동작대교구 기도원 성령대망회에서 간증을 했는데 놀랍게도 전도하는 내 모습을 봤다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도 했다.

 

나는 사업장에서 쉬는 시간이면 항상 성경을 읽고 쓴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의 말씀이 있어야 전도를 할 때 흔들림이 없고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14년째 성경을 읽는 모습에 손님들은 몇 독을 했는지 궁금해 한다. 그러면 나는 “몇 독이 중요한 게 아니라 말씀이 삶이 되게 읽는다. 예수가 내 삶의 가운데 오면 모든 게 변한다”고 말한다. 말씀을 지식으로는 알지만 그 말씀이 가슴으로 내려와 사랑의 마음으로 변화되고 손과 발로 행위가 이어지지 못할 때가 많다.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들어 전도의 도구로 사용해주심에 감사하고 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노력할 것이다.       

 정리=김주영 기자


박영이 권사(용산대교구)

- 갓 태어난 손자 ‘장 절제 위기’ 기도로 이겨내

성령 충만으로 기도 하며 평안으로 응답 받아

2011년 딸이 남자 아이를 출산했다. 임신 출산과정 모두 순조로웠는데 태어난 지 몇 시간 되지 않은 아기의 배가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출산 병원에서 강남성모병원으로 아이를 옮길 때 내가 보호자로 앰뷸런스에 동승했다. 위급한 상황에 놓인 손자를 위해 오직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뿐이었다. 그런데 입에서는 아프지 않게 해달라거나 아무 이상 없게 해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아이가 성령 충만 받게 해 주세요’라는 기도만 나왔다.

 병원에 도착해서 검사를 한 후 의사는 ‘아이 장에 구멍이 나서 배가 부풀어 오르는 것 같다’며 수술이 시급하다고 했다. 아마 구멍이 발견되면 상처부위 양 옆으로 각각 10㎝씩 총 20㎝의 장을 잘라야 할 거라고도 했다. “하나님 갓 태어난 아기의 장을 잘라 내야 한다니요. 성령의 불로 구멍이 난 분위가 메워지고 치료되게 해주세요.”

 성령 충만을 외치며 기도 하던 중 어느 순간 깊은 평안이 밀려왔다. 40년간 신앙생활하면서 많은 기도와 응답을 받았고 이번에도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믿고 감사하며 기다렸다.  

 아이는 수술실로 들어갔고 몇 시간 뒤에 의료진이 나와서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개복을 하고 구멍을 찾기 위해서 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살펴보았는데 구멍을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 네 명이나 아이의 장을 꼼꼼히 살펴봤고 서로 같은 부분을 지적했는데 돌기 같은 부분이 있어 손길을 몇 번씩 멈췄다고 한다. 오돌토돌한 모양으로 메워져 있는 모습에 ‘여기가 그곳이었나?’라는 추측만 할 뿐이었다고 했다. 구멍을 찾을 수 없어서 장을 소독만 하고 봉합 후 경과를 지켜보기로 했다.

 아이는 빠른 속도로 회복해서 수술 5일만에 물을 먹게 됐고 뒤이어 우유도 먹게 됐다. 결국 8일 만에 퇴원을 했는데 이후 크게 아픈 적 한번 없이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 개복했던 부위도 아이가 성장하면서 희미한 모습으로 점점 사라지고 있다. 사위가 직장일 때문에 스웨덴에 가면서 세 식구 모두 가게 돼 손자는 그곳에서 지난해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멀리 떨어져 있어 자주 볼 수 없지만 통화를 자주한다. 나는 손자 진욱이를 “우리 성령 충만 진욱이”라고 부르며 늘 축복해준다. 진욱이가 평생 성령 충만하여 살기를 간절히 바란다.

 

놀라운 기적 속에 사위의 믿음이 강해졌고 우리는 모든 일을 온가족이 기도하며 이겨나가고 있다. 고난 속에서 기도할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 찬양 드리며 나의 삶을 하나님을 전하는 일에 드리고 싶다.     

정리=복순희 기자


정종미 집사(장년국)

- 기도의 힘으로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아이들은 교회학교 교육 반드시 필요
성령 충만할 때 방언하고 새벽기도 열심

새해가 되면서 두 주간 진행된 ‘신년축복 열두광주리 새벽기도회’. 매일 새벽 3시 반이 되면 온 가족이 기도회 참석을 위해 일어났다. 새벽어둠과 찬 공기를 가르고 여의도 성전에 도착하면 우리 부부와 세 아이는 하나님께 먼저 감사기도를 드렸다. “이 새벽 주를 바라보며 아이들과 주님 전에 나왔습니다. 하나님, 세 아이가 주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일꾼들로 자라도록 인도해주세요.”

 세 아이 중 둘째인 아들 주형이는 누구보다 신년축복 열두광주리 새벽기도회에 열심이었다. 예배 때마다 간절히 기도하는 아이를 볼 때면 ‘기도가 아이를 저렇게 변화시킬 수 있구나. 기도의 힘이란 참으로 대단하구나’라는 생각에 내 가슴은 뭉클했다.

 주형이는 올해 초등학교 6학년에 올라간다. 7살 때 봉사를 시작한 아이는 에너지가 넘치는 개구쟁이로 욕심이 많고 화를 잘 내는 편이었다. 그런 아이를 볼 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기도’였다. 아이의 마음에 예수님이 주시는 감동이 있게 해달라고 늘 간구했다. 아이의 짜증이 심해질수록 ‘기도하라’는 주님의 음성으로 여기고 주께 더 간절히 기도했다. 그런 주형이가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 게 4학년 여름 수련회에 다녀오면서였다. 성령대망회 시간에 성령이 임한 아이는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고 그후 조금씩 달라졌다. 5학년이던 작년에는 훌륭한 교회학교 선생님을 만나면서 급속도로 변화했다. 장난이 심하고 투정이 많은 아이들을 사랑으로 보살펴주신 선생님을 보면서 교회학교가 왜 중요한 지, 아이들이 왜 교회학교를 통해 성장해야 하는지 알게 됐다.

 지난해 가을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주형이는 “이번 새벽기도회에 꼭 가고 싶으니 일찍 깨워달라”고 해 깜짝 놀랐다. 아이가 새벽기도를 사모하고 있다는 게 놀라웠고 그런 아이의  변화를 보면서 ‘하나님께 기도할 때, 때가 차매 그 기도가 응답된다는 것이 이런 걸 두고 하는구나’ 다시 한번 깨닫게 됐다. 주형이는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기도에 동참했다.

 새해가 되면서 주형이는 교회 봉사를 더욱 열심히 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열두광주리 새벽기도회 참석 의사도 밝혔다. 주형이는 새벽기도 때마다 방언으로 기도하며 외할아버지의 구원을 간구했다. 나는 그런 주형이를 보면서 아이의 일생이 오직 주와 동행하는 평생이 되길 간절히 소원했다. 아이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은 ‘오직 기도’에 있다.

정리=오정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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