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영 집사(강서대교구)

- “신유 기적 체험하며 하나님 살아계심 깨달았죠”

나는 남선교회 수전실에서 봉사하고 있다. 주님사랑 산사랑 나라사랑이라는 뜻의 주산나산악회 회장인 나는 79세의 나이에도 늘 산행을 하며 건강을 챙기고 있다. 걷기와 달리기를 좋아해 10년 전부터 수많은 마라톤과 걷기대회에 출전하고 있다. 대회마다 참석자 중에 최고령자였지만 기도하며 달리면 늘 새 힘이 솟았고 1등을 놓치지 않았다. 걷기대회 세계 기록자인데다 그랜드슬램도 여러 번 달성한 나는 6년 전에 최고령 한국걷기 골든그랜드슬램 워커로 대한민국 최고 기록인증서를 받았다. 지난해에는 골든그랜드슬램 워커로 도전한국인 모범시민상을 받았고 춘천마라톤대회 풀코스를 5시간 14분만에 완주하기도 했다.

내가 이렇게 마음껏 걷고 뛸 수 있을 만큼 건강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심한 중이염을 앓아 귀가 잘 안들리고 수시로 귀에서 고름과 피가 흘러내렸다. 자고 일어나면 베개가 고름으로 누렇게 젖어있곤 했다. 아무리 병원을 다니고 좋다는 민간요법을 써봐도 소용이 없었다. 37세에 아내를 따라 처음 교회에 갔는데 무슨 기도를 할지 몰라서 병을 고쳐주시면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겠다고 말했다. 그 다음날 귀가 깨끗이 나았다. 신기했지만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할 뿐 그 때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나는 술도 많이 마시고 담배도 많이 피웠는데 하루는 술을 마시다가 폭행을 당해 갈비뼈가 부러졌다. 친구의 권유로 여의도순복음교회에 나왔는데 예배시간에 들려온 찬송 소리에 눈물이 나면서 대성통곡을 했다. 조용기 목사님께서 신유기도 시간에 왼쪽에 타박상을 입은 사람이 있는데 성령님이 말씀하시니 일어나라고 하셨다. 나는 깜짝 놀라 일어났다. 순간 전기에 감전된 듯 땀이 비오듯 나면서 몸이 뜨는 느낌이 났다.

예배를 마치고 병원에 갔는데 나를 진찰하던 의사가 놀라워했다. 갈비뼈가 부러진 것은 오진이 있을 수가 없는데 뼈가 붙어있는 것이었다. 이후 나는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알게 됐고 오산리 기도원에 가서 그동안 잘못한 일들을 고백하며 회개기도 했다. 눈물이 갑자기 쏟아지면서 얼마나 뜨겁게 기도가 나오던지 차고 있던 시계가 풀려버릴 정도였다.

지금은 성령을 체험하고 술과 담배를 모두 끊었지만 한 때는 술 담배에 빠져 살았었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아침에 칫솔만 보면 구역질이 나왔다. 얼굴이 늘 시커멓고 자주 토해서 병원에 가봤더니 의사는 왜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병원에 오지 않았냐며 간경화가 심해 고치기 힘들다고 했다. 기도원에 가서 금식하며 간절히 기도했고 그날 밤 친구한테 약을 받는 꿈을 꿨다. 다시 병원에 가보니 간경화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분명 치료의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이었다.

주님께 큰 은혜를 받은 나는 이영훈 목사님 말씀대로 언제 어디서나 절대긍정 절대감사로 살아가고 있다. ‘범사에 감사하라’를 내 인생 모토로 삼고 아침에 일어나면 감사하며 1시간 씩 기도하고 십일조를 반드시 드리는 것을 철칙으로 삼고 있다. 평생토록 내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기를 기도한다.

정리=이미나 기자


홍성연 집사(서대문대교구) -

태아 염색체 이상, 기도 후 건강한 아이 출산

30여 년 전 나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청년으로서 교회 다니는 것은 좋았지만 지구역장을 맡으라는 요청에는 도망 다니기 바쁜 크리스천이었다. 친정에 어려움이 많았고 나도 간경화에 걸리는 등 삶의 도피처가 필요했다.

교회에서 남편을 만나 1999년 결혼을 했다. 결혼 3개월 만에 임신을 했는데 준비가 너무 안 된 상태라 감사하지 못했다. 입덧이 심해 아무것도 먹지 못해 하루 종일 어지러움에 시달려야 했다.

임신 6개월이 됐을 때 산부인과에서 아기의 염색체 이상이 의심된다며 양수 검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 다운증후군과 지적장애가 의심되는 상황이었다. 충격에 휩싸인 나는 눈앞이 깜깜해지고 눈물만 흘리기 시작했다. 양수 검사를 위해 의료진이 나를 침대에 눕히고 손과 발을 끈으로 묶었는데 너무나 서러워 양손과 발에 못이 박혔을 때 예수님도 얼마나 고통스럽고 참담했을지 알 것 같았다. 몸과 마음이 아픈 상태에서 결과는 21일 후에 나온다는 말을 들었다. 집에 돌아와서 남편에게 병원에서 들은 것을 이야기했지만 남편은 끝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뱃속에서 아이는 활발하게 움직이며 엄마인 나를 찾았다. 그냥 있을 수만은 없었다. 아이를 살려야겠다는 일념으로 새벽예배를 드리겠다고 다짐했다. 추운 2월 새벽 4시에 일어나 내가 사는 창신동에서 가깝고 작은 오빠가 다니는 남대문성전으로 택시를 타고 갔다. 나는 5시부터 9시까지 새벽예배를 두 번 드렸다. 기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온통 눈물이었다.

하루씩 채워나가는 21일이 내겐 200일 같았다. 20일째 기도를 하고 집에 돌아와 잠을 잤는데 너무도 생생하게 두 번이나 같은 꿈을 꿨다. 내가 건강한 아들을 낳는 꿈이었다. 꿈에서 깨어나 감사하며 엉엉 울었다. 이튿날 마지막 날인 21일째 새벽예배를 갔는데 목사님께서 ‘이삭’에 대한 말씀을 해주셨고 기도시간에 “아이 문제로 힘든 자매님의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해 주셨다”고 하셨다. 나는 “하나님 아들이 태어나면 이삭처럼 하나님께 쓰임 받는 아이가 되게 해주세요. 장애아일지라도 아이를 키울 능력과 힘을 제게 주세요”라고 기도하고 일어섰다. 그 순간 기쁨이 샘솟고 다리가 가벼워지고 찬양이 입에서 저절로 나왔다.

결과를 들으러 남편 손을 꼭 붙잡고 병원에 갔다. 차트를 유심히 보던 선생님께 내가 먼저 “선생님 결과가 정상으로 바뀌었죠? 하나님께서 제 꿈에 보여주셨어요”라고 말하니 선생님은 자기도 예수님을 믿는다며 기적이 일어났다고 함께 기뻐해주셨다. 그러면서 “어머니 출산 때까지 안 알려 주는데 아들이에요”라고 말씀해주셨다. 나는 “맞아요. 그래서 이름을 이삭으로 지었어요”라고 대답했다.  

건강한 이삭이를 낳고 남편과 함께 기도원에 가서 3일간 금식하며 감사기도를 했다. 이삭의 뜻은 웃음인데 이삭이가 태어나면서 내 삶에 기쁨이 생기고 신앙의 가치관이 달라지고 전도를 하게 됐다. 앞으로도 살아계신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며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가겠다.

정리=복순희 기자


박효순 권사 (동작대교구) - 믿음 선포와 행함으로 남편 만성 천식 완치

말씀 붙잡고 기도할 때 하나님의 치유 역사 임해

2009년 입춘을 앞두고 남편 김정만 장로가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환절기라 단순 감기인 것 같아 남편에게 감기약을 먹였지만 좀처럼 호전되지 않았다. 기침이 1년 가까이 지속되자 단순한 감기가 아닌 것 같아 남편과 대학병원에 갔다. 담당 의사선생님은 천식이 생각보다 오랜 시간 지속돼 평생 고칠 수 없는 만성 질환이 됐다고 말했다.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였다. 더군다나 천식이 점차 심해지면서 병원에서 처방해준 약을 먹어도 일시적인 효과 밖에 보지 못했다.

뒤늦게 천식에 좋다는 약이란 약은 모두 구해봤고 한약까지 달여 먹였지만 상태는 갈수록 악화됐다. 이제는 기침뿐만 아니라 기도도 협착 돼 숨이 차올라 침대에 눕는 것도 힘들어했다. 순간적인 호흡곤란으로 응급실에 다녀오기도 했고 혼자 힘으로 화장실을 다녀오기 힘들 정도로 상태가 심각해졌다. 주변 지인들은 남편이 천식으로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 했다. 그러나 나는 그럴수록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다. 하나님의 치유하심을 간구하며 기도할 때 이사야 41장 10절 말씀이 떠올랐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나는 이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께서 남편의 천식을 고쳐주실 것을 확신했다. 남편이 약을 먹을 때도 운동을 할 때도 하나님께서 고쳐주고 계신 것을 믿고 선포했다. 남편도 하나님께서 고쳐주실 것을 확신했다. 치유해 주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행함을 보여야 한다고 말한 남편은 교회 봉사를 쉬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남선교회 심방실에서 열심히 봉사했다. 한편으로는 걱정도 됐지만 하나님께서 치료해 주고 계심을 확신하며 더욱 뜨겁게 기도했다.

하나님께서 우리 부부의 믿음을 보셨는지 2012년부터 남편의 호흡이 점차 안정되는 날이 많아졌다. 남편의 호흡이 안정되면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할 수 있게 됐고 일상생활을 하는데 지장이 없을 정도로 호흡이 편해졌다. 2013년에는 남편의 기침도 서서히 멎으며 천식이 완전히 치유됐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죽을 때까지 앓아야 할 천식을 치유해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기도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깨닫게 하셨고 야훼 라파의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셨다.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그날까지 하나님께 충성 또 충성하는 믿음의 부부가 되겠다.


정리=금지환 기자


이순자 집사(마포1대교구)-원인 모를 어깨통증 고침 받고 봉사의 삶 다짐

1989년 지인의 전도로 남편과 함께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왔다. 첫 예배에서 큰 은혜를 받고 매주일 시흥동 집에서부터 버스를 두 번씩 갈아타며 어린 아들을 데리고 여의도로 예배를 드리러 왔다. 교회에 다닌 지 얼마 안됐을 무렵 마포에 사는 교인을 보면서 ‘교회에 가까이 사시니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1998년 마포로 이사를 오게 됐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도 모두 아시고 우리의 작은 신음소리도 들으신다는 말씀이 생각났다. 마포로 이사 온 후 아랫집에 우리 교회에 다니는 권사님과 이웃이 됐다. 권사님의 전도로 드디어 남편도 교회에 다니게 됐다.

 그런데 이사를 온 뒤 어느 때 부터인가 머리부터 어깨까지 통증이 생겼는데 얼굴은 노랗게 뜨고 팔이 안 올라갔다. 밥을 먹을 때 수저도 들 힘이 없고 살림을 해야 하는데 통증 때문에 걸레질조차 할 수 없었다. 병을 고치기 위해 동네병원에 갔다가 원인을 못 찾아 대학병원에도 가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모대학 한방병원에 가서야 중풍 증상인 것 같다며 매주 약을 처방해주었다. 약을 계속 먹었지만 차도도 없고 약 때문에 속도 안 좋아지자 병원에서는 약을 중단시켰다. 불치병이란 생각을 하니 마음에 절망이 찾아왔다.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아무리 몸이 아파도 예배를 빠진 적이 없었다. 목과 어깨의 통증으로 1년 넘게 고생했는데 그날은 수요예배에 참석했다. 대성전 1층 뒤에 앉아서 예배를 다 드리고 신유기도 시간이 됐다. 조용기 목사님께서는 기도 후 “젊은 사람이 왔는데 머리와 어깨의 통증이 심했던 것이 나았다”라고 말씀하셨다. 그 기도를 들은 순간 ‘어머 젊은 나이에 나처럼 똑같이 고생하는 사람이 있네. 나도 나았으면 좋겠다’라고 생각을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며칠 후 남편이 나에게 “여보 안 아파? 요즘에는 왜 아프다고 안 해?”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누워있던 자리에서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났다. 남편의 말을 듣고 보니 나를 괴롭히던 통증이 사라졌고 몸이 새털처럼 가벼워졌다. 하나님께서 하시려면 1초만에도 병을 고칠 수 있다는 것을 체험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내가 기도했던 것처럼 항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열심히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교구에서 지·구역장 봉사도 기쁨으로 할 수 있었다.  

 

2010년 더욱 의미 있는 섬김을 위해 우리 교회 순복음호스피스 9기 정규교육을 받고 호스피스 봉사를 시작했다. 예전의 나는 냄새에 엄청 예민하고 차멀미도 심했는데 10년이 지난 지금은 하나님께서 건강의 복을 주셔서 어떤 냄새도 아무렇지 않고 원거리 봉사도 즐거운 마음으로 다닐 수 있게 됐다. 돕겠다고 시작한 봉사였는데 내가 더 많이 도움 받고 배우고 있다. 주님 안에서 바라보니 누구를 돕는다는 그 마음조차 교만이란 걸 깨닫게 된다. 남은 인생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사랑을 세상에 전하며 열심히 살아가고 싶다.         

정리=복순희 기자

 



신동예 집사(순복음중동교회)

유방암 말기에서 하나님 은혜로 건강 회복

절망 속에서 말씀과 기도로 새 힘 얻어
조용기 목사 신유 기도 후 기적 체험해

나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성가대원으로 봉사하며 지역장으로 지역식구들을 섬기는 일이 너무 행복하다.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날마다 기쁨과 감사가 넘쳐난다. 특히 예배 시간에 조용기 목사님께서 신유 기도를 하실 때면 가슴이 벅차오른다. 12년 전 내가 체험한 기적이 아직도 생생하기 때문이다.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던 나는 12년 전 어머니를 따라 처음 교회에 나왔다. 그 때 유방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죽음을 앞두고 있으니 남편과 세 아이들이 마음에 걸려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그 때 진료를 해 주시던 한의원 원장님이 유방암 환자 한 분을 소개해주셨는데 그 분과 대화하던 중 "하나님이 신동예씨를 사랑하시나봐요"라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울컥하며 눈물이 쏟아졌다. 이후 마음이 평안해지며 힘이 났다.

 처음에 교회에 나올 때는 거부감이 컸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할 수 있었다. 새벽기도와 금식을 하며 하나님께 매달리자 뜨거운 성령을 체험하고 방언을 말하게 됐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게 되자 치유에 대한 소망이 생겨났고 내 안에 희망과 기쁨도 넘쳐났다.

 담당 교구장님께 안수기도를 받았고 많은 분들이 중보기도를 해주었다. 나는 열심히 기도하면서 항암 치료를 병행했다. 항암 주사를 맞는 동안 대부분의 환자들은 고통을 호소하지만 나는 주사를 맞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편히 잠들게 해주셔서 큰 고통 없이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항암치료와 함께 CT촬영을 하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치료가 진행될수록 암 덩어리가 작아지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CT촬영을 하던 내게 "다 끝났다. 다 이루었다"라는 음성을 들려주셨다. 반신반의하던 내게 수요예배에서 암이라는 병에서 해방되었음을 확신하게 되는 일이 일어났다.

 조용기 목사님께서 신유기도 시간에 "치료가 안 되는 병이 있는데 하나님이 고쳐주셨습니다. 암인 것 같습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커다란 감동과 함께 완치되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병원에서 검사를 받아보니 암은 없어져 있었다. 할렐루야! 기적이었다. 그런데 5개월 후 유방암이 같은 자리에 재발했다. 유방암은 거의 같은 자리에 재발하지는 않는다는데 암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원망스럽기는커녕 더욱 담대한 믿음이 생겼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시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주일 외에도 모든 예배에 열심히 참석했고 새벽예배도 꼬박꼬박 나오며 하나님께 매달렸다. 3년이 넘게 항암주사를 맞으면서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는 말씀을 붙잡았다. 곧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쁜 마음으로 치료에 임했고 결국 암 완치 판정을 받았다.

 

암이 사라지고 9년이 지난 지금까지 건강히 잘 지내고 있다. 이 시간들을 통해 우리 가족은 더욱 믿음으로 하나 됐고 서로를 소중히 여기게 됐다. 합력하여 선을 이뤄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 

 정리=이미나 기자


홍순자 집사(구로대교구)

- “성경필사 하고 한글 깨우쳤어요”

한글 모르고 왼쪽 청각 잃은 상태에서 2년 간 성경필사
성경필사와 성경일독으로 하나님께 칭찬받는 자녀 소망

지난해 11월 2년 만에 성경필사를 완성했다. 한글을 알지 못하는 까막눈에 3년 전 갑자기 왼쪽의 청각을 잃어 필사를 완성하기까지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야 했다. 문구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밑줄 노트 몇 권을 사서 무작정 성경을 보고 따라서 옮겨 그리는 작업을 했다. 아침 7시부터 정오까지 필사에 매진했고 남는 시간에는 기독교 방송을 봤다. 올해 80세인 나는 하나님을 위해 그동안 한 일이 없다는 게 참 부끄럽다. 나는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청소부로 일했었다. 일터에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천이었고 학교에서 수요일이면 예배를 드려서 나도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믿게 됐지만 생계를 위해서 일하느라 2년 전부터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주일 예배만 간신히 드릴 뿐이었다.

 나는 교회에 나오면 항상 “하나님 제가 한글을 몰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심지어 귀도 들리지 않습니다. 말씀을 읽고 싶은데 하나님이 알려주셔야 가능합니다”라며 말씀의 하나님을 알기를 원한다고 기도드렸다. 구역예배에 참석해서도 남들은 다 성경을 읽는데 나만 조용히 있어야 하니 말씀에 대한 갈급함은 점점 커져만 갔다.

 말씀을 읽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2018년 6월 필사를 시작했는데 기쁨이 넘쳐서 몇 시간을 써도 팔이 아프지 않고 눈도 아른거리지 않았다. 이번 필사를 끝내면서 한글을 깨우치는 놀라운 역사가 임했고 이제는 남들보다 글을 더 빨리 읽을 수 있게 됐다. 할렐루야!

 나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 하나 더 있는데 지역장님과 구역원을 잘 만난 것이다. 내가 글을 읽지 못하고 이해가 되지 않는 게 많아 질문을 자주해도 항상 기쁜 마음으로 선생님처럼 잘 설명해주고 나를 위해 기도도 많이 해준다. 보청기를 착용해도 귀가 울리는 상태라 설교도 들을 때보다 듣지 못할 때가 많지만 좋으신 하나님과 다정한 구역원들을 보면서 주일예배와 구역예배에 꼬박꼬박 참석해 은혜를 얻고 있다. 이제 글을 읽게 된 나에게 지역장님은 시편을 읽으라는 과제를 줬다. 12월 한 달 동안 시편을 읽었는데 예전에 필사할 때는 그냥 아무것도 모르고 글을 옮겨 적었다면 이제는 말씀을 조금씩 이해하고 있다.

 나는 하나님께 칭찬 받는 게 소원이다. 이번에 전도대상자를 선택하고 같이 구역예배도 드렸는데 그 열매가 올해 꼭 잘 맺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또 다시 목표를 가지고 성경필사와 성경일독에도 도전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하나님과 더 친밀해지고 사랑받는 자녀가 됐으면 좋겠다.

정리=김주영 기자


박운병 집사(반석대교구) -

목숨 걸고 탈북, 새터민 전도는 나의 사명

나는 57세였던 2005년에 아내와 큰 딸 그리고 7살 손녀와 탈북에 성공해 자유 대한민국 땅에 왔다. 이미 2000년에 둘째인 아들과 막내딸이 남한에 정착해 있었기에 가족의 재회는 눈물바다였다. 지금 돌아보면 탈북 과정과 남한 정착은 모두 하나님의 계획이셨고 은혜였다. 나는 19세에 공산당에 입당해 35년 간 기관차 수송을 담당했다. 중국을 오가며 외부 세계를 알게 됐고 1990년대 극심한 배고픔과 전염병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북한 사람들이 죽어가는 현실을 보면서 1998년에 탈북을 결심하고 준비를 시작했다.

 아들과 막내딸을 먼저 남한으로 보낸 나는 남은 가족을 데리고 M국을 통해 탈출에 나섰다. 1차 도전에 실패해 중국 옌지로 송환되는 위기도 있었지만 다시 탈출했다. 죽음의 통로라 불리는 M국으로 향할 때 추격을 따돌리고 곳곳에 쳐진 철조망 25개를 넘었지만 갈 길은 막막했다. 먹지 못해 지쳐 쓰러진 어린 손녀를 보며 나는 처음으로 하늘을 원망했다. 굶주림 속에 이틀을 더 걷다보니 죽음이 눈앞에 와 있는 듯 했다. 그때 어디선가 ‘눈을 크게 떠 보라’는 음성이 들렸다. 힘겹게 눈을 뜨고 저 멀리 바라보았다. M국에 들어갈 수 있는 국경이었다. 하지만 일정 간격을 두고 5 높이로 세워진 시멘트 기둥 사이로 굵게 쳐진 철조망을 보자 절망스러웠다. 3월 초였지만 땅까지 얼어붙어 구덩이를 팔 수 없으니 절체절명이었다.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기둥을 사다리 옆면 삼아 잡고 철조망을 타고 넘어가보자는 지혜가 떠올랐다. 지금 생각하면 하나님이 주신 생각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무사히 국경을 넘었고 날이 밝자 웅덩이에 쌓인 눈을 발견해 사흘 만에 해갈의 기쁨을 누렸다. 이어 M국 군인에게 발견됐고 몇몇 군인이 일행 중 추위에 떨고 있는 아이들을 보자마자 자신의 외투를 기꺼이 벗어주는 선행을 보여 큰 감동을 받았다. 여러 관문을 거친 후 드디어 대한민국 땅을 밟게 된 우리는 이것이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체험하는 사건이었음을 깨닫고 온가족이 예수를 구주로 영접했다.

 나는 우리 교회 반석대교구 새터민교구에서 신앙생활하며 서리집사 직분도 받았다. 매주일 80여 명의 새터민과 예배드리며 양육 받고 있다. 새터민들은 복음 통일 후 북한 지역 곳곳에 퍼져 복음을 전할 마중물이다.

 나는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만난 새터민 중 뜻이 같은 이들과 3년 전부터 북한 땅에 쌀 보내기를 실천하고 있다. 1.5ℓ 페트병에 쌀을 담고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라고 적힌 문구, 주님의 말씀이 담긴 USB, 구충제를 동봉한다. 페트병 겉에는 성경과 라디오가 젖지 않도록 단단히 포장해 이를 조석현상을 이용해 바다에 띄워 보냈다. 한번 보낼 때마다 700~800개의 페트병을 띄우는데 3년 동안 총 95회에 걸쳐 쌀과 전도용품을 보냈다. 새터민 중 이 쌀을 받아 보았다는 사람들을 지금까지 다섯 명 정도 만났다.

 나는 페트병을 바다에 띄울 때마다 ‘하나님! 이것이 북한 주민을 살리는 생명의 떡이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한다. 주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을 기억하며 호흡이 다하는 그날까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할 것이다.

정리=오정선 기자


이재순 권사(서대문대교구)

- 20년 호스피스 봉사 원동력 주님의 은혜

봉사하면 좋아지는 건강의 복 받아
하나님께 맡기니 세자녀도 바르게 자라


어려서부터 고향 교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 해 온 나는 1987년 결혼 후 서울에서 살면서 여의도순복음교회에 출석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 충만을 받아 세 자녀를 낳고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양육하며 살아왔다. 그러던 중 2001년 간암 말기였던 분을 전도했다. 그분 집에 찾아 갔을 때 동행하신 권사님은 초면인데도 능숙한 모습으로 환자를 닦아 드리고 찬송을 불러주며 환자분이 평안하게 임종할 수 있도록 했다. 나도 권사님처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마침 우리 교회에서 운영하는 순복음호스피스를 찾아갔다. 정규교육을 받고 그때부터 매주 3~4일 간 호스피스 환우들을 찾아가 목욕과 발마사지 등의 봉사를 하고 있다.
 나는 매일 믿음과 은혜로 산다. 임종 직전인 분들의 맥박 수치가 40~50인데 나는 평소에 50~60정도라 서맥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컨디션이 아주 좋을 때가 60이고 50까지 떨어지면 누워있게만 된다. 신기하게도 봉사를 하면 컨디션이 좋아지고 덩달아 맥박 수치도 좋아져 그동안 살면서 건강 때문에 어려움을 겪은 적이 없다. 하나님께 몸을 드려 섬기면 하나님께서 건강을 책임져 주신다는 것을 20년간 체험했다.
 많은 시간을 들여 봉사를 하고 있는데도 오히려 교회에서 안수집사 직분을 맡은 남편과 세 자녀의 칭찬과 지지속에 호스피스 봉사를 하고 있다. 또한 자녀들을 하나님께 맡기니 자녀들을 책임져 주신다는 것도 체험했다.
 세 자녀는 태교를 찬양으로 하고 유아부부터 고등 3부를 졸업할 때까지 찬양반 봉사를 해서 그런지 청음 능력이 뛰어났다. 큰딸은 첼로를 전공해 시립교향악단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곧 결혼을 앞두고 있다. 바이올린을 하던 둘째 딸은 미용을 배우더니 캐나다 호주 독일 등에서 일을 하면서 많은 경험을 쌓았는데 독일에 있을 때는 난민들을 위해 미용봉사를 했다고 한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함께 호스피스 시설에 봉사를 가곤 했는데 그런 경험 때문에 자녀들은 봉사를 어렵지 않게 받아들이고 봉사의 기쁨을 누리면서 살고 있다. 셋째인 아들은 내가 호스피스 교육을 받을 때 3살이었는데 장성해서 내년 군 제대를 앞두고 있다.

 임종을 앞둔 분들, 많이 아프신 분들을 위한 호스피스 봉사라는게 개인 혼자서 한다면 엄두가 나지 않겠지만 순복음호스피스는 항상 팀으로 다니기 때문에 든든하다. 수 많은 분들의 임종을 지켜보면 천국과 지옥, 죽음 이후에 가야 할 곳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보람있는 봉사가 호스피스라는 것을 알리고 싶다.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날까지 천국 소망을 전하며 살아가고 싶다.           

정리=복순희 기자

 


김한임 권사(동작대교구)

- 교통사고로 죽을뻔한 나를 살리신 하나님

뼈 부서져 장애인 될 거라 했지만 후유증 없이 퇴원
평생 몸찬양 사역자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 다짐


나는 1981년부터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많은 축복과 은혜를 받았다. 젊을 때부터 몸이 워낙 약해서 비실비실했던 나는 30대 초반부터 눈뜰 기력도 없이 몸이 급격히 안 좋아졌고 40대에는 관절염과 오십견이 와서 몸을 움직이기 힘든 정도가 됐다. 지역장으로 봉사하던 중 몸찬양을 하면 건강해질 수 있다는 이야기에 순복음영산율동대학을 다니게 됐고 졸업 후에는 선교회와 기도원에서 봉사하게 됐다. 몸찬양 봉사를 하면서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내 생각과 결심에 따라 봉사를 그만두었는데 봉사를 그만둔 뒤 일주일 만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건널목을 건너는 중 과속으로 달려오는 승용차에 치였는데 나중에 들으니 내가 공중에 15m 정도 붕 떴다가 떨어졌다고 했다.
 내 머리, 목, 오른팔은 손댈 수 없을 정도로 부스러져 의사가 붕대로 응급처치만 했다. 손을 대면 더 부서지기 때문에 다른 조치는 취할 수가 없다고 했다. 6개월을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생명이 끊어졌다가 이어지는 걸 스스로 느낄 정도로 혼수상태가 올 때도 있었고, 나를 보고 가는 의사마다 내가 장애인이 될 거라고 이야기했지만 나는 에스겔서 37장 환상처럼 골짜기에 마른 뼈들을 소생시키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절망 가운데 소망을 보고 하나님께 서원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저를 정상으로 고쳐주시면 다시 몸찬양 봉사자가 되어 하나님께 충성하고 온 세상에 하나님을 전하는 복음의 증인이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내 모든 뼈가 기적처럼 붙었고 6개월을 사용하지 못한 몸도 물리치료 없이 회복됐다. 70세가 넘은 지금도 후유증 하나 없이 오히려 예전보다 더 건강한 몸으로 찬양하며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동안 내게 많은 복을 부어주셨는데 최근에는 3년간 아이를 갖지 못해 고민하던 며느리의 태의 문이 열려 내년 4월 출산을 기다리고 있다.
 

나는 앞으로 천국 가는 그날까지 지금 내가 단장으로 있는 ''엔젤스 워십 전도단''을 섬기며 복음을 전하는 꿈을 가지고 있다. 찬양 ''이제 내가 살아도''의 가사처럼 살아도 주 위해 살고 죽어도 주 위해 죽는 사명자로서 하늘 영광만을 바라보며 살 것을 다짐한다.정리=김주영 기자


오명옥 집사(동작대교구) - 나의 피난처 되신 하나님께 영광

직장과 가정의 문제 해결, 버팀목 되신 주 찬양

내게 어려움이 닥쳐올 때마다 돌파구를 예비해 두신 ‘야훼 이레’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 숱한 고난을 극복하며 오히려 나의 신앙은 깊어지고 믿음은 더욱 견고해졌다.

 1979년 나는 고등학생 때 어머니를 따라 처음 여의도순복음교회에 나왔다. 타종교 신자였던 어머니는 여의도순복음교회에 와서 심장병과 불면증을 고침 받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게 됐다. 아버지도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교회에 나오게 되면서 온가족이 구원을 받았다. 어머니는 얼마나 열정적이신지 80세가 넘은 지금도 대방역에서 전도를 하신다. 시댁도 어머니의 전도로 전부 예수님을 믿게 됐다.

 어머니는 항상 내게 한 교회를 섬기라고 말씀하셨다. 주변에 곁눈질하는 떠돌이 신앙인이 아닌 신앙의 뿌리를 깊숙이 내리고 열매를 맺으라고 가르쳐 주셨다. 나는 말씀에 순종해 교회학교 교사로 10여 년을 봉사했고 또 동작대교구의 지역장으로 10여 년을 봉사하고 있다. 연고지 없이 기댈 곳 하나 없는 우리 가정에 교회는 큰 버팀목이 됐다.  

 가세가 기울 때 남편이 교회 전기실에서 3년간 일하면서 큰 복을 받았다. 남편은 부지런히 노력해 소방설비와 전기기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다른 직장으로 이직했다. 반 지하에 사는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내게는 꿈이 있었다. 절망과 낙심하기보다 하나님을 믿으며 항상 방 3칸에 빛이 잘 들어오는 집을 바라보고 기도했다. 원하던 집을 분양받을 수 있는 기회가 왔고 대출을 70% 이상 받아야 하는 불가능한 상황에서 우연히 크리스천인 은행 직원을 만나 집을 구할 수 있었다. 햇볕도 잘 들고 방 3칸에다가 1층으로 창고를 겸해 사용할 수 있어 남편의 장비들을 보관할 수 있는 공간까지 마련됐다.

 또 지역장의 사명을 감당하며 할 수 있는 일자리를 놓고 기도했는데 저녁 7시부터 새벽 4시 30분까지 일하는 직장을 구하게 됐다. 그곳에서 감독님의 권유로 연마기술을 배워 남들보다 연봉도 높게 받게 됐고 같은 직장의 동료들 중에는 크리스천이 많아 함께 기도하는 시간도 가질 수 있어 감사하다. 무엇보다 직장이 교회 근처라서 퇴근 후 새벽예배에도 참석할 수 있으니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직장에서 중국인을 많이 만나게 되는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로 인도하고 있다.

 무소불위하신 하나님은 아들의 결혼자금 문제도 해결해주셨다. 아들은 일식 셰프로 일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외식산업 CEO가 되는 걸 최종 목표로 하고 있다. 이 땅에서 오직 하나님의 빽만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 가정은 생명을 다하는 날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고 영광 돌리기에 힘쓸 것이다.

정리=김주영 기자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