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의 기쁨을 누리자
한 흑인 설교자가 『순종의 의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 을 했습니다. “만약 주님께서 저더러 돌담을 뛰어 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다면 저는 그대로 순종할 것입니다. 이는 뛰는 것은 제가 할 일이고 넘게 해주시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순종이란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하며, 그의 뜻을 따르며, 당신 자신을 하나님의 통치에 맡기는 것입니다. 그 순종의 대가는 기쁨과 평안입니다. 그러나우리 안에는 죄된 옛 성품이 남아 있어 너무나 자주 순종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그 순종이 주님 안에서우리로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 마귀가 저희의 귀에 대고 불순종의 유익함에 대해 속삭일 때 순종의 삶을 사신 주님의 모습을 기억하게 하시옵소서.”
⊙ 당신은 어떤 부분에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길 어려워하고 계십니까 ?
하나님은 은혜의 사슬로 당신의 자녀들을 묶어 놓으시고 조정하신다. 우리가 그의 뜻에 순종하면 모든 것이 순조로우나 거역하고 나의 고집대로 하려고 하면 결국 고통을 당하고 돌아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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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복음성가 13곡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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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보리 산위에 십자가 섰으니 

 

 


 




김경애 집사(영등포대교구) -

포기하지 말고 기도해야 하는 이유

유교전통의 완고한 부모님 구원 위해 간구
하나님 정하신 때에 응답하고 기적 베푸셔

강한 유교집안에서 평생을 살아오신 부모님은 나와 동생들의 신앙생활을 반대 했다. 그래서 그런 부모님을 전도한다는 생각을 쉽게 하지 못했다. 그러다 20년 전 교구식구의 장례예배에 참석했는데 일반적인 장례식장 분위기와 달리 은혜가 넘치는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다. 바라기는 우리 부모님도 천국으로 인도하고 이렇게 가족들이 모여 천국환송예배를 드리면 좋겠다는 소망이 생겼다. 그래서 그날부터 부모님을 위한 기도를 시작했다. 7년 전 어머니에게 약물성 치매가 찾아왔다. 평생을 온유한 성격으로 살아온 어머니는 돌발행동과 거친 말들로 가족들에게 상처를 주고 힘들게 했다. 

 하루는 어머니와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하는 중에 성령님이 ‘어서 어머니를 구원시켜라’는 음성을 주셨다. 당황스럽지만 성령님의 말씀에 순종해 어머니에게 “제 말을 따라서 해보세요”라며 결신기도를 시켰다. 처음에는 잘 따라하는 듯했는데 평생 험한 말 한 번 안하셨던 어머니가 험상궂은 표정으로 욕을 하며 화를 내는 것이 아닌가. 너무 놀랐지만 어머니를 달래며 단 한번만 해달라고 졸라 겨우 결신기도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기회만 되면 성경 속 이야기도 들려주고 찬송도 들려드렸다. 눈으로 보기에는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어 보였지만 동생들과 함께 기도하면 할수록 어머니의 구원에 대한 확신이 생겼다. 그래서 성찬주일에 떡과 포도주를 가져다 아버지 몰래 어머니가 성찬에 참여할 수 있게 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 날 이후로 어머니가 우리가 기억하는 온유하고 착한 예전의 모습으로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기억도 온전히 돌아오면서 그동안 못했던 어머니와 진솔한 대화도 하면서 그 간의 어려움이 씻겨지는 듯했다.

 그 날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어머니는 찬송을 참 좋아하셨다. 그 날도 눈을 감고 찬송을 듣고 계셨다. 그런데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떠시면서 쫓기는 표정을 지으시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셨다. 너무 놀란 난 동생들과 지구역장들과 함께 간절히 어머니를 위해 기도했다. 1시간 기도했을까 그 때서야 고통에 일그러졌던 어머니가 배시시 웃음을 지으며 편한 자세로 누우셨다. 그리고 다음 날 어머니는 너무나 행복한 모습으로 천국으로 가셨다.

 어머니를 천국으로 모셨다는 안도감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아버지가 예상치 못한 폭탄선언을 하셨다. “장례는 경애네 교회 식으로 하겠다” 나는 물론 동생들도 사전에 얘기된 바 없었고 예상조차 못했던 일이라 깜짝 놀랐다. 그렇게 내가 20년 전부터 꿈꾸며 기도했던 그 장면이 실현된 것이다. 온 가족이 모여 어머니의 천국환송예배를 드렸다.

 우리 가족이 어머니의 치매로 힘들어 할 때 우리 가족을 도와주었던 이계화 집사님의 섬김과 사랑 그리고 장례예배에 함께 와서 예배드리는 교구 식구들의 모습에 큰 감동을 받으신 듯 했다.

 그후 한 달 뒤 아버지는 나를 따라 우리 교회에 출석하시고 새신자교육도 수료하셨다. 아버지는 1년이 넘도록 단 한 주도 빼놓지 않고 주일성수하셨다. 아버지는 특히 이영훈 목사님의 설교를 좋아하셨다. 그래서일까. 아버지는 이영훈 목사님이 요셉의 장례를 주제로 한 주일설교를 끝으로 들으시고는 그 날 저녁 어머니처럼 평안한 자세로 천국으로 가셨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자녀들은 이전보다 더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됐다.  

 나는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을 계획하고 이끄셨음을 분명하게 확신하게 됐다. 바라기는 부모 혹은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는 분들이 절대 포기하지 말고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때에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나 또한 남은 오빠네 가족들을 위해 계속 기도할 것이다. 할렐루야.           

      정리=정승환 기자

 


이 음성을 들으십시오 -

국해현 목사(서대문성전 담임)

 

북한 핵실험, 북한 선제 타격, 사드배치, 중국 보복, 일본의 소녀상, 독도문제, 탄핵, 정치적 비방, 세월호, 경제 불황, 청년 실업률, 출산감소까지 우리주변에서 너무나 많이 들리는 소리들이다. 이런 소리를 듣고 있으면 금방이라도 나라에 큰 일이 생길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해 온다. 지금까지 내 안정된 생활 근간이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사로잡힌다. 이런 두려움의 현실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을 하실까? 바다 한 가운데서 큰 물결로 인해 고난을 당했던 예수님 제자들에 대한 사복음서 기록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에 귀기울여보자. 제자들은 큰 물결로 인해 배가 요동치는 현실이 몹시 두려웠을 것이다. 그것도 밤 사경(새벽2∼3시경)에 죽을 것 같다고 소리치는 사람들의 부르짖음을 들으며 다들 공포에 질렸을 것이 분명하다. ‘왜 이러지?’ ‘이러다 배가 뒤집히는 거 아니야?’ ‘사고를 당해서 우리가 다 죽을지도 몰라’ 그런데 성경은 그 상황에서는 있을 수 없는 전혀 예상 밖의 기록을 하고 있다. 그들이 두려워하고 염려했던 대로 대형사고가 나서 배가 파선하고 다치거나 죽었다고 기록하지 않고 ‘바람은 잠잠해졌고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다’고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를,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 그들에게 달려오셨고, 달려오신 예수님을 그들이 배로 영접했기 때문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예수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셨다는 것은, 고난당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맨발로 뛰어 오셨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이 한마디의 말씀은 제자들의 두려움과 불안을 평안으로 바꿔주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 성경의 기록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고 믿는다. 그래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님께서는 나라와 우리 자신의 삶을 위해 절규하듯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면, 우리를 고난가운데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맨발로 달려오실 것이라는 사실 또한, 절대로 의심하지 않고 믿는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렇게 위로해 주시고, 용기를 주실 것을 확신한다.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육신의 눈에 보이는 큰 물결, 흔들리는 현실 때문에 두려워하지만 말고, 예수님을 삶 가운데 모시고, 기도로 마음과 귀를 열어서 이 음성을 꼭,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장태영 안수집사(구로대교구) -

내 삶을 인도하신 치료의 하나님

 오래 전 나는 모 회사 입사시험을 보기 위해 상경했다가 당시 돈 6000원이 없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오갈 데 없는 신세에 처한 적이 있다. 도움을 구할 사람도 없어 궁여지책으로 구걸도 해봤다. 그러다 무슨 오해를 했는지 경찰서로 신고가 들어가 경찰에 붙잡혀 조사를 받은 적도 있다. 그렇게 막막하기만 했던 내 인생에도 하나님은 찾아오셨다.

 1990년이었다. 모 대기업에 입사하게 된 후 인쇄기술을 연마하며 생활을 이어갔던 그 때 빨간 가방을 든 아주머니를 만나게 됐다. 내게 쥐어준 것은 ‘행복으로의 초대’란 전도지였다. 한 번 읽고, 두 번 읽고 하다 보니 어느새 빼곡히 적힌 글들이 내 마음에 들어왔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렸을 때 시골에서 자라왔던 나는 예수님이 누군지, 하나님이 뭐 하시는 분인지도 모른 채 시골을 누비는 촌놈에 불과했다. 그러다 서울 숙모가 운영하는 홍대 인근 서점에서 일을 배우며 숙모가 다니는 교회를 따라 예배를 드리게 됐다. 지금이야 당연한 것이었지만 매 주일 예배를 드리는 것과  끼니마다 기도하는 것이 참 어색했다. 그러다 군대를 가게 됐고 좋은 선임을 만났다. 당시 군종이었던 선임은 부대 내 교회로 인도하고 어렵고 힘들 때 좋은 위로의 말을 해주어 인간적으로 잘 따르고 마음도 편안해짐을 느꼈었다.

 그 때의 평안함이 떠오르면서 나도 모르게 여의도순복음교회로 발걸음이 옮겨졌다. 주일예배는 물론 주일철야예배도 참석하면서 매 예배가 즐거웠다. 지금 담임목사님이신 이영훈 목사님이 당시 철야설교를 하셨는데 하는 말씀 족족 내게 하시는 말씀처럼 느껴져 큰 은혜를 받았다. 말씀으로 은혜를 받으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눈에 들어온 것이 햐얀 옷을 입은 봉사자들이었다. 그 때는 남선교회가 무엇인지 봉사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저 “저도 하얀 옷을 입고 싶습니다”라는 말이 먼저 나왔다. 그렇게 남선교회 봉사실에서 봉사를 시작했다. 근데 봉사를 하기 전 봉사자는 믿음이 필요하다고 들었다. 나는 믿음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봉사를 시작하면 마냥 기쁘기만 할 것 같았는데 그런 생각도 잠시 나는 허리통증과 무릎통증이 함께 와서 큰 어려움을 겪었다. 아픈 다리와 허리를 부여잡고 인근 병원에 가서 치료도 받아봤지만 차도가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통증은 더욱 심해졌고 봉사는 물론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 때가 되어서야 매주일 교회에서 듣던 말씀들이 생각났다. 예수님이 늘 병자들을 고쳐주셨음을 기억해냈다. 그래서 교회에서 배운 대로 하나님께 의지하기로 작정하고 기도처에서 40일 작정기도를 시작했다. 성경의 말씀처럼 기도하면 허리와 무릎에 통증이 치료받을 것이라 확신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안수기도만 받으면 무조건 나을 것 같다는 믿음이 생겼다. 실제로 엄태욱 목사님이 그 때 우리 기도처를 찾아와 예배를 인도해주셨는데 그 때 나는 엄 목사님께 매달리다시피 안수기도를 요청했다. 엄 목사님은 내게 안수기도해주셨는데 그 즉시로 통증이 떠나가버리고 지금까지 건강하게 봉사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 후 하나님께서는 내게 힘을 주셔서 아무리 피곤하고 고단하여도 철야예배 후 이어지는 새벽기도에도 참석할 수 있는 새 힘을 주셨다. 매주일 그 힘에 의지해 예배를 드리고 여름이면 오산리 기도원 금식성회도 참석하며 은혜를 누릴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오갈 곳 없던 나를 하나님은 지금까지 지키고 보호하시고 이끌어주셨다. 그 은혜에 감사하며 날마다 이사야 41장 10절과 시편 23편을 묵상하며 오늘도 주님이 주시는 평안함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고백한다. 할렐루야!     

 


사랑 없는 수고/조용기목사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린도전서 13장 1~8절)

 우리 사회가 최근 무척 차갑고 몰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옛날보다 엄청나게 잘 살고 있습니다. 하늘을 찌르는 고층 빌딩과 길을 메우는 자가용, 우리가 먹는 식탁 등 옛날에 비하면 참으로 풍요롭기 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3장 1절로 3절은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수고해도 그 삶에 사랑이 없다면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1. 사랑의 척도를 가지고 바라보라

  우리는 사랑을 가슴에 품고 사랑의 척도를 가지고 모든 사태를 해결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눈 속의 들보와 티에 관해서 이렇게 말을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6장 41절로 42절에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누가복음 6장 41절)라고 말씀하셨는데, 티와 들보는 크기가 엄청나게 차이가 있습니다. 티는 눈 속에 들어갈 만큼 작은 것이지만, 들보는 집을 지을 때 기둥으로 쓸 만큼 큰 목재인 것입니다. 티는 안과 의사가 눈을 뒤집어 특수 렌즈로 보아야 겨우 찾을 수 있는 티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작은 티를 쉽게 찾아냅니다. 이것은 타락한 인간의 죄성 때문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후 하나님께서 물으시자 아담은 모두 하와가 잘못했지, 자기는 잘못한 게 없다고 말합니다.

  창세기 3장 12절에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담은 자기의 잘못은 보지 못하고 아내의 잘못된 탓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내를 주신 하나님까지도 은근히 원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담 이후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자신의 잘못은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의 잘못만 비난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바라보고 그 십자가를 통해서 사물을 판단해야 됩니다.

  마가복음 10장 43절로 45절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에베소서 5장 1절로 2절에도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웃을 평론할 때, 그 사람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짊어졌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안경 삼아서 이웃을 평론하고, 자기 마음대로 평론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가지고 우리가 변화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말로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역사를 나타내야 되는 것입니다.


2. 사랑에도 바라봄의 법칙을 적용하라

  사랑은 역시 바라봄의 법칙을 통해서 늘 바라봄으로 그 사랑의 말씀이 마음속에 들어와서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어느 집사님이 자기 자녀들을 교육시키기 위하여 사랑을 적은 천을 애들 방 벽에 붙여놓고, 매일같이 읽으라고 했어요. 사납고 부모 말을 잘 안 듣던 애들인데, 그 방에 아버지가 사랑을 가르치는 성구를 적어놓고, 보고, 읽고, 자고, 깨라고 부탁을 했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4절로 7절을 보면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 이것을 그대로 행하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변화를 시켜주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쪼개기까지 합니다.

  바라봄의 법칙에 고개를 들어 이 사랑의 말씀을 읽으면, 이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 집사님은 ‘자기 아들들이 다른 것으로는 도저히 변화되지 않았는데, 사랑을 적은 천을 바라보고 늘 읽고 들어오고 나가고 한 그 결과 인격이 변화되었다’고 간증합니다. 부모의 꾸지람으로 변화된 것이 아니라, 사랑의 말씀이 가슴속에 들어와서 변화된 것입니다. 

  한 동리에 한 사람이 뒷산에 있는 큰 바위가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기이하게 여기고 늘 그 바위를 바라보았는데, 나중에 자기가 나이를 먹어서 거울을 들여다보니깐 바로 그 바위가 자기 얼굴을 변화시켜 놓았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그처럼 예수님의 고난을 바라봄으로 생각과 말과 행동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연약할 때, 하나님 말씀을 바라보면 그 말씀이 우리를 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6절에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아가 로마서 5장 10절에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 위해서 고난당하신 것을 생각하고 감사하면, 예수님의 그 언약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연약할 때 강하게 만들어 주시고, 죄인 되었을 때 사함 받은 의인이 되게 만들어 주시고, 원수 되었을 때 화목하게 만들어 주시는 변화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날이 갈수록 우리 사회에 분노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말을 안 듣는다고 교사가 유치원생을 때려죽이기도 하고, 끼어들어 줄을 섰다고 칼을 휘두르고 있으며, 심지어 아무 이유도 없이 길 가는 사람을 해치고, 상처를 입히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생겨나는 겁니다. 분노 범죄가 계속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보면, 사회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함으로 인한 분노가 가득한 경우가 많습니다. 사랑이 줄어들면 분노가 늘어납니다. 분노가 우리 사회에 가득해지면, 너 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가 피해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두려운 사회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3. 용서하고 사랑하라

  우리는 용서하고, 사랑하는 훈련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따르는 용서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고 하신 말씀은 용서와 사랑의 모범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3절로 7절에 바리새인, 사두개인, 율법사들이 젊은 여자를 끌고 와서 예수님 발 앞에 내동댕이치고 ‘예수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우리에게 잡혔습니다. 변명할 것 없어요. 모세의 율법에는 간음한 자는 돌로 쳐서 죽이라고 했는데 주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질문을 던집니다. 그때 예수님이 허리를 굽혀서 손가락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어떤 글을 썼다는 말은 성경에 기록하지 않아도, 예수님이 손가락으로 글을 쓰니깐 그거를 따라서 손가락 가는 곳을 주의해서 보고, 무엇을 적는가 보고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다른 사람 모르게 지은 죄를 예수님이 손가락으로 적어 내려가고 있습니다. 큰 자부터 작은 자까지 ‘야 내가 이 여자를 돌려 쳤다간 그 다음엔 내가 돌에 얻어맞아 죽어야 되지 않겠느냐.’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손가락으로 글을 자꾸 써 내려 가는데, 큰 자로부터 작은 자까지 돌을 살며시 땅 위에 놓고 그들은 자기들 집으로 가버리고 만 것입니다. 한참 후에 예수님이 울고 있는 여자에게 ‘여자여 고개를 들라. 너를 참소하는 자가 있느냐? 정죄하는 자가 있느냐?’ ‘주님 없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 집에 가서 다시 죄 짓지 마라.’

  얼마나 놀라운 주님의 용서와 사랑이 아닙니까. 용서와 사랑이 그를 변화시키는 것을 봅니다. 참된 신앙은 용서만 해 주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해주었으면 사랑을 베풀어서 변화를 받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이 용서받고, 사랑받아서 진정으로 변화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용서하고 사랑을 하지 아니하면 우리가 참된 신앙을 가졌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종교창설자들의 태도를 보면 대조가 참으로 됩니다. 어떤 종교창설자는 점잖게 앉아가지고 있는데, 주변에는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이 끓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다 볼 필요 없다. ‘본래 무일물하사, 본래 아무것도 없는 것이니라. 마음에 없다고 생각하고, 초연하여 도를 닦아라. 있는 것을 없다고 말하고, 자기 마음속에 평안을 가져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심한 매를 맞고, 찢어진 옷을 입고, 나중에 십자가에 못 박혀 매달려 계십니다. 이는 우리를 구원하는 기독교 신앙의 근원이라고 우리가 말을 합니다. 처참하게 맞고 극악한 형벌을 받아 죽어가는 예수님이 부처님하고 뭐가 다릅니까? 부처님은 수양과 도덕으로 모든 주위와 환경을 생각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잘못된 수양과 환경을 뛰어 들어가서 전신으로 짊어지고 피투성이가 되어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6절로 8절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이사야 53장 4절로 5절에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라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철저히 우리 죄악과 저주를 대신 짊어져 주신 것입니다. 


4. 사랑은 주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하면서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기억한다”(데살로니가전서1장3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냥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수고’라는 말을 썼습니다. 수고는 ‘코포스’라는 헬라어 단어인데, ‘몸이 녹초가 되어 견디지 못할 정도가 될 때까지 노동을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말만 사랑이 아니라,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힘들고 고달픈 일도 기꺼이 감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엄마가 밤잠을 못 자고 아기를 돌보는 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밖에서 힘들게 일하는 것도 가족들을 사랑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야곱은 사랑하는 라헬을 얻기 위하여 외삼촌의 집에서 노동을 하는데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창세기29장20절)고 했습니다. 사랑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사랑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보스턴의 한 정신병원에 애니라는 앞을 보지 못하는 소녀가 있었는데, 이 아이는 성격이 매우 난폭하고,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자원봉사자가 애니라는 아이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아이가 아무리 난폭해도 계속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그 자원봉사자의 관심과 사랑으로 애니는 변화가 되어서, 정신병원에서 퇴원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후에 신문사의 도움으로 개안수술을 받아 눈도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애니라는 아이는 바로 헬렌 켈러를 돌보았던 앤 설리번 선생님입니다.

  앤 설리번은 한 자원봉사자의 사랑으로 회복된 이후, 그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헬렌 켈러를 48년 동안 돌봐 주었던 것입니다. 사랑은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사랑이 또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놓습니다. 나 한 사람이 베풀 수 있는 사랑은 아주 작습니다. 그렇지만 이 사랑이 또 다른 사랑을 낳고, 그러한 사랑이 모여서 이 사회를 따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랑은 어떠한 허물이라도 벗기지 않고 덮어주는 것입니다. 저는 어릴 때를 생각하면 항상 떠오르는 추억이 있습니다. 추운 겨울밤에 내가 이부자리를 발로 찬 채 잠을 자면 어머니나 할머니가 기겁을 합니다. 그리고 이불을 목 있는 데까지 끌어올려 덮어주고 손으로 다독거려 주는데, 세월이 지나고 보니 그 사랑이 마음속에 따뜻하게 느끼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더구나 여름철에 할머니께서 빨래를 개고 있는데, 할머니 곁에 누워서 배꼽을 다 내놓고 잠을 자고 있으면 할머님이 기겁을 하시고 ‘할매 따라와서 감기 걸리려고 그러냐?’며 홑이불 개던 것을 내 배 위에까지 덮어주시면서 ‘이렇게 벗고 자면 안 된다’고 말씀하시던 것이 생각납니다. 우리 어머니나 할머니가 나의 모자란 점을 덮어주지 ‘이 자식 이불 안 덮을 바에는 덮지 말고 저 구석에 가서 혼자 자라!’고 벗기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나를 꼭 덮어 주었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덮어주는 것이지 벗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사랑이 있다고 큰 소리를 해도, 허물을 덮어주지 아니하면 사랑을 증명할 수가 없습니다. 잠언 10장 12절은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고 했습니다. 또 잠언 17장 9절은 “허물을 덮어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랑으로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 주시고 용서하시는 것과 같이, 우리도 서로 덮어주고 용서하고 사랑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요, 예수 믿는 신앙인 것입니다.

결론

  성경은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린도전서 13장 13절)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화려한 치장을 하고, 근사한 말을 하고, 잘 지은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한다고 하더라도, 서로 싸우고, 허물을 들추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건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들이 지은 죄악을 덮어주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님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보혈의 옷으로 우리들을 덮어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앞에 서서 ‘주님 나를 심판하시옵소서.’ 그러면 예수님은 ‘심판은 무슨 심판?’, ‘내가 너무 죄를 많이 지었습니다.’, ‘내가 네 죄를 다 청산했다. 내 의로운 예복을 네가 입어라. 내가 다 이루었다.’ 그것이 예수님이 하신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변화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이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변화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인이 의인이 되고, 더러운 자가 깨끗한 사람이 되고, 믿지 못할 사람이 믿을 사람이 되고, 미운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사랑을 통해서 변화를 받아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모든 말은 울리는 꽹과리 소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실천함으로 이 사회에 사랑의 교향곡이 울려 퍼지게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미움으로 꽉 들어차 있습니다. 몇 사람만 모이면 온 천지를 뒤덮어버릴 정도로 서로 미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최후의 순간에도 사랑으로 강도였던 사람을 구하는 것을 봅니다. 흉악한 강도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인정했습니다.
  ‘주님, 주의 나라에 임하시거든 저를 기억해 주시옵소서.’  그 때 예수님은 그 강도의 죄를 지적하기보다는 죄를 덮으시고, ‘오늘날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시며 용서와 사랑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흘리신 피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덮어주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거역하고, 에덴에서 쫓겨나올 때, 하나님이 짐승을 잡아서 가죽을 벗겨가지고서 피를 흘리고 가죽 옷을 입혀서 내보낸 것입니다. 이 상징적인 것입니다. 쫓겨나갈 때 ‘벌거벗고 그냥 얼어 죽어라’고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짐승을 대신 죽여서 가죽을 벗겨서 입혀서 내보낸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입혀서 내보내느니라. 주님은 여러분을 입히는 옷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을 끌어안고 “나를 옷 입어라. 내가 피를 흘려서 십자가에서 네 옷을 만들었으니 나를 옷 입어라.” 예수님 사랑에 의지하면 그리스도의 피가 여러분을 덮어서 의롭게 만들어 주시고. 성령이 여러분을 변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 주시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셔서 그 흘리신 보혈로 우리들의 죄와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사랑으로 덮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용서받은 의인이 되었습니다. 늘 감사하며 살게 하시고 이제는 늘 주님께 받은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며 살게 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기사입력 : 2017.04.02. pm 16:59 (편집)
 


창세기 성경퀴즈 (1)

1. 창조사업에서 육지와 바다가 분리된 날은? (창1:9-10, 13) ③

 ① 첫째 날     ② 둘째 날      ③ 셋째 날      ④ 넷째 날


2. 제 삼일에 창조하신 것은? (창1:10-13) ④

 ① 빛  ② 사람         ③ 생물         ④ 바다와 육지


3. 천지 창조시 새들을 만드신 날은? (창1:22-23) ①

 ① 다섯째 날   ② 둘째 날      ③ 셋째 날      ④ 넷째 날


4. 사람과 동물이 창조된 날은? (창1:24-27) ②

 ① 각각 다른 날에      ② 같은 날에    ③ 동시에       ④ 동물이 하루 전에


5. 하나님이 채소와 과일 나무를 창조하신 날은? (창1:11) ②

 ① 둘째 날     ② 셋째 날      ③ 넷째 날      ④ 다섯째 날


6. 조류와 어류를 창조하신 날은? 창1:21 ④

 ① 첫째 날     ② 둘째 날      ③ 넷째 날      ④ 다섯째 날


7. 창조가 이루어진 기간은? (창1:31, 2:1) ③

 ① 5일        ② 10일        ③ 6일  ④ 9일


8. 창세기 1장의 인간 창조 기간은? (창1:24-27) ②

 ① 천지창조 전에               ② 천지창조 후에        

        ③ 천지창조 중간에      ④ 제7일에


9. 창세기 2:7절에서 말하는 인간의 구성 요소는? ②

 ① 하나        ② 둘   ③ 셋   ④ 넷


10. 에덴동산은? (창2:8) ①

 ① 동방에 있었음               ② 지상에 없었음        

        ③ 유럽에 있었음        ④ 아프리카에 있었음


11. 에덴동산을 흘러간 강들은? (창2:11-14) ①

 ① 비손, 기혼, 힛데겔, 유브라데          ② 유브라데, 아바나, 힛데겔, 기혼

 ③ 힛데겔, 요단, 비손, 유브라데          ④ 요단, 유브라데, 비손, 기혼


12. 에덴동산의 강 이름 순서는? (창2:11-14) ②

 ① 기혼, 비손, 힛데겔, 유브라데          ② 비손, 기혼, 힛데겔, 유브라데

 ③ 힛데겔, 유브라데, 비손, 기혼          ④ 유브리데, 힛데겔, 비손 ,기혼


13. 빛과 해, 달, 별을 만드신 날이 맞게 짝지어진 것은? (창1:3,5,16,19) ③

 ① 첫째 날, 셋째 날    ② 둘째 날, 셋째 날     

        ③ 첫째 날, 넷째 날     ④ 둘째 날, 다섯째 날


14.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라는 말씀이 없는 창조 날은? (창1:6-8) ①

 ① 둘째 날     ② 셋째 날      ③ 넷째 날      ④ 여섯째 날


15. 육축과 새와 들짐승들의 이름은? (창2:19) ③

 ① 자연히 생김         ② 하나님이 지으심      

        ③ 아담이 지음  ④ 진화에 의해 생겨남


16. 구약에서 짐승이 말한 것은? (창3:1, 민22:28) ②

 ① 한 번       ② 두 번        ③ 세 번        ④ 네 번


17. 인간 최초의 범죄자는? (창3:6,20) ②

 ① 가인        ② 하와         ③ 아벨         ④ 에녹


18. 사람이 옷을 입게 된 것은 언제부터인가? (창3:7) ②

 ① 창조 직후부터               ② 범죄 후부터  

        ③ 홍수 후부터  ④ 바벨탑 사건 후부터


19.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 하나님이 그들에게 지어서 입혀 주신 옷은? (창3:21) ③

 ① 무화과 나뭇잎 옷    ② 털옷         

        ③ 가죽옷       ④ 통옷


20. 제일 처음 살인한 사람은? (창4:8) ②

 ① 두발 가인   ② 가인         ③ 셈           ④ 아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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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온유함

  모세는 땅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고 했다.(민12:3)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이상하다고 느낄 정도로 그 타당성이 희박하다.  왜냐하면 모세는 애굽인들을 향하여 반기를 들었고 그 때 애굽 사람을 살해했던 것이다. 그리고 40년 후그가 바로 앞에 섰을 때 이 바로 왕은 모세를 온유하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강했고, 분노했으며, 누구보다도 범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이 싶이약하고 수줍움을 잘 타고내성적인 사람이었다면 광야를 지나는 동안 거역하기잘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 수 있었겠는가?사실 그는 지팡이를 가지고 반석을 향하여 명하지 않고 지팡이로 반석을  쳐서 물을 내게 했기 때문에 약속의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는 나약하고 연약한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그런데성경은 어떻게 그를 향하여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
  바로 절제된 힘과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복종심, 그것이 바로 모세는 온유한 사람이라는 평을 받게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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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이 유익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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