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교과서에서 '건국·자유' 뺀 것은 위헌"..헌법소원

일부 교사들과 학부모, 학생들이 "초·중·고교 역사교과서에 담기게 될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민주주의' 용어는 특정한 역사관과 정치적 견해에 입각해 위헌적"이라며 헌법소원을 냈다.

헌법소원에 참여한 일부 학부모 등은 역사교과서에 종전 용어 대신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민주주의' 용어가 쓰이는 것이 위헌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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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교사·학부모 등 1150여명 헌법소원
"대한민국 정부수립·민주주의 용어 위헌적"
"특정 역사관, 정치적 견해..정치중립 위배"

일부 교사들과 학부모, 학생들이 "초·중·고교 역사교과서에 담기게 될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민주주의' 용어는 특정한 역사관과 정치적 견해에 입각해 위헌적"이라며 헌법소원을 냈다.

이들은 1948년 8월15일에 대한민국이 건국됐으며, 자유민주주의가 헌법의 기본원리라는

관점에서 '건국'과 '자유'가 빠진 교과서는 헌법에 위배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헌법을 생각하는 변호사모임(헌변)은 학부모와 교사 등 청구인 1150여명이 '초중등학교

교육과정 일부개정' 교육부 고시에 대한 헌법소원심판을 냈다고 14일 밝혔다.

이는 역사교과서에 '대한민국 건국'과 '자유민주주의' 단어 대신 '대한민국 정부수립',

'민주주의' 용어를 쓰고, '대한민국이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라는 표현을 배제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지난 7월27일 교육부 고시에 대한 것이다.

해당 고시는 초등학교 5·6학년군 사회 과목에는 2019년 3월1일, 중학교 역사와

고등학교 한국사 과목에는 2020년 3월1일부터 적용될 예정이다.

헌변에 따르면 청구인들은 일반인, 학부모, 학생, 교사 등으로 구성됐다고 한다.

소송대리는 헌변과 한반도 인권과 통일을 위한 변호사모임 소속 변호사 22명이 맡기로 했다.

헌법소원에 참여한 일부 학부모 등은 역사교과서에 종전 용어 대신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민주주의' 용어가 쓰이는 것이 위헌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청구서에서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삭제하는 것은 특정한 역사관과

정치적 견해에 따른 것으로 교육의 자주성, 전문성, 정치적 중립성에 위배된다"며

 "대한민국 수립을 정부수립으로 바꾸는 것은 대한민국이 정통성에 배치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1948년 유엔이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한 것을 삭제하는 건

국제사회가 공인하는 명백한 역사적 사실을 감추고 왜곡하는 것이다"라며 "교육을

정치적 도구로 활용하려는 의도를 드러낸 것으로 정치적 중립성에 배치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교육부 고시는 위헌적 내용의 교육과정을 학생들에게 강요하면서 학생들의

자유로운 인격발현권과 학부모의 자녀교육권, 제대로 된 의무교육을 받게 할 의무를 침해한다.

위헌적 교육 내용을 가르칠 담당 교사들의 학생 교육권도 침해한다"고 강조했다.


울산경찰, 맥도날드 알바생에 음식 던진 '갑질 손님' 소환

울산시 북구의 한 맥도날드 드라이브스루 매장에서 외제승용차를 탄 고객이 운전석에서

20대 여성 아르바이트 직원의 얼굴을 향해 음식을 던지는 영상이 공개돼 네티즌의 공분을 산

사건과 관련해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한국맥도날드 관계자는 "피해 사실을 확인했고, 직원 보호와 피해 구제를 위해 경찰에

고발했다"며 "직원이 고객의 진정한 사과를 받기를 원하고 있으므로, 필요한 모든 조치를

 다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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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직원 "너무 황당하고 화나 ..블랙박스 영상 공개 감사"
[보배드림 영상 캡처]

울산시 북구의 한 맥도날드 드라이브스루 매장에서 외제승용차를 탄 고객이 운전석에서

20대 여성 아르바이트 직원의 얼굴을 향해 음식을 던지는 영상이 공개돼 네티즌의 공분을 산

사건과 관련해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14일 울산 중부경찰서에 따르면 이날 매장 점주가 음식을 던진 고객을 폭행 혐의로 고발했다.

점주는 경찰 조사에서 "해당 고객은 주문이 잘못됐다는 이유로 직원에게 욕을 하고

음식을 던졌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경찰은 피해 직원을 상대로 조사를 벌였다.

경찰은 또 피고발인인 손님이 김모(49)씨라는 사실을 밝혀내고, 김씨를 다음 주 초

소환해 사건 경위 등 사실관계를 확인할 예정이다.

현재 피해 직원은 이 사건으로 정신과 진료를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직원이 정신적인 피해를 받은 것으로 인정되면 김씨의 폭행 혐의가 상해 혐의로

변경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맥도날드 관계자는 "피해 사실을 확인했고, 직원 보호와 피해 구제를 위해 경찰에

고발했다"며 "직원이 고객의 진정한 사과를 받기를 원하고 있으므로, 필요한

모든 조치를 다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어 "당시 주문 실수는 없었고, 정상적으로 접수했다"고 강조했다.

지난 13일 자동차 전문 커뮤니티 '보배드림'에는 관련 영상이 올라와 지금까지

조회 수가 25만건이 넘었다.

26초짜리 이 영상에는 커뮤니티 회원이 지난 11일 맥도날드 드라이브스루

매장에서 기다리던 중 목격한 앞 차량 운전자의 '갑질' 모습이 담겼다.

영상을 보면 앞 차량 운전자가 자신이 주문한 음식을 받은 뒤 직원과 몇 마디

나누다 갑자기 직원에게 제품을 던지고 그대로 가버린다.

이 회원은 "제품에 맞은 직원은 울고 있었다"며 "USB에 블랙박스 원본 영상을

저장해 매장에 전달했고, 국민신문고에 신고도 완료했다"고 말했다.

이날 보배드림에는 자신을 '맥도날드 직원 본인'이라고 밝힌 네티즌도 글을 올려

당시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해당 고객은 단품 4개를 주문했는데, 제품을 건네주자 (자신이) 세트로 주문한 게

아니냐고 되물었다"며 "주문 내용을 말해주자 고객이 표정이 안 좋고 혼잣말로 욕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혹시 실수가 있었는지도 몰라 주문 내용을 모니터로 확인했느냐고 되묻자 고객이

욕설과 함께 '안 먹어'라고 말하며 제품이 든 봉투를 얼굴로 던졌다"고 밝혔다.

이 직원은 "봉투에 맞자마자 고개가 획 돌아갔고 너무 황당하고 화가 나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며 "너무나 분했지만, CCTV에 제대로 찍히지 않아 참고 넘기려고 했던

상황에서 블랙박스 영상이 공개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블랙박스 영상을 인터넷에 올려 이 일을 세상에 알려주신 분과 마치 가족의 일인

것처럼 같이 화내고 걱정해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며 "이번 일로 아르바이트를

그만둘 생각은 없다"고 덧붙였다.


큰 나무가 되어 봅시다.

  큰 나무가 되어 봅시다 불안해지거나 마음이 우울하다

싶을 때는 눈을 감고 큰 나무가 되어 봅시다.

아주 잠깐만이라도 괜찮습니다.

스스로 난 큰 나무야 라고 생각하고 대지에

깊이 뿌리 내렸다고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뿌리를 깊이 내렸으니까 그리 쉽게 쓰러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바람이 약간 불어도 끄떡도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 의해 쓰러 지는 일도 없습니다.

당신은 아주 강항 존재입니다.

걱정거리가 있다 보면 아무래도

나쁜 쪽으로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흔히 인생을 길에 비유하곤 합니다만 그럴 때는

길이 좋지 않은 곳만 골라 산을 오르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지금은 특히 어려운 순간인니까 인생이란 산은

그 어느 때 보다도 험할 것입니다.

방심하면 순식간에 굴러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험한 산을 오르려면 기백을 모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불안해하면 안 됩니다.

당신은 항상 보호받고 있다고 믿어

보십시오 당신은 생명을 부여받았습니다.

누구나 생명을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당신이 아플 때에도,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에도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목숨이 붙어 있다는 것만으로 당신은 축복 받은 존재입니다.

그렇게 축복받은 존재인 자신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고통에는 반드시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힘든 일이 일어났을 때는 반드시 그것을

극복하는 힘이 당신에게 주어져 있는 법입니다.

당신은 고독하지 않으며 우주는

당신 편이라는 것을 꼭 기억하기 바랍니다.

당신은 약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바꾸면 내부가 바뀝니다.

외부도 바뀝니다.

자신을 큰 나무라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극복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박목월 시인과 그의 아들 이야기

19526. 25 전쟁이 끝나날 무렵 박목월 시인이 중년이 되었을 때

그는 제자인 여대생과 사랑에 빠져 모든 것을 버리고 종적을 감추었다.

가정과 명예. 그리고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라는 자리도 버리고 빈손으로

홀연히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목월의 아내는 그가 제주도에서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남편을 찾아 나섰다.

부인은 남편과 함께 있는 여인을 마주한 후 살아가는 궁한 모습을 본 후

두 사람에게 힘들고 어렵지 않으냐며 돈 봉투와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지내라며

두 사람에게 겨울옷을 내밀고 아내는 서울로 올라왔다.

목월과 그 여인은 그 모습에 감동하고 가슴이 아파 그 사랑을 끝내고 헤어지기로 한 후,

목월이 서울로 떠나기 전날 밤 이시를 지어 사랑하는 여인에게 이별의 선물로 주었다.

 

그때 그 시가 바로 이 노래다.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 ~ 너도가고 나도 가야지

한 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 ~ 너도가고 나도 가야지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 두고 홀로 울리라

~ ~ 너도가고 나도 가야지'

 

노래마다 사연이 있다.

아픔과 고통 속에서 진주가 생성되듯 오늘 우리네 삶 또한 성숙 하고

가치 있는 삶들이 생성되고 있음을 생각해 봅니다

 

어 머 니

내가 영리하고

똑똑하다는 우리 어머니!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6.25전쟁이 났다

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머니

말씀 잘 듣고 집 지키고 있어'' 하시고는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가셨다.

그 당시 내 여동생은 다섯 살이었고,

남동생은 젖먹이였다.

인민군 지하에서 한 달이 넘게 고생하며 살아도

국군은 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견디다 못해서 아버지를 따라 남쪽으로 가자고 하셨다.

우리 삼 형제와 어머니는 보따리를 들고 아무도 아는 이가

없는 남쪽으로 향해 길을 떠났다.

1주일 걸려 겨우 걸어서 닿은 곳이 평택

옆 어느 바닷가 조그마한 마을이었다.

인심이 사나워서 헛간에도 재워 주지 않았다.

우리는 어느 집 흙담 옆 골목길에 가마니

두 장을 주워 펴 놓고 잤다.

어머니는 밤이면 가마니 위에 누운 우리들 얼굴에 이슬이 내릴까봐 보자기를 씌워 주셨다.

먹을 것이 없었던 우리는 개천에 가서 작은 새우를 잡아

담장에 넝쿨을 뻗은호박잎을 따서 죽처럼 끓여서 먹었다

3일째 되는 날, 담장 안집 여주인이 나와서 ''(우리가)호박잎을

너무 따서 호박이 열리지 않는다. 다른 데

가서 자라!'' 고 하였다.

그날 밤 어머니는 우리을 껴안고 슬피 우시더니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남쪽으로 내려갈 수 없으니 다시 서울로 가서 아버지를 기다리자고 하셨다.

다음 날 새벽 어머니는 우리들이 신주처럼 소중하게 아끼던

재봉틀을 들고 나가서 쌀로 바꾸어 오셨다.

쌀자루에는 끈을 매어서 나에게 지우시고 어머니는 어린 동생과

보따리를 들고 서울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평택에서 수원으로 오는 산길로 접어들어 한참을 가고 있을 때였다.

30살쯤 되어 보이는 젊은 청년이 내 곁에 붙으면서 '

'무겁지. 내가 좀 져 줄께!''하였다.

나는 고마워서 ''아저씨, 감사해요'' 하고 쌀자루를 맡겼다

쌀자루를 짊어진 청년의 발길이 빨랐다.

뒤에 따라 오는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으나, 외길이라서

그냥 그를 따라 갔다.

한참을 가다가 갈라지는 길이 나왔다.

나는 어머니를 놓칠까봐 ''아저씨, 여기 내려 주세요!

어머니를 기다려야 해요'' 하였다.

그러나, 청년은 내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그냥 따라와!'' 하고는 가 버렸다.

나는 갈라지는 길목에 서서 망설였다.

청년을 따라 가면 어머니를 잃을 것 같고

그냥 앉아 있으면 쌀을 잃을 것 같았다.

당황해서 큰 소리로 몇 번이나

''아저씨! ''하고 불렀지만, 청년은 뒤도

돌아 보지않았다.

나는 그냥 주저앉아 있었다.

어머니를 놓칠 수는 없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 즈음 어머니가 동생들을 데리고 오셨다.

길가에 울고 있는 나를 보시더니 첫 마디가 '

'쌀자루는 어디 갔니?''하고 물으셨다.

나는 청년이 져 준다더니 쌀자루를 지고

저 길로 갔는데, 어머니를 놓칠까봐

그냥 앉아 있었다고 했다.

순간 어머니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리고 한참 있더니 내 머리를 껴안고,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에미를

잃지 않았네!. '' 하시며 우셨다.

그날 밤 우리는 조금 더 걸어가 어느 농가

마루에서 자게 되었다.

어머니는 어디에 가셔서 새끼 손가락만한

삶은 고구마 두 개를 얻어 오셔서 내 입에

넣어 주시고는,''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아버지를 볼 낯이 있지!

하시면서 우셨다.

그 위기에 생명줄 같았던 쌀을 바보같이

다 잃고 누워 있는 나를, 영리하고 똑똑한

아들 '이라고 칭찬해 주시더니!

그 후 어머니에게 영리하고 똑똑한 아이가 되는 것이 내 소원이었다.

내가 공부를 하게 된 것도 결국은 어머니에게 기쁨을 드리고자 하는 소박한

욕망이 그 토양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때는 남들에게

바보처럼 보일 수도 있었지만,

어머니의

(바보처럼 보이는 나를)똑똑한 아이로

인정해 주시던 칭찬의 말 한 마디가

지금까지 내 삶을 지배하고 있는 정신적

지주였던 것이다.

헌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이신 박동규님의 글입니다.

이 글 속의 ''어머니''

시인 박목월님의 아내십니다.

절박하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야단이 아니라 칭찬을

해 줄 수 있는 어머니!

그런 어머니의 칭찬

한 마디가 우리 아이들의 인생을 아름답게 변화시켜 주리라 믿습니다.

오늘따라 어머님을 불러보고 싶네요.

얼마나 아프셨는지요?

 


국일고시원 화재 57살 양씨 빈소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 

희생자 가족 "막노동·비정규직 일하던 아들, 저축하려고 고시원 거주"
경찰·소방·국과수 등 10일 오전 합동현장감식
"화재 원인 규명에 주력..결과는 3주 뒤에"
종로구청은 "국일고시원 피해 주민들 거주비 지원 예정"


‘국일고시원 화재’ 사고가 일어난 지 이틀째인 10일 오전 서울 종로구 국일고시원
화재 현장 앞에 국화꽃이 놓여있다.

9일 밤 10시께 서울 중구 국립중앙의료원 장례식장에서 만난 조아무개씨는 차오르는 눈물에 말을 잇지 못했다. 조씨는 이날 새벽 발생한 ‘종로구 국일고시원 화재’로 세 아들 중 큰아들(35)을 잃었다. 아버지 조씨는 “부모를 잘못 만나 험난한 세상에서 고생만 한 큰아들을 가슴에 묻게 됐다”며 통곡했다.

조씨는 “전라도가 고향인 아들이 8년 전 서울에 올라와 줄곧 고시원에서 혼자서 살았다”고 말했다.

“막노동을 하다가 최근에는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었어요. 생활비를 아끼고 돈을 모으려고 고시원에 살았죠. 전에 살았던 곳도 고시원이었는데, 개발 지역이 되어서 거처를 옮긴 곳이 이곳 국일고시원인 것 같아요. 돈이 많으면 어디 아파트를 한 채 사준다든지, 어디 전세를 해준다든지 (했을 텐데)… 저 먹고살기도 힘들어요. 우리 아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한 거고, 발버둥을 친 애예요.”

조씨는 아들의 사고 소식을 처남을 통해 알게 됐다고 했다. “아들 직장에서 처남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오늘 출근을 안 했다고. 처남이 서울에서 큰불이 났다는 소식까지 함께 전해 줘서 알아보니 아들은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어요.”

조씨는 사고 전날 밤 아들과 통화한 내용을 떠올리며 눈물을 쏟았다. “‘이제 결혼할 때가 되지 않았냐’고 하자 수줍어했어요. 평소에도 착실하고 거짓말도 할 줄 모르는 아들이었는데…. 추석 때 본 모습이 마지막이었어요. ‘너 먹고 싶은 거 있냐’ 물었다가 농담으로 ‘니가 아빠를 사줘야지’ 하니까 ‘네, 아빠 사줄게요’ 해서 같이 냉면 물국수 먹었습니다. 그게 마지막이었습니다.”

조씨는 마지막 당부도 잊지 않았다. “오죽하면 고시원에서 살겠습니까. 생활이 넉넉지 못하니까 고시원에서 생활하고, 학생들도 절약하려고 고시원에서 생활할 겁니다. 부디 철저히 조사해야 합니다. 어느 고시원이든지 방화시설 잘되어서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해야죠.”

이번에 불이 난 국일고시원은 주로 40~70대 생계형 일용직 노동자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각자의 방에서 일상에 시달리며 살았던 듯 생존자 여러 명에게 사망자들 신원에 관해 물어봤지만 일제히 “서로 전혀 모른다. 얼굴밖에 모른다”는 답만 돌아왔다. 따로 사는 가족들이 고시원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들도 많았다.

이런 현실을 보여주듯 숨을 거둔 또 다른 희생자 양아무개(57)씨의 빈소에는 아무도 찾는 이가 없었다. 양씨의 주검이 안치된 서울백병원 쪽은 “가족과도 연락이 되지 않고 있고 찾아오는 사람도 아무도 없다”고 했다. 무연고자로 추정된다.

한편, 최소 7명의 목숨을 앗아간 ‘종로구 국일고시원 화재’ 이틀째인 10일 오전 화재 원인을 찾기 위한 관계 당국의 합동 감식이 시작됐다. 이날 오전 10시10분부터 경찰과 소방, 국립과학수사연구원, 한국전기안전공사 등은 전날 화재 사고가 발생한 서울 종로구 국일고시원 합동현장감식에 들어갔다. 서울 종로경찰서 조광현 형사과장은 “화재 현장을 발굴해 발화지점과 발화증거 찾기에 중점을 둘 것”이라며 “증거물은 국과수 감정을 의뢰할 예정이고 감식과 결과는 3주 뒤에 나올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종로구청 복지지원과는 이번 화재로 피해를 본 국일고시원 주민들을 이재민으로 보고 주거지원 방안을 마련했다. 종로구청은 “주민들이 이전에 살았던 곳과 비슷한 수준인 월 30만~40만원 선의 고시원에 최대 3달까지 머무를 수 있도록 주거비용을 지원할 예정”이라며 “국일고시원 근처의 고시원 8곳을 주민들의 임시 거처로 제시했고 다른 고시원도 선택할 수 있다”고 밝혔다. 구청 쪽은 “부상자들도 회복되면 이재민으로 분류해 지원할 예정이고 주민들에게 직접 지원하지 않고 고시원 주인들에게 후불로 비용을 지원하는 방식”이라고 덧붙였다.


"정말 가는 건가"..'세종 이전' 앞둔 공무원들은 '싱숭생숭'

정부서울청사에서 근무하는 행정안전부 공무원들의 최근 최대 관심사는 '세종 이전'이다.

정부는 지난 2일 내년 2월 행안부, 8월 과학기술정보통신부를 세종시로 이전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당장 세종 이전이 3개월 앞으로 다가오면서 정부서울청사서 근무하는 공무원들의

발등에도 불이 떨어졌다.

정부의 행안부 이전 정책에 따라 내년 3월에는 의정관실 등 3개 부서를 제외한 전 부서

직원들이 세종에서 생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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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정부서울청사서 세종청사로 '먼길'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과 행정안전부 직원들

정부서울청사에서 근무하는 행정안전부 공무원들의 최근 최대 관심사는 '세종 이전'이다.

정부는 지난 2일 내년 2월 행안부, 8월 과학기술정보통신부를 세종시로 이전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예정됐던 사안이었지만 이낙연 국무총리가 세종특별자치시지원위원회를 주재하며 관련 내용을 구체적으로 밝혔다.

행안부는 세종청사 확충 전까지 청사 인근의 민간건물을 임차해 이전할 예정이다.

이에 따라 행안부 소속 1179명과 과기정통부 소속 987명 등 총 2166명의 인원이 세종에서 근무하게 된다.

당장 세종 이전이 3개월 앞으로 다가오면서 정부서울청사서 근무하는 공무원들의 발등에도

불이 떨어졌다.

행안부는 지난 7일 월례조회에서 전 직원들을 상대로 구체적인 청사 이전 계획과 세종에서 집을

구할 때 유의해야 할 점 등에 대해 안내하는 시간을 가졌다.

내년 2월 설날 이후 순차적으로 이전하고, 집을 구할 때 한꺼번에 많은 이들이 문의하다 보면

부동산 임대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요령 등을 전달했다.

정부의 행안부 이전 정책에 따라 내년 3월에는 의정관실 등 3개 부서를 제외한 전 부서

직원들이 세종에서 생활해야 한다. 정부는 세종 이전과 관련해 직원들에게 현지 적응

지원금 명목으로 매달 20만원씩을 2년간 지원할 예정이다.

세종시 이전과 관련해 행안부 직원들의 표정도 엇갈렸다.

일부 공무원들은 세종에서 머물 집을 이미 구한 상태였고, 아직까지 구하지 못한 직원들의 경우

오피스텔이나 원룸 등의 정보를 구하는데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무엇보다 낯선 곳에서 생활하는 것에 대한 불편함을 호소하는 공무원들이 많았다.

자녀가 중학생 이상인 공무원들의 경우에는 교육 등의 문제로 가족들이 함께 내려가기보다는

세종에서 따로 오피스텔 등을 구해서 지내겠다는 구상을 가진 이들이 있었다.

한 공무원은 "솔직히 다들 이야기는 안하지만 세종에 가고 싶어서 가는 직원들이 얼마나 되겠느냐"라며

"아파트를 빌려서 직원끼리 룸 셰어 하자는 이야기도 나온다. 혼자 내려가게 돼 걱정이 많다"고 했다.

다른 공무원도 "오피스텔을 구한다고 해도 (업무상)서울에 올라와야 할 일이 많지 않겠느냐"면서

"어떻게 지낼지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반면 어린 자녀가 있는 공무원들은 세종에서 좀 더 나은 조건 속에서 생활 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도 전했다.

정부는 내년 6월 250명 규모의 청사어린이집 2개동을 추가로 개원하고, 통근버스 증차 등

편의시설 지원과 조기정착을 위한 이전불편사항 접수센터 등을 운영하기로 했다.

한 공무원은 "새로운 곳에 대한 걱정도 있지만, 어린이집 등이 잘 운영된다고 하니 괜찮을

것 같다"고 했다.


조명균 "남북군사긴장 완화되면 평화·번영 찾아들 것"

조명균 통일부 장관은 10일 "남북 사이에 흐르던 군사적 긴장이 완화되면,

그 자리에 평화와 번영이 찾아들 것"이라고 밝혔다.

조 장관은 이날 인천시 건설기술교육원 인천 본원에서 통일부 산하 남북하나재단(이사장 고경빈)

주최로 열린 '남북 어울림 한마당' 행사 격려사에서 "이달의 첫날, 인천 앞바다에서

포성이 멈췄고 지난 5일부터는 남북의 인원들이 같은 배를 타고 한강하구 물길을

조사하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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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어울림 한마당 격려사.."탈북민들 언젠가 고향 찾을 수 있게 노력"
조명균 통일부 장관 [연합뉴스 자료사진]
 조명균 통일부 장관은 10일 "남북 사이에 흐르던 군사적 긴장이 완화되면,
그 자리에 평화와 번영이 찾아들 것"이라고 밝혔다.

조 장관은 이날 인천시 건설기술교육원 인천 본원에서 통일부 산하 남북하나재단(이사장 고경빈)

주최로 열린 '남북 어울림 한마당' 행사 격려사에서 "이달의 첫날, 인천 앞바다에서 포성이 멈췄고

지난 5일부터는 남북의 인원들이 같은 배를 타고 한강하구 물길을 조사하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러면서 "올해 남북관계가 개선되는 과정에서 우리 모두가 본 것처럼, 평화와 통일은 먼 미래의

거창한 목표가 아니라 서로를 알아가면서 함께 살아가는 과정"이라고 강조했다.

조 장관은 이어 "탈북민 분들이 새로운 고향에 뿌리내리고 언젠가는 그리운 고향을 찾을 수

있도록 정부는 모든 노력을 다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또 "정부는 탈북민들의 삶이 실질적으로 나아질 수 있도록 생활밀착형 지원도 보다

세심하게 살피고 보완할 것은 보완해 나가면서 지원해 나가도록 하겠다"고 덧붙였다.


이렇게 사시구려
 


이렇게 사시구려. 이렇게 사시구려 나이가 들면 설치지 말고 미운소리, 우는소리, 헐뜯는 소리, 그리고 군 소리, 불평일랑 하지를 마소. 알고도 모르는 척, 모르면서도 적당히 아는척, 어수룩 하소 그렇게 사는것이 평안하다오. 상대방을 꼭 이기려고 하지마소. 적당히 져 주구려 한걸음 물러서서 양보하는것 그것이 지혜롭게 살아가는 비결이라오. 돈, 돈 욕심을 버리시구려. 아무리 많은 돈을 가졌다해도 죽으면 가져갈 수 없는것. 많은 돈 남겨 괜한 자식들 싸움하게 만들지 말고 살아있는 동안 많이 뿌려서 산더미 같은 덕을 쌓으시구려. 그렇지만 그것은 겉 이야기. 정말로 돈은 놓치지 말고 죽을때까지 꼭 잡아야 하오. 옛 친구를 만나거든 술 한 잔 사주고 불쌍한 사람 보면 베풀어주고 손주 보면 용돈 한푼 줄 돈 있어야 늙으막에 내 몸 돌봐주고 모두가 받들어 준다오. 우리끼리 말이지만 이것은 사실이라오. 옛날 일들일랑 모두 다 잊고 잘난체 자랑일랑 하지를 마오. 우리들의 시대는 다 지나가고 있으니 아무리 버티려고 애를 써봐도 가는 세월은 잡을 수가 없으니 그대는 뜨는 해 나는 지는 해 그런 마음으로 지내시구려. 나의 자녀, 나의 손자, 그리고 이웃 누구에게든지 좋게 뵈는 마음씨 좋은 이로 살으시구려 멍청하면 안되오. 아프면 안되오. 그러면 괄시를 한다오. 아무쪼록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살으시구려. -좋은글 중에서-


박목월 시인과 그의 아들 이야기


19526. 25 전쟁이 끝나날 무렵 박목월 시인이 중년이 되었을 때

그는  제자인 여대생과 사랑에 빠져 모든 것을 버리고 종적을 감추었다.

가정과 명예. 그리고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 라는 자리도 버리고 빈손으로

홀연히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얼마 간의 시간이 지난 후 목월의 아내는 그가 제주도에서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남편을 찾아 나섰다.

부인은 남편과 함께 있는 여인을 마주한 후 살아가는 궁한 모습을 본 후

두 사람에게 힘들고 어렵지 않으냐며 돈 봉투와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지내라며

두 사람에게 겨울 옷을 내밀고 아내는 서울로 올라왔다.

목월과 그 여인은 그 모습에 감동하고 가슴이 아파 그 사랑을 끝내고 헤어지기로 한 후,

목월이 서울로 떠나기 전날 밤 이 시를 지어 사랑하는 여인에게 이별의 선물로 주었다.

그때 그 시가 바로 이 노래다.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 ~ 너도가고 나도 가야지


한 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 ~ 너도가고 나도 가야지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 두고 홀로 울리라

~ ~ 너도가고 나도 가야지'

노래마다 사연이 있다.


아픔과 고통속에서 진주가 생성되듯 오늘 우리네 삶 또한 성숙 하고

가치있는 삶들이 생성되고 있음을 생각해 봅니다


어 머 니

내가 영리하고

똑똑하다는 우리 어머니!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6.25전쟁이 났다

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머니

말씀 잘 듣고 집 지키고 있어'' 하시고는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가셨다.

그 당시 내 여동생은 다섯 살이었고, 남동생은 젖먹이였다.

인민군 지하에서 한 달이 넘게 고생하며 살아도 국군은 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견디다 못해서 아버지를 따라남쪽으로 가자고 하셨다.

우리 삼 형제와 어머니는 보따리를 들고

아무도 아는 이가 없는 남쪽으로 향해 길을 떠났다.

1주일 걸려 겨우 걸어서 닿은 곳이 평택 옆 어느 바닷가 조그마한 마을이었다.

인심이 사나워서 헛간에도 재워 주지 않았다.

우리는 어느 집 흙담 옆 골목길에 가마니 두 장을 주워 펴 놓고 잤다.

어머니는 밤이면 가마니 위에 누운 우리들 얼굴에 이슬이 내릴까봐 보자기를 씌워 주셨다.

먹을 것이 없었던 우리는 개천에 가서 작은 새우를 잡아 담장에 넝쿨을 뻗은

호박잎을 따서 죽처럼 끓여서 먹었다

3일째 되는 날, 담장 안집 여주인이 나와서 ''(우리가)호박잎을

너무 따서 호박이 열리지 않는다. 다른 데가서 자라!'' 고 하였다.

그날 밤 어머니는 우리을 껴안고 슬피 우시더니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남쪽으로

내려갈 수 없으니 다시 서울로 가서 아버지를 기다리자고 하셨다.

다음 날 새벽 어머니는 우리들이 신주처럼 소중하게 아끼던 재봉틀을

들고 나가서 쌀로 바꾸어 오셨다.

쌀자루에는 끈을 매어서 나에게 지우시고

어머니는 어린 동생과 보따리를 들고 서울로 다시 돌아 오게 되었다.

평택에서 수원으로 오는 산길로 접어 들어한참을 가고 있을 때였다.

30살쯤 되어 보이는 젊은 청년이 내 곁에 붙으면서 ''무겁지. 내가 좀 져 줄께!''하였다.

나는 고마워서 ''아저씨, 감사해요'' 하고 쌀자루를 맡겼다

쌀자루를 짊어진 청년의 발길이 빨랐다.

뒤에 따라 오는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으나, 외길이라서 그냥 그를 따라 갔다.

한참을 가다가 갈라지는 길이 나왔다.

나는 어머니를 놓칠까봐 ''아저씨, 여기 내려 주세요!

어머니를 기다려야 해요'' 하였다.

그러나, 청년은 내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그냥 따라와!'' 하고는 가 버렸다.

나는 갈라지는 길목에 서서 망설였다.

청년을 따라 가면 어머니를 잃을 것 같고 그냥 앉아 있으면 쌀을 잃을 것 같았다.

당황해서 큰 소리로 몇 번이나 ''아저씨! ''하고 불렀지만, 청년은 뒤도 돌아 보지않았다.

나는 그냥 주저앉아 있었다. 어머니를 놓칠 수는 없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 즈음 어머니가 동생들을 데리고 오셨다.

길가에 울고 있는 나를 보시더니 첫 마디가 ''쌀자루는 어디 갔니?''하고 물으셨다.

나는 청년이 져 준다더니 쌀자루를 지고 저 길로 갔는데, 어머니를 놓칠까봐

그냥 앉아 있었다고 했다.

순간 어머니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리고 한참 있더니 내 머리를 껴안고,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에미를

잃지 않았네!. '' 하시며 우셨다.

그날 밤 우리는 조금 더 걸어가 어느 농가 마루에서 자게 되었다.

어머니는 어디에 가셔서 새끼 손가락만한 삶은 고구마 두 개를 얻어 오셔서 내 입에

넣어 주시고는,''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아버지를 볼 낯이 있지!

하시면서 우셨다.

그 위기에 생명줄 같았던 쌀을 바보같이 다 잃고 누워 있는 나를,

영리하고 똑똑한 아들 '이라고 칭찬해 주시더니!

그 후 어머니에게 영리하고 똑똑한 아이가 되는 것이 내 소원이었다.

내가 공부를 하게 된 것도 결국은 어머니에게 기쁨을 드리고자 하는

소박한 욕망이 그 토양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때는 남들에게 바보처럼 보일 수도 있었지만,

어머니의

(바보처럼 보이는 나를)똑똑한 아이로 인정해 주시던 칭찬의 말 한 마디가

지금까지 내 삶을 지배하고 있는 정신적 지주였던 것이다.

헌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이신 박동규님의 글입니다.


이 글 속의 ''어머니''

시인 박목월님의 아내십니다.

절박하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야단이 아니라 칭찬을

해 줄 수 있는 어머니!

그런 어머니의 칭찬

한 마디가 우리 아이들의 인생을 아름답게 변화시켜 주리라 믿습니다.

오늘따라 어머님을 불러보고 싶네요

얼마나 아프셨는지요?

사랑하는 어 머 니~~~~~~~~~.......

 


"NLL 인정 못 해" 北 다시 경고방송..잠잠하다가 왜 또?

      

<앵커>

이런 가운데 북한이 그제(14일) 서해 북방한계선 NLL을 인정하지 않고, NLL보다 더 남쪽에

그어 놓은 자기네 경계선을 넘어왔다면서 경고 방송을 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번 달 들어서는 잠잠했는데 다시 이런 방송을 하는 이유가 뭔지,

김태훈 국방 전문기자가 취재했습니다.

<기자>

북한은 지난 7월부터 9월 말까지 서해에서 NLL이 아닌 자신들이

그은 해상 경계선인 경비 계선을 지키라는 경고 방송을 20여 차례 했습니다.

남북 정상이 평양 공동선언을 한 9월 19일에도 경고 방송을 했습니다.

NLL 존재를 인정한 4·27 판문점 선언에 배치되는 행동입니다.

그러다가 10월부터는 다시 잠잠해졌는데 갑자기 그제 경고 방송을 두 차례 재개했습니다.

[노재천/합참 공보실장 : 북한이 어떠한 주장을 하든 간에 서해 북방한계선은 우리 전우들이…]

합참 국정감사에서 북한이 NLL을 인정하는지를 두고 여야가 논쟁을 벌인지

꼭 이틀 뒤, 마치 남남갈등을 부추기는 듯한 모양새입니다.

[문성묵/국가전략연구원 통일전략센터장 : 자기들이 주장하는 경비 계선을 정당화시킴으로써

앞으로 평화수역 설정 과정에서 자기들의 입장을 관철하기 위한 그런 의도로 보이죠.]

다음 달부터는 서해에 완충 수역이 지정돼 해상사격과 기동훈련이 금지됩니다.

남북 군사협의를 통해 평화 수역 전환을 위한 각종 기준을 논의할 예정인데,

이 과정에서 NLL에 대한 북한의 속내가 확인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가운데 오늘 판문점 자유의 집에서는 JSA 비무장화를 위한 남과 북,

그리고 유엔사의 3자 협의가 열렸습니다.

오늘 회의에서는 병력과 화기, 초소의 철수, 관광객의 JSA 남북 지역 자유 왕래 등

비무장화 세부 사항들이 논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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