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정 집사(서대문대교구) -

모든 것을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

예상치 못한 뇌종양 판정 기도로 용기 얻어
계속된 고난이 믿음의 가정 이루는 지름길 돼

 

우리 집은 전통적인 타종교 집안이었지만 나와 언니는 어려서부터 여의도순복음교회에 출석했다. 나는 온가족이 주일성수하는 친구들이 너무 부러웠다. 친구들 집에 있는 성경이나 기도하는 친구 어머니의 모습, 심지어 교회로고가 그려진 수건까지도 부러웠다. 그 때부터 나는 믿음의 가정을 꾸리길 꿈꾸었던 것 같다.

 나는 한 남자를 만나 가정을 꾸렸지만 예상치 못한 문제에 봉착했다. 남편은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자랐다.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시댁과의 마찰은 심각했다. 그러던 2010년 어느 날 접촉사고가 발생해 병원에 검사를 받으러 갔다가 의사의 말에 깜짝 놀랐다. 뇌에 종양이 발견되었다는 것이었다. 내가 의지할 곳은 하나님 밖에 없었다. 나의 신앙생활을 반대하시던 부모님도 더 이상 반대하지 않으셨다. 이 때 아는 분을 통해 김성자 지역장님을 소개받았다. 김 지역장님은 자신의 아들도 뇌종양이었지만 하나님이 치료해주셨다고 간증하며 하나님도 분명 나를 치료해주실 것이라며 위로해주셨다. 그래서 김 지역장님이 이끌어주시는 대로 말씀을 붙잡고 기도했다. 지역장님과 작정기도 후에는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에 올라가 3일 금식기도를 시작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은 내게 먼저 회개하길 원하셨고 온전히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 것을 고백하도록 이끄셨다. 기도하는 가운데 알수 없는 무서운 소리가 나를 휘감듯 내 안에서 터져 나왔고 지역장님은 그런 나를 붙잡고는 “예수의 피”를 계속 외치라고 말씀하셨다. 영문도 모른 채 나는 “예수 피”를 외치며 나중에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함께 기도한 지역장님을 비롯해 주변 분들이 계속 중보기도해주셨다는 것도 나중에 들을 수 있었다. 일련의 영적전쟁을 경험한 후에는 방언을 받고 성령체험을 하면서 수술에 대한 용기와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나를 살려주실 것을 믿고 수술에 임하는 동안 수술실 밖에서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지역장님의 권면으로 남편이 신앙생활을 결심한 것이다. 하나님은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우리 가정을 구원하셨다. 어려서부터 꿈꾸던 식구가 함께 주일성수를 하게 된 것이다. 더 이상의 부모님의 반대도, 시부모님의 반대도 없었다. 그러나 달라진 환경과 달리 난 뇌에 종양이 완전히 치료받았다는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 병원에서도 완치란 있을 수 없으며 재발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그래서 늘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둘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 내가 걱정했던 그 두려움이 현실이 됐다. 뱃속 아이가 5개월이 됐을 무렵 머리에 종양이 다시 퍼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출산 후 재수술과 방사선치료를 해야한다고 병원에서는 말했다. 또 다시 절망이 우리 가정을 덮쳤다. 계속되는 고난에 힘들어하는 남편에게 나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자고 토닥이고 함께 새벽기도를 하며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했다.
 온 가족들의 축복 속에 둘째 아이를 낳았다. 나도 재수술이 아닌 방사선치료만 진행해도 될 정도가 되었고 남편과 함께 3일 금식기도 후 치료를 진행했다. 이때도 김 지역장님을 비롯해 교구장님과 교구 식구들이 나를 위해 기도해주셨다. 처음 수술을 받았을 때와는 달리 이제는 하나님께서 온전히 나를 치료해주셨다는 믿음을 가지니 두려움이 사라졌다. 신앙생활을 내가 먼저 시작했지만 지금은 남편이 나의 신앙버팀목이 되어줄 정도로 믿음이 자랐다. 우리 부부가 주님만을 의지해 어려운 과정을 이겨냄으로서 신앙이 성숙해지고 아이들도 하나님의 자녀로 믿음을 키워갈 수 있는 것 같다. 남편은 교회학교 교사로, 나는 지역장으로 주님이 맡기신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다. 할렐루야!
정리=정승환 기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태복음 11장 28∼30절)

  아담 이후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삽니다. 나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다고 생각하는 사람 많습니다만 모두 다 각각 다른 종류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갑니다. 남자도 여자도 어른도 아이도 입버릇처럼 피곤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있습니다.  한 어른이 아파트의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주변에 있는 유치원 어린이들이 여러 명이 잔뜩 탔습니다. 그런데 그 중 유치원 어린이가 좌우의 친구를 보고 “야, 인생살이 참 피곤하다.” 그러니 그 어른이 그 말을 듣고 하도 신기해서 어린애가 인생사가 피곤하다니 어떻게 피곤한가? 그래서 “야 너 유치원 학생인데 너 인생이 그렇게 피곤하면 어떻게 되나?” 어린아이가 “부모는 몰라요. 유치원 갔다가 집에 돌아오면 어머니가 피아노 연습하라고 독려를 합니다. 피아노 치고 난 다음에는 좀 놀려고 하면 미술학원에 가라고 밀어 내칩니다. 미술학원에서 겨우 좀 시간을 내어서 집에 돌아오면 영어학원에 가라고 또 밀쳐 냅니다. 인생이 피곤하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어른들은 피곤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데 육체의 피곤함 뿐 아니라 정신적 피로가 대단한 것입니다. 스트레스는 현대 사회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말 중에 하난데 이 스트레스가 원인이 되어 여러 가지 질병에 우리가 걸리게도 되는 것입니다. 옛날과 달리 신경성  병이라든지 시민성 질환이라고 말을 많이 하는데, 그것은 모두다 마음에 뿌리를 둔 병을 말하는 것입니다.
  전도서 1장 8절에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만 피곤할 뿐 아니라 만물이 피곤하다. 모든 피조물들이 피곤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근본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짐인 것입니다.

1.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보시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이라고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항상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걸머지고 살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 인생들은 이 세상에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삽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며 왜 사는가?’ 그 의미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려는 탐심을 아담과 하와가 가졌다가 심판을 받아서 그 속사람이 죽고 육체의 사람만 벌거벗은 채 하나님 앞에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은 저주받은 땅에 피곤하고 고달픈 인생을 사는 것을 매일같이 보고 있습니다. 저주받은 땅에서 사는 고통은 성경에 뚜렷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창세기 3장 16절~19절)고 했습니다.
  아담은 그 아내의 꾐을 받아서 선악과를 따먹었는데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세기 3장 16절~19절)는 준엄한 심판이 내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단하고 피곤한 인생을 살도록 심판을 내린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부부간에, 부모 자식 간에 안력과 갈등을 가져와서 심지어 죽이고 죽기도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4장 8절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모 자식 간에 갈등이 격심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인생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를 많이 씁니다. 그래도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행실들을 하고 삽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이 잘못된 인생사를 고칠 수가 있겠습니까? 

2. 다 내게로 오라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주님께로 나오라고 말한 것입니다. 주님께 오면 주님이 고쳐주시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길을 잃어 버렸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길이 되십니다. 예수님이 우주의 길인데 우리 인생이 길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면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더 많은 공부를 해도, 수련을 해도 더 많이 종교를 만들어야 될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길이기 때문에 예수님 품에 안기면 길을 찾는 것입니다. 예수님 떠나면 길을 잃어버리는 것이고, 예수님 품에 안기면 길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올바른 길에 들어서서 살아야 마음이 평안하고 기쁘고 즐겁고 행복합니다. 그 길에서 벗어나면 평안도 기쁨도 행복도 떠나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길을 잃어버리지 말고 그 중심에 서서 살려면 길 되신 예수님을 모시는 것이 바로 그 길인 것입니다.
  오늘 이 세상에 공부를 많이 해야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수양과 도덕을 많이 닦아야 잘 사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학문의 중심에 선 곳에 들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길인데 예수님을 모시고 있으면 길을 모시고 있고 그럼 내가 이 세상에 바라는 크고 작은 길은 큰 길 되신 예수님 안에서 다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주를 믿는 사람들이 머리가 되고 꼬리 되지 않고, 위에 있고 아래 내려가지 않고, 남에게 꾸어줄 지라도 꾸지 않는 삶을 산다는 것은 올바른 길을 쫓아서 살기 때문에 낭패와 좌절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길을 올바르게 들어서서 가기 때문에 실패하지 않지요. 사람이 길을 선택하다는 것,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실 때에 좌우에 강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같이 있는데, 그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 한사람이 다른 강도보고 말하기를 ‘예수님보고 욕하지 마라. 너와 나는 젊을 때부터 길을 잘못 들었다. 우리 그 길에 대응하는 보복을 지금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예수님은 길을 잘못 든 적이 없고 길을 잘못 들 때도 없다. 주님이시여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임할 때 나를 기억하여 주시옵소서.’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그 사람을 보시고 ‘오늘날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서 만날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은 한평생 길을 잘못 들었으나 마지막에 길을 잘 선택했단 말입니다. 마지막에 길을 잘 선택하니까 다른 때 실수로 선택하지 못한 것은 다 용서되고 사라져 버리고 그는 낙원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 세상에 살면서 크고 작은 일에 올바른 길을 택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간구하고 기도하면 예수님이 길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여러분이 간 길을 밝혀줄 수 있는 것입니다.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마태복음 18장 12절~14절)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길 잃은 양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모두 다 길에 들어서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길을 잃어버린 사람은 그 대가로서 방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길을 잃지 않는 사람은 열매를 맺습니다. 유럽 사람들이 미주에 이민을 갈 때 많은 사람들이 남미를 택해서 갔습니다. 남미에는 금은보화가 많이 나기 때문에 금은보화를 얻기 위해서 남미로 가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또 많은 사람은 북미를 택해서 배를 탔습니다. 그들은 자유롭게 신앙을 가질 수 있게 되기 위해서 예수 잘 믿으려고 북미를 택했습니다. 세월이 지나고 난 다음 누가 길을 올바르게 택했느냐? 예수 잘 믿기 위해서 북미에 간 사람들은 예수도 잘 믿고 올바른 길에 들어서서 성공도 했습니다. 그러나 남미로 간 사람들은 길을 잘못 택해서 예수도 못 믿고 생활도 길을 잘못 들어서 사업이 실패했습니다.
  역사를 보면 예수님께 들어가서 길을 올바르게 택한 사람은 무엇을 해도 성공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험 속에 들어가면 이 땅에 사는 삶 자체를 주님께서 천국으로 만들어서 우리에게 주실 때가 비일비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주님께로 오면 길을 찾게됩니다. 문제의 해결을 얻습니다.
  또 예수님은 진리 자체입니다. 다른 데는 거짓말이 꽉 들어 차 있습니다. 이 세상에 거짓 종들이 나를 따르라고 해서 수많은 사람을 거짓의 구렁텅이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제일 우리가 조심해야 될 것은 정치인들인 것입니다. 정치인들이 거짓말 약속을 산더미처럼 해놓고 난 다음에, 나중에 당선되고 난 다음 “몰라요, 나 잊어버렸는데. 그런 말 내가 했던가?”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치인들 따라 다니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찾으려면 예수님께로 나아가야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체가 진리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나와서 주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주님과 대화를 하고 지내면 우리가 진리에 서서 거짓에 속아 넘어가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에 보면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마귀는 통째로 거짓말인 것입니다. 그 거짓말을 따라가면 모든 것이 거짓투성이인 곳으로 가게 되기 때문에 실패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게로 오라”고 할 때, 예수님은 올바른 길이니까 당신에게 오라고 하고, 예수님은 진리고 거짓이 아니기 때문에 속지 않기 위해서 예수님께로 오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아담과 하와에 범죄로 말미암아 죄를 지은 백성은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로마서 5장 19절)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로마서 5장 21절)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이 되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죽어도 생명인 예수님이 지옥 건너편에서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마귀가 절망적인 세계를 만들어 놓았어도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예수님을 모시면 생명을 모시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수양과 도덕을 닦고 여러 가지 종교를 가진다고 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생명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그냥 모셔드리면 생명을 모시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종교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모심으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을 줄 수 있다는 것이 그 축복인 것입니다. 

3. 행위냐 믿음이냐

  우리가 행위로써 사느냐, 믿음으로 사느냐 이것을 예수님이 우리에게 밝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가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에덴에서 쫓겨나옵니다. 하나님 앞에 쫓겨 나오면서 패션 스토어에서 만든 것보다 훨씬 좋은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해 입고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심판을 내리실 때, 죄를 지은 그들은 영적으로 죽었습니다. 그들이 쫓겨나올 때 무화가 나무 잎으로 앞치마를 만들어서 입고 나왔습니다. 무화가 나무가 앞치마를 만들어 놓으면 햇빛이 비치기 때문에 그냥 말라버립니다. 인간이 수단과 방법을 다해서도 수치스러운 것을 막을 수 없이 풀잎사귀에 옷이 되고 말라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쫓아낼 때 짐승을 잡아서 피를 흘리고 그 가죽을 벗겨서 옷을 만들어 입혔습니다. 거기에는 의미가 깊습니다. 영적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쫓겨나올 지라도 하나님이 나중에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주실 것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며 피를 흘려서 우리 죄를 다 청산하고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벗겨서 아담과 하와에게 입혀주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올 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쏟고 그 예수님의 가죽을 벗겨서 이 세상에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지은 죄를 청산하고, 하나님이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살 수 있게 만들어 주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인간은 벗은 몸으로 아무리 노력을 해도 영원한 추위를 이기지 못합니다. 이것은 인간은 인력으로 율법을 지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10절로 12절에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했으며, 로마서 3장 20절에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수단으로써는 죄를 안 지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자기 힘으로 살 수 없을 것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주시기 위해서 인간으로 내보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심으로 인생들이 일생의 죄를 다 청산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죄 없는 인생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심으로 의롭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로마서 3장 21절~22절)고 했습니다. 저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참 하나님 희한하십니다. 우리 지구에 사는 모든 인류들을 계산에 다 넣어가지고서 인류의 지은 죄악을 예수님에게 떠맡긴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대가가 얼마나 큰지, 예수 그리스도 안 믿는 우리들이 한평생 지은 죄의 대가가 열(10)이라고 가정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피의 대가는 영원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으면 죄를 한 번도 안 지은 것처럼 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부르실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입어서 영원한 의로움을 가지고 나옵니다. 죄를 한 번도 안 지은 것처럼 그런 자격을 가지고 가슴 펼치고 하나님 앞에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은혜라는 것은 이처럼 공짜로 주는 것인데, 그 공짜로 주는 은혜에 의지해서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믿기만 하면 죄가 청산되고, 성령꼐서 우리 속에 들어오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같이 지내면서 죄의 생활은 점점 사라지고, 의와 진리를 따라 살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4. 쉽고 가벼운 멍에를 메라

  예수님께서 말씀하기를 “나의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당시 중동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이 소에 멍에를 걸쳐서 논을 갈거나 밭을 가는데, 어미 한 마리만 있을 때는 모르는데 새끼가 있으면 목에 건 멍에가 보통보다 큽니다. 그 멍에를 어미 목에 걸어 놓고 새끼를 그 멍에 밑에 같이 불러 세우는 것입니다.
  멍에는 엄마 목에 걸려있는데 밖에서 보면 새끼가 멍에를 같이 걸머지고 있는 것 같이 보입니다. 어미 소가 걸어갑니다. 그럼 그 밑에 새끼 소는 어미 따라서 걸어가면 아무 짐도 목에는 얹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어미 소가 잔뜩 몸에 힘을 넣어서 땀을 흘리고 헉헉 거리면서 가는데, 새끼는 엄마 밑에서 멍에를 맨 척만 합니다. 밭을 가는 흉내만 넵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엄마는 자기가 수고하고 무거울 지라도 새끼를 자기 멍에 밑에 불러서 같이 밭을 갊으로 새끼에게 밭가는 법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끼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새끼 멍에 위에 얹어진 것이 아니라 엄마가 다 새끼의 멍에를 자기 목에 걸고 엄마는 그것을 짊어지고 가는데 새끼는 재미있게 평안하게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우리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맡기고 나면 예수님이 당신의 십자가의 멍에에 우리 짐을 다 받아서 짊어지고 “나와 같이 가자”라고 하면 사람들이 “와~짐을 다 짊어지고 가네?” 실상 그 짐은 자기 멍에에 얹어있지 않습니다. 예수님 멍에에 얹어있는 것입니다. 자기 멍에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멍에 밑에 들어가 있으니까. 그래서 예수님과 나란히 같이 걸어갑니다. 예수님이 온유하고 겸비한 마음으로 새끼를 옆에다 세워서 같이 가면 큰 짐을 옮기는 것같이 보이지만 새끼는 수고롭지 않게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앉아계시지만 예수님께서는 “나의 멍에 밑에 들어와서 나와 함께 행해야 된다.”고 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에 짐이 없는 사람 없습니다만, 인생에 그 짐을 다 걸머지고 갈 사람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자기의 짐을 예수님의 멍에에다 얹어놓고 자기는 예수님 멍에 밑에 서서 그리스도와 함께 걸어가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예수님이 다 맡아서 짊어지고, 우리는 편안하게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새끼에게는 쉽고 가벼운 멍에입니다. 새끼의 그 무거운 짐을 엄마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걸머지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함께 걸머지고 믿음으로 순종해서 살아나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를 위한 죽음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죽음을 대신 짊어지고 걸어가는데, 우리가 예수님을 모시고 같이 가면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속에 충만하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27절로 28절에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뜨거운 사랑으로 여러분과 나의 짐을 짊어져주시고, 그 예수님 멍에 밑에 우리가 들어가면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중복음의 멍에를 매고 있는 것입니다. 죄의 멍에, 질병의 멍에, 가난과 헐벗음의 멍에, 죽음의 부활의 멍에, 성령과 동행하는 멍에, 예수님은 그 모든 멍에를 걸머지고 “내 멍에 밑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멍에 속에 들어가면 우리의 짐을 예수님이 다 걸머지고 우리는 그냥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면서 같이 살게 되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는 여러분인데, 주님에게로 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여러분이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인데 여러분의 십자가처럼 느껴집니다. 그런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서 여러분 그냥 건성 얹혀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도 예수님이 매달려 있는데, 예수님의 십자가인 줄 보이는데, 예수님이 여러분을 업고서 십자가에 매달려 있어요. 여러분 십자가에 매달렸다고 생각하지만 업혀있지 여러분이 십자가를 스스로 짊어진 것은 아닌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은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대속해주시고 우리에게 의의 옷을 입혀주십니다.
  갈라디아서 3장 26절로 27절에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의의 옷이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의 의를 전달받아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 의로움 우리의 의로움, 예수님의 치료 우리의 치료, 예수님의 부귀 우리의 부귀, 예수님의 부활 나의 부활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외롭게 지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불러서 당신의 멍에 밑으로 들어오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 내게로 오라. 너희가 그렇게 고생하고 수고하지 말고 내게로 오라. 그리고 내 멍에 밑으로 들어오너라. 네 짐은 전부 다 내 멍에에 던져버려라.”고 주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예수님이 짊어지고 있는 멍에의 지게에 내 짐 다 맡겨 버리고 주님을 나의 주님으로 모시고 기도로써 맡기고 나가면, 주는 겸손하고 온유한 하나님으로 여러분의 짐을 대신 걸머지고 일생을 평안하게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 없이 살 수 없습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범죄한 인간들에게 지워진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청산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그 피로 구원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주님이 베푸시는 오중복음 삼중축복을 누리며 승리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승리의 깃발을 높이들고           

//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말씀과 찬양의방 > 복음송듣고 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여 나를 바치옵니다   (0) 2017.05.10
예수님 살아 나셨네   (0) 2017.05.08
나는 행복한 사람   (0) 2017.04.30
감사로 제사 드리는 자가   (0) 2017.04.27
야곱의 축복   (0) 2017.04.23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샬롬~^^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을 잘 섬기면 복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복을 곧 부귀 영화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요~

그런데 시편을 묵상하던 중 그와 반대되는 말씀이 있네요^^;;


♥시편 82:4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찌니라 하시는도다


왜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 "부귀영화"와 반대되게 가난하고 궁핍한 자는 구원하라 하실까요??

심지어 마태복음에는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9: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그럼 천국 가기위해 우리 모두는 가난해져야 하는 걸까요??


아마도 우리가 생각하는 가난과 부자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가난.부자와 다른 것 같지요??^^


♥마태복음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요한계시록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잠언 23:4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찌어다 


위의 말씀들을 참고로 볼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가난은 심령의 가난으로

하나님의 것을 구하는 것을 말씀하는 듯 하고, 부자는 자신의 사사로운 지혜를 가지고

자부심을 드러내는 것을 말씀하는 듯합니다^^;;


예를 들면 사춘기를 겪는 아이들이 자기의 생각과 자신의 세계가 전부인양 믿고

부모님께 큰소리치고 자신도 다~ 알고 있고, 다~ 알아서 할 수 있다고 하는 모습이

우리 하나님 보시기엔 마치 부자가 아닐까 싶네요^^


제 자신도 가끔은 그랬던것 같아 부끄럽고 하나님께 죄송한 아침이네요~

가난이 뭐가 좋겠냐만은 가난한 자는 구하기 때문에 복!(마7:7참고)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 가난한 자가 되어 봅시다~^^


놀라운 그 은혜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찬송가 405)의 작사자는 존 뉴튼(John Newton(1725-1807)입니다.

그는 한 때 이교도였으며 탕자였고 노예상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변하여 자신이 그토록 오래 동안 부인하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43년간 목사로 헌신하였습니다.

뉴턴이 여섯 살 때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뱃사람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그 다음해에 재혼하였습니다. 그 때부터 뉴튼의 삶은 삐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아버지를 따라 항해를 자주하게 되었습니다. 한 번은 그의 친구와 같이 군함을 승선하기로 약속했는데 그가 너무 늦게 도착했기 때문에 배는 이미 출항하고 없었습니다. 불행하게도 그 배는 얼마 지나지 않아 파선하여 그의 친구와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보전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바리새인과 같은 엄한 신앙생활을 결심했습니다. 그는 자주 금식하며, 채식을 하고 많은 시간을 성경읽기와 묵상 그리고 기도에 드렸지만 얼마 후에는 다시 밤이 새도록 술을 마시며 창기들과 어울렸습니다.

전쟁으로 뉴튼은 군인이 되었고 군함에 자주 타면서 나쁜 행동과 거친 행동을 서슴없이 저질렀고 탈영하다 잡혀 중범죄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혀 반성하지 않고 더욱 나쁜 짓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 포로로 잡혀 15개월 동안 포로생활을 하면서 노예무역의 일꾼으로 일하게 되었고 드디어는 노예선의 선장이 되어 노예를 사고파는 일을 지휘하였습니다.

어느 날 노예무역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큰 폭풍우를 만나 배가 파선하였습니다. 그는 '주여 우리에게 자비를'이라 애타게 부르짖었습니다. 기도의 응답이었던지 배가 파선한지 4주 만에 기적적으로 뉴튼과 선원들은 모두 구조되었습니다. 이 일을 통해 그는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그는 노예무역을 그만 두었고 자신에게 베픈 하나님의 은혜를 전파하기 위해 목사가 되어 43년을 섬겼습니다. 팔십의 나이를 넘기자 그의 시력과 청력 그리고 기억력이 현저히 쇠퇴해졌음으로 한 친구가 그에게 이제는 설교를 그만 두는 것이 좋겠다는 제안하자 그는 음성을 높이며 말하였습니다. "나는 잠시도 멈출 수 없습니다. 아니, 어떻게 옛 아프리카의 신성모독자가 말을 할 수 있는 데도 입을 다물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는 자신의 생애를 되돌아보며 그에게 베푸신 은혜를 감격해 하며 찬송가 405장의 <놀라운 은혜(Amazing Grace)>라는 찬송가를 작시했습니다.

뉴튼은 운명하면서 자신의 묘비에 다음의 글귀를 적어달라고 유언했습니다.
"한 때 이교도였으며 탕자였고 아프리카 노예상이었던 존 뉴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하신 긍휼로 말미암아 용서받고 크게 변화되어 마침내 성직자가 되었으며 자신이 그토록 오랫동안 부인했던 바로 그 믿음을 전파하며 버킹검에서 16년간, 올니교회에서 27년 간을 섬겼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에베소서 2:8

 


신윤복 권사(강서대교구) -

하지정맥류로 인한 두 다리 고통 치유하신 하나님

대교구 리더 훈련 때 성령 임재, 첫사랑 회복
기도할 때마다 응답주신 주께 감사 고백 드려


 1월 26일부터 29일까지 강서대교구에서는 지구역장과 3040예비 리더들을 위한 ‘절대영성 리더훈련’이 있었다. 하지정맥류로 인해 5년 째 고생 중이던 나는 사실 리더 훈련에 참여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앉는 것은 물론 서는 것조차 심지어는 잠을 이룰 수 없이 고통스러워하는 내가, 그 좁은 공간에 오랫동안 앉아 강의를 들어야한다는 게 곤혹이었다. 하지만 다른 교구에서 많이 참석한다기에 고통을 견디기로 마음먹고 훈련에 참여했다.

 여러 강사님들의 말씀은 한결같이 은혜롭고 이후 진행되는 프로그램도 나에게 영적 도전이 됐다. 마지막 훈련 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부활하신 주님을 생각하며 우리 역시 부활 신앙을 회복하는 순간 성령이 나에게 강하게 임했다. 성령은 내가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의 동일한 감격을 나에게 선물했다. 첫 사랑의 회복이었다.

 교회에 처음 출석한 것은 중 3시절, 교회가 서대문에 있을 때였다. 그러나 첫 사랑의 감동이 사라지면서 교회가 여의도로 이전한 뒤 내 신앙은 잠시 주춤거렸다. 그리고 몇 년 후 벌어진 교통사고. 그 사고로 나는 손가락 일부를 잃었다. 가족은 예민한 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봐 늘 노심초사했다. 그런데 사고로 고통스러워야할 나는 정작 어느 때보다 마음이 평안했고, 믿음이 자라기 시작했다. 주님이 늘 꿈을 통해 나를 위로해주시고 안아주셨기 때문이다.

 그 즈음 사촌언니를 따라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에 가서 기도하던 중 나는 강한 성령을 체험했다. 어찌나 강한 성령을 받았던 지 마치 공중을 걸어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현동 굴레방다리 근처에 있던 집에서 여의도까지 매일 밤 철야예배를 다녔다. 통행금지로 버스가 끊기면 마포대교를 걸어 찬양을 부르며 집으로 왔다. 그 시간이 나에겐 은혜의 시간이었다.

 이번 절대영성 리더훈련을 받으면서 그 때의 가슴 절절했던 뜨거움, 예수님을 향한 첫 사랑을 다시 회복하며 많은 눈물을 흘렸다. 그 순간 하지정맥류로 아팠던 두 다리가 시원하게 느껴졌다. 에어컨 바람을 맞을 때 느끼는 시원함이 아니었다. 마치 강한 파스를 붙였을 때 ‘쏴∼’하고 느껴지는 시원함이 다리 위에서 아래로 흐르더니 다리의 고통이 사라졌다. 성령의 치유하심이었다. 할렐루야!

 또 어릴 적 접골원에서 잘못 맞춘 까닭에 아파오기 시작한 무릎의 고통 또한 감쪽같이 사라졌다. 놀라운 기적이었다. 앉았다 일어서도, 오래 걸어도,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심했던 두 다리의 고통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더 이상 두 다리를 파스로 도배하지 않아도 됐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게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기적을 베풀어주신다. 그 하나님을 믿고 기도할 때 하나님은 나에게 좋은 남편을 만나 믿음의 가정을 만들게 해주셨고, 기도할 때 가족 구원을 응답해주셨다. 또 기도할 때 두 자녀를 믿음 안에서 건강하게 키워주셨다. 특히 카투사에 입대했던 아들이 군시절 매주 금요일 여의도에서 철야예배를 드리고 싶다고 기도할 때는 하나님이 자연스럽게 예배드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셨고 우리 가정이 주를 향한 믿음을 잃지 않도록 이끌어주셨다. 이번에 다시 한번 성령의 은혜를 뜨겁게 부어주셨으니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 

 건강을 회복한 뒤 나는 집에서부터 우장산 길을 거쳐 수영장까지 40분간 걸어다니면서 기도한다. 그 시간이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의 시간이다. 더 이상 두 다리의 고통도 없어서 더욱 기쁘다. 기도하며 찬양하다보면 주님과의 관계는 더욱 좁혀지고, 40분이라는 시간은 짧게 느껴진다.

 신앙의 회복, 질병의 치유가 있도록 은혜의 시간을 마련해주신 강서대교구와 대교구장 이대영 목사님께 감사드린다. 교구활동과 교회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은 정말 우리의 영적 성장에 많은 도움이 된다.


정리=오정선 기자



사랑 없는 종교도 있나요?/조용기목사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중략)…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누가복음 10장 25∼37절)

 한 율법 교사가 예수님을 찾아와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 대신 한 가지 비유를 들어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심하게 맞아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았지만 그냥 지나쳐 버립니다. 잠시 후에 레위인이 지나가다가 그를 보았지만 피해서 지나갔고, 그도 역시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마리아인이 그를 발견하고 불쌍히 여겨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싸맨 후 자기가 타고 온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내려가 치료해 주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들려주신 후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좋은 이웃이 되는 길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1.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은 유대교의 예식을 집행하는 중심부였습니다. 그래서 부유하고 유식한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살았습니다. 예루살렘은 지대가 높아서, 사람들은 여리고로 내려다녔습니다. 여리고는 먹고, 마시고, 즐기고, 방탕한 생활을 하는 세속적인 도시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보면 여리고 평지에서 농사를 지어서 예루살렘에서 팔아 돈을 벌어 지갑을 잔뜩 채워 여리고로 내려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지나가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는 강도들이 숨어 있었습니다. 강도들은 그를 덮쳐서 때리고 돈을 빼앗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길을 지나간 사람은 장사꾼만이 아니라 제사장도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갔다는 말입니다. 여리고로 내려갔다는 것은 타락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타락한 제사장이 종교적인 이름으로 불쌍한 사람을 도와줄 리가 없었습니다. 종교는 있어도 사랑은 없었던 것입니다. 강도에게 맞아서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서도 율법의 준행자인 제사장은 상당히 고약한 얼굴로 교훈을 전하고 그대로 내려간 것입니다. 

 그 다음 레위인도 지나갔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본 그는 꾸짖고 그냥 지나가 버렸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교훈을 주고 꾸짖어도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한 사마리아 사람이 이리저리 여행을 하다가 그 사람을 보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을 개라고 부르며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여러 번 외국에 정복당해서 포로로 잡혀갈 때, 포로 잡혀간 그 자리에서 태어난 사람이나 그런 종류의 사람들을 사마리아인이라고 해서 순수한 유대인으로 취급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나서 피투성이가 된 사람을 위해서 기름과 포도주를 부어 응급처치를 해준 것입니다. 당시 광야를 지나다니는 사람은 기름이나 포도주를 상비하고 있었습니다. 거칠어진 피부에 기름을 칠하고, 포도주는 상처난 곳에 병균이 퍼지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긴 옷을 입고 있었는데, 자기의 옷을 찢어 강도 만난 사람의 상처를  감아 묶어 주고, 주막집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주막집은 오늘날 호텔이 되는 것입니다. 그 주막집에 가서 주인에게 돈을 주면서 “이 사람을 돌보아 주고, 내가 돌아올 때 돈이 더 들었으면 그 길에 돈을 더 갚아 주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좋은 이웃이 되겠습니까? 말할 필요 없이 선을 행한 사람이 좋은 이웃인 것입니다.


 2. 누가 선한 사람인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율법주의자가 올바른 신앙을 한다’ ‘레위인 같은 의식주의자가 올바른 신앙생활을 한다’고 말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율법주의자도 의식주의자도 아닌 마음에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는 강도 만난 이웃을 꾸짖으며 심판하고 지나갔습니다. 율법은 법이니깐 법을 어기는 사람들만 쳐다봅니다. 법의 안경을 쓰고 사람을 쳐다보기 때문에 모자란 점을 지적하고 꾸짖는 일을 하는 것이 자신의 본분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7장 3절로 5절은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율법주의자를 대단히 꾸짖는 이유는 율법을 자신이 가지고 다른 사람을 평론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만 잘났고, 상대방은 잘못됐고 나쁜 사람이라며 결점을 드러냅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살피지 않고 이웃만을 살펴서 꾸짖는 것이 율법주의자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율법주의자를 대단히 미워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또 의식주의자는 성전의 의식과 예식을 잘 지키고 행하는데 주력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요사이에도 형식주의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주일에는 교회에 열심히 나가고, 교회에서 모든 행위는 다 따라서 행하면서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자신을 존경하고 이웃을 무시하는 사람이 형식주의자인 것입니다. 내용 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 이런 사람은 레위인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도 강도떼를 만나 맞아서 죽어가는 사람을 비난만 하고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율법주의자, 의식주의자들은 내용이 없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내용이 있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제사장이 될 수 없었습니다. 레위인도 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사마리아인을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인정해 주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종교의 내용으로 보는 자비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형식과 의식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형식과 의식 속에 있는 사랑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13장 8절은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함은 율법과 의식을 다 이룬 것이 됐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3장 10절을 보면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면 율법이 다 이루어지는 것이란 말입니다. 사랑하지 않고 율법을 가지고서 평론만 한다면 그것은 종교가 타락한 것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이 보시는 선한 일


 고린도전서 13장 1절로 3절은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훌륭한 설교, 천사 같은 웅변, 탁월한 지식, 위대한 지도력을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사랑이 없다면 위선자이며, 그 말은 꽹과리 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매우 엄격한 판단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훌륭한 설교를 하고, 천사 같은 웅변을 하며, 탁월한 지식을 가지고 위대한 지도력을 발휘하는 사람을 대단한 인물로 생각하며 존경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내용에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위선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신앙생활은 항상 내용이 있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자비와 사랑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하나님께 인정받는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또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지식을 안고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다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떤 사람을 소개받을 때 보면 어느 대학을 나와 어디서 석사 학위를 받았고, 어느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면서 대단한 경력을 전합니다. 하지만 이런 경력에도 사랑이 없다면 하나님 앞에서는 제로이며, 아무 가치도 없고, 무용지물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구제를 크게 하고 전력으로 봉사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사람도 사랑이 없다면 하나님은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이 어떻게 봉사를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이들은 종교단체에 소속되어 사람을 죽이는 일에도 전력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사이 중동에서 일어난 종교가 자기들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사람을 죽이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이 폭력을 행사하여 두려움으로 사람들을 설득시키려고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런 것들을 하나님께서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4. 참 사랑의 모범


 참 사랑의 모범은 요한복음 3장 16절에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한 일에 쓰러져 버림받아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려주기 위해서 자기의 몸을 버린 이 사랑이 참 사랑인 것입니다.

 심판하고 정죄하기 위한 종교가 아닌 용서와 회개를 하게 도와주고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자꾸 남을 흉보고, 남을 얕잡아 보고, 남의 잘못을 욕하고, 자기가 대단한 신앙인 같이 행동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종교적인 형식만 있지 하나님이 인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루에 일곱 번씩 일흔 번 죄를 지어도 용서해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회개를 하고,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주님이 원하는 사랑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합니다. 주님은 내가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고 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죄인을 정죄하고 죽이는 것이 아니라, 어찌하든지 제2의 기회를 주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회를 주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다시 한 번 시작해보는 거다”라며 재생의 기회를 줘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가 성전으로 끌려와서 예수님 발 앞에 내동댕이쳐졌습니다. 그녀를 잡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모세의 율법에는 간음하다 잡힌 자를 돌로 쳐 죽이라고 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겠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남의 결점을 정죄하고 심판해서 죽이고, 결국에는 버림받게 만드는데,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허리를 굽혀서 손가락으로 무얼 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어깨너머로 글을 본 사람들이 돌을 놓고 그대로 다 도망을 쳐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틀림없이 저들의 감춰진 죄를 손가락으로 적으셨다고 생각합니다. 이 여자를 죽이기 위해서 돌로써 때린다면, 그 다음에는 자기 자신이 돌에 얻어맞아야 될 것이라고 알고, 모두 도망을 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중에 그 여자를 보고 “여자여 고개를 들어 보라. 너를 정죄하는 자가 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예수님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았느니 집에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간음하다가 잡힌 자는 돌로 쳐서 죽이라고 했지만, 예수님은 “나는 너를 정죄하지 않았느니 집에 가서 다시 죄 짓지 마라”고 말씀하신 것은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죄 짓는 사람을 잡아서 형벌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다시 회개하고 변화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줄 터이니 그렇게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이 다른 종교와 다른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에 나와서 조금만 잘못하면 교회법을 동원하든지 국가법을 동원해 심판을 하는 것입니다. 정죄하고 심판합니다. 그러고 난 다음 “내가 위대한 일을 했다. 내가 훌륭하다”고 자화자찬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에 계신 예수님은 “다시 기회를 줘야 된다. 난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회개를 시키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해 변화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일은 오늘보다 좋아지고, 다음 달은 금번 달보다 좋아지고, 내년에는 금년보다 좋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릴 때 이웃의 잘못을 비평하고 정죄하지 마십시오. 이웃을 위해서 기도해주고 변화 받아 새사람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데 도움을 베푸십시오. 이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8절은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죄를 덮어서 그 사람이 재기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또 에베소서 4장 32절에는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용서를 해야 제2의 기회를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안 해주는데 어떻게 제2의 기회를 가질 수 있습니까? 시퍼렇게 율법의 칼날을 세워서 심판을 내린다면, 그곳은 도살장이지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남을 심판하면 자기도 똑같이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서 심판과 정죄를 하지 말고, 제2의 기회를 가지도록 용서를 해주고 힘을 돋우어 주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데 힘을 써줘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이유는 독생자가 인생의 죄악을 다 짊어지고 자기의 고통을 끝까지 당하고 청산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회개하고 재기하기 위해서 주께 나오면 주님은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없는 사랑으로써 주님이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희망이 없는 사람은 버림받은 사람이지만, 아무리 죄악이 가득찬 곳에 살더라도 희망을 가지고 앞으로 나가기를 바라는 자는 주님이 끝까지 밀어주고 도와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어찌하든지 주님의 은혜를 받아서 변화받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아질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무도 버리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재기해서 새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이 그 기회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찌하든지 그 기회를 주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네 눈에 있는 들보는 못 보고 눈에 티가 있는 이웃을 정죄하느냐?” 과장하게 말씀한 것이지만 내 눈에 들보 같은 잘못을 가지고 있으면서 조그마한 잘못을 가지고 있는 이웃을 심판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모여서 심판을 할 수밖에 없을 때는 언제나 희망을 주는 심판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희망을 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이 되어서 이 세상에서 상처 입은 사람을 교회로 잘 이끌어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재기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사회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는 것은 교회가 사람을 새 사람 만들 수 있는 처소가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보혜사 성령님이 지금 우리 속에 들어오기를 원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령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이고, 의지하여 성령님을 경배하고, 믿고, 따라 나가면 성령님은 우리들을 변화시켜서 새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내 힘과 능으로 되지 않지만, 성령님은 가능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모여서 주께 감사하면 성령께서 그 마음에 임하여서 훌륭한 변화된 사람이 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로서 충실한 성도가 되어 가정과 교회와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죄악이 만연한 이 땅에 예수님 보혈의 사랑을 통해 믿는 자들에게 희망과 위로를 주심을 감사합니다. 세상의 상처받은 자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위로자가 될 수 있도록 성령님 도와주옵소서. 무엇보다 이 땅에 예수님의 향기를 전하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나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 이기록 목사  추평교회 


아사야 43:1~3


납달리 지파 사람인 토빗은 평생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사람들이 송아지

를 만들어 제물을 바칠 때도 토빗은 첫 열매와 십일조를 정성껏 하나님께 바쳤습

니다.또한 율법에 따라 고아와 과부들, 이방인들을 돌보는 일에 정성을 다했습니다.


그의 경건한 삶이 위기를 맞은 것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해 포로로 살게 된 후부터

였습니다. 나라는 망하고 동포들이 소망 없는 삶을 살 때에도,토빗은 하나님께 회복

시키실 날을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예배드리고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더

큰 시련이 닥쳐왔습니다.눈이 보이지 않게 된 것입니다.이때 토빗은 이렇게 기도했

습니다."주님, 당신께서 하신 일은 모두 의롭고 당신의 길은 다 자비와 진리입니다.


이제 당신께서 좋으실 때로 저를 다루시고 명령을 내리시어 제 목숨을 앗아 가게 하

소서. 그리하여 제가 이 땅에서 벗어나 흙이 되게 하소서." 오늘 본문은 나라를 잃고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에게 아사야 선지자가 전하는 말씀입니다.


삶이 험악하고 괴로워, 차라리 흙이 되는 것이 좋겠다는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

입니다."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깨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스스로 죽지 못해 날마다 죽여 달라고 기도하는 이에게 하나님은 다정스런 말투로 두

번이나 부르십니다. 그리고 속삭이십니다. "너는 두려워 말라. 너는 내 것이라.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라."


우리는 몸과 영혼이 내 것이라고 쉽게 착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너는 내 것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견딜만한 고난만 주십니다. 우리가 주님 것이라는 시실

을 깨닫게 되면, 우리에게 닥친 고난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정검다리가 됩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 정금같이 단련될 것이고, 마침내 새벽부터 밤까지 마음에 조금의

두려움과 공허함도 없는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될 것이기 때문입니다.토빗의 말년이 그

것을 증명합니다. 그의 말년은 은총으로 가득 찼습니다.천사의 도움으로 다시 보게 되

었고 수명을 다 채우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하나님 곁으로 갔습니다.


* 어렵고 힘들다 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것임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기도

하나님, 내가 내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것임을 이억하게 하소서. 우리에

게 오는 그 어떤 시련도 우리를 해칠 수 없음을 알게 하소서. 시련을 통하여 거룩한 존

재로 거듭나, 나를 지으신 하나님의 신성한 이름을 높이게 하옵소서.예수님의 이름으

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기록 목사  추평교회


나는 행복한 사람                        

            


 

 


'말씀과 찬양의방 > 복음송듣고 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수님 살아 나셨네   (0) 2017.05.08
승리의 깃발을 높이들고   (0) 2017.05.02
감사로 제사 드리는 자가   (0) 2017.04.27
야곱의 축복   (0) 2017.04.23
반드시   (0) 2017.04.20

중국의 어느 버스 안에서 일어난 실화

 


(감동이라기보다 충격)

 

중국의 어느 시골마을 버스안에서의 일입니다.

예쁘게 생긴 여자를 험악하게 생긴 두 건달이 희롱합니다.

버스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아무도 모른체합니다.

급기야 두 건달은 운전사에게 정지할 것을 명하고 말을 듣지않자 운전사를 테러합니다.

그리고 두 건달은 버스에서 여자를 강제로 끌어내려 버스 옆 풀밭으로 데려가 돌아가며 강간합니다.
버스안에는 건장한 남자도 수십명 있었지만 누구 한 사람도 정의롭게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냥 차창너머로 슬금슬금 눈치보며 그 광경을 구경만합니다.

왜냐하면 남의 일에 참견했다가 칼이라도 맞을까봐 두려웠겠죠..

그때, 보다 못한 한 청년이 나서서 건달과 싸웁니다.

건달들은 청년을 칼로 무참히 찌르고 달아납니다.
여자가 울면서 옷을 차려입습니다.

여자가 버스에 오르자 아무도 말이 없습니다.

창피한건 아는지 여자와 눈길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모두가 무관심한척 창밖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운전사는 테러당해서 운전할 수 없고 여자가 헝클어진 상태로 운전석에 앉습니다.
그때, 피를 흘리며 청년이 차에 타려하자 여자가 소리칩니다.
“왜 남의 일에 참견하시는 겁니까?”

라며 그 여자는 청년에게 화를 내고 버스문을 닫아버립니다.
그리고 여자가 운전하는 버스는 출발합니다.

청년은 아픈 몸을 이끌고 시골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다 자동차 사고현장을 목격합니다.
교통을 통제하는 경찰관이 말하길 버스가 천길 낭떠러지에 떨어져 승객이 모두 사망한 사고라고합니다.
멀리 낭떠러지를 바라보니 방금 자신이 타고 왔던 그 버스였습니다.

버스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죄를 짓지 않았지만 다시 보면 모두 죽어야 할 만큼 큰 죄를 지은 사람들입니다.

오직 살만한 가치가 있던 그 청년을 버스에 타지 못하게 하고 그 여자는 승객들을 모두 지옥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이 글을 읽고있는 우리 모두는 그 버스안의 승객은 아닌지 곰곰히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