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 (중략) …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로마서 8장 32∼39절)
사람들은 누구나 고통을 피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 이후 고난과 시련의 삶은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가 없습니다. 왜 끊임없이 고난이 다가오는가를 마음으로 이유를 묻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고난의 유익을 알게 된다면 모든 고난을 이겨낼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1. 불순종과 고난
불순종이 고난을 가지고 오는 동기가 됩니다. 야고보서 1장 13절로 15절을 보면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욕심이 들어오면 시험을 당하게 됩니다. 우리가 경쟁하는 것은 괜찮지만, ‘저 사람이 망해야 내가 우뚝 서겠다. 저 사람은 망하고 나만 성공해야 된다’ 등의 잘못된 경쟁 심리는 죄를 짓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반함으로 불순종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늘 받아 왔습니다. 요나 시대에는 앗수르가 세계를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앗수르에게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요나도 앗수르가 망하기를 학수고대했습니다. 그러나 요나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내렸습니다.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에 가서 회개하라고 전하라. 회개하지 않으면 40일 만에 수도는 무너지리라!’ 그 말을 들은 요나는 니느웨 정 반대편에 있는 다시스로 도망쳤습니다. 요나 1장 3절에는 “그러나 요나가 야훼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야훼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니느웨의 정 반대인 다시스로 가려고 배를 탔을 때, 요나는 순조롭게 하나님을 피해서 떠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다 한가운데서 갑자기 비바람이 치고 폭풍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배가 결국 파선 직전에 이르게 되자 선장과 선원들이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온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하나님께 잘못을 저지르고 도망치는 사람이 배에 타서 풍랑이 있는 것 같다면서 제비를 뽑았고, 요나가 제비를 뽑았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을 피해 배를 탄 것이라고 말하자 선장과 선원들은 요나에게 하나님께 운명을 맡긴다며 바다에 던져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가 물에 빠져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말씀을 증거 하라고 사명을 다하라고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요나가 천지와 만물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서 도망을 치고 불순종의 삶을 살다가 이 큰 고난을 당한 것입니다. 요나 1장 11절로 12절에 보면 “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하니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요나가 불순종을 회개할 때까지 바다가 흉용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제일 먼저 생각해볼 것은 ‘내가 무슨 하나님의 뜻을 거역했는가? 무슨 명령에 불순종했는가?’ 그것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불순종을 하면서 고통에서 나오기 위해서 몸부림을 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씨름에서 이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2. 고통은 회개케 하는 도구이다
말씀과 기도를 멀리하는 자에게 고통을 주어서 회개케 합니다. 시편 89편 30절로 32절에는 “만일 그의 자손이 내 법을 버리며 내 규례대로 행하지 아니하며 내 율례를 깨뜨리며 내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내가 회초리로 그들의 죄를 다스리고 채찍으로 그들의 죄악을 벌하리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 119편 67절에 보면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불순종도 하나님이 고난을 보내는 이유가 되지만, 말씀과 기도를 게을리 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고통을 보내서 회개하고 더욱 열심히 하나님을 찾게 만들게 하려는 것입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 12:6∼8) 하나님이 참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잘못하면 징계를 하신다는 것입니다.
제가 기도를 할 때 사탄이 “너는 하나님 뜻에 따라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너에게 채찍을 때릴 뿐 아니라 너 같은 사람 기도에 응답하지 아니한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 자꾸 괴로움을 주는 것은 너는 하나님 앞에 나와서 응답받을 수 있는 기도를 못 한다. 하나님이 그만큼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라고 속삭일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성령께서 깨우쳐 주신 것이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고 변화된 우리들은 아들이 되었기 때문에, 마음 놓고 “아버지”하고 달려가면 오는 것을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에도 보면 탕자가 아버지께로 회개하고 돌아오니깐 아버지가 뛰어가서 탕자를 끌어안고 목을 맞추어서 “내 아들아 잘 돌아왔다”라고 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 왔으니 말씀을 듣고 우리가 회개하고 나가면 하나님이 이 자리에서 우리를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돌아온 우리를 위해 “제일 좋은 옷을 갖다 입혀라, 반지를 끼워줘라, 신발을 신겨줘라, 살찐 송아지를 잡아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로 다 형용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생각할 때 그 사랑을 생각하고 감격하며 하나님께 나가야 될 것입니다.
3. 고통은 축복을 받는 그릇이다
고통은 우리가 축복을 받기 위한 그릇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편 40편 1절로 2절을 보면 “내가 야훼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기다리고 기다린 사람을 기가 막힐 수렁에서 웅덩이에서 건져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견고하게 되기 위해서 고통을 주셨으나, 회개하고 나오면 하나님께서 품어주는 좋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12절을 보면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으며, 시편 118편 5절에는 “내가 고통 중에 야훼께 부르짖었더니 야훼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에게 나가면 고통과 축복이 앞뒤를 따라오면서 우리를 이끌어갑니다.
고통이 다가오는 것은 믿음의 그릇을 크게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또 축복이 다가오는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중심으로 서서 파괴된 심장, 파괴된 심정이 아닌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에게 축복으로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스위스의 피에르 렌치니크 박사는 ‘고아가 세계를 주도한다’라는 논문을 썼는데, 세계사에 큰 영향력을 끼친 300명 중 60%가 고아였다는 것입니다. 알렉산더 대왕, 줄리어스 시저, 루이 14세, 조지 워싱턴이 다 고아였고, 루소는 태어나자마자, 파스칼은 3살 때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또 이스라엘 건국의 어머니로 불리는 골다 메이어도 고아였습니다. 아이들에게는 부모를 잃는 것만큼 큰 시련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고난을 오히려 삶의 에너지로 바꾸었기 때문에 세계사에 큰 족적을 남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스위스의 정신의학자인 폴 투르니에는 “슬픔이 크면 클수록 그 슬픔이 만들어내는 창조적 에너지는 더욱 크다”고 말한 것입니다. 고난을 당할 때 절망하지 말고 고난을 창조적 에너지로 바꾸어 놓아야 합니다. 그러면 꿈이 현실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의 길을 걸어갈 때 꿈을 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난이 와도 꿈을 품고 하나님 앞에 나가면 큰 꿈을 이루는 에너지가 된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올바르게 이기면 큰 성공을 하고, 잘못하면 자신도 망하고 나라도 망칠 수 있습니다. 우리 세대에 사는 분들 중에서 대통령이 국민들의 마음에 이처럼 깊은 상처를 준 것은 처음입니다. 이것은 회개하고 하나님을 붙잡고 나섰으면 이런 일들은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주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 국가와 민족이 농락당했다고 밖에 뭐라고 할 말이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 국민 전체가 큰 고통 속에 빠져 있는데 이때 정신 차리지 않으면 큰일입니다. 그래도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옛날에는 데모를 하면 서울시가 온통 거름더미가 되고 파괴적인 모임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집회를 보면 50만 명이 모였는지 100만 명이 모였던 지간에 상관없이 조용하게, 질서 정연하게 데모를 한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 ‘아 이제 그릇이 되었구나. 우리 한국이 세계 국민들 앞에서 고난을 받되, 고난을 능히 소화할 수 있는 꿈을 이룰 수 있는 국민이 되었구나”라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데모가 우리 국민의 소양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만한 깊이가 있는 국민이 되었습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4. 고통은 하나님을 찾게 한다
교만하고 자만하면 하나님이 채찍으로 때려서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고 나가야 힘을 얻을 수 있지 교만하고 오만해서 자기 인간의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55장 6절로 7절을 보면 “너희는 야훼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야훼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 하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잠언 8장 17절을 보면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도와주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면 바울은 셋째 하늘에 올라가서 주님을 만났었기 때문에 그 영광을 말로써 표현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울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서 행하게 하기 위해 가시를 주셨습니다. 바울과 같은 위대한 사도가 그 가시가 떠나가기를 세 번이나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네가 가시가 있어 교만하지 않아야 은혜를 보관할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바울이 빌립보의 신자들에게 편지 썼을 때 ‘내가 복음을 전도해서 너희가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 나를 사랑해서 할 수 있으면 너희 눈이라도 뽑아서 내게 주려고 했다느냐? 그런데 이 짧은 세월에 벌써 나를 배반하고 등을 돌리느냐?’라는 탄식스러운 편지를 썼는데, 바울 선생은 아마도 안질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눈이 아주 나빴는지 빌립보 성도들이 자신들의 눈을 뽑아서라도 바울에게 주고 싶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또 바울은 편지를 쓸 때 자기가 직접 편지를 쓴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전부 다른 사람이 받아쓰기를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고통을 통하여 교만과 오만한 마음을 빼앗아 겸손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교만하지 않고 자만하지 않게 만들었다는 것을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55장 6절로 7절에는 “너희는 야훼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야훼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 하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죄로 인해 고난당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오라 우리가 야훼께로 돌아가자 야훼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 6:1) 아모스 선지자도 “야훼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암 5:4)고 외친 것입니다.
개인이든 나라든 고난을 만났을 때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살 수 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이 지금 해야 될 일은 하나님을 찾는 일인 것입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라 구하는 이마다 구할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라”고 했으니 우리가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면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이때 들으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이 문을 열어주시면 안 될 일도 다 되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이 온통 혼란스럽지만 우리 국민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마음속에 꿈을 품고 있으면 성령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역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귀하게 발전하고 향상하는 것입니다.
5. 고통은 영적인 힘을 기르게 한다
고통과 괴로움을 극복함으로 영적인 힘을 얻습니다. 고통을 당하고 극복한 사람이 기도도 잘하고 영적인 힘이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2절로 4절에는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시험을 당할 때, 그 고난을 참으면 그것이 인격적인 영적 힘이 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10절에는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히브리서 12장 11절은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통, 괴로움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성령이 같이 계시는 분에게는 어떠한 면에서도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대나무가 강하고 곧게 위로 뻗어 자랄 수 있는 이유를 아십니까? 폭풍우가 와서 다른 나무들은 막 쓰러져도 대나무는 안 쓰러집니다. 갈수록 푸르청청하게 자라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대나무에는 ‘마디’가 있기 때문입니다. 대나무는 환경이 나빠서 잘 자라지 못할 때, 고통스러울 때마다 마디를 만든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라고 또 마디를 만듭니다. 그 마디가 대나무가 쓰러지지 않고 마르지 않게 만들어주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고통이라는 것은 우리 예수 믿는 사람에게 기도하고 있는 마디를 만들어줍니다. 그 마디를 많이 가진 사람이 여간 어려움을 당해도 파멸되지 않습니다. 인생이 더 이상 성장하지 않고 멈춘 것처럼 느껴질 때 낙심이나 포기하지 말아야 됩니다. 멈춤의 시간에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가면 영적으로 더 강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고난 없이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고통의 크고 적음은 작은 마디일 뿐, 모두가 고통을 겪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똑같이 고통을 당해도 어떤 사람은 주저앉고 어떤 사람은 용수철처럼 다시 일어납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회복탄력성’이 높다고 합니다. 회복탄력성은 사랑에서 나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랑이 고난을 이기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고난이라도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는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모든 고난을 넉넉히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하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 나라와 이 민족을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국민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마음속에 꿈을 품을 수 있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성령께서 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