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을순 권사(기도원교구) - 기도의 성산 오산리 기도원서 되찾은 나의 건강
오중복음 삼중축복 믿음 갖고 열심히 기도할 때
이유없이 시리고 아팠던 등의 통증 깨끗이 나아

 2008년 1월 갑자기 뇌경색이 발병하면서 왼쪽 팔에 마비가 왔다. 몸도 점점 약해지면서 다리의 힘이 빠져 걷는 것조차 힘들었다. 자녀와 지인들의 걱정 속에서 나는 하나님의 치료를 믿고 새벽예배를 드리며 기도에 힘을 쏟았다. 그러던 중 2013년에는 대상포진까지 발병했다. 마음의 실망과 몸의 고통은 말로 다할 수 없이 극심했다. 대상포진으로 인한 수포가 등과 복부에 퍼지면서 혼자서는 몸을 움직여 앉거나 설 수 없는 형편이 됐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증상이 또 나타났다. 등이 시리더니 쐐기에 쏘이는 듯한 통증이 일어나 그 고통에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다. 한 여름에도 추위가 느껴져 긴 옷, 때론 두꺼운 옷을 착용해야했다. 뚜렷한 원인도, 치료방안도 찾을 길이 없었다. 그저 기도 밖에 방법이 없었다. 그때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이 생각났다.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이면 이른 아침 안양 집을 나섰다. 여의도에 와서 기도원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타면 마음이 편안했다.

 육신은 고통스러웠지만 하나님이 반드시 치료해 주실 것을 믿고 바라고 생각하며 화요일과 목요일마다 금식 기도했다. 그리고 입술로는 “더 이상 질병은 나와 상관이 없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나는 깨끗이 고침받았다”고 선포했다. 부활의 복음, 신유의 복음 등 순복음의 오중복음과 영혼이 잘 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해지는 삼중축복을 바라보고 기도원을 찾아 기도하면서 차츰 내 몸에는 변화가 일어났다. 뇌경색으로 인해 불편했던 몸이 호전됐다.

 나는 시력이 좋지 않아 26년간 안경을 착용했다. 그런데 몸이 약해지면서 시력 또한 나빠졌다. 안약을 투약해도 눈이 뻑뻑하게 느껴졌고 시야가 흐리며 아팠다. 이 때문에 성경 읽는 것이 무척이나 힘들었다. 그래도 기도를 쉬지 않고 더욱 건강해진 내 모습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며 쉬지 않고 기도했다.

 올 여름 어느 화요일, 기도원에서 예배를 드리던 중 당시 기도원장이셨던 함덕기 목사님의 설교 말씀을 들었다. 목사님은 설교를 마치신 후 신유기도를 하시면서 “눈이 뻑뻑하고 아픈 사람이 있는데 이 시간 깨끗하게 고침받았다”고 선포하셨다. 그 순간 “아멘”하고 고백하자 아프고 흐릿했던 눈이 깨끗해졌다. 한 달 뒤인 9월 기도원에서 함덕기 목사님을 만나 그동안의 일을 말씀드리며 예배 중 눈이 낫는 기적을 경험했다고 말씀드렸다. 함덕기 목사님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씀하시고는 이번에는 시리고 아픈 나의 등을 안수하시며 간절히 기도해주셨다. 그런데 그 순간 그토록 쑤시던 등의 통증이 신기하게도 감쪽같이 사라졌다. 할렐루야! 지난해 이맘때 즈음 나는 등이 시려 두꺼운 솜옷을 입어야 했다. 하지만 등의 통증이 사라지면서 지금은 얇은 티 하나만 입어도 몸에서 열이 날 정도이며 정상적인 몸이 됐다.

 기도원에서 기도하면서 나는 뇌경색의 고통도 사라졌고, 대상포진으로 인해 생긴 흉터는 작은 흔적 하나만 남기고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행하신 기적이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이 나는 “내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고백을 하게 된다.

 지금도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이면 기도원으로 향한다. 나를 고쳐주시고 살려주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다. 나는 기도원에 가면 기도원을 찾은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한다. 내가 응답받은 것처럼 그들이 ‘절대 믿음’ ‘절대 희망’을 갖고 문제 해결을 위해 기도할 수 있도록 중보하기 위함이다. 나에게 기도를 부탁한 이들을 위해서도 간절히 기도한다. 기도원이 더욱 은혜의 성산이 되도록, 여의도순복음교회가 더욱 성령으로 충만해지도록 기도한다. 오직 감사와 찬송을 하나님께 올려드린다.
 


성령의 열매(III) - 충성, 온유, 절제/이영훈목사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5장 22∼23절)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있는데 첫 번째 그룹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특징으로서 사랑과 희락, 기쁨, 화평, 평안이고, 두 번째 그룹은 나와 이웃 간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열매의 특징으로 오래 참음, 자비, 친절함을 베푸는 것, 양선, 착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그룹은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특징으로서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1. 충성(Faithfulness)

 일곱 번째 충성의 항목에 대해서 우리 함께 은혜 나누기 원합니다. 이 충성이란 말의 헬라어는 ‘피스티스’인데 이는 ‘믿음, 신실함’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충성이라는 것의 의미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믿음으로 최선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 하나님께 인정받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충성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사람 앞에 잘 보이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래서 때때로 진실하지 않게, 그저 그 사람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그저 그 사람이 지금 높은 위치에 있기 때문에 잘하는 척하는 모습을 보일 때가 참 많습니다. 이것은 충성이 아닙니다. 이것은 위선의 모습입니다. 진정한 크리스천의 충성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믿음의 자세로 최선을 다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자들에게 복을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 12절은 설명합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충성되이 여겨 직분을 맡기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 직분은 그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직분을 주시고, 기쁨과 감사함으로 믿음의 자세로 충성하도록 사명을 부여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직분은 계급장이 아닙니다. 섬김의 직분이요, 영광스런 직분입니다. 평신도로 있을 때는 불평도 하고 부정적인 얘기도 때때로 할 수 있고, 또 감정을 다 표현해서 소리치고 다투고 싸울 수 있어도, 일단 제직이 되면 그때로부터는 그것을 하면 안 됩니다. 왜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교회를 섬기기 위해서 세우신 직분자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직분자의 첫 출발점, 첫 걸음이 집사 직분인데, 집사는 헬라어로 ‘디아코노스’라 해서 ‘섬기는 자, 하인’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집사님이 되면 교회의 머슴이 되고 하인이 되는 것입니다. 궂은 일은 다 앞장서서 하고, 열심히 교회를 섬기고, 예배가 은혜롭게 하는 데 충성을 다하는 직분이 바로 집사 직분입니다. 집사님 직분으로 섬기다가 “이제는 종신토록 교회를 위해서 충성하는 일꾼이 되라”고 해서 세우는 직분자가 장입니다.

 장로 직분은 아주 영광스러운 직분입니다. 이제는 교회 부흥을 위해서 일생을 바쳐 헌신하는 직분을 주신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의 대표로 세운 직분입니다. 그래서 그 직분자들로 인해서 교회가 든든히 서고, 교회가 부흥하고, 하나님의 큰 영광을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여의도순복음교회도 너무나 훌륭하신 장로님들을 많이 세워져 각 부서에서 충성, 헌신, 봉사하여 교회 모든 행정적인 것이 아름답게 잘되고 있고, 부서 부서에서 잘 섬겨주셔서 교회가 화목하고 부흥하고 성장하고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직분을 맡겨주신 이는 우리 주님이시고,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충성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가는 교회의 직분자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달란트 비유로 그 맡은 자에게 충성해야 될 것을 가르쳐주셨는데, 한 사람에게 한 주인이 먼 곳을 가면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열심히 나가서 일을 해서 다섯 달란트를 더 남기고, 또 한 사람도 나가서 열심히 일해서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이 두 달란트를 남겼는데,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나가서 일을 하지 아니하고 땅에 파묻어놓고 놀았습니다. 주인이 돌아와서 이제 그 하인들이 일한 것의 보고를 받고 그들을 평가하는데,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이 다섯 달란트 남긴 사람이나,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이 두 달란트 남긴 사람이나 칭찬이 똑같습니다.

 마태복음 25장 21절을 보면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주님 앞에 설 때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칭찬받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게을러서 이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고 그저 놀고먹었던 한 종은 주인으로부터 책망을 받고 심판을 받았습니다. 마태복음 25장 26절입니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므로 우리는 늘 ‘하나님 앞에서의 의식’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구약의 요셉은 야곱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말씀을 잘 순종하고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충성된 자녀였고, 그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노예로서 팔려갔지만 노예로서 그 자리에서 열심히 충성해서 주인에게 인정을 받았고, 또 모함을 받고 죄수로 그가 감옥에 들어가게 됐지만 그곳에서도 맡겨진 모든 것에 충성하여서 간수장이 그를 높여 감옥 전체를 돌보게 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때가 되매 높이셔서 불과 서른 살의 나이에 당시 최대 강대국인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게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는 총리가 되어서도 교만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충성, 헌신하여서 온 애굽 사람과 이방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어디를 가든지 충성하고 최선을 다하고 헌신함으로 말미암아 인정받고 칭찬받고 장차 주님 앞에서 설 때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칭찬 받는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녀들은 자녀들로서 자녀의 자리에서 충성해야 되고, 부모는 부모의 자리에서, 주부는 주부의 자리에서, 직장인은 직장인의 자리에서, 경영인은 경영인의 자리에서, 전문인은 전문인의 자리에서, 예술인은 예술인의 자리에서 충성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단 한 번도 게으른 사람들에게 복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성공은 충성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선물인 것입니다.

 나이가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있는 곳에서 나에게 맡겨주신 일에 최선을 다하고 충성하면 그것이 하나님께 인정받는 길이요, 복 받는 길인 것입니다. 모세는 120세까지 충성했습니다. 히브리서 3장 5절에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랬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 1절, 2절에 우리에게 주님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우리에게 주님께서 맡기신 하나님의 비밀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가 되신다고 하는 복음의 비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가는 그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간에 이 복음의 비밀을 전해야 됩니다.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가 되시고, 당신의 구세주가 되십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당신의 삶이 변화되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로 축복받은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 귀한 복음을 전해야 될 것입니다.

 지난 8월 17일 날 제5회 성천상, 아주 귀감이 되는 의료인들에게 주는 상을 받은 91세 국내 최고령 의사 한원주 권사님이 계십니다. 소망교회 권사님이신데요, 평생 2/3, 60년의 그 긴 시간을 의사로, 그 중에서도 40년이 넘는 세월을 소외된 이웃을 위해 인술을 베풀며 살아오신 귀한 권사님이십니다. 3대째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아버님은 독립운동가요, 의사였습니다. 경성여자의학전문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가서 인턴, 레지던트를 거쳐 미국 원호병원 등에서 10년간 근무하고 나서, 한국에 돌아와 1968년 병원을 열게 되었는데,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다고 한 사람이라고 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오는지,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쁨도 잠깐. 1979년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고백합니다. “남편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어요. 인생의 의미를 잃어버렸어요. 기도를 해도 ‘이게 아니잖아요. 하나님, 정말 이럴 수 있습니까’라는 하소연부터 터져 나왔어요. 하지만 그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왜 나를 의사의 길로 인도하셨을까’부터 되짚어보게 만드시더군요.”

 문득 아버님이 생각났습니다. 아버님은 독립운동가면서 의사였는데 일제 치하에서 병든 사람들을 치료하는 일에 앞장서서 결핵 퇴치 운동, 또 콜레라 예방 운동, 한센병 환자 돌보기,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환자들 돌보기, 또 두메산골에 의료시설 없는 곳에 무료 진료를 하는 일에 모든 노력을 기울이셨던 것을 기억하고, ‘이것이 나의 사명이다. 나도 아버지처럼 내 주변에 돈이 없어 병원에 못 오는 사람, 여러 가지 형편이 힘들고 어려워서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사람들을 돌보는 삶을 살아야 되겠다.’ 그래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28년 동안 도시 영세민, 노숙자등 어려운 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람에겐 생활비도 지원해주고 장학금까지 지원해주었습니다.

 82세가 되던 해 또 다른 사명을 맡습니다. 자신처럼 황혼 앞에 선 노인 환자들을 섬기는 일입니다. 재활 요양 병원과 종신 계약을 했습니다. ‘내가 병원을 여기 서서 일할 수 있을 때까지, 마지막까지 여기에서 일하다가 세상을 떠나겠다.’ 그의 그 귀한 삶이 알려져서 8월 17일 날 상을 받게 되었는데요. 이런 고백을 합니다.

 “제가 가진 것을 나누기 위해 의사로서 소임을 다 했을 뿐인데, 뜻하지 않게 영예로운 상을 받게 됐습니다. 제가 일할 수 있을 때까지 하되, 치매 등 질병, 사고 때문에 일할 수 없을 때가 오면, 이 병원에 입원하고 여기서 임종할 수 있도록 계약했어요. 아픈 사람 고치는 게 제가 할 일이거든요. 그걸 지금까지 할 수 있다는 게 너무 기뻐요. 하나님이 건강을 허락하실 때까지 사명을 이어가고 싶어요.“

 얼마나 귀한 권사님인지 모릅니다. 나이가 91세가 되었는데도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셔서 지금 환자를 돌보고 있어요. 여러분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간에 여러분에게 맡겨진 사명이 매우 중요한 것임을 깨닫고 최선을 다하는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온유

 그 다음 여덟 번째가 온유입니다. 온유는 부드러운 성품을 말합니다. 요즘 너무나 사람들이 사나워졌어요. 사람을 사귀는 것도 잘 사귀어야지 사귀다가 헤어지면 요즘 헤어졌다고 와서 칼로 찔러 죽이고, 가서 폭력을 행사하고, 차로 들이박고. 전 뉴스를 보면서 가슴이 섬뜩 섬뜩 합니다. 우리 교회 청년들이 사람을 잘 사귀어야겠구나, 이거. 이런 폭력성 있는 사람을 사귀었다가는 큰일 나겠구나.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먼저 달라져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성령충만 받고 난 후에는 온유해져야 됩니다. 온유해져야 됩니다. 온유해지지 않으면 아직 충만 받은 게 아닙니다. 그것은 부드러움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온유하신 분이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그렇게 핍박받고 욕을 먹고 고난을 당하셔도 늘 그것을 온유함으로 참고 견디고 이기셨습니다. 이사야 53장 7절은 설명합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포용하셨고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까지 용서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3장 34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사야 42장 1절로 3절은 이와 같이 말씀합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고함치고 소리 지른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닌데, 사람들은 목소리가 크면 자기의 뜻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목소리를 높인다고 해서 그것이 통과된다고, 그 떼거지처럼 모여서 소리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그 반대로 나아가야 합니다. 소리쳐야 될 때 소리치지 아니하고, 온유함으로 감정을 다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품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내게 배우라. 내게 배우라. 예수님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십니까?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 여러분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감정 다 표현하고 살지 말고, 소리를 지르고 싶다고 다 소리를 지르고 살지 말고, 그럴수록 감정을 잘 조절해서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사랑으로 권면하고, 품고, 대화 나누면서,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어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뉴욕 타임즈 최장기 베스트셀러로 130주 동안 베스트셀러였고 천만 권이 넘게 팔린 책이 최근에 나왔습니다. 49개국 언어로 번역되었는데요, 게리 채프먼의 ‘다섯 가지 사랑의 언어’라고 하는 책입니다. 이 책에서 온유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랑은 온유하다. 우리는 사랑의 감정을 말로 전달하고 싶으면 온유한 말을 써야 한다. 온유한 말투로 해야 한다. 우리의 배우자는 우리가 사용하는 말보다는 그 어투로 내용을 이해한다. 같은 말이라도 크고 거칠게 표현하면, 그것은 사랑의 표현이 아니라 비난하고 정죄하는 표현이 될 것이다. 솔로몬은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잠 15:1)라고 했다. 배우자가 몹시 화가 나서 말을 함부로 할 때라도 당신이 그를 계속 사랑하기를 원한다면, 더 열을 내며 화를 부추길 것이 아니라 부드러운 말을 해야 할 것이다.”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의 표현이 거친 말을 하고 목청을 높여 소리를 질러도 여러분은 목소리를 낮춰야 되요. 마음속으로 ‘할렐루야. 할렐루야.’ 하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얼굴에 미소를 띠고 웃으면서 “아, 그래요.” 소리가 크면 소리를 더 작게 해야 됩니다. 저 사람이 잘 안 들리게. “그러셨어요.” 그 사람이 갑자기 소리가 작아지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소리를 왜 같이 안 지르나.’ 여러분 그렇게 감정을 다 표현해갖고 싸워보고 난 후에 마음이 편치가 않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잖아요. 마음이 편치가 않아요. 밥 먹어도 제대로 소화도 안 되고 감정만 나빠지는 것입니다. 온유하시기 바랍니다. 온유하면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온유하면 여유가 생기고, 온유하면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잠언 15장 1절은 말씀합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그런데 이 온유한 자에게 이 땅의 복도 주신다고 시편 37편 11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누가 많은 땅을 차지하느냐? 온유한 사람이에요. 이삭은 참으로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농사를 지어서 100배를 얻으니까, 그 집을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하고 질투해서 그를 공격해 왔습니다. 애써 땅을 파 우물을 만들었더니, 와서 우물을 뺏었습니다. 당시 물이 귀했습니다. 물을 얻기 위해서 땅을 많이 파야 하는데 한 번 파서 물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여러 곳을 파서 물이 어디서 한 곳 나오는 곳을 찾는 그런 시절인데 우물을 빼앗아 갑니다. 그런데요. 이삭이 다투지 않았어요. 다른 곳으로 옮겨서 또 우물을 팠습니다. 물이 또 나왔습니다. 그런데 또 달려와서 그 우물을 뺏었습니다. 싸우지 않고 그 우물을 양보해줬습니다. 하인들이 말합니다. “아이, 저 사람들 왜 저렇게 무례하게 구는데 주인님의 왜 그러십니까?” “아니야, 아니야. 원하면 주고 우리가 또 가서 파면되지.” 가서 또 땅을 팠더니 또 물이 나왔습니다. 그제야 알았습니다. ‘아, 저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이구나. 저 사람은 가는 데마다 물줄기가 따라다니는구나. 이제 그만 괴롭히자.’ 할렐루야!

 여러분 이 같은 넉넉한 마음, 온유한 마음, 너그러운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지 못했더라도 오늘 이 시간부터 결심해야 됩니다. 여유 있게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사랑을 베풀며 살면 인생이 행복해집니다. 아름다워집니다. 멋있는 인생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26장 22절에 설명합니다.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야훼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3. 절제(Self-control)

 마지막 아홉 번째가 절제입니다. 절제는 ‘셀프 콘트롤(Self-control)’ 즉 자신을 잘 조절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잠언 25장 28절은 설명합니다.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

 마음이 무너지면 다 무너지는 것입니다. 마음을 잘 절제해야 됩니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스피드를 내고 싶다고 그래서 막 밟으면, 절제하지 못하면 속도위반으로 티켓도 띠고, 또 사고도 나고, 많은 어려움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일에 절제해야 됩니다.

 특별히 운동선수들은 얼마나 절제하는지 모릅니다. 먹고 싶은 것도 몸 관리를 위해서 먹지 않고, 쉬고 싶어도 몸을 위해서 체력을 위해서 계속 훈련을 하고, 잠자는 것 먹는 것 모든 것 다 절제합니다. 또 정신도 늘 건강한 정신을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합니다. 골프하는 사람은 정신이 무너지면, 멘탈이 무너지면 다 무너진다고 그래서 늘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그렇게 공을 친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운동선수보다 우리는 더 절제해야 됩니다. 왜?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 받은 자녀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감정 표현하고 싶다고 다 표현하고, 소리 지르고 싶다고 다 소리 지르고, 싸우고 싶다고 다 싸우면 안 됩니다. 그것은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제가 설교 준비하다가 아주 재미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돼지들이 모여서 하나님 앞에 인간을 고발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먹을 것을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켜서 ‘돼지처럼 먹는다’고 그러는데 절대로 돼지는 위의 7, 80퍼센트가 차면 아무리 좋은 것, 맛있는 것 갖다놔도 먹지를 않는대요. 과식하는 법이 없답니다. 여러분, 돼지가 많이 먹어서 배탈 났다는 얘기를 들어봤습니까? 그런데 인간들이 자기들은 절제하지 못하고서는 우리 보고 ‘돼지같이 먹는다’고 우리를 갖다가 오히려 모독했기 때문에 고발했다! 그 예화를 보면서 실제로 우리 인간들이 절제하지 못하면서 그렇게 절제하는 동물을 들어가지고 ‘돼지처럼 먹는다’ 표현을 한 것을 보면 참 부끄럽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 가운데 하나가 절제의 은혜입니다. 늘 우리는 모든 면에 절제해야 됩니다. 감정도 절제하고 삶의 모습도 절제해야 됩니다. 너무나 한국은 음식물 쓰레기가 많이 남아서 그 음식물을 처치하지 못합니다. 대천덕 신부님과 함께 식사를 한 적이 있는데, 음식을 옆에 있는 분이 많이 남기니까, 다른 때는 그런 말씀 안 하시는데 음식 남기는 것 보고 한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음식물 남기지 마세요. 먹을 것이 없어 죽어가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하신 말씀이 마음에 딱 걸립니다. “음식물 많이 남기는 것도 죄에요.” 여러분, 지금부터는 남기지 말고 싹싹 비워가지고 절대로 남기면 안 됩니다. 특별히 뷔페 음식점 가가지고 이만큼 쌓아다가 반 씩 남기면 절대 안 돼요. 먹을 만큼만 조금 가져다 먹고 파해서 딱 음식을 조절을 해야지, 절제하지 못하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들이 범사에 절제해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정말 인정받고 사람 앞에서 칭찬받는 주님의 귀한 일꾼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톨스토이의 글 가운데, ‘사람에게는 어느 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주인공은 바흠이라고 하는 사람인데 농부로서 늘 넓은 땅을 갖기를 소원했습니다. ‘내 원이 없이 큰 땅을 가지고 농사를 지어봤으면 좋겠다.’ 그런데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데 어느 고장에 가면 원하는 대로 땅을 준다고 그래서, 그곳에 가봤더니 그 성주가 말하기를 하루 동안에 다녀올 수 있는 만큼 다녀오면 그 온 땅을 천 루블에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 신이 나서 다음날 아침 일찍 동이 트자마자 그곳에 가서 “제가 이제 원하는 땅을 갖기 위해서 다녀오겠습니다!”하고 출발점에서 달려 나갔습니다. 그 대신 조건은 해지기 전에 그 자리로 돌아와야 돼요. 그러니까 해지기 전에 한 걸음이라도 더 가서 반환점을 돌아오기 위해서 또 가고 또 가고 또 갑니다. 해를 바라보면서 해가 중천에서 넘어가면 다시 되돌아가야 되니까 달려가다가 더 이상 갈 수 없을 때까지 갔을 때, 다시 돌아와서 해지기 전에 열심히 열심히 다시 돌아와 가지고 출발점에 와서 탁 치고 쓰러졌는데, 가보니 피토하고 심장마비로 죽었어요. 그의 하인이 그곳에 땅을 파고 묻어주었는데 그가 얻은 땅은 여섯 자였습니다. 일 미터 팔십, 관 들어가는 그 땅밖에 못 얻었습니다. 절제하지 못하는 우리 인생의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15절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갈라디아서 5장 16절은 말씀합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철저하게 자신을 절제하고 훈련해서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고 사람 앞에 존귀함을 받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성령으로 충만하여 풍성한 열매 맺는 주님의 일꾼 되기 원합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는 저희 모두가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변화되어서 우리 가정이 변화되고, 이웃이 변화되고, 이 대한민국이 변화되고, 그리하여 하나님 영광이 온 천하에 나타날 수 있는 그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저희 모두가 될 수 있도록 은혜 내려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인류에게 가장 필요한 것

 

인류에게 가장 절실한 것이 지식이요 정보였다면 하나님은 메시아를

위대한 교육자로 보냈을 것이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기술이라면 하나님은 구세주를 위대한

과학자로서 보냈을 것이다.

우리가 최고로 바라는 것이 쾌락이라면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풀어줄 자를

가수나 연주자나 코미디언 같은 위대한 연예인으로 보냈을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돈이라면 하나님은 메시아를 위대한 경제학자로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인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용서이다. 인간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해 주실 자비뿐이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건져주실 자, 우리의 허물을 대신 짊어지실 자,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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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열매(Ⅱ)오래 참음, 자비, 양선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5장 22~23절)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는 한 열매 속의 아홉 가지 내용인데, 첫 번째 세 가지 내용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맺혀지는 열매로 사랑과 희락, 기쁨과 화평이고, 두 번째는 나와 이웃 간의 관계에서 맺어지는 세 가지 열매 모습으로,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의 모습을 우리가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 범주의 ‘오래 참음’, ‘자비’, ‘양선’에 대해서 함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1.오래 참음(Patience)

 오래 참음이라고 하는 것은 막 화가 나는데 막 눌러서 억지로 참는 그런 참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해주실 것을 믿고 믿음으로 참고 견디는 것을 말씀합니다.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관용의 마음을 가지고, 내게 당한 문제에 대해서 분노하거나 흥분하고 요동하지 아니하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주님의 때를 기다리는 모습이 성경이 말하는 오래 참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실 것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모든 것이 아름답게 되게 만들어주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사랑장으로 불리는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면 사랑의 정의를 열다섯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열다섯 가지 내용 가운데, 네 가지가 오래 참음과 연관이 있습니다. 첫 출발이 ‘사랑은 오래 참고’, 그 다음에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충만하면 어떤 시련도 잘 참고 견딜 수가 있고 사소한 일에 성내지 아니할 수가 있고 환난과 핍박을 잘 견디고 참고 이겨내는 것입니다. 오늘 이와 같은 은혜가 여러분에게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여, 우리에게 성령의 은혜가 충만히 임하여서 어떤 환난과 핍박이 다가와도 문제와 어려움을 만나도 내가 흔들리고 분노하고 미워하고 다투지 않게 하여주시고, 오래 참고 견뎌서 반드시 주님의 은혜로 승리하게 하여주시옵소서!

 야고보서 1장 19절부터 20절은 말씀합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듣는 것은 빨리 듣지만 말할 때는 한 번 더 생각하여 ‘이 말이 혹시 상대편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는 않는지’, ‘상대편을 분노하게 하지는 않는지’ 늘 염두에 두고 말은 천천히 하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화를 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 이 말씀은 우리가 우리의 감정을 잘 다스리지 못해서 아무 때나 화를 내고 소리 지르고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모세는 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 가장 온유함이 승한자라 그랬습니다.

 성경을 보면 모세는 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 가장 온유함이 승한 자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온유하고 마음이 부드럽고 잘 참고 견디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말 많고 불평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 동안 광야에서 이끌어서 가나안 입구까지 인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온유함이 지상의 모든 사람보다 뛰어났다고 하는 모세가 그 가나안 입구, 가데스바네아에 왔을 때 백성들이 또 불평하니까 그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어요. 그렇게 잘 참고 인내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했던 그가 그 순간에는 화가 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위를 명하여서 물이 나오게 하라’ 말씀하셨는데 그가 화난 것을 참지 못하고 “내가 너희에게 물을 내랴” 지팡이를 들어서 바위를 두 번 쳤습니다. 화를 내고 화난 행동을 보여준 것입니다. 물이 나왔지만 하나님께서 그 모습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민수기 20장 12절은 말씀합니다. “야훼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꿈에도 그리고 소원하던 가나안 땅을 들어가지 못하고 가나안 입구까지만 가고 거기서 그의 삶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이 분노함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믿고 난 다음 우리의 감정을 잘 다스려야 됩니다. 물론 화날 일이 있죠. 속상할 일이 있고, 소리 지를 일이 있죠. 그러나 소리 지르고 싶다고 해서 다 소리 지르고, 화내고, 욕하고 살아가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참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달라져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오래 참는 덕을 쌓아야 되는 것입니다. 절대로 예수 믿는 사람들끼리 교회 안에서 소리 지르고 다투면 안 됩니다. 소리 지르고 다투는 것은 마귀의 역사요,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약하기 때문에 자꾸 마귀의 유혹을 받아서 ‘싸워라, 싸워라!’, ‘소리 질러라, 소리 질러라!’, ‘화내라, 화내라!’, 거기에 그냥 유혹을 받아서 감정을 폭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믿고 이제 이만한 은혜 가운데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여기까지 왔으면 이제는 우리가 모든 것을 참고, 견디고,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배려하고, 품는 그와 같은 덕스러운 모습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사울 왕도 그랬습니다. 블레셋이 쳐들어오는데, 이제 사무엘이 와서 제사를 드려야 되는데 사무엘이 늦게 오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불안해서 흩어집니다. 그러니까 “언제 선지자가 올 것을 기다리느냐. 내가 제사를 드리겠다.”고 제사를 드려버렸어요. 그때로부터 그는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하고 하나님으로부터 귀하게 쓰임받지 못하는 그러한 길을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나서 주님의 일을 할 때, 끝까지 우리 마음을 다스리고 특별히 몸 된 교회를 섬길 때 기쁨과 감사함으로 섬겨야지, 주님 몸 된 교회를 섬긴다고 하면서도 내 맘에 맞지 않는다고 소리 지르고 다투면 하나님이 슬퍼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해주시는 사실을 믿고, 참고 견디며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나가야 합니다.
 로마서 5장 3절, 4절 말씀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환난을 당해도, 핍박을 당해도, 억울한 일 당해도, 속상한 일 많아도, 잘 참고 견디면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결국 우리가 꿈꾸고 소망하는 것을 이루게 되는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때가 올 때까지 참고 기다려야 됩니다.

 시편 37편 7절은 말씀합니다. “야훼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는 말씀은 불평하지 말고, 원망하지 말고, 내 인간의 감정을 드러내지 말고, 꾹 참고 기다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그냥 잡초처럼 싹 한순간에 몰아내버리시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여러분에게 부어주실 것입니다. 당장 응답이 없어도 반드시 하나님의 때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좋은 일이 다가올 것을 믿고 참고 기다리면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5장 10절 11절은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오래 참고 기다리면 은혜가 임합니다. 아브라함이 25년을 기다렸습니다. 보통 사람은 1년, 2년, 참 어떤 약속을 받고도 못 기다립니다. 아브라함 25년, 요셉이 13년이라는 그 긴긴 연단의 과정을 통한 후에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여러분, 주님 안에서 큰 은혜를 주실 때 그냥 갑자기 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연단에 연단을 거쳐서 때가 되어 받을 만한 그릇이 된 다음에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강한 군대가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훈련을 하고 또 훈련하고 훈련해서 강한 군대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훌륭한 스포츠 선수들이 그냥 탄생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또 훈련하고 또 훈련하고 또 훈련해서 그렇게 정상의 위치에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큰 뜻을 이루기 위해서 참고, 견디며, 맡은 일에 묵묵히 순종하며, 헌신할 때, 큰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2. 자비(친절, Kindness)

 이 자비는 친절한 것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향한 우리의 섬김의 자세가 바로 친절입니다. 친절은 사람과의 관계를 화목하게 만들고 폭넓은 대인 관계를 이루게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친절한 것에는 어떠한 목적이 있어요. 왜? 장사하는 사람들이 친절하게 하면 손님들이 더 많이 옵니다. 똑같은 물건을 사더라도 친절한 데로 가지, 불친절한 데를 왜 갑니까? 어디 가서 무엇을 하더라도 그 입으로 늘 친절하게 말하고 손님을 기쁘게 하는 곳으로 우리가 가게 되어있습니다. 그것은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더 많은 손님을 끌기 위한 친절입니다. 물론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친절해야 합니다.

 일본이 저렇게 성공한 비결 중의 하나가 그 민족정신 가운데 있는 친절입니다. 얼마나 친절한지 모릅니다. 제가 1978년에 처음 일본에 갔는데 깜짝 놀랐어요. 백화점에 가니까 모든 사람들이 90도 절을 하는데 일본 사람은 헤어질 때 한번만 절하는 것이 아니라, 안녕히 가시라고. 또 돌아보면 안녕히 가시라고. 한 세 번은 인사해야 갑니다. 아! 저 몸에 깊숙이 배인 친절이 일본을 오늘날의 성공으로 이끌었구나. 우리 한국도 많이 친절해졌습니다. 관공서가 친절해졌고 또 어디를 가든지 기업체의 일하는 분들이 친절하게 손님들을 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사람 많은 우리 교회는 처음 온 분들이 자꾸 부딪히고 그래서 친절하지 못하다는 말을 합니다. 우리 모두가 친절이 몸에 배어야 합니다. 배려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친절은 몸에 배어서 베풀 때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덕을 끼치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평생 소외된 자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친절을 베풀며 사셨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6장 36절에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모든 자비를 베푸는 것처럼 너희도 이웃을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고 친절을 베풀라고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친절은 조건 없이 베푸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가 우리 이웃이냐”고 율법 교사가 물었을 때 선한 사마라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가진 것 다 빼앗기고 온 몸을 두들겨 맞고 길거리에 버려졌을 때, 늘 제사를 드리고 거룩한 말을 하는 제사장은 보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교회에서 봉사를 열심히 하는 레위인들도 보고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이 업신여기고 그들을 존중히 여기지 않았던 사마리아 사람이 가다가 그것을 보고 나귀에서 내려서 상처를 싸매주고 주막에 데려가서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돌봐주도록 하고 돈을 맡기고 가는 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0장 36절, 37절입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미국의 유명한 성공 철학의 대가이자 루즈벨트 대통령 고문관을 지낸 나폴레온 힐의 ‘성공의 열쇠’라는 책에 나오는 예화입니다.
 어느 비가 많이 오던 오후 필라델피아 한 백화점 앞에 할머니 한 분이 서 있다 들어왔습니다. 대부분 직원들이 할머니가 들어온 것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검소한 옷차림의 나이 많은 할머니가 들어와서 문 앞에 서 있을 때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데 한 젊은 직원이 달려가서 할머니에게 말했습니다. “할머니, 뭐가 필요하세요?”, “아니야, 아니야. 난 지금 비가 와서 잠깐 비를 피해 들어왔는데 차가 오면 갈 거야.”, “할머니,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여기 앉아서 기다리세요.”하고 의자를 내다놓고 의자에 앉아서 차를 기다리게 합니다. 한참 기다린 후에 차가 왔습니다. “고마워, 젊은 양반. 명함이나 하나 줘.” 그래서 명함을 줬어요. 그 할머니는 가셨습니다.

 그리고 이 젊은 직원은 다 잊어버리고 열심히 그곳에서 또 일을 하고 있는데 어느 날 백화점 사장에게 편지가 왔습니다. 이 백화점 사장에게 편지가 왔는데, 아무 아무개 직원을 나의 고향 스코틀랜드에 보내서, 큰 성의 가구 전체를 그 청년이 주문해서 다 채우게 하라고. 알고 보니 그 편지를 쓴 사람은 그 직원이 의자를 가져다 드린 할머니였고, 그 할머니는 당시 미국 최대의 재벌인 철강 왕 앤드류 카네기의 어머니, 마가렛 모리슨 카네기였습니다.
 늘 검소한 옷차림으로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그 어머니가 이 한 젊은 직원의 친절에 감동되어서 본인 고향에 있는 큰 성에 있는 모든 가구를 이 백화점에서 납품하도록 해가지고, 이 젊은 청년이 고속 승진해서 그 회사의 중역으로 파견되어서 모든 물건을 납품하게 했습니다. 그 한번의 친절이 이 청년의 운명을 바꿔놓은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아니하고 그냥 할머니 한 분에게 친절을 베풀었는데 이런 큰 축복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이면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대가를 바라지 않고 친절을 베풀어야 될 것입니다. 사랑을 베풀어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하늘나라의 큰 상급으로 우리 모두에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친절을 행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양선(착함, Goodness)

 여섯 번째가 양선입니다. 이 양선이라는 말은 착함입니다. 착한 성품, 착한 행동을 말합니다. 성령이 임하면,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착한 마음을 넣어주십니다. 예수 믿는 순간 우리가 그동안 악한 마음을 먹고 살았던 어둠의 자녀였는데, 성령이 오셔서 착한 마음을 심어주시고 빛의 자녀로 살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를 만나면, 예수님의 은혜로 그 운명이 바꿔집니다.
 당시, 예수님 당시, 세리장이었던 삭개오가 그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예수님 만난 후에 그의 운명이 바꿔졌습니다. 누가복음 19장 8절에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로마정부의 앞잡이가 되어서 많은 세금을 거둬가지고 일부는 로마정부에 바치고 일부는 아마 본인이 축적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는 거부가 되었는데 예수님 만난 다음, 그 악한 마음이 바뀌어서 착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내가 가진 재산의 절반을 가난하고 불쌍한 자에게 다 나누어주겠습니다. 그리고 강제로 착취한 일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습니다.” 그는 그 후에 가이사랴의 첫 주교가 되었다는 기록이 남겨져있습니다.

 우린 빛의 자녀로서 의로움과 착함과 진실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5장 8절, 9절에 설명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여러분, 여러분이 어두움이 아니라 빛입니다. 여러분이 가는 곳마다 사랑의 빛을 비춰야 됩니다. 용서의 빛을 비춰야 됩니다. 착한 빛을 비춰야 되는 것입니다. 지난 한 주일 동안 기도하는데 주님 말씀하시기를 “무조건 용서하라! 용서하라! 용서하라!”며 용서의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여러분, 마음이 착한 사람은 자기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대단히 죄송하게도, 마음이 착하지 못하면 절대로, 절대로, 용서하지 않고 마음에 아픔과 원한을 부여잡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 미움과 아픔과 상처가 있는 한 그는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늘 그 상처에 눌린 바 되고, 그 상처 때문에 분노하고, 더 미워하고, 더 사람과 갈등이 생기는 그러한 삶의 모습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문제 많은 사람은 다른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문제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원인이 나한테 있습니다.

 주여, 오늘부터 내 마음이 착한 마음으로 바꿔지게 하여주옵소서. 사랑하고 용서하며 살게 하여주옵소서. 다투고 미워하고 분노하며 살지 않게 하여주시고, 용서하고 또, 용서하고 또, 용서하며 살게 하여주옵소서.
 우리가 빛이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빛의 자녀답게 빛을 발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마태복음 5장 15절, 16절에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빛은 어두움을 밝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이 되었기 때문에 이제 어두움을 밝혀야 됩니다. 신앙은 말이 아니라 행함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말로 “사랑한다.” “사랑한다.” 하면서도 행함이 뒤따르지 못하면 그것은 거짓 사랑인 것입니다. 진짜로 사랑하면, 그 사람을 위해서 무얼 쏟아 붙고 다 주어도 아깝지가 않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2장 15절에서 17절에는 말씀합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지금 옆집이 직장을 구하지 못한 채 몇 달이 되어서 쌀독에 쌀이 떨어지고 먹을 게 없어서 굶주리는데 “먹을 것이 없으면 음식점에서 사 잡수세요.” 말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지금 그럴 수 있는 형편이 아닌데 그때는 아무 말 하지 아니하고 집에 있는 쌀독에 쌀을 한 포대 담고, 집에 냉장고에서 밑반찬 가져다가, “아이고, 이거 우리 함께 나눠먹어요. 우리 집에 좀 넉넉하게 있어요.” 나눠주는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정이 많은 나랍니다. 시골 어느 데도 가다가 들어가서 인사를 하면 먹을 것을 주는 그러한 정이 많은 민족입니다.

 한 일본 사람이 한국을 알리기 위해서 한국 전체를 순례해서 책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한국 사람은 한마디로 말하면 정이 많은 사람입니다. 시골 어디를 가도 반갑게 맞아주고, 말도 통하지 않는데 먹을 것을 내오고, 어떤 때는 잠도 재워주고. 그래서 일본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그 정을 한국 시골 곳곳에서 체험했다고 하는 그런 책을 쓴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일반 사람들의 모습일진데 우리 예수 믿는 사람 이보다 더 열배, 백배, 천배로 사랑을 실천하며 어려운 사람을 돌보며 살아가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세월호가 가라앉았을 때, 안산 전체가 경제적으로 침체되고 가라앉았습니다. 모든 가계들은 개점휴업입니다.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저희들이 안산희망나눔 프로젝트로 한 번에 천 명씩 12번을 갔습니다. 처음 갈 때는 ‘한 번 이벤트성으로 왔다가나’ 했는데, 세월호가 올라올 때까지 간다고 약속하고 3년 동안 12번을 갔더니 완전히 안산의 분위기가 바뀌었습니다. 저들이 얼마나 교회에 대해서 감사하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가서 단 한 번도 예수 믿으라고 전도한 적이 없고 우리가 그냥 가서 그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말씀만 전했는데, 저들이 크게 사랑을 체험하고 감동을 받아서, 저들이 열두 번째 가니까 “아이고, 이번이 마지막이냐”고 저들이 안타까워하던 모습이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올해 추수감사절 때 한 번 더 갈려고 합니다.
 여러분, 사랑은 행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장 16절은 말씀합니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고린도 후서 9장 8절입니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주먹을 휘두르는 삶에서 이제는 주걱 푸는 삶으로 바뀐, 그 무료 급식 담당을 하고 계신 <바나바하밥집>의 김현일 대표님. 바나바하우스 밥집을 <바나바하밥집>이라고 하는데, 매주 700명이 넘는 그 노숙인들에게 무료 급식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원래 운동선수 출신의 좋은 체격 조건으로 한때 주먹 휘두르는 삶을 살다가 그가 마음을 잡고 사업을 시작했는데 IMF로 완전히 망합니다. 아내와 딸을 친정에 보내고 노숙 생활을 하는데 말로 없이 그 삶이 비참했다고 합니다. 무료 급식 받으려고 줄을 설 때의 심정을 고백합니다.
 “그 줄은 마치 절망의 줄 같아요.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온갖 생각이 들어요. 배식이 제 앞에서 끊긴 적도 있어요. 그럴 땐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죽고 싶기도 하고…. 너무 끔찍해요!”

 5개월 후 간신히 일자리를 구해 가족과 다시 만납니다. 그때 나들목교회의 김형국 목사님을 만나서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가 새 출발 했습니다. 2008년, 한 노숙자가 버스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목사님을 찾아가서 말합니다. 교회가 어려운 사람을 도와줘야 되지 않겠냐고. 그때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교회가 누구냐? 교회가 무엇이냐? 우리 교회도 교회지만, 네 자신도 교회인데, 너는 도대체 뭘 하고 있냐? 하나님이 네게 보여주시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지 마라.”
 아! 그 말을 듣고 감동받아서 2009년, 컵라면 다섯 개와 빵 다섯 개를 들고 신설동에 있는 노숙인을 찾아간 것이 그의 사역의 시작입니다. 노숙인들은 처음 그를 경계했습니다. 왜냐하면 노숙들에게 와서 그 신분증을 빌려가지고 대포통장도 만들고, 대포폰도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를 이용하는 사람이 아닌가?’ 했는데, 끊임없이 와서 저들을 섬기며 자기도 노숙 생활을 했다고 하면서 가진 것을 나누어줄 때, 한 사람 두 사람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바나바하우스 프로젝트를 열어서 매주 700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있고, 무료 급식뿐 아니라 노숙인 자활, 거기서 그냥 가라앉아 있지 않고 이제 일어나서 새 출발 할 수 있도록 저들을 상담도 하고 주거, 의료, 법률, 다양한 방면으로 저들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사회 적응 훈련, 치료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고 이제 저들이 자활할 수 있도록 공동체 마을을 만드는데, 봉사자들과 함께 어울려서 지금 40여 가구를 이루어서 저들의 자활을 돕고 있습니다. 그 절반 이상이 미혼모 노숙인 장애인들입니다. 그들을 사랑으로 섬기는데 그들이 그곳에 와서 하나, 둘씩 변화됩니다. 완전히 인생을 포기했던 사람들이 그곳에 와서 새 삶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분들에게 필요한 건 공동체였어요. 밥도 먹고, 예배도 드리고, 함께 울고 웃는 그런 공동체가 필요한 거죠. 지역생활공동체로 함께 먹고, 마시고, 예배하고, 사역하는 사도행전의 교회 모습이 우리 공동체가 추구하는 모습이에요. 공동체 안에서 네 번의 결혼식과 돌잔치를 치르는 등 그야말로 삶의 대소사를 함께 나누고 있어요. 주님의 말씀은 아주 선명해요. 예수님은 가난하고 소외받고 핍박받는 사람들 가운데 함께 계셨어요. 저희 역시 삶에서 구체적이고 선명하게 예수님을 배우고 발현하는 공동체가 되려고 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은혜를 받았으므로 이제부터는 선을 행하며 착한 일을 행하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주여, 우리에게 성령으로 충만케 하여주셔서, 성령의 은혜를 물 붓 듯이 부어주셔서, 모든 일에 참고 견디며,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선한 일을 행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온 천하에 드러내는 주님의 일꾼들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이와 같은 복된 인생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너무나 많은 은혜를 받았는데, 그다음 이기주의로 살았습니다. 베풀지 아니하고 늘 움켜지고 살았습니다. 이제는 오래 참고,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고, 착한 행실로 통하여 사람들을 변화시키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저희


박해숙 권사(장애인대교구) -

고난 중에 감사로 이끄시는 주님


갑작스러운 남편의 뇌경색에 청천벽력
기도할 때 걱정과 근심이 감사로 바뀌어

 나는 늘 신앙생활에 대한 갈급함이 있었다. 하지만 몸이 불편해 엄두를 내지 못했다. 특히 아이를 낳고 나서는 육아에 전념하기에도 벅찼다. 그러다 여의도순복음교회 구역장님의 전도로 교회출석을 마음먹게 됐다. 아이가 4살이 되던 무렵 구역장님의 도움으로 주일예배를 드렸다. 예배를 드리면서 너무 행복하고 큰 은혜를 받았다. 그 후부터 장애인대교구에 등록해 열심히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주일에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려면 교구버스를 이용해야 했다. 당시 우리 집에서 교구버스를 타는 곳까지는 버스정거장 2개 정도 되는 거리였다. 일반인이면 20분이면 걸어갈 거리지만 나는 목발을 짚고 2배 이상의 시간을 들여야 겨우 교구버스를 탈 수 있었다. 이런 나를 남편은 “주변에 많은 교회들을 놔두고 왜 거리가 먼 교회를 가느냐”며 타박했지만 은혜를 사모하는 나의 열정을 막을 수 없었다.

 하루는 장애인대교구 찬양대 연습을 하는 중에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남편은 다급한 목소리로 몸에 마비가 찾아온 거 같으니 빨리 와서 도와달라고 말했다. 깜짝 놀라 황급히 집에 오니 남편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고 몸의 한 쪽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병원으로 옮겨진 남편은 뇌경색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나는 “하늘이 노랗다”는 말의 의미를 그 때 이해했다. 나도 몸이 불편한 상황에서 남편마저 뇌경색이 찾아왔으니 그냥 눈물만 나오고 하나님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중환자실로 옮겨진 남편을 두고 의사는 “뇌 내 혈관이 좁아져 일어나는 증세로 여러 가지 상황을 보아야 하겠지만 100% 완치는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기도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교구 식구들에게도 기도를 부탁하고 나는 하나님께 매달렸다. ‘하나님 어떻게 해요. 도와주세요. 하나님 살려주세요’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은 내게 ‘너 근심 걱정 말아라∼ 내 너를 지키리∼’라는 찬송을 들려주셨다. ‘그래요, 하나님만 믿고 걱정을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다짐하고 남편이 호전될 것을 바라보고 기도했다. 그렇게 기도가 바뀌자 그 날부터 남편이 급속도로 좋아지기 시작했다. 특히 남편은 강한 의지를 갖고 재활운동에 매달렸다. 간병인이 자제를 시킬 정도로 열심히 했다. 비록 지금도 목발을 필요로 하지만 혼자서 거동이 가능할 정도로 회복됐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거주하고 있던 집은 우리에게 너무 불편했다. 그래서 새 장막을 위해 기도했다. ‘하나님 지금 사는 집은 너무 힘들어요’라며 매일 노래를 부르듯 하나님께 졸랐다. 임대아파트를 신청했는데 몇 차례 당첨되었지만 그 아파트들은 교회에서 너무 멀었다. 나는 다시 ‘하나님! 교회와 가까운 집을 주셔야 남편과 교회를 가지요’라며 기도했다. 그렇게 기도를 한 결과 10년 만에 하나님은 영등포에 임대아파트를 주셨다. 할렐루야.

 영등포로 이사 온 후 남편도 주일예배에 참석하고 있다. 병원에 입원해 있을 당시 문병 왔던 목사님과 약속을 했다고 한다. 좋은 아파트에 당첨되면 교회에 가겠다고. 아마도 하나님이 남편의 말을 들으셨던 것 같다.

 나는 믿음생활하는 것이 너무나 좋다. 순간순간 고난도 있었지만 돌아보면 그런 고난마저도 감사하게 된다. 그 고난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바라기는 믿지 않는 양가 친척들까지 모두 구원을 받길 바라며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정리=정승환 기자


이연용 집사(여의도순복음안산교회) -

수 십년 간 앓고 지낸 두통 한번에 사라져

금요철야예배 드리며 치유의 소망 품어 
목사님 안수 기도 중 성령의 기적 일어나


 원래 나는 교회나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이 살았다. 시집오기 전에는 불교이면서도 점을 보는 것을 좋아해서 많이 다녔었다. 그런데 남편과 열애 끝에 결혼을 하려고 보니 시어머님도 남편도 예수님을 독실하게 믿는 기독교 가정이었다. 남편을 따라 나도 교회를 다녔다. 그때는 말씀도 잘 모르고 믿음도 생기지 않아서 다니다 말다를 반복했다.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는 항상 나도 교회를 다녀야겠다는 생각이 있어서 이 교회 저 교회 동네 여러 교회들을 다녀보고 이내 시들해졌다. 그러다 5년 전 지인에게서 순복음교회를 다녀보라는 말을 들었다. ‘성령이 충만한 교회’라는 말을 듣고 왔는데 예배에 참석하고 말씀을 들으며 조금씩 하나님에 대해 알게 되고 교회 출석도 꾸준히 하게 됐다.  

 사실 나에게는 초등학교 때부터 원인을 알 수 없는 두통이 있었다. 약국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는 두통약을 하루에도 5∼6알씩 먹어야 했다. 약을 계속 먹으니 약이 듣지를 않아서 다른 두통약으로 바꿔가면서 결국 지난해에는 가장 독하다고 평이 난 약을 먹다가 그마저도 내성이 생겼는지 효과를 볼 수가 없었다.

 당연히 두통이 시작 된 때부터 병원에도 다녔다. 시간이 날 때마다 내 병명을 밝혀줄 새로운 병원과 의사를 찾아 헤맸다. 병원에서 각종 검사를 받고 의학 기술이 발달 돼 새로운 검사 기기가 생겨 검사를 받아도 나를 괴롭히는 두통의 원인을 알아 낼 수 없었다. 지난해부터는 진통제를 복용하는 것 외에 신경외과 약도 같이 먹었다. 병원에서 MRI 촬영을 했는데 두통의 원인은 찾아낼 수 없었지만 뇌혈관이 조금 막힌 것을 발견했다. 그 약을 먹으면서 생각지 못한 증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약을 먹고 나면 정신이 맑지를 않았다. 저녁에 약을 먹고 나면 약 기운에 취한 듯 아무것도 못하고 잠이 들었다. 한번은 어딘가를 가다가 갑자기 정신이 들어 길 한복판에 멈춰 섰는데 내가 어디를 가려고 했었는지 몰라 몹시 당황한 적도 있다. 혹시 내가 치매에 걸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덜컥 겁이 났다.

 멈추지 않는 두통과 약의 부작용으로 인해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막연히 금요철야예배를 참석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담임 김유민 목사님의 안수기도를 받으면 고통이 멈출 것 같다는 소망이 생겼다. 그전에는 일을 하기 때문에 피곤하니까 금요철야예배를 갈 수 없었는데 수십 년 간의 고통을 하나님께서 고쳐주실 것을 믿고 나을 때까지 계속 다니기로 마음에 결단을 했다. 매주 금요철야예배를 드리면서 기도로 하나님께 나의 고통을 말씀드렸다. 그리고 세 번째로 금요철야예배에 참석했을 때 통성기도 시간 중 안수기도를 받고 싶은 사람은 강대상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그래서 담임 목사님께 안수기도를 받게 됐다. 기도를 받는 순간 기도를 받던 내가 한 순간에 쓰러져 버렸다. 몇 분 후 나 스스로 깨어났을 때는 목사님을 비롯해 성도들이 나를 위해 기도를 해주고 있었다. 창피한 생각이 얼핏 들어 일어나 나가려는데 목사님께서 다시 안수기도를 해주셨다. 깨어난 순간부터 놀랍게도 머리 속이 깨끗이 맑아지고 상쾌해 진 것을 느꼈다. 불같은 성령의 임재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됐다. 그 즉시로 먹던 약봉투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벌써 5개월가량이 지났는데 그 이후로도 머리에 두통은 없고 항상 맑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나는 나에게 일어난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네 분들도 모두 내가 어떻게 약을 먹고 살았는지 다 아시기 때문이다. 이제는 약을 하나도 먹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다 보면 저절로 전도가 된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기적을 체험하다니 놀랍고 감사하다. 수 십 년 동안 누구도 고칠 수 없었던 두통을 고쳐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과 감사를 드리고 싶다. 
 


성령의 열매(Ⅰ)-사랑, 희락, 화평/이영훈목사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5장 22-23절

 우리 순복음 신앙은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한 신앙을 말씀합니다. 처음에 ‘순복음’이라고 그러니까 그 의미를 잘 모르고 “그러면 당신들만 순복음이고 우리는 가짜 복음이냐?”라며 비판했던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가 아니고 말씀을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다 그대로 믿고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 주님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신앙이 바로 순복음 신앙이고, 이 순복음 신앙은 열매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그것이 삶 속에서 열매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말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생활이 엉망이고, 걸핏하면 화를 내고, 다투고, 미워하고, 그러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구원을 받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성령충만을 받아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풍성한 열매를 맺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장 5절에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주여, 우리가 많은 열매를 맺게 하여주시되 특별히 성령이 충만하여 성령의 열매를 많이 맺게 하여주옵소서.

 갈라디아서 5장 22절로 23절에 나타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나타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어야 되는데, 이 아홉 가지 열매를 3등분해서 세 열매씩 나누어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첫 번째 세 열매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나타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의 열매입니다. 두 번째는 나와 이웃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이 세 가지 모습입니다.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입니다. 세 번째로는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 맺어지는 세 가지 모습인데, 충성과 온유와 절제인 것입니다. 오늘은 사랑과 희락, 화평에 대해서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눕니다.

1. 사랑(Love) 

 먼저, 우리가 성령 안에서 맺어야 될 열매는 사랑의 열매입니다. 사랑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떠한 사랑을 하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기적인 사랑, 자기중심적인 사랑을 합니다. 그래서 누가 나에게 잘해주면 그 사람을 잘 대해주고 사랑하는 이러한 조건적인 사랑을 합니다. 그런데 그가 나에게 잘해주다가도 피해를 입히고, 나를 힘들게 하면 그 사랑이 변하여 미움이 됩니다. 친구가 변하여서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인간적인 사랑에 머물러있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 사랑에 머물러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조건을 따지지 아니하고 무조건적으로 용서하고 사랑하는 위대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용서받을 수 없고, 사랑을 받을만한 아무런 자격이 없는 데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무조건적으로 우리를 사랑하고, 용서하고, 구원하신 그 놀라운 사랑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은 설명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이 사랑 안에 머물러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한번 우리를 사랑하시면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을 하시는 그 자리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얼마 있지 않아서 그 밤이 지나기 전에 본인을 배반하고 다 도망할 것을 알았지만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시고 그들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은 설명합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사람들은 좀 사랑하다가 싫증이 나면 돌아서기도 하고, 오해가 생기면 다투고 멀어지기도 하고, 또 자주 못 보면 관계가 소원해지기도 하지만 우리 주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부족해도, 못 났어도, 때때로 주님을 섭섭하게 해도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고, 용서하시고, 우리와 함께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 사랑에 힘입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구원하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놀라운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 이 위대한 사랑, 변함없는 사랑에 대하여 감사, 감격하며 살아가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 놀라운 사랑에 감사하여 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우리 주님을 사랑하기 원합니다. 사랑의 고백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22장 37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여야 하고, 그다음 우리 이웃을 그렇게 사랑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을 위해서도 예수님이 죽으셨기 때문에, 그 사람도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기준으로 남을 사랑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기준에 의해서 우리 이웃을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2장 39절은 설명합니다.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또 요한일서 4장 20절, 21절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형제는 구원받은 형제자매를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 어떤 경우에도, 어떤 경우에도 믿는 사람들끼리 다투고, 싸우고, 나누어지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 안에서 다 형제자매인 것입니다. 형제들끼리 조금 다투어도 그것 금방 잊어버리고, 서로가 사랑하고, 서로 도와줍니다. 왜? 형제이기 때문에. 형제는 잠시 잠깐 섭섭한 것 있고 오해가 있어도,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금방 풀어집니다. 더군다나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구원받은 주님의 형제자매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이웃을, 우리 형제를 사랑하며 살아야 됩니다. 기준이 내 몸처럼 사랑하라, 내가 내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본인이 소아마비 장애를 앓고 있으면서도, 장애로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장애인을 섬기며 살아가는 귀한 분이 계십니다. 김경식 목사님입니다. 임마누엘집 원장 목사님이신데, 3살 때 열병으로 소아마비를 앓아서 기어 다녀야 했습니다. 두 손과 두 발에 신발을 신고 기어 다녔습니다. 아버지는 이 때문에 화병으로 돌아가시고, 동네 사람들은 이 아이를 보면서 바닷물에 던져버리라고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누나들도 “차라리 죽어버려라!”,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멸시하니까 그렇게 동생을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그 집에서 예수를 믿던 유일한 그 어머니, 믿음의 어머니는 이 아들을 품고 기도하면서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너는 하나님이 택한 사람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쓸모 있는 사람이란다. 너는 다른 사람들에게 베푸는 사람이 될 거야. 장애는 살아가는데 조금 불편할 뿐이지, 네 안에 예수님이 거하시기 때문에 넌 축복받은 사람이야, 멸시와 천대를 받을 지라도 조금도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아라.”

 여러분, 장애를 있는 분들을 귀히 여기고 사랑으로 섬겨주시기 바랍니다. 절대로 저들을 멸시하고 저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면 안 됩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아들을 위해서 간절히 눈물로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셔서, 한쪽 다리를 쓸 수 있게 되어서, 기어가다가 그 다음부터는 목발을 짚고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다음 기술을 배워 전자 대리점을 하면서 돈을 많이 벌게 되었는데, 친구에게 돈을 빌려줘서 받으러 갔다가 그만 도박하는 자리에서 도박에 빠지게 되었어요. 전 재산 다 날리고 교도소까지 들어가게 됩니다. 교도소에서 나온 후에는 그는 구걸하며 살아가는 거지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 절망적인 그 자리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제가 그런 신세가 되니까 저 같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더라고요. 걸인들, 장애인들을 보면서 하나님께 서원했습니다. ‘하나님이 기회를 주신다면 저들을 모시고 살겠다’고요. 그래서 1983년에 도봉산 안골부락 천막집에서 장애인 10여 명과 임마누엘 공동체를 시작했습니다.”

 껌팔이 행상으로 간신히 모은 돈 100만원을 가지고 도봉산 산자락에 오갈 데 없는 장애인 10명과 함께 공동체 생활을 시작합니다. 저들을 먹이기 위해서 길에서 볼펜, 양말, 껌을 팔고, 기독교 서적 외판원으로 일하면서 열심히 돈을 벌어서 그들을 섬깁니다. 별별 수모와 모욕을 당하면서도 목발을 짚고 이것저것 팔 물건을 들고 다니면서 열심히 모금을 해서 저들을 보살피고, 그리고 신학교에 들어가서 졸업해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장애를 가진 사람이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섬긴다는 소식이 계속 퍼져나가자, KBS 방송에서 이것을 특별히 취재해서 보도하고 난 후에 전국에서 그를 불러서 집회를 해달라고 해서 가서 강의도 하고 예배도 드려주고, 책도 써서 그가 인세를 많이 받게 되니까 그 돈을 다 모아서 송파에 땅을 삽니다. 1990년에 이곳에 땅을 사고, 임마누엘집을 짓습니다. 1993년, 자신도 소아마비 장애인이면서도 더 어려운 장애인들을 위해 헌신한 공로로 최연소로 국민훈장 동백상도 받게 되었고요, 현재 임마누엘집은 2개의 법인과 산하 11개 장애인 시설을 운영하고 있으면서 약 1000명의 장애인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임마누엘집의 원훈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이 말씀대로 주변의 더 어려운 이웃들을 돕고 있는 귀한 목사님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역하면서 가장 기쁜 일은 중증장애가 있는 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그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용기를 얻고 삶의 기쁨과 소망을 얻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두 목발로 걸을 수 있도록 건강한 두 팔을 주신 것에 감사하며, 앞으로도 주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제가 받은 은혜, 그 체험을 장애인은 물론 지역사회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고, 그들에게 위로와 힘이 되고 싶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장애인 대교구가 있어서 많은 장애를 가진 분들이 신앙생활하고 있는데, 우리가 그들을 더 사랑으로 잘 섬겨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온몸이 건강하고 멀쩡하면서 우리보다 어려운 사람을 돕지 아니하고 나만을 위해 산다고 하면 우리는 성숙한 신앙인이 아닙니다. 이제부터는 고개를 이웃으로 돌려서 나보다 어렵고 힘든 사람을 돕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주고, 그들이 절망할 때 위로하고 격려하는 그러한 신앙의 본을 보이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여, 우리가 사랑이 충만하여서 이 사랑을 실천하며 살게 하여주옵소서! 말뿐이 아닌 행동으로 사랑을 보여주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2. 희락(Joy)

 그 다음에 성령 충만할 때 우리에게 임하는 것이 희락, 기쁨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에게는 주님이 주시는 기쁨이 넘쳐납니다. 기쁨은 긍정적인 신앙의 열매인 것입니다. 기쁨은 모든 문제와 어려움을 초월합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에 권면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힘들어도, 어려워도, 오해를 받고 속상해도, 상처를 입어도 기뻐하라! 기뻐하라! 기뻐하라!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네 권의 편지, 책을 썼는데 이 편지가 책이 되는데, 그것이 우리 성경에 신약성경에 들어가 있습니다. 에베소, 빌립보, 골로새, 빌레몬, 이 네 편의 서신이 책이 되어서 성경에 들어가 있는데, 빌립보 교회에 보낸 빌립보서 끝에 가서 4장 4절에 이와 같이 말씀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옥중에 있는 그가 밖에 있는 사람에게 이렇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사실 밖에 있는 사람이 옥에 갇힌 그에게 “얼마나 고생하십니까. 주님 안에서 위로함을 받고 기뻐하세요.”라고 해야 되는데 뭔가 바뀐 것 같습니다. 옥 안에 있는 사람이 옥 밖에 있는 성도들에게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주여, 이 기쁨이 우리에게 넘쳐나게 하여주시옵소서. 어려움을 당해도, 문제를 만나도, 고난 가운데서도 기뻐하며 살게 하여주시옵소서.

 요한복음 15장 11절에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주의 복음이 증거 되는 곳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임해서 기쁨이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 성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 그 성에 기쁨이 넘쳤다고 사도행전은 말씀하고 있습니다(“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사도행전 8장 8절).
 주여, 이 기쁨이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게 임하게 하여주시옵소서! 문제를 만나도, 어려움을 당해도, 억울한 일을 당해도 기뻐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께서 떠나신다고 하자 제자들의 마음에 근심이 가득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6장 22절에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우리가 예수님 믿는다고 믿지 않는 가족들이 핍박을 하고, 믿지 않는 동료가 우리에게 많은 어려움을 준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하늘나라에 상급이 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 11절, 12절에 말씀하셨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미국 뉴욕 브룩클린 테브너클교회 짐 심발라 목사님의 말씀입니다. “행복은 상황에 따라 변하는 신기루이지만, 기쁨은 다르다. 우리는 행복하지 않아도 기뻐할 수 있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 의하면, 기쁨은 성령으로부터 온다. 성령은 행복의 덧없음을 아시고 성령을 통해 상황을 초월하는 초자연적인 기쁨을 누리게 하신다. 바울은 하나님 나라가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롬 14:17)이라고 말한다.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를 쫓는 제자의 특징이다!”
 주님 안에서 기뻐하고 감사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과 응답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로 18절을 함께 고백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주여, 오늘 우리 마음 가운데 주의 사랑이 넘쳐나고 이 기쁨이 우리 삶 가운데 충만하게 임하게 하여주시옵소서. 마치 샘이 펑펑 솟아오르듯이 우리 마음에 기쁨이 솟아오르게 하여주옵소서. 

3. 화평(Peace)

 그 다음 세 번째가 화평, 평화입니다. 히브리말로 ‘샬롬’이라고 말하는데, 이 샬롬이라고 하는 말이 영어로는 ‘peace’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우리나라 말에는 ‘평안, 평화, 평강, 화평’, 이 네 단어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진정한 평화는 우리 하나님만이 주실 수가 있습니다. 이 평안은 그 누구가 빼앗아 갈 수 없는 평안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은 말씀합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주님이 주시는 샬롬, 이 평화는 마음 깊은 곳에서 자리 잡은 평안함입니다. 환란의 풍파가 몰아닥치고, 문제가 어려움이 다가와도 절대 요동하지 않는 평안함입니다. 깊은 바다는 동요하는 법이 없습니다. 해변가가 촐랑 거리지, 깊은 바다는 늘 고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깊은 바다의 신앙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깊은 바다의 신앙으로 그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평안함이 넘쳐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두려워 떨며 숨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부활의 날, 저들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요한복음 20장 19절입니다.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주여, 이 평강이 우리 마음 가운데 넘쳐나게 하여주시옵소서! 진짜 주님이 주시는 평안함은 극한 절망에서도 낙심하거나 슬퍼하지 아니하고 주님 주시는 은혜로 그것을 이겨내는 평안함입니다.
 찬송가 413장, ‘내 평생에 가는 길’을 작사한 호레이시오 스패포드씨의 간증으로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시카고의 저명한 변호사이자, 법리학 교수요, 신학교 이사요, 운영 위원이었고, 무엇보다도 무디 부흥사를 도와서 교회를 열심히 섬기는 주님의 일꾼이었습니다.

 그런데 1871년, 시카고에 대화재가 나서 교회가 다 불타게 되고 그의 큰 저택도 불이 나서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낙심하지 않고 주님만 바라봅니다. 오히려 자기 집이 불탄 것보다 교회가 불탄 것을 걱정해서 교회를 다시 재건하는 일에 앞장서서 헌신한 귀한 분입니다.
 그런데 그의 부인 안나 스패포드 여사는 몸이 약해져 휴식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네 딸과 함께 영국에 잠깐 가서 좀 쉬고 오도록 했습니다. 원래 같이 가려고 했는데, 본인은 일 처리할 것이 많아서 먼저 떠나보내고 다음에 따라가려고 했는데, 이 배가 대서양을 항해하던 중 1873년 11월 15일 새벽 2시, 영국 범선과 충돌해서 가라앉습니다. 이 사고로 226명의 승객이 목숨을 잃습니다. 의식을 잃은 부인은 구조원에 의해서 구조되었지만 네 딸은 이미 모두 목숨을 잃고 다시는 그 딸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영국 웨일즈에 도착한 부인이 남편에게 전보를 보냅니다. ‘혼자 살아남았음’ 전보를 받고 너무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사랑하는 네 딸을 한꺼번에 잃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비보를 듣고 달려온 친구들에게 말합니다.
 “내게 어떤 희생이 닥쳐와도 주님을 의지하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주님의 평안함이 있었습니다.
 부인을 데리러 배를 타고 영국으로 가는데, 선장이 어느 지점을 지날 때 와서 말합니다. ‘이곳이 배가 충돌해서 가라앉은 곳입니다.’ 그의 마음이 무너졌습니다. 선실로 돌아와서 눈물로 기도합니다. “주님, 왜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 밤새 눈물로 기도할 때, 새벽 동이 터오는데 성경 말씀이 그의 마음 가운데 떠올랐습니다.

 “너는 달려가서 그를 맞아 이르기를 너는 평안하냐 네 남편이 평안하냐 아이가 평안하냐 하라 하였더니 여인이 대답하되 평안하다”(왕하 4:26)
 지금 이 여인은 자기 아이가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평안하냐고 물었을 때 “평안합니다.”
 이 말씀이 큰 위로가 되어서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찬송가 가사를 적어 내려갔습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파도가 치고 달려오는 모습을 보면서 2절을 지었습니다.
 저 마귀는 우리를 삼키려고/ 입 벌리고 달려와도/ 주 예수는 우리의 대장 되니/ 끝내 싸워서 이기리라!
 자기 자신을 바라보니 너무나 주님 앞에 죄짓고 부끄러운 모습이라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지은 죄 주홍빛 같더라도/ 주 예수께 다 아뢰면/ 그 십자가 피로써 다 씻으사/ 흰 눈보다 더 정하리라!
 하늘을 바라보니 뭉게구름이 피어있는데 천국 가있는 딸들이 손을 흔드는 것 같아요. 그래서 4절은 그가 이렇게 작사했습니다.
 저 공중에 구름이 일어나며/ 큰 나팔이 울릴 때에/ 주 오셔서 세상을 심판해도/ 나의 영혼은 겁 없으리/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그는 그 이후 다시 얻은 두 자녀와 함께 이스라엘에 건너가서 고아와 가난한 사람들을 평생 돌보며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어떤 시련이 다가와도 어떤 문제와 어려움과 고통이 다가온다고 할지라도, 주님 주시는 평안함으로 모든 어려움을 넉넉히 이기고, 주님께서 맡긴 사명을 잘 감당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짧은 인생길 지나가는 동안 문제와 어려움이 다가와도 성령 충만함 받아 사랑을 실천하며 살게 하시고, 늘 기쁨이 충만하게 하여주시고, 주님 주신 평안함으로 모든 어려움을 이기며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저희 모두가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김기대 복음 찬양 모음


                                                 

            

 

찬양하여라 찬양하여라!!김기대 복음찬양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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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하는 마음이 없이는

 

수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한 살인범이 어떤 한 재판에서 사형언도를 받았다.

그런데 이 살인범의 형이 되는 사람은 공직에 있는 동안에 아주 많은 공로를 세워서

잘알려진 사람이었다. 이 형은 주지사를 찾아갔다.

그리고 자기 동생을 사면해주기를 간청했다.

주지사는 동생을 위하여 탄원하는 형의 잊혀질 수 없는 공로를 참작하여 그 동생의 죄를 사면해주었다.

양복 안주머니에 주지사의 사면장을 받아 넣은 형은 곧바로 감방 안에 갇혀 있는 동생을 찾아갔다.

동생을 만나본 형은 물어보았다. “만약 네가 사면을 받고 살아나간다면 너는 무엇을 하겠니.”

그러자 동생은 안면을 찡그리더니 즉시 대답을 했다.

만약에 내가 살아서 감방을 나간다면,

첫째로 나에게 사형언도를 내린 판사를 찾아 그 놈을 죽이는 일이고 그 다음에는 내 재판에서

증인으로 섰던 놈을 찾아서 그 놈을 쏘아 죽이는 일이야.”

형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나왔다.

그래서 형무소 문을 나서는 형의 양복 안주머니에는 주지사로부터 받은 사면장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당신의 마음이 용서와 사랑으로 채워져 있지 않으면 천사도 가지고 왔던

하나님의 축복을 당신에게 전달하고 갈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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