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피플, ‘모두의 반찬’ 전달 사업 전개


한부모가정 아이들에게 매월 2회 온정 나눠

 국제구호개발 NGO 굿피플이 모두의 평등한 밥상을 꿈꾸는 ‘모두의 반찬’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국내 저소득층 한부모가정에 반찬을 지원하는 사업인 ‘모두의 반찬’이 기획된 것은 지난해 11월. 부모의 온전한 보호와 관심을 받지 못하고 경제적으로도 열악한 환경에 놓여 매일 김치 한 가지로 끼니를 때우던 한부모가정의 아이를 만난 굿피플 직원이 ‘어떻게 하면 이 아이가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을까’ 고민한 것으로부터 시작됐다. 이번 반찬지원사업은 서울특별시 지원으로 양천구에 위치한 채움반찬(대표 이지선)과 함께 진행하며 오는 11월까지 40가정을 대상으로 월 2회 반찬을 지원한다.

 ‘모두의 반찬’ 첫 배달이 이뤄진 것은 지난달 28일. 이날 굿피플 본부 직원들이 퇴근길을 이용해 40가정을 방문하여 직접 반찬을 전달했다. 굿피플은 지속적인 방문을 통해 반찬지원뿐만 아니라 정서교류 및 기타 생계 지원도 병행해나갈 예정이다.
 굿피플 회장 진중섭 장로는 “저소득층 한부모가정의 경우 가정경제를 꾸려나가는 데 부담이 크고 자녀들에게 쏟을 시간과 여유가 부족한 게 사실”이라며 “저소득층 한부모가정의 아이들이 영양적으로 균형 잡힌 식사를 함으로써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모두의 반찬’ 사업에 많은 관심과 응원을 부탁드린다”고 밝혔다.

 한편 국내 소외된 이웃들을 돕기 위해 아동 후원, 위기가정지원, 희귀난치성질환 환아 및 가족지원 등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는 굿피플은 앞으로 저소득층 한부모가정 뿐만 아니라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소외 이웃들을 대상으로 ‘모두의 반찬’ 사업을 확장해나갈 예정이다.


Subject: 聖 畵-2(10)

西洋人들이 우리나라나 중국 일본 등 東洋에서 와서 寺刹에서 佛畵(탱화:撑畵)를 많이 보듯
우리는 유럽을 여행할 때 유명한 聖堂과 寺院 敎會는 물론 이름있는 博物館과 美術館에서도
많이 보는 그림이 성화(聖畵)다. 성화는 말틴 루터가 宗敎改革을 주장하기 전에는 주로 
"애비타" 등에서 볼 수 있드시 聖母 마리아 像이 聖畵의 中心이었으나
그 후로 Catholic(천주교)에서 Protestant(기독교)가 분리되면서 예수(Jesus)그리스도가
성화의 중심인물로 등장한다.
그러므로 성화를 그런 점에 유념하여 보면 그 製作年代를 대강 짐작할 수 있다.
마리아
 
    
 
 
목수인 아버지 요셉을 돕는 소년 예수
성전에서 학자들을 놀라게 한 소년 예수님
 
    
 
 
회개하라 외치는 세례요한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푸는 세례요한
 
    
 
 
40일을 금식하시며 광야의 시험을 이기신 예수
제자들을 모으시는 예수님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예수님
성전에서 상인들을 내어쫓으시는 예수님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을 가르치시는 예수님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생의 샘물을 가르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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쿼바디스 (1986, 로버트 테일러, 데보라 카)|기독영화, 영상

       

 

쿼바디스 (Qvo Vadis, 1951)

 

기본정보 드라마 | 미국 | 175| 개봉 1986.11.08
 
감독 머빈 르로이
 
출연 로버트 테일러, 데보라 카, 리오 겐, 피터 유스티노브... 더보기

 

줄거리

{여기가 아피아 가도(Appian way).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The most famous road that leads to Rome)'고 했듯, 이 길 역시 로마로 통한다. 이 길로 로마의 군대가 진군했었고, 로마는 제국의 중심이며, 이 전 세계의 주인이다. 그러나 그 권력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멸망은 다가오고 있다. 어느 누구도 미래를 예측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은 권력에 좌우되며, 죽음이 정의를 대신한다. 정복당한 나라의 통치자는 신하를 볼모로 맡겨 버리고, 그들은 예전에야 어쨌건 간에 노예나 인질신세가 되고 만다. 로마의 정복자들로부터 헤어날 길은 없는 것이다. 권력과 부패, 인간의 비참함과 노예라는 이 구조를 바꾸기란 불가능으로만 보였다. 그런데 3년 전, 기적이 일어났다. 유대의 한 사내가 인류를 해방 시키려고 십자가에서 죽었다. 그 사람은 사랑과 속죄에 대한 말씀을 널리 전했으며, 얼마 후 십자가는 오만한 로마 독수리 대신 그 자리에 앉게 됐다. 이 이야기는 영원한 삶에 대한 갈등의 이야기이다. 서기 64년의 뜨거운 여름, 네로(Nero)라고 불리는 반 기독교인인 황제가 군림하고 있었다. 그 때 제14군(14th legion)이 승리하여 로마로 금의환향 하였고, 그 부대의 사령관은 마커스 비니키우스(Marcus Vinicius)였다.}

 폭군 네로(Nero: 피터 유스티노브 분) 황제는 방탕하고 퇴폐적인 생활을 하면서 신흥 종교인 기독교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을 시작한다. 전투에 큰 승리를 거두고 부하들과 함께 로마로 행진하던 마커스 비니키우스(Marcus Vinicius: 로버트 테일러 분)는 네로 황제가 로마 시내에서 큰 잔치를 연다는 이유로 로마 시외곽에서 기다리게 되는데, 궁정의 타락한 축제에서 아름다운 리지아(Lygia: 데보라 커 분)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데.

 [스포일러] 네로의 황녀는 비니키우스의 남성다움에 반해 그를 사랑하나 그가 리지아와 사랑하는 사이임을 알고 네로에게 기독교도들을 잡아 처형하도록 사주한다. 로마에 대화재를 일으킨 네로는 그 죄를 기독교인들에게 씌어 많은 기독교인이 붙잡혀 사자의 밥이 된다. 리지아를 구하기 위해 원형 경기장에 뛰어든 비니키우스. 네로가 그마저 죽이려하자 수 많은 관중들이 반기를 일으키고 궁중 안으로 도망간 네로는 자살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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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사진(마사다)

 

마사다 요새 전경

 


마사다 요새

 


마사다로 올라가는 케이블 카

 


마사다 헤롯궁

 


마사다위에서 내려보는 광경

 

마사다 요새

 

사해(死海)에서 서쪽으로 4㎞ 떨어져 유태광야 동쪽 끝에 우뚝 솟은 바위산.

헤스몬가(家)의 지배자에 의하여 축조되고 BC 35년에 유다의 헤롯왕이 개축하였다.

사방을 깎아지른 벼랑으로 둘러치고 뻗쳐오르던 바위산은 해발 434m이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배(船) 같은 모양을 한 바위산 꼭대기는 평균 너비 120m에

길이 620m,둘레 1,300m다.

마사다에 얽힌 사건을 역사책 ‘유태전쟁’에 자세히 기록한 요세푸스는 서기 66년

유태인들이 로마 제국의 통치에서 벗어나려고 반란을 일으켰을 때 갈릴리 지방의 유태군

지휘관이었다.

그는 나중에 조국에 등을 돌리고 로마군에 넘어갔지만,어느 역사책에도 나와 있지 않은

마사다 싸움을 후세에 전했다.

이 바위산을 처음 요새로 만든 이는 대제사장 요나단이었다.

그 뒤 유태왕 헤로데가 기원전 35년 여기에 성벽을 두르고 무기와 식량을 저장했다.

그는 로마에 기대어 유태를 통치했는데 유태인들은 호시탐탐 반란을 일으킬 기회를 엿보았다.게다가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까지 유태 왕국을 자기에게 달라고 로마 집정관 안토니우스에게 졸라대는 것을 알게 된 헤로데는 로마가 자기를 배신할까 봐 두려워 천혜의 요새인 마사다를 피난처로 만들었던 것이다.

헤로데가 죽은 뒤 마사다에는 로마군이 머물렀으나,유태전쟁이 일어나자 반란군이 이곳을

 차지했다. 서기 70년 로마군은 유태의 반란을 진압하고 예루살렘을 불태웠다.

모든 유태인이 고향에서 쫓겨나게 되었는데,그 중 한 무리가 마사다로 도망쳐

로마군에 항거했다.

그들은 엘리아자르 벤 야이르가 이끄는 젤롯파(열심당;유태교의 한 갈래) 신도들이었다.

마사다에는 헤로데가 가져다 놓은 옥수수와 콩,대추야자가 엄청나게 쌓여 있었고,

포도주와 기름도 넉넉했다.

과일은 신선했고,잘 익어 있었다.

그것들은 메마른 날씨와 먼지가 섞이지 않은 공기 덕분에 100년이 넘도록 썩지 않고

잘 갈무리되어 있었다.

헤로데가 만든 물탱크에는 물이 가득했으며,무기도 1만명 정도가 그보다 훨씬 많은

공격군을 상대해 지구전을 벌일 수 있을 만큼 창고에 그득했다.

 사막과 다름없는 광야를 건너오기에 지친 로마군은 가파른 벼랑 위에서 내려다보며

활을 쏘아대는 반란군을 이길 수가 없었다.

성 안에는 식량과 무기가 넉넉했으므로 마사다야말로 젤롯파 유태교인들이 로마군과 맞서

싸우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요새였다.

마사다에 모여든 유태인은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합쳐 1,000명이 채 안되었다.

로마제국의 눈에는 한줌에 지나지 않았지만,그들은 마사다를 게릴라 기지로 삼아

끊임없이 로마군을 괴롭혔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꺼져 가는 반란의 불길이 또다시 타오를 것 같았다.

이미 2년 전에 유태왕국을 무너뜨리고 ‘유태 정복 기념 동전’까지 만들어 쓰던

로마제국으로서는 마사다의 유태인이 큰 골칫거리였다.

결국은 로마 황제 베스파시안이 정예 군단으로 꼽히는 제10군단에 마사다를 함락하라고

엄명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서기 72년 플라비우스 실바 장군이 제10군단과 보조 군단을 이끌고 마사다로 진군해 왔다.군세는 병사 9,000명과 노역에 부릴 유태인 전쟁 포로 6,000명.실바는 마사다를 빙 둘러

벽을 쌓고 곳곳에 망루를 세웠다.

그러나 반란군보다 그들을 포위한 로마군의 사정이 더 열악했다.

로마군은 먼 데서 물을 길어 왔고 보급품도 유태광야 너머에서 날라왔다.

포위 작전이 소용없다고 깨달은 실바는 무더운 여름이 오기 전에 공격하기로 했다.

마사다 서쪽 벼랑에는 희고 넓은 바위가 툭 튀어나와 있었다.

실바는 그 바위에까지 흙과 돌을 다져 비탈을 쌓도록 했다.

비탈 꼭대기는 마사다 성벽보다 20m쯤 낮았다.

 

이 엄청난 흙산 쌓기 공사는 아이러니하게도 유태인 포로들이 해냈다.

마사다 쪽에서는 활을 쏘아 이 공사를 막으려 했지만 좁은 전선(戰線),

즉 성벽의 한 지점에 많은 병력을 투입할 수 없었다.

다음 단계로 로마군은 망루같이 생긴 공성탑(攻城塔)을 만들어 비탈 위로 올렸다.

공성탑 높이는 마사다 성벽보다 조금 높았다.

철판을 두른 이 탑에서 로마군 궁수들이 활을 쏘아 엄호하는 사이에

다른 병사들이 투석기(投石機)를 끌어올렸다.

세계를 정복한 로마군의 투석기는 무서웠다.

사거리가 400m나 되는 투석기가 20∼25㎏짜리 돌들을 날려보내자 성벽은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유태인들은 무너진 성벽 자리에 서둘러 또 다른 벽을 쌓았다.

그들은 나무기둥을 두 겹으로 박고 그 안에 흙을 넣어 돌이 날아와도 무너지지 않도록 했다.그러자 실바는 박격포에서 벌컨포와 미사일 공격으로 바꾸었다.

불화살이 유성처럼 날아가 박히고 횃불이 던져졌다.

남풍(南風)마저 가세하자 나무 벽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4월15일이 기울었다.

실바는 일단 진지로 물러났다.

그는 날이 밝으면 공성탑에서 구름다리를 놓고 성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로마 정규군 9,000명과 유태 반란군 수백 명의 대결.

마사다는 로마군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로마 병정들은 유태인이 한 명도 도망치지 못하도록 밤을 새워 물샐 틈 없이 지켰다.

밤 사이에 유태인 전원이 자결한 것을 실바가 알 리 없었다.

날이 밝자 로마군은 단단히 무장을 갖추고 성벽에 나무다리를 걸쳐놓았다.

로마군 선봉이 함성을 지르며 구름다리를 건넜다. 그런데 너무나 이상했다.

적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성은 무섭도록 고요함에 잠겨 있었다.

불탄 건물과 960명의 장렬한 주검이 로마군을 맞았다.

그들은 뜻밖에 벌어진 일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우리들의 비겁한 패배가 저들의 승리를 더욱 영광스럽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들로 하여금 우리의 죽음에 실망하고,경탄하도록 만듭시다’라고 열변을 토한

벤 야이르의 말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비록 적군이지만 그 장렬한 죽음 앞에서 로마군은 기뻐할 수가 없었다.

병사들이 이곳저곳을 수색하자 두 여자가 숨어 있던 도랑에서 나왔다.

여자들이 간밤에 있었던 일을 자세히 말하자,실바는 두 여자와 아이들 다섯을 모두

살려 주었다.

로마군은 마사다에 40년쯤 머물렀다.

500년 가량 지나 비잔틴 수도사들이 한동안 살았지만,이슬람 교도들이 유태를 정복하자

그들도 떠나갔다.

유태인들이 이스라엘을 세우기까지 1900년 간이나 세계 여러 곳에 흩어져 떠도는 사이에,

그들의 용기와 신앙을 상징하는 마사다는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않고 사라졌다.

요세푸스가 쓴 마사다 이야기는 다른 역사 기록에는 없었으므로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는 서기 73년에 마사다에 있지 않았으며,더구나 유태인을 배반하고 로마에 붙은 사람이

아니던가. 그러나 요세푸스의 기록이 사실임이 밝혀질 날은 끝내 오고야 말았다.

1838년 사해 바닷가를 여행하던 두 미국인 학자 E 로빈슨과 E 스미스가 우연히

이 장엄한 바위산 위의 폐허 흔적을 보고 망원경으로 살폈다.

그 뒤로 이스라엘 정부가 발굴에 나서기까지 125년간 많은 탐험가들이 마사다의 비밀을

한꺼풀씩 벗겨냈다.

아랍 사람들이 아스 사바(저주받은 땅)라고 부르던 기묘한 바위산이 점차 역사 기록 속의

 마사다로 바뀌어 가자 이스라엘 정부는 결단을 내렸다.

 

1963년 마침내 유태인 고고학자 이가엘 야딘이 요세푸스의 기록을 뒷받침할 유적을

발굴하는 일을 떠맡았다.

1917년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야딘은 이스라엘 독립운동에 참여해 군 참모장이 되었다가

나중에 부총리에까지 올랐다.

1952년 군을 떠난 야딘은 히브리대학 고고학 교수로 일하면서 1955년부터 유태 광야와

사해 근처에서 여러 유적을 발굴해 왔다.

야딘은 1963년 10월∼1964년 5월,1964년 11월∼1965년 4월 두 차례 마사다를 발굴했다.

그리고 요세푸스의 기록에 거의 틀림이 없음을 샅샅이 밝혀냈다.

그는 먼저 짤막한 신문 광고를 내 발굴을 도울 자원봉사자를 모집했다.

워낙 외진 데다 날씨가 고약한 곳이어서,스스로 나선 사람이어야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왕복 여비를 자기가 내고,두 주일간 한 천막에서 열 사람이 지내며 음식도 좋지 않다는

조건이었지만,스물여덟 나라에서 신청서가 쏟아져 들어왔다.

지원자 5,000여명은 한 번에 두 주일씩 스물세번에 걸쳐 번갈아 일했다.

가드나(이스라엘 청소년 전투부대) 학생들과 키부츠(집단 농장)에서 온 지원자까지 합쳐

날마다 평균 300명이 발굴을 도왔다.

야딘은 그 옛날 로마 제10군단장 실바의 캠프와 맞닿는 곳에 발굴본부를 차렸는데,

내내 혹독한 날씨에 시달렸다.

아마도 세계 고고학 발굴 역사에 마사다에서처럼 어려운 발굴은 없었으리라.

 

남풍은 시속 100㎞로 불어 천막을 갈가리 찢었고,느닷없이 쏟아지는 장대같은 소나기는

눈 깜박할 사이에 골짜기를 채웠다.

말라붙었던 개울이 강으로 바뀌고,캠프와 캠프 사이로 흙탕물이 넘쳐흐르는 바람에

보급 물자를 헬리콥터가 날라다 준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렇지만 그 덕분에 야딘은 헤로데 왕이 만든 거대한 물탱크에 물이 가득 차 있었다는

기록을 믿게 되었다.

옛사람들은 바위산 꼭대기에서도 빗물을 잘 저장해 물 문제를 해결했던 것이다.

야딘이 제일 먼저 발굴한 곳은 마사다 북쪽 끄트머리 벼랑에 지어진 3층 건물이었다.

요새라기보다 화려한 벽화로 장식된 왕궁이었다.

 헤로데 왕은 사해의 해면으로부터 340m나 되는 높은 곳,로마 시대의 수려하고 전통적인

공중 목욕탕을 본뜬 독탕에서 찬물과 미지근한 물과 뜨거운 물을 마음대로 쓰며

사치스럽게 지냈다.

헤로데의 궁전을 발굴하느라고 자원봉사자들은 밧줄로 몸을 묶고 까마득한 낭떠러지에

매달려 거센 바람에 흔들리며 일했다.

 헤로데가 그처럼 위험한 곳에 궁전을 지은 까닭은,경치 좋고 방어하기 좋다는 점도

있었겠지만 햇빛 드는 시간이 짧아 서늘하고 바람막이가 잘 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야딘은 여기에서 처음으로 유골 세 구를 찾아냈다.

 

하나는 젊은이의 것이었는데,그 옆에는 갑옷에 달았던 은비늘 수백 개와 화살들이 흩어져

있었다.또 하나는 금방 손질한 듯이 땋은 까만 머리카락이 붙은 젊은 여자의 유골,

나머지 하나는 어린아이의 것이었다.

3층 왕궁 옆 커다란 창고 건물을 복원하는 데는 이스라엘군 공병대가 뜯어서 올린 뒤

조립해 준 기중기를 썼다.

창고 뒤로는 아파트와 비잔틴 수도사들이 지은 회당이 있고,헤로데의 별장인 서궁(西宮)과

큰 수영장이 있었다.

그밖에 작은 궁 세채가 더 있었다.

왕은 마사다를 빙 둘러 성벽을 쌓고,군데군데 탑 38개를 세웠다.

탑 안과 성벽에 붙여 지은 방이 110개.유태인들은 이 방들을 칸막이로 막아 여러 세대가

함께 살았다.대·중·소 크기의 목욕탕이 나란히 발굴되자 야딘은 이것이 유태교에서 침례

의식을 할 때 사용하는 미크베가 아닐까 생각했다.

밖에서 대형 욕탕으로 통하는 수로가 지붕들에서 흘러내리는 빗물을 욕탕으로 끌어들이는

데 쓰인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유태 율법에 따르면 미크베는 하늘에서 떨어져 곧바로 흘러든 ‘순수한’ 빗물로 채워야 한다.물통 따위로 길어온 물은 안 된다.

율법학자들이 마사다의 욕탕을 제2 성전시대 미크베라고 고증하자 온 이스라엘이

떠들썩했다.

그 동안 제2의 성전시대(기원전 520∼516년·스룹바벨 왕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축한 때)

때 미크베는 하나도 발견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가장 뜻깊은 유물이 나왔다.

성벽의 한 방에서 파편더미를 2m 넘게 치우자 옷,이불,바구니 따위와 함께 두루마리

구약성서가 나왔다.

자원봉사자들이 달려와 양피지 한 조각을 내밀었을 때 야딘은

그것이 시편 81∼85편인 것을 금방 알아보았다.

 

적외선 사진을 통해 판독해 보니 서기 40년 이전에 쓰여진 것이었다.

내용은 몇몇 작은 변화 외에는 오늘날 쓰이는 성서와 똑같았다.

마사다에서 나온 두루마리 구약성서는 모두 14개였다.

시편,레위기,에스겔서,신명기 부분들과 유태 민족이 해방된 기쁨을 적은 희년서(喜年書),

그리고 외경(外經;구약 성경에 들어 있지 않은 책 14권.

카톨릭에서는 이를 구약성경과 같은 무게로 다루지만 신교에서는 ‘성경은 아니지만 읽어도

무방한 책’으로 인식한다)인 ‘벤 시라의 지혜서’.‘벤 시라의 지혜서’는 탈무드에 널리

인용되며 율법학자에게 성서와 마찬가지로 권위 있게 취급된다.

원본이 자취를 감추고 희랍어 번역이 ‘외경’에 수록되었는데,마사다에서

히브리어 원본이 나온 것이다

1963년 이래 Y.야딘의 지도로 헤브루대학·예루살렘 발굴협회 등이 협력하여

산마루에 있는 헤롯왕의 부성(浮城)·행정청사(行政廳舍)·

욕장·저수지 등과 더불어 귀중한 파피루스 문서의 단편(斷片)도 발굴하였다.


아합 ― 가장 사악한 북이스라엘 제 7대 왕

1. 인적 사항
① 아합은 '아버지의 형제'라는 뜻. ② 북왕국 이스라엘의 7대 왕, 22년간 통치(왕상16:29).
③ 오므리의 아들(왕상16:29). ④ 시돈 공주 이세벨과 결혼(왕상16:31).
⑤ 장남 아하시야가 왕위를 이음(왕상22:40). ⑥ 차남 여호람이 다시 왕위에 오름(왕하3:1).
⑦ 그의 아들 70명과 딸(아달랴)이 있음(왕하 10:1,6,7 ; 대하 21;6).
2. 시대적 배경
B.C. 874-853년까지 약 22년간 북왕국의 제 7대 왕으로 통치했던 인물. 당시 북왕국 이스라엘은 제 6대 왕 오므리의 강력한 대내외 정책으로 인해 정치적 전성기를 누리던 때였다. 이러한 때에 아합은 베니게의 시돈 왕 엣바알의 딸인 이세벨과 혼인하여 당시 문화적으로 큰 번영을 누렸던 베니게의 문명을 대거 들여왔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바알 종교이다. 더욱이 그가 시돈 왕과 혼인 동맹을 맺은 또 다른 이유는 북쪽의 아람이 크게 세력을 확장하면서 팔레스틴 땅으로 남침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 세력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이외에도 아합은 남유다 왕 여호사밧과도 혼인 동맹을 맺어 팔레스틴 지역의 세력을 장악하는데도 힘썼다. 이처럼 아합은 외교적 역량을 크게 발휘하여 북왕국의 정치, 경제, 문화의 전성기를 가져왔으나 종교적으로는 시돈에서 바알 종교를 말살하려 했던 매우 사악한 정책을 폈다.
3. 주요 생애

4. 성품
① 북이스라엘의 외교 유지를 위해 이방 여인 이세벨과 결혼할 정도로 외교적 술수가 뛰어난 자(왕상 16:31).
② 바알의 광신도인 아내의 영향을 받아 바알을 숭배하고, 정책상 우상 숭배를 조장할 만큼 줏대없고 간악한 자(왕상16:31033).
③ 두 차례에 걸친 아람의 공격을 격퇴할 만큼 군사적 전략에 능한 자(왕상20:1-29).
④ 나봇의 포도원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하자 의기 소침해져 식음을 전폐할 정도로 유약함을 지닌 자(왕상 21:1-5).
⑤ 사람을 죽여서까지 자신의 욕심을 채울 정도로 탐욕과 집착이 강한 자(왕상21:11-16).
⑥ 자신의 죄악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정직한 충고자 미가야 선지자를 옥에 가둘 정도로 영적으로 우매하고 교만한 자(왕상22:13-33).
⑦ 바알 선지자들과 엘리야의 대결을 통해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보고서도 계속 사치와 불 신앙의 생활을 한 것을 볼 때 완악한 믿음을 소유한 자(왕상 22:39).
5. 구속사적 지위
① 북이스라엘의 제 7대 왕(왕상16:29,30)
② 바알 종교 장려 정책과 함께 여호와 종교를 말살하려 했던 자, 즉 여호와의 구속 사역을 끝까지 방해하려 한 사단의 획책에 종노릇한 자(왕상16:31).
6. 주요 업적
① 두 차례에 걸친 아람 군대의 공격을 격퇴(왕상20:1-29).
7. 실수
① 열렬한 바알 숭배자인 이방여인과 결혼함(왕상16:31).
② 바알을 숭배하고 우상 숭배 정책을 실시함(.왕상16:31-33).
③ 아내의 악을 방관함(왕상18:4;21:7-10). ④ 나봇의 포도원을 강탈함(왕상21:1-16).
⑤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아람 왕 벤하닷을 살려줌(왕상20:34,42).
⑥ 진실을 말한 선지자 미가야를 옥에 가둠(왕상22:13-33).
8. 평가 및 교훈
① 아합은 왕위에 오른 후 하나님을 모욕하고 북 이스라엘을 파멸시킬 온갖 극악한 행동을 서슴치 않았다. 그런데 이러한 아합의 행동 배후에는 열렬한 바알 숭배자였던 아내 이세벨의 영향이 무척 컸다(왕상21:25). 곧 그는 오므리 왕조를 굳건히 하려는 외교 정책의 일환으로 이세벨을 선택했지만 그의 결국은 온갖 죄악과 불 신앙으로 인한 파멸뿐이었다. 이처럼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자 하는 탐욕이 신앙보다 앞설 때 이의 결국은 심판에 이르게 된다. 또한 이는 성도에게 있어 배우자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를 잘 보여 준다. 당신에게는 신앙 여부가 배우자 선택의 조건이 되고 있는가?
② 아합은 열렬하게 바알을 숭배하고, 백성들에게 우상 숭배를 조장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북이스라엘은 여호와 신앙이 멸절될 위기까지 놓였고, 결국 하나님의 징계로 3년반 동안의 극심한 가뭄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재앙에도 불구하고 아합은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박해하며 바알만을 좇았다(왕상17:1;18:4) . 이러한 아합의 어리석음을 보면서 성도는 환난을 당하였을 때 먼저 그 원인이 자기에게 있지 않은가 돌이켜 보아야 함을 깨닫게 된다.
③ 아합은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살인까지도 불사하며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았다(왕상21:1-16). 이처럼 인간의 헛된 욕망은 분별력을 상실하고 또 다른 죄를 불러일으키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탐욕만을 위해 도모하는 부질없는 욕심을 버리고, 오직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만을 향하도록 노력해야 하겠다(롬13:13,14).
④ 아합에게는 권력욕에 사로잡혀 그에게 간계를 일삼았던 아내가 있던 반면,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고 잘못된 길을 지적하던 엘리야와 미가야 등의 정직한 충고자도 있었다(왕상17:1 ; 21: 25;22:27,28). 그러나 그는 끝끝내 정직한 자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아내 이세벨의 궤계에 더 귀를 기울였기 때문에 멸망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정직한 자의 충고를 분별하여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가를 깨닫게 된다. 당신에게는 하나님의 진리를 전달해 주는 자의 소리를 분별하는 지혜가 있는가?
9. 핵심 성구
"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스스로 팔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 자가 없음은 저가 그 아내 이세벨에게 충동되었음이라(왕상21:25).

 



성지사진(나사렛,예루살렘교회)
 


나사렛 전경

 


나사렛 수태고지 교회

 


수태고지 교회

 

이 훌륭한 교회는 유명한 이탈리아의 건축가 무찌오에 의해 디자인 되었다. 그는 고대의 교회의 유적을 보존하면서 교회 위의 교회를 연결하는 방법을 고안하였다. 그래서 아래 교회의 바깥벽은 십자군 교회의 기초에 따라 지었고 다만 바쁜 도로에서부터 조금 떨어지도록 몇 미터를 옮겼다. 두 교회의 높이는 24m 길이가 40m 이다. 서쪽과 남쪽면은 부활과 수태 고지를 상징하는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52m 높이의 놀라운 지붕은 돌과 콘크리트로 지탱된다. 천정은 구리로 덮여 있으며 둥근 천장은 전등을 둘러싸여 있다. 전통적으로 인정 받은 수태 고지 동굴은 옛 나사렛의 남쪽 끝에 있다.

 


수태고지 교회 2층

 


1층 마리아 집터

 


수태고지 교회 1층 마리아의 집 터

 


수태고지교회 야외 조각

 


나사렛 마리아 우물

 

마리아의 우물은 성지에서 가장 확실한 장소 중에 하나이다. 현재까지 이 도시의 유일한 식수 공급원이다. 예수도 어머니와 함께 이 우물에 와 다른 부녀자들처럼 물을 길렀음이 분명하다. 산에서 솟는 샘물은 하루종일 부녀자들이 물을 긷는 공공샘터까지 수로를 따라 흐른다. 희랍정교회는 마리아가 수태의 계시를 이 우물에서 물을 긷다가 받았다고 믿어 교회를 그 옆에 세웠다.

 

 


나사렛 회당

 

 

 

 

 

 

 

 

 

 

 

 

 

 

 

 

 

나사렛 성 요셉 기념교회

 


성 요셉교회 내부

 


성 요셉교회 창문

 


성 요셉교회 지하 경당 제단

 


지하 경당

 


지하 경당 창문


예루살렘 성전의 모형


 

예루살렘 성전의 모형


「평화의 땅」이라는 뜻의 예루살렘이라는 지명은 이미 모세 때부터 있어 왔는데, 그 역사를 살펴보면 정말 평화가 절실한 땅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원 1천년 전 다윗이 수도로 정한 이래 36번이나 전쟁에 함락되었고, 점령자의 이름이 바뀌었으며 열 차례나 무너졌던 피의 살육이 점철된「 전쟁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남아있는 성채는 1537년 터어키의 오스만 제국 당시 재건된 것이다. 예루살렘 성내 올드 시티라고 부르는 곳은 지금도 아랍 지역, 유대 지역, 기독교 지역, 아르메니아 지역으로 구획되어진 채, 종족마다 종파마다 갈등과 반목을 계속하면서 외견상으로만 평온을 유지하고 있다. 아주 좋은 예로 금요일은 이슬람의 성일이고, 토요일은 유대인의 안식일, 일요일은 기독교인들의 주일(主日)로 저마다 종교의식에 따라 엄격히 지켜진다. 지금은 황금색 돔의 오마르 회교 사원이 서 있는 자리에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다.  사진은 예루 살렘 신시가지 홀리랜드 호텔에 전시되어 있는 예수 당시 성전건물의 모형이다.


부활하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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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월교회 전교인65명 순교이야기   


   전남 영광군 염산면 야월리에 위치한 야월교회는 광주 선교부에서 활동하던 미국 남장로교 배유지(유진 벨) 선교사에 의해 1908년 4월 5일에 설립되었다.


   1950년 6월 22일(한국전쟁 3일전), 공산군 1개 부대가 야음을 타 야월리 창수 앞으로 침투하였다. 그러나 마침 여순 반란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광주에 주둔하고 있던 군 병력이 내려와 작전을 펴 거의 전멸시켰으나, 잔당은 옥실리와 야월리 뒷산으로 잠입하였다. 그 후 산에 나무하러 갔던 정문성 씨가 부상을 입은 공산군을 보고 경찰에 신고하여 포위되었을 때, 자수를 권유하고 설득하여 경찰에 넘겨주었는데 그를 총살해버렸다. 이 사건 후 다른 잔당은 동료가 총살당했다는 사실에 분노하며 특히, 정문성이 교인이라는 것을 알고 야월교회에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한편, 6. 25한국전쟁으로 야월리를 점령한 공산당들이 양조장집 주인과 다른 유지들을 교회당 뜰에 무릎 꿇리고 마을 사람들 앞에서 공개처형 하기에 앞서 인민재판을 벌였다. "여러분! 인민의 피와 땀을 착취한 이 악질 반동세력들을 어떻게 하면 좋겠소?" "인민의 원수이니 죽여야 합니다." 그때 야월교회 출신 김성종 영수가 칼칼한 목소리로, "아닙니다. 그 사람은 흉년이 들어 어려웠을 때 쌀을 풀어 나눠주었고, 법 없이도 사는 사람입니다. 나라에선 이런 사람을 상을 주어도 모자랄진대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됩니다."고 하자, 다른 사람이 "옳소!" 하면서 동조하였다. 이로써 계획에 차질이 생기자, 그들은 기독교인들을 먼저 죽이려는 무서운 음모를 꾸미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950년 9월 29일 국군과 UN군이 목포에서 함평 영광을 수복할 때 기독교인들과 우익 인사들이 대대적으로 국군을 환영한 일이 있었는데, 미처 후퇴하지 못한 채 인근 산 속에 은거하고 있던 공산군과 지방 빨갱이들이 국군을 환영한 교인들과 주민들에 대한 보복계획을 세웠다. 한편, 염산면과 백수면은 가장 늦게까지 수복되지 못하였는데, 지방 빨치산과 공산군들은 인민재판으로 처형을 시작하여 1950년 9~10월에 걸쳐, 야월교회 전교인 65명이 잔혹하게 학살당하였으며 교회당마저 불타는 참상을 겪게 되었다.


   이후 야월교회는 1989년 배길량 담임목사에 의하여 65명 순교자기념비를 건립하면서 다음해 11월 29일 준공예배와 함께 순교자기념탑 제막식을 가졌으며, 2006년 6월에는 전국교회의 헌금과 전남도청과 영광군청의 지원으로 연건평 2백50평 규모로 “기독교인순교기념관” 을 야월교회 옆에 2층으로 건립하였다. 
 

   기념관은 야월교회 뿐 아니라 영광군의 기독교순교자들까지 다함께 기리며 1층은 순교역사자료를 사진과 조형물로 전시하고 있는데 중앙 홀에서 2층까지 세워진 ‘기도하는는 손’ 조형물은, 상처받은 손과 부드러운 손이 마주잡고 있는 형상으로 표현하여 화해와 용서의 강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또한 2층에는 예배실과 순교자들의 영정과 한국기독교 교회사적인 고서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 기념관을 돌아보면서 한국기독교 역사 속에서 야월교회가 6. 25 한국전쟁으로 수난을 당하여 흘린 '순교자의 피'가 결코 헛되지 않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2009.5.14.연합기독뉴스/박경진 장로)


   야월교회(담임 배길량 목사) : 전남 영광군 염산면 야월리 471-1

 


긍정적인 믿음과 고백이 이루는 기적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브리서 11장 1절)

어느 크리스마스 이브에 나는 새벽까지 설교 준비를 하느라고 여념이 없었는데, 급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어떤 사람이 국립 서울대학병원에서 건 전화였습니다. "조목사님이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 "조목사님 교회의 성도 한 분이 지금 죽어가고 있습니다.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사고를 낸 운전사가 자동차 뒷좌석에 태운 채 밤새도록 돌아다녔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는 사람이 택시에 치어 죽었을 경우 사고를 낸 운전사가 그 유족에게 100만원 정도만 배상하면 대개 돈 문제는 끝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치인 사람이 다치기만 하고 살아 있으면 운전사가 모든 치료비를 물어야 했습니다. 따라서 운전사가 사고를 냈을 때, 목격자가 없으면 다친 사람을 병원으로 데려가지 않고 죽을 때까지 태우고 달리는 경우가 간혹 있었습니다. 그 편이 문제를 해결하기 쉽다고 생각해서였습니다.

사고를 당한 그 성도는 사고가 나기 직전에 아름다운 모자와 몇가지 다른 물건들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샀습니다. 그는 그 선물을 아내에게 빨리 주고 싶어서 들뜬 마음으로 신호등도 안 보고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택시에 치인 것입니다. 밤이 깊은 시간이라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택시 운전사는 그 성도를 차에 싣고 숨이 끊어지기만을 기다리며 밤새도록 돌아다닌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도는 끝내 죽지 않았고 마침내 이 택시는 경찰의 눈에 띄어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그 덕분에 환자가 병원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연락을 받고 급히 병원으로 달려가 보니, 사고의 충격이 심해서 그 성도는 내장을 크게 다친 상태였습니다. 독이 든 피가 벌써 그의 온 몸에 쫙 퍼져 있었습니다. 의사가 나를 알아보고 불렀습니다.

"조목사님, 그 사람을 꼭 수술할 필요가 있을까요? 의학적으로는 이미 가망이 없습니다. 너무 오랜 시간 방치되어 패혈증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치료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말했습니다. "선생님, 어서 수술하십시오. 저는 크리스마스 예배 설교가 끝나는 대로 곧 다시 오겠습니다."

크리스마스 예배가 끝난 후, 나는 국립 서울대학병원 응급실로 달려갔습니다. 그 성도는 계속 혼수 상태였고 의사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다시 말했습니다. "목사님, 조금도 기대하지 마십시오. 이 사람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사람의 위를 수술하려고 절개해 보니 세 군데나 손상되어 있고, 위 속에는 배설물과 찌꺼기가 꽉 차 있었습니다. 더 이상 희망이 없으니 그런 줄 아십시오."

"그래요? 하여튼 저도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하고 나는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병실에 들어갔을 때 그는 전혀 의식이 없었습니다. 나는 그 옆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5분만 시간의 여유를 주십시오. 5분간만 그를 혼수 상태에서 깨어나게 해주십시오." 그런데 기도 중에 그가 움직이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얼른 보니, 그 사람이 의식이 돌아왔는지 눈을 떴습니다. "아이고! 목사님, 죽겠습니다." 그가 울부짖었습니다.

기도대로 최소한 5분의 시간을 얻은 것입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말했습니다. "형제님, 그렇게 말하면 안됩니다. 계속 그렇게 말하면 믿음을 갖지 못하므로 형제님은 죽습니다. 형제님은 이 고통을 이기고 살아나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형제님의 생각을 바꾸십시오. 이 3차원적인 세상의 환경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오직 한 길은 형제님의 믿음입니다. 형제님은 믿음으로 다시 낫는다는 비전과 꿈을 가져야 살 수 있습니다. 온몸이 다 치료된 모습을 생각하십시오. 제 말 잘 들으십시오. 아주 건강한 젊은 사람의 모습을 마음 속에 그려보세요. 그는 집을 나서며 아내에게 출근 인사를 합니다. 그는 젊음과 건강미가 넘쳐 흐릅니다. 그는 활기에 차서 일을 성공적으로 잘 처리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고 찬탄합니다. 그는 저녁이 되어 일을 끝내고 아내에게 줄 멋진 선물을 샀습니다. 아내는 그가 집에 돌아와 식사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가 도착했을 때 아내는 현관까지 뛰어나와 포옹하며 반갑게 맞이합니다. 그들은 집으로 들어가서 맛있는 식사를 하고 집에서 조용하고 행복한 저녁 시간을 보냅니다."

"형제님, 제가 지금 얘기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바로 당신입니다. 형제님의 마음 속에 그 모습을 그리세요.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마음 속으로 이 사람은 바로 나다. 이렇게 말하십시오. 형제님, 제발 당신이 죽는 그림을 마음에 그리지 마세요. 죽은 시체의 모습은 상상도 하지 마십시오. 계속해서 지금 생각한 그 건강하고 멋진 젊은이만 꿈꾸세요. 저는 기도할 터이니 형제님은 그냥 머릿속에 그림을 계속 그려보십시오. 기도는 제게 맡기시고요.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예, 목사님. 저의 생각을 바꾸겠습니다. 저는 그 건강한 젊은이가 바로 저라고 믿겠습니다. 저는 그 꿈과 비전을 저의 현실로 삼겠습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바로 그런 저의 모습이 지금 눈에 보입니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동안, 외과 의사와 간호사들이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킬킬대며 나를 비웃었습니다. 나를 정신나간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나와 그는 심각했습니다. 나는 성령의 4차원의 영적 법칙을 알았고, 그 성도는 성령의 언어를 말한 것입니다. 외국에서 일하는 선교사가 그 나라의 말을 배워야 통역 없이 직접 그들과 대화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태로 죽어가던 사람이 성령의 깊은 언어를 배워 성령과 직접 대화한 것입니다.

나는 그 성도의 침대 곁에 무릎을 꿇고 그 성도를 붙들고 기도했습니다. "성령이시여, 당신은 오늘날 온 세상의 치료자이십니다. 이제 이 형제는 성령의 언어를 말합니다. 이 형제는 자신이 완전히 치료받고 회복된 비전과 꿈을 가졌습니다. 형제의 육신에 임하시고 주관하셔서 치료의 역사를 베풀어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치료의 능력으로 가득하여 깨끗이 나을지어다!"

이 때 갑자기 간호사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방이 왜 이리 덥지? 온도가 너무 높은데." 그러나 실제 바깥 날씨는 매우 추웠습니다. 방이 더운 까닭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 열기는 이 성도를 치료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것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불 곁에 있는 것처럼 덥다고 야단이었습니다. 그들의 귀는 열기로 인해 붉게 변했습니다. 하나님의 치료하시는 권능의 힘이 그 방안에 얼마나 강하게 임했던지 침대마저 흔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 성도와 내가 믿음을 풀어놓자, 성령께서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응답하신 것입니다. 성령께서 임하셔서 치료의 역사를 베푸신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자 성령께서 그 성도를 치료하신 것입니다. 놀랍게도 그 성도는 일주일만에 다 나아서 병원을 퇴원했습니다. 그는 현재 건강한 몸으로 화학 약품 사업을 아주 잘하고 있습니다. 매주일 아침마다 대성전 2층 발코니에 앉아 예배드리는 그를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순복음교회 창립25주년 감사예배 드려


이영훈 목사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하신다”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여의도순복음총회·이하 기하성) 총회장 이영훈 목사는 9일 경기도 하남시에 위치한 우리순복음교회 창립 25주년 및 이전 5주년 기념 감사예배에 참석해 말씀을 전했다. 김영석 담임목사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예배는 기하성 부총회장 김명현 목사의 대표기도에 이어 이용우 목사(순복음큰기적교회)의 성경봉독, 연합성가대의 찬양, 여의도순복음교회 북미캐나다선교회의 특별공연에 이어 이영훈 목사가 ‘인도하시는 하나님’(출13:21∼22)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이영훈 목사는 “인도자를 잘못 만나면 실패만 있을 뿐”이라며 “하나님은 이 땅에 일천만 크리스천을 인도하고 계신다. 중국, 러시아, 일본, 북한이 뭐라고 해도 우리는 축복받을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돕고 계신다”고 역설했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순복음교회를 25년간 인도하셨기에 교회가 부흥하고 또 부흥했다”며 “앞으로도 세상의 음성이 아닌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노력하라”고 당부했다.
 이날 기하성 경기동지방회 증경회장 명성훈 목사의 격려사에 이어 기하성 총무 엄진용 목사, 이현재 국회의원, 오수봉 하남시장 등의 축사가 있었다.
 진덕민 위임목사와 김영석 담임목사는 감사인사를 전했다. 기하성 증경총회장 엄기호 목사가 축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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