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예배/부모의 역할과 책임

◎ 찬송가(다같이) : 199장(통일 234장), 570장(통일 453장)
◎ 신앙고백(다같이) : 사도신경
◎ 말씀봉독(다같이) : 보라 자식들은 야훼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시편 127편 3절)
◎ 본문읽기
◎ 주기도문(다같이) :
맨 마지막에
◎ 오늘의 만나
 “아이는 부모의 등을 보고 자란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자녀의 인격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존재가 부모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는 저절로 혼자 크지 않습니다. 자녀가 건강한 신앙과 윤리적, 경제적으로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부모가 그 역할과 책임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1. 아버지의 역할
 하나님께서 아버지에게 ‘머리’로서의 권위를 주시는 것은 군림하라는 뜻이 아니라 책임을 다하라는 의미입니다. 아버지는 가장으로서 가정의 총책임자입니다. 아버지에게 부여된 가정에 대한 책임은 경제적인 부분이나 사회적인 것도 있겠지만 가정의 영적인 건강에 대한 부분이 가장 큽니다. 영적 제사장의 역할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가정을 이끌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섬기는 가정의 아버지는 하나님의 나라와 뜻이 가정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힘써야 합니다.
 아버지는 가장으로서의 리더십을 발휘해야 합니다. 리더십의 핵심은 하나님 중심으로 서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가장이 먼저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바로 서는 신앙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신명기 4장 10절은 “네가 호렙 산에서 네 하나님 야훼 앞에 섰던 날에 야훼께서 내게 이르시기를나에게 백성을 모으라 내가 그들에게 내 말을 들려주어 그들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나를 경외함을 배우게 하며 그 자녀에게 가르치게 하리라 하시매”라고 말씀합니다. 자녀는 아버지의 말이 아닌 삶을 통해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아버지는 자녀가 성장하면서 보고 배울만한 신앙의 모델, 삶의 모델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아버지는 자녀를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올바른 훈계는 하나님의 지혜로 자녀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때 주의해야 할 점은 자녀의 수준과 성장 단계에 맞는 훈육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자녀를 훈계하는 것을 자신의 분노를 해소하는 도구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엡 6:4). 비록 엄한 훈계라 할지라도 그 속에 진심 어린 사랑이 담겨있다면 자녀는 상처받지 않고 가르침을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는 자녀의 의식주와 교육을 제공할 의무가 있습니다. 부모는 아이가 자라나 독립할 때까지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주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성실하고 지혜로운 사회적, 경제적 활동을 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2. 어머니의 역할
 어머니는 가정에서 생명을 전수하는 역할을 합니다. 어머니는 뱃속에 태아가 생기는 순간부터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생명이자 선물이라는 마음을 품고 태교와 출산에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자녀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놀라운 축복입니다. 시편 127편 3절은 “보라 자식들은 야훼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아이를 낳는 것도 위대한 일이지만 그 아이가 올바르게 살아 갈 수 있도록 보호하고 양육하는 것은 더욱 위대한 일입니다. 자녀 양육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그들의 마음과 생활 속에 심어주는 것입니다. 생활 속에서 아이와 가장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가장 많이 대화하는 사람은 어머니입니다. 그러므로 어머니는 아이에게 시시때때로 말씀을 가르쳐줄 책임이 있습니다.
 자녀를 올바로 이끌기 위해서는 잘못했을 때 훈계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훈계와 균형을 맞추어 위로도 함께해 주어야 합니다. 아버지가 주로 훈계의 역할을 맡는다면 어머니는 위로해주는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럴 때 아이들은 잘못된 부분에 대해 훈육을 받으면서도 위로해주는 부모님의 품 안에서 바르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자녀의 앞날을 위해 어머니는 끊임없는 격려로 다가가야 합니다. 아이에게 어머니의 칭찬과 격려보다 더 큰 힘은 없습니다. 지혜로운 어머니는 칭찬과 격려를 통해 자녀가 가지고 있는 잠재성을 끌어내줍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공통으로 해야 할 일도 있습니다. 바로 자녀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3장 28절은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땅에 떨어져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듣고 응답해주십니다.

3. 조부모의 역할
 시대가 변해가면서 부모의 역할 못지않게 조부모의 역할도 중요해졌습니다. 조부모는 살아온 삶의 경험이 부모보다 깊습니다. 그 경험을 통해 가정의 내력을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이 앞으로 살아갈 방향을 정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아이들은 누군가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주기를 기대합니다. 하지만 부모는 자녀를 사랑한다고 모든 것을 용납해줄 수 없습니다. 잘못된 길로 나갈 때는 야단을 치거나 훈계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조부모는 양육에 대한 일차적 책임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부모보다 더 관대하게 아이들을 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면에서 조부모는 아이들에게 특별한 사랑을 줄 수있습니다.
 신앙의 조부모는 영적인 면에서도 남다른 연륜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명기 32장 7절은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조부모님들은 풍부한 경험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신앙의 전통이 끊
어지지 않도록 아이들에게 잘 전수해주어야 합니다.
 
 ◎ 간추린 만나
 <아버지의 역할>

1. 아버지는 가정의 영적 제사장입니다.
2. 아버지는 신앙과 생활에서 있어서 자녀의 좋은 본보기가 되어야 합니다.
3. 아버지는 자녀를 안전하게 보호하고 훈육할 책임이 있습니다.

<어머니의 역할>
1. 어머니는 생명을 잉태하는 소중한 역할을 감당합니다.
2. 어머니는 자녀가 어릴 때부터 시시때때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3. 어머니는 위로와 칭찬 그리고 격려를 통해 자녀의 마음을 잘 돌봐야 합니다.

<조부모의 역할>
1. 조부모는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아이를 돌봐줄 수 있습니다.
2. 조부모는 가정의 신앙의 역사를 자녀 대대로 물려주는 역할을 감당합니다.

◎ 내 삶의 만나
 <옆 사람에게 인사>

1. 하나님께서 당신을 아버지로(어머니로) 부르셨습니다.
2. 믿음으로 자녀를 양육합시다.
3. 사랑으로 자녀를 양육합시다.

<기 도>
1. 각 가정의 아버지들이 믿음 안에서 좋은 가장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2. 어머니들이 가정에서 사랑의 통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3. 조부모로서(조부모님들이) 신앙의 전통을 잘 전수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중보기도>
옆 사람과 기도 제목을 나누고 같이 기도합시다.


정태권 안수집사(신안산교회) -

잃었던 미각을 되찾았어요

병원 치료로는 전혀 고침 받지 못해
믿음의 하나님 바라보며 간절히 기도
치유 바라며 감사예물 드리자 깨끗이 나아



 2014년 4월경 갑자기 미각(味覺)을 상실했다. 사고를 당한 것도, 다른 질병이 있던 것도 아닌 건강에는 자부심이 강했던 나였다. 소금을 먹어도 짜지 않았고, 꿀을 먹어도 전혀 단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며칠 지나면 돌아오겠지’ 했지만 일주일이 지나도 미각은 돌아오지 않았다.

 병원을 찾았다. 이비인후과 전문의는 원인을 확실히 모르겠고, 치료방법 또한 특별히 없다며 “가글 열심히 하고 소염제 처방을 해줄테니 복용하라. 그래도 회복되지 않으면 큰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혹시 못 고치는 병이 아닐까 덜컥 겁이 났다. 진료의뢰서를 가지고 분당에 있는 대형 병원에 예약하고 진료를 받으러 갔다. 시약 검사 등을 받았으나 거기서도 ‘가글액, 소염제 처방’을 해주시더니 보름 후 다시 오라고 했다. 어느덧 미각을 상실한 지 한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내 안에 점점 실망이 커지고 있었다. 병원 로비 난간을 잡고 뒤늦게 간절히 기도했다.

 “전능하신 야훼 하나님! 제가 참으로 죄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서 순종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했으며 물질을 믿고 살아 왔습니다. 세상 유혹에 빠져 살아온 지난 시간을 회개합니다. 용서하여 주세요” 한참을 난간에 기대어 기도하고 있었다. 그때 지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나와 똑같이 미각을 상실한 사람이 있는데 한 대학병원 교수에게 진찰받고 약 처방 받아 3일 약을 복용한 후 미각이 돌아 왔으니 그 교수를 찾아가보라는 것이었다.

 순간 ‘야훼 하나님께서 나에게 치료의 길을 내어주시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열흘 후 그 병원 교수를 찾아 내가 들었던 이야기를 했다. 의사는 당황해하며 그 환자는 운이 좋았던 경우라고 말했다. 병원에서는 소염제 처방을 해줄테니 보름 후 다시 오라했다. 결과는 또 마찬가지. 여전히 미각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또 다시 2개월이 지났다. 약을 먹어도 전혀 소용이 없었다. 그후 1년 2개월 동안 병원에 가질 않았다. 아무런 약도 먹지 않았다. 오직 기도에만 힘쓰고 내가 찬양 봉사하는 교회 중보기도회에 나의 문제를 알리고 기도를 부탁했다.

 그런데 올해 9월 경 하나님께서 나에게 깨우침을 주시는 일이 일어났다. 주일 아침 안수집사회에서 예배를 마친 후 임 모 안수집사의 간증이 있었다. 집을 처분하고 이사를 가야하는데 도무지 집을 보러오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부부가 열심으로 기도하던 중 하나님께 믿음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먼저 예물을 심자고 다짐하고선 주일에 감사예물을 심었단다. 그러자 며칠 만에 원하는 사람이 나타나 그 자리에서 계약이 이뤄졌다며 감사간증을 전했다. 그 순간 나는 ‘그동안 열심히 기도했지만 미각 회복을 놓고 감사 예물을 드린 적이 없었구나’라고 깨달았다. 그리고 미각이 회복될 때까지 하나님께 감사드리자는 생각으로 계속 물질을 심겠다고 다짐했다. 주일예배와 금요철야예배 때 “미각이 회복되게 해주심을 믿음으로 감사드립니다”라고 헌금봉투 써서 예물을 드렸다. 그렇게 3주가 지났을 때 혀끝에서 미세한 단맛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정말 기뻤다. 하나님께서 잃었던 미각을 치료해주셨다는 확신이 다가왔다. 그리고 한주가 지날 때마다 10%, 20%, 50%… 서서히 미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든 미각이 1년 6개월 만인 10월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하나님은 믿음 안에서 감사로 심는 예물 위에 반드시 보응해주시지 그냥 지나치는 분이 아님을 이번 일을 통해 깨달았다.

 누군가 절실한 기도 제목을 가지고 기도하고 있다면 먼저 믿음과 감사로 하나님께 심으라고 말해주고 싶다. 반드시 하나님의 응답과 축복이 임하게 될 것이다.


구역예배/행복한 부부

◎ 찬송가(다같이) : 299장(통일 418장), 555장(통일 없음)
◎ 신앙고백(다같이) : 사도신경
◎ 말씀봉독(다같이) :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세기 2장 23∼24절)
◎ 본문읽기
◎ 주기도문(다같이) : 맨 마지막에
◎ 오늘의 만나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뒤 아담과 하와를 통해 가정을 만드셨습니다. 부부는 ‘부모를 떠난다’는 독립적인 성격과 ‘둘이 한 몸을 이룬다’는 연합의 성격이 있습니다(창 2:24). 이를 위해서 부부는 서로를 도우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부부의 행복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번 과에서는 믿음 안에서 행복한 부부가 되기 위한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보길 원합니다.

 1. 행복한 부부가 되기 위한 노력

 부부는 매우 친밀한 관계이기 때문에 상대방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정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불화는 이러한 태도에서 생겨납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다르게 창조하셨습니다. 그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행복한 부부가 되는 첫 걸음입니다. 또한 부부는 결혼하기 전 서로 다른 환경 속에서 자라나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를 이해하기보다 고치려고 하면 상대방은 자존감에 큰 상처를 입고 서로 불화하게 됩니다. 신앙적, 윤리적으로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면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포용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또한 부부가 서로 존중하고 인정하고 칭찬하는 것은 상대방의 마음의 상처를 아물게 하고 서로에게 더욱 가치 있는 존재가 되는 방법입니다. 잠언 15장 23절은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라고 말씀합니다. 부부간의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는 잘못된 생각으로 상대방의 부족한 점을 들추어 흠을 내지 말아야 합니다. 부부는 하나님께서 한 몸으로 만드신 공동체입니다. 상대방을 낮추는 것은 자기 자신을 낮추는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서로의 부족함은 덮어주고 잘하는 것은 칭찬함으로써 서로가 건강한 자아상을 만들어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긴 인생을 살면서 같은 방향을 보며 함께 걸어가는 관계가 부부입니다. 그러므로 부부는 서로 하나 될 수 있는 공통의 관심사를 가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공통의 목표나 취미를 함께할 때 유대감이 깊어지고 가정의 행복을 더 크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부가 모든 것을 함께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많은 것을 함께하는 만큼 서로의 독립적인 시간과 공간을 주는 것도 중요합니다. 자신의 인생의 가치를 배우자에게만 너무 의지하지 않도록 하고 상대방의 이해와 지지를 받으며 자기 개발과 이상의 실현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부부는 정신적으로만 결합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시기에 적절한 스킨십을 통해 신체적인 교감을 갖는 것도 중요합니다. 마음이 담긴 스킨십은 상대방을 기분 좋게 해주고, 외로움을 없애주며, 두려움과 불안 그리고 긴장감을 해소시켜줍니다.
 무엇보다 행복한 부부가 되기 위해서 지속적인 애정 표현이 필요합니다. 대체적으로 한국의 부부는 사랑을 표현하는 것에 서툴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 사랑의 충전이 필요합니다. 남편과 아내는 결혼한 후에도 여전히 사랑을 필요로 하는 남자와 여자입니다. 표현하지 않은 사랑은 결국 점점 희미해지고 맙니다.

 2. 남편으로서의 역할

 부부간에 특별히 남편이 해야 하는 역할이 있습니다. 성경은 남편에게 예수님이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할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 25절은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교회를 사랑하신 사랑은 자기의 생명을 내어주신 사랑입니다. 남편은 자신과 아내가 한 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아내를 지켜주고 보호해야 합니다.
 남성과 여성은 신체적으로나 감성적으로 확실한 차이점이 존재합니다. 특히 여성은 감성적인 면에서 남성보다 훨씬 섬세하고 민감합니다. 남편들은 아내를 대할 때 생각나는 대로 말을 내뱉어 아내의 마음에 상처를 줍니다. “그러한 것으로 왜 상처를 받냐!”라고 말하며 면박을 주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남녀의 차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행동입니다. 자기의 방법대로 아내를 쉽게 대하지 말고 아내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배려를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3. 아내로서의 역할

 행복한 부부가 되기 위해서는 남편뿐만 아니라 아내들도 해야 하는 역할이 있습니다. 성경은 남편이 아내의 머리와 같다고 말씀합니다. 아내들은 머리와도 같은 남편에게 기쁜 마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엡 5:23).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순종은 남편에 대한 무조건적인 순종이 아닙니다. 서로의 신뢰 가운데 나오는 기쁨의 순종을 이야기합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가장 바라는 것은 믿음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믿어줄 때 그 남편은 아내를 자신의 몸처럼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할 때 최선을 다해 가장의 책임을 다하게 될 것이고 아내는 그런 남편에게 기쁜 마음으로 순종할 수 있습니다.
 또한 아내는 스스로를 단장해야 합니다. 겉모습을 아름답게 단장하여서 남편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속사람을 단장해야 합니다. 잠언 12장 4절은 “어진 여인은 그 지아비의 면류관이나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지아비의 뼈가 썩음 같게 하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어질고 현명한 아내는 가정을 일으키고, 가정을 통해 사회를 바꾸는 역할을 합니다. 내면의 아름다움이야말로 전인적인 아름다움을 이끌어냅니다.

 ◎ 간추린 만나
 <행복한 부부가 되기 위한 노력>
1.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는 것이 행복한 부부가 되는 첫 걸음입니다.
2. 서로 칭찬하고 격려하며 사랑의 표현을 해주어야 합니다.
3. 공통의 관심사와 취미를 갖는 것이 행복한 부부가 되는 데 큰 도움을 줍니다.

<남편으로서의 역할>
1. 남편은 아내를 자신의 생명을 다해 희생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2. 아내의 섬세한 감정을 이해하여 아내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배려해야 합니다.

<아내로서의 역할>
1. 아내는 남편을 신뢰하고 기쁜 마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2. 내면의 아름다움을 가꾸어 가정을 일으키는 어진 여성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 내 삶의 만나
 <옆 사람에게 인사>
1. 예수님 안에서 행복한 부부가 됩시다.
2. 예수님 안에서 좋은 남편이(아내가) 됩시다.

<기 도>
1. 서로 사랑하고 의지할 수 있는 배우자를 주심을(주실 것을) 감사하는 기도를 합시다.
2. 배우자의 실수와 연약함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합시다.
3. 배우자를 사랑으로 섬길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합시다.

<중보기도>
옆 사람과 기도 제목을 나누고 같이 기도합시다.


무너진 단을 수축하라/이영훈목사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그에게 가까이 가매 그가 무너진 야훼의 제단을 수축하되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엘리야가 돌 열두 개를 취하니 이 야곱은 옛적에 야훼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신 자더라 그가 야훼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제단을 쌓고 제단을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둘 만한 도랑을 만들고 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이르되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 하고 또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 하여 다시 그리하니 또 이르되 세 번째로 그리하라 하여 세 번째로 그리하니 물이 제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 찼더라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열왕기상 18:30-36

 우리가 예수 믿고 한평생 살아가는 동안에 가장 중요한 것은 늘 예수를 처음 믿었을 때 그 은혜, 그 감격, 첫사랑을 잃지 말아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칭찬 받는 교회였고 많은 일을 한 교회였지만, 계시록 2장 4절을 보면 그들이 책망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처음의 그 은혜, 그 기쁨, 그 감사, 그 감격을 잃어버리고, 교회가 부흥하니까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서 칭찬하니까 그 칭찬에 묻혀서 풍성함에 묻혀서, 주님을 향한 열정이, 감사 감격이 사라진 것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늘 살펴야 합니다. 내가 처음 예수를 믿었을 때, 그 어느 날 내가 성령 체험을 했었을 때 눈물이 나고 내 마음이 뜨거워서 “나 주 위해 살리라.”고 결심했지만 그것이 어느 순간에 알게 모르게 사라져버린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예배에 대한 감격도 사라지고 기쁨도 사라지고 감사도 사라진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 나와야 합니다.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나의 첫사랑을 회복시켜주시옵소서! 다시 성령으로 충만케 하여주시옵소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애굽에서 해방 받아 가나안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들이 풍요로움 속에 갇혀서 첫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우상을 숭배하고 죄짓고 불의하고 방탕하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심판하셔서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아니하고 온 땅이 기근이 들어서 큰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때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회개케 하시기 위해서 갈멜산에서 엘리야 선지자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가 영적 대결을 하는 그러한 놀라운 장면이 전개됩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이 모여서 자기들의 신에게 “신이여, 신이여, 불을 내려주옵소서! 불을 내려주옵소서!” 아침부터 하루 종일 부르짖었지만, 아무런 변화가 다가오지 않았고, 그들의 신은 침묵했고, 엘리야가 엎드려 기도할 때 불이 떨어졌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인 교훈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십자가 신앙을 회복하라

 첫째로, 우리는 십자가의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의 십자가의 신앙이 회복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풍성히 임하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18장 30절에 성경은 말씀합니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그에게 가까이 가매 그가 무너진 야훼의 제단을 수축하되”
 백성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더 가까이 와라!” 이미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이 부르짖고 부르짖었는데도 아무런 응답이 임하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은 ‘아, 바알과 아세라가 가짜 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가까이 오시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자!” 무너진 제단을 다시 쌓은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 가운데 무너진 신앙의 제단을 다시 쌓아야 됩니다. 감사의 제단이 무너졌습니까? 다시금 감사의 제단을 쌓으시기 바랍니다. 기도의 제단이 무너졌습니까? 다시 기도의 제단을 쌓으시기 바랍니다. 찬양의 제단이 무너졌습니까? 다시 찬양의 제단을 쌓으시기 바랍니다. 무엇이 무너졌는지 본인이 알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다시 무너진 제단을 쌓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기느라 예배의 제단이 무너졌습니다. 감사와 찬양의 제단이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저들의 삶 가운데는 죄와 절망만 가득하게 된 것입니다. 다시 제단을 쌓고 그다음 그 위에 나무를 벌여놓고 송아지를 잡아 올려놓았습니다. 열왕기상 18장 33절은 이와 같이 말씀합니다. “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저들의 죄 때문에 송아지가 피 흘려 죽었습니다. 나무에 올려진 송아지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신앙을 회복해야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죽으셨기 때문인데, 우리는 늘 “주님의 은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날 위해 몸 버려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님, 사랑합니다.” 사랑의 고백을 하는 주님의 귀한 일꾼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피의 제사는 하나님이 제정해놓으신 것입니다. ‘너희가 죄를 지었을 때 너희 죄를 사하기 위해서 대신 피를 흘려 죽어야 하느니라.’ 구약 시대에는 짐승들이 죽었고, 신약 시대가 열리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피를 흘리고 돌아가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에 성경은 설명합니다.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늘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의 능력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10장 19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신앙을 회복할 때 주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넘쳐나게 됩니다. 첫사랑의 감격을 회복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여, 우리가 처음 예수를 믿었을 때, 처음 성령 체험했을 때, 그때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때 신앙을 회복할 수 있게 하여주시옵소서.’
 오늘 이 시간이 그와 같은 회복의 시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정결신앙을 회복하라

 둘째로, 우리는 정결신앙을 회복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죄로 인해서 더러워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더러워진 우리의 영혼을 씻어내야 됩니다. 열왕기상 18장 33절에서 35절은 말씀합니다. “이르되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 하고 또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 하여 다시 그리하니 또 이르되 세 번째로 그리하라 하여 세 번째로 그리하니 물이 제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 찼더라”
 통 넷에 물을 가득 채워 물을 부었습니다. 위에부터 제단 아래까지 물이 흥건하게 젖었습니다. “또 다시 물을 채워서 부어라!” 또 다시 네 통에 물을 채워서 부었습니다. “또 다시 물을 채워서 부어라!” 또 다시 물을 부었더니 물이 차고 넘쳐서 옆에 파놓은 도랑에까지 물이 흥건히 가득하게 고였습니다. 열두 통의 물을 부은 것입니다.
 이 열둘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합니다. 열두 지파가 하나님 앞에 범죄하여 타락했기 때문에 그 물을 붓는 상징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정결함을 받아야 될 것을 저들에게 깨닫게 해준 것입니다.

 날마다 우리가 정결함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이 죄악 속에 살다보면 죄의 때가 묻게 되어있습니다. 아침에 열심히 세수를 하고 나가서 하루 종일 일하다 돌아오면 원하든 원치 않든, 얼굴에 먼지가 묻어있기 때문에 밤에 자기 전에 또 세수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다보면 알게 모르게 죄의 때가 묻습니다. 어떤 때에는 보는 것이 우리에게 죄를 가져다 줄 때가 있습니다. TV드라마나 영화를 보다가도 죄의 모습들이 우리에게 들어옵니다. 우리가 듣지 않아야 될 얘기를 듣다보면 내 마음에 죄가 자리를 잡게 됩니다. 우리가 생각을 지키지 못하고 우리의 생각이 죄로 얼룩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알게 모르게 주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고 죄 짓는 모습으로 나타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날마다 씻어서 정결함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몸을 씻고 날마다 세수는 하면서 정작 정결함을 받아야 될 우리의 영혼이 죄로 얼룩져있다면, 우리는 부끄러운 구원을 받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여, 우리 영혼이 날마다 정결하게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의 보혈로써 정결하게 되게 하여주옵시고, 말씀의 물로써도 정결하게 하여주시옵소서!’
 에스겔 36장 25절은 설명합니다.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우리가 회개하고 주님 앞에 나올 때 예수의 보혈이 강물처럼 흘러서 우리 마음을 적시고 우리의 영혼을 덮어서, 우리를 정결케 하고, 우리의 상처를 치료하고, 우리의 삶에 회복의 은혜를 넘치게 부어줄 것입니다. 요한일서 1장 7절은 말씀합니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우리가 날마다 말씀을 묵상해야 되는 이유는 창세기 1장 1절부터 계시록 22장 끝 절까지 성경 구절마다 예수님의 피가 방울방울 적셔져있어서, 말씀을 읽을 때 그 피가 우리 마음 가운데 뿌린 바 되므로 우리가 정결함을 받기 때문인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26절은 설명합니다.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또 히브리서 10장 22절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주여, 우리가 날마다 정결함을 받고 주님 보시기에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아름다운 모습으로, 주님이 인정하시는 모습으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하여주시옵소서!’
 여러분, 사람들이 세상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만나러 갈 때에는 정말, 요즘 말로 꽃단장을 하고, 잘 단장하고 옷도 좋은 옷을 입고, 그리고 약속 시간보다 일찍 가서 기다리는데, 우리 하나님 앞에 나올 때는 정말 그러한 준비와 정결한 모습으로 나와 예배를 드리는지 우리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하면 우리의 모습이 주님 앞에 인정받는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날마다 예수의 보혈로 씻고, 말씀의 물로 씻어서 정결함을 받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의 인도함을 받고,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시편 119편 105절에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철저하게 회개의 무릎을 꿇고, 말씀의 인도함을 받아서 정결함을 받고 변화 받을 때, 우리는 풍성한 주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에베소서 1장 7절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주여, 우리가 주님 보시기에 부끄럽지 않은 그러한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 삶을 인도하여주옵소서. 우리가 어디가 잘못 되었는지 늘 말씀의 거울에 우리 자신을 비쳐보아서 우리의 잘못된 모습을 발견하고, 회개하고, 바로잡게 하여주옵소서. 감사가 사라지고, 기쁨이 사라지고, 은혜가 사라지는 나의 모습을 철저히 회개하고 다시금 첫사랑의 감격을 회복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3. 성령 충만의 신앙을 회복하라

 우리는 성령 충만의 신앙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성령 충만 만이 우리를 영적으로 강건한 주님의 일꾼으로 다시 세워주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우리는 쉽게 시험에 들고 넘어지고 좌절합니다. 그냥 무너지는 것입니다. 왜? 충만 받지 못해서입니다.
 ‘주여, 우리를 성령으로 충만케 하여주시옵소서. 그 엘리야의 제단에 불이 떨어진 것처럼 오늘 우리 심장에 불이 떨어지게 하여주시옵소서. 성령의 불이 떨어지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래서 우리의 삶 가운데는 모든 죄의 흔적들이 다 태워져 사라져버리고, 절망도, 근심도, 걱정도, 마음의 상처도, 염려도 다 사라져버리고, 주님의 은혜가 충만케 하여주시옵소서.’
 열왕기상 18장 37절, 38절입니다. “야훼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야훼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이에 야훼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주여, 응답하옵소서. 응답하옵소서.’ 엘리야가 간절히 기도할 때 불이 떨어졌습니다. 이 불은 성령의 불을 상징합니다. 우리에게 성령의 불이 임해야 됩니다. 성령의 불이 임하면 우리 삶이 그 순간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터닝 포인트를 맞게 되는 거예요. 죄 가운데 살던 내가 변화 받아 하나님께 인정받는 일꾼으로 살아가는 그러한 삶의 변화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예수 믿고 난 다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은 말씀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성령 충만 받으면 하나님께서 그 일생을 인도해주시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 장로님이 간증하시기를 “우리 아들이 교회 학교 다닐 때 성령 충만 받고 나서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한 번도 저를 속 썩인 일이 없고 잘 자라서 미국에 유학 갔다 와가지고 지금 좋은 회사에 취직해서 회사를 잘 다니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령 체험이 그 아들의 일생을 이렇게 바꾸어놓은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속 썩이고, 반항하고, 괴롭힙니까? 성령 충만 받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여, 우리 아들이, 우리 딸이 성령 충만 받아서 삶이 달라지게 하시고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주님의 일꾼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저도 성령 체험하기 전까지는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입니다. 4대째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다보니까 매일같이 집에서 가정 예배를 드렸어요. 가정 예배를 드릴 때 돌아가면서 대표기도를 하는데, 어머니의 기도 시간만 오면 대표 기도가 한 15분이예요. 자다 깨도 하고 계세요. 저희 형제 다섯을 놓고 간절히 기도하다보니까 15분씩 가는 거예요. 그래서 매일같이 가정 예배드리고, 토요일이 되면 지금 캐나다 토론토에 계신 작은 아버지가 오셔서 형제들 앉혀놓고 성경 퀴즈하시고, 그래서 성경 테스트를 매주 토요일마다 했어요. 그래서 열심히 성경 공부를 했습니다. 끝나고 나면 상금을 줬거든요. 돈에 눈이 멀어가지고 열심히 성경 공부 했어요. 그런데 순복음교회에 와서 성령 받고 나니까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1966년 2월, 조용기 목사님께서 닷새 동안 성회를 인도하시는 넷째 날 목요일 날 불이 떨어졌어요. 방언이 임했습니다. 맘이 뜨거워지고 단 한 번도 그 전까지는 예수님 때문에 울어본 적이 없는데 눈물, 콧물이 쏟아졌습니다. 날 위해 몸 버려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님 생각나서 얼마나 울고 또 울고 또 울었는지 모릅니다. 기도만 하면 눈물이 메마르지 않았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땐데요, 그 눈물의 기도가 한 5년은 갔어요. 그냥 엎드려 기도만 하면 한 시간 넘게 그냥 방언으로 기도하면서 눈물, 콧물 쏟아지는데 얼마나 하나님의 큰 은혜가 감사한지, 기도만 하면 예수님 십자가 밖에 생각이 안나요. 날 위해 몸 버려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님,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래서 그 길 따라 쭉 오다보니까 오늘 여기까지 왔습니다. 할렐루야!

 여러분이 이 은혜를 다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이 은혜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저도 그때의 첫사랑의 감격을 회복하기 위해서 몸부림칩니다.
 ‘주여, 늘 성령으로 충만케 하여주셔서 주님의 사랑에 감격해 머물러있게 하여주옵소서. 어떤 경우에도 원망과 불평하지 않게 하시고 감사하게 하시고, 어떤 경우에도 낙심하여 좌절하여 주저앉지 않게 하시고, 새 힘을 얻고 일어나게 하여주셔서, 하나님 영광 위해 살게 하여주옵소서.’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베드로가 성령 받기 전에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만난 후에도 다시 고기 잡으러 갈릴리로 돌아갔던 베드로입니다. 오순절 날 성령 불 받고나서 달라졌습니다.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나가서 복음을 선포할 때, 말씀을 전할 때 하루에 삼천 명, 오천 명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불이 떨어지는 장면이 사도행전 2장 1절로 4절은 설명합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지금 아르헨티나의 큰 부흥의 역사를 일으키고 있는 클라우디오 프레이존 목사님을 소개합니다. 원래 클럽에 가서 춤추는 것을 좋아하던 청년입니다. 그래서 그 어머니에게 “엄마, 나 클럽 갈 테니까 돈 좀 줘요. 용돈 좀 줘요.” 그때 기도하는 어머니가 그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먼저 교회, 나 따라서 교회 나오면 용돈 주겠다.”고, “교회 왔다 클럽가라”고. 그래서 클럽 갈 용돈 얻으려고 교회 따라 나왔다가 은혜를 받아버렸어요. 성령을 체험했습니다.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은혜를 제대로 받았나 봐요. 신학교 가서 목사가 됐는데, 교회를 개척하고 나서 열심히 전도하고 목회를 하는데 성도는 할머니 다섯명 뿐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전도하고, 열심히 설교해도 교회가 부흥하지 않았습니다. 너무 힘듭니다. 교회 가면 사람들이 모여오고, 교회가 막 북적북적하고, 애들이 울고 그래야 좀 부흥하는 교회 같은데, 할머니 다섯 분이 가만히 앉아계시니까 너무너무 힘들고 어려운거예요. 그래서 하다하다 지쳐서, 성령 받은 사람도 때때로 충만함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총회장 목사님을 찾아가가지고 “저, 이제 포기해야 되겠습니다. 목회 접겠습니다. 목사증 반납하겠습니다.” 그러자 총회장님이 권면합니다. 다시 충만 받고 열심히 해야지 여기서 포기하면 안 된다 권면해서 다시 돌아옵니다.

 어느 날 그 처삼촌 되는 분이 와서 예언의 말씀을 전합니다. “내가 기도하는데, 장차 교회가 크게 부흥하고 자네는 큰 부흥사가 돼서 전 세계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게 될 거야.” 그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아멘! 교회가 부흥합니다. 나는 세계적인 부흥사가 됩니다. 믿습니다.” 그래서 기도 열심히 해서 성령 충만 받아가지고, 교회 가서 할머니들 앞에서, “제가 세계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큰 종이 될 것입니다. 교회가 부흥할 것입니다.” 할머니들이 “아이고, 교회가 부흥이 안 되니까 조금 이상해졌나보다.” 그런데 그가 믿음으로 선포했을 때 하나님이 역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교회가 5만 명이 될 것입니다!”
불이 떨어지니까 이 교회가 200명, 300명, 400명, 2,000명까지 부흥했어요. 그래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2천명쯤 되고 나니까 굉장히 목회가 바빠요. 여기저기 오라는 데도 많고 또 할 일도 많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신학교 은사 선생님이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네가 이룬 많은 성공적인 사역을 볼 수 있게 되어 참으로 기쁘다네. 그런데 성령님의 음성을 듣기 위하여 어느 정도의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가? 자네도 성장했고, 교회도 훌륭하다네. 하지만 무언가 중요한 것이 결여되어 있다네. 성령님께서 자네에게 말씀하시길 바라고 계시지만, 자네는 너무 바빠서 귀를 기울일 시간이 없는 듯하네.”
 본인이 교회가 크고 나니까 자신도 모르게 “내가...”하는 교만이 들어와서 자기 힘으로 교회를 부흥 시키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루 종일 너무 바쁘고 너무 피곤하고 너무 지친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무릎을 꿇고 회개하고 “주여, 다시 나를 성령으로 재충만 받게 하여주옵소서. 주여, 나에게 성령이, 나에게 성령이 임하셔서 성령이 불이 떨어져서 내가 다시금 새 힘을 얻어서 주의 사역 감당하게 하여주시옵소서!”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또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다시 제 2의 부흥을 주셔서 2천 명이, 3천 명이, 4천 명이, 5천 명이, 6천 명이, 만2천 명 성도로 부흥하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부흥의 역사를 이루고 지난 십여 년 동안 50여 개 국에서 300만 명이 넘는 성도들에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목사님의 고백입니다. “당신 속에서 ‘성령님 갈급합니다’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절규하기까지 기도하게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진정한 갈급함이 당신 속에 간절함으로 주어질 때, 성령께서는 자신의 임재를 당신에게 알리기 시작하신다. 그때 이미 당신은 어제의 당신이 아니다!”
 ‘주여, 우리를 성령으로 충만케 하여주옵소서. 성령으로 충만해서 성령의 사람이 되어 위대한 역사를 이루는 주님의 일꾼들 다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우리 교회 지난 59년의 역사도 이와 같았습니다. 불광동 천막 교회에서 다섯 명으로 출발했습니다. 그래서 천막을 점점 더 확장하게 되었고, 3년이 지난 후에 5백 명이 되어서 서대문으로 이사를 갑니다. 얼마나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지 예배 후에 그냥 사람들로 인해서 온 도로가 마비가 될 정도가 되었습니다. 오백 명이 천명이 되고, 이천 명이 되고 만 명이 되었을 때 여의도로 이사를 오게 되었습니다. 여의도로 이사 와서 교회가 부흥하는데 만 명이 오만 명이 되고, 십만 명이 되고, 이십만 명이 되고 그래서 교회를 다시 확장해서 크게 짓고, 또 그래도 부족해서 서울시 전역에 20개의 지성전을 세우고 교회가 우리 원로 목사님이 은퇴하실 때 78만 명 성도에 다다르게 된 것입니다. 2년 후에 20개 지성전을 독립시켜서 33만 명이 떨어져나가므로 45만으로 성도가 줄게 되었을 때, 다시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게 해주셔서 지난 7년 동안 무려 성도가 10만 명이 늘어서 지금 55만 명이 되었습니다. 독립한 제자교회 33만 명과 우리 교회 55만 명을 합치면 88만 명이 된 것입니다.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면 한계를 뛰어넘습니다. 우리 인간의 생각은 한계가 있지만 주님의 역사는 한계가 없습니다. 부흥에 한계선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부흥하고 또 부흥해서 온 세계에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교회로 주님 오시는 날까지 쓰임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첫째도 성령 충만이요, 둘째도 성령 충만이요, 마지막도 성령 충만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성령 충만 받아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주님의 일군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와 은혜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첫사랑을 회복하고 무너진 단을 다시 쌓고, 주님 앞에 죄 사함 받고 정결케 되어 성령의 불 받아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받길 원하오니 주님, 우리를 사용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최길학 목사(여의도순복음광명교회) -

심장 멈추고 혼수상태였지만 후유증 없이 회복

의식 없던 중 이영훈 목사 기도 받은 후 급속 회복

 얼마 전 나는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했다. 지난달 29일 오전에 가슴이 답답한 증세가 느껴져 교회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병원을 찾았다. 병명은 부정맥 질환의 일종인 발작성 심방세동 빈맥이었다. 이 병은 심방의 여러 부위가 무질서하게 뛰면서 불규칙한 맥박을 형성하는 것으로 평균 맥박이 75인데 그때 당시 나의 맥박은 200까지 빠르게 뛰었다.

 아무리 해도 맥박이 빨리 뛰는 것이 해결이 되지 않아 앰뷸런스를 타고 대학병원 응급실로 이송이 됐고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그런데 치료를 받는 과정 속에서 심장 박동이 멎었고 의식도 잃었다. 심폐소생술로 심장 박동을 다시 살려 놨지만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내가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의료진은 가족들에게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면 가능성이 없다는 소견을 전달했다. 산소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의식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온 가족이 기도하며 여러 목사님과 성도들에게 중보기도를 요청했다. 소식을 듣고 30일 여의도순복음교회 담임 이영훈 목사님이 병실을 찾아 오셨다. 중환자실이라 면회시간 외에는 들어올 수 없는데 목사님께서 와 주셨다. 이영훈 목사님은 “하나님, 우리 목사님 살려주셔서 영혼을 살리는 그 귀한 복음 증거하는 일을 계속하게 해주시옵고, 제2의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게 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를 해주셨다. 

 목사님이 오셨을 때 나는 의식이 없었기 때문에 목사님이 다녀가신 건 나중에야 알게 된 일이었다. 목사님의 기도를 받은 그날 밤 기적이 일어났다. 의식이 돌아와 깨어났다.

 내가 사경을 헤매고 있는 그 시간 이영훈 목사님을 비롯해 나를 위해 많은 분들이 기도를 해주셨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내 소식이 전해져 여의도순복음광명교회 전성도를 비롯해 여의도순복음교회 교역자 기도회와 총회 실행위원회 예배, 새벽예배와 수요예배에 참석한 목회자와 성도들이 나를 위해 기도를 해 주셨다. 의식이 돌아온 뒤 12월 2일에 양쪽 다리의 동맥을 통해서 시술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시술도 말끔하게 잘 되었다. 

 보통 심정지가 일어나면 뇌로 가는 혈액공급이 정지돼 몇 분만 지체 돼도 돌이킬 수 없는 뇌손상으로 식물인간이 되거나 뇌사상태가 된다고 한다. 깨어나도 몸의 일부가 마비되는 등 장애와 후유증이 있다고 하는데 쓰러지기 전과 다름없이 건강한 모습으로 회복되고 있는 중이다.

 절망적인 상황이었는데 이영훈 목사님의 기도를 받고 극적으로 깨어나고 수술도 잘 끝나 몸 상태도 급속도로 좋아졌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2주 전부터는 다시 강단에 올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다. 나의 하루 하루는 전적으로 생명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생명을 주셨으니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여의도순복음광명교회 성도들을 잘 섬기겠다. 또한 기도해주신 많은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다시 한번 이번 일로 기도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었다. 우리 좋으신 하나님은 주님의 자녀들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신다. 앞으로 이영훈 목사님께서 기도해주신 것처럼 제2의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께 쓰임 받으며 주님의 일을 잘 감당하고 싶다.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증거하는 주님의 종으로서의 사명을 최선을 다해 감당할 것이다. 


구원을 받고 유지하고 성장하는 삶/조용기목사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에베소서 3장 16∼19절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사랑, 그리고 우리들의 믿음을 통해 구원을 받고, 구원을 유지하고, 성장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기독교를 세상의 많은 종교들 가운데 유독 우월하다고 자랑하고 있습니까? 이 질문을 가지고 영국의 옥스퍼드대 교수들이 토론을 할 때, 기독교 저술가인 C.S. 루이스 박사는 단 1초도 주저하지 않고 “그것은 은혜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의 말처럼 기독교의 핵심은 은혜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은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1.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은혜란 무엇이냐? 값없이 도움을 받은 것을 말합니다. 절대로 값을 요구하지 아니하는 빈손 들고 받는 것을 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 도움을 받지 않고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면 그 은혜는 막중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것을 은혜라는 말로 표현하지만 도저히 그 정도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은혜인 것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를 지은 죄인으로 사망선고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두가 다 죄인입니다. 로마서 3장 10절로 12절에 보면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의인은 단 한 명도 없고, 모두가 다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죄인임을 아는 죄인과 죄인임을 모르는 죄인이 있을 뿐,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다 죄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1장 8절로 10절에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며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 없이 태어났기 때문에 사망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값으로 죽는데, 예수님은 죄없이 태어난 유일한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죽을 수가 없어요. 죄를 안지었는데 대가로서 사망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오직 죄 없으신 예수님이 인간의 삶을 대신하셨을 때 인간의 사망을 청산하실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다 죄의 빚을 지고 있는데, 예수님이 이 대신 빚을 끌어안아서 당신의 생명으로 빚을 청산하신 것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인데 내 죄가 아니고, 인간의 죄를 다 내 죄로 끌어안아서 죄인이 되었음으로 예수님은 죽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유일한 영생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대신하여 죄를 짊어지심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고난을 통해 대속의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죄를 주님께서 속량하셨다고 말씀하셨는데, 로마서 3장 23절로 24절에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말씀하는데, 속량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의 빚을 탕감하여 그 사람을 자유롭게 해 준다’는 뜻입니다.

 과거에는 빚을 갚지 못해서 노예가 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오늘날에도 빚을 지면 빚의 노예가 됩니다. 한국은행의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 가계 부채는 이미 1천 조 원을 훌쩍 넘어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빚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빚을 지게 되면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빚의 노예가 됩니다. 만약 빚을 다 갚지 못하고 죽으면 자식이 그 빚을 떠안고 계속해서 갚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진 빚은 돈으로도 갚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빚은 죽음을 통해서만 갚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진 빚은 죄요,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죽어야 그 빚이 갚아져요.

 그런데 이처럼 무서운 죄의 빚을 예수님께서 대신 갚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생명을 대가로 지불하시고 우리의 모든 빚을 다 갚아 주신 것입니다. 온 세계 만민들의 죄를 예수님이 다 당신의 죄로 인수인계하고 이 우주의 유일한 죄인이 되셔서 그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물이 되신 것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은혜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는 영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 사람이 됐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죄를 갚는 재물이 됐는데, 10년 동안 재물이 되나, 100년 동안 재물이 되나, 아니면 영원한 재물이냐? 예수님은 영원한 하나님이시니까 재물도 영원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동안 지은 나의 모든 죄는 예수님이 다 청산했어요. 지금 죄를 짓고 있는 것도 예수님이 청산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장차 죽은 때까지 미래에 지을 죄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조차도 예수님이 이미 다 책임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모시면 우리 일생이 그 예수님 안에서 다 청산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에 장차 지을 죄조차 다 청산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8절에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고 한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은 사랑을 통해서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신 것입니다. 사랑을 우리가 잘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사랑을 헬라어로 두 가지 단어를 쓰는데 하나는 ‘필레오’이고 다른 하나는 ‘아가페’입니다. 필레오 사랑은 친구간의 사랑이고 아가페 사랑은 희생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베드로가 취득한 사랑은 필레오 사랑과 아가페 사랑 둘 모두 다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배반하고 난 다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제자들은 다 뿔뿔이 헤어졌습니다. 베드로는 죽을 때까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해놓고 예수님을 세 번이나 따라 부인을 하고 이제는 자기 스스로도 자기를 버리고 또다시 어부로 돌아가자. 갈릴리로 내려가서 그물을 던졌으나 밤새도록 그물을 던져도 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해변가에서 “얘들아, 거기 물고기가 있느냐?” “없습니다.” “오른 편에 던져보라.” 배의 오른 편에 던져보니 굉장히 많이 잡혔습니다. 다른 제자가 “예수님 오셨다.” 베드로는 놀라서 물속에 뛰어 들어가서 해변을 헤엄쳐서 나왔습니다. 오니까 예수님이 이미 아침밥상을 차려놓고 물고기를 구워놓고, “오너라. 배고프지? 빨리 먹자.” 먹으시고 난 다음에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뼈아픈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아가페 하느냐? 너가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보다도 더 나를 사랑하는데 아가페로 하느냐? 희생적으로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데 희생적으로 사랑하느냐고 물으니까 ‘친구로 사랑합니다.’라고 답합니다. 희생적으로 사랑한다고 해놓고 배반했기 때문에 자신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아가페하느냐? 희생적으로 사랑하느냐?’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필레오 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나는 주님을 친구로써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내 양을 쳐라.’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필레오 하느냐? 친구로 사랑하느냐?’ 거기에 베드로가 박살이 났습니다. 지난 번에 예수님을 희생적으로 사랑한다고 세 번 말해놓고 세 번 빌라도 앞에서 예수님을 배반했는데 이제 예수님이 오셔서 아침 식사까지 준비해서 먹이게 해주시고 난 다음에 ‘나를 사랑하느냐?’ 하니까 그때는 예수님께서 ‘아가페 사랑하느냐?’고 하니까 ‘아닙니다. 필레오 사랑합니다. 친구로 사랑합니다.’ 두 번째도, ‘네가 희생적으로 나를 사랑하느냐?’ ‘아니요. 필레오 사랑합니다.’ 세 번째 예수님은 이제는 바꾸어서 ‘친구로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실 때 아이고 큰일 났습니다. 내내 희생적으로 사랑한다고 해놓고 난 다음에 배반한 그가 이번에는 예수님이 친구로 사랑하느냐고 내리 두 번을 희생적으로 사랑하는지 물을 때 친구로 사랑한다고 했다가 세 번째 또 친구로 사랑하느냐고 물으니까 자신이 없습니다. 언제는 희생적으로 사랑한다 해놓고 난 다음에 예수님을 배반했는데 이제는 친구로 사랑한다고 해놓고 난 다음에 또 배반할지 모르는 처지입니다.

 주님이 무언가 낌새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줄 알고 ‘주님, 주님은 내가 어떻게 사랑하는지 알지 않아요? 나를 시험하시는 것입니까?’ ‘알았다. 그러면 내 양을 먹이라.’ 주님께서 배반한 베드로를 찾아와서 죄를 용서하시고 제자를 더 확실하게 확증해 주었습니다. 인정을 받고 난 다음에 그는 용기와 힘이 다시 생겨나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장 16절~17절)

 우리는 이웃을 심판합니다. 조금만 잘못해도 잘못을 지적하고 심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다고 오셨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주님은 구원을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개인의 죄를 예수님께 가지고 나왔는데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오늘날까지 네가 지은 죄악을 내가 다 갚아주었다. 용서해준다.” “지금 짓고 있는 죄는 어떻게 됩니까?” “지금 짓고 있는 죄도 네가 나를 믿고 나옴으로 내가 용서했다.” “그러면 내가 죽기 전에 짓는 죄 말입니다.” “아이고, 내가 이제 이 세상을 떠나가기 전에 큰 죄를 지으면 그것은 어떻게 됩니까?” “그것도 다 청산되었다.” 왜냐하면 영원한 하나님 아들 예수님이 영원히 죄를 청산해 버렸기 때문에 과거의 죄도, 지금의 죄도, 미래의 죄도 다 청산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은 믿는 것 밖에 없습니다.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기독교 신앙이 위대한 것은 누구든지 저를 믿기만 하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어라.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다. 과거의 예수님도 되고, 지금의 예수님도 되고, 딱 죽기 전에 숨 떨어지기 전에 예수님도 되고 그러니 그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이 여러분을 과거, 현재, 미래 다 책임을 져주시기 때문에 위대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한 대표적인 예는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재물로 바치려는 신앙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6절에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렵게 기도해서 얻은 외아들인데 ‘아브라함아 네 아들 이삭을 재물로 드려라.’ 참 기가 막힐 노릇 아닙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만큼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죽여도 잿더미 속에서 살려줄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모리아산까지 그 아들과 같이 갔습니다. 이삭에게 짐을 지우고 칼과 불을 가지고 모리아산 밑에까지 왔는데 그가 ‘아버지, 칼도 있고 불도 있는데 제물은 어디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제물을 예비하신다.’라고 말합니다. 모리아산에 올라가서 제단을 쌓고 난 다음에 ‘이삭아, 네가 제물이다. 네가 죽어줘야 되겠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칼로 내려 칠려는 순간 하늘에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네 아들 이삭에게 손대지 말라. 네 독생자도 아끼지 않고 나에게 내놓을 것 보니 네가 참으로 나를 사랑하는 줄 아노라.’라는 음성이 들립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는데 아들을 내놓을 정도까지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그런 명령을 받았으면 아들을 갖다 놓을 용기도 없을 거니와 아들에게 도로 얻어맞아서 형편없이 될 것입니다. 참으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선물로 내놓은 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그것이 아가페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할 때 일방적으로 사랑했습니다. 사랑할 가치가 있기 때문에 사랑한 것이 아니라 무조건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남의 사랑받을 수 있는 가치가 있으면 모를거니와 그럴 가치도 없는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다 책임지시고 사랑해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8절로 39절에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관계는 아예 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는 사랑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다 버린 놈이라고 해도 하나님 보기에는 버린 놈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체포 당하였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베드로는 그처럼 큰 죄를 지은 자기 자신을 더 이상 예수님의 제자라고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어부로 돌아와 다시 고기를 잡고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양을 먹이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베드로를 예수님의 제자로 다시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엄청나게 퇴보할 때, 주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며 손을 내밀어 우리의 손을 다시 잡아주는 주님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해야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먹어보지 않으면 그 맛을 알지 못하고 아무리 멋진 풍경이라도 눈으로 보지 못하면 그 아름다움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체험해보지 아니하면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나면서 하나님에 대해 날마다 들었지만 체험적 신앙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노년에 가서야 하나님을 체험하고 진정한 신앙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신학자 어거스틴 역시 믿음이 좋은 어머니의 양육을 받으며 자랐지만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후 악한 일을 끊고 남은 생애를 주님에게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맛보고 경험할 때, 우리의 신앙이 더욱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순복음교회 교인들이 특별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는 성령을 체험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성령을 체험해서 내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신 그 은혜를 느끼게 될 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진실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믿고 체험해서 산 신앙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은혜와 사랑으로 끝까지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드리듯이 은혜는 값없이 주는 축복이요, 사랑도 값없이 인정해주는 사랑인데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은혜를 주시고 사랑을 주십니다. 은혜도 영원하고 사랑도 영원합니다. 은혜와 사랑은 우리 과거의 삶을 청산해주시고 현재의 삶을 은혜와 사랑은 책임져 주시고 죽기 전에 숨이 끊어지기 전에 그 때에 우리가 잘못한 것도 은혜가 책임을 져주시고 사랑이 보답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은혜로운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인 것을 우리가 믿고 체험하면 그만큼 위대한 신앙이 없습니다. 

 3. 우리의 믿음

 은혜도 사랑도 믿음으로 체험해야 되는 것입니다. 영적세계는 오직 믿음만으로 연결이 됩니다.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믿을 수 있는 가능은 하나님이 모두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 믿을 수 있는 능력은 다 주었습니다. 문제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느냐 선택하지 않느냐 선택만 우리가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로마서 3장 22절)

 사울이 바울로 변화된 것은 다메섹의 체험 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큰 변화를 가졌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여러 가지 체험을 할 수 있는 일들을 주실 때, 여러분 그것을 선택할 것이냐 안 할 것이냐는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믿음의 작정인 것입니다.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주어지는 선물이라면 믿음은 그 선물을 받는 손과 같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선물을 줄 때, 손을 내밀어 받아야만 내 것이 되듯이 하나님께서 구원이라는 선물을 주실 때, 믿음의 손을 내밀어 받아들여야 구원의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이라는 선물을 주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받느냐? 받지 않느냐?’는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4. 신앙의 후퇴와 방지

 신앙의 후퇴와 방지를 우리가 잘 돌봐야 되는 것입니다. 변치 않는 은혜와 구원을 의지하고 역시 사랑도 의지합니다. 우리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가 변치 않습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사랑도 변치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신앙이 엄청나게 퇴보할 때, 자기의 신앙은 영원한 은혜를 받고 있으므로 신앙이 없어질 위험에 처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퇴보하고 뒤로 물러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믿음으로 이 은혜와 사랑을 받아들이면 여러분은 절대로 버림받지 않습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브리서 10장 38절)

 여러분은 다 하나님께서 믿을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것을 사용해서 믿을 것이냐 아니할 것이냐는 여러분의 선택에 달린 것입니다. 파라클레토스는 은혜와 사랑에 잡혀 있는 죄인의 보혜사인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크신 능력으로 믿는 자와 은혜와 사랑을 강하게 도우며, 변화와 성장을 가져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고, 사랑을 받고 성령은 그 안에 들어와서 신앙이 자라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로마서 8장 26절)

 죄책감에는 사탄이 주는 죄책감도 있습니다. 사탄이 잘못된 죄책감으로 우리를 흔들 때, 우리에겐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1절에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언자라는 말의 헬라어는 파라클레토스인데 변호사라는 뜻이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하면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는 변호사 역사를 해주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7장 25절에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그러므로 죄책감에 눌려 있지 말고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여 회개함으로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가시기를 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닷가에 가면 조개들이 바위에 딱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조개는 약하고 아무 힘이 없지만 바위에 딱 달라붙어 있기만 하면 아무도 파도가 거세게 몰아쳐도  끄떡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구원의 바위이신 예수님께 딱 달라붙어 있기만 하면 세상의 어떤 풍파가 와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한복음 15장5절)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구원을 받는 것도 유지하는 것도 오직 예수님이 붙들어주실 때 가능한 일입니다.  

결론
 우리의 생명은 유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원하십니다. 영원하신 예수님이 우리의 유한한 죄를 다 갚아도 예수님의 생명의 엄청난 무한에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끝없는 은혜와 사랑 안에서 인간의 죄는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네가 얼마나 큰 죄인이냐? 하나님의 은혜는 영원한 은혜다. 어떠한 죄도 다 청산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한 사랑이다. 영원히 버리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여러분을 붙잡고 있는데 여러분은 끝까지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믿음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선택해서 잡아 있으면 내가 죽을 때 숨이 넘어갈 때 살인죄를 지었다 해도 하나님 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 은혜가 살인죄를 책임졌습니다. 하나님 사랑이 살인죄를 책임지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가 다 이루었다는 영원한 선언을 받아들여서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상관없이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믿음을 버리지 않는 이상 은혜도 영원하고 사랑도 영원하고 일시적인 죄와 잘못이 영원한 은혜와 영원한 사랑에 붙잡혀 있는 이상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아멘.

<기도>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죄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늘 넘어지고 흔들이는 우리들을 봅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철저한 믿음으로 주님의 은혜에 붙어있는 성도들의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도립니다. 아멘.


전정심 권사(마포1대교구) - 부르짖는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


교통사고 난 손주, 중보기도 힘으로 살아나
이영훈 목사 안수 기도에 절대긍정 희망 얻어

 친손주 재영(사진 왼쪽)이가 25살 때인 2015년 7월이었다. 새벽 5시 병원으로부터 재영이의 사고 소식을 들었다. 군대를 제대한 손자는 운전 중 난간을 들이받아 쇄골이 골절됐고, 머리에 큰 부상을 입었다. ‘죽었구나’ 생각하고 정신없이 병원으로 달려갔다. 수술을 마친 의사는 “환자가 살 가망이 40%”라고 했다. 절망적이었다. 그런데 이영훈 목사님의 기도만 받으면 재영이가 살 수 있겠다는 희망이 생겼다. 하지만 목사님과 연결될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당시 담당교구장이셨던 추한숙 전도사님의 도움으로 이영훈 목사님과 전화연락이 됐다. 정신줄을 놓고 있던 나와 며느리는 목사님의 기도에 힘을 얻었고 절대긍정의 믿음을 품게 됐다. 그날이 토요일이었는데, 이영훈 목사님은 “내일 주일예배 후 병원으로 가겠다”는 말을 해주셨다. 그리고는 정말 주일 4부 예배 후 병원으로 우리를 찾아오셔서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손자를 위해, 가족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 주셨다.

 이영훈 목사님의 기도를 받고 난 후 나는 기도원으로 달려갔다. 마침 여성금식기도대성회 기간이라 금식하며 하나님께 매달렸다. 예배 시간마다 중보기도를 청했고, 강사 목사님과 수 많은 성도들이 3∼5분씩 손자를 위해 중보 기도해 줬다. 또 예배 후 목사님마다 내 머리에 손을 얹고 손자를 위해 기도해주셨다. 이어 경찰선교회 주관 성회까지 참석해 금식하며 기도했다. 그러자 마음에 희망과 용기가 생겼다.

 재영이는 몇 차례에 걸쳐 뇌수술을 받았다. ‘아이가 깨어 날까’하는 기대감에 수술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수술을 마치고 나온 의사는 “살아도 식물인간이 된다”는 절망적인 말을 했다. 가족 모두는 지쳤다. 그런데 어디서 그런 담대함이 나왔는지, 나는 “가자. 가서 밥 먹고 힘내자.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께 무릎 꿇자. 그러면 하나님이 안 살려주시겠니? 재영이는 안 죽는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살려주신다고 했다. 이영훈 목사님도 기도해 주셨잖니?”라며 가족을 위로했다. 그리고는 철야예배가 드려지는 교회로 달려와 “하나님, 제발 살려주세요. 하나님 믿고 담대히 선포했잖아요. 제발 살려주세요”라며 눈물로 기도했다. 금요성령대망회때 나는 성도들에게 중보기도를 요청했다. 그러면 성전에 모인 성도들이 손자를 위해 기도했다. 교구에서도, 남편이 봉사하는 남선교회 보호실에서도 간절히 기도해주셨다. 지나는 길에 모르는 사람의 손을 붙잡고 손자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중보 요청도 했다.

 병원에 입원한 지 24일째 되던 날, 손자가 기적적으로 눈을 떴다. 중보기도의 힘이었다. 손자는 의지가 강한 아이라 재활에 적극성을 보였다. 주변의 지속적인 중보기도 힘으로 재영이는 8개월 만에 일어나 퇴원했다.

 지난해 여름 재영이는 이영훈 목사님을 직접 찾아뵙고 다시 기도를 받았다. 목사님은 “더 좋아질 것이다. 하나님이 은혜 주셨으니 앞으로의 길도 열어 주실 것이다”라며 안수해주셨다. 대학청년국 가스펠선교회에 들어간 재영이는 주일은 물론 금요 철야예배를 드리며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있다.

 우리를 위해 아낌없이 기도해주시고 도와주신 교구 성도들에게 감사하다. 남선교회 보호실 가족들에게 지면을 통해 인사한다. 대교구장님을 비롯한 많은 교역자님들께 감사드린다. 무엇보다 재영이를 위해 한걸음에 달려와 기도해주신 이영훈 목사님께 “사랑하고 진심으로 존경합니다”라고 인사드린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복음전도에 힘을 쏟는 것이다. 10명 전도 목표 중 지금까지 4명을 주께 인도했다. 나도 손자도 남은 일생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살자고 다짐했다.       


행복은 나눌 때 온다/조용기목사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누가복음 6장 38절

 유엔 인권위원회 식량특별조사관으로 활동했던 사회학자 ‘장 지글러’는 <탐욕의 시대>라는 책에서, 매년 1000만 명이 넘는 5세 미만의 어린이들이 목숨을 잃는 이유를 가난으로 인한 영양 결핍과 질병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아이들이 죽어가는 것이 지구상에 식량이 부족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전 세계 인구가 먹고도 남을 만큼 이 지상에 음식은 넘쳐나는데 아이들이 굶어 죽는다는 것은 바로 탐욕 때문에 나누지 않기 때문에 이런 비극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돈이 많아서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골목골목 다니며 폐휴지를 모아서 기부하는 할아버지도 있고, 구두를 닦아주고 받은 돈 중 동전을 따로 모았다가 기부하는 구두미화원도 있습니다. 또 어떤 유치원에서는 아이들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매달 얼마씩 내어 꾸준히 모아 그 돈으로 아프리카에 우물을 설치해 많은 사람이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힘들고 각박한 세상이지만 이처럼 작은 것이라도 나누고 베푸는 마음이 있기에 세상은 따뜻해지고 살 맛 나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

 우습고 재미가 있어서 제가 인용을 하려고 합니다. ‘10대는 철이 없다. 20대는 답이 없다. 30대는 집이 없다. 40대는 돈이 없다. 50대는 일이 없다. 60대는 낙이 없다. 70대는 이가 없다. 80대는 처가 없다. 90대는 시간이 없다. 100대는 다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보면 이렇게 없는 것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꿈과 믿음을 가지고 미래를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십자가에 죽어서 피를 흘리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꿈을 갖고 믿음을 갖고 담대하게 말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1.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할 수 없게 된다


 생각한대로 인생은 이루어집니다. 없다고 생각하면 패배의식에 잡히며, 모든 것이 없는 방향으로 이끌려 갑니다. 모세가 열두 명의 정탐꾼을 택하여 가나안땅을 정탐하라고 보냈을 때, 열 명은 ‘할 수 없다’는 생각의 안경을 끼고 출발했습니다. 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은 40주 40야를 정탐한 곳에서 할 수 없는 것들만 바라본 것입니다. 민수기 13장 31절로 33절에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는 말씀은 부정적인 관찰을 설명한 것입니다. 우리들도 조금만 잘못되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될까요? 우리들은 하나님을 바라봐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피난처요, 요새요, 의뢰하는 하나님을 항상 바라보아야 합니다. 여호수아 1장 5절로 6절에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고 말합니다. 주님이 같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용감한 마음을 가지고 나가면 주님께서 책임지고 같이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열 두 정탐꾼 중에 여호수아와 갈렙은 ‘할 수 있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라는 확실한 생각을 가지고 정탐을 나갔습니다. 그들은 ‘할 수 있다’는 긍정의 안경을 끼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땅을 보았던 것입니다. 정탐한 땅마다 “이거 이미 하나님이 주신 땅이다”라며, 이미 받은 마음을 가지고 바라봤기 때문에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민수기 13장 30절에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라고 했으나 백성들이 돌을 들어서 갈렙을 쳐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열 명의 정탐꾼처럼 부정적인 생각으로 사물을 바라보아서는 안 됩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들어오면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고,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신다는 것을 마음속에 늘 느끼고 “주께서 나와 같이 계신다.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이고 의지하니 감사합니다”라고 느낌으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볼지어다 세상 끝 날까지 내가 항상 너와 같이 있으리라’는 이 말씀을 의지하고 함께 계신 하나님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뜨겁게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뜨겁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8절로 39절에는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누가 이 사랑의 줄을 끊을 수 있겠습니까? 마태복음 7장 11절에도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능치 못하심이 없다는 것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우리 생각으로 하나님을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 좋다는 것도 하나님 보시기는 좋기 때문에 그것을 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동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좋은 것은 좋아서 좋고, 나쁜 것은 좋게 만들어 줄 것이니 좋은 것입니다. 좋은 하나님을 따라 가니까 모든 일이 좋게 되는 것입니다. 스바냐 3장 17절에는 “너의 하나님 야훼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 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쁨으로 말미암아 이기지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보고 즐거이 부르짖으며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이 이런 마음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그 아들 예수님을 보내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고 몸을 찢기시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것입니다. 마가복음 9장 23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는 말씀처럼 우리가 무엇이든지 믿음으로 살려고 해야지, 인간적인 생각으로 “할 수 없다. 못한다. 안 된다”고 하면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꿈을 마음에 품고 믿음으로 안고 미래를 봐야 되는 것입니다.


 2. 꿈을 가지고 미래를 품에 안아라


 우리가 꿈을 품고 믿음을 안고 미래를 바라보면, 찬란한 미래가 영광스럽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꿈으로 마음에 품고, 믿음으로 끌어안고, 입으로 시인하고 나가면 하나님의 기적이 따라오게 되는 것입니다. 민수기 14장 7절로 9절에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야훼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야훼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야훼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들은 마음에 꿈을 가지고 믿음으로 그 땅을 바라봤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보았습니다. 보는 것 마다 “아, 하나님이 주신 것은 아름답구나. 하나님이 주신 것 우리 밥이 이렇게 준비되어 있구나. 이것도 우리 땅이구나”라고 말했습니다. 이미 하나님이 주신 것을 믿고서 바라보니 모든 것이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말하게 되고 행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마음에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개인이나 민족은 망하고, 마음에 꿈을 가지고 믿음을 품고 나가는 민족은 흥합니다. 성경에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하리라”고 말했지 않습니까? 꿈이 없는 개인도 망합니다. 우리가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마음속에 꿈을 품고 믿음으로 끌어안고 입술로 고백하고 나가면 하나님이 역사할 수 있는 그릇이 준비되는 것입니다. 그 그릇에 성령께서 들어와서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은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바라보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진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보지 못하는 것을 이미 본 것처럼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나가면 하나님과 대화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유대 광야에 나가셨을 때, 남자만 5000명,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합치면 수만 명이 따라 나왔습니다. 시간이 지나니 배가 고팠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시험해 보았습니다. 빌립에게 “어디에서 떡을 구하여 이 많은 사람을 먹일 수 있겠느냐?”고 물으시니 빌립은 매우 당황했습니다. “한 두 사람도 아니고 이렇게 많은 사람을 먹일 떡을 살 곳은 없습니다. 혹 있더라도 200데나리온이나 되는 돈도 없었습니다. 먹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안드레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와서 “어린아이가 가져온 것인데, 이것밖에 드릴게 없습니다”라고 하면서도 주님께 내놓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빌립에게 실망했습니다. 왜냐면 이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시면 믿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집행하면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꿈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보는 것이 꿈이 아닙니까?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게 바라보는 것이 꿈입니다. 직장에 들어가지 않았어도 직장에 들어간 것처럼 꿈꾸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지 않은 집을 이미 사서 들어가 있는 것처럼 꿈꾸어 보는 것입니다. 몸이 병들어서 침상에 누워 있는 사람이 걸어 다니면서 부지런히 일할 수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꿈꾸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꿈이 있느냐? 믿음이 있느냐?’를 시험해 보신 것이었습니다. 빌립과 안드레에게 시험하신 이유는 주님의 명령을 들었으면 못 먹일 환경이라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먹일 수가 있습니다”,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먹일 수가 있습니다”라고 대답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계획과 꿈을 꾸고, 계산은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가 계산을 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꿈을 꾸고, 분명히 마음속에 품은 꿈을 믿고, 주님이 일해주실 것을 알고, 주님께 계산을 맡기면 주님께서 해주시는 것입니다. 안드레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주님께 가져오니 주님이 그것을 가지고 사람들을 다 먹이고 열 두 바구니가 남는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삶 속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고 주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기도하고 개인, 가정, 생활, 자녀, 사업 모든 것을 맡긴다면, 주님이 계산해 주십니다. 주님의 계산은 우리와 다릅니다. 주님은 없는 것을 있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3차원의 감각적인 세계를 뛰어넘어 4차원적 성령의 세계 속에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문제가 있어도 꿈과 믿음으로 해결하려고 하시기 바랍니다. 해결되는 좋은 것을 꿈꾸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몸 찢기고 피를 흘려 죄를 대신 해주셨고, 우리의 허물을 대신 사해 주었고, 채찍에 맞으심으로 저주를 대신 갚아주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사망과 음부를 폐하고 부활 영생 천국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나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긍정적인 꿈을 꾸고, 믿음을 가지고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냥 종교적인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승리와 성공을 가져오는 능력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3.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우리가 잘 되고 성공하기를 원하는 것은 남에게 나누어주기 위해서 입니다. 성경에는 ‘주라 그리하면 돌려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눌러 흔들어 넘치게 해서 안겨 주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우리 그릇을 비워서 나누어주고, 빈 그릇을 주님께 가져오면, 주님은 계속해서 그 그릇을 채워주십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을 나누어 주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로 35절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은 힘이 듭니다. 사랑받지 못할 사람을 사랑해야 되고, 용서받지 못할 사람을 용서해야 되니 힘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십자가의 은혜를 부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장 16절에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나누어 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셔서 우리에게 더 맡겨주십니다. 하나님은 탐욕을 매우 싫어하십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는 것입니다. 우리가 탐욕을 버리고 나누어 주는 마음을 가지면 하나님께서 아끼지 아니하고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우리가 외롭게 살도록 하나님이 내버려놓지 않았습니다. 보혜사 성령님이 내려와서 우리를 책임지고 있습니다. 구약 4000년 동안은 아버지의 시대였기에 아버지 뒤에서 예수님과 성령께서 역사하셨습니다. 신약시대는 예수님이 사역하신 33년 동안 아들의 시대였기에 아버지와 성령이 아들 뒤에서 역사하셨습니다. 오순절 이후부터 지금까지는 성령의 시대로 성령이 보혜사가 되어서 우리 가운데 계시고 아버지와 예수님이 뒤에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보혜사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우리를 돕기 위해서 항상 우리와 같이 계신 이’라는 뜻입니다. 보혜사는 우리와 항상 같이 계십니다.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이고, 의지합니다”라고 말하면 보혜사 성령님이 기쁘고 즐겁게 우리의 손을 잡고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님은 우리에게 불안을 주지 않습니다. 공포를 주지 않습니다. 불신앙을 주지 않습니다. 마귀가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하는 것으로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공포심이 붙잡히게 하고 불신앙하게 만듭니다. 디모데후서 1장 7절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보혜사 성령을 힘입어서 우리는 마귀를 대적해야 되는 것입니다. “너 이 원수 귀신아, 이 불만의 귀신아 떠나가라! 불안의 귀신아 물러가라! 공포의 마귀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보혈로 명하노니 물러갈지어다! 불신앙의 귀신아 나가라! 내게서 물러가라!”고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개인이나 가정이나 생활에서 불안과 공포와 불신앙이 따라오지 못하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평안, 확신, 기쁨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평안을 주시고, 확신을 주시고, 기쁨을 주시면 성령이 같이 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아닙니까?” 묻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기도하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평안이 확 들어차고 확신이 넘치고 기쁨이 넘쳐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마음속에 불안하고 공포하고 불신앙이 계속 됩니다. 이것은 아직까지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기에 더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 뜻을 아는 것은 성령이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고 확신을 주시고 기쁨을 주실 때 성령이 허가를 내려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나누는 나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외아들 예수님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셨고, 예수님은 당신의 피와 살을 나누어서 생명을 나누어 주셨고, 보혜사 성령은 당신이 거할 처소를 우리 속에 만들어서 우리와 함께 평안을 나누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꿈꾸고, 믿고, 긍정적인 선언을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하늘나라를 왕성하게 하시고, 나누어 주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믿는 우리는 믿음으로 기도하고 난 다음에 “계산은 주님이 하신 줄 믿고 감사합니다. 아멘”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크신 기적과 능력으로 역사하는 것입니다. 5000명이나 되는 군중이 빌립이나 안드레에게는 많은 숫자였지만 예수님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은 우리와 같이 계시는데 우리를 위해서 큰 기적을 베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주가 되십니다. 오늘날도 안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믿고 평안을 가지고 살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오늘 우리가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주신 복을 마음껏 나누게 하옵소서. 빈 그릇에 채워주시는 그 은혜를 마음껏 누리며 행복한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영교 권사(서대문대교구) -

생명 보다 더 귀한 것, 바로 ‘영혼’이지요

호스피스 봉사하며 하나님의 사랑 깨달아
주님 은혜로 봉사하며 대장암 완치 받아


 나는 순복음호스피스 8기로 8년간 호스피스 봉사를 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아픈 이웃을 섬기러 갔다가 오히려 내가 배우고 얻은 것이 많다. 그중 봉사 초창기에 만난 환자분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구강암 말기로 고통 중에 계셨던 분인데 알고 보니 무속인이었다. 호스피스 봉사는 팀으로 이뤄지는데 우리가 교회를 다닌다는 것을 알고 처음에는 찾아가도 언짢아하고 달가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 방문을 하면서 마음 문을 두드렸다. 대화를 해보니 너무나 외로운 분이었다. 남편과 사별했고 슬하에 5남매를 두었지만 파란만장한 삶과 남다른 가정사로 자녀들과 왕래가 없어진 지 오래였다. 나중에는 우리가 가면 너무나 반기며 좋아하셨다.

 2009년 6월 어느 날 새벽기도 다녀온 아침에 나는 배가 견디지 못할 만큼 많이 아파 병원에 갔다. 진통제를 처방받고 며칠 후 알게 된 검사 결과는 대장암 3기였다. 큰 병이라고는 들었지만 마음은 평온했다. 다만 수술을 받으러가야 하는데 구강암 말기로 약해진 그분께 충격을 줄까봐 “한 달 간 시골에 다녀올 일이 생겼으니 다녀오겠다”하고 입원을 했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 좋은 의료진을 만나 수술을 잘 받았다. 수술을 마치고 일주일에 한번씩 항암치료를 받았다. 항암치료를 받을 때는 많이 힘들었지만 어느 정도 몸이 회복이 되어 늘 걱정이었던 그분께 전화를 했다. 그사이에 건강이 악화 돼 입원과 퇴원을 했다고 했다. 회복을 위해 내가 먹는 음식들을 챙겨서 그분을 만나러 갔다.

 호스피스 봉사를 통해 어느새 그분 마음이 달라지고 어느덧 예수님을 영접하고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셨다. 그리고 스스로 결단을 하고 무속인을 할 때 사용했던 것들을 모두 치우고 예수님 안에서 참 평안을 얻으셨다. 그분은 입퇴원을 반복하며 괴로움 속에도 신앙을 지켰다. 그분이 많이 힘들어 할 때는 “내가 먼저 천국에 갈수도 있다. 내가 먼저 가면 내가 천국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당신이 먼저 가면 나를 기다려달라”는 말을 했다. 그 말에 안심을 한 그분은 며칠 뒤 천국에 가셨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서대문대교구 11교구에서 도와주셔서 장례를 잘 마칠 수 있었다. 다섯 자녀들도 장례에 참석해 어머니를 불쌍히 여기고 후회를 하는 모습을 보였다. 자녀들 중 감동을 받은 큰아들과 막내딸은 예수님을 믿겠다고 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대장암 판정을 받았을 때가 69세였는데 항암치료를 1년 동안 받으면서 봉사를 하고 75세인 지금까지 완치 판정을 받고 별다른 건강의 문제없이 지낸 것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다.

 4개월 전에는 사랑하는 남편이 천국으로 갔다. 지난해 4월에 위암 선고를 받고 5월에 임파선까지 퍼졌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남편은 항암치료를 하겠다고 결정했다. 남편은 사실 교회는 오래 다녔지만 변화를 받지 못해 술을 계속 마셨었다. 암 선고를 받은 후 술을 끊고 암과 싸우며 남편은 월요일마다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기 시작했고 기도만 하면 울었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인데 주일에 교구실에서 기도를 받다가도 통곡을 했다.

 1년 4개월간 투병을 하며 호스피스 봉사를 하며 배웠던 모든 것을 남편에게 해드리며 불편함 없이 서로 감사하며 시간을 보냈다. 남편의 마지막은 어느 드라마보다도 아름다웠다. 교구 목사님들, 지역장님들, 교구 식구들이 다 다녀가시고 자녀들과 손자 손녀들에게 둘러싸여 보고 싶은 사람들을 다 만났다. 사람들이 모두 찬양을 하며 평온한 가운데 천국으로 가셨다.

 호스피스 봉사를 10년 가까이 하면서 느낀 것은 생명이 귀하다는 것, 그리고 생명보다 영혼은 더 귀하다는 것이다. 나에게 호스피스 봉사를 소개해주고 이끌어주신 이재순 실장님께 지면을 빌어 감사인사를 전하고 싶다.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그날까지 호스피스 봉사를 하며 살아가고 싶다.


종이 울지 않는 이유

 

높은 직책에 있던 한 소녀의 아버지는 반란군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죄목으로 그들에게 끌려가 온갖 협박에도 굴복하지 아니하고 마침내 마을의 새벽종소리가 울리는 시각에 처형당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죽음을 맞게 되자 소녀는 생각끝에 종지기 노인에게 찾아갔다.

"새벽종소리가 울리면 저희 아버지가 처형을 당하게 돼요. 할아버지 제발 내일 새벽에는 종을 치지 말아주세요. 제발 부탁입니다."

"내가 그렇게 해서 아버지를 구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단다. 하지만 나 역시 반란군의 감시를 받고 있으니 내가 종을 치지 않으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고, 또 그렇게 되더라도 아마 그들이 종을 칠거다."

다음날 새벽, 종지기 노인이 종을 치려고 줄을 힘차게 여러 차례 잡아 당겼지만 종은 울리지 않았다. 반란군 대장은 새벽종소리를 기다려도 울리자 않자 종지기 노인을 찾아가 소리쳤다.

"왜 종을 치지 않는 거요?"

"아무리 종을 쳐도 종이 울리지 않습니다."

반란군 대장 역시 여러 차례 중릉 당겼지만 종이 울리지 않자 종루 꼭대기로 올라가보니 이게 어찌된 일인가!

한 소녀가 종의 충에 몸을 묶고서 피투성이가 된 채 매달려 있었다.

놀란 대장은 "저기 저 소년가 누구요?"

"오늘 새벽에 처형 당하게 될 사람의 딸입니다."

종지기 노인은 슬피 울지 않을 수 없었다.

반란군 대장은 아버지에 대한 딸의 사랑에 감탄하여 소녀의 아버지를 풀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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