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단기선교 김천팀 사역 보고


묵묵히 임하는 여목사의 시골 목회에 큰 감동
교회 홍보 및 지역 전도 나설 때 ‘행복’

 8월 3일부터 5일까지 장년대교구 김천팀은 순복음사도행전교회에서 단기선교사역을 진행했다.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순복음사도행전교회를 방문한 단기선교팀은 유난히 더웠던 8월 한낮의 햇볕과 싸워가며 교회 홍보와 지역 전도 사역을 열심히 전개 했다.
 순복음사도행전교회는 지난해 5월 개척된 교회로 여성 목회자인 황혜원 목사가 시무하고 있다. 지난해 사역지를 김천으로 정하고 이 교회 입당예배부터 황 목사와 교류를 갖게된 장년대교구 단기선교팀은 올해 전도지 ‘행복으로의 초대’와 전도용 스티커가 붙은 쓰레기봉투와 양말을 들고 다니며 축호전도를 실시했다. 한쪽에서는 부스를 설치하고 부침개 전도에 나섰다. 전도활동에는 부모를 따라 어린아이들도 동참해 지역 주민에게 감동을 주었다.  한 팀원의 간증이다. “팀원의 아이가 다쳐 깁스를 하는가 하면 직장 문제로 선교 동참이 어려워질 뻔한 팀원도 생기고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그런 가운데도 서로의 마음을 모아 기도에 힘쓸 때 복음 전파의 길이 열리고 사역을 통한 은혜가 충만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홀로 시골목회에 전념해 온 목사님을 보면서 마음의 감동 또한 컸습니다.”


수험생 자녀를 위한 수능기도회 진행

이영훈 목사 빌립보서 말씀으로 기도와 격려

  2019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15일 아침 8시 30분부터 전국의 1190개 시험장에서 일제히 치러졌다. 같은 시간 우리 교회 대성전에서도 시험 시간표에 따라 수험생을 위한 기도회가 진행됐다. 교회학교에서 주관한 기도회는 많은 학부모들이 참석해 대성전 1층을 채우고 시험이 종료되는 시간까지 중보 및 안수기도, 찬양과 율동 등으로 수험생들에게 힘을 보탰다.

 1교시 국어 시험 전 이영훈 목사는 빌립보서 4장 6∼7절 말씀을 통해 “성경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라 그리하면 평강이 임한다고 말씀하셨다.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면 하나님이 자녀들에게 최고의 컨디션을 주셔서 좋은 결과가 있게 도와주실 것”이라고 참석자들을 격려했다. 이어 “이 시험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지만 넘어야 할 관문이기에 부모들이 기도하고 자녀들은 시험장에서 시험을 치른다”면서 “우리 일생에 여러 가지 시험이 있는데 모든 시험을 믿음으로 잘 감당해 좋은 열매를 맺게 하시고 하나님의 큰 복이 임하게 하여 주시도록, 또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꿈꾸고 계획한 대로 좋은 결과 나와서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을 간구했다.

 참석자들은 이영훈 목사의 기도에 크게 공감하며 수험생의 이름과 기도제목이 적힌 카드를 붙잡고 기도에 전념했다. 5교시 시작 전에는 교육국장 황선욱 목사의 격려가 있었다.

 이날 기도회에는 교회학교와 대학청년부 교역자들이 찬양과 기도를 인도했고 대교구 교역자들은 수험생 가족들을 한 명 한 명 안수하며 기도했다. 학생들의 시험 시간에 따라 80, 100분 동안 이어지는 기도에도 학부모들은 지치지 않고 오히려 더 간절하게 방언과 눈물로 기도했으며 오후 5시 40분 제2외국어와 한문을 끝으로 시험이 종료되면서 기도회도 마무리됐다.

 이번 기도회에는 수험생의 가족뿐만 아니라 교구의 지·구역장들도 참석해 중보기도를 했다. 한 성도는 “작년에 자녀가 수능시험을 봤는데 당시 많은 사람들의 중보기도 덕분에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면서 “나도 순복음의 다른 자녀들을 위해 기도해야겠다는 마음으로 기도회에 참석했다”며 학부모들을 응원했다.

 


평신도를 위한 신학 강좌(15)-

역사신학(6) - 한국교회사 2

 참된 신앙을 갖는 데 신학은 전혀 필요가 없다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신학이 신앙에 장애가 된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사실 ‘신학’은 좁은 의미에서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의미하고 넓은 의미에서는 기독교 신앙 전반에 관한 서술을 뜻한다. 그러므로 (바른) 신앙이란 (바른) 신학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점검하여 재수정함으로써 얻어지는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평신도를 위한 신학 강좌’를 개설하여 연말까지 20회에 걸쳐 신학 전반에 대해 알기 쉽게 소개하고자 한다. 집필순서는 ①조직신학(3회), ②구약신학(3회), ③신약신학(3회), ④역사신학(6회), ⑤실천신학(4회), ⑥선교학(1회) 순이다. <편집자 주>


 1. 한일합방과 한국교회의 수난
 을사조약(1905)을 강제로 체결하여 조선의 외교권을 강탈한 일본은 이후 조선의 행정권 사법권 경찰권 군사권을 차례로 빼앗았다. 이와 같은 일련의 침략과정을 거쳐 일본은 1910년 8월 22일 조선을 강제로 합병했다.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일본은 총독부를 설치하고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 강압적인 통치를 시작했다.
 일본이 조선을 합병할 당시, 한국교회는 외국인 선교사 270여 명, 조선인 교역자 2300여 명, 신도 20만 명의 인원과 전국에 1900여 개의 예배당과 300개 이상의 학교를 보유한 유일하고도 강력한 전국적인 조직으로 성장해 있었다. 게다가 조선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다수의 인사가 교회에 들어와 신앙생활과 민족운동을 나란히 전개하고 있었다.
 합병 초기 일제는 기독교와 우호적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했지만 기독교가 조선을 식민통치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판단되자 서서히 기독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많은 기독교인이 신민회에 가입해 활동하고 있었다. 신민회는 상실되어 가고 있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1907년 4월에 안창호 전덕기 등 기독교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항일 비밀조직이었다. 기독교 세력이 신민회의 배후라고 확신한 일제는 항일 민족운동과 기독교 세력을 한꺼번에 제거하기 위해 합방 직후 ‘105인 사건’을 기획·조작했다. ‘105인 사건’은 일제가 1911년 12월에 기독교인들이 초대 조선총독인 데라우찌를 암살하려 했다고 날조하여 100여 명의 기독교 인사를 잡아들이고 선교사들을 추방하려 한 악랄한 음모였다. ‘105인 사건’은 일제 강점기 한국교회가 겪어야 할 길고도 긴 핍박과 수난의 출발선이었다. 

 
2. 3·1운동과 기독교
 1910년대 조선총독부는 강력한 무단통치를 하며 우리 민족을 경제적·문화적으로 가혹하게 탄압했다. 이를 통해 민족 고유의 문화를 말살하고 한국 경제를 철저히 수탈하면서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꺾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일제의 폭력적인 통치가 강해질수록 이에 저항하는 한국 민족의 저항의식 또한 커져만 갔다. 이렇게 누적되었던 우리 민족의 반일의식과 항일 에너지가 걷잡을 수 없이 터져나온 사건이 바로 3·1운동이었다.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발표된 독립선언서에 호응하여 각계각층의 사람이 참여하여 거의 1년간 지속된 항일민족독립운동을 일컫는 것이다. 기독교는 3·1운동의 시작과 전개에서 큰 역할을 감당했다. 3·1운동을 준비하고 조직화하는 단계에서부터 기독교인들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했고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던 단계에서는 교회가 조직과 인원을 제공했다. 당시 2000만 겨레 중 10%인 200만 명이 3·1운동에 참여했는데 전체 참가자의 22%가 기독교인이었으며 민족대표 33인 중 절반가량인 16명이 기독교인이었다. 당시 기독교 인구가 전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1%에 불과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기독교가 3·1운동에 주도적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만큼 교회의 피해 역시 만만치 않았다. 1919년에 조선총독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1919년 4월 말까지 투옥된 기독교인은 2120명으로써 유교 불교 천도교인의 총수 1556명보다 많았다. 또한, 미국교회협의회 동양위원회가 1919년 출판한 『한국의 상황』(The Korean Situation)에 의하면 1919년 3월 1일부터 7월 20일까지 631명이 살해되고 2만 8934명이 체포되었다.
 기독교는 3·1운동 참여로 막대한 피해를 보았지만 동시에 기독교는 외래종교요 서양종교라는 시선을 불식시키며 ‘민족의 종교’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3. 사회적 변화와 도전에 직면한 교회
 3·1운동은 일제가 식민통치를 강압적인 무단정치에서 유화적인 문화정치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제는 문화정치를 표방하며 겉으로는 유화정책을 내세워 이전보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허락해주었지만 속으로는 민족의식과 민족운동 세력을 말살하려는 집요한 분열 및 이간책을 사용했다. 한편, 일제의 식민통치가 다소 헐거워진 틈을 타서 국내에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상이 유입되었다. 공산주의 사상은 3·1운동 실패 후 패배주의와 허무주의에 빠진 사람들과 사회구원에는 미진한 기독교에 냉소적인 태도를 보인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사회·청년 운동에서 주도권을 잡았다고 판단한 공산주의자들은 1925년부터 교회를 공격하고 기독교 신앙을 비판하는 반기독교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의 거센 도전과 교회에까지 침투한 패배주의와 허무주의로 인해 한국교회는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시련기에 내적인 신앙체험을 강조하는 부흥운동이 전개되어 우리 민족에게 암울한 현실을 이겨낼 힘과 희망을 주었다. 이 시기의 부흥운동은 개인의 영적 지도력에 강하게 의존하고 있었다. 특정한 개인보다는 불특정 다수에 의해 진행된 집단적 신앙체험이 주류를 이룬 이전의 부흥운동들과는 달리, 이 시기의 부흥운동은 김익두 이용도 길선주와 같은 특출난 개인이 이끌었다. 이들은 각각 ‘신유와 기적을 동반한 부흥운동’(김익두) ‘신비주의적 부흥운동’(이용도) ‘내세지향적 부흥운동’(길선주)을 한국교회 안에 정착시킨 인물들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부흥운동은 사회주의 계열이나 교회 내의 진보주의 청년계층으로부터 몰역사적이고 비현실적이라고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힘없는 다수 민중계층 교인들에게 암울한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신앙적 활력소를 불어넣었다는 점에서 민중운동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4. 신사참배와 한국교회의 수난
 일본은 1931년 만주침략을 시작으로 1945년 패전하기까지 15년에 걸친 침략전쟁을 감행했다. 이를 위하여 식민지였던 한국을 침략전쟁을 위한 병참기지로 개편하고 물자와 인력의 수탈과 동원을 용이하게 할 수 있는 체제를 구축했다. 더 나아가 수탈을 극대화하기 위해 한국인의 정신생활까지도 통제하려고 시도했다. 이때 일제가 시행한 것이 ‘황민화정책’이었다. 황민화정책은 ‘천황 신앙’을 강제해 한국 민족의 정체성을 빼앗고 민족성을 말살하려고 추진된 정책이었다. 일제는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신사참배와 동방요배를 강요하고 황국신민서사를 제창하게 하였고 창씨개명과 일본어 사용을 강제했다. 그리고 황민화와 전쟁 협력을 강요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내세운 논리가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는 ‘내선일체론’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을 앞두고 일제는 한국교회에 본격적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먼저 기독교계 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했고 이어 개별교회와 각 교단에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한국교회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항하여 학교 폐지와 선교부 철수 및 신사참배 거부 등의 강력한 수단으로 투쟁을 벌였다. 하지만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성공회 등 대부분의 교파가 일제에 굴복하여 신사참배를 결의하였고, 마지막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던 장로교도 1938년 9월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함으로써 한국교회는 변절의 길을 걷게 되었다.
 신사참배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한국교회 파괴 작업은 계속 진행되었다. 그 결과 성결교는 1941년 12월에 침례교회는 1944년 5월에 해산되었고 장로교는 1943년 5월에 ‘일본 기독교조선장로교단’으로 감리교는 8월에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으로 예속되었다. 그러다가 일제는 1945년 7월 19일에 한국의 모든 기독교 교파를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통폐합함으로써 한국교회를 일본교회에 완전히 종속시켰다.

<국제신학연구원>


‘2018 희망나눔 박싱데이’

굿피플 7년째 희망박스로 겨울 녹이는 사랑 실천
2만개 희망박스 전국 독거노인 소외계층에 전달

 국제구호개발 NGO 굿피플은 14일 광화문광장에서 ‘2018 희망나눔 박싱데이’를 진행해 7년째 희망릴레이를 이어갔다. 이번 박싱데이를 통해 소외계층에 전달될 20억 상당의 생필품이 담긴 희망 박스 2만개가 만들어졌다.  
 굿피플 이사장 이영훈 목사는 개회사를 통해 “2018 희망나눔 박싱데이를 통해 2만개의 박스가 소외된 이웃들에게 전달될 예정이다”며 “우리가 2012년부터 희망박스를 전달해 왔는데 올해는 더 많이 전하기 위해서 희망박스 릴레이 운동을 전개해 많은 참여가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사랑 나눔이 필요하다. 쪽방촌을 방문하면서 우리가 더 많은 사랑을 베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면서 ”특별히 복지 사각지대에 계신 분들에게 사랑과 희망이 더욱 전달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국제구호개발 NGO 굿피플과 한국사회복지협의회의 주최로 열린 이번 행사는 우리 교회와 CJ제일제당, 한국사회복지협의회가 후원했다. 이날 행사에는 굿피플 이사장 이영훈 목사를 비롯해  장로회장 박경표 장로, 한국사회복지협의회 서상목 회장, 국회의원 송영길븡유성엽, 굿피플 회장 김천수 장로, 굿피플 나눔대사 탤런트 김호진과 300여 자원봉사자들이 참여했다. 상자를 채우기 위해 쉼 없이 움직이던 봉사자 김영아 씨는 “다양한 생필품들이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는 데 큰 보탬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봉사자들은 선물박스에 설탕 고추장 된장 참기름 등 총 21가지의 생필품들을 넣으면서 마음속 사랑도 함께 담았다. ‘2018 희망나눔 박싱데이’를 통해 만들어진 박스는 전국 각지의 독거노인 어르신, 기초생활 수급자, 다문화가정 등 소외 계층 이웃들에게 전달될 예정이다.
 ‘박싱데이’란 중세시대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다음날 옷 곡물 연장 등과 같은 생필품을 박스에 담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선물했던 전통에서 유래된 것으로 굿피플은 지난 2012년부터 매년 개최하고 있다. 올해까지 약 140억 상당 10만 개의 희망 박스를 소외 이웃들에게 전달했다.
 어려운 이들을 위한 좋은 이웃이자 친구인 굿피플은 ‘2018 희망나눔 박싱데이’에 앞서 소외된 이웃들에게 더 많은 희망박스를 전달하기 위한 온라인 캠페인인 ‘희망박스 릴레이’를 펼쳐왔으며 이 캠페인은 11월 30일까지 진행된다.


추수감사주일 꽃꽃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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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대학 ‘서예미술전시회’ 황혼기, 인생 작품을 그리다

여의도순복음교회 베다니홀서 24일까지

 “내 나이가 어때서.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천국 가는 날까지 맘껏 펼쳐볼 거야.”

 노년층 성도들을 위해 설립된 영광대학이 10월 17∼24일 여의도순복음교회 베다니홀에서 ‘2018 서예미술 작품전시회’를 열고 있다.

 평균나이 79세! 인생의 황혼기에 들어선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의 즐거움을 다른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전시회를 마련한 것.

 이번에 출품된 작품들은 모두 영광대학 학생들이 수업을 받으면서 갈고 닦은 실력으로 1년 동안 준비한 것들이다. 서예 100점 이상, 미술 40점 등이고 전시회장 입구에는 성경필사본들도 전시되어 있다.

 영광대학 회장 김형권 장로는 “미술 작품들도 그렇지만 특히 서예는 100장을 써야 겨우 한 점 작품이 나올 수 있다”며 이번 전시회가 영광대학 학생들의 열정으로 마련되었음을 강조했다.

 실제로 한자 한자 정성을 다해 쓴 붓글씨 성구들이 전시회장을 풍성하게 채웠다.

 요한복음 15장 포도나무 비유를 담은 작품의 경우 붓글씨로 쓴 말씀을 수묵화로 그린 포도나무가 조화롭게 감싸는 모습이다. 성경 구절만 아니라 선인들의 명언과 보석처럼 아름다운 문장, 시구 등도 있다.

 더욱이 풍경화와 정물화에서는 오랜 시간 인생을 살아온 노년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삶의 깊이도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핫핑크와 샛노랑 등 발랄한 색감의 꽃 그림을 보면 육신이 늙어가더라도 결코 사라지지 않을 동심의 감성들이 살아 있어 즐거움을 더해준다. 봄날 손자와 산책에 나서는 모습을 표현한 작품에선 삶을 추억하고 기억하는 영성도 볼 수 있다.

 유화를 출품한 추옥지 권사는 “7∼8년 전부터 영광대학에서 매주 한 번씩 그림을 배워왔는데 그림을 배우기 전과 후 달라진 점이 있다면 세상을 전혀 다른 눈으로 본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무 하나, 잎 하나를 봐도 선과 형태가 다 다르고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어진다”는 것.

 또한 영광대학 학생들 가운데는 한글도 모르는 상태로 입학했다가 지금은 90세가 넘은 나이에 한글서예는 물론 한문서예까지 하는 분들도 있다.

 이처럼 이번 전시회의 작가들, 즉 영광대학 학생들의 경우 다양한 이력들을 가지고 있어 이 점을 고려하면 더욱 의미 있게 감상할 수 있다. 또 보는 이들에게 배움에는 나이도 없고 한계도 없음을 웅변하고 있어 배움의 의욕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영광대학은?

 여의도순복음교회가 36년 전 신앙 안에서 건강하고 활기찬 노년을 지향하며 노인복지 실현을 위해 개설한 단체로서 현재는 350여 명의 학생들이 소속되어 활동 중이다. 매년 결실의 계절인 가을이면 작품 전시회를 통해 성도들과 이웃들에게 1년간의 노력의 성과를 선보이고 있다. 또한 평소에는 전문강사를 초빙해 매주일과 수요일, 목요일에 일어, 영어, 장기, 바둑, 한문 서예, 율동, 건강체조, 성극, 찬양, 국악, 성경쓰기, 미술, 하모니카, 오카리나, 난타 등의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추수감사주일 꽃꽃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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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대학 ‘서예미술전시회’ 황혼기, 인생 작품을 그리다

여의도순복음교회 베다니홀서 24일까지

 “내 나이가 어때서.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천국 가는 날까지 맘껏 펼쳐볼 거야.”

 노년층 성도들을 위해 설립된 영광대학이 10월 17∼24일 여의도순복음교회 베다니홀에서 ‘2018 서예미술 작품전시회’를 열고 있다.

 평균나이 79세! 인생의 황혼기에 들어선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의 즐거움을 다른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전시회를 마련한 것.

 이번에 출품된 작품들은 모두 영광대학 학생들이 수업을 받으면서 갈고 닦은 실력으로 1년 동안 준비한 것들이다. 서예 100점 이상, 미술 40점 등이고 전시회장 입구에는 성경필사본들도 전시되어 있다.

 영광대학 회장 김형권 장로는 “미술 작품들도 그렇지만 특히 서예는 100장을 써야 겨우 한 점 작품이 나올 수 있다”며 이번 전시회가 영광대학 학생들의 열정으로 마련되었음을 강조했다.

 실제로 한자 한자 정성을 다해 쓴 붓글씨 성구들이 전시회장을 풍성하게 채웠다.

 요한복음 15장 포도나무 비유를 담은 작품의 경우 붓글씨로 쓴 말씀을 수묵화로 그린 포도나무가 조화롭게 감싸는 모습이다. 성경 구절만 아니라 선인들의 명언과 보석처럼 아름다운 문장, 시구 등도 있다.

 더욱이 풍경화와 정물화에서는 오랜 시간 인생을 살아온 노년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삶의 깊이도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핫핑크와 샛노랑 등 발랄한 색감의 꽃 그림을 보면 육신이 늙어가더라도 결코 사라지지 않을 동심의 감성들이 살아 있어 즐거움을 더해준다. 봄날 손자와 산책에 나서는 모습을 표현한 작품에선 삶을 추억하고 기억하는 영성도 볼 수 있다.

 유화를 출품한 추옥지 권사는 “7∼8년 전부터 영광대학에서 매주 한 번씩 그림을 배워왔는데 그림을 배우기 전과 후 달라진 점이 있다면 세상을 전혀 다른 눈으로 본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무 하나, 잎 하나를 봐도 선과 형태가 다 다르고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어진다”는 것.

 또한 영광대학 학생들 가운데는 한글도 모르는 상태로 입학했다가 지금은 90세가 넘은 나이에 한글서예는 물론 한문서예까지 하는 분들도 있다.

 이처럼 이번 전시회의 작가들, 즉 영광대학 학생들의 경우 다양한 이력들을 가지고 있어 이 점을 고려하면 더욱 의미 있게 감상할 수 있다. 또 보는 이들에게 배움에는 나이도 없고 한계도 없음을 웅변하고 있어 배움의 의욕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영광대학은?

 여의도순복음교회가 36년 전 신앙 안에서 건강하고 활기찬 노년을 지향하며 노인복지 실현을 위해 개설한 단체로서 현재는 350여 명의 학생들이 소속되어 활동 중이다. 매년 결실의 계절인 가을이면 작품 전시회를 통해 성도들과 이웃들에게 1년간의 노력의 성과를 선보이고 있다. 또한 평소에는 전문강사를 초빙해 매주일과 수요일, 목요일에 일어, 영어, 장기, 바둑, 한문 서예, 율동, 건강체조, 성극, 찬양, 국악, 성경쓰기, 미술, 하모니카, 오카리나, 난타 등의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베트남순복음교회 창립 14주년 감사예배

 베트남순복음교회(담임 이구홍 목사) 창립 14주년 감사예배가 9월 16일 베트남순복음교회에서 열렸다. 인도차이나지방회장 김야고보 선교사는 ‘아브라함의 부르심과 연단’(창 12:1∼5)을 주제로 한 설교에서 “아브라함이 연단을 통해 참된 믿음의 조상이 된 것처럼 참된 믿음으로 교회를 섬길 것”을 당부했다.
 2부 임직식에서는 연규승 장로, 김성태 신대래 안수집사, 장형선 권사가 새로 제직을 맡았다.
 이 행사에는 인도차이나선교회 회장 한기택 장로와 회원 박경민 집사가 참석해 베트남순복음교회의 든든한 기둥으로 부름 받은 제직들을 축하했다.

 


평신도를 위한 신학강좌(14) - 역사신학 5 - 한국교회사 1

 참된 신앙을 갖는 데 신학은 전혀 필요가 없다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신학이 신앙에 장애가 된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사실 ‘신학’은 좁은 의미에서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의미하고 넓은 의미에서는 기독교 신앙 전반에 관한 서술을 뜻한다. 그러므로 (바른) 신앙이란 (바른) 신학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점검하여 재수정함으로써 얻어지는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평신도를 위한 신학 강좌’를 개설하여 연말까지 20회에 걸쳐 신학 전반에 대해 알기 쉽게 소개하고자 한다. 집필순서는 ①조직신학(3회), ②구약신학(3회), ③신약신학(3회), ④역사신학(6회), ⑤실천신학(4회), ⑥선교학(1회) 순이다.                               <편집자 주>


조선말 전해진 기독교, 엘리트들 수용되면서 민족종교로 발전
서구문물 통해 민족자강 이루려던 이상재 안창호 이승만 등 입교

 조선말에 전해진 기독교는 우리 민족과 역사를 함께하면서 외래종교에서 민족종교로 변화하고 발전했다. 우리 민족과 역사를 함께한 한국교회의 역사를 2회에 걸쳐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겠다.

 1. 기독교 수용 이전의 접촉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훨씬 이전에 이미 몇 차례 복음과의 접촉이 있었다. 7∼9세기 중국 당나라에서 경교라는 이름으로 번성하였던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당시 당나라와 빈번한 교류를 하던 신라에 소개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1956년 경주 불국사 경내에서 발굴된 돌십자가, 마리아상, 2점의 십자무늬장식 등의 고고학적 자료들이 경교의 신라 전래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한편, 임진왜란(1592∼1598) 때에도 기독교와의 짧은 접촉이 있었다. 1592년 12월에 일본 주재 예수회 소속 선교사인 세스페데스 신부가 조선을 방문하여 경상남도 웅천(오늘날의 창원)에 주둔하던 천주교도인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를 1년간 돌보았다. 세스페데스 신부는 조선 땅을 밟은 첫 천주교 성직자였지만 조선인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은 없었다.

 2. 천주교의 수용
 17세기 천주교는 종교라기보다는 서학 혹은 천주학이라는 학문으로 한국에 소개됐다. 서학에 관심이 많았던 유학자 중에 천주교를 믿는 이들이 생겼다. 이들 중 하나가 한국 최초의 영세자이며 한국 천주교회 창설자 중의 한 사람인 이승훈이었다. 그는 1783년 겨울 조선사신단의 일원으로 북경에 가서 다음해 2월 북경 주재 예수회 선교사인 그라몽 신부에게 영세를 받고 돌아왔다. 귀국하자마자 이승훈은 동료 유학자들에게 영세를 베풀었다. 이들은 교우 김범우의 명례동 집(현재의 명동성당 자리)에서 모임을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한국 천주교회는 신해(1791), 신유(1801), 기해(1839), 병오(1846), 병인(1866)교난 등 다섯 차례의 심한 박해를 견디며 성장했다.   


 3. 개신교와 한국과의 접촉
 1884년 고종이 개신교 선교를 허락하기 이전에 이미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파하려는 개신교 선교사들의 움직임이 있었다. 처음으로 한국에 들어온 개신교 선교사는 독일 출신으로 동아시아에서 오랫동안 선교사로 활동한 칼 귀츨라프였다. 그는 1832년 7월에 조선에 통상을 청원하는 동인도회사의 상선을 타고 우리나라에 왔다가 충청도 지역에서 한문성경과 전도문서를 배포한 후 돌아갔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두 번째 선교사는 ‘한국에서의 첫 개신교 순교자’로 알려진 로버트 토마스 목사였다. 영국 출신 중국 주재 선교사였던 그는 한국 선교의 꿈을 품고 1886년 여름 미국 무장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우리나라에 왔다가 9월에 순교했다.
 
 4. 만주와 일본에서의 성경 번역
 한편 만주와 일본에서는 한글번역 사업이 진행됐다. 만주 주재 스코틀랜드 선교사인 존 매킨타이어와 존 로스 목사는 만주에서 장사하던 이응찬, 백홍준, 서상륜 등 의주 청년들의 도움을 받아 1882년에 누가복음과 마가복음을 번역·출판했다. 그들은 1887년에 신약성경을 완역하고 순 한글로 된 최초의 신약전서, ‘예수셩교젼셔’를 출판했다. 일본에서도 이수정에 의해서 성경이 번역됐다. 1882년 9월에 수신사 박영효의 통역으로 일본에 온 그는 1883년 4월에 동경에서 미국 선교사 조지 녹스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됐다. 언어에 뛰어났던 이수정은 마가복음을 번역하였고 이는 1885년 2월에 요코하마에서 출판됐다.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이 1885년 4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한국에 입국할 때 손에 쥐고 있던 성경이었다. 

 5. 한국 선교의 시작  
 쇄국정책을 유지하던 조선은 1876년 일본과 불평등 조약인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하고 문호를 개방했다. 1882년에는 미국과 한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복음의 미개척지였던 한국의 문호가 개방된 것이다. 1884년 7월에는 일본 감리교회 감독인 로버트 맥클레이 목사가 내한하여 고종으로부터 교육과 의료 활동에 국한된 선교사업을 허락받음으로써 한국 선교의 문은 드디어 공식적으로 열리게 됐다.  
 미국의 남감리교회는 헤론과 언더우드(북장로교회)를, 스크랜턴과 그의 어머니 메리 그리고 아펜젤러(남감리교회)를 의료 및 교육선교사로 임명했다. 북장로교회도 헤론과 언더우드를 임명하고 중국에서 활동하던 의료선교사 알렌의 선교지를 한국으로 변경했다. 1884년 9월 알렌은 국내에 거주할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로서 한국의 땅을 밟았다.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를 포함한 다른 선교사들도 내한해 선교 활동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한편, 북장로교회와 남감리교회에 이어 호주장로교회(1889), 침례교(1889), 성공회(1890), 미국 남장로교회(1892), 미국 남감리교회(1896), 캐나다 장로교회(1898) 등이 선교사를 파견했다.   

 6. 교회들의 설립
  의주 청년 서상륜은 1883년 외가가 있는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에 교회를 세운다. 이 교회가 바로 한국 최초의 개신교 교회인 소래교회, 혹은 송천교회이다. 한국의 자생교회인 소래교회를 이어 언더우드가 1887년 9월 27일 서울에 새문안교회를, 아펜젤러가 1887년 10월 9일에 정동제일교회를 설립했다. 1893년 6월에는 마펫 선교사가 평안도 지역을 대표하는 장대현교회를 설립했다. 

 7. 한국교회의 성장
 개신교 선교사가 입국해 공식적인 활동을 시작한 첫 10년간(1884∼1894)은 ‘고전의 시기’였다. 1894년까지 한국 교회가 얻은 신자는 500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청일전쟁(1894∼1895) 이후, 신자 증가율은 급격히 늘기 시작했다. 신도 수는 1895년 750여 명, 1896년 2500여 명, 1897년 3300여 명, 1900년 1만2000여 명, 1905년 2만6000여 명으로 증가했다. 청일전쟁 이후, 하층민들은 물리적 보호와 정신적 위안을 찾아서, 엘리트층들은 서구문물 수용을 통한 민족의 자강을 이루기 위해 대규모로 입교했다. 이승만, 이상재, 안창호 등 다수의 지도자들이 기독교 신자가 됐다.

 8.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한국 개신교회의 초창기는 사람들이 종교적 목적에서보다는 실제적이고 정치적 목적에서 교회에 입교하던 시기였다. 을사늑약(1905년)으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할 풍전등화와 같은 시기에 한국 교회의 얼굴과 성격을 만들 원산부흥(1903년)과 평양대부흥(1907년)이 때맞춰 일어났다. 1903년 원산의 선교사 기도모임에서 점화된 부흥의 작은 불씨는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대부흥의 큰 불길로 피어올랐다. 평양에서 일어난 부흥의 역사는 한반도 전역은 물론 1908년에는 만주 지역의 교회에도 확산됐다.
 평양대부흥운동은 한국 교회에 양적·질적 변화를 가져왔다. 한국 교회는 수적으로 성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앙적으로도 성숙하게 됐다. 기독교를 서구의 문물과 사상으로 인식하였던 초기 기독교인들이 이제 기독교 안에서 영적인 생명력과 깊이를 찾기 시작했다.

<국제신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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