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를 위한 신학 강좌(13) - 역사신학 ④ - 현대교회사

 참된 신앙을 갖는 데 신학은 전혀 필요가 없다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신학이 신앙에 장애가 된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사실 ‘신학’은 좁은 의미에서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의미하고 넓은 의미에서는 기독교 신앙 전반에 관한 서술을 뜻한다. 그러므로 (바른) 신앙이란 (바른) 신학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점검하여 재수정함으로써 얻어지는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평신도를 위한 신학 강좌’를 개설하여 연말까지 20회에 걸쳐 신학 전반에 대해 알기 쉽게 소개하고자 한다. 집필순서는 ①조직신학(3회), ②구약신학(3회), ③신약신학(3회), ④역사신학(6회), ⑤실천신학(4회), ⑥선교학(1회) 순이다.<편집자 주>

 이번 주에는 17세기 중반에서 현재까지 포괄하는 근·현대교회의 역사를 시대별로 대표되는 사상들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1. 17세기 중반 - 근·현대교회사의 시작

 종교개혁은 부패한 중세 가톨릭교회에 반대해 일어난 교회의 개혁운동이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중세의 연장이었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이 공로 사상이나 연옥 같은 중세 기독교의 여러 종교적 신념들을 제거하기는 했지만, 동시에 르네상스운동을 통해 형성되던 인본주의적인 관념이나 가치들도 함께 배제하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종교개혁시대 역시 교회의 권력이 국가의 정치를 좌지우지하고 있었고, 기독교 교리가 인간의 삶과 생각을 통제하고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종교의 강력한 지배는 17세기 초 일어난 30년전쟁(1618∼1648)에 의해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1648년 체결된 베스트팔렌 평화조약으로 개신교회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등한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고, 유럽의 국가들은 기독교의 힘과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교회사에서는 국가와 사회가 기독교의 통제와 지배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17세기 중반을 근·현대교회사의 시작으로 본다.

 
2. 17세기 후반 - 계몽주의와 경건주의의 태동

 30년 전쟁 이후, 유럽 국가와 사회에서는 세속화가 진행되면서 교회의 절대적 권위를 부정하고 인간의 이성과 자유로운 탐구를 강조하는 계몽주의 사상이 등장했다. 신앙보다는 이성과 합리성을 진리의 판단 기준으로 삼았던 계몽주의자들은 인류의 무한한 진보와 이성의 힘에 의한 사회의 개혁을 믿었다.
 인간 이성을 강조하는 이러한 계몽주의 사상은 교회에도 영향을 미쳤다. 계몽주의 사상의 등장과 함께 개신교는 이성적 사유를 통해 신앙과 교리를 논증하고 이해하고자 노력했고, 그 결과 개신교 정통주의 혹은 개신교 스콜라주의가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계몽주의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지만 직접 세상에 간섭하지 않고 자신이 만든 자연의 질서에 맡겨놓았다고 주장함으로써 기독교의 계시와 기적을 부정하는 자연신론의 태동에 크게 기여했다.
 한편, 계몽주의 사상에 반발하는 경건주의운동이 독일에서 시작되었다. 경건주의운동은 신앙의 본질을 이성보다는 개인의 종교적 경험에서 찾았다. 필립 야콥 스페너(1635∼1706)에 의해 시작된 경건주의운동은 스페너와 어거스트 헤르만 프랑케(1663∼1727)가 함께 세운 할레대학에서 전 유럽의 개신교회로 퍼져갔다. 이러한 경건주의는 헤른후트의 모라비안 공동체를 이끈 니콜라우스 루드비히 진젠도르프(1700∼1760)와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영국의 존 웨슬리(1703∼1791) 그리고 그의 동생 찰스 웨슬리(1707∼1788)에게 강한 영향을 끼쳤다.

 3. 18세기 - 복음주의적 부흥운동

 18세기 영국의 기독교는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의 영향으로 깊은 침체의 늪에 빠져 있었다. 이런 가운데 기독교 신앙에서 회심과 구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복음주의 신앙운동이 성공회 신부였던 웨슬리 형제와 조지 휫필드(1714∼1770)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이들은 거룩한 생활에 필요한 엄격한 방법을 제시했기 때문에 ‘감리교도’ 혹은 ‘메소디스트’라고 불렸다. 감리교운동은 영국의 기독교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영국의 상류층에서 노동계층까지 전 계층에 걸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특히 복음은 사회에 영향을 주어야 한다는 웨슬리의 사회참여 주장은 영국 전 사회에 각성을 가져왔다. 후에 복음주의운동은 영국 노예해방운동의 선구자인 윌리엄 윌버포스(1759∼1833)와 대영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빅토리아 여왕(재위 1871∼1901)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영국에서 감리교 부흥운동이 활발히 전개될 즈음에, 북미에서도 영국 식민지들을 중심으로 제1차 대각성운동이라 불리는 영적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대각성운동을 이끈 영적 지도자들은 조나단 에드워즈(1703∼1758)와 조지 휫필드였다. 초창기의 청교도적인 신앙과 경건성이 사라지고, 종교적 열정이 무시되던 당시 미국 사회에서 이들은 죄의 회개와 개인적 회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 영향으로 미국에서는 회개운동이 일어났고, 영적으로 죽어가고 있던 미국 교회에 영적 생명력이 회복되었다. 제1차 대각성운동은 약 반세기 후에 일어날 제2차 대각성운동의 영적 토대가 되었다.  


 4. 19세기 - 위대한 선교의 세기

 19세기는 기독교 역사상 ‘위대한 선교의 세기’라고 불린다. 현대 개신교 선교는 현대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영국의 윌리엄 캐리(1761∼1834)가 1793년 인도의 콜카타를 향해 출발하면서 본격적으로 막이 올랐다. 이후 런던선교회(1795년), 미국 국제선교 본부(1810년), 바젤선교회(1815년), 영국 성공회선교국(1799년) 등 유럽과 미국에서 수많은 선교단체들이 조직되었고 각국에 선교사들이 파송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세기 기독교 해외선교는 드와이트 무디(1837∼1899)와 아서 피어선(1837∼1911) 같은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에 의해 전성기를 맞이한다. 우리나라에 온 언더우드나 아펜젤러 같은 선교사들도 모두 무디와 피어선이 조직한 ‘학생선교자원운동’을 통해 선교의 비전을 키웠던 사람들이었다.

 5. 20세기 이후 - 교회일치운동과 오순절운동

 교파와 교단 간의 협력을 강조하는 교회일치운동은 선교 현장의 어려움을 해결하려는 의도에서 시작되었다. 그 결과 선교 현장에서 여러 교단의 과다한 경쟁과 분쟁을 피하고, 좀 더 효율적인 선교를 위한 지역선교대회가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런 가운데 1910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는 세계 선교의 실제적 방향과 전략을 점검하기 위한 국제규모의 선교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는 세계적 차원의 교회일치운동을 위한 첫 걸음이 되었다.
 한편 20세기가 시작되는 첫날인 1901년 1월 1일 성령의 능력과 은사를 강조하는 오순절운동이 미국 캔자스 주 타피카에서 찰스 팔함 목사에 의해 시작되었다. 작은 지역 부흥운동에 불과하던 오순절운동은 1906∼1909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아주사 거리 부흥회를 통해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등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지리적 확산 이외에도 오순절운동은 1960년대부터 성공회, 가톨릭교회, 장로교, 루터교 등 오랜 역사적 전통을 가진 교회들로 확산되기 시작하였고, 기독교를 좀 더 성령 충만한 종교로 탈바꿈시켰다. 또한 현재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종교운동으로 인정받고 있는 오순절운동은 비서구 지역에서의 놀라운 성장에 힘입어 서구 중심의 기독교를 비서구 중심의 종교로 변화시키고 있다.

<국제신학연구원>


평신도를 위한 신학강좌<12> - 역사신학③ - 종교개혁

 참된 신앙을 갖는 데 신학은 전혀 필요가 없다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신학이 신앙에 장애가 된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사실 ‘신학’은 좁은 의미에서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의미하고 넓은 의미에서는 기독교 신앙 전반에 관한 서술을 뜻한다. 그러므로 (바른) 신앙이란 (바른) 신학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점검하여 재수정함으로써 얻어지는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평신도를 위한 신학 강좌’를 개설하여 연말까지 20회에 걸쳐 신학 전반에 대해 알기 쉽게 소개하고자 한다. 집필순서는 ①조직신학(3회), ②구약신학(3회), ③신약신학(3회), ④역사신학(6회), ⑤실천신학(5회) 순이다.<편집자 주>

 

이번 주에 살펴볼 종교개혁이란 16세기경 부패한 로마교황과 교황청에 대항하여 일어난 개혁운동을 말한다. 대체 당시 로마가톨릭의 부패는 어떠했길래 유럽 전역에서 개혁운동을 불러일으켰을까? 먼저 종교개혁의 배경에 대해 살펴보자.


 1. 종교개혁운동의 배경

 수백 년간 계속된 십자군 전쟁의 실패는 당시 교황권의 약화를 초래했다. 일방적이었던 왕권과의 관계에서도 충돌이 생기기 시작했다(교황의 아비뇽유수). 교황무오설(교황은 유일한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며 성서 해석의 최종 결정권을 가진다는 주장)을 통해 쌓아온 절대적 교권은 르네상스를 통해 일어난 지식층의 도전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성직자들의 타락이었다. 서품을 위해 큰돈이 오고 갔으며, 이를 회수하기 위해 비성경적인 면벌부(죄로 인한 형벌의 감면 또는 사면을 보증하는 증서) 판매에 앞장섰다. 독신이어야 할 사제들은 축첩을 일삼았으며, 사제들에게서 태어난 아이들로 고아원이 가득 찰 지경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볼 때 16세기의 종교개혁은 어쩔 수 없는 시대적 요구였다.


 2. 종교개혁 시대 설정

 일반적으로 종교개혁의 시작은 1517년으로 알려졌다. 사실, 교황에게 대항하는 개혁의 요구는 훨씬 이전에도 있었다(14세기 존 위클리프, 15세기 얀 후스). 그럼에도 1517년을 손꼽는 이유는 마르틴 루터 때문이다. 그가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하면서 종교개혁운동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개혁의 양상은 점차 가톨릭과 개신교 세력 사이의 무력 충돌로 치달았고 ‘30년전쟁’으로 끝을 맺는다. 이 전쟁은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제국 내 개신교도를 살육하는 과정에서 개신교 측(오늘날의 체코, 헝가리, 독일, 덴마크, 영국, 스웨덴, 네덜란드, 프랑스)의 저항으로 벌어진 전쟁이었다. 전쟁의 결과 신성로마제국은 붕괴되었고 각국의 독립과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베스트팔렌조약(1648)이 체결되었다. 이로써 종교개혁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3.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유럽 내 여러 국가의 개혁운동을 일일이 다루지 않고, 종교개혁운동의 진원지인 독일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비텐베르크
 루터의 교구는 브란덴부르크의 대주교 관할하에 있었다. 루터의 교구를 넘겨받고자 했던 마인츠의 주교 알브레히트는 엄청난 돈을 지불해야 했고, 교황은 그에게 베드로교회 신축을 위해 1506년 발행한 면벌부를 팔도록 했다. 알브레히트의 판매 대리인은 도미니크수도회의 요한 텟첼이었다. 그는 “돈이 금고에 떨어지자마자, 연옥에 있는 영혼은 천국으로 뛰어오른다”라고 설교하며 잘못된 믿음을 부추겼다.
 비텐베르크의 고해신부였던 루터는 설교를 통해 이를 강하게 질타하면서, 1517년 10월 31일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비텐베르크교회 정문에 게시, 공개토론을 요구했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였다. 루터의 반박문은 마침 만성절을 맞이하여 비텐베르크교회에 전시된 엄청난 성(聖)유물들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던 수많은 방문객의 시선을 붙들었다. 근래에 발명된 인쇄술 덕에 대량 인쇄된 전단지는 이들을 통해 독일과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이와 더불어 루터의 종교개혁 논문들(『독일 그리스도인 귀족들에게』, 『교회의 바벨론 포로 서곡』,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보름스 칙령
 칼 5세가 황제가 되자 로마교황청은 “주여 분기하소서”라는 글을 통해 루터를 파문했다. 루터 역시 1520년 12월 10일 로마교황청의 파문서와 여러 가지 잘못된 로마교황청의 지침서들을 모아 불에 태우면서 로마교황청의 모든 잘못된 제도를 따르길 거부했다.
 제국법에 따라 교회 파문에 이어 곧장 추방돼야 했기에 제국의회가 소집됐다. 모든 사람의 예상을 깨고 루터는 1521년 4월 18일 보름스 제국회의에 나타났다. 심문 과정에서 황제는 루터에게 자신의 주장들을 철회할지 물었다. 하루의 생각할 시간을 요청한 루터는 이튿날 자신의 주장에 대한 취소를 거부하며 말했다. “폐하! 저는 제가 인용한 성경을 확신하며,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양심에 붙들려있습니다. 저는 어떤 주장도 철회할 수 없고, 철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양심을 저버리는 행동은 안전하지도 잘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저는 여기에 서 있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저를 도와주소서. 아멘!”
 황제는 루터를 이단으로 배격하는 보름스 칙령(5.26)을 반포하기로 했다. 그사이 비텐베르크로 돌아가던 루터는 정체 모를 괴한들에게 납치를 당한다. 그러나 이는 그를 보호하기 위한 프리드리히 영주의 계획이었다. 바르트부르크성으로 인도된 루터는 이후 융커 요르크라는 가명을 쓰며 약 1년 동안 숨어지냈다. 이때 독일어 신약성경이 완성됐다.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보름스 제국회의 이후 프랑스와의 전쟁이 시작되자 황제는 루터의 사건에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루터는 열광주의자들의 개혁을 저지하기 위해 비텐베르크로 돌아왔으며, 글을 통해 계속 종교개혁 운동을 펼쳐나갔다. 어려움도 있었다.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츠빙글리와의 성만찬 논쟁이 결렬됐고, 결혼(1525)으로 인해 대중들의 차가운 시선을 받기도 했다. 예상과 달리 보름스 칙령이 재추진되기도 했다(1526 슈파이어 제국회의. 이때 거세게 ‘항의’하는 종교개혁 측 제국의원들은 ‘프로테스탄트’, 즉 ‘항의자들’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그럼에도 개혁운동은 확산되어갔으며, 결국 개신교 진영은 1532년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체결, 통일된 연합체가 되었다.

 독일 밖에서 루터의 영향
 독일의 종교개혁은 주변으로 확장되어갔다. 서구의 거의 모든 나라가 여기에 포함된다. 덴마크,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스웨덴, 핀란드, 헝가리와 발트해 연안 리보니아 지역의 비독일어권에서도 예배 개혁과 성경 번역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특별히 루터의 사상은 취리히의 츠빙글리, 제네바의 칼뱅을 중심으로 한 개혁주의에 깊은 영향을 주었으며, 영국 청교도주의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다음 시간부터는 합리주의 및 계몽주의가 등장하는 근대교회와 그 이후 시대를 다루게 된다. 17세기 말부터 등장한 경건주의운동과 18세기 부흥운동, 19세기 해외선교, 20세기 오순절운동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국제신학연구원>

 


이원재 목사(순복음야오교회)

꿈을 잃어버린 일본에 ‘예수 꿈’ 심어요


꿈을 잃어버린 일본에 ‘예수 꿈’ 심어요
지난해 개척 소명 받고 야오 지역에 순복음교회 개척

 성경의 인물 가운데 요셉은 많은 크리스천에게 사랑을 받는 인물 중 한 명입니다. 저 역시 누군가 성경에서 존경하는 인물을 물으면 요셉이라고 대답합니다. 파란만장한 삶 속에서도 꿋꿋이 믿음의 절개를 지키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요셉의 삶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30년 전 제 가슴에 일본을 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보지도 않은 일본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10년간 인생 공부를, 그리고 신학교와 목회를 포함해서 또 10년을 일본 선교의 꿈을 꾸게 하셨고 마침내 20년 후 저를 일본 땅에서 사역하게 하셨습니다. 일본은 아프리카나 동남아 지역의 선교 환경과는 매우 다릅니다. 척박한 기후와 질병, 가난을 가슴에 끌어안고 눈물 흘리는 선교사들의 간증 같은 것은 없습니다. 사회제도도 의료보험도 잘 돼 있는 선진국입니다. 모자란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일본 땅에는 한 가지 없는 게 있습니다. 사람들에게서 ‘꿈’을 찾을 수 없습니다. 저는 일본에서 사역하면서 사람들이 꿈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들에게서 하나님 없는 공허함을 보았습니다. 나라는 선진국이지만 지독한 영혼의 가난으로 고통하고 신음하는 것이 보였습니다.

 2008년 12월 저는 선교사 파송을 받고 일본에 왔습니다. 2009년 1월 13일 순복음오사카교회에 부교역자로 7년간 사역한 뒤에는 주님의 계획하심에 따라 도쿄 인근에 위치한 순복음지바교회에서 지역 복음화에 헌신했습니다.
 그러던 중 지난해 10월 순복음일본총회에 참석해 이영훈 목사님의 설교를 듣다가 개척의 레마를 받았습니다. 당시 말씀은 여호수아 3장 14∼17절을 본문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요단강 도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믿음을 가지고 물을 밟을 때 요단강이 갈라지는 기적이 나타난 그 말씀에서 ‘네가 오늘 믿음을 가지고 그 땅을 밟으면 기적을 보여 주리라’는 주의 음성이 가슴에 꽂혔습니다. 처음에는 개척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만 이내 이것이 주님의 뜻임을 깨닫고 ‘일본 일천만 구령’을 위한 또 하나의 교회 개척에 감사했습니다. 순복음오사카교회 담임인 정대원 목사님과 비전에 대해 논의하다가 오사카의 ‘야오’라는 지역에 교회를 개척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야오는 오사카 시 동남부에 위치한 특례 도시입니다. 오사카 부에 위치하지만 오사카 시와는 환경이 다른 이곳에 ‘순복음의 신앙, 절대긍정·절대믿음의 깃발’을 꽂기 위해서는 상당한 영적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교회를 세우려면 건물 세를 얻어야 했는데 일본인들이 한국인 그것도 목회자에게 호의적이지 않아 교회 건물로 세를 줄지 안 줄지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저와 아내는 교회를 위해 기도하던 중에 주인의 아들인 이삭의 아내를 얻기 위해 고향에 내려가는 종의 기도가 담긴 창세기 24장 12절이 떠올랐습니다.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야훼여 원하건대 오늘 나에게 순조롭게 만나게 하사 내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나는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일천만 구령을 위해 일본에 또 하나의 교회를 세우려고 합니다. 원하건대 야오 땅에 교회가 순조롭게 세워지도록 역사하소서.’ 때마침 오사카지방회 소속인 한 목회자가 개척에 도움이 되고 싶다며 후원금을 보내왔고 마침내 모든 것이 합력해 선을 이루는 기적의 역사가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할렐루야!

 ‘순복음야오교회’가 세워진 야오는 인구 약 27만 명이 사는 조용한 지역입니다. 야오는 산을 사이에 두고 나라 현과 맞닿아 있으며 자위대의 헬기나 소형 비행기를 위한 비행장이 있습니다.
 개척 소식을 어떻게 알았는지 교회 간판을 걸기도 전에 한 한국 사람이 우리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제주도에서 일본으로 시집온 지 20년이 넘었다는 그는 지인의 소개로 전도를 받고 잠시 순복음오사카교회에 다닌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완강한 남편의 반대로 성경책을 찢기고 괴롭힘을 당해 더 이상 교회를 다니지 못해 혼자 눈물로 야오에 순복음교회가 세워지기만을 기도해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교회를 세워주셔서 감사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지금 그 한인은 우리 교회 1호 성도가 돼 많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비록 남편 몰래 교회를 다니지만 가족 구원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며 올해 7월에는 침례를 받았습니다. 이어 성령 침례도 받더니 놀라운 신앙 성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남편 몰래 평일에도 틈만 나면 교회에 와서 열심히 기도하는 그 성도를 볼 때면 왜 하나님이 저를 야오에 보내시고 개척하게 하셨는지 감사 또 감사뿐입니다.

 야오 지역은 아직 주님을 모르는 영혼이 많습니다. 꿈을 잃은 사람, 꿈을 갖지 못한 사람, 무엇이 꿈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이들을 보면서 저는 ‘꿈’을 갖게 됐습니다. 순복음의 오중복음과 삼중축복, 절대긍정과 절대감사의 신앙을 야오 사람들에게 심어주고 싶습니다. 순복음의 신앙으로 무장해 일본에서 세계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를 인도하는 꿈이 생겼습니다. 이 꿈을 위해 30년 전 하나님이 저에게 일본 선교의 꿈을 주신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시작은 미약합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도 원대한 꿈을 향해 ‘일본 일천만 구령’을 외치며 나아갑니다.


한국 교회의 염원 담은 ‘종교개혁기념음악회’


교회 하나 됨, 남북 화해 기원…이영훈 목사 작사한 곡도 연주
윤의중 음악감독, 베들레헴찬양대 합창, 코리아쿱 협연

 종교개혁 501주년을 맞아 우리 교회 찬양위원회가 주관한 한국 교회의 연합을 위한 종교개혁기념음악회가 10월 28일  KBS홀에서 열렸다. 국립합창단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인 윤의중 씨가 음악감독을 맡고 우리 교회 베들레헴찬양대의 합창과 코리아쿱오케스트라의 협연으로 진행된 이날 음악회는 종교개혁주일의 의미를 되새기고 나아가 복음통일이라는 우리 시대의 간절한 염원을 잘 반영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이영훈 목사와 림형석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총회장, 전명구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 전희준 한국찬송가작가총연합회 대표회장 등 교계와 음악계 지도자들이 자리를 함께함으로써 한국 교회의 연합을 기원하는 자리가 됐다.
 음악회 전반부는 지난해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해 만들어진 칸타타 ‘일어나 빛을 발하라’ 중 3곡이 연주됐고, 남북 화해 기류에 맞춰 한국 교회의 고백이 담긴 찬송 ‘분단의 십자가, 평화의 부활’ ‘주의 재림을 기다리며’ ‘우리 맘에 오소서’ 등이 처음으로 발표돼 감동을 선사했다. 이 중 ‘주의 재림을 기다리며’와 ‘우리 맘에 오소서’ 찬양은 이영훈 목사가 작사한 곡들이다.
 또 후반부에는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가 작사 작곡한 찬송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비롯해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내 진정 사모하는’ 등 귀에 익숙한 찬송가 7곡이 차례대로 연주돼 청중들의 박수를 받았다. 또 오중복음과 삼중축복, 절대긍정과 희망을 노래한 ‘순복음의 찬양’이 앙코르곡으로 연주되면서 공연의 피날레를 장식했다.
 이날 연주회 인터미션(공연 중에 갖는 휴식 시간) 시간에는 이영훈 목사가 작사해 초연된 두 곡이 수록된 악보집을 양익승 장로가 이영훈 목사에게 직접 헌정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영훈 목사는 “한국 교회는 재도약과 복음통일의 큰 사명을 감당해야 할 중요한 시기에 종교개혁을 위한 기념곡과 나라를 위한 분단의 십자가 등을 발표하게 되어 뜻 깊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찬양위원장 양익승 장로는 “이번 종교개혁음악회는 한국찬송가작가총연합회와 우리 교회 베들레헴찬양대가 함께 준비한 음악회로 하나님께는 영광, 성도들에게는 깊은 감동과 은혜를 선물하는 천국잔치가 되었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글·오정선 / 사진·김용두 기자


아쉬켈론

이름만 남은 도시 ‘아스글론’

 그 지경은 유다 족속의 남은 자에게로 돌아갈지라 그들이 거기에서 양 떼를 먹이고 저녁에는 아스글론 집들에 누우리니 이는 그들의 하나님 야훼가 그들을 보살피사 그들이 사로잡힘을 돌이킬 것임이라(습 2:7)

 이스라엘에 여행을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성지를 방문한다. 기독교인들에게 성지는 성경에 나오는 곳이라기보다 예수님이 사역하신 곳이 대부분이고 나머지는 스치듯 보거나 아예 지나쳐버리는 곳도 많다. 아쉬켈론(Ashkelon)은 그런 곳들 중 하나이다. 지중해를 바라보는 멋진 풍경을 가진 도시이자 유적지이지만 성경에서 언급된 적이 있었나 싶은 낯선 지명과 팔레스타인 자치 지역인 가자에서 가까운 위치여서 더더욱 여행자들의 발길이 뜸한 숨겨진 보석 같은 곳이다.

 아쉬켈론은 한글 성경에서 ‘아스글론’으로 씌어 있다. 성경에는 블레셋으로 불리는 지역이 있는데, 우리가 잘 아는 골리앗이 속한 군대가 블레셋 연합군이었다. 블레셋은 지역 이름이다. 가사, 아스돗, 아스글론, 가드, 에글론이란 도시가 위치하던 지역을 블레셋이라고 불렀다. 블레셋은 5개 도시국가가 연합한 지역을 통칭하던 말이고 그 지역에 살던 이들을 블레셋 사람이라고 불렀다. 현재도 이 다섯 도시는 현대 이스라엘 속에 존재한다. 유적지와 함께 현대적 도시들이 그곳에 자리잡고 있다. 아스돗은 아쉬돗(Ashdod), 아스글론은 아쉬켈론(Ashkelon), 가드는 갓(Gath), 에글론은 에크론(Ekron)이란 이름으로. 다만 아쉬운 것은 가장 아름다운 해안도시이자 휴양지였던 가사(현대의 가자지구)는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통치 이후 출입이 통제되면서 그 아름다움을 잃어버렸다. 아쉬켈론과 다른 네 성읍이 블레셋이라는 연합민족적 형태를 띨 수 있었던 까닭은 그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아쉬켈론은 지중해가 바라다 보이는 곳에 위치한 아름다운 도시이다. 푸른 파도가 몰아치는 아름다운 바닷가를 끼고 있던 이 도시는 지중해를 통한 무역으로 말미암아 번성했다. 대국들이 앞다투어 점령하려고 했던 많은 항구도시들 중 하나였지만 위로는 욥바, 아래로는 가사 덕에 커다란 피해 없이 자신들의 도시를 잘 보존할 수 있었다. 다른 유적지와는 다르게 정복자의 층(대부분의 큰 도시들은 제국들이 무너뜨리고 다시 세우는 과정에서 층이 생겨나게 된다. 므깃도 요새의 경우 27개 층이 존재한다)이 거의 없다. 다만 이제는 사용하지 않고 버려진 흔적들만이 시간의 흐름을 대신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아쉬켈론은 우리가 잘 알지는 못하지만 여호수아의 정복시대부터 예레미야에 이르기까지 성경에 빈번하게 등장한다. 아쉬켈론은 번영의 도시였던 만큼 우상화가 크게 일어난 장소이기도 하다. 무역항이었으므로 부가 넘쳐났다. 그래서 멸망의 상징이기도 하다. 삼손은 자신이 결혼하게 된 블레셋 여인의 친구들과 내기하여 지자 아스글론으로 내려가 길에서 지나가던 이들을 때려눕히고 뺏은 채색 옷을 주었다고 사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아스글론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 내쫓지 못한 이들 중 하나였고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계속 가시와 같은 존재로 남아 있었다. 다윗이 블레셋의 골리앗을 물리친 후 잠시 주춤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이스라엘을 괴롭혔고 다윗이 정복한 이후에도 여전히 그 도시는 그 자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아쉬켈론은 가장 오래된 과거로는 가나안 시절 주전 1400년 전부터 시작해서 가장 근대인 오스만제국 때까지 남아 있던 도시이다. 그 사이 무려 8차례나 주인이 바뀌었지만 도시 자체의 번영은 사라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아쉬켈론은 아름다운 해안 도시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 잘 정리된 도로와 아름다운 해변은 많은 이들에게 휴양지로서 찾아오게 만든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 많은 제국들이 거쳐가며 사람들이 오고갔지만 그 도시 자체는 크게 변하지 않고 모든 문화를 품어 왔다. 지금도 유적지를 가보면 가나안 시대의 성읍을 시작으로 로마 비잔틴 시대, 십자군의 주둔 터와 오스만제국의 성벽 터가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재밌는 것은 그 모든 것들이 각자가 아닌 하모니를 이루면서 남아 있다는 점이다.


 아쉬켈론은 근대사에서도 흥미로운 곳이다.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땅에서 쫓겨난 주후 90년 이후 아쉬켈론에는 여전히 유대인들이 살았고 아쉬켈론은 지금의 팔레스타인(이전에는 유대 땅이라고 불리던 지역)에서도 거의 몇 안되는 유대인들에게 친절한 곳으로 남아있었다. 그래서 19세기 후반 이곳으로 이주하던 유대인들은 아쉬켈론과 가자 인근으로 많이 이주해 살았다. 이는 마치 예언서에 등장한 장면을 떠올리게도 한다.


 현대의 아쉬켈론은 지금 가장 뜨거운 감자인 가자지구와 가까이 있으면서 이전에는 화목했던 모습을 추억이라도 하는 듯이 번영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필자는 이스라엘에 살면서 자주 캠핑을 다닌다. 이는 현지인들과 쉽게 만날 수 있고 이스라엘의 자연과 그 지역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북쪽부터 남쪽까지 자주 이곳저곳을 돌아본다. 캠핑을 하면서 역사 속에 자리잡고 앉아 성경의 이야기와 역사의 언저리를 들여다볼 수 있는 아주 멋진 곳이었다. 과거와 현재가 맞닿아 있으며 현재의 갈등과 고뇌 속에서도 의연히 피어나는 삶의 모습들이 보이는 곳이었다. 눈을 들어 멀리 바라다보면 분쟁의 땅 가자지구가 보인다. 하지만 아쉬켈론은 평화로운 파도만이 일렁인다.
 과거 유적지를 바라보면서 이루어진 고층 아파트와 아름다운 집들은 이제 더 이상 과거 이방인의 땅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안식처이며 모두의 휴식처가 되어가고 있다. 이제 진정한 휴식처가 되기 위한 평화와 공존의 길은 언제쯤 이어질까? 저 바닷길로 가자와 아쉬켈론, 아스돗과 욥바까지 이르는 길이 이어지기를 소망해 본다.

김요셉 목사


평신도를 위한 신학 강좌<11> - 역사신학 ② - 중세

참된 신앙을 갖는 데 신학은 전혀 필요가 없다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신학이 신앙에 장애가 된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사실 ‘신학’은 좁은 의미에서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의미하고 넓은 의미에서는 기독교 신앙 전반에 관한 서술을 뜻한다. 그러므로 (바른) 신앙이란 (바른) 신학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점검하여 재수정함으로써 얻어지는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평신도를 위한 신학 강좌’를 개설하여 연말까지 20회에 걸쳐 신학 전반에 대해 알기 쉽게 소개하고자 한다. 집필순서는 ①조직신학(3회), ②구약신학(3회), ③신약신학(3회), ④역사신학(6회), ⑤실천신학(5회) 순이다. <편집자 주>

 지난주에 살펴본 바와 같이 역사신학(교회사)이란 기독교의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를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다. 오늘은 역사신학 연구를 위한 시대구분 가운데 중세에 대해 알아보고 이 시기에 기독교는 어떠한 특징을 갖게 되었으며 더 나아가 살펴보아야 할 주제들은 무엇인지 소개하고자 한다.


 1. 중세의 개념

 중세란 중간 시대를 뜻하는 라틴어(매디움 애붐)를 번역한 말로서 서로마제국의 멸망(476)으로부터 시작하여 종교개혁(1517) 직전까지를 가리킨다. 특별히 ‘중세’라는 단어는 15세기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일어난 르네상스(문예부흥)와 연관되어있다.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인문주의자들의 목표는 그리스 문명과 로마 문명을 본받아 인간 중심의 사회, 즉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는 사회로 돌아가는 데 있었다. 그들은 ‘근원(고전)으로 돌아가자’라고 외치면서 자신들이 살고 있던 당대와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던 고전 시대 사이에 놓인 ‘흉물스러운 시대’를 극복하려 했다. 그것이 바로 중간기(중세)였다. 그들은 그 ‘중간기’를 가리켜 ‘배워야 할 가치 있는 문화가 전혀 없는 암흑기’라고 폄하했다.


 2. 중세의 시작

 학자들 대부분은 이러한 중세의 끝을 종교개혁의 시작 무렵(15세기 말∼16세기 초)으로 보는 것에 큰 이견이 없는 반면, 그 시작에 대해서는 다양한 목소리들을 내고 있다. 독일 할레 대학에서 문헌학 역사학 지질학을 가르치던 켈라리우스(C. Cellarius, 1638∼1707)는 중세의 시작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313)으로 주장했다. 이와 달리 일부 학자들은 게르만족의 용병 대장이었던 오도아케르에 의해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476년을 중세의 시작으로 여기며, 또 다른 일부는 교황 그레고리 1세가 교황 자리에 오른 590년을 내세운다. 이러한 차이는 저마다 중세를 규정하려는 시각이 달라서 나타난 현상이다.
 다만 이러한 다양한 기준들 가운데 게르만족에 의한 서로마제국의 멸망(476)을 중세의 시작으로 삼는 것이 유익하게 보인다. 그 사건을 기준으로 교회뿐만 아니라 문화 및 사회 모든 영역에서 획기적인 변화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3. 중세의 특징

 고대와 구별되는 중세의 경제적 특징은 반(半)자유 농민들이 사회적 기반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문화적 특징으로는 14∼16세기에 걸쳐 전 유럽에서 일어난 ‘르네상스’와 ‘인문주의’(휴머니즘)라고 말할 수 있다. 정치적인 특징으로는 로마제국의 쇠퇴와 함께 게르만 민족이 서유럽의 정치적 패권을 장악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있다(흔히들 게르만족을 독일 민족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게르만족 가운데 한 부류가 독일인이지 독일인이 곧 게르만족 전체는 아니다). 이러한 게르만 민족의 확장은 중세의 종교적인 특징의 근원이었다. 북동부 유럽으로부터 남하하여 서유럽 전역에 퍼져 나갔던 게르만족이 기독교화되면서, 교황을 중심으로 한 로마가톨릭이 서유럽 전역에 걸쳐 세속적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세란 기독교를 몰랐던 게르만족이 서유럽 지역으로 이주해 와서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그 받아들인 기독교를 근거로 새로운 문화, 교황이나 교회의 세속 지배, 또는 신성로마제국이라는 독특한 기독교 시대를 만들어 간 기나긴 과정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으로서의 중세는 종교의 절대성을 앞세워 인간 위에 군림하는 등 여러 가지 잘못된 일이 자행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기독교 역사상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할 많은 단면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4. 중세 기독교의 형성

 서유럽에 정착한 후 처음 기독교를 접하게 된 게르만 민족은 처음엔(5∼6세기경) 로마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기독교 예식이나 신학을 모방하고 답습하는 것에 그쳤다. 그러나 8세기경에 이르러서는 기독교 문화는 물론 고전 문화와 완전히 융합되는 데 이르렀다. 게르만 민족의 후예로서 프랑크왕국을 세운 칼 대제(샤를마뉴, 768∼814)는 유럽 대부분 지역을 정복하고 그곳 거주민들을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학문과 교육의 부흥에 힘썼는데 각지에 수도원 학교를 세우고 궁정 학교를 설립하여 학문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이를 가리켜 ‘카롤루스(카롤링거) 왕조의 르네상스’라고 일컫는다. 이 기간에 기독교 문화와 게르만 민족의 정신 그리고 고전 문화가 비로소 융합되었으며 중세 유럽 문화의 터전이 마련되었다.

 10세기 초에 단절된 카롤루스 왕조는 약 40년이 지난 AD 800년, 오토 1세(카롤루스 1세)가 황제에 오르면서 명맥을 잇게 되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를 신성로마제국(800∼1806)의 시작으로 여긴다. 신성로마제국이 형성되면서 소위 유럽의 기독교라는 틀도 완성되어갔다. 신성로마제국 안에서 기독교 학문은 ‘스콜라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기독교의 경건과 금욕운동은 ‘수도원운동’이라는 이름으로, 교권과 제도권은 ‘교황제도’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신앙부흥운동은 ‘종교개혁’과 ‘평신도 경건운동’ 또는 ‘신비주의’나 ‘금욕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 서유럽 특유의 기독교 문화를 이루어갔다.

 중세가 서유럽 특유의 기독교를 형성해내었다는 사실은 클레르보의 베르나르와 같은 탁월한 수도사가 중세의 영성운동을 주도했다거나, 성 프란시스가 가난을 통해 그리스도의 참된 가르침을 올바로 구현했다거나,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학대전이라는 책을 통해서 중세의 신학을 정리했다거나 하는 것 이상의 중요한 의미가 있다. 물론 이들이 있기에 중세는 수많은 부정적 요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 모두 중세라는 고유의 틀과 문화 속에서 길러진 인물들임을 간과해선 안 된다.

 
5. 중세교회사 연구를 위한 주제들

 중세교회사를 이루는 요소들은 중세 특유의 기독교를 만들어 낸 요소들이다. 이것은 교회 내적으로는 교황제, 수도원주의, 평신도 경건운동 등이며 외적으로는 프랑크왕국이나 황제제도, 신성로마제국 등을 들 수 있다. 다만 중세교회사 구성 요소 중에 동방교회사는 독립된 장으로 다루는 것이 일반화되어있다. 중세교회사 연구를 위한 그 밖의 주제들은 다음과 같다.

 ① 로마제국의 해체와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인한 서유럽의 재편과 기독교화 ② 수도원운동과 교황제도의 확립 ③ 프랑크왕국의 발전과 로마가톨릭교회 ④ 프랑크왕국의 확장과 카롤루스(카롤링거)왕조의 르네상스 ⑤ 유럽 질서의 개편과 동·서방교회의 분열 ⑥ 교회의 개혁운동과 성직 서임권 논쟁 ⑦ 11∼12세기 십자군 전쟁과 그 영향 ⑧ 중세의 경건운동 ⑨ 중세 스콜라 신학 ⑩ 중세 후기(교황권의 쇠퇴와 신학적 정황).
 다음 시간에는 ‘종교개혁’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국제신학연구원>


2018년도 영광대학 축복성회 및 경로잔치


이영훈 목사 “복음통일 위해 기도해달라” 부탁

 2018년도 영광대학 축복성회 및 경로잔치가 18일 바울성전에서 개최돼 본 교회 및 분당·성동·도봉·중동·김포·성북·강남·송파·광명 등 9개 제자교회의 영광대학 학생들이 한 자리에서 하나님께 감사 찬양을 드리는 화합의 시간을 가졌다.  
 이영훈 목사는 ‘형통하리로다’(시 128:1∼6)라는 제목의 설교를 통해 “오늘 본문 말씀을 보니 예수 잘 믿는 사람은 자손만대에 복이 있고 좋은 일이 일어난다”면서 “하나님을 잘 섬기는 가정은 만대에 이르는 형통의 복을 받게 되니 여러분의 가정은 어르신들 덕분에 잘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영훈 목사는 또 “어르신들에게 평안의 복이 충만하기를” 축원하고 “남북통일 역시 복음통일과 평화통일로 이루어져야 한다”면서 “총과 칼 등 무력으로 되어서는 안 된다”고 못 박았다. 이영훈 목사는 “복음통일만이 온전한 남북통일을 이루는것”이라고 강조하고 기도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날 예배는 영광대학장 전응원 목사의 사회, 영광대학 회장 김형권 장로의 대표기도, 말씀 후에는 에벤에셀 몸찬양단의 찬양 등으로 진행됐다.
 2부 순서로는 본 교회와 제자교회에서 참가한 총 25개팀이 경로잔치 특별활동 발표를 했다. 찬양과 성극, 댄스스포츠와 난타 공연 등 1년 동안 갈고 닦은 기량으로 천국잔치를 꾸몄다.
 영광대학은 60세 이상의 본 교회 성도를 대상으로 성경강해와 교양강좌, 찬양교실 등을 열고 있으며, 세부 프로그램으로는 서예, 일본어, 영어, 성극, 국악, 미술 등 문화활동과 건강 체조, 스포츠 댄스 등 건강관리 프로그램이 있다.
 또한 매년 여름에는 영성수련회를, 가을에는 축복성회와 경로잔치, 작품전시회, 수학여행 등을 통해 노년의 신앙생활을 풍성히 하고 있다.

글·복순희 / 사진·김용두 기자


우리 교회 땅 기증, 건립후원으로 ‘손원일 선교센터’ 세워진다

이영훈 목사 “해군 및 전군 복음화” 기대

 지난 35년간 해군·해병들의 예배 및 성경공부 등 신앙공동체 역할을 해온 경남 진해 ‘원일다락방’이 ‘손원일 선교센터’로 재건축될 예정이다. 원일 다락방 부지의 땅 1720㎡(약 520평)을 소유하고 있던 우리 교회는 해군 복음화를 위한 적극적인 지원을 위해 토지를 무상으로 양도하기로 하고 5일 서울해군호텔에서 기증식을 가졌다.
 행사에는 해군참모차장 김판규 장로, 해군해병대교회 총회장 이희찬 목사 등 해군 관계자와 우리 교회 이장균 수석부목사, 박경표 장로회장, 이태근 기하성(여의도순복음총회) 수석부총회장, 고석환 목사 등 교회와 교단 관계자 등이 참석했다.

 해군본부교회 정상덕 목사의 사회로 진행된 기증식은 손원일 선교센터 발기인 대표인 김혁수 장로가 원일다락방이 걸어온 발자취를 소개했고, 민관방북단과 함께 북한을 방문 중이던 이영훈 목사를 대신해 이장균 수석부목사가 행사에 참석해 손원일 선교센터 이사장 김덕수 장로에게 기증서를 전달하고 이영훈 목사의 인사말을 전했다.
 이영훈 목사는 서면 인사말을 통해 “군 선교 사역은 우리 교회 60년 역사 속에 대한민국 국군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계속되어오고 있다. 특별히 해군을 창설하신 손원일 제독님과 해군의 어머니로 존경 받아오신 홍은혜 권사님의 헌신을 통해 그동안 해군 선교가 활발히 이뤄진 것에 감사드린다”고 했다.

 이영훈 목사는 “우리 교회는 손원일 제독님과 홍은혜 권사님 그리고 당시 해군의 복음화를 간절히 원했던 기독 해군의 요청에 따라 해군사관학교 교회 건축을 지원, 봉헌했고 이어 해군 기독 장교 육성을 위한 원일다락방 건축을 지원했다. 35년 간 기도와 성경공부로 많은 기독 해군 장교, 해군 지휘관들을 일으켰던 원일다락방이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해 재단법인 손원일 선교센터로 재탄생하게 됐다. 이와 관련해 우리 교회가 손원일 선교센터에 부지를 기증하게 된 것은 큰 기쁨이요 영광이라고 생각한다”며 손원일 선교센터를 통한 해군 복음화, 나아가 우리나라 복음화에 대한 기대감을 전했다.

 


평신도를 위한 신학 강좌<10> - 역사신학 ①

 참된 신앙을 갖는 데 신학은 전혀 필요가 없다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신학이 신앙에 장애가 된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사실 ‘신학’은 좁은 의미에서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의미하고 넓은 의미에서는 기독교 신앙 전반에 관한 서술을 뜻한다. 그러므로 (바른) 신앙이란 (바른) 신학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점검하여 재수정함으로써 얻어지는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평신도를 위한 신학 강좌’를 개설하여 연말까지 20회에 걸쳐 신학 전반에 대해 알기 쉽게 소개하고자 한다. 집필순서는 ①조직신학(3회), ②구약신학(3회), ③신약신학(3회), ④역사신학(6회), ⑤실천신학(5회) 순이다.<편집자 주>

초대 교회부터 현대까지의 기독공동체 역사

 이번 주부터는 흔히 ‘교회사’라고 일컫는 ‘역사신학’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교회사란 무엇이며(정의), 교회사 공부는 왜 중요하며(중요성), 교회사 공부를 통해 무엇을 얻어야 하며(과제), 교회사를 위한 연구 방법은 어떤 것이며(연구 방법), 또 이를 위해 교회사를 어떻게 시대별로 구분할 수 있는지(시대구분) 생각해 볼 것이다. 그다음 고대교회사에서 다루어야 할 중요한 주제들을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1. 교회사의 정의
 언뜻 교회사란 ‘교회의 역사’라고 생각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리스도교의 역사’라는 말이 좀 더 명확한 표현이다. 다시 말해서 교회사란 초대 교회로부터 시작해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과 연관된 모든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살피고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신학의 한 분야이다.

 
2. 교회사의 중요성과 과제
 흔히 ‘역사’라는 말을 들으면 골치 아프고 따분해하는 경우를 본다. 아마도 중·고등학교 시절 많은 사건과 연도를 암기했던 기억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역사 공부가 단순한 과거의 사실을 암기하는 것이 아닌, ‘생생한 이야기의 탐구’가 될 때 역사만큼 흥미로운 것도 없을 것이다. 사실 흥미의 여부와 관계없이 교회사 연구는 매우 중요하다. 1) 이를 통해 우리는 과거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관련된 ‘올바르지 않은 신앙’, ‘공동체를 향한 위험’을 생각하게 되며, 그와 유사한 일의 반복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뿐만 아니라 과거 교회사 속에서 오늘날의 교회와 성도를 위한 올바른 기준이나 모범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이른바 ‘도나투스 논쟁’(AD 4∼5세기, 북아프리카)은 전자를 위한 좋은 예일 것이다. 이는 고대교회 시절, 황제숭배를 거부하고 순교까지 각오했던 사람들이, 그렇지 않았던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교회로부터 쫓아내려 했던 극단적 분리주의 신앙 운동으로서, 결국 이단으로 정죄되었다(411년 카르타고 교회회의). 이와 반대로, 마르틴 루터 이야기는 후자를 위한 좋은 예이다. 중세 말기 부패한 로마 가톨릭에 맞서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를 외치며 개혁에 앞장서던 마르틴 루터 이야기는 오늘날 교회와 성도에게 훌륭한 모범이 된다.
 이러한 교회사 공부의 중요성으로부터 자연스럽게 교회사의 과제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교회사를 공부함으로써 우리는 과거의 역사로부터 현재를 이해하고, 더 나아가 미래를 향한 이정표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3. 교회사의 연구 방법
 교회의 탄생 이후 지금까지의 긴 역사를 효과적으로 다루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오늘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두 가지 교회사 연구 방법을 활용하고 있다. 1) 한 가지 방법은 역사를 횡단면으로 놓고 연도에 따라 일어난 여러 가지 사건들을 살피는 방법이다. 이러한 연구방식은 동시대에 여러 부문에서 발생한 사건들을 한눈에 살필 수 있지만, 개별 사건의 인과 관계를 살피는 것은 어렵다. 2) 다른 한 가지는 특별한 영역을 선택하여 긴 시대를 걸쳐 그것을 집중적으로 추적해 가는 방법이다. 이것은 역사를 종단면으로 놓고 살피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사건의 전후 과정을 살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개인적인 교회사 공부에서는 대체로 두 번째 방법이 적합하지만, 두 가지 방법의 장점을 잘 살려서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서 교회사 연구의 이상적인 방법은 몇 가지 시대별 구분을 기준으로 하여, 그 가운데 특정한 사건들에 집중하고 사안들의 배경과 진행 및 결과를 이해하는 것이다.

 
4. 교회사의 시대구분
 16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교회사의 시대 구분을 매우 세분하여 제시했다. 개신교는 100년을 단위로 이에 대응하여 가톨릭은 1년을 단위로 교회사를 정리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오늘날 주로 활용되고 있는 시대구분은 고대교회사, 중세교회사 그리고 근대교회사 세 가지로 구분하는 방법이다. 이 가운데 중세교회사를 종교개혁사와 구분하고, 근대교회사를 현대교회사와 구분하기도 한다. 다만 시대 사이의 명확한 경계를 정하기는 쉽지 않은 문제이다. 따라서 시대구분에 관한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하고, 다른 시도들의 타당성을 살피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1) 고대교회와 중세교회
 많은 학자는 고대교회의 시대적 범위를, 속사도들(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직접 친분을 가진 교회 지도자들)의 활동 시대로부터 로마제국의 멸망과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까지로 이해한다. 물론 칼로 자르듯 고대교회 시대와 중세교회 시대의 경계를 구분하기는 쉽지 않은 문제이다. 이와 관련된 견해는 대략 세 가지로 나뉜다. 먼저 서로마제국의 몰락(476년)을 기준으로 삼는 방법이다. 두 번째 기준은 교황 그레고리(590∼604)를 기점으로 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칼 대제(샤를마뉴, 768년 왕위 계승)를 기준으로 삼기도 한다.

 2) 중세교회와 종교개혁 시대
 중세교회 시대는 기술 학문 등의 분야에서 ‘위대한 발견’이라고 일컬어지는 발전 및 도약과 함께 끝을 맺는다. 이러한 시기의 중요한 특징은 ‘고대로 돌아가자’라는 의식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종교개혁의 시작을 중세교회가 끝나는 시점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종교개혁 시대를 그 이전과 완전히 무관한 새로운 시대로 볼 수 없긴 하지만,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분리된 개신교 신앙의 출발이라는 점에서 종교개혁을 기준으로 삼는 것에 큰 문제는 없다. 어느 시점을 종교개혁의 출발로 볼 것인가에 대해서도 역시 여러 견해가 있지만, 대부분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면벌부의 신학적 문제점을 게시하고, 로마 가톨릭을 향해 공개적인 토론의 불을 붙였던 1517년(10월 31일)을 상징적인 종교개혁 원년으로 본다.

 3) 종교개혁 시대와 근대교회
 종교개혁 시대에서 근대교회 시대로 접어드는 기점을 흔히 베스트팔렌 평화조약(1648)으로 이야기한다. 이를 기점으로 최초의 국제전쟁이었던 30년 전쟁이 막을 내리고, 주권국가들로 구성된 현대 유럽이 탄생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또한 합리주의 및 계몽주의 그리고 신앙부흥운동과 교파주의의 등장을 근거로 1648년 이후를 근대교회 시대로 일컫는다. 이 시기에 특별히 17세기 말부터 등장한 경건주의 운동과 18세기 전반부터 일어났던 감리교 운동 그리고 미국의 대각성 운동 등이 포함된다. 최근에는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을 근대교회와 현대교회의 구분점으로 보기도 하며, 일부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현대적 개혁을 목표로 열린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현대교회의 출발점으로 거론하기도 한다.

 
5. 고대교회사에서 다루어야 할 중요 사건들
 고대교회 시기는 다음과 같이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로마제국 내에서의 그리스도교의 전파가 이루어진 AD 100년까지 시기이다. 둘째, 그리스도교의 내적·외적 위기와 도전의 시기였던 AD 313년까지이다. 내적 도전과 위기란 여러 형태의 이단들을 가리키며, 외적 도전과 위기란 약 250년간 계속되었던 로마제국 내에서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를 가리킨다. 셋째, 로마제국의 국가 종교로서 그리스도교의 발전 시기이다. 이러한 고대교회 시기 안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할 주제들은 아래와 같다. 특히 이러한 주제들은 영미권과 유럽에서 실시되어오고 있는, 고대교회와 연관된 국가시험에 자주 등장하는 주제들이다. 

 1) 처음 3세기 동안 그리스도인들 박해 2) 처음 3세기 동안 그리스도교의 확장과 선교 3) 2세기의 이단과 정통 4) 고대교회 시대의 변증가들 5) 고대교회의 신앙고백 형성 6)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대전환  7) 도나투스 논쟁 8) 아리우스 논쟁과 삼위일체론의 형성 9) 그리스도교 수도원의 시작 10) 로마 주교제도와 교황제도의 시작과 발전(대 그레고르 교황까지) 11) 5세기의 그리스도론 논쟁 12) 펠라기우스 논쟁.

 앞으로 전개될 역사신학 강좌를 통해, 교회사 가운데 발견할 수 있는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진지한 흥미가 생겨나길 소망한다.

<국제신학연구원>


굿피플 삼리스 학교-케냐 빈민가 아이들의 “꿈은 이루어진다!”


내일의 주인공 단도라 히어로즈의 ‘레디, 액션!’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의 모든 쓰레기가 모이는 곳, 그 쓰레기를 팔아 생계를 꾸려 나가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단도라(Dandora). 눈길이 닿는 곳마다 쓰레기가 산처럼 쌓여 있고, 주민들은 쓰레기 속에서 일하고 배우며 살아간다. 이곳 주민들의 평균소득은 하루 2달러 미만. 세계에서 가장 빈곤한 지역 중 한 곳이다.

 정부로부터 오랜 시간 방치되어 있었던 탓에 제대로 된 사회기반 시설이 전무하고 특히 아이들을 위한 교육시설이 무엇보다 열악하다. 이 때문에 단도라에서 나고 자라는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단도라의 쓰레기 산을 떠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악순환은 끊을 수 없는 고리처럼 이어지고 있다. 엄마아빠를 돕기 위해, 또는 소년소녀가장으로서, 단도라의 아이들은 자고 일어나면 쓰레기장으로 향한다.

 국제구호개발 NGO 굿피플은 가장 낮은 자를 섬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단도라 지역 아동들을 대상으로 2015년부터 ‘굿피플 삼리스 학교’를 개교해 이곳 아이들의 교육과 환경개선에 헌신해 왔다. 아이들이 어려운 현실에 눈을 맞추기보다 자신들이 가진 희망과 가능성을 키워줌으로써 내일의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교육프로그램을 만들어 진행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영상 콘텐츠 제작 및 미디어 교육 프로그램이다. 특히 2017년 1월부터 ‘칸 라이언즈 광고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주식회사 파울러스와 함께 영상 콘텐츠 제작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 수업을 통해 아이들은 새로운 경험과 자신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담아내는 즐거움을 누리며 꿈을 키운다. 특히 이 교육은 단순한 영상교육뿐 아니라 세계 시민으로서의 자세도 배우고 지역사회의 문제들을 스스로 살피면서 해결책을 찾도록 돕는다. 또 가난이나 어려운 환경에 매몰되지 않고 꿈과 희망을 찾아 가도록 돕는 역할도 한다.

 교육에 참여한 아동들은 스스로 ‘단도라 히어로즈(Dandora Heroes)’라는 이름을 만들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제작했다. 2017년 교육에 참여한 아동들은 ‘꿈은 이루어진다(Dreams Come True)’, ‘아동학대(Child Abuse)’, ‘절대 포기하지마(Never Lose Hope)’등의 영상을 만들었다.

 요셉(17) 군은 “지금까지는 이런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었는데 내가 말하고 싶은 나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보여줄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재미있다”면서 “우리가 만든 영상을 통해 우리의 미래가 변화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희망을 꿈꾸는 아이들의 발걸음이 쓰레기장이 아닌, 단도라를 빠져 나와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굿피플 삼리스학교는 절망의 땅에 희망의 물줄기를 끊임없이 이어 나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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