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신앙을 갖는 데 신학은 전혀 필요가 없다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신학이 신앙에 장애가 된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사실 ‘신학’은 좁은 의미에서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의미하고 넓은 의미에서는 기독교 신앙 전반에 관한 서술을 뜻한다. 그러므로 (바른) 신앙이란 (바른) 신학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점검하여 재수정함으로써 얻어지는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평신도를 위한 신학 강좌’를 개설하여 연말까지 20회에 걸쳐 신학 전반에 대해 알기 쉽게 소개하고자 한다. 집필순서는 ①조직신학(3회), ②구약신학(3회), ③신약신학(3회), ④역사신학(7회), ⑤실천신학(3회), ⑥선교학(1회) 순이다.<편집자 주>
1928년, 메리 럼시 우리나라에 오순절 신앙 전파
1953년,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창립
1958년, 조용기·최자실 전도사 교회 개척… 세계최대 교회 성장
3·1운동(1919)에도 불구하고 독립을 쟁취하지 못하자 우리 민족은 깊은 좌절과 무기력에 빠졌고 한국교회 역시 패배주의로 인해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기에 길선주 김익두 이용도와 같은 특출난 부흥사들이 등장하여 한국교회와 민족에게 암울한 현실을 이겨낼 힘과 희망을 주기도 했다. 그리고 이 무렵 한국교회는 성령의 임재와 능력을 강조하는 오순절 신앙을 접하게 된다. 한국에 전파된 오순절 신앙은 한국교회 내에서 점차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했고 오늘날까지 한국교회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세계 최대의 교회인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이러한 오순절 신앙의 대표 주자이다. 이번 주에는 한국의 기독교를 성령 충만한 기독교로 변화시켜온 한국 오순절운동의 기원과 발전, 그리고 여의도순복음교회에 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오순절 신앙의 전래
우리나라에 최초로 오순절 신앙을 전파한 사람은 미국 출신의 메리 럼시 선교사다. 독실한 감리교인이었던 럼시는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일어난 아주사거리부흥회(1906∼1909)에 참석하여 오순절 성령침례를 경험한 후 한국 선교를 열망하면서 뉴욕 로체스터에 있는 오순절 계통의 로체스터성경훈련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다. 그리고 오랜 기도와 기다림 끝에 럼시 선교사는 마침내 1928년 봄 그가 그토록 열망하던 한국 땅을 밟는다. 럼시 선교사가 한국에 도착한 이후 여러 오순절 선교사들도 차례로 한국에 들어왔다. 미국 출신의 오순절 선교사인 글래디스 파슨즈와 엘프레다 오프스테드는 1930년에 영국 출신의 오순절 선교사인 엘시 메레디스와 릴리 베시는 1932년에 서울에 도착하여 럼시 선교사와 함께 선교활동을 전개했다.
오순절 선교사들이 선교 사역을 시작하면서 한국에 오순절교회가 차례차례 설립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세워진 오순절교회는 서빙고오순절교회였다. 1928년 한국에 입국하여 오순절 신앙을 전하던 럼시 선교사는 1933년 봄 허홍과 함께 서울 변두리 지역인 서빙고에 교회를 세운다. 교회 설립 초기에는 주민들의 핍박이 거셌지만 점차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훈련받은 오순절 사역자가 필요했던 럼시는 당시 일본 나고야 주재 미국 하나님의성회 선교사인 존 주르겐센 밑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박성산을 담임 교역자로 청빙했고 그 결과 서빙고교회는 장년 70명 주일 학생 200여 명에 이르는 알찬 교회로 성장하게 된다. 한편 파슨즈와 오프스테드 선교사도 수창동교회를 개척한 후 존 주르겐센 밑에서 박성산과 함께 신학을 공부하던 배부근을 담임 교역자로 초청한다. 오순절 선교사들은 계속해서 한국인 오순절 지도자들과 힘을 합쳐 서울 지역에 추가적으로 4개의 오순절교회를 설립한다.
하지만 일제는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예비작업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한국 주재 기독교 선교사들을 추방하는 등 기독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기독교 탄압 정책하에서 럼시, 메레디스, 베시 선교사는 자국의 선교사 대피 명령에 따라 1940년 모두 한국 땅을 떠나야만 했고 그들의 피와 땀으로 설립한 오순절교회들도 차례차례 문을 닫아야만 했다.
한국 초기 오순절운동의 특징 중 하나는 한국에 입국하여 활동한 오순절 선교사들이 모두 여성이었고 오순절 교단이나 선교 단체에서 정식으로 파송한 선교사들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자비량 선교사라는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한국 오순절운동의 토대를 놓을 허홍 박성산 배부근 같은 초기 한국인 오순절 지도자들을 발굴하고 헌신적으로 지원했다.
한국 하나님의성회의 창립
6.25전쟁 발발 직후 한국에 입국한 미국 하나님의성회 소속의 종군 목사 엘로드는 한국 내 오순절교회의 현황을 파악한 후 1951년 미국으로 돌아가 미국 하나님의성회 본부에 한국 오순절교회의 현황을 보고한다. 이 무렵 박성산 목사도 미국 하나님의성회 본부에 한국 오순절교회가 처한 어려움을 알리면서 미국 하나님의성회가 조속히 한국 선교를 시작해 줄 것을 호소한다.
이러한 엘로드와 박성산의 노력의 결과로 1952년 여름 미국 하나님의성회 동양 선교부장인 오스굿 목사가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 오순절교회의 현황을 직접 조사한다. 조사를 마친 후 오스굿 목사는 미국 하나님의성회에 한국 선교를 시작할 것을 적극적으로 요청한다. 이에 미국 하나님의성회는 당시 일본 주재 선교사인 체스넛을 1952년 12월에 한국 선교사로 파견한다.
체스넛의 내한으로 교단 결성을 위한 움직임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인화력이 뛰어난 박성산 목사가 순천 부산 거제 광주 등지를 순회하며 오순절교회와 교인들을 모으는 일에 헌신했다. 그의 헌신의 결과로 1953년 4월 8일 허홍 목사가 담임하던 서울 용산구 한강로의 남부교회에서 체스넛 박성산 허홍 배부근 윤성덕 곽봉조 박귀임과 그 외 4인의 참관자를 포함해 총 11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한 가운데 교단이 정식으로 창립된다. 교단의 명칭은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로 결정됐고 체스넛 목사가 초대 총회장으로 허홍 목사가 서기 겸 재무로 선출됐다. 그리고 1953년 5월 허홍 목사가 담임하던 남부교회에 순복음신학교가 설립된다.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설립과 발전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가 창립된 지 5년 후인 1958년 5월 18일 순복음신학교 졸업생인 조용기·최자실 당시 전도사는 서울 변두리인 대조동에 작은 천막 교회를 개척한다. 조용기 전도사는 6.25전쟁 이후 질병과 굶주림 범죄와 폭력으로 소망을 잃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영혼 구원뿐만 아니라 축복과 병고침의 전인구원의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신유 등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면서 5명으로 시작한 천막 교회는 개척 3년만에 재적 1000명 출석 600명의 교회로 성장한다.
조용기 전도사와 최자실 전도사는 교회를 대조동에서 서대문으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1961년 10월 15일 건축 중이던 ‘순복음부흥회관’에서 개척예배를 드린다. 1964년 성도 수가 3000명에 이르렀을 때 조용기 목사는 출애굽기 18장 18절의 말씀을 근거로 구역 조직을 만든다. 그가 창안한 구역 조직은 교회의 폭발적인 부흥의 원동력이 되었고 그 결과 여의도순복음교회는 1973년 9월 서대문에서 여의도로 교회를 옮긴다.
교회 이전 후에도 여의도순복음교회는 교회사에 유례가 없는 성장을 계속 이어갔고 1979년에는 10만 성도 1980년에는 20만 성도 1983년에는 30만 성도 1984년에는 40만 성도 1985년에는 50만 성도 1990년에는 60만 성도 1992년에는 70만 성도로 성장했다. 2010년 20개 제자교회의 독립으로 인해 88만 명이던 성도 수가 불가피하게 45만 명으로 줄어들었으나 제2대 이영훈 위임목사의 영적 지도력 아래 교세는 즉각 다시 증가세를 보여 교회 창립 60주년인 2018년 현재 오순절 신앙으로 무장한 56만여 명의 성도들이 하나가 되어 절대긍정 절대감사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창립 70주년의 꿈과 비전을 향해 달려가는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성령운동은 외적 성장과 더불어 내적 성숙을 지향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사회적 차원에서 실천하는 일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2008년 이영훈 위임목사의 취임 이후 지금까지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사회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통일을 준비하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힘써왔다. 교회 예산의 3분의 1을 구제와 선교에 투입하면서 강력한 성령운동과 사회적 구원을 동시에 추구하고 있는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지금 이 시간에도 한국과 세계에서 오순절운동의 역사를 새롭게 쓰고 있다.
<국제신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