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적 자부심을 기르는 10가지 방법

            

1. 당신의 내면에 긍정적 자부심을 길러라.
- 당신 내부에서 가장 훌륭한 것을 찾아라.

2. 당신의 외모에 긍정적 자부심을 길러라.
- 곧게 서서 사람들의 눈을 보라. 자주 웃고, 굳게 악수하라. 항상 건강을 유지하라.

3. 다른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기분좋게 느끼도록 만들어라.
- 케네디의 내면적 자부심은 국가 전체를 기분좋게 해 주었다.

4. 자신을 교육하라.
- 마음을 열고, 평생 동안 당신의 지식을 쌓아가도록 애써라.

5. 준비하라.
- 준비는 두려움을 파괴하고 자신감을 구축한다.

6. 자신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라.
- 매일 당신의 삶 속에서 축복과 행운을 생각하기 위해 몇 분을 할애하라.

7. 당신의 시간과 돈을 불운한 사람들에게 희사하라.
- 남들에게 베푸는 것만큼 기분좋은 일은 없다.

8. 긍정적이고 건강한 생활방식으로 건강을 유지하라.
- 건강한 생활방식을 계속 유지하라.

9. 주변에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친구를 두어라.
- 그들을 모방하라. 하루 24시간 동안 성공을 느끼고, 보고, 숨쉬고, 만지고, 냄새 맡아야 한다. 한계가 아니라 가능성을 보아야 한다. 당신과 같은 파장을 가진 사람을 찾도록 하라. 그들의 후원과 격려와 지혜가 필요하다.

10. 두려움을 외면하지 말라.
- 진짜 실패는 아예 경기를 하지 않는 것이다. 성공은 눈덩이와 같아서 일단 작게 만들어 놓기만 하면 저절로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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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교회 창립 59주년>“꿈·희망·감사의 삶” 위해 전진하는 교회


1958년 창립, ‘절대 절망’의 자리에서 ‘절대 희망’ 
선포세계 최대 교회로 성장, 빛과 소금 사명 감당하고 있어
이영훈 목사 중심으로 개인구원과 사회 구원 주력해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창립 59주년을 맞이했다. 역사상 민족 최고의 비극이었던 한국전쟁은 이미 끝이 났어도 전 국토와 민심은 극도로 피폐해 있었다. 어디를 둘러봐도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절대 절망과 절대 빈곤 뿐이었다. 이때 절대절망속에서 절대희망이 선포되었다.
 1958년 5월 18일, 서대문구 대조동 한 가정집에서 사과상자에 보자기를 씌운 강대상 앞에서 복음이 울려 퍼졌다. 그곳엔 5명이 전부였지만 조용기 전도사의 ‘믿는 자들에게 따르는 표적’이라는 메시지는 마치 빛과 같았고, 그 빛은 짙은 어둠속을 뚫고 나왔다. 빛은 가장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사람들에게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라는 희망으로 비췄다. 그 빛을 경험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변화되었다. 하나님을 만나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되는 삶으로 운명을 바꿔놓았다.

 조용기 목사를 통한 희망의 메시지와 강력한 성령 운동은 엄청난 생명력을 가지고 여의도순복음교회를 교회사에 유래가 없는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게 했다. 당시 동네 주민보다도 많은 성도들이 출석하였던 대조동 천막교회는 1962년 서대문 사거리로 교회를 옮기며 순복음중앙교회로 명명하고 부흥을 이어가며, 1964년에는 성도 수 3000명이 넘어선다. 그리고 1973년 황무지 여의도로 교회를 이전하며 오늘날의 모습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당시 많은 새신자와 성도들이 마포대교를 걸어서 교회를 와서 예배를 드렸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꿈과 기쁨으로 충만했다. 교회에 나오기만 하면 희망을 찾고 살 길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문서선교와 방송선교에 힘을 썼다. 기독 월간지인 <신앙계>를 1967년 발간하였으며, 1978년부터는 <순복음가족신문>와 <행복으로의 초대>의 전신인 <순복음뉴우스>을 발간하여 성도들을 하나로 엮는 역할과 함께 문서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였다. 그리고 <행복으로의 초대>라는 선교방송을 통해 직접적으로 복음이 닿지 않던 산간 오지에까지 복음을 전하였다. 그리고 지금은 위성을 통해 국내 뿐 아니라 아시아 지역에 복음을 전함은 물론, FGTV 인터넷 방송을 통해 전세계에 순복음의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을 전하는데 진력하고 있다.
 우리 교회는 1975년대부터 선교사를 파송했다. 현재 세계 64개국에 682명의 선교사들(4월 기준)이 순복음의 영성을 가지고 성령운동을 펼쳐 나가고 있다. 국내에서는 미자립교회를 도우며,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지상명령에 순종해 2001년부터 지금까지 약 500개 교회를 개척했다.

 1964년부터 우리 교회 교회학교에 출석하였던 이경선 장로회장의 아들 이영훈 학생이 여의도순복음교회 창립 50주년을 맞던 2008년 5월에 2대 담임목사로 취임하게 됨은 참으로 고무적이 아닐 수 없다. 이영훈 담임목사는 취임 후 조용기 목사가 50년간 펼쳤던 순복음의 성령운동을 가장 아름답게 계승함은 물론 ‘절대 긍정 절대 감사’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쳐 나가고 있다. 국내외 복음 전파 사역에 주력함은 물론 분열된 한국 교회들의 연합과 일치를 위해 적극적으로 헌신했다. 나아가 나누고 베푸는 사역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교회 예산의 30%를 복지와 사회 사업에 투입하며 소외된 이웃들에게 복음과 함께 적극적으로 사랑을 나눔으로 개인적 구원에서 나아가 사회구원이라는 시대적 요청에 응답해 나아간 것이다.
 격변의 시대, 성장의 시대를 거치면서 지난 59년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세상에 희망을 제시했다. 오직 십자가의 능력만이 이 세상을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온 세상에 전파했다.

 한편 오는 5월 17일 대성전에서 여의도순복음교회 창립 59주년 기념예배를 드린다. 김상길 부목사의 사회로 진행되는 이날 예배는 조용기 원로목사가 설교하며, 이영훈 담임목사가 감사의 인사를 전할 예정이다.
 절대 절망의 자리에서 십자가를 통해 주어지는 절대 희망을 나누었던 여의도순복음교회. 앞으로도 절대 긍정, 절대 감사의 자세로 하나님이 주신 꿈과 비전을 향하여 성령님과 동행하며 계속 전진해 나아갈 것이다


성전 꽃꽂이-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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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명화 `삼손과 데릴라             

                 

 

 





추억의 명화 '삼손과 데릴라'


   Click! Samson And Delilah-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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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데교회, 아데미신전(터키)

 

 


사데 허무스강

 

사데는 허무스(Hermus)강 계곡 평야의 한 복판에 있다.

그 평야 북쪽으로는 트몰루스(Tmolus)의 긴 산맥이 우뚝 솟아 있고,

그 산맥에서 여러 구릉과 작은 산들이 톱니바퀴살 같이 뻗어나가고 있다.

그 산 줄기들은 각기 좁은 고원을 형성하고 있다.

원래의 사데는 이들 산줄기 중 하나의 위에 있었다.

고도는 450m였다. 그런 위치 때문에 사데는 난공불락의 요새와 같았다.

산맥의 양측면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고, 벼랑과 트몰루스 산맥이

만나는 그 곳에만 사데로 들어올 수 있는 길이 있었는데,

그것 마저도 경사가 급하고 험준하였다.

 


사데 토몰루스 산 요새

 

고레스왕은 사데성을 포위했다. 그러나 크로이수스와 사데

사람들은 개의치 않았다.

 난공불락의 요새와 같은 트몰루스산에 숨어있기만 하면

문제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 난공불락의 요새와 같은 트몰루스산에 숨어있기만 하면 살 수

있다고 자부하는 사데사람들을 가리키며 고레스왕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너희들은 살았다고 하지만 사실은 죽은 목숨이다.” 

고레스는 14일간을 포위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다음에“사데성으로

들어갈 방법을 찾아내는 사람에게 특별상을 주겠다고 했다.

어느 날 히에로에데스(Hyeroeddes)라고 불리는 한 군인이

사데성의 발포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때 사데 군병의 한 명이 실수하여 자기 철모를 성벽 총구 너머로

떨어뜨리고는 그것을 찾으려고 절벽 아래로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히에로에데스는 그 곳에는 몸집이 작은 사람이면 기어 올라갈 수 있는

틈바구니가 바위 사이에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날 밤 일단의 페르샤 군인들이 그 바위의 갈라진 틈바구니를 통해

사데성으로 침입할 수 있었다.

그들이 발포대 위에 도달했을 때 그 곳에는 보초병 하나 없었다.

사데 사람들은 발포대에 보초가 깨어서 경계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안전하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결국 다 잠자고 있다가 사데는 함락된 것이다

 


사데 교회 뒤편 언덕위에 양치는 사람의 모습

 


아데미 여신전

 


아데미 여신전

 


아데미 여신전 안내판

 

주전 330년대 알렉산더대왕의 명령으로 건축이 시작된 이 신전은

‘다산(多産)과 풍요의 여신’을 위한 것이었다.

전면의 폭이 50m, 길이가 100m, 78개의 석주가 늘어선 웅장한 규모이다.

지금도 수십 개의 크고 작은 석주들이 도열해 있고

특별히 이오니아식의 석주 두 개가 18m나 되는 높이로 하늘을

찌를듯이 솟은 채 남쪽 끝 부분에 남아 있다

 


사데교회(비잔틴시대)

 


사데교회(아데미 여신전 뒤쪽 한 구석에 위치)

 


사데교회 입구

 


사데교회 입구

 


사데교회 내부

 

 

사데교회

 

사데는 사르디스라 하며 현재명은 살리히리이다.

사데 교회는 1세기 중반에 이루어졌다고 보고 있다.

사도 바울의 제자이며 일곱 집사 중의 하나였던 클레멘트가

사데 교회의 첫 감독이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사데 교회는 이 도시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크게 부흥 하였다가

나중에는 쇠퇴하는 우여곡절을 경험한다.

사도 요한이 사데 교회에 편지를 쓸 당시의 교회지도자는

누구였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처음에는 아데미신전을 빼앗아 예배드리다가(4세기경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 권세를 얻었을 때쯤)후에

신도의 숫자가 작아져 아데미신전 담 밖에 돌담을 싸놓고 예배드린 것 같다고 한다.

 초기 기독교 당시 신도 수는 매우 많았으나 영적으로는 미약하였다.

때문에 "너는 살아있다고 말하나 실은 죽어가고 있다!"란 책망을 받았다.

사데 지역은 황금이 많은 지역으로 재물의 유혹이 있었고 또한 아데미

여신을 섬기는 신전이 있어 신앙생활에 큰 어려움이 있었다.

현재의 사데교회 유적은 아데미 신전 뒤편에 비잔틴 시대에 벽돌로 지은 교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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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더 ―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의 여인

 1. 인적 사항
① 에스더는 '별'을 뜻하는 바벨론 식의 이름, 히브리 이름의 '하닷사'(에 2:7).
② 바베론에 포로로 잡혀간 베냐민 사람 아비하일의 딸(에 2:15).
③ 사촌 모르드개 밑에서 자람(에 2:7). ④ 바사 왕 아하수에로의 왕비(에 2:17).
2. 시대적 배경
바사 왕 아하수에로(Xerxes, 485-464) 당시 왕후로 있었던 인물이다. 이 당시는 B.C.586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된 지 약 100여년이 지난 때이며, B.C.537년 스룹바벨에 의한 제1차 바벨론 포로 귀환이 있은 지 약 60년이 지난 때이다. 바사 제국은 아하수에로의 통치하에 지중해 지역에서 경제적, 정치적으로 극도의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이러한 번영된 바사 제국 하에서 많은 이스라엘 포로들은 고국으로 돌아갈 것을 희망하기는커녕, 하나님의 선민으로서의 의식도 거의 상실한 채 일신(一身)의 안일만을 도모하며 안주하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뜻밖에 하만에 의해 온 유대 백성들이 멸절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고, 이에 왕후로 있던 에스더의 활약으로 그 위기에서 구출되는 위대한 구원 사건을 체험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유대 백성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민임을 새삼 인식하게 되었고, 또 하나님의 이방 지역에서도 당신의 백성들을 보호 인도하시고 계심을 체험하게 되었다.
3. 주요 생애


4. 성품
① 자기를 양육시켜 준 모르드개를 공경하고, 왕후가 된 후에도 변함없이 순종한 것을 볼 때 겸손하고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자(에 2:20;4:10-17).
②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은 것을 볼 때 용모가 아름답고 성품이 온순한 자(에 2:15).
③ 유대 백성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왕 앞에 나아갈 용기 있고 동족애가 강한 자(에4:16).
④ 왕에게 나아가 백성을 위해 진언하기 전에 백성에게 3일간 금식을 선포하고 자신도 그렇게 한 것으로 보아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한 자(에 4:15,16).
⑤ 두 번의 연회를 통해 하만의 음모를 폭로하고 유대 백성들을 구할 지략을 짠 것으로 보아 치밀하고 지혜로운 여인(에 7:3-6;8:3-8).
5. 구속사적 지위
① 포로 출신의 연약한 처녀의 몸이었으나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도구로 사용된 자(에4:14).
② 한 제국의 왕후라는 지위조차도 하나님의 신앙과 자기 민족의 구원을 위해 초개같이 버릴 만큼 신앙 인으로서 참된 삶의 모범을 보인 자(에 4:13-16).
③ 비천한 포로 출신으로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대제국 바사의 왕후라는 지위에 오름으로써 궁극적으로 모든 시대의 성도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얻게 될 영광을 예표적으로 보여 준 자.
6. 평가 및 교훈
① 에스더는 자신을 양육한 모르드개에게 이후에도 변함없이 순종하였고, 또 동족에 대한 사랑과 충성을 저버리지 않았다(에2:20;4:10-17). 이는 환경과 여건이 좋아졌을 때 그 동안 받은 바 은혜를 쉽게 망각하고 더 나은 생활만을 추구하려 드는 우리 모두에게 좋은 귀감이 된다. 그렇다면 이 시간, 지금 내게 주어진 부와 명예로 인해 지난날 하나님과 사람에게 받아왔던 은혜에 대해 소홀히 해 온 부분은 없는가 돌이켜 보자.
② 에스더는 유대 백성을 구해야 하는 막중한 사명을 띠고, 목숨을 건 진언을 하기 이전에 금식하며 하나님께 기도했다. 참으로 두려움이 그녀를 감쌀 때 전적으로 하나님 앞에 매어 달렸던 것이다(에 4:15,16). 그렇다면 우리는 감당하기 힘든 크고 두려운 일을 앞두고 어떠한 행동을 취하는가? 인간의 생각대로 머리를 짜기 이전에 하나님을 의뢰하는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잠 16:1-3).
③ 에스더는 왕후라는 부와 권력을 지닌 자리에서도 자신의 안일만을 꾀하지 않고 위급함을 당한 민족을 생각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는 사랑을 표현하였다(에 4:15-5:4). 이는 사리사욕을 위해 국가와 민족을 배신하는 풍조가 만연된 오늘 날에 큰 귀감이 된다. 우리도 삶의 작은 부분에서부터 나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모습보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삶의 모습이 나타나야 하겠다.
④ 동족이 전멸될 위기 속에서 목숨을 건 에스더 한 사람의 용기는 온 동족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했다(에 8:9-14). 이는 올바른 일을 위해서는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참다운 용기를 보여 주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때에 참다운 용기를 가지고 행동해야 하겠는가? 죄를 척결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그때에 바로 이러한 용기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⑤ 전멸의 위기에 처한 유대 백성은 믿음이 있는 한 사람 에스더로 인하여 구원받을 수 있었다. 소돔성에 의인이 열 명안 있으면 내가 그 성을 멸하지 않으시겠다 던 그 하나님께서 오늘 날도 믿음이 있는 의인 열 명을 우리 가운데서 찾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악으로 패역한 사회를 보며 한탄할 것이 아니라 나 하나라도 믿음이 있는 의인이 되기 위하여 믿음의 모습을 지켜 나가도록 힘써야 하겠다(창 18:32).
⑥ 민족을 위해 금식하며 기도하였던 에스더의 모습은 오늘 우리에게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 눈물 훌리며 기도해야 할 필요성을 제시해 준다. 남북의 분단이 고착화되고 갈수록 죄악이 만연되는 이 상황에서도 우리는 끝까지 구국의 기도를 쉬지 말아야 할 것이다(삼상 7:8,9).
⑦ 일면 에스더는 동일한 포로 시대의 인물들인 에스라, 다니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와 같은 인물들(스8:21,22;단1:8-16;3:13-18;6:10)에 비해 신앙적인 절개를 그렇게 굳건히 지킨 인물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방인 왕과 혼인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피치 못할 이유로 자신의 신분을 밝혀야 하기까지는 유대 민족이라는 사실과 또 여호와 신앙을 가진 자라는 사실을 감추며 살았기 때문이다(에2:20).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부족한 에스더를 하나님께서 당신의 도구로 삼으신 사실을 돌이켜 볼 때, 우리들 자신도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점이 많으나 그분의 크신 은총으로 주의 일에 동참케 된 사실과 아울러 다시 한번 그 은혜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7. 핵심 성구
"에스더가 명하여 모르드개에게 회답하되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너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5,16).



노아와 신석기 혁명

                

       

                                                                                                                                                       ]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창 9:2)


  노아가 첫 경작인 이었다는 성경본문의 말씀은 홍수 후 급격히 변화된 환경 가운데 노아가 새로운 삶을 개척해 나가야만 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환경의 변화와 경작의 시작 및 식생활의 변화는 소위 신석기 혁명으로 표현되는 인류 문화상과 유사하다. 이러므로 홍수 이후 노아의 생활이 신석기 시대 초기인들의 삶과 부합되는 점을 고찰하는 것은 노아 홍수 연대를 밝히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신석기 혁명이라는 용어는 정착생활과 식량, 생산경제, 마제석기, 그리고 토기의 사용으로 특징 지워 지지만 반드시 이러한 요소들을 신석기 문화가 모두 구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략 1만 년 전에 자취를 감춘 후빙기 이후 지역에 따라 보통 1,000년에서 수천 년 동안의 후구석기 시대를 지나면서 인류 생활에 획기적인 변화가 생긴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대한 의미를 지닌 것이 농경의 시작으로서 농경으로 인한 잉여 생산의 축적은 궁극적으로 계급사회와 국가의 발생을 가져오게 하였다. 현재까지 농경에 관련된 가장 오래된 증거는 중동지방에서 발견되었는데, 중동지역은 후빙기의 환경변화로 건조 지대가 되었지만 곳곳에서 발달한 오아시스에서는 동식물의 서식이 가능했고, 이곳에 정착한 사람들은 점차 식물을 재배하고 동물을 사육하게 되었다. 이것을 차일드의 '오아시스 가설'이라고 하는데 이 설은 석기와 청동기, 철기로 이어지는 원자재의 변화양상에 의거하는 인류문화사 발전단계설의 난점을 경제적인 측면에서 그 발전단계를 고찰함으로서 극복하려고한  시도였다. 이 이론은 후대 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고, 도전을 받기도 하였지만, 많은 학자들은 농경의 시작이 기후의 변화에 기인한다는 점에 상당한 공감을 표했다.    

 

환경 및 기후의 변화와 농경의 시작과 관계가 중요한 문제인데 그것은 노아홍수 이후의 기후 변화와 노아의 농경시작과의 관계에 깊은 연관성이 있음을 암시해주기 때문이다. 노아 홍수 이후에 급격한 환경의 변화가 있었음을 짐작케 해주는 증거는 인간의 수명이 홍수 후 현저히 단축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홍수 전에는 900세 전후의 수명이 홍수 후에는 급격히 단축됨을 볼 수 있다. 이 같은 현상을 오늘날 창조 과학회에서는 홍수 이후의 환경변화가 인간의 건강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식생활의 변화는 홍수 후 환경변화에 다른 적응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육식의 문제는 동물의 사육화에 따른 육식의 편이성 문제로 생각할 수 있는데, 이것은 창 9:3에서 채소와 함께 고기가 식물로 주어짐으로써 농경의 시작과 맥을 같이 하는 가축의 사육으로 인한 육식의 보편화를 뜻하는 것일 수 있다.


  작물의 재배와 가축의 사육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농경의 시작은 가축의 사육과 밀접하게 연관 되는데, 노아의 경작과 육식의 사실은 그러한 신석기 문화의 모습을 강하게 반영한다고 여겨진다. 아울러 전술한 바와 같이 홍수 후 인간 수명 단축으로 추정되는 환경의 변화 또한 신석기 혁명이 야기된 기반과 유사하다고 보여지는 것이다. 이러므로 초기 농경의 연대를 통하여 노아 홍수의 연대를 추정 고찰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현재 농경의 기원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지역으로 레반트(Levant)와 자그로스(Zagros), 아나톨리아(Anatolia), 이 세 지역을 들 수 있다. 이 지역의 중석기 시대에서 초기 신석기 시대에 걸친 유적들의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의 결과를 살펴보겠다.


  레반트 지역에서 초기 농경의 흔적을 보이는 문화를 나투피안 문화(the Natufian Culture)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문화적 성격을 가진 유적은 동서로는 지중해 해변에서 내륙으로 80km까지, 그리고 남북으로는 베이루트에서 카이로까지 나타난다. 그 연대는 주전 1만년에서 8천년에 속한다. 이 후에 재배된 동식물의 조상종이 발견 되는 대가 9천-8천 년기인데, 아직까지는 확실한 재배의 증거가 없으므로 본격적인 농경과 사육 시기는 더욱 늦어진다고 볼 수 있다.


  자그로스 지역의 중석기 또는 신석기 시대 유적은 이라크 북부에 위치한 자위 케미(Zawi Chemi)의 유적이다. 근처의 샤니다르(Shanidar)동굴 유적과 함께 농경의 시작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는 자위케미는 주전 8,900±300년, 샤니다르는 주전 8,650±300년으로 측정되었다.


  한편 아나톨리아 지역의 시원적 농경유적인 촤이외니 티페시는 주전 8천년기 중반까지 올라가고 그보다 좀 늦은 촤탈휘익 유전은 주전 6천 년기에서 5천 년기의 연대를 갖고 있다.


  요약컨대 신석기 혁명과 연관을 시킨 노아의 경작 시작 및 홍수 연대는 어셔나 딜레의 홍수연대보다 수천년 이상 상회하는 것이다. 올브라이트가 근동의 최고 석기를 10만년 이상으로 올려본 이후, 근동에서 발견된 인류의 흔적은 갈릴리 호수 남쪽에 위치한 우베디야(Ubeidiya)에서의 50만년 전으로 비약적인 상승을 하고 있다. 앞으로의 과제는 이러한 과학적 연대와 성경을 어느 정도까지 조화시킬 수 있느냐 하는 데 있다고 할 것이다.


  현재 학계에서 연대 측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이다. 종전에는 많은 비판을 받았으나 점차 안정된 위치를 찾아 가고 있다. 이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연대 측정법이 있는데, 어느 한 연대 측정법에 약점이 있을지라도 다른 영대 측정법과 상호 보완하면 상당히 신뢰도가 높은 결과를 얻을 수 가 있다.


  노아 홍수 연대의 검토에 있어서 먼저 기억해야 할 점은 성경본문에 대한 바른 해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의 치밀한 신학적 구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문자나 숫자만의  단순한 적용은 성경의 진리를 왜곡할 위험이 있는 것이다. 창세기 5장과 11장의 족보는 이러한 이해의 차원에서 조명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볼 때 노아홍수는 어셔의 연대기가 제시하는 주전 2,348년보다 훨씬 오랜 것임을 파악할 수 있다. 이렇듯 성서고고학의 업적과 연대 측정법의 발전으로 고대 근동 세계의 모습이 윤곽을 드러내게 되었는데, 주전 3,000년경에 속한 설형 문자와 상형문자 토판들이 발견됨으로써 언어의 분화가 주전 3,000년을 훨씬 상회함을 알게 되었다.


  노아로부터 시작된 땅의 경작 사실이 신석기 문화의 도래와 연관 된다고 할 때 노아 홍수는 신석기 혁명 이전 시기가 될 것이다. 아직 확정적인 농경개시 연대가 밝혀져 있지 않지만 주전 9천 년에서 7천 년 사이에 농경이 시작 되었다고 보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노아 홍수는 이를 앞서는 시기가 될 것인데, 그 확정적인 연대는 구약 성서에 대한 성서적 신학적 해석과 발맞추어야 할 것이다.


도시 문명의 발생과 니므롯


   인류 문명은 수천 년 동안 흥망성쇠를 거듭해 왔다. 성경에서도 대홍수를 기점으로 이전의 문명시대와 이후의 문명시대가 구분되고 있다. 홍수 이후 노아의 자손들로부터 어떻게 도시가 건설되고 고대문명이 시작되었는가하는 점은 큰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노아 홍수 이후 인류의 확산과 종족 및 국가의 형성에 관한 내용은 창세기 10장에서 찾을 수 있다. 노아는 아브라함의 10대조로 창세기 11장에 나와 있는데, 아브라함이 살던 시대는 이미 중기 청동기 시대로 고대문명이 꽃피고 고대 제국의 흥망성쇠가 거듭된 지 오랜 시절인 것이다. 이러므로 노아 홍수 이후로 언제부터 새로운 문명의 발전이 있었는지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 우선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개화 과정이 규명되어야 하고, 노아가 최초로 성경에 언급된 제국의 건설자인 니므롯의 정체가 밝혀져야 할 것이다.  

 

도시화에 관한 가설


  지난 세기 동안 많은 학자들이 관심을 기울였던 주제 가운데 하나는 세계의 위대한 문명의 발전 과정을 이론화하는 것이다. 고대 문명사회의 존재, 발전, 성장 요인에 관해 밝히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한 연구는 다양하지만 대개는 경제와 환경과 인구의 세 요인들의 결합 내지 상호 작용으로 이루어진다. 


  홍수 이후 인류 사회는 촌락 농경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는데, 이들 공동체는 사육 제배하는 동식물의 생리학적 개선과 토기를 비롯한 용기의 제작으로 가공과 저장, 교역 등의 기술발전, 그리고 인구 증가와 정착생활에 따른 조직의 구성이 양성적 환류 작용을 일으켜 더욱 확대되게 된다. 이들 공동체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하수나 공동체, 사마라 공동체, 할라프 공동체로 발전하게 되고, 도시사회로 성장하게 된다. 도시문명의 발전가설들은 몇 가지로 설명될 수 있는데 이들 발전 이론은 관개를 통한 농경의 집약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칼 비트포겔(Karl Wittfogel)은 자연 자원으로서의 물과 대규모의 관개 시설의 건설을 위한 중앙 집중적 협력과 감독의 필요성에 의해 소규모 사회보다는 더 효율적인 중앙 집중화된 사회를 요청하게 되었다는 수력가설을 발표하였다.


  차일드(Gordon V.Childe)는 도시로 성장하기 이전에 순회 장인이 출현하고 노동이 전문화되며, 주전 4천년 경부터 효율적인 관개 농경이 개발됨으로써 특정지역에 생산물이 집중되어 도시가 이루어 졌다는 장인-전문화-관개 가설을 주장하였다.


  로버트 카네이로(Robert Carneiro)는 전 세계적으로 초기 문명은 산, 바다, 사막 등으로 한정된 농경지에서 발생하였는데, 이러한 농경지의 압박으로 말미암아 전쟁이 발발되고 그 결과 전쟁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서 조직화, 기구의 확대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인구-압력-갈등 가설을 제시하였다. 인구압(Population-pressure)가설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의 국가 형성 연구에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데, 특히 맥가이어 깁슨(McGuire Gibson)은 티그리스 와 유프라테스 강이 수로를 변형할 때마다 주변 주민들이 심한 입구압을 겪게 됨으로써 조직의 변화를 초래하게 되었다고 본다.


  이 밖에도 도시화의 다원론이 아담스와 플레너리 등에 의해 주장되었다. 


  이러한 여러 학자들의 이론을 종합하여 문명의 발전에 대한 체계, 생태학적 모델을 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


  (1)메소포타미아의 저지대에서 자연 수로에 의존하는 농업 공동체는 물에 대한 접근성에 따라 토지 생산성이 달라지고, 그 결과 부의 축적으로 인한 권력의 차별과 이의 세습화가 야기되었다.


  (2)농경의 집약화와 함께 생산의 전문화가 수반되었는데 이는 교역과 생산의 재분배가 사원에 의해 주도됨으로써  종교 공동체에 권력이 집중되게 되었다.


  (3) 메소포타미아에서 부족한 비가공재를 수입함에 따라 무역 전문 종사자와 교역품 생산 장인의 출현 등 도시사회의 특징인 복합성을 증대시켰다.


  이러한 세 가지 요인들은 양성적 환류를 일으켜 물품과 부의 편중을 낳았고 이에 따른 내외부적 위협을 방어하기 위해 군대가 창출되었다. 군대의 성장은 행정 엘리트들의 성장과 함께 행정 집단의 힘을 강화시키게 되었으며, 결국 통제 기능이 강력한 권력 사회를 만들게 되었다.  


도시제국의 출현


메소포타미아에 있어서 초기 도시문화의 흔적은 우바이드(Ubaid)기, 우룩(Uruk)기, 젬뎃 나슬(Jemdet nasr)기의 세 시기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우바이드기(B.C. 5300-3600)는 우르 근처에 있는 텔 알 우바이드 유적을 쫓아 명명 되었는데 모두 4개의 시대로 세분되며 최초 정착생활의 증거로부터 나중에는 2,000명-4,000명 규모의 취락 형성의 흔적이 나타나고 있다. 이 시기의 특징적인 모습은 단색, 채색 토기의 형태와 문양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종교적 건축물에서 더욱 잘 살펴볼 수 있다. 사원 유적은 후기로 갈수록 크기가 증대하는데 높은 기단과 그 위에 세워진 성소와 측실 및 회랑, 그리고 기단과 성소를 잇는 계단이 수메르 건축의 특징이 되었다.


  수메르 문화를 대표하는 우륵기(B.C. 3600-3100)는 2기로 세분화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유적은 우르에서 북동쪽으로 65km 떨어진 와르카(Warka) 유적이다. 와르카의 옛 이름은 우룩이며, 성서에서는 에렉(창10:10)으로 기록되어 있다. 와르카는 백색의 사원이 높은 기단위에 세워져 있는 건물의 발굴로 유명한데 이 건물은 하늘의 신 아누 의 지구라트(Anu ziggurat)로 여겨진다. 또한 이 지역의 수호신이자 사랑과 전쟁의 신인 이난나(Inanna)여신을 위한 사원으로 보이는 건물들이 발굴되었다. 이들 건축물들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노동력의 규모와 건축설계기술, 반복된 재건축으로 볼 때, 그 당시에 이미 대규모 경제력과 노동력 및 전문화된 장인을 통제하는 조직화 된 위계 체제가 형성되었음을 충분히 추론할 수 있다.


  젬뎃 나슬기는 도시화의 뚜렷한 증거와 아울러 문자의 본격적인 발전이 특징적이다. 이 시기는 통상 주전 3,100-2,900년으로 비정되고 있으며, 다양한 내용이 새겨진 원통형 인장이 다수 발견되고 있어 문자를 사용하려는 초기의 시도를 엿볼 수 있게 한다.


  한편 우륵기에 이르러 집단의 규모가 증가하고 더욱 복잡성을 띄게 되면서 이를 전체적으로 통제할 필요성이 대두되고, 이를 효과적으로 수행한 것이 사원의 중심으로 한 종교집단이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 종교 집단은 특정한 신들과 연결되어 있었고, 종교 집단의 통합과 더불어 그들의 신들도 가족관계로 서로 얽혀지고, 권력의 위계도 갖게 된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신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종교 집단들은 제의뿐만 아니라 사회질서 유지, 경제 행위에도 직접 관여 하였다. 특히 재화의 재분배 역할을 주도함에 따라 사원은 도시의 가장 중요한 건축물이 되었고, 사원 관계자들은 경제적,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니므롯 帝國


메소포타미아의 종교 도시들이 시민들에게 충분한 식량과 보호를 해줌으로써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자, 그들은 전통적인 기존의 국경을 넘어 영역을 확장하였고, 급기야 인접 도시국가들을 병합하여 세계 최초의 제국들이 건설되었다. 고 이집트, 수메르, 사르곤의 아카드제국, 에블라제국 등이 그것이다.


  성경에 보면 니므롯은 시날 땅의 바벨, 에렉, 악갓과 갈레 등의 도시 국가들을 병합하고,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 레센을 건축하였다.(창10:10f) 그런데 아직까지 니므롯이 역사적으로 불확실한 존재이며, 그 이름도 셈어에 속하는지 아닌지 불명확하다.


  그가 탁월한 사냥꾼이라는 성서 기사로 인해 그의 신원을 사냥과 연관시켜 파악하는 여러 가설들이 나타나게 되지만 설득력이 약하고, 오늘날 보편적으로 수용되는 가설은 니므롯이 아카드의 사르곤 1세라는 설이다. 사르곤은 셈족의 영도자로서 우룩과 우르, 그리고 페르샤만에 이르기까지 수메르 전역을 정복하였다. 그리고, 동으로 엘람,북으로 수바르투, 서로는 시리아를 정복하여 아카드 시대(B.C. 2360-2180)를 창립한 전설적인 영웅이다. 그러나 용맹성의 일치에도 불구하고 이름의 유사성이 전혀 없는 것과 셈족의 통치자라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다.


  폰 라트는 니므롯이 함의 아들 구스에게서 출생한 사실을 중시하고, 니므롯을 애굽왕 아메노피스 3세(Amenophis Ⅲ : B.C. 1411-1375)일 가능성이 있다고 하였다. 


  엉거(Merrill F. Unger)는 폰 라트와 신학적 입장은 다르지만 니므롯이 함의 후손으로 바빌론 지역을 통치하였다는 점에 조금도 의심을 갖고 있지 않는다. 그는 구스가 원래 바빌론과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데, 구스족의 원고향은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 하류이며 니므롯은 이곳에서 성장하여 큰 세력을 얻게 되었다. 그 후로 그들은 아라비아 반도 남쪽 인 예멘으로 확산 되었으며, 마침내 홍해를 건너 아프리카 누비아와 아비시니아를 식민지화 하였다. 그러나 구스족은 본래 바빌로니아의 기혼강 주변에서 생활하였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창 2:13절의 내용과도 부합되고, 노아의 세 아들 함, 셈, 야벳이 같은 지역에서 살다가 흩어져 나가는 성경의 기록과도 일치하고 있어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이 견해는 남부 메소포타미아, 남부 아라비아, 누비아를 연관시키는 고고학적 근거 자료가 부족하므로 더 숙고할 필요가 있으며 주전 3천년기에 출현한 고대 근동의 역사적 왕들과 연결시킬 수 없는 단점이 있다.
 
  정리하면, 메소포타미아의 남부 지역에서는 일찍부터 관개에 의한 농경이 시작 되었고 유프라테스 강의 물줄기 에 연결되어 니푸르, 라르사, 우룩, 우르 등이 도시국가로 성장하였다. 수메르 문명은 농업용 관개 수로를 그 용도를 넘어서 지역간의 교역을 촉진하는 교통로 역할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발전하게 되었다.


  또한 강물이 운하를 따라 저지대로 흘러들게 되면 늪이나 호수가 형성되어 식량자원이 풍부해지고, 가옥과 배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갈대가 무성하게 된다. 반면에 주변 숲에는 맹수들이 서식하여 가축들을 위협하고 농경에 방해를 주기도 하였는데 이때 사냥꾼의 역할이 중시 되었던 것 같다. 아마도 니므롯은 이러한 배경을 가진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여명기에 활약한 탁월한 인물이다.


  니므롯은 세상의 지배자들이 출현하는 시기의 첫 번째 영걸이다. 그는 개인적인 용맹과 정치적 권력으로 세상에서 찬탄 받았고 성경에서도 결코 그를 나쁘게 평가하지 않는다. 그러나 비극은 그 다음이다. 그의 왕국이 바벨이란 도시로부터 확장 되었는데 이 도시가 하나님을 반역하는 온상이 되었고(창 11:1-9참조), 마침내는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된 것이다(계 18:2). 이를 통하여 성경은 이 땅에서의 번영만을 추구하는 문명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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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의 권세=====1

                                    

                 

오늘의 말씀은 (잠18:21)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

이 세상에서 가장 선하면서도 가장 악한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의 혀입니다.

구약 잠언 18장21절에는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이커 성경주석」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옵니다.
『수다를 억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벽이 없는 집과 같다. 모든 생활에서 말을 절제하면 실수는 하지 않을 것이다. 성질을 죽이라. 남의 말에 많은 주의를 기울이고 조금만 말하라. 혀는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선과 가장 커다란 악을 행할 수 있는 기관이다』

오늘도 혀의 중요성을 알고 온전한 언어생활을 하는 아름다운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이야기===모리아 산으로 간 이삭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디도서 2장 14절
)

      

 

"여보 하나님은 참 고마우신 분이세요. 우리에게 이렇게 많은 복을 주시니 정말 감사한 일이예요." "그러게 말이예요. 참 사랑이 많으시고 인자하신 분이시지요." 이 사람들은 바로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행복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참으로 큰 복을 받았어요. 그들은 부자였고 또 하인들도 많았어요. 주위 사람들은 이들 부부를 너무나 부러워 했어요.

 

그러나 한가지 그들을 슬프게 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자녀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예요. 하나님께서는 두 사람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했기 때문에 기다리지만 그 시간은 참으로 길었어요.

      

 

"아브라함아!", "예, 하나님 말씀 하시옵소서." "이제 내가 너에게 사라를 통해 아들을 주려고 한다. 내년 이맘때가 되면 네가 아들을 낳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후 정말 사라는 한 아이를 낳게 되었어요. 그로부터 1년이 지났어요.

 

이 곳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장막 안이예요. 과연 어떤 일이 생겼을까요?

 

사라가 누군가를 안고 있어요. 아이예요. 그래요.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대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선물로 주셨어요. 아무리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아도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지키셨어요.

 

아브라함은 너무 기뻐했어요. 이들 부부는 이 아이의 이름을 이삭이라고 지었어요. 이스라엘 말로 이삭은 웃음이라는 뜻이예요. 이 이삭으로 인해 꿈같은 날들을 행복하게 보냈어요.

 

오랜 세월이 지나 이삭이 이제 키가 많이 컸어요. 그러던 어느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다시 부르셨어요.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나가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앉았어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주 어려운 명령을 내리셨어요. "아브라함아 네 아들 이삭을 나에게 바쳐라" 예전 제사를 드릴 때는 짐승의 배를 갈라 피를 흘리고 불을 태워 제사를 드렸어요. 그런데 이삭을 이렇게 잔인하게 바치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무런 변명없이 이삭을 바치겠다고 하나님께 약속했어요.

 

아브라함은 다음날 아침 일찍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치라고 한 모리아 산을 향해 떠났어요.

 

이삭은 소풍이나 가는 것처럼 즐거워 하였지만 아브라함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아팠어요. 그리고 가는 길도 너무나 먼길이예요.

 

이제 하인들은 밑에 두고 아브라함과 이삭 두사람만 산을 향하여 걸어갑니다. 한참 가다가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물었어요. "아버지 큰일났어요. 제사에 바칠 양이 없네요."

 

아브라함은 깜짝 놀랐어요. 그리고 이삭에게 "그것은 하나님게서 다 준비하실 것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마음은 너무나 아팠어요.

 

이제 드디어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사해야 할 곳에 도착했어요. 아브라함은 이삭과 함께 하나님께 제사할 제단을 쌓았어요.

 

제단을 다 쌓은 아브라함은 이제는 더 이상 이삭에게 바치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이삭아, 하나님께서 오늘 너를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신다. 아버지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길 수 가 없단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은 이삭은 조용히 말했어요. "하나님께서 하시라고 하면 어떤 일이라도 해야지요. 하나님 어서 저를 묶으셔서 하나님의 명령대로 하세요."

 

그리고 제단 위에 올려 놓았어요. 이제 아브라함은 이삭을 칼로 찔러 죽여 하나님께 드려야 해요. 아브라함은 정말 너무나 슬펐어요.

 

그러나 이삭보다 하나님의 명령을 더 중히 여기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이삭을 죽여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 칼을 들었어요. 이제 막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고 하는 순간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멈추어라. 네가 얼마나 나를 사랑하는지 이제 알았다. 내가 너를 위해 한 어린 수양을 준비해 두었다. 고개를 돌려서 뒤를 돌아보아라" 하나님이 말씀하셨어요.

 

조금만 늦었으면 이삭은 죽었을 것이예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뒤를 보았어요.

.

 

하나님께서는 이 이삭을 대신하여 제사를 드릴 수양을 준비하셨어요. 아브라함은 기쁜 마음으로 수양을 잡아서 이삭을 대신하여 제사를 드렸어요.

 

 

아브라함과 이삭은 너무나 기뻤어요. 특히 이삭은 자신을 대신해 죽어준 그 수양이 너무나 고마웠어요. 만약 이 수양이 없었다면 이삭을 살지 못했을 거예요. 우리도 이삭처럼 죽을 수밖에 없었던 때가 있었어요. 수양이 이삭을 대신하여 죽어 주어서 이삭이 살아난 것과 같이

 

우리는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 대신 죽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영원한 천국에서 죽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 지낼 수 있게 된거예요. 이 예수님의 은혜를 항상 감사하며 지내는 모든 친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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