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S 2017 “오직 성령충만”으로 “아시아 복음화”를


이영훈 목사, ‘사도행전적 부흥운동 이어나갈 것’ 역설

 아시아리더스서밋 2017 타이베이(ASIA LEADERS SUMMIT 2017 TAIPEI·이하 ALS 2017)가 성료했다. 대만 타이베이에서 21일부터 23일까지 진행된 ALS 2017에는 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인도, 홍콩, 일본 등 아시아를 대표하는 기독교 리더들이 대거 참석해 아시아 지역의 복음확산을 위한 교회들의 역할과 협력 방안 등에 대해 다각적으로 논의했다.  

 또 대만 현지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한 세미나에는 450여 현지 목회자들과 신학생들이 참석해 성황을 이루었고, 이영훈 목사가 강사로 선 저녁성회에서는 1000여 명의 대만 성도들과 현지 목회자들이 세계최대교회인 여의도순복음교회처럼 부흥과 성장하는 교회를 꿈꾸는 시간을 가졌다.  

 21일 샹그릴라 호텔에서 열린 환영만찬에서 ALS 대표 이영훈 목사는 “19세기에는 영국이 선교를 주도했고 20세기에는 미국이 선교에 앞장섰다. 21세기는 아시아가 세계 선교를 주도할 것이다. 아시아 지역 교회들이 서로 협력해 주님이 맡기신 세계 선교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자”며 동반자로서 협력과 비전 공유를 강조했다.

 22일에는 대만 현지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한 세미나가 진행됐다. 아르핀 목사(인도네시아 ROCK MINISTRY)가 ‘교회성장의 원리’에 대해, 빈센트 레오 목사(말레이시아 Glad Tidings AOG Church)가 ‘능력있는 설교’에 대해, 에드먼드 테오 목사(홍콩 ICA)가 ‘아시아 선교’에 대해, 한기채 목사가 ‘목회자의 리더십’에 대해, 에드먼드 챈 목사(싱가포르 CEFC)가 ‘제자훈련’을 주제로 강연했다.

 참석한 목회자들은 각 세미나를 통해 “세계선교에 대한 흐름과 목회현장에서 적용할 수 있는 사역방법 등을 구체적으로 배울 수 있었다”며 사역 현장에서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22일 톱처치(Top Church)에서 열린 저녁성회에서 이영훈 목사는 ‘성령을 받으라’(행 19:1∼7)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이영훈 목사는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던 제자들이 오순절날 성령충만을 받자 거리로 나가 담대히 주의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하루에 3000명, 5000명씩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며 “오직 성령충만만이 교회 부흥과 성도들의 신앙성장의 길”이라고 역설했다.

 또한 이영훈 목사는 웨일즈 부흥운동을 일으켰던 이반 로버츠의 일화를 소개하며 “단 한 명의 젊은 광부 이반 로버츠로 인해 30일 만에 3만 7000명이 회개하고 돌아왔고, 5개월 만에 10만 명이 하나님께로 돌아왔다. 여기 모인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며 대만 뿐만 아니라 아시아와 전 세계가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올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이영훈 목사는 성회 참석자들에게 “성령 충만과 세계선교를 위해 함께 기도하자”고 제안하며 한국교회의 부흥을 이끈 여의도순복음교회의 트레이드 마크인 ‘주여 삼창’기도를 소개했다. 그리고 이영훈 목사의 선창에 따라 성회에 참석한 목회자와 성도들은 “쭈아∼(주여), 쭈아∼(주여), 쭈아∼(주여)” 간절히 외치며 기도했다.

  홍콩에서 온 빌리 로우 목사는 “서로 다른 국가, 문화, 인종을 가진 아시아인들이 한 자리에 모여 관계를 맺고 세계 선교를 위해 헌신하는 모습에 큰 감동을 받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특히 ALS를 이끄는 이영훈 목사와 한국교회에도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또 대만의 장티엔치인 목사도  “아시아 복음화와 교회부흥은 성령으로 충만할 때 가능하다는 것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이번 성회를 통해 성령의 인도하심을 느낄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우리 교회는 1964년부터 해외선교를 위해 헌신하고 있다. 1976년에는 국제교회성장기구(CGI)를 창설해 세계선교를 위해 기여해 왔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복음화가 미비한 아시아 지역의 복음 전파를 위해 2013년부터 아시아 리더스 서밋을 통해 다각적인 선교를 이뤄나가고 있다.


박문례 선교사(우간다)

아프리카의 진주 ‘우간다 공화국’에 심은 순복음 열정  
미티야나순복음교회 통해 성도들에게 꿈과 비전 세워  
“주 안에 할 수 있다”는 긍정의 신앙으로 양육  
예수님의 사랑으로 고아와 어린이 교육에 앞장서 

 

 아프리카의 진주로 불리는 ‘우간다 공화국’은 인구 약 3590만명(2014년 기준)으로 아프리카 동부 내륙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수도는 캄팔라로 영어, 우간다어, 스와힐리어를 쓰고 있고 농업 국가입니다. 주변국가로 케냐, 르완다, 탄자니아, 수단, 콩고 동서남북의 국경을 이루고 있어 복음의 요충지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우간다 퍼스트레이디 자넷 무세비니는 교회 설교에서 “소도 동성애를 하지 않으니 인간도 동성애를 할 수 없다”고 했을 정도로 반동성애법을 지지하고 통과시킨 작고 가난하지만 저력이 있는 민족임이 틀림이 없습니다. 이로 인해 해외 원조가 줄어 과중한 세금징수, 테러의 위험, 전염병으로 삶과 죽음에 항상 노출되어있고 무지하고 가난의 큰 무게를 짊어지고 가면서도 “하나님이 하실 수 있다”고 외치며 미래의 희망을 꿈꾸는 나라가 우간다입니다. 

 미티야나순복음교회(MITYANA NEW LIFE CHURCH UNDER YOIDO MISSION)는 하나님의 작품이십니다. 2004년 처음 선교지에 발을 딛고 영혼 구원을 외치며 아프리카의 뜨거운 태양아래 먼지를 마시며 금식하고 기도하며 아이들과 함께 온 타운을 휩쓸고 전도를 했습니다. 말씀이 살아있고 기도가 응답되고 많은 영혼들이 구원받는 은혜를 눈으로 보면서 저는 더 큰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한순간에 제가 꾸는 꿈을 내려 놓아야하는 사건이 생겼습니다. 한 영혼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가라하시고 저는 조금만요 미루다가 어느 날 말라리아로 눈이 멀고 죽음에까지 가서야 “주님 살려만 주시면 뭐든 하겠습니다”하고 간 곳이 미티야나라는 도시입니다. 교회 개척 당시 참 힘들었던 것은 열악한 환경도 아픈 것도 부족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비수를 꽂고 날선 칼을 휘두르는 말쟁이들 때문이었습니다. 말쟁이들을 빼고 나니 제 주위에 동료는 없고 하나님만 제 옆에 계셔서 저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고 일으키시고 인도하셨습니다. 그렇게 8개월간 나 홀로 가정교회를 마치고 6평 정도 되는 현지인 방 2개를 얻어 2009년 5월 미티야나순복음교회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 곳에서 5살 반 한 소녀가 구원을 받았고 예수님의 품으로 보내야 했습니다. 한 소녀의 구원은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주님의 마음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작은 순종의 상은 참으로 컸습니다. 주님은 하나에 충성되었기에 더 많은 영혼을 주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대로 여러 개의 지교회가 개척이 되었고 영혼들도 늘어났습니다. 그 밖에 학교와 목회자 양성을 위한 조그만 신학교와 장학사역을 통해 어린 영혼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개인 마다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저에게는 작은 소녀의 꿈입니다. 고아와 가난한 가정을 위한 유치원 과정인 헬프센터(help center)의 시작으로 복음이 전해지면서 한 소녀는 예수님을 만났고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의사가 되어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무료로 고쳐주고, 선교사님처럼 되고 싶다던 소녀의 꿈을 지켜주고 싶어 학교사역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어김없이 많은 아이들이 모입니다. 귀한 어린 영혼들의 희망과 소망 그리고 꿈을 주고 지켜주기 위해 어른 성도들이 먼저 꿈과 비전으로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조이 스쿨(JOY SCHOOL)’ 기쁨 유·초등학교는 꿈이 만들어 낸 학교입니다. 성도들이 사비를 털어 나무 기둥을 사고 화장실을 파고 소똥과 진흙을 가져와 벽을 막고 멀고 험한 길을 지나 20ℓ 물통을 머리에 이어 나르는 사랑의 헌신과 믿음의 기도가 제2의 제3의 학교가 되었습니다. 그중에 제3의 학교 은냐루테테 조이 스쿨은 놀라운 꿈과 비전의 실상입니다. 



 은냐루테테에 가는 길은 정글을 연상케 합니다. 실제로 교회로 들어가다가 길을 잃어버려 다시 돌아서 나오는 경험을 하기도 했습니다. 작년에 시작한 교회는 말이 교회지 나무 가지와 비닐을 덮어 만든 작은 비닐하우스를 연상케 합니다. 그곳에 꿈과 미래가 자라고 있습니다. 처음 은냐루테테 성도들은 나무와 진흙 소똥으로 만든 양철지붕 교회를 꿈꾸었습니다. 그리고 양철판을 하나 둘 사서 모으고 있었습니다. 성도들의 기도는 교회 먼저 짓고 학교나 병원이 가까이 있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기도는 한 성도님의 양철지붕 후원으로 5개 소똥 진흙 건물을 올릴 수 있는 기적을 눈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큰 물질이 없어 아주 느리게 기둥 하나 하나가 세워지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저는 고맙고 마음이 짠하고 감사하여 박수를 쳐주고 싶습니다. 믿음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물질이 없어서 할 수 없다” “교회가 없어서 의자가 없어서 예배들 드릴 수 없다” 이런 말에 “절대 아닙니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작은 물질이 성전이 되고 그들의 꿈과 비전이 예배의 부흥을 일으키는 모습에 저는 항상 배우고 감동합니다. 아프리카 성도들이 일어나서 한발 한발 선교를 위해 발을 딛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작은 한발에 행하시는 하나님의 기적을 눈으로 보면서 시골 농부들을 하나님의 일꾼으로 변화시켜 쓰시는 멋진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아프리카 영혼들이 외치고 있습니다. 같이 영혼을 구원하자고, 꿈을 꾸자고, 할 수 있다고, 해보자고,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해주신다고, 빈 손 들고 외치는 것 같으나 그들은 참 용기와 희망과 꿈과 비전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선교사를 선교사처럼 만들어 주는 이들과 함께 손잡고 오래도록 복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아프리카 영혼들의 외침을 들으시고 함께 손잡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간다의 모든 사역의 결실은 하나님의 은혜와 여의도순복음교회와 성도님들의 헌신과 기도가 낳은 열매입니다. 그리고 더 굳건히 손잡아 주시고 기도해 주십시오. 그 기도를 통해 더 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받고 주를 위해 헌신하리라 저는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21∼23일, 2017 <아시아 리더스 서밋> 대만에서 개최


“아시아 선교는 아시아 교회가”
이영훈 목사 등 아시안 목회자, 협력선교 방안 모색

 ‘아시아 선교는 아시아의 교회가, 아시아인의 손으로 전하자’는 취지로 2013년 홍콩에서 시작된 아시아리더스서밋(ASIA LEADERS SUMMMIT·이하 ALS)이 21일부터 23일까지 3일간 대만 타이베이에서 개최된다.
 타이베이 탑 처치(Taipei Top Church)와 샹그릴라호텔에서 진행되는 이번 ALS에는 이영훈 목사를 비롯해 에드먼드 테오 목사(홍콩 ICA), 쿠마르 목사(인도 갈보리채플), 오바자 목사(인도네시아 GBI), 아르핀 목사(인도네시아 ROCK MINISTRY), 시가끼 시게마사 목사(일본 순복음동경교회), 마코토 목사(일본 JPN), 김정석 목사(광림교회), 진재혁 목사(지구촌교회), 한기채 목사(중앙성결교회), 빈센트 레오 목사(말레이시아 글래드타이딩 AOG교회), 에드먼드 챈 목사(싱가포르 CEGC), 도미닉 여 목사(싱가포르 TCC) 등 아시아를 대표하는 교회 지도자들이 참석해 아시아 선교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협력의 길을 모색한다.
 또한 선교만을 위한 의견 교환이 아닌 교회와 사역의 성숙을 위해 서로의 목회 및 사역을 소개하고 공유한다. ALS는 일반적인 교회성장이 아닌 동반 성장, 협력의 리더십 등으로 표현되는 새로운 목회 패러다임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번 대회를 준비하는 대만의 양 유밍 목사를 비롯한 대만교회 지도자들도 이번 ALS를 통해 현지 대만교회들에게 비전은 물론 새로운 도전 의식을 심어주리라 기대하고 있다.
 21일에는 각국에서 온 아시아 교회 대표들 간에 환영만찬이 진행되며 기존의 회원들은 물론 초청된 아시아 기독교 지도자들이 화합의 시간을 갖는다. 22일에는 총 5번의 주제발표가 진행되는데 아르핀 목사가 ‘교회성장의 원리’에 대해, 빈센트 레오 목사가 ‘강한 설교’에 대해, 에드먼드 테오 목사가 ‘아시아 선교’에 대해, 한기채 목사가 ‘목사의 리더십’에 대해, 에드먼드 챈 목사가 ‘제자훈련’에 대해 발표한다. 세미나 이후 저녁에는 아시아리더스서밋 참가자뿐만 아니라 지역 목회자들을 초청해 만찬을 함께 하고 이어 저녁성회가 개최된다.
 저녁성회에는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사역’에 대한 영상과 함께 이영훈 목사가 말씀을 선포한다. 이영훈 목사는 목회자들과 평신도리더 등 성회에 참석한 모든 이들에게 성령충만의 중요성과 더불어 아시아 선교는 물론 세계 선교에 이바지하기 위한 영적 대각성에 대해 설교한다.
 한편 세계 최대 교회인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이끄는 이영훈 목사의 리더십에 대한 아시아 각국의 기독교 지도자들의 지지와 기대가 대단하다.
 ALS 대표 이영훈 목사는 앞서 열린 ALS 2016에서 아시아복음화율 현 7%에서 30%이상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지도자들의 협력과 더불어 지도자들이 먼저 영적성숙·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참가한 아시아리더들도 “세계교회의 성장에는 항상 성령운동이 있었다. ALS를 통해 아시아 지역에 성령 운동의 역사가 일어나고 세계복음화를 향한 부르심에 나서길 기대한다”며 이번 ALS에도 강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길 소망하고 있다.


서상진 선교사(대만)

대만의 하늘에 십자가 세우기 위해 교회 개척 주력 



타이중순복음교회 중심으로 여러 원주민 마을에 교회 세워 
청소년 복음화, 교회개척훈련에 힘써 차세대 신앙주자 양성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아름다운 섬 포모사 타이완에서 인사드립니다.
 타이완은 한국의 경상남북도와 전라북도를 합한 크기의 작은 나라이지만, 여러 문화와 언어가 공존해 있습니다. 고산에는 대표적인 산지인들의 9개 부족어가 있고, 소수 부족까지 합하면 20개 이상의 언어가 있습니다. 평지에는 민난어, 만다린어, 객가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는 유교, 도교, 불교, 조상숭배 등 우상을 섬기며 거리 3㎞ 마다 크고 작은 신당들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사역하고 있는 타이완은 38년 전에 순복음1세대 황모영 선교사님의 개척을 시작으로 현재 순복음2세대 10명에 선교사들과 3세대 순복음 현지 사역자 30여 명이 타이완 전역 18개의 순복음교회를 세워 사역하고 있습니다.
 저는 20년 전에 선교지 타이완에 선교사로 파송 받아 타이완 공항에 도착했을 때 느낌을 잊지 못합니다. 캄캄한 밤 어두움 그 자체였습니다. 십자가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때 마음에 다짐했습니다. 대만하늘에 수 많은 십자가를 보게하리라. 그리고 교회개척사역을 시작했습니다.

 한국의 밤 하늘은 십자가로 장식되어 있어 영적 공기가 상쾌합니다. 그런데 타이완의 밤 하늘은 어둡고 영적공기는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제 마음 가운데 타이완에 더 많은 교회가 개척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저부터 솔선수범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타이중순복음교회를 개척한지 얼마 되지 않아 여러 가지 어려웠지만 주일 오후에는 교회에서 나온 헌금을 모두 가지고 온 가족이 심방을 나갔습니다. 사모와 5살 큰아들, 3살 작은아들을 데리고, 좁은 산길을 3∼4시간 운전해서  합한산 런아이샹(仁愛鄕) 친아이촌(親愛村)의 원주민 교회인 완다순복음교회에 도착해 문이 닫혀 있는 교회, 성도가 없는 교회를 심방하고 전도해서 저녁예배를 인도하고 돌아오면 새벽 1∼2시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육신은 피곤하지만 영은 자유했습니다. 기뻤습니다. 저로 인해 산지인들 부락에 또 하나의 십자가가 어두운 밤하늘에 밝혀지니 감사했습니다.

 또 한국에서 현대건설에서 고속전철을 수주해서 미야오리지역에 오게되어 지교회를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미야오리에(苗栗) 거주하는 학가인들은 미종족전도지역입니다. 타이완 인구의 5분의1을 차지하는 큰 부족인데, 복음화가 제일 낮은 지역에 미야오리순복음교회를 세워 또 하나의 십자가가 타이완 하늘을 밝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화린엔(花蓮), 아리산 등 자매교회를 세우니 현지 목회자들이 관심있게 물어봅니다. 저는 하나님의 교회는 성장해야 하며 그 비결은 교회를 많이 세우는 것이라 말하고 격려합니다. 정말 지교회를 세우고 물질적으로 나누니, 타이중(臺中)순복음교회는 하나님이 성장 시켜 주시고 축복해주셔서 큰 성전도 헌당하게 해 주시고 교회도 부흥시켜 주셨습니다. 이것을 본 현지 목회자들도 도전을 받아 지금은 많은 교회들이 지교회를 세우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타이완 기독교 인구가 3%에 불가했지만, 현재 어느 도시는 8%까지 성장하는 부흥을 주셨습니다. 대만의 하늘은 많은 십자가들로 장식되고 있습니다.

 저는 성령 충만한 교회, 질병을 치료하는 교회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비전도 현실에 부딪치면 여지없이 깨어지고, 부담이 됩니다. 왜냐하면 대상이 타이완 사람인데, 현지언어를 못하니 아무리 훈련이 잘되어 있고 아름다운 것이 있어도 보여줄 수 없어 답답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조용기 목사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목사님께서 수 많은 나라에 가서 수 많은 언어를 듣는데 언어가 통하지 않는 나라에 갔을 때 성회 주최측에서 찬양을 인도하면 방언으로 같이 찬양을 따라하시는데 은혜가 된다고 하셨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얼마나 자신감이 생기던지 그때부터 환자를 위해 안수하기 시작했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 2:7)라는 말씀을 붙잡고 무한 자신감으로 한국어, 중국어, 방언으로 기도했고, 많은 환자들이 치유되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성령의 역사하심 속에 우울증, 정신질환, 심장병, 관절염, 구강암, 임파선암, 대장암이 치료받는 기적이 이어졌습니다. 조금 지나서는 중국어기도와 방언기도로, 20년이 지난 지금은 완벽한 중국어 기도로 성령님과 함께 사역하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또 저는 우상문화에서 성장한 아이들을 위해 관심을 갖고 사역하고 있습니다. 전도를 하다보면 부모님이 반대하여 교회에 나오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교회에 나가면 조상숭배를 못하기 때문이라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4∼14세를 대상으로 매년 월드미션과 함께 캠프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율동, 워십, 드라마, 부채춤, 성경말씀, 풍선놀이, 레크리에이션, 만들기 등 다이나믹하고 다양한 프로그램들로 진행됩니다. 학생들은 방학에 학원 다니고 부족한 과목을 공부하느라 바쁜데도 캠프를 선택하고 참석합니다. 시장님도 시강당을 무료로 사용하게 도와주시고 후원해 주십니다.

 참석했던 아이들의 80%이상이 예수님을 모른던 아이들인데 이제는 고등학생이 되고, 대학생이 되어 신앙 생활하는 것을 볼 때 감개무량합니다.

 이제 제가 주력하고 싶은 사역은 신학교를 통한 교회개척 훈련학교입니다. 지금 타이완의 많은 신학교에서 졸업생이 배출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교회가 개척되지 않고 있는 것을 볼 때 교회개척 훈련학교가 필요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사명자들을 모집해서 신학훈련과 더불어 개척까지 이어지는 사역에 중점을 두고 싶습니다. 저희 교회서 성령 충만으로 훈련된 성도들이 오순절신학으로 무장되어, 타이완 전지역에 타이완 밤하늘에, 십자가를 장식하는 성령 충만한 사명자들로 세워지기를 소망합니다.

 성도 여러분! 타이완이 생각나실 때마다 기도해 주십시오. 첫째, 타이완에 우상을 믿는 많은 사람들이 결단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시인할 수 있도록 둘째, 타이완의 많은 교회들이 성령 충만, 치료하는 교회들이 될 수 있도록 셋째, 타이완에 더 많은 교회가 개척되어 타이완의 밤하늘을 십자가로 장식하는 그날이 속히 올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솔 로 몬|기독영화, 영상

       


 

 

 

 

 

 

 


 여로보암 ― 북왕국 이스라엘의 제1대 왕
1. 인적 사항
① 여로보암은 '백성을 더하게 하소서'라는 뜻. ② 에브라임 지파 출신(왕상11:25).
③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22년간 통치(왕상12:2;14:20).
④ 솔로몬의 신복 느밧의 아들, 모친은 수루아(왕상 11:26).
⑤ 고향은 세겜의 서쪽 사마리아 스레다임(왕상 11:26). ⑥ 아들로는 아비야와 나답이 있음.
2. 시대적 배경
여로보암 당시 이스라엘은 대변혁을 겪었다. 즉 솔로몬 사후 이스라엘 왕국이 분열됨으로써(B.C.930) 남왕국은 남왕국 대로 정치적 안정을 회복하기 위해 정비를 막 서두르게 되었고, 북왕국은 북왕국대로 정치적, 종교적 정비를 서두르던 때였다. 또한 이런 국내적 대격변과 함께 국외적으로도 솔로몬 말기부터 서서히 이스라엘을 침공해 오던 주변 국가들의 세력이 강성해짐에 따라 상당히 위기감이 고조되어 있던 때였다. 그러나 솔로몬 때까지 탄탄했던 이스라엘이었기 때문에 남북 왕국 분열 직후인 이 당시에는 아직 외적의 침입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 당시에는 남북 왕국간의 적대 감정이 매우 높아 잦은 전쟁이 벌어졌다. 이러한 시기에 여로보암은 새롭게 북왕국을 창건한 자로서 정치적으로는 매우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였으나 종교적으로는 악한 선례를 만듦으로써 북왕국 멸망의 근본 원인을 재공하고 말았다.


4. 성품
① 솔로몬 왕의 인정을 받아 공사의 감독자로 발탁될 만큼 부지런하고 유능한 자(왕상11:28).
② 이스라엘 분단에 대한 아히야의 예언을 듣고 곧 반란을 일으킬 만큼 정치적 야욕이 강한 자(왕상 11:26-32). ③ 애굽 망명 후 유다 지파와 솔로몬 통치에 대한 백성들의 반목을 충동질하여 정권에 도전할 만큼 계략이 뛰어난 자(왕상12:2-4). ④ 이스라엘 열 지파의 추대를 받고, 북왕국의 초대 왕이 된 것을 볼 때 정치․군사적 지도력이 뛰어난 자(왕상12:1-3, 20).
⑤ 왕이 된 후 성막을 가진 유다로부터 종교적으로도 독립하는 동시에 왕권도 강화하기 위하여 북쪽 지역에 많은 산당과 우상을 만들만큼 대담한 인본주의 자(왕상 12:27, 31).
⑥ 하나님의 책망조차 무시할 정도로 교만한 자(왕상 13:1-10).

5. 구속사적 지위
①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갈라진 후 북왕국의 초대 왕이 됨(왕상 12:20).
② 왕권 강화를 위해 벧엘과 단에 우상을 만들어 섬기게 함으로써 자신뿐만 아니라 백성들까지도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게 한 왕(왕상 12: 28).
③ 여로보암과 그 집을 향한 하나님의 재앙이 선포됨. 이는 세상적 정욕만을 추구하는 자에게 임할 심판의 표징이 됨(왕상 14:7-16).

6. 주요 업적
① 솔로몬의 '밀로' 건축과 예루살렘 성벽 수축 공사를 감독함(왕상 9:15).
② 세겜과 브누엘을 건축하여 군사적인 요새를 강화함(왕상 12:25).

7. 실수
①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세워놓고, 백성들에게 우상 숭배를 강요함(왕상 12:27-29).
② 레위 자손이 아닌 보통 백성을 제사장으로 삼음(왕상 12:31;13:33).
③ 후세들에게 악한 선례를 남김으로써 결국 북왕국 멸망의 원인을 제공함(왕상 14:10).

8. 평가 및 교훈
① 여로보암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이것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왕상12:28,29)고 하며 이를 경배하였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경시한 채 자신의 생각과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것은 곧 우상 숭배와 동일한 죄악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 완악한 마음이나 자신의 이해 관계가 앞서지 않도록 하며 오직 하나님의 방법으로만 그 분을 섬겨야 한다.
② 여로보암은 일찍이 솔로몬 왕의 인정을 받아 요셉 족속의 역사를 감독할 만큼, 또한 북쪽 10지파의 추대로 왕이 될 만큼 부지런하고 유능한 자였다(왕상 11:28;12:20). 그러나 이렇게 뛰어난 지도자요 존경을 받던 그였지만 하나님을 떠남으로써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임을 당했다. 이를 통해 하나님 없이는 인간의 지혜와 칭찬이 헛됨을 깨닫게 된다. 더욱이 하나님을 버리는 자는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자신도 버림받게 됨을 기억해야 하겠다. 참으로 일이 형통할 때에 더욱 하나님을 겸손히 섬기는 자가 되자.
③ 여로보암은 솔로몬의 왕권에 대적하여 북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였다. 이로써 그는 후세들에게 이스라엘의 분열이라는 좋지 않은 전통을 남겼고, 더더욱 우상 숭배를 조장함으로써 백성들의 신앙을 변절시켰다. 혹시 우리도 여로보암 처럼 그릇된 신앙의 모습을 신앙의 후배들에게 남기고 있지는 않는가?

9. 핵심 성구
"여로보암에게 이르되 너는 열 조각을 취하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나라를 솔로몬의 손에서 찢어 빼앗아 열 지파를 네게 주고"(왕상 11:31).

정동제일교회, 아펜젤러 목사 (서울 중구 정동)

            

 정동제일교회 예배당  (출처- http://image.search.naver.com)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貞洞)에 있는 한국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교회 건축물이다. 1977년 11월 22일 사적 제256호로 지정되었다. 1895년 9월에 착공, 이듬해 헌당식(獻堂式)을 거행하고 1897년 10월 무렵에 준공된 고딕풍의 붉은 벽돌 건축물이다. 교회 내부는 평천장(平天障)에 별다른 장식 없이 간결하고 소박하며 기단(基壇)은 석조(石造)이고 남쪽 모퉁이에 종탑을 세웠다. 건물은 벽돌쌓기로 큰 벽체를 구성하고 아치 모양의 창문을 낸 고딕 양식의 교회당이다. 1926년 양쪽 모퉁이를 넓혀 삼랑식(三廊式) 평면형으로 교회 건물을 증축하였으며 1953년에는 6·25전쟁으로 반파(半破)된 교회를 수리하여 복원하였다. 정동교회의 역사는 1885년 10월 11일, 미국 북감리교 선교부 목사 아펜젤러가 정동에 마련한 '벧엘예배당'이라는 그의 집에서, 감리교회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인을 위한 공중예배를 가짐으로써 시작되었는데, 이 날 여자 한 사람을 포함한 4명의 신자가 예배를 드리고 세례를 받았다. 아펜젤러는 이보다 앞서 1885년 6월에 입국하였으나, 당시 조선 정부로부터 그리스도교의 전도사업이 공식적으로 승인되지 않아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세워 신학문 교육부터 시작하였다. 정동교회는 1889년 한국 최초의 월간잡지 《교회》를 발간하여 자유주의 사상을 불어넣기 위해 힘썼고, 1897년에는 미국의 엡?청년회 운동을 도입하여 청년사업을 전개하였는데, 1922년에는 한국 최초로 여름성경학교를 개설하는 등 선구적인 선교활동을 전개한 한국 감리교회의 대표적인 교회이다. (네이버 백과사전)

 

100주년 기념탑     (출처- http://blog.naver.com/areyoureal

 

100주년 기념교회 내부

 

정동 문화재예배당         (출처- http://blog.naver.com/chihirototo)


정동(문화재)예배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예배당으로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리의 신앙정신이 담겨있는 영국 빅토리아풍 고딕식 붉은벽돌 건물로 이 땅에 예수그리스도의 몸된 성전을 최초로 형상화 한 것입니다. 한국감리교회의 창시자이며 정동제일교회의 설립자인 아펜젤러 목사는 1895년 연회에서 5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서울제일감리교회당을 정동에 건축하도록 허럭받은 후 4년동안 정동교회당 건축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습니다. 이 예배당은 길이 77척 너비 40척 높이 25척으로 회당안에 좌우로 좁은 방 하나씩, 그 길이는 28척 너비는 14척 11평으로 설계되어 1895년 8월 7일에 착공된 후 하나님의 축복속에 순조롭게 건축이되었습니다. 그해에 기초공사를 끝냈고, 1896년에는 지붕을 얹었습니다. 1897년 6월에는 거의 완공되어 배재학당의 졸업식을 이 첫 예배당에서 하였으며 정동교인들이 입당한 것은 10월 3일 주일이었으나 1897년 12월 26일 성탄주일을 기해 하나님과 이 민족앞에 봉헌하였습니다. 이 예배당은 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당시 최대의 건물이었으나 1914년 대부흥운동으로 교인수가 2천명 이상으로 늘어나자 1926년 모퉁이 주춧돌을 종각 남쪽 모퉁이 서편으로 옮겨놓고 동으로 10자, 남으로 14자, 합 60평형을 증축하여 175평 건물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정동 문화재예배당 당시의 사진    (출처- http://image.search.naver.com) 

 

정동 문화재예배당,  복구된 정동예배당


1950년은 우리 민족에게 잊을 수 없는 해이다. 6. 25전쟁으로 말미암아 주요 관공서 기관이 파괴되고 주요기관이 마비되었다. 정동교회도 예외는 아니어서 강단이 폭격을 맞아 폭삭 무너져 내려앉았고 파이프 오르간이 망가져서 파이프가 휘고 부서져 파편이 여기저기 널려져 있었다. 교회는 절반이나 파괴되고, 목사관도 날아가고 없었다. 실로 처참한 광경이었다. 정동교회는 곧 1953년 11월 8일 임원회가 열리고 `정동교회당복흥위원회'가 조직된다. 그리고 최단시일 안에 중수할 것을 결의하면서 모은 헌금이 528,830원에 달했다. 한편 총리원에서도 보조금 70만원을 보내주어 총 수리비 1,225,000원을 조달하게 된다. 수축공사는 12월 3일에 착공하여 약 3주만에 완료된다. 그리하여 1953년도 성탄 축하예배는 새로이 복구된 예배당에서 드릴 수 있었다.

 

문화재 예배당의 의의


이와 같이 정동(문화재)예배당은 1887년 건축, 봉헌될 때부터 한국 감리교회와 민족의 흐름 속에서 그 중심축 역할을 담담히 감내했습니다. 봉건적 신분 차별과 여성 차별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을 때 정동(문화재)예배당은 새로운 빛을 던져 준 것입니다. 정동 예배당에서 남녀를 가르는 휘장이 벗겨졌을 때 낡은 봉건적 사고는 이미 깨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일제의 억압도, 공산주의의 도정도 정동교회는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수 많은 기독교 정신을 갖춘 인재를 배출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정동(문화재)예배당의 벽돌 하나하나에 민족과 믿음의 선배들의 숨소리와 땀이 정결하게 배어 있습니다. 정동 예배당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는 지금,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여 우리에게 들리는 아름다운 예루살렘 성전의 영광을 통하여 하나님과 하나됨을 맛보게 합니다. 문화재예배당은 다가오는 21세기 에는 한국 교회와 민족의 등불이 될 것이며, 어머니의 포근한 품과 같이 한국 교회와 사회를 껴안는 어머니 교회의 면모를 영원히 간직 함으로써 우리의 감동과 사명은 영원히 역사에 남을 것입니다. 

 

정동 문화재예배당 정문

 

정동 문화재예배당 내부

 

감리교 한국선교 50주년 기념비


884년 6월 24일은 선교사 매클레이 박사가 인천에 도착함으로서 한국선교의 문이 열린 역사적인 날이다. 이날을 기점으로 1934년은 조선 감리교회의 50주년에 해당하는 해가 되므로 크게 기념행사를 갖게된다. 조선 감리교회는 1935년 4월 부활절을 기해 50주년 행사를 크게기념하는 행사를 갖게 된다. 기념비에 사용된 돌은 이끼가 끼지 않을뿐더러 견고하고 화려하기로 이름난 보령 염포오석이다. 비석전면에는 "감리교회 조선선교 오십주년기념비. 기독교조선감리회교우일동건립"이라고, 후면에는 "부활주일에 조선과 만주에 있는 감리교회에서 기념 헌금한 것과 유지들의 기부로 1936년 4월 12일 부활주일에 이를 건립하였다"고 쓰여있다.

 

제1,3대 담임목사 아펜젤러 목사, 50주년 기념비 

 

아펜젤러 목사 (제1,3 대 , 1885-1891, 1893-1902)


우리 나라 최초의 감리교 목사이자, 이 땅에 감리교 역사를 뿌리내린 아펜젤러 목사는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인 1895년 4월 5일 부활 주일 날 감리교의 스크랜튼 목사와 함께 조선이라는 조그만 나라에 도착하였다. 아펜젤러는 1858년 미국 펜실베니아주에서 태어나 드류신학교를 졸업하고 선교사의 뜻을 품고 있던 중 미국 감리교 선교부로 부터 한국 선교사로 오게 된 것이다. 아펜젤러 목사는 고종황제의 허락으로 이 곳에서 선교사업, 교육사업, 봉사활동 등 무수히 많은 일을 하였는데, 그 첫째가 한국 최초의 개신교 교회인 정동제일교회를 세우시고 이 땅에 기독교문화를 꽃피운 일이다. 아펜젤러 목사는 최초의 감리교 모교회건물인 문화재예배당을 짓고 정동교회의 초대 목사가 되신 분으로 조선인의 민족 복음화에 한 평생 힘쓰셨으며, 한글 신약성서 번역작업을 통해 우리 나라 성서보급에도 큰 일을 하였다. 그리고 교육사업을 통해 배재학당을 건립하고 민족의 지식사업에 열정을 다 하였다. 아펜제러 목사가 목포에서 해난 충돌사고로 순직하기 전까지 그의 전 생애를 바쳐 한국에 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배재학당과 정동제일감리교회, 그리고 한글 신약성서 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진정 위대한 선교사요, 교육자요, 선각자로서 이 땅에 민족 복음화를 위해 죽는 날까지 몸바쳤으며 그 공은 실로 위대하다 하겠다.

 

최병헌 목사 (제 4대, 1902-1913)


1902년 최병헌 목사가 부임하면서 정동교회의 지도력은 선교사들로부터 한인 목회지로 완전히 전환된다. 탁사 최병헌 목사는 정동제일교회의 신학적 기초를 쌓으며, 그 위에서 평생 목회 하셨다. 그의 사회적 복음이해는 이미 고찰한 그의 강연 `종교와 정치의 관계'에서 전개된다. 탁사의 복음 이해를 위한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은 그의 글 `죄 도리'이다. 탁사 최병헌 목사는 기독교의 기본 문제인 죄의 원인과 결과와 그 해결책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앙과 결부하여 풀이하였다. 또한 최병헌 목사가 일생동안 신학적 기초로 삼은 것이 재래종교와 기독교와의 만남의 문제를 어떻게 해명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그의 주제해명을 위해 1900년 「대한크리스도인회보」에 "삼인문답"을, 그리고 1907년 「신학월보」에 "셩산유람긔'를 각각 종교인간의 대화형식으로 연재했다. 그 후 "셩산유람긔"는 「성산명경」으로 ,"종교변증론"은 「만종일연」으로 각각 단행본이 간행되었다. 이렇듯 최병헌 목사는 당대 최고의 신학자요, 철학자요, 문인으로서 정동신학의 기초를 집대성한 분이라 할 수 있다. 

 

정동교회의 초기역사  (사진, 글 출처- http://chungdong.onmam.com)

 

고종황제로부터 한국에서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을 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는데 성공한 미국 감리교 선교부는 곧 한국에서 일할 선교사를 물색한다. 이에 응하여 나선 사람이 바로 의료선교사 스크랜튼과 여성선교사 스크랜튼 대부인, 그리고 아펜젤러이다. 1885년 1월 14일 드류신학교의 교수들과 학생들은 한국을 향해 떠나는 아펜젤러를 위하여 성대한 환송예배를 올린다. 그들의 환송을 받으며 뉴욕을 떠난 아펜젤러 부부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2월 2일 파울러 감독으로부터 목사안수를 받고 한국행의 명령을 받은 것이다. 그곳에는 이미 스크랜튼 부부와 스크랜튼 대부인이 와 있었으며, 이들 일행 5인은 1885년 2월 3일에 기선 편으로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한다. 한국 선교단 일행은 2월 27일에 일본에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던 일본 주재 선교사 메클레이를 만난다. 그리하여 이들 6인은 3월 5일 도쿄에 있는 메클레이 박사 댁에서 첫 한국선교사회의를 연다. 그런데 한국은 그 전해말 갑신정변의 후유증으로 정국이 불안한 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한국 선교사 일행은 정국이 진행될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그러다 한국 정세가 다소 호전됨에 따라 이들은 서울을 향해 출발하되 분산하여 가기로 한다. 선발대로 나선 아펜젤러 부부는 3월 23일에 한국을 향해 요코하마를 떠난다. 나카사키를 거쳐 제물포로 가는 배에는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 목사가 함께 타고 있었다. 이들이 탄 배는 우선 부산에 닿았다가 다시 제물포로 향한다. 목적지 제물포에 도착한 것은 1885년 4월 5일. 곧 부활절이었다.

 

(출처- 정동제일교회 홈페이지,  http://chungdong.onmam.com

 

시병원


의료사업과 교육활동의 허락을 받고 들어 온 세 선교사들은 각기 자기분야에서 일을 시작한다. 스크랜튼은 도착하자마자 우선 장로교의 의사 알렌을 도와 광혜원에서 일했고 9월부터는 자기 집에서 진료활동을 시작한다. 1886년 봄에는 정동에 별도의 건물을 구입하여 병원으로 개조하고 그해 6월 15일에 정식으로 문을 연다. 그는 개원 8개월만에 522명의 환자를 치료하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었고 이에 감동한 고종황제는 다음해 진료소 이름을 "시(施)병원" 일라 지어준다. 인술을 베푼다는 뜻과 함께 스크랜튼의 한국인 이름인 시란돈의 `시'를 딴 것으로 이해된다. 

 

보구여관

 

1887년 스크랜튼 대부인에 의해 정동 이화학당 구내에 설립된 최초의 부인 병원인 보구여관 (保球女館)은 하워드 여의사에 이어 1890년 10월 셔우드, 홀 의사 부부가 맡아 운영하면서 크게 발전, 1892년 대중이 많이 모이는 동대문시약소 (보구여관 동대문 분원)를 개설하고, 1899년 가을 보구여관이 옮겨오면서 1912년 한국 최대의 규모의 부인병원 건물을 완공하게 된다. 이 병원은 동대문 교회와 함께 오늘 날 이화여대 부속 병원으로 발전한다. 

 

벧엘에서의 첫 세례식, 성만찬식


1888년도 연례보고서에서 아펜젤러는 이 역사적인 사건에 대해 되풀이하여 보고함으로써 그 역사적 의미를 부각시키고 있다. 곧 벧엘 예배당에서의 첫 예배와 첫 세례식, 그리고 첫 성만찬식이 그것이다. "10월 16일. 일요일에 28세의 젊은 부인인 최씨의 아내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는 물음에 정확하게 대답했다. 아마 그는 이 땅에서 개신교 선교사에게서 첫 세례를 받은 최초의 여성일 것이다. 우리 감리교가 안방에까지 진출하게 되어 기쁘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여성들이 또 있다. 이 첫 열매를 축복하소서."

 

벧엘예배당


정동제일교회를 상징하는 것은 하나님의 집 '벧엘예배당' 입니다. 1887년 9월 14일 조선을 방문중이었던 워른감독의 승인하에 아펜젤러 목사는 정동에 사방 8*16 피트의 한옥 한채를 구입하고 이곳을 '벧엘예배당' 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이 벧엘예배당에서 정동제일교회 최초의 예배가 1887년 10월 9일에 봉헌되었습니다. 이 벧엘예배당이야 말로 한국감리교회의 요람이요, 정동제일교회의 초석이 된 것입니다. 또한 이 예배당은 정동제일교회의 뿌리일뿐 아니라 한국감리교회, 나아가 한국기독교와 근대 이후 우리민족의 좌표가 되었습니다. 정동제일교회 벧엘예배당은 오늘 우리들로 하여금 시대적 사명을 돌아보게 하고 과거와 현재 미래속에서 생명이 넘치는 전통으로 우리들 가슴 속에 녹아있을 것입니다.

 

 

1913년 아펜젤러 목사 사후 일어난 기념사업 중 기념비는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아펜젤러 기념 현판과 기념종은 결실을 맺었다.

아펜젤러 기념 현판은 1903년 8월 11일 배재학당 현관에 부착하였다. 1907년 모금을 시작한 기념종은 1913년 결실을 맺었다. 최병헌은 아펜젤러 기념종의 명칭을 “세상을 깨운다.” 혹은 “세상을 깨우친다.”는 뜻으로‘경세종’(警世鍾) 혹은 ‘각세종’(覺世鍾)이라 하였다.  이 종은 지금도 정동제일교회 문화재예배당 종탑에 걸려 있다.

 

정동교회와 애국청년운동


정동교회 교인의 대부분은 배재학당, 이화학당의 학생들로 구성되었다. 말하자면 청년교회요, 학생교회이다. 따라서 이외의 교회활동은 주로 청년운동에 비중이 주어져 있다. 청년운동은 두 방향으로 전개한다. 하나는 주일운동이요, 또 하나는 엡윗청년회 운동이다. 주일학교 운동은 성서연구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교육을 목적하고 있는 데 비해, 엡윗청년회 운동은 신앙훈련과 함께 선교와 봉사를 목적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엡윗청년회를 지도하고 프로그램에 직접 개입한 이들이 서재필 박사와 윤치호 등 독립협회의 중심인물이라는 점이다. 서재필과 윤치호는 그들이 추천하는 민족운동의 기반을 민중과 함께 배재학당과 정동교회에 두고 있었다. 서재필은 아펜젤러의 집에 우거하면서 배재학생들에게 강의하며, 학생운동을 지도하고, 윤치호는 관직에 있으면서 배재학생들 위한 강연회를 자주 연다. 그리하여 독립문 기공식이 있은 지 열흘 만인 1896년 11월 30일에 한국 최초의 학생회인 "협성회"가 조직된다. 협성회의 목적은 학생들에게 충군애국(忠君愛國)하는 마음을 굳게 세워 의기와 용맹을 기르고, 학생들 사이의 동창의식을 길러 서로 권면하고 마음과 힘을 합하여 국가에 봉사하며, 배운 대로 전국동포에게 전하는 데 있었다. 독립협회는 정치적인 집단이고, 협성회는 계몽적인 집단이며, 엡윗청년회는 선교집단이다. 지도자들의 성격에 따라 그 관여도에 차이가 있지만 이들에게 공통된 정신적 기초는 신앙 위에 선 민족구국운동이다. 임원들 역시 동일한 인물들의 경우가 많지만, 협성회의 회장, 부회장 등의 임원인 양홍묵, 노병선, 유영석, 문경호 등이 또한 정동교회 엡윗선교회의 회장과 부회장으로 일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출판 인쇄소, 정동 삼문인쇄소


한국 개신교의 모 교회인 정동제일교회와 배재, 이화학당이 자리잡고있는 정동 34번지 일원은 기독교 문화 유적지로 한국 신문화와 신교육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기독교 문화지로 지정된 본 교회의 일원은 초대 선교사인 아펜젤러 목사 부부가 1885년 이곳에 와 처음 머물렀던 보구여관과 시병원 건물이 있었던 곳이며 이 두 건물이 헐린 후 이곳에는 배재식당의 기숙사와 한국 최초의 민간도서관인 종람관이 있어서 한국 최초의 일간 신문인 독립신문과 매일신문이 이 곳에서 발간되었을 뿐 아니라 이광수의 무정, 심훈의 상록수 등이 이 인쇄소에서 발간되었고 이 곳 종람관(도서실)독서회에서는 이광수, 김동인, 남궁억, 주요한, 전영택, 심훈 등이 밤낮으로 모여 책을 읽고 토론함으로 한국 최초의 문예지 "백조"가 이 곳에서 발간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광수의 무정, 심훈의 상록수 등이 쓰여진 곳이기도 하다. 특히 이 곳에 있었던 배재학당 기숙사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아관파천 반대, 을사조약 반대에 이어 삼일 독립운동에 이르기까지 우국 충군 애국 지사들의 모임장소이며 대피소이기도 한 한국 독립운동의 발원지이다. 

 

 

문화재 예배당과 독립운동


정동제일교회의 애국청년운동은 기미년 3.1 독립운동의 핵심으로 거사전인 2월 26일 기독측 인사 10명이 정동제일교회 담임 이필주 목사 사무실에 모여 독립선언문 초안에 동의하고, 이 자리에서 기독교측 민족대표 16명을 확정했으며 또한 3.1 독립운동 당시에는 시위대의 주동력인 배재학생 동원을 김진호 전도사가 이화학생은 하란사 교수가 맡아 주도했으며, 선언문과 격문의 등사와 전달은 정득성 전도사가 전담하는 등 거사의 주거지가 되었습니다. 이필주 목사와 박동완 전도사가 민족대표 33인의 반열에 현순 목사와 손정도 목사는 중국 상해로 건너가 상해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일을 주도하여 각각 외무차장, 의정원 부의장으로 대한민국 정부수립의 기초를 마련하였습니다. 당시 이화학당 학생이자 정동제일교회에 열심히 출석했던 유관순의 일화는 오늘 대다수의 국민들의 마음속 깊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태극기를 품에 안고 정동(문화재)예배당의 파이프 오르간 뒤에서 간절하게 기도했던 유관순의 모습에서 신앙과 조국의 운명을 끌어 안았던 정동(문화재)예배당의 기품을 볼 수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독립선언의 이념과 내용, 3.1 운동의 진행 방향 등이 모두 정동예배당에서 시작되었고, 정동제일교회의 정신과 함께 살아 움직였다는 것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습니다.

 

문화재 예배당과 민족중흥


1945년 광복을 여러 국제 정치적 관점에서 조명할 수 있겠지만 그 핵심 내면에는 신앙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젊은이들을 교육하고 민족을 위해 봉사했던 정동제일교회의 흔적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 노력의 연장선상에서 정동제일교회가 배출한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공적도 간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독립과 해방, 그리고 해방 직후의 정국에서 정동(문화재)예배당의 정신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1950년 민족의 비극, 한국전쟁과 함께 정동예배당의 절반이, 그것도 최초의 파이프 오르간과 제단이 있던 곳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허망한 이념 때문에 동포의 가슴에 서로 총부리를 겨누어야했던 이 전쟁에서 하나님은 공산주의를 극복하도록 역사하셨습니다. 당시 파괴된 정동예배당의 복구 사업은 비단 정동교회 교인들만의 과제가 아니라 감리교 전체의 과업이었습니다. 피난 생활 후 극심한 궁핍의 상황 속에서도 수축 공사는 한국 감리교회의 지대한 관심속에 순조롭게 진행되어 1953년도 성탄 축하 예배는 새롭게 복구된 예배당에서 성대히 치를 수 있었습니다. 계속된 역사의 격동기인 조국 근대화 속에서도 정동제일교회는 중추적역할을 하였습니다. 신앙과 교육의 병행을 목적으로 삼는 정동제일교회의 정신은 양적으로 급격하게 확대되는 한국 교회의 전반적 분위기 속에서도 그 기본 정신을 영성운동과 교육과 선교와 봉사라는 측면에서 발전시켰습니다.  

 

배재학당 동관

 

한국 근대교육이 시작된 곳으로 1886년 세워진 옛 배재학당의 동관이다. 다른 옛 건물들은 모두 헐리고 이제는 1916년에 세워진 이 건물만 하나 남았다. 서울기념물 제16호로 H.G.아펜젤러가 세운 국내 최초 근대식 중등 교육기관이다. 1910년대 한국 근대 건축 중요 지표이다.

 

 

보수공사가 진행중인 배재학당 동관.  (출처- http://blog.naver.com/jcs89225)

 

동관 측문  

 

공사중인 배재학당    (출처-  http://blog.naver.com/hyotao)


우리나라 근대 교육의 효시이기도 한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은 선교사로 이땅에 온 아펜젤러 목사와 스크랜톤 대부인이 선교의 일환으로 교육활동을 먼저 하게된 것으로 정동제일교회와는 한울타리(우리)에 있는, 말 그대로 "우리"이며 선교공동체 이다. 아펜젤러 목사가 배재학당을 세운것은 이 학교를 한국 복음화의 원동력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또한 배재하는 말이 뜻하는 것처럼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는데 있었고 그가 목표한 유능한 인재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거듭난 사람이었다.

 

배재학당

 

배재학당 자리

 

이화학당의 옛 모습, 1886년

 

이화학당, 1908년도, 스크랜튼 선교사가 지도하고 있다.   (출처- http://blog.naver.com/aceman53)

 

이화학당은 스크랜톤 대부인이 선교의 일환으로 교육활동을 위해 세운 최초의 신교육 여성학교이다. 봉건적 사고에 갇혀있는 이 땅의 여성을 신교육을 통해 참되고 착하고 아름답게 가꾸는 이화학당은 복음의 생명력을 입증하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신교육은 복음과 함께 생기 발랄한 신문화, 예컨대 문학과 음악, 미술, 체조, 율동등을 이 땅에 도입했고 생활문화 또한 이에 편승하게 됨으로 정동제일교회를 중심한 배재, 이화학당은 이 땅의 개화를 선도한 한국 신문화의 산실이었다. 이 모든 일에 정동제일교회는 깊숙이 관여했다. 정동제일교회의 정신은 어두운 시기에 젊은 청년들의 교육과 민족의식에 큰 영향을 주었고, 이는 계속된 역사에서 줄기차게 조국과 민족을 이끌어가는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화학당 학생들과 스크랜튼 선교사 

 

이화학당의 옛 모습, 1886년

 

목조 한옥으로 복원된 이화학당 

 

목조 한옥으로 복원된 이화학당 

 

목조 한옥으로 복원된 이화학당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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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교파와직분, 절기들

 
각 교파들

 (1) 신교의 분열

신교의 분열은 로마교황의 부패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교황의 부패원인은 권력이 한 사람에게
편중되었고, 그가 부(돈)를 함께 가지되어 부패하게 되었다.
부패의 방지책이 신교의 분열로 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권력을 분산한 것이 장로교의 형태이다. 조직과 운영이 장로를 중심으로 분산시켜 권력으로 부패 할 수
있는 원인을 차단한 것이다.
감리교는 목사와 평신도가 행정에 같이 참여하며 목사는 중앙의 감독을 받아 부패를 막게 하였다.
다른 교단은 장로교나 감리교의 형태로 운영하거나 복합적으로 운영하여 부패를 방지하고 있다.
각 교단의 역사를 간단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2)개신교 교단들의 역사
1. 장로교
16세기 종교개혁 때에 스위스지방 종교개혁자들이 발전시킨 교회 형태로, 주로 칼뱅의 주장을 따른다.
장로교는 하나님이 이미 예정하신 데로 이루어진다는 예정론의 특색을 가진다.
한국에 처음 선교한 사람은 1885년 미국인 언더우드목사로 언더우드학당을 세워 후에 연세대학이 되었다.
1884년 1년 전에 미국공사관 의사로 따라온 알렌이 개인적으로 의료 선교하고 있었고 1885년에 광혜원을 세우고 의술을 가르쳤으며 이것이 지금의 연세대 의대가 되었다.

2. 감리교
1784년 영국국교회 성직자이며 복음전도자로 요한 웨슬리가 동생 찰스와 함께 영국국교회에서 감리교운동을 창시하였다.
한국에서 처음 선교한 사람은 1885년 미국인 아펜젤러이고 배재학당을 중심으로 선교하였으며 지금의 배재고등학교가 되었다. 1884년 1년 먼저 의료선교사업으로 스크랜턴이 들어와 있었고, 그의 어머니가 이화학당을 중심으로 한국여성 교육의 요람이 되었으며 지금의 이화여대가 되었다.

3. 침례교
17세기 영국의 청교도 개혁운동으로 시작하였고, 일반 개신교와 차이는 교회행정을 회중교회 형식과 세례방식으로, 세례 시에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물 속으로 몸 전체를 담그는 방법을 주장한다.
개신교에서는 일반적으로 머리만 물을 적시는 방법의 세례를 행한다.
미국이 침례교인이 많은 것은 로저 윌리엄스의 공로가 크다.
로저 윌리엄스는 1639년에 교회와 국가의 분리 및 양심을 주장하였다.
한국에는 1889년 캐나다 선교사 펜윅이 함경도 지방에 선교를 시작하여 만주 지방과 몽고에까지 선교하였다. 6. 25동란 흥남 철수 때에 침례교인이 많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흥남철수는 중공군의 제3야전군 9개사단 병력이 원산의 육로를 차단하여 동부전선의 국군병력이 고립되어 해상수송을 통하여 한국군 제1군단 병력과 기독인을 우선으로 1950년 12월15-24일에 걸쳐 철수작전이 시작되었다. 기독교인을 가려내기 위하여 기도문을 외우는 사람으로 선별하였다고 한다.
남한에는 충남 강경에서 선교가 시작되었다.

4. 성결교
영국의 감리교 계통으로, 미국의 길보른과 카우만이 일본에 선교 할 때에 그의 성서 학원을 졸업한 김상준, 정빈 두 사람이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 무교동에서, 1901년에 동양선교회(O.M.S)이름으로 시작하였다. 1907년에 성결교회로 개명하고, 사중복음 즉 중생, 성결, 신유, 재림 4가지를 중심으로 한다.
일반 개신교와 다른 것이 없고 다만 한국인이 전도 한 것이 특이하며 한국이 시작인 셈이다.

 (3)개신교의 조직
조금의 차이는 있으나 대개는 비슷하다.
1. 당 회: 장로, 목사로 구성하고 당 회장은 목사가 맡는다. 가장 중요한 임무를 가진다.
교회행정과 신앙문제 및 예배순서를 정하며, 권선징악의 결정, 예산편성, 목사의 초빙과 직분자의 선정 등 중요한 사항전부를 결정한다.
당 회가 구성되면 말썽이 된다고 기피하는 현상이 지금은 많이 개선되었다.
당 회장이 힘이 크거나, 당 회가 없거나, 소수의 당 회는 문제를 일으키는 요인도 된다.
2. 제직회: 당 회에서 결정한 것을 공포하거나 표결하는데 요사이는 문제가 많다고 하여 표결권을
인정하지 않는 교파도 있다. 제직의 의견을 수렴 또는 토론하고 결정한다. 예산을 표결하거나 건의 받는다.
요사이 당 회가 제직의 표결권을 없는 점을 이용하여, 소수의 당 회가 단합하여 제직 모르게 결의하고
처리하여 원성을 사는 경우가 있다.
3. 회계위원: 당 회에서 결정하거나 당 회장이 임명하며 대개는 1년이 임기이다. 교회의 재정을 관리한다.
4. 감사: 회계위원과 비슷하고, 교회의 모든 재정을 감사한다. 

(4)교회직분
1. 목사: 당 회장으로, 설교와 교회 모든 일의 제반을 담당한다.
일반적으로 남자이나 특수하게 여자가 되는 경우도 있다.
때로는 목사를 하나님의 사자, 사도라고 하나 바른 표현이 아니다 교황들은 그런 표현을 사용하였으나
성서 에베소 4: 11-12에는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모두가 교회를 세우는 성도를 온전케 하는 봉사자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므로 세습하는 자리도 아니고 대접받는 자리도 아니고 군림하는 자리는 더더욱 아니다.
성서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말과 행동으로 가르치는 힘들고 어려운 자리이다.
2. 전도사: 목사의 안수를 받지 못한 사람으로 목사님을 보좌한다.
3. 장로: 당 회원이며, 당 회에서 선출하고 교인의 투표에 의하여 결정된다.
일정한 자격 시험을 통과하고 안수 받아야 정식 당 회원이 된다.
원로장로는 일정한 기간(20년 정도)을 봉사하고 은퇴한 장로를 말하며 당 회에 참석 할 수 있으나
표결권은 없다. 명예장로는 기간을 봉사하지 못한 장로로 당 회에 참석 할 수 없다.
협동 장로는 본 교회에서 장로로 임명받지 못하고 타 교회에서 온 장로를 말하고 당 회에 참석 할 수 없다.
여자 장로가 없는 교파도 있다.
4. 권사: 미국 감리회에서 처음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감리교와 성결교에서는 권사는 남녀 모두 될 수 있지만, 장로교에서는 여자만이 권사가 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여자가 많다. 권사는 안수례를 받지 않은 영구직이며 취임식을 갖는다.
나이가 많아 명예로 주는 권사는 명예권사이다.
임무는 신자들을 돌보고 봉사하며 신자의 상태를 목사에게 알리고 교회 일에 보조한다.
5. 집사: 남과 여로 구성되었고 집사는 대개는 서리(일반)집사로 임기가 1년으로 임명제이다.
안수집사는 종신제로 취임과 안수를 받는다. 어느 교파는 안수집사가 없는 곳도 있다.
임무는 교회에 봉사하고 제직 위원으로 제직 회의에 참석한다.
6. 권찰: 주로 여자가 임명되며 집사가 되기 전에 거치는 봉사하는 직분이다.
7. 사찰: 교회의 일을 보는 사람으로 봉사료가 지급된다.
교회에서 봉사료를 받는 사람은 목사, 전도사, 사찰, 사무원 정도이다.
교회의 직분은 경력에 의하여 권위나 권력을 가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교인 또는 이웃에게 봉사하고 일하는 청지기(종-노예)로 높아지는 것이 아니고, 낮아지는 직분이다.
권위라는 맹신으로 이것을 망각하고 대접받는 직분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흔히 평신도라는 단어는 목사와 전도사 외에 모든 교인에 사용하는데, 목사와 전도사는 하나님이 세우신
특별한 사도와 구별 하기 위하여 사용된다.
이것은 잘 못 된 개념으로 예수님은 특별 신도와 평신도로 구분하지 않았다.
누구나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종으로 하나님의 하인이다.
종은 그리스어로 디아코너스[diakonos=dia(통하여) + konos(봉사)]의 합성어라고 한다.
나는 예수님이 베드로의 발을 씻기는 그림을 찾기 위하여 수 천장의 그림을 보았다.
겸손하신 예수님, 봉사하는 예수님의 그림이 귀하다다는 사실을 보고 우리들이 얼마나 싫어하면
성화도 귀할까? 참으로 느낀 점이 많았다.
옆의 그림은 런던에 소장하고 있는 포드 마독스 브라운이 19세기에 그린 그림이다.


 (5)교회의 절기
안식일(사바스-Sabbath): 창 2:2절, 출 20:11절, 31:7절, 신 5:14-15, 막 1:21-25절 등에 나타나 있다.
종교적인 날이다. 예배에 참여하며 제물과 기도와 찬송을 하나님께 드린다.
유대교는 금요일 해가 지면서 다음 토요일 해가 질 때까지를 안식일로 하고 있으나 그리스도가 부활 한
이후부터는 안식일의 주인은 그리스도임으로 부활하신 일요일을 안식일로 지킨다.(골 2: 16절,
고전 16: 1-2, 행 20: 7절, 계 1: 10절, 요 20: 19, 막 16: 9절)
유대교는 허다한 규칙을 제정하여 형식적으로 변하였다. 예수님은 이것을 부인하셨다.
유대인이 얼마나 형식적인지 예를 들면 안식일에는 전등의 스위치를 켜지 못하여 남의 도움을 청한다.
그럼 다 유대인이면 누구에게 부탁 할 것인지, 그리고 남은 해도 되는 것이지 그들에게 물어보고 싶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쉬기 위하여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안식이 필요하여 만들어 주신 것이다.
월삭(New Moon): 민 28: 11-15절, 삼상 5: 6, 18, 24절에 기록되었다. 속죄제, 번제를 드리고 음식을
나누어 먹고 나팔을 불었다. 주의 선지자를 찾아가 일신상 문제를 의논하였다.(왕하 4: 23절)
속죄의 날: 7월 10일 금식을 하며 대 제사장은 희생제사를 드렸다.(레 1: 6절, 현 달력 9-10월)
속죄양에게 죄를 씌워 들로 내몰았는데 이 양을 아사셀이라고 한다.
나팔절(feast trumpets): 성회로 모이고 말씀을 읽었다. 이 날을 신년으로 나팔을 불었다.
현 7월 1일로 민 29:1-6절, 레 23:23-25에 기록되었다.
안식년: 7년마다 1년이 안식년이고 안식년 7번 째되는 다음해가 희년으로 50년 되는 해이다.
안식년에는 사람과 땅이 쉬고, 희년에는 연속 2년 쉬며 종을 놓아주며 저당 잡힌 땅과 모든 소유를
되돌려준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 가난한자도 부자도 없게 되는 좋은 제도이다.
레 25: 8-17절, 출 21: 2-7, 23:10절에 기록되었다.
유월절(pass over): 출 12장에 기록되었다. 이 날은 재앙이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른 유대인을
넘어간데서 유래한다. 이날에 유대인이 애굽의 손에서 벗어나 가나안 땅으로 가게되었다.
출애굽을 기념하는 날로 너무나도 급하여 누룩이 들지 않은 빵을 먹고 애굽을 떠난 것을 기념하여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맛없는 떡(빵-무교병)을 먹고 시편 113-114장을 노래한다.
그리스도는 유월절의 어린양이다.(고전 5: 7절) 현 4월 10일
오순절 (pente cost): 50일의 뜻으로 유월절 다음날(4월 11일)로부터 50일 후의 맥추기간을 말하므로
맥추절, 칠칠절(7x7), 초심절이라고도 한다. 율법을 받은 것을 감사한다.
현 6월 첫 일요일로 출 34: 18-26절에 기록되었다.
장막절(feast of tabernacle): 7월 15일(현 9-10월)로부터 7일간 들에 나가 장막을 세우고
광야생활을 기념하며 체험하는 날이다. 추수생활과 소박한 생활을 하기 위하여 초막을 세워
초막절이라고도 하고 수장절이라고도 한다 (출 23:16절, 레 23: 24절).
부림절(feast of lots): 유대인을 하만의 음모(에 9: 21-28절)로부터 구한 날을 기념하는 날로 금식으로
시작한다. 부림(purim)은 놀이의 기구 주사위와 비슷한 것으로 히브리어로 제비뽑기의 뜻이다.
이 날은 양일을 지킨다. 유대력 12월(아달) 14, 15일을 지킨다.
부림절 회당에서 에스더(에스델)서를 낭독하고 선물을 교환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며 즐긴다.
후에 '하만타셴'(하만의 귀들)이라고 하는 세모꼴 과자를 굽는 관습이 생겼다. [부림절 참조]
헌목절: 유대력 1월 15일로 성전에 쓸 나무를 드린다(느 10: 34절).

사순절(lent): 부활 전의 금욕기간으로 재수요일(Ash Wednesday-재의 수요일은 타고남은 재를
말하나 여기서는 재생의 뜻이다)부터 부활절(Easter)까지의 주일(일요일)을 제외한 40일간을 말한다.
사육제(카니발, 謝肉祭): 카니발의 기원은 로마는 이날을 동지제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동지제는 사투르누스(Saturnus;농업의 신)의 제사의 날이다.
동지제는 카니발과 크리스마스의 기원이 되었는데 이유는 그리스도교도가 계승할 때 12월 25일부터
시작해서 신년 축제와 12일제의 양쪽을 결합시켰다.
이것이 유럽의 남국에서는 옥외 축제를 주로 하는 카니발이 되었고,
북국에서는 종교적 의의를 가진 크리스마스가 되었다.
사육제는 종교와는 관련이 적으나 '재의 수요일(사순절)'기간이
시작되기 전 3일간(일요일, 화요일, 스페인은 수요일까지)의 독일인의 축제를 말한다.
사육제(謝肉祭)의 한문을 풀이하면 고기를 먹지 못하는 사순절을 생각하면서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것에
대한 감사를 뜻하는 말이다. 사육제가 끝나는 날에는 모든 고기를 먹어 치웠다.
사육제(謝肉祭)는 라틴어로 'carn  eval‎‍  '이라고 한다.
'carne(고기)'와 'val(격리)'를 합친 합성어로 '고기를 사양하는 잔치(辭肉祭)'를 말한다.
그래서 본래의 뜻인 사육제(辭肉祭)로 써야 한다는 이들도 있다.
사육제의 정확한 역사적 기원은 불분명하지만, 이 축제는 특히 마인츠(파스트나흐트)와 뒤셀도르프 등의
도시 것이 유명하며, 쾰른(카르네발)에서는 이미 1234년에 정착되었고 이 도시가 가장 성대하다.
이 지역에서만 열리는 이유는 이 지역은 카톨릭 지역이며, 나머지는 신교지역으로 너무 무절제하다는
이유로 금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적 의미를 가지고 행사가 시작 된 것은 나폴레옹이 프랑스의 안전을 위하여 16주를 떼어내어
'라인연방(동맹)'이라는 중간 완충지대를 만들 때부터 시작된다. [나폴레옹 참조]
1815년 독일(프로이센)이 다시 점령하여 프랑스에게 충성한 지배계급을 조롱을 하여도 좋다고
허락을 한 것이 전통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바보같은 군주, 여자군주가 가장행렬에 등장하는 이유이다.
검소하고 무뚝뚝한 독일인은 온데 간데 없고 바보와 광대들의 세상이 되며, 요란한 가장행렬과 대규모
가면무도회, 풍자적이고 파격적인 연극과 연설 그리고 신문 칼럼 등 광적인 행위들도 이 축제에서
유래하였는데, 이 모든 것은 현재의 사육제에서도 여전히 볼 수 있는 요소들이다.
사순절이 시작되면 금욕생활을 해야 하므로 그전에 실컷 먹고 마시고 놀아보자는 취지가 담겨져 있다고
본다. 같은 날 브라질에서도 벌어지는 '리우 카니발'은 유럽인의 이주가 많았고 또한 카톨릭이 많았기
때문이다. 리우 카니발은 세계에서 가장 환락과 광란의 축제로 많은 관광객이 찾아 온다.
우리에게도 한번쯤은 이런 바보처럼 미치는 축제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종려주일(palm Sunday):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요 12: 13절)
수난주간: 부활 성일 전의 일주일간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생각하는 주간이다.
성금요일(good friday):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생각하며 초대교회는 금식하고 애도하였다.
오늘날에도 이 날에는 종을 울리지 않고 엄숙히 보낸다.
부활절(Easter): Easter는 '봄의 여신'이란 뜻으로 가장 기쁜 날이고 희망의 날이다.
영어명 'Easter'의 기원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8세기 앵글로색슨족의 사제 비드는 이 말이 앵글로색슨
족이 숭배하는 봄의 여신 '에오스터'(Eostre)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하였다.
부활절은 춘분(3월 21일경) 무렵이나 춘분 다음의 만월(滿月 : 부활절 달)이 지난 후 첫번째 일요일을
부활절로 기념한다. 부활절에 세례를 받는 것은 오래전부터 시작된 관습이었다.
세례예비자들(catechumens)이 세례받을 준비를 하는 기간이었으며, 당시 세례는 1년에 1번,
즉 부활절에 받을 수 있었다. 예수님이 새벽에 무덤에서 부활 한 것을 기념하여 새벽에 예배를 가졌으나
요사이는 오후에 예배를 보기도 한다. 개신교는 이 날에 대개는 성만찬식도 겸한다.
승천절(Ascension day): 일명 성목요일로 부활 주일 후 40일되는 날이다.
성령강림절(white sun tide): 승천 후 10일 부활 후 50일(출애굽 후 50일에 율법을 받음과 의미가 같음)
되는 날이다.
어린이 주일(children's day): 1856년 매사추세츠주 세주첼시의 유니버설교회에서 레오나드 목사가 5월 첫 일요일에 시작하였다. 1922년 우리 나라는 방정환 선생님이 5월 1일에 시작하였으나 해방 후 1946년 날짜를 5월 5일로 바꾸어 어린이날 기념행사를 하였다.
어머니 주일(mother's day): 1907년 안나 M . 쟈비스 부인이 시작하였다.
5월 제2 목요일로 정하였으나 지금은 제 2 일요일을 '어버이 날로' 정하여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한다.
감사절(Thanksgiving day): 1621년 가을 플리머스의 총독 윌리엄 브래드퍼드가 수확의 풍요함을
감사하며, 그 동안의 노고를 위로하는 축제를 3일 동안 열고 근처에 사는 인디언들을 초대하여 초기의
개척민들과 어울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한 데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1863년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국경일로 선포하였다.
칠면조 고기와 호박 파이의 축제는 고유한 풍습으로 정착되었으며, 11월의 마지막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기념하였으나 1941년 법령으로 11월의 4번째 목요일로 정하였다.
캐나다는 1879년 11월에 추수감사절을 국경일로 선포하고 지금은 매년 10월의 2번째 월요일에 축제를
열고 있다. 우리 나라의 교회에서도 감사절은 지키고 있으나 미국의 감사절과는 성격이 많이 다르다.


서장원 선교사(아르헨티나순복음교회)

순복음 영성으로 아르헨티나 24개주, 4천만 영혼 구원 매진 
37년전 세워진 아르헨티나순복음교회, 복음의 전초기지로 우뚝

 아르헨티나는 서울에서 비행 시간만 꼬박 30시간 이상 걸리는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곳입니다. 축구와 탱고를 사랑하며, 열대의 아마존부터 지구의 최남단 케이프 혼에 이르는 광활한 대지의 나라입니다. 이로 인해 예부터 풍성한 농산물, 다양한 지하자원을 찾아 유럽의 많은 이민자들이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남미의 다른 국가들처럼 아르헨티나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후, 유럽식 도시를 건설하여 ‘남미의 파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낙천적이지만 결코 게으르지 않은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자기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릅니다. 그래서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립니다. 가톨릭 신앙도 지켜내야 하는 문화로 보기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아버지 때부터 가톨릭 신자라고 말하는 사람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 때문에 아르헨티나의 개신교 신자의 수가 증가했다고는 하지만, 전체 국민 중에 아직 9%를 넘지 않습니다.

 아르헨티나순복음교회가 세워진 지 올해로 37년이 되었습니다. 이곳의 한인 이민 역사가 꼭 50년이 되었으니까, 교민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나라든지 초창기 이민자들의 삶은 힘들고 어렵습니다. 아르헨티나 교민들 역시 언어와 문화가 달라 겪었던 삶의 고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순복음교회의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의 신앙은 고달픈 이민생활을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조용기 원로 목사님의 4차원의 영성은 성령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을 체험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초창기 이민생활로 어려웠던 성도들은 타 민족보다 더 빠른 시간 안에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절대긍정, 절대감사의 신앙으로 받은 축복을 이웃들과 함께 나누는 삶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출석하고 있는 500여 명의 한인 성도들은 아르헨티나 24개주, 4천만의 영혼 구원을 위해 함께 기도하며, 물심양면으로 헌신하고 있습니다. 7년 전, 아르헨티나 교포 교회들 중에서는 처음으로 본 교회 예배당을 현지인 예배와 지역 선교를 위해 개방했고, 성도들이 직접 현지인들을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가톨릭 문화를 고집하는 아르헨티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많은 인내가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특히 아르헨티나순복음교회가 위치한 지역에는 볼리비아와 페루 그리고 파라과이에서 온 이민자들도 상당수 살고 있어서, 다양한 민족과 문화를 이해하며 전도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한인 성도들은 오랜 시간 이민자로만 살아왔던 이 땅이 결국 우리가 가야 할 ‘땅 끝’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르헨티나가 각 성도들의 선교지로 바뀌게 되었고, 우리 주변의 이웃들은 선교 대상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상가들이 밀집된 지역에서는 매주 현지인 종업원들을 상대로 전도지를 나누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용기 원로목사님과 이영훈 담임목사님의 설교를 스페인어로 번역하여 만든 전도지는 종업원들의 마음의 문을 열었고,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자리로 인도해 주었습니다. 그 결과 지금은 인접국가인 볼리비아의 라빠스 시를 포함하여, 총 7개의 지교회가 수도인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를 중심으로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약 700여 명의 순복음 현지인 성도들이 함께 힘을 모아 아르헨티나 전국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열매가 있기까지 전임 선교사님들의 꿈과 열정이 필요했습니다. 또한 성도님들의 헌신과 기도를 받으신 하나님의 응답이었습니다. 지난 3월, 이곳에 새롭게 부임한 저도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으로 가슴 벅찬 사역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저보다 먼저 기나 긴 경주를 달려온 전임 선교사님들 그리고 선임 최주호 선교사님의 땀과 눈물이 더 풍성한 열매를 맺는 밑거름이 될 줄로 믿습니다.

 이제 아르헨티나에는 현지인 배우자들과 가정을 이루는 한인 2세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사회 각계각층에서 영향력을 나타내는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따라서 다음 세대를 순복음의 영성으로 훈련하여 세상 앞에 당당히 세워야 할 필요가 보입니다. 더욱이 아르헨티나는 가톨릭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남미에서는 최초로 동성결혼을 합법화한 나라입니다. 또 좌익 성향인 빼론당의 장기집권으로 정치, 경제, 사회가 불안한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이와 같은 시대적 요청에 다니엘과 세 친구들과 같은 믿음의 사람들이 아르헨티나 전역에 세워지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앞 세대가 보여 준 열정적인 선교의 삶이 보다 더 넓게 실천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다음 세대의 현지인 성도들 역시 중남미 33개국을 향하여 선교의 꿈을 펼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 모든 사역들을 위해 끝까지 순종의 선교를 다 할 수 있도록, 여의도순복음교회 성도님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기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먼 곳에 떨어져 있을지라도, 성령 안에서 아르헨티나를 위해 함께 기도할 때,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들이 이 땅에 나타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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