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혁분 권사(마포2대교구) - 계단 오르내리기 힘들었던 왼쪽 다리 치유

예수 보혈 의지할 때 기적 일어나

지난해 1월부터 다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앉았다가 일어서거나 계단을 내려갈 때면 신경이 이만저만 쓰이는 게 아니었다. 그러다 가을에 산으로 도토리를 주우러 갔다가 왼쪽 오금이 붙어버린 느낌이 들면서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상태가 심각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주변에서는 빨리 병원에 입원해 정밀검사를 받아보라고 권했지만 나는 30년 째 연말이 되면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에서 며칠간 기도하는 신앙 습관에 따라 먼저 기도원을 찾았다.

아픈 다리를 고쳐달라는 기도를 하려했는데 하나님은 나보다는 교회를 위한 기도를 먼저 하게 하셨다. 교회의 복음 전파를 방해하는 마귀를 물리치고 우리 교회가 이 시대 복음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한 후 집으로 돌아왔다.

해를 넘겨 올해 설이 지나자 다리는 부서질 것처럼 고통이 심해졌다. 계단을 내려갈 때는 난간을 붙잡고 두 걸음에 걸쳐 한 계단씩 내려가거나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야만 했다.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아도 그때 뿐 통증은 여전했다.

5월이 지나 하루는 볼 일이 있어 지하철을 이용했다. 힘겨운 걸음으로 겨우 좌석에 앉아 그날도 어김없이 주기도문을 외웠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께 기도했다.

‘언제나 나의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 지금 저를 봐 주세요. 이런 아픈 몸으로 사람들에게 좋으신 하나님을 전하면 전도가 될까요? 나를 고쳐주세요.’ 아픈 왼쪽 다리를 한 대 힘껏 치며 “예수 피로 아픈 병은 떠나갈지어다”라고 선포했다.

목적지에 도착해 지하철에서 내려 걷는데 이상하게 다리가 풀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개찰구를 지나는데도 걸음이 자연스럽게 걸어져 에스컬레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해보자고 생각하고 걸음을 뗐다. 그랬더니 난간을 붙잡지도 않았는데 계단을 쉽게 오르는 것이 아닌가. 할렐루야! 하나님이 내 기도에 응답해주셨다. 나는 아픈 다리가 고침 받는 순간 ‘순종할 때 응답주시는 하나님’을 깨닫게 됐다.

집사 시절 성경전체를 필사했지만 지난해 이영훈 담임목사님이 성경필사라는 숙제를 내주셔서 신약을 다 쓰고 올해 구약 필사노트 네 권 중 마지막 권을 남겨두고 있다. 매일 아침 새벽에 일어나 한 시간씩 기도한 후 오전 8~12시까지, 또 늦은 오후에 성경을 필사하는데 하루에 적어도 필사노트 5장씩은 쓰게 된다. 하루에 말씀도 20장씩 읽으며 이웃을 위해 중보하고 있다.

십자가 보혈을 의지하며 하나님 앞에서의 의식을 갖고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나는 믿음의 유산을 남기기 위해 일주일에 한 번씩 출가한 자녀들과 모여 가정예배를 드린다. 우리 교회 각 기관에서 봉사하는 세 자녀를 보면 우리 가정을 주님께 인도해주신 그 사랑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다.

날마다 은혜를 더하시고 사랑을 이웃에게 전하라고 건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순복음의 권사로 주변에 신앙의 본이 되겠다.


정리=오정선 기자

 

김성국 선교사(레바논)

 

시리아 난민들을 하나님 백성으로 키웁니다

인구 5백만 명의 경기도 크기의 작은 나라
‘중동의 파리’ 불렸지만 지금은 경제 위기로 최악
센터 사역으로 시리아 난민에게 복음전파 자립 도와


할렐루야! 레바논에서 인사드립니다. 레바논은 지중해변에 위치해 있고 북과 동으로는 시리아와 남쪽으로는 이스라엘과 경계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경기도만한 크기에 약 500만 명이 살고 있는 아주 조그만 나라입니다. 레바논은 한때 ‘중동의 파리’라고 불리기도 하고 겨울에 눈 덮인 산이 있어서 ‘중동의 알프스’라는 별명을 가진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하지만 오랜 내전으로 나라는 많이 피폐해졌고 시리아 내전으로 발생한 난민들의 대량 유입과 최근 코로나바이러스 사태와 경제위기로 나라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시리아 내전이 발생한 지 벌써 만 9년이 지났습니다. 시리아 난민들의 상처도 어느 정도 아물어가고 이제는 난민이라는 신분으로 정착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난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2015년 복음주의문화센터를 만들어 지금까지 그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센터에서는 다양한 활동들을 제공합니다. 교육의 기회를 갖지 못한 아이들을 유치반 초등반 청소년반으로 나눠 기본적인 교과 과목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매주 금요일은 금요성경학교로 신앙교육을 실시하고 아이들은 찬양을 하고 성경을 배웁니다.

또한 청소년들은 제자훈련 프로그램을 통해 각종 은사와 재능을 개발하고 여성들은 성경공부와 천연비누 만드는 법을 배웁니다. 자칫 자존감이 낮아질 수 있는 이들이지만 이러한 수업과 훈련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고 또한 자신감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청년들과 아버지들을 위한 프로그램도 시작해 이들이 복음을 가까이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사회활동이 적어진 것은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 좋은 환경이 되었습니다. 코로나가 시작된 이후 주 2회 드리던 예배를 온라인으로 실시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위한 수업도 온라인으로 진행하고 있는데 아이들은 매주 하루씩 돌아가면서 센터에 나오고 있습니다. 센터에 속한 가족들을 모두 7개 소그룹(구역)으로 나눠 SNS상에서 매일 아침 2시간씩 묵상을 나눕니다.

여성들은 비누와 면마스크를 만들어 주변 난민들에게 무료로 나눠주고 외부 기관의 협력으로 100개 가정의 시리아 난민들에게 긴급 식량도 나눠주고 있습니다. 센터가 시리아 난민들에게 복음과 떡을 나눠주는 통로로 쓰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위기를 기회로 바꾸고 계십니다.

레바논은 최근 더욱 깊은 암흑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듯 보입니다. 코로나19와 경제악화에 이어 환율의 급등으로 공식 환율은 5배로 뛰어 올라 금융위기까지 겹쳤고 현지인들의 월급은 기존의 5분의 1이 줄었습니다. 대신 물가는 2~3배가 뛰었습니다. 정부와 정치인들에 항의하는 시위가 연일 벌어지면서 도로를 강제로 막고 타이어를 태우고 있습니다. 이제 휘발유와 밀가루(빵)의 가격을 잡지 못하면 언제 서민들이 도로에 뛰쳐나갈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더욱이 염려되는 것은 시리아 난민들입니다. 코로나19의 위협적 상황에서 사회경제적인 혼란이 겹치면 어쨌든 가장 피해를 보는 사람은 가난한 난민들입니다.

저희 센터에서는 시리아 난민들이 주님을 영접한 후 경제 자립 공동체로 서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들에게는 집과 땅과 일자리가 필요합니다. 이들과 같이 살다보니 애굽에서 종살이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보는 것 같습니다. 이들에게는 출애굽과 같은 새로운 비전과 약속이 필요합니다.

전쟁으로 모든 소유를 잃고 실향민이 됐지만 새로운 땅에서 하나님을 만난 이후 오히려 더 큰 축복을 얻었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중동지역에 있는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발판으로 사용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따라서 이들에게 새로운 땅을 보여주시고 안정적으로 주를 예배할 공간과 농사지을 수 있는 농지 및 건물이 생겨나길 기도합니다. 레바논의 혼란 속에서 오직 주님만이 반석되심을 믿고 믿음의 가족들이 흔들리지 않도록 중보해 주십시오.

청소년, 청년 제자훈련을 통해 난민들이 복음을 전하는 일꾼들로 성장할 수 있도록 성도님들에게 기도를 요청합니다. 또한 난민들에게 전하는 복음방송을 직접 제작하고 송출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것을 간절히 기도합니다.

느헤미야

신앙공동체 회복, 기도와 말씀

느헤미야서는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너진 신앙 공동체를 회복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사실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의 회복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회복을 원하지 않은 주변의 세력들의 수많은 방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느헤미야서는 이러한 위기의 시기에 지도자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간절한 기도와 말씀에 의한 신앙 회복이 잘 나타나 있다.


기도로 시작된 공동체의 회복(느 1∼7장)


느헤미야서는 바사 왕국의 궁중에서 술을 담당하는 관리였던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의 처참한 상황을 전해 듣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느 1:2∼3). 고국에 남아있던 자들이 큰 환난을 겪고 있다는 사실과 예루살렘 성이 불에 타 허물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가 첫 번째로 결단하며 행한 것은 기도였다(느 1:4). 그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죄에 대한 회개의 기도와 함께 왕으로부터 은혜를 입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렸다(느 1:5∼11). 6개월간 지속된 기도의 응답으로 느헤미야는 마침내 예루살렘 성의 재건을 왕으로부터 허락받게 되었다(느 2:1∼9). 고향으로 귀환한 느헤미야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반대하는 산발랏, 도비야 그리고 아람 사람 게셈의 방해를 이겨내고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라는 위대한 목표를 향해 차근차근 나아가게 되었다(느 2:11∼3:32).

느헤미야의 방해자들이 그들을 조롱하고, 무력으로 협박도 하고, 음모를 꾸미기도 했지만(느 4:1∼14), 그들은 기도로 시작한 느헤미야의 열정과 지혜를 이길 수 없었다(느 4:15). 왜냐하면 기도함으로 성벽의 재건을 시작한 느헤미야를 하나님께서 돕고 계셨고(느 4:15∼20), 그 자신도 본을 보이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었다(느 5:1∼19). 결국 산발랏과 게셈의 거짓 소문과 음모에도 불구하고 성벽 재건은 단기간인 52일 만에 완성되었고(느 6:15∼19), 바벨론으로부터 돌아온 자들의 인구 조사가 행해졌다(느 7:1∼72). 성경의 역사를 뒤돌아 볼 때,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항상 순조롭지 않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니 더 험난하고 어려울 때가 있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 어려운 것을 이겨내는 사람들이 있다. 느헤미야의 경우 그 비결은 하나님을 향한 기도였다.


말씀으로 시작된 신앙의 회복(느 8∼13장)


이스라엘 공동체의 회복이 기도로부터 시작되었다면, 공동체의 영적 회복은 말씀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영적 회복의 장소는 바로 예루살렘에 있는 수문(Water Gate) 앞 광장이었다. 학사 에스라는 모세의 율법 책을 읽기 시작하였다(느 8:1). 말씀 낭독은 새벽부터 정오까지 이어졌고, 사람들은 그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느 8:2∼3). 점점 말씀을 뜻을 깨닫게 된 백성들은 울기 시작했다(느 8:8∼9). 말씀의 참된 의미를 깨달은 자들은 더욱 더 하나님 말씀을 공부하기 위해 모여들었고, 그 결과 과거에 지켜지지 못했던 절기(초막절)와 예배가 다시 드려지게 되었다(느 8:12∼18).

예배의 회복으로 이어진 말씀은 또한 백성들 속에서 회개를 불러일으켰다.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를 자복하며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할 것을 다짐하였다(느 9:1∼38). 그리고 말씀으로 촉발된 신앙의 변화는 삶의 변화로 이어졌다. 사실 이제까지 이스라엘 사람들은 야훼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구별된 삶을 살지 않았다. 이방 사람들과의 혼인은 신앙의 거룩성을 상실하게 되었고, 그 결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말씀을 깨달은 자들은 과거의 과오를 뉘우치고, 앞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합당한 삶을 살겠다고 맹세하였다(느 10:1∼39).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던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주민과 지방 주민들(느 11:1∼36), 그리고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의 동참을 이끌어 냈고(느 12:1∼26), 그들과 함께 성전을 정화하고, 안식일을 준수하며, 이방인과의 혼인을 금지하는 등 신앙 회복을 위한 개혁적 조치들을 취하게 되었다(느 13:1∼13).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 회복의 결실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처럼 느헤미야서는 절망에 빠져있던 이스라엘 공동체가 한 지도자의 기도에 의해 회복되고 또한 죄 가운데 방황하던 백성들이 말씀에 의해 새로워진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진심으로 회개하고 말씀대로 살겠다고 결단할 때, 무너진 신앙 공동체가 회복되고 끊어진 하나님의 나라의 역사도 다시 이어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국제신학교육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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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이 존재하는 곳/조용기목사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에베소서 2장 1~5절)

 

오늘날 세상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의 배후를 추적해보면 그 배후에 마귀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 2:2)라고 말합니다. 마귀는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배후세력으로서 보이는 세계에서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의 역사를 분명히 알고 대적해야 하는 것입니다.

 

1. 기도로 마귀를 쫓아내라

마귀가 하는 일을 보면 마귀는 영적으로 수많은 이단을 통해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천국 가는 길은 한길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절)고 했는데 마귀는 이 길 외에 다른 길을 만들어 사람들을 미혹하여 잘못된 길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인본주의적인 사상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본질적으로 거짓되고 그릇된 정보를 통해서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듣지도 못하고 믿지도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 마귀는 우리의 몸과 마음에도 역사하는 것입니다. 나는 기도생활을 통해서 종종 인간의 이성을 초월한 여러 가지를 체험했습니다. 나는 해외성회를 많이 인도했는데, 갑자기 비정상적으로 피곤할 때가 있습니다. 온 전신의 힘이 다 빠지고 다리가 후들거리며 몹시 피곤하여 성회를 인도하고 싶은 마음이 안 생길 때입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피곤한가?’를 생각해봐도 특별히 피곤할 만한 일도 없습니다.

그러면 저는 다른 일을 다 제쳐놓고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면 얼마 있지 아니하여 온 몸에 힘이 부쩍 생기고 피곤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맙니다. 그래서 이제는 비정상적인 피곤이 내게 다가올 때,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때는 즉시 기도하여 마귀의 억압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비정상적으로 마음이 안정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하고 밤 두, 세시가 되어도 잠이 안 오게 일어났다 앉았다 하게 됩니다. 이럴 때는 엎드려서 기도하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귀의 억압에서 풀려나서 마음이 안정되고 평안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또, 비정상적으로 마음에 분노와 미움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나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시여, 이것은 악의 영의 억압으로 말미암은 것이오니 이것을 제게서 제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 하면 얼마 있지 아니하여 내 마음속에서 미움과 분노가 떠나가고 마음이 정상적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러한 것들은 마귀의 억압으로 말미암아 온 것이기 때문에 기도하면 마귀가 떠나가고 비정상이 모두 정상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이런 일을 한두 번 아니라 수없이 체험한 것입니다. 마귀는 예수님 당시나 오늘이나 사람들의 영과 마음과 생활을 억압해서 그 삶을 파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기도로써 마귀를 대적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와 싸울 때, 한두 번 마귀를 대적해서 마귀가 도망가지 않는다고 낙심해서 안 됩니다. 마귀는 우리 삶을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전력을 기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귀를 대적할 때, 밀고 당기면서 씨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이긴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마귀를 패배 시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는 이긴 싸움을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이긴 싸움이라고 해도 끝까지 기도해서 최후 결론에 도달해야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인도를 따라 애굽에서 나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향해 가는 도중에 아말렉의 사람들과 전쟁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 여호수아는 군대를 이끌고 싸움터로 나가고 모세는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싸움터를 내려다보면서 그 두 손을 높이 들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손을 들고 기도하면 이스라엘 군대가 이기고 모세가 팔이 아파서 두 손을 내리면 이스라엘 군대가 수세에 몰렸습니다. 그래서 모세 혼자서 두 팔을 계속 들고 있을 수가 없어서 아론과 훌이 각각 모세의 팔을 하나씩 잡고 서 있었습니다. 그 싸움이 끝날 때까지 모세가 계속 기도하자 이스라엘 군대가 승승장구하여 마침내 이스라엘에 승리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마귀를 대적할 때는 끝까지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다니엘도 포로가 되어서 끌려간 땅에서 자기 나라를 위해 기도했는데 한 주일, 두 주일 기도를 해도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기도하는데 기도를 시작한지 스무 하루 되는 날에 응답을 받았던 것입니다. 만일 다니엘이 기도에 노련하지 않았다면 며칠 기도하다가 응답이 없다고 낙심하고 뒤로 물러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노련한 기도의 용사라 그의 기도가 반드시 마귀의 훼방을 받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인내로써 계속 기도하여 마침내 마귀의 진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최소한 스무 하루 동안 싸워야 합니다. 다니엘도 스무 하루 동안이나 기도했으니 우리도 하루 이틀 기도하고 실망할 것이 아니라 다니엘의 모범을 따라서 적어도 스무 하루 이상은 기도를 계속해야 될 것입니다. 여러분, 중도에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기도하면 승리를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님 중에 32년 동안 이단종교에 빠져서 허송세월하다가 74세가 되어서야 예수님을 믿은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냐 하면 며느리와 딸의 끈질긴 기도로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 며느리가 우리 교회 지역장의 전도를 받고 믿음의 사람이 되었는데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전도하니까 시어머니가 늘 며느리를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시어머니가 이단 종교 집회에 갔다가 넘어져서 허리를 다치는 바람에 할 수 없어 며느리 집에 머물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그때부터 며느리와 딸이 함께 40일 작정기도를 시작한 것입니다.

며느리와 딸이 매일 집에서 예배를 드리니까 시어머니가 ‘도대체 교회 예배 어떻게 드리는가?’ 쳐다보다가 30일째 되는 날, 찬양을 하는데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눈물로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믿었던 종교가 이단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32년간 빠져있던 이단사설을 끊고 며느리를 따라서 우리 교회 예배에 나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신유기도시간에 제가 “허리가 아팠는데 치료 받은 사람은 손을 들라.”고 해서 자기도 모르게 손을 들었는데 그때부터 허리가 깨끗이 나았다고 간증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기도를 하되 불퇴전의 각오로 기도를 해야 됩니다.

마귀는 끝까지 인내하고 견디면서 달려드는 사람을 견디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뭐라고 말하는지 압니까? “조금만 더 견뎌보자. 조금 있다가 응답이 안 오면 낙심해서 도망칠 터이니 견뎌라.” 귀신들끼리 격려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기도로써 끝까지 믿고 나가면 마귀가 물러가고 마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의 콜로라도에서 집회를 할 때, 아르헨티나에서 오신 실바소라는 목사님이 제게 와서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그 목사님은 주의 종이 되기 전에 은행의 간부였는데 갑자기 전신이 마비되는 병에 걸린 것입니다. 의사 선생님은 “앞으로 3달밖에 못산다. 온 전신이 마비되어서 죽을 것이다.”고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그래서 온 가족이 함께 금식하면서 주님께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그런 어느 날 이분이 교회에 가서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너는 마치 일선에 있는 군인이 적의 총탄에 맞아 부상을 가진 것처럼 내 선교를 방해하려는 마귀에 의해 부상을 입은 것이다. 네가 계속 기도하면 마귀를 능히 이길 수 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고 마귀와 맞서 계속 기도하라.” 그런 하나님의 음성이 마음속에 들려 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결사적으로 매일같이 하나님께 부르짖어서 1년 동안 기도했습니다. 1년 동안을 전신마비 상태에서 주님께 부르짖어 기도했는데 어느 날 하루아침에 자고 일어났는데 보통 사람처럼 완전히 건강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언제나 알아야 될 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막는 마귀의 훼방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고 말합니다. 마귀의 훼방을 끝까지 기도로 대적하면 예수님 안에 있는 여러분이 반드시 승리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2. 4차원의 영성으로 무장하라

둘째로, 마귀를 대적해서 이기려면 4차원의 영성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4차원의 영성의 첫째는 생각입니다. 여러분은 생각을 늘 승리를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체험하려면 여러분이 기도하고 구하는 것이 여러분의 생각과 일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구하는 것은 하나님께 아뢰고 아뢰는 것이고 여러분의 생각은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그릇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아무리 구해도 그릇이 준비돼 있지 않으면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릇을 준비해야 하는데 여러분의 생각이 응답을 받는 그릇입니다. 그러므로 구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이 일치하도록 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역사를 원한다면 하나님은 승리자이시므로 여러분은 항상 승리를 생각해야 되고 하나님은 부요하신 분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늘 부요를 생각해야 되고 하나님은 생명이시므로 여러분은 끊임없이 건강을 생각해야 되고 하나님은 실패하신 적이 없기 때문에 여러분은 늘 성공을 생각해야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사용하여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다음, 꿈을 꾸고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 성도님 한분은 어린 아들이 머리에 부스럼이 났는데 그 부스럼이 점점 번져서 나중에는 진물이 나고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병원에서는 병명도 모르고 원인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모든 방법을 다 써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어머니가 욥을 치료하신 하나님이 자기 아들도 치료해 주실 것이라 믿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바라보면서 아들이 건강하게 된 모습을 바라보고 꿈꾸었던 것입니다.

그 꿈을 가지고 매주 아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했는데 어느 날 제가 예배 때 신유기도시간에 “오늘 머리에 부스럼이 나서 온갖 치료를 다 해도 낫지 않아서 고통스러워하는데 사람이 있는데 이 시간에 하나님께서 고쳐주셨습니다.” 그렇게 선포했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 옆에 앉은 아들의 얼굴을 보니까 성령의 불이 임하고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는 것을 보고 ‘아, 하나님이 치료해 주셨구나.’ 그런 믿음이 와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집에 도착해서 아들의 머리를 보니까 그 아침까지만 해도 흉측하고 진물이 났던 머리 피부가 깨끗이 나아서 아기살처럼 변해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꿈을 가지고 나아오는 사람에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환경이 절망적이어도 우리가 기도하면 성령께서 환경을 초월한 꿈을 주는 우리 마음속에 심어주시는 것입니다. 그 꿈은 영혼이 잘되고 꿈이 될 수도 있고 범사가 잘 되는 꿈이 될 수도 있으며 몸이 건강한 꿈이 될 수도 있습니다. 또 남을 살리고 세계를 복음화 하는 꿈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성령께서 꿈을 주시고 그 꿈을 품고 기도할 때 성령께서 역사하여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현재 눈의 앞에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시인하는 것은 감각이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눈에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 잡히는 것이 없어도 하나님이 내 꿈을 이루어 줄 것이라고 믿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성령님은 그러한 믿음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못한다. 안 된다. 할 수 없다.” 그런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이 변화되어서 “주님, 내가 믿습니다. 성령님,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면 성령님이 역사하셔서 여러분의 삶에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입술의 창조적 선언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하늘나라에는 우리가 원하는 것은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내가 입술로 말을 크게 하면 입술의 고백을 통해 성령님이 운행하셔서 이루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승천과 일체됨을 입술로 시인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이제는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이제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승리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럴 때마다 마귀를 대적해서 싸워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어느 날 밤, 하도 피곤해서 새벽에 깬 적이 있습니다. 얼마나 심장이 뛰고 어지럽고 구토가 나고 괴로운지 ‘아, 내가 오늘 죽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잠자리에 눕지도 못하고 일어나서 걸상에 겨우 웅크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신다는 생각이 내 맘에 떠올랐어요. 그래서 “보혜사 성령님이여, 저의 연약함을 도와주소서!”라고 제가 부르짖었습니다. 그러자 즉시 성령께서 내 마음속에 고요하고 잠잠한 음성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아, 십자가를 쳐다보아라. 전쟁은 이미 끝났다. 끝난 전쟁을 가지고 네 힘으로 싸우려고 하느냐? 이미 전쟁은 끝났다.” 그렇게 성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러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하니까, 성령께서 “들어가서 편안히 눈감고 자라.” 그래서 제가 그 길로 잠자리에 들어가서 누웠는데 마음속에 그렇게 평안하고 좋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편안하게 자고 아침에 깨어 일어나니까 온몸이 깨끗이 나아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류 역사상 최대의 격전장이요, 예수님의 부활은 영원한 승리를 우리들에게 갖다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알고 승리자로서 전리품을 취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성령님과 함께 싸우라

셋째로, 우리는 눈에 보이는 사람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공중에 진치고 있는 악의 영들과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싸움을 할 때는 우리 힘이 아니라 성령님과 함께 싸워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3차원의 존재 속에는 다스리는 자가 있습니다. 3차원이 다스리면 3차원의 일들이 일어나고 4차원이 다스리면 하나님의 일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물질세계는 3차원에 속합니다. 그런데 이 3차원의 물질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4차원에 속한 영의 세계입니다.

4차원의 세계는 어떤 세계입니까? 창세기 1장 2절을 읽으면 답이 나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고 3차원의 물질세계 위에 성령이 운행하시는데 성령은 보이지도 아니하시고 붙잡을 수도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4차원은 성령이신데 성령께서 운행하시니까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꽉 들어찬 세상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4차원의 지도자는 성령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4차원의 성령의 다스림을 받을 때, 마귀가 물러가고 하나님의 일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우리의 생각 속에 계시고 꿈속에 계시고 믿음 속에 계시고 입술의 창조적인 선언 속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생각과 꿈과 믿음과 말을 통해서 성령님과 함께 마귀를 대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매일같이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생각하고 소망 찬 꿈을 가지고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변화와 창조를 가져오는 말을 하십시오. 그러면 성령님과 함께 살게 되고 여러분은 성령님의 손을 잡고 마귀를 쫓아내고 여러분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요 4:4)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과 함께 싸우면 언제든지 마귀를 넉넉히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 성도들 병든 사람이 있으면 그 손목 자국 주님을 바라보고 병이 나은 것을 크게 입술로 선언하게 도와주시옵소서. 주님이시여, 주님께서 주님의 손등을, 손 상처를 보고 상처에 댈 뿐만으로 나은 것을 외치는 사람은 주님께서 곧장 고쳐주시옵소서.

오늘 주님의 고치시는 능력이 우리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넘쳐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성경이 영광스럽게 나타나게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여,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범사에 우리가 먹고 살고 일하는 것에 형통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시옵시고 건강하고 성령이 충만한 삶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너 흑암의 세력은 물러갈지어다! 마귀야, 물러가라! 주의 성령이 일어나시옵소서. 주의 성령이 역사하시옵소서. 그래서 우리에게 주의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을 다 쫓아내버리고 말아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15. 길르앗 야베스와 사울 왕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류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책이다. 성경 한 구절은 한 개의 구절 이상의 의미와 역사적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구절들을 넓은 시야로 혹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세하게 접근함으로써 성경 전체를 조금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순복음가족신문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기록한 성경구절의 행간을 풀어 성도들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의 선택과 다윗의 축복

"다윗이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전령들을 보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너희 주 사울에게 이처럼 은혜를 베풀어 그를 장사하였으니 야훼께 복을 받을지어다"(삼하 2:5)

세찬 바람에 곧 쓰러질 듯 몸을 숙이던 갈대는 잔잔해진 바람에 사군자 마냥 허리를 꼿꼿이 세운다. 하지만 이내 불어오는 작은 바람에 어느 방향인지 묻지도 보지도 않고 스스로 목을 떨군다. 권력 앞에 사람의 마음도 그렇게 요동친다.

사울의 죽음 이후 대세는 이미 다윗에게 기울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앞다투어 다윗의 환심을 사려고 했다. 사울의 죽음을 다윗에게 알리겠다고 한걸음에 달려왔다 죽임을 당한 아말렉 청년도 있었다(삼하 1:10~15). 그러나 사울의 처참했던 시체를 수습하고 그의 죽음을 끝까지 애도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다.

사무엘하 2장 5절은 끔찍한 죽음을 맞이한 사울의 장례를 치르고 끝까지 사울에 대한 신의를 잃지 않았던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 대한 다윗의 칭찬과 축복의 말이다. 하지만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다윗에게 괜한 오해와 미움을 살 수 있었음에도 왜 사울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사를 지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1. 끔찍했던 사울의 죽음

사울 왕의 등극은 이스라엘의 큰 전환기가 되었다.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의 뜻을 따라 나라의 대소사들을 결정하던 신권정치제(神權政治制, theocracy)에서 제정분리(祭政分離)의 원칙에 입각한 원시 군주제(君主制, monarchy)로 전환된 것이다. 사울 왕은 40년 동안 이스라엘의 초대 왕을 지냈다. 불안한 왕권을 가지고 시작했지만(삼상 10:26~27) 암몬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써 왕권을 강화해 나갔다(삼상 11:11~15).

사울은 자기의 고향인 기브아(Gibeah)를 이스라엘의 초대 수도로 정하고 모압 암몬 에돔 블레셋 아말렉 등과 같은 주변국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왕국의 면모를 갖춰나갔다. 물론, 사울 왕이 이방 민족들을 다 섬멸하고 그들을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완전히 몰아낸 것은 아니었다.

사울 왕은 그의 재임 기간 중 많은 시간을 군사력을 동원해 다윗을 제거하고자 쫓아다니는 데 허비했다. 다윗에 대한 그의 질투심은 그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었고 죽음 또한 비참했다. 많은 사람들의 생각처럼 사울의 죽음은 단순히 전쟁 중에 자살로 끝난 것은 아니다.

사무엘상 31장 9절에 "사울의 머리를 베고 그의 갑옷을 벗기고 자기들의 신당과 백성에게 알리기 위하여 그것을 블레셋 사람들의 땅 사방에 보내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전쟁에서 승리한 블레셋 사람들은 이튿날 전리품을 취하려 전장에 다시 나타났다. 그때 사울이 죽은 것을 발견하고(삼상 31:8~9) 죽은 사울의 목을 잘라 블레셋 여러 지방으로 보냈다. 사울의 머리는 조롱거리와 승전의 상징으로 블레셋 여러 지방을 떠돌다 돌아와 다곤 신전에 매달렸다(대상 10:10). 그의 갑옷은 블레셋의 다산과 전쟁의 신인 아스다롯의 집(신당)에 진열되었다(삼상 31:10). 그의 시체는 목이 없는 채로 벧산 성벽에 그의 세 아들 시신과 함께 못 박혀 걸려 있었다(삼상 31:10~12).

2. 길르앗 거민과 사울의 인연

사울과 길르앗 야베스 주민과의 관계는 사울의 재임 초기부터 시작되었다. 왕정이 시작되기 전 이스라엘 백성들은 중앙집권적인 결속력을 갖지 못했다. 여러 명의 사사에 의해 국지적으로 다스려졌고 대부분 지파의 장들이 책임을 지는 지방분권적 체제였다. 길르앗 야베스는 갈렙 자손들이 점령한 땅이었다(대상 2:50~55).

사울이 왕이 된 지 얼마 안 돼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큰 위기가 닥쳤다. 암몬 족속이 쳐들어온 것이다. 사울이 왕이 된 이후지만 아직 중앙집권적 통치가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길르앗 야베스인들은 암몬 족속의 왕인 나하스와 굴욕적인 화친을 맺고 그를 섬기고자 했다(삼상 11:1). 하지만 나하스는 화친의 조건으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의 오른쪽 눈을 다 빼는 것을 제시했다(삼상 11:2). 실제로 고대 사회에서는 단순히 협박에 그치지 않고 종종 그대로 실행되었다.

이런 암몬 족속의 위협에 길르앗 야베스인들의 선택은 궁색함 그 자체였다. 일주일의 시간 동안 이스라엘 지파들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아무도 반응하지 않으면 나하스가 원하는 대로 하겠다는 것이었다(삼상 11:3).이 소식이 사울에게 들렸다. 사울이 이 소식을 들었던 시점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마침 사울이 밭에서 소를 몰고 오다가 이르되 백성이 무슨 일로 우느냐 하니 그들이 야베스 사람의 말을 전하니라"(삼상 11:5). 이미 사무엘상 10장에서 왕으로 공포되었던(삼상 10:24) 사울이 소를 몰고 있었던 것에서도 볼 수 있듯이 왕정체제가 전혀 갖춰지지 않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사울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나아가 암몬 족속들을 전멸시켰다(삼상 11:11). 이것이 40년 전에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사울에게 입었던 은혜였다.

 

 

3. 길르앗 야베스인들의 의로운 선택

40년 후 블레셋 진영의 벧산 성벽에 사울의 시신과 그의 아들들의 시체가 걸려 있었다.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은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에게 행한 일을 듣고 모든 장수들이 일어나 밤새도록 블레셋 진영을 뚫고 들어가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시체를 수습해 가지고 왔다(삼상 31:12).

'밤새도록'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벧산은 길르앗 야베스로부터 약 20㎞ 떨어진 지역으로 밤길을 아주 빠르게 5시간 이상 걸어야만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이다. 밤을 선택한 것은 블레셋 사람들과의 물리적인 충돌을 최소화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장례 방식은 매장이었다. 율법은 극악한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만 화장(火葬, cremation)을 허용하고 있었다(레 20:14).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사울과 그의 아들들을 화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삼상 31:12) 그만큼 시체가 많이 훼손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그들의 장막 밖에서 화장을 하고 그 뼈를 가져다가 에셀 나무 아래 장사하고 7일 동안 금식하며 그들의 생명을 구해주었던 사울에 대한 예를 다했다(삼상 31:13). 아무도 관심이 없었던 사울의 죽음에 대해 변하지 않는 마음으로 사울의 죽음을 애도했던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의 의로운 선택이었다.

다윗은 이런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의 선택을 진심으로 축복했을 뿐만 아니라 훗날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유골을 사울의 가족묘가 있던 베냐민 땅 셀라에 이장함으로써 사울 왕과 그의 아들들의 장례를 완성했다(삼하 21:12~14).


이상윤 목사(순복음홍콩신학교 학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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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인과, 창녀와의 만남,

태어 날 때 부터 선천성 뇌성마비로 30여 년을 길에서 구걸하며 살아온 걸인 총각은,

이제 삼십 중반이 되었다. 찌지리도 가난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그는, 애초부터 부모를 잘못 만났다.
태어난지 몇년이 지나도 걷지를 못하자, 도저히 부양할 능력이 없는 부모는, 걷지도 못하는 그 어린 것을

서울 어느 고삿길에 내다 버렸다.
신약성경에 태어 날 때부터 걷지 못하는 바디메오 처럼, 태생적으로 걷기 조차 힘든 몸을 힘겹게 이끌고,

세상거리에 내 동댕이 쳐져, 그 몸으로 생명을 이어 와, 성년이 된 선천성 뇌성마비 청년은,

남의 말을 정확히 듣고 판단하기는 해도, 그것을 남에게 전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구걸 이외에는 어떤 다른 일을 할 수가 없었다.
행인들이 많이 다니는 번화가 길목에 진 종일 주저 앉자, 하루동안 구걸한 돈이 4~5만 원은 되지만,

그 돈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간혹 음식점 안으로 들어서기라도 하면, 곧 바로 문전박대를 당하기 일수였다.
구걸하는 동냥치가 아니라,
당당한 손님으로 돈을 내고 먹겠다 해도 모든 식당들은 그에게 음식을 팔지 않았다.
그 이유는, 기후와는 관계없이 선천적으로 온 몸이 덜덜 떨리고 뒤틀려서,
수저를 손에 쥐면, 손이 떨려 음식을 먹어도, 입에 들어가는 것보다 흘리는 밥이 더 많아, 식탁 주위를

아주 지저분하게 만들어, 손님들에게 혐오감을 주기 때문이었다.
이토록 문전박대를 당해 서럽고 배고픈 세월을 보내야했던 그는, 그래도 주일이면, 교회앞에서 두손 벌려 구걸하다가,

예배시간이 되면, 교회 뒷자리에 앉아서 주님을 향하여 간절히 기도하였다. 앉은뱅이 바디메오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신, 예수님의 기적을 간절히 바라면서,
그는 성경 한 권을 다 외웠다.
계속해서 읽다보니 저저로 외워진거란다.
30년 세월동안, 자기가 다닌 교회 주변을 떠나본 적이 없을만큼 신실한 신앙인이 되었다.

하지만 성경 신구약을 전부 암송할 만큼, 그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몸은 여상히 그의 상전이었다.
식당에서 문전박대를 당하는데, 교회 식당 이라고 뉘라서 밥 떠 먹여줄이 있을까?
교회에서도 짐덩이 이고 애물단지일 뿐,
그를 진정 형제애로 대해주는 이는 없었다.
진정성이 결여된 피상적인 친절로는, 사랑에 주린 상한 심령을 쌔매주진 못한다.
몸은 지체부자유자여도 몸과 맘은 젊기에, 허리의 갈비뼈가 시려질 때면, 자기를 온몸으로

이해해줄 이가 그리워졌다.
사춘기가 삼십이 지나서야 찾아 온 거다.
허나 몸과 맘이 본능적으로 이성을 갈망한들, 그것은 한낮 헛된 망상에 불과 할 뿐이었다.
자신을 향해 문을 꼭꼭 닫은 이 땅에서,
그가 동냥을 나섰다가 우연히 찾아 든 곳이, 엉뚱하게도 서울의 유명한 588 창녀촌이었다.
그곳은 돈만 내면, 누구든지 문전박대를 하지 않는 신기한 곳이었다.
어느 날, 그는 이렇게 창녀촌에 들어가서,
매춘녀가 시키는대로 비싼 음식을 주문 했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주문 한 가지를 더 첨가했다. 먹여 달라고…,
그랬더니 기적이 일어 났다.
그 창녀가 음식상을 차려 들고 쪽방으로 들어와서, 세상이 내팽개쳐버린 뇌성마비 거지 청년에게,

음식을 떠서 먹여주기 시작했다.
걸인은 평생 처음 받아보는 인간다운 대접에 감격하여 눈물을 줄줄 흘렸다.
사람들은, 588 이 창녀촌을 가장 더러운곳으로 알지만, 지체부자인 거지 청년에겐, 가장 아름다운

천상의 세계로 보였다.
그리고 밥값을 주겠다고해도 나를 내 쫒은 식당과 달리, 나를 내 쫒지 않고 맞아 준
저 여인이야 말로, 진정한 천사로 보였다.
드디어 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다…당신이 바…바로 이땅에서 첨으로 날. 인간으로 대해준 처…천사야.”
창녀는 깜짝 놀랐다.
뭇 남성들의 천대와 사회의 냉대만을 받아 오던 창녀인 자신을 향하여,
“당신이야 말로 천사”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태어나 이때 껏 처음 듣는 이 감격스런 말에, 창녀는 가슴이 뭉클하였다.
그 감격이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눈물을 흘리며 창녀는 거지 청년에게 말했다.
“창녀를 천사라고 말하는
당신이야말로 천사입니다…”
이렇게 둘은 서로를 고백하였다.
“나의 천사…”
드디어 두 사람은, 목사님께 둘이 부부의 인연을 맺게된 사연을 말씀드렸더니, 목사님은 흔쾌히 주례를

서 주시고, 이 사연을 들은 교회성도들의 진정어린
축복속에서, 교회에서 성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그들을 아끼는 이들의 성원으로, 교회앞에 조그마한 구멍가게를 열어,
지금 그곳에서 내외가 장사를 하고 있다.
이제 청년은 항상 문전박대속에, 비럭질하는 걸인이 아닌 떳떳한 한 가정의 가장이 되고,

게다가 매일 밥을 먹여주는 아내가 있기에. 그는 이 세상은 에덴동산 이라고 찬양한다.
창녀였던 아내도, 이제는 갖은 수모를 당하지 않고도 살수 있고,
남성들을 저주하지 않고,
진심으로 한 남성을 사랑할 수 있어서, 매일 매일을
“축복으로 살아간다.” 고 기뻐했다.
그들을 이토록 새롭게 한 것은 누구일까?
걸인을 구한 것은 사회복지 정책도 아니고, 자선도 아니고, 물론 교회도 아니었다.
그건 바로 '창녀'였다.
창녀를 구한 것은 윤락 방지법도 아니고,
목사도 아니고, 인생 상담자도 아니었다.
그건 바로 '걸인'이었다.
누가 '창녀'고 누가 '걸인'인가?
성경은 하나님보다 세상이 주는 것들을 더 사랑하는 것을 '창녀'라고 한다.
우리는 흔히 사람에게 빌어먹고 사는 것만 걸인으로 아는데, 우리가 어렸을때 엄마 젖을 빨고 자랐고,

자연을 통하여 하나님이 거저 주는 것을 얻어 먹고 사는 것에 대해서는 말이없다,
거저주시는 하나님을 외면하고,
내가 수고해서 먹고 사는 걸로 아는 우리는 과연 누구에 의해 생명을 부여 받았는가?
당신은 자신의 몸을 자기 것으로 아는가?
참으로 어리석구나!
과연 당신의 몸에 대해 어느만큼 알고 있는가?
인생이란 서로 돕고 살면 그게 바로 천국이고, 그 반대이면 지옥인 것이다.
상생(相生)이란 바로 이를 이름이다.
오늘이란 하루는 내 인생의 축소판이다.
이 땅에서 오늘은 내 남은 삶의 첫날이기도 하다.
그래서 오늘 보다 더 소중한 날은 없다.
주어진 오늘을 어떻게 살 것인가는,
오로지 우리의 몫이다.

옮겨 보낸이 報恩 김병기

에스라
하나님 앞에 바로서기

구약 에스라서는 바벨론 포로 이후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연합하여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고 와해된 신앙 공동체를 회복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에스라서는 무엇보다 신앙 공동체가 위기에 처했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에스라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 부분(스 1:1∼6:22)은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을 재건한 사건이다. 두 번째 부분(스 7:1∼10:44)은 에스라의 귀환에 의한 신앙 공동체의 개혁을 다룬다. 에스라서에는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신앙으로 이겨낸 이스라엘 귀환 공동체의 승리의 역사가 담겨 있다.


하나님의 감동과 은혜로 재건된 성전(1∼6장)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기 위해 바사의 초대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내라는 조서를 공포하게 하셨다(스 1:1). 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마음에 감동을 받고 예루살렘에 야훼의 성전을 재건하기 위해 함께 일어났고(스 1:5),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던 금과 은과 각종 물품들을 기쁨으로 내어 놓았다(스 1:6). 뿐만 아니라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빼앗아 갔던 야훼 성전의 그릇들도 환수 조치되었다(스 1:7∼8). 세계 역사에 아무런 보상도 없이 포로들을 고국으로 돌려보내고 빼앗은 전리품을 무상으로 되돌려주었던 경우가 있었을까?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바로 하나님이셨다. 고레스 그리고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 모두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자들이었다. 에스라서는 하나님의 감동만이 어둡고 절망적인 상황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성전 재건의 시작은 예배의 회복에서 시작되었다(스 3:2∼6). 그리고 예배의 회복은 성전 재건에 박차를 가하는 계기가 되었다(스 3:7). 성전의 기초가 놓일 때 옛 솔로몬 성전을 회상한 노인들은 대성통곡했지만 많은 백성들은 음악에 맞춰 찬송을 드리고 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질렀다(스 3:10∼13). 그러나 이스라엘의 예배가 회복되고 성전이 재건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자들이 있었다(스 4:1∼6). 이들의 갖은 훼방으로 인해 성전 재건은 다리오 왕 2년까지 중단되었다(스 4:7∼24).

장기간 중단되었던 성전 건축은 학개와 스가랴 두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감동의 말씀으로 재개되었다(스 5:1∼2). 야훼 성전의 재건을 정치적으로 받아들인 자들은 바사 왕 다리오에게 성전 건축이 정말로 허락되었는지 물었다(스 5:3∼17). 이에 다리오는 문서 창고에서 왕의 조서를 찾아보게 하였다(스 6:1). 그런데 문서 창고에는 두 개의 조서가 있었다. 하나는 건축을 허락하는 고레스 왕의 ‘허락 조서’(스 6:3)였고 다른 하나는 건축을 중단시킨 아닥사스다 왕의 ‘금지 조서’(스 4:21)였다. 그런데 이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였다. 왜냐하면 관리들이 발견한 조서는 금지 조서가 아닌 허락 조서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다리오 왕은 유다 사람들의 성전 공사를 막지 말 것이며, 왕의 재산과 세금으로 성전 재건을 도우라는 조서를 내렸다(스 6:6∼12). 성전의 재건을 막기 위해 온갖 방법이 동원되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역전의 기회로 바꿔 놓으셨고 성전 재건은 완성되었다(스 6:15).


기도와 금식을 통한 삶의 개혁(7∼10장)

야훼 성전이 재건되자 하나님은 학자 에스라의 지도하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다시 한 번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인도하셨다(스 7:1∼9). 이 때 에스라는 야훼의 율법을 연구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율례와 규례를 가르치기로 결심한다(스 7:10). 에스라 7∼10장은 예배와 성전을 회복한 이스라엘 공동체가 어떻게 삶의 방식들을 개혁했는지 보여준다. 이 당시 이스라엘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이방 민족들과의 혼합 결혼과 이로 인한 종교의 혼합화였다(스 9:1∼15; 10:2). 이 때 에스라가 취한 방법은 기도와 금식이었다. 그는 금식을 선포하고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기도하였다(스 8:21). 에스라가 이처럼 기도와 금식으로 하나님께 간구하자 백성들 사이에서 큰 회개의 운동이 일어났다. 에스라의 가르침에 백성들은 통곡하며 회개하기 시작하였다(스 10:1∼3). 에스라에게 있어서 최우선 개혁 대상은 종교의 혼합을 조장하는 이방인과의 결혼이었다(스 10:11). 왜냐하면 아무리 성전이 재건되었다 하더라도 신앙이 온전하지 못하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에스라서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을 재건한 것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몸부림치며 삶을 변화시킨 과정들이 잘 나타나 있다. 이것은 신앙 공동체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 위해 필요한 일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먼저 하나님의 은혜에 감동하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것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신실하게 살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교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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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13. 고스비 사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류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책이다. 성경 한 구절은 한 개의 구절 이상의 의미와 역사적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구절들을 넓은 시야로 혹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세하게 접근함으로써 성경 전체를 조금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순복음가족신문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기록한 성경구절의 행간을 풀어 성도들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영적·육체적으로 타락한 이스라엘을 심판하신 하나님

"이는 그들이 속임수로 너희를 대적하되 브올의 일과 미디안 지휘관의 딸 곧 브올의 일로 염병이 일어난 날에 죽임을 당한 그들의 자매 고스비의 사건으로 너희를 유혹하였음이니라"(민 25:18)

요단강을 지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온 이스라엘 백성은 여리고성을 만나게 되었다. 현재도 발굴 중인 여리고성은 그 규모와 구조에서 철옹성(鐵甕城)이라고 할만하다. 광야를 떠돌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여리고성은 인간적으로 볼 때 좌절 그 자체였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여리고성에 무혈입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전쟁사의 첫 패배는 난공불락의 여리고성이 아니라 그들이 보기에도 만만해 보였던 아이성 전투에서 일어났다(수 7:2~7).

여리고성을 빼앗았던 환희와 기쁨은 오래 가지 못하고 큰 슬픔으로 바뀌었다. 아이성의 패배는 하나님께서 명령한 언약을 지키지 않았던 유다지파 갈미의 아들 아간 때문에 일어났다(수 7:1).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 민족 전체가 위험에 빠진 사건은 광야 생활 중에도 여러 번 발생했다. 그중에 한 사건이 고스비 사건이다(민 25:18).


1. 고스비 사건의 배경

고스비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이 싯딤에 이르렀을 때 일어났다. 싯딤은 '아카시아 언덕'이라는 뜻으로 요단강에서 동편으로 11㎞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족장시대에는 엘람 왕 그돌라오멜의 연합군이 소돔과 고모라 지역의 다섯 왕을 무찌르고 재물을 약탈했던 곳이다. 이 때 아브라함의 조카 롯을 포로로 잡아갔던 곳이기도 하다(창 14:8~12).

가나안의 문턱이었기에 모세가 마지막 설교를 한 곳이기도 하며 여호수아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고 공식적으로 선언한 곳이기도 하다(민 27:12~22). 지리적으로 가나안 땅과 매우 근접해 있었기에 가나안의 종교와 문화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던 곳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입성을 눈앞에 두자 이것을 막기 위해 모압 왕 발락은 발람을 통해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했다. 이 계획은 무산됐지만 영적 타락으로 인한 이스라엘의 자멸은 뜻하지 않은 곳에서 일어났다. 그 사건이 고스비 사건이다.


2. 고스비 사건과 이스라엘의 영적인 자멸

민수기 25장 1절은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또다시 가데스바네아의 실수를 범하고 있었다. 가나안 땅을 지척에 두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을 미루고 있었던 것이다. 40여 년 전에 했던 일들을 똑같이 반복하고 있었다. 정탐꾼을 보내기도 했고 이것저것 재보고 미루며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싯딤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압의 여인들과 음행하기 시작했다. '음행하다'의 히브리어 '리즈노트'는 '창기같이 행동하다'(신 22:21), '다른 남자와 간통하다'(창 38:24) 등으로 쓰였지만 단순히 육체적인 간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을 떠나 우상숭배를 하고 세속에 물들어가는 영적인 간음을 내포한다.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은 모압 여자들과의 음행에서 멈추지 않았다. 모압 외에도 미디안 족속과의 음행으로 이어졌다. 민수기 25장 1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고스비 사건의 고스비는 모압 족속이 아닌 미디안 족속의 여자였다(민 25:15).

 

3. 바알브올의 집단적 타락과 영적 각성

민수기 25장 3절은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가담한지라 야훼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바알브올은 '바알을 섬기는 브올'이라는 뜻이다. 그 당시 모압 족속과 미디안 족속 모두 바알을 섬기고 있었다. 바알 신당에는 여러 개의 방이 있었고 이곳에서 바알을 숭배하는 제의 중의 하나로 신전에서 일하는 여인들과 음행이 이루어졌다.

민수기 25장 3절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전체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바알브올에서 음행을 행했던 사람이 소수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연해 있었음을 말해 준다. '가담했다'로 번역된 '차마드'는 재귀형(Niphal)으로 쓰여 '자기 스스로 묶다' '스스로를 연결하다'(KJV, joined himself)란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싯딤에 거하면서 스스로 바알브올로 찾아가 음란에 빠지고 바알을 섬겼다는 의미이다.

이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백성의 수령들을 잡아 태양을 향하여 하나님 앞에서 목매어 달라고 명령하신다(민 25:4). 이스라엘 백성의 수장들도 바알브올에서 행했던 음란과 우상숭배에 적극적으로 연루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민수기 25장 15절은 고스비에 대해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죽임을 당한 미디안 여인의 이름은 고스비이니 수르의 딸이라 수르는 미디안 백성의 한 조상의 가문의 수령이었더라." 고스비는 바알성전에서 음란을 행하던 여인이 아니었다. 미디안 가문 중의 수령의 딸이었다. 바알브올의 음행이 미디안 귀족들에게도 만연해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지파의 장들은 미디안의 귀족들과 어울려 음란과 우상숭배를 일삼고 있었다. 이런 바알브올의 우상숭배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은 염병으로 2만 4000명이 죽는 고통 가운데 있었다(민 25:9).

그런데 어느 날 시므온 지파의 수장이었던 시므리(민 25:14)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보는 앞에서 고스비를 이스라엘 회중으로 데리고 들어왔다(민 25:6).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손에 창을 들고 시므리의 막사로 들어가 한 번에 시므리와 고스비의 배를 꿰뚫어 죽였다(민 25:7~8). 이 사건 이후 이스라엘 백성에게 돌고 있던 염병이 그쳤다(민 25:8). 이 일로 미디안 족속과 이스라엘은 화합할 수 없는 숙적 관계가 되었다.

가나안 입성 후 미디안 족속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확할 때가 되면 아말렉 족속과 연합해 모든 곡식을 약탈해 갔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디안 사람들을 피해 동굴로 피신해야만 했다. 이런 약탈이 7년 동안 이어졌으며(삿 6:1) 미디안 족속으로 인한 궁핍함이 극에 달했다(삿 6:7). 하지만 미디안의 압제는 기드온과 300용사의 승리로 일단락됐으며 더 이상 이스라엘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이상윤 목사(순복음홍콩신학교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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