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란 ''그리스도교(기독교)의 역사''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 공동체의 역사라는 점에서 ''교회의 역사''라고도 말한다. 긴 역사를 효과적으로 다루기 위해서 교회사를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시대로 구분한다. 고대(초대)교회사, 중세교회사, 근대교회사. 여기에 종교개혁을 특별한 주제로 구별하여 종교개혁사를 포함시킬 수 있다(2018년 10월 14일자 ''평신도를 위한 신학 강좌''를 참조). 각 시대마다 유구한 기독교 신앙의 가치를 깨닫게 해주는 주제들로 충만하다. 교회사 산책을 통해 각 시대마다 펼쳐지는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향해 출발해보자. <편집자 주>
불합리한 종교적 미신 이교도의 도전 극복한 교회
로마제국 내에는 그리스도교 신앙 전파를 쉽게 만든 요인들과 함께 그리스도교 신앙이 반드시 극복해야 할 도전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특별히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러한 도전에 응전하면서 당시 어느 종교도 이루지 못한 눈부신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이번 글에서는 로마제국 내 그리스도교 신앙 전파에 도움이 된 요인들은 무엇이었으며 그리스도교 신앙이 극복해야 할 도전은 어떠한 것이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1. 교통망의 발달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은 로마제국 당시 사통팔달되어 있던 육상로의 모습을 반영하는 말이다. 오늘날 이탈리아의 철도망은 로마제국 시대의 도로망 연결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을 정도이다. 심지어 현재 이탈리아의 국도들 가운데 많은 도로가 로마제국 당시 붙여진 이름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아우렐리아누스 황제 통치하에 건설된 로마에서 제노바까지의 1번 국도는 여전히 ''아우렐리아 가도''라고 불리고 있다).
도로를 이용한 이동 및 운반 수단은 마차였다. 다만 마차는 하루에 60㎞ 이상을 갈 수 없었기에(예외: 황제의 마차는 하루에 150㎞를 갈수 있었다) 사람들은 잘 발달된 해상로를 통한 이동 수단을 더욱 선호하였다(우리는 사도 바울이 ''276명의 승객을 운반하는'' 여객선을 탔음을 잘 알고 있다 ; 행 27:37).
당시 항해는 주로 지중해 연안에서 이루어졌지만 7월과 2월 사이에는 계절풍을 이용, 홍해를 거쳐 인도까지 왕래할 수 있었다. 이러한 로마제국 내 교통망의 발달은 활발한 서신 왕래도 가능케 했다.
2. 공용어 사용
거대한 로마제국 안에는 자신들만의 고유한 언어를 가진 다양한 민족들이 있었다(아람어 시리아어 켈트어 베르베르어 등). 하지만 그들은 그리스어(헬라어)와 라틴어를 공용어로 사용했다. 특별히 그리스어는 주로 제국의 동방 지역에서 공용어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당시 그리스어를 가리켜 ''코이네''(평범한)라고 불렀다. ''평범한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라는 의미였다. 그리스어는 문학과 철학 그리고 상인들이 사용하는 가장 친숙한 언어였다는 점에서 오늘날 영어에 비교할 수 있다.
구약성경은 그리스어로 번역되어 읽혔고(칠십인 역), 신약성경은 물론 많은 그리스도교 작품들이 그리스어로 쓰였다. 반면 로마제국의 서방 지역에서 주로 사용되던 언어인 라틴어는 그리스어에 비해 널리 사용되는 언어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제국에 반포되는 법령이나 규율 등은 라틴어로 작성되었다.
3. 황제숭배
알렉산더 대왕(주전 323년)이 정복했던 드넓은 지중해 인근 영토는 그의 후계자들(디아도코이)이 나누어 통치했다. 그들은 통치 강화를 위해 ''황제숭배''를 강조했다.
후에 이 지역이 로마제국에 의해 복속되면서 ''황제숭배''는 로마제국의 황제들과 연결되었다. 사람들은 황제를 ''신께서 보낸 구원자''로 칭송했으며 황제의 탄생을 ''기쁜 소식''(복음)이라고 불렀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로마의 평화''(팍스 로마나)를 이룩한 ''황제''를 숭배하는 것이야말로 제국의 일치를 위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로마제국 시민들의 열광 속에서 황제숭배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 만큼은 황제숭배의 위험성을 깨닫고 있었다. 그들은 구세주로서의 황제를 반대하여 ''참된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외치기 시작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황제의 상''에 어울리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이었다.
4. 신비종교
황제숭배가 성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종교적 욕구는 채워지지 않았다. 이러한 욕구를 채우기 위해 제국 내 많은 사람이 신비종교(밀교)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들은 신에게 제사하기 위해 목욕재계하고 거룩한 식사를 하며 몰아지경에 빠지는 광란적인 의식을 일삼으면서도 육체의 윤리적인 의무는 강조하지 않았다. 그들이 갈망하는 구원은 육체적인 구원이 아닌 영혼의 구원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신비종교 참여를 통한 구원에 대한 갈망은 황제숭배와 마찬가지로 당시 제국 내 그리스도교 신앙이 맞닥뜨린 중대한 도전이었다. 이러한 도전에 맞서 비이성적인 신비주의를 배격하고 진정한 구원의 신비를 가르치며 더 나아가서 윤리적인 정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그리스도교 신앙은 많은 사람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5. 우상숭배
로마제국 내 가정에서 우상숭배는 일상적이었다. 부엌 찬장을 수호하는 신(페나테스), 뜰과 거실을 지켜 주는 신(라라), 불을 지켜주는 신(베스타) 등이 있었으며 그 외에도 일상생활 계절 출생 혼인 죽음 여행 등을 관장하는 수호신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 앞에서 기도하고 제물을 바쳤는데 이러한 가정 제신들을 섬기는 곳을 가리켜 라라리아(Lararia)라고 불렀다.
값비싼 신상들은 은이나 금으로 만들어졌다. 어린이들은 제물에 바치는 과자를 먹으며 수호신 앞에서 기도하는 어머니를 보며 자랐다. 그들은 수호신 앞에서 기도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확신했으며 가축의 피를 수호신들에게 뿌리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고위직, 군인, 교사, 수공업 등은 우상숭배와 깊이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이 직업들을 기피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우상숭배가 얼마나 불합리한 종교적 미신인지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노력했다. "헝겊으로 장식하거나 기름을 바른 나무나 돌로 만든 형상들이 어떻게 복을 주고 건강을 줄 수 있겠는가!" 목청을 높이면서 차라리 칠장이나 건축공이 되라고 권면했다(터툴리아누스).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러하듯이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신화를 비웃으며 우상을 하찮게 여기는 용감하고도 이성적인 사람들이었다.
김형건 목사(CAM대학선교부장)